주일설교

영광의 바탕

아빠와 함께 2021. 5. 17. 07:13

영광의 바탕

2021년 5월 16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3-4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서 세상에서는 도무지 예상 못할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시작은 지상에서의 치욕스러운 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 계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나’라는 것은 아예 없고 오직 그 바탕에 ‘죄’가 들어 앉아 있음을 밝혀줍니다.

즉 죄와 계명은 살아나고 소위 있다고 우기는 ‘나’를 소멸시켜 버립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본인이 본인을 관찰해서 아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되면 관찰 되는 대상이 자신의 육신이 되고 관찰하는 자는 ‘본인’이 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관찰하는 자’라는 ‘나’이다는 것은 누가 보고 있기에 알게 된 사실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인간의 관찰은 한계에 부딪칩니다.

자신의 육신을 조사해서 ‘자아self’을 발견하고자 하지만 그 육신을 관찰하는 자아를 관찰하는 자아는 인간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근본은 자아로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따라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죄가 바탕되었음을 말해주십니다.

그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삽비라 부부 이야기입니다. 둘 다 한날에 죽은 부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헌금할 마음을 가지고 땅을 팔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헌금바치고 난 뒤에 죽고 맙니다. 죄로 인해 죽은 겁니다. 이들은 살인하거나 간음하거나 도적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죽었을까요?

그들은 들켰기 때문에 죽은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거꾸로 돌려보면 이와 같습니다. ⑴애초부터 이들은 죽었어야 하는 죄인이다. ⑵ 그들은 들킬 필요가 없다고 자부한 그들의 자아가 들켜서 죽었다. ⑶ 그들은 헌금 행위를 통해서 성령을 속인 자가 된다. 즉 그들은 자신의 자아를 시작점으로 여기고 세상을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들을 죽여버리므로서 애초부터 그들은 죽어 마땅한 자로서 헌금행위를 한 자로 판정납니다. 즉 그들은 기존의 자아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 겁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 겁니다. 자신의 자아가 뭔가 나쁘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자아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가치나 의미와 영광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이런 사람에 비해서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이런 태도를 보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3-5)

이 본문에서 마리아는 그동안 축적된 자신의 영광성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에게 다 드립니다. 이 모습을 두고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마리아는 나의 죽음에 합당한 장례 준비를 미리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홀로 죽으시고 홀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의 탄생을 고려해서 죽으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자아나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자아는 지탱하면서 자기를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없어지는 것을 겁냅니다. 자신의 가치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새로운 바탕되시는 분을 압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나옵니다. 거기서 어떤 죄많은 여인은 주변의 조롱에도 불과하고 그동안 모아놓은 향수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애 붓고 울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깁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반응을 보이십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6-47)

이 죄많은 여인은 자신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그냥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에게 일임한 겁니다. 불신자란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꿀만한 영광을 발견하지 못한 자입니다. 국소적아고 개별적 자아를 여전히 붙들고 사는 자들이 불신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자는 ‘보편적 자아’입니다.

‘보편적 자아’는 자기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따로 그 어떤 시간이든 공간이든 구애받지 않고 사는 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의 출생은 의도적으로 혈육적인 계열과 관련없음을 보이는 출생입니다.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눅 1:7, 24)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오로지 예수님의 약속과 관련된 인물입니다. 주님에 의해 새롭게 인물상으로 나타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장성하여 활동할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눅 11:8-9)

우리 성도는 독생자의 모멸스러운 영광의 자리에 함께 있어야 될 자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주어진 것이 영광의 자리position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자신의 죄를 감추는 세상입니다. 자신의 본질이 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들키려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자아가 빠진 자들만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와 미워하는 자로 구분하는 선택 행위를 즐거워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걱정말고 부활하심이 곧 함께 계신 주님의 일관된 조치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8강-골 3장 3-4절(영광의 바탕)21051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3-4절입니다.

골로새서 3:3-4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는 그냥 죽었는데 그냥 살았습니다. 이걸로 우리가 성도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은 겁니다. 살아서 안 죽는다는 거지요. 죽었는데, 죽은 게 맞는데 살아난다는 것, 그러면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뭘 더 원합니까? 죽으라고 밟았는데 이게 안 죽고 살아나네요. 세상에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없어요.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다시 살 수 없기 때문에 발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자신의 미래로서 인정이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러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흔히 말하기를 다음 정권은 올바른 정권, 바른 정권, 참된 민주주의가 어쩌고 하시는데 나라가 바른 정권 올바른 나라가 되는 것을 바라지 마세요.

왜냐하면 좋은 나라가 되어버리면 부활의 기쁨은 없고 자꾸 이 세상에 더 기대를 걸고 이 세상에서 더 살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이 괜찮은 세상에서 더 낙을 한번 볼까? 그게 어떻게 부활의 기쁨과 족히 비교가 됩니까?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 아니에요. 죽는 게 무서워서 발악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고 복음에 대해서 많이 들었는데 막상 세상에 나가서 복음이 안 나오는 이유가 뭘까요? 딱 하나 복음이 안 나와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안 다치고 싶은 겁니다. 자기 손해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부활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부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이 별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려요. 내가 구상하고 내가 예상하고 내가 예측한 그러한 계획이라면 그냥 우리의 욕망이고 이것은 뭐 한번 내질러 보는 하나의 기대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이것은 친히 주님께서 벌이신 일이에요.

“내 너 살려낼 게. 너 좋으라고 살려내는 것이 아니야.” 주님이 하시는 일의 과정 속에서 부활이라는 코스가 있어요. 부활이라는 게 있고 새 생명 주는 게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했고 그걸 또 우리가 알아먹네요. 죽어도 사는구나. 그러면 게임 오버, 끝났지요.

그동안 일평생 사는 것이 힘들었던 이유가 죽을까 싶어서 힘들었잖아요. 망할까 싶어서. 찌질이 인생, 집안 망할까, 집안에 ‘잘 풀리는 집’ 화장지 이만큼 쌓아놔도 일이 풀리지 않아요. 되는 일이 없어요. 끝까지 일이 안 풀려.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죽을 때 죽는 척하지 말고 확실히 죽어라, 그 말이에요, 확실히.

“확실히 살려줄 때니까 확실히 죽어. 죽는 척하지 말고, 복음 아는 척하지 말고.” 나 자신을 어떻게 계획하고 나 자신을 어떻게 이끌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연속적인 계획에 우리의 모든 것을 그냥 맡기세요. 시건도 없는 우리가 뭘 안다고 내 인생 붙들지 마시고 내 인생을 그냥 놔줘요. 주님에게 인수인계 하는 겁니다.

쥐어 봐야 별 볼일도 없는 것 그 자기 인생 왜 쥐고 있습니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죽어도 너 산다.” 너는 필히 죽어야 되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 너는 필히 살아야 될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 인생에 대해서 네가 걱정할 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나라 꼬라지가 어떻게 되든 북한의 김정은이가 쳐들어오든 그거 신경 쓸……, 쳐들어오면 죽으면 되잖아요.

코로나가 범람하든 말든 어떤 백신을 맞아야 더 사느냐, 아, 그런 걱정을 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나 안 다치는 방향으로 인생을 계획하지 마세요. 그러면 무슨 기쁨이 없느냐 하면, 부활의 기쁨이 상실되어 버립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생을 직사하게 했거든요. 직사하게 고생한 이유가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합니다. 21절에 보면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철학이 아니에요. 괴상한 논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어도 산다. 그게 주님의 일관된 계획이다. 이게 실제상황이라고 이야기했다고 재판받은 거예요. 사도바울은 자기 몸 다치든 매를 맞든 부활의 기쁨에 비하면 이건 아주 소소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누굴 만나든 복음 전할 기회가 있거든요, 남이 나를 공격한다, 그렇게 핑계 대지 마시고 우리 자신이 아직도 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지, 나를 안 다치게 하려고 자기 단도리하고 먼저 자기부터 챙기는지 그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게 없다면 사도바울처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그걸 전하는 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그게 아무나 전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주님이 알아서 하지 왜 우리 보고 맡기느냐?’ 하겠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알아서 자살하시고 알아서 부활해서 나를 믿으라 부활 된다,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을 자기 세계로 끌고 가시는가? 그냥 지식으로 “죽었다가 살면 된다. 그러면 나는 된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주의 일 따로고 자기 생각 따로 되어버려요. 그것은 지식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영생을 어디에서 끄집어내는가를 몰라서 그래요. 영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지식으로 들었지 믿어라,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예수님이 자기 부활의 생명을 얻는 그 현장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 들여야 돼요. 끌어당긴 거예요. 자기 안에.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난다. 주님의 영광과 함께 우리의 영광도 같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겁니다. 우리의 생명 나타날 때 영광과 더불어 나타난다 그 말이지요. 잠재적 영광이 노골화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복음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면서도 부활이 주는 기쁨, 그걸 너무나 많은 사람이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부활이 주는 기쁨, 다시 말해서 나는 당연히 죽어야 된다는 그것조차도 기쁨에 포함이 되어야 돼요.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병으로 죽든, 교통사고로 죽든, 강도한테 맞아 죽든, 굶어 죽든, 어떤 식으로 죽는다는 것도 나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고 복이고 죽는 이것도 기쁨이다. 이렇게 참여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이 부활의 기쁨이 확 살아나는 겁니다.

나 죽어서 결국 부활 될 것 살아서 호강이나 하자. 이런 식으로 또 다른 기쁨을 따로 챙기면 이것은 부활의 기쁨이 아니고 그냥 지식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먼저 이걸 생각해야 돼요. 주님께서 이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로 규정하는 작업이 먼저다. 규정을 어떻게 하느냐?주님께서는 우리 자아를 우리 자신을 율법으로 찾아와서 죽여버립니다.

율법으로 죽이는 이유가 계명이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 안 오면 내가 살아나잖아요.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살아 있으면 이것은 내 배후에 마귀도 나하고 같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되고 살아 있더라도 내 안에서 주님의 율법과 계명이 살아나야 됩니다.

그래서 나를 죽이고 내 안에 율법과 계명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진짜 나는 없고 그 안에 뭐가 있는가? 그 안에 죄가 있는 거예요. 로마서 7장 10절에 보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9절에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나를 더 바닥의 모습으로 내려가게 만들어요. 내가 멀쩡하게 생각한 그것은 오해였고 내가 멀쩡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죄가 멀쩡한 거예요.

죄가 나의 이름으로 설쳐댔던 겁니다. 나는 없고 내 안에 죄가 나라는 이름으로 까불어댔던 거예요. 그래서 나면서도 나에 대해서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이 오니까 나는 없고 죄가 나라는 이름으로 행세깨나 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명을 통해서 우리를 내가 없는 다른 것, 내 안에서 진짜 내 본질을 들추어내는 일을 했습니다.

“네가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죄가 살아온 거야. 네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네 생일날 죄가 태어난 거야.” 죄가 덩치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계명이 와야 그게 되는 거예요. 계명이 와야. 그러면 죄가 우리의 본 모습이라면 죄가 부활 되고 죄가 생명을 받는 일은 애초에 없어야 되는 거지요.

그동안 성경을 백 독 천 독 하면서 내가 안 죽고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예수님 이용해서 어떻게 부활을 얻고 천당을 가고 새 생명을 얻느냐? 자꾸 나부터 start point로, 시작점을 잡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와서 하나님 예수님 이용할 생각만 했으니 지식으로만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러면 생명을 얻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그러면 부활을 얻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우리가 물을 수가 있거든요. 왜냐하면 나는 없고 죄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함께’라고 할 때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는 누구, 누구지요?” 함께 영광 받는다고 했으니 그 함께 하는 자가 누구냐는 거지요.

그 ‘함께’가 국수적 존재가 아니고 보편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국소적이라 하는 것은 특정 장소에 있는 각자 자아들인데 그게 아니라 보편적 자아, 모든 자아를 새롭게 만들어낸 주님의 생명이 실린, 영광이 실린 새로운 자아가 여기서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탄생을 할 때는 전에는 죄가 내 행세를 했다면 여기서는 예수님의 의가 나를 대신하는 행세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 바닥에 나라는 껍데기를 제켜버리면, 벗겨버리면 그 안에 죄가 들어 있잖아요. 그 죄가 있던 그것부터 시작된 그게 나라면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시작된 새로운 나가 되기에 예수님의 영광과 부활도 같이 공유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걸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뿌리까지 보지 아니하면요, 이렇게 돼요. “하나님, 내가 교회 나왔습니다. 하늘나라 좋은 소식 없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부활 된다고요? 내가 믿을게요. 안녕히 계십시오” 여전히 자기가 죄 인줄 모르고 나 인줄로 알고 있어요.

죄가 의가 되는 법은 없어요. 마귀가 영생 얻는 법은 없어요. 마귀가 천국 가서는 안됩니다. 죄는 죄와 더불어 죽어야 마땅하지 죄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불만불평 터트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내가 왔다. 내가 알아서 부활한 것 보이지? 믿어라.”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경 군데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그 자아를 죽이고 사적인 자아, 국소적인, 정한 지점에만 있는 자아를 제거하고 보편적인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자아를 만드는 작업이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데요. 요한복음 12장에 보게 되면 유월절 되기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의 나사로집에 있는데 거기에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마리아라는 나사로의 여동생이 있었어요. 그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3절에 보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마리아가 자기가 모아놓았던 비싼 향수를 일거에 하나도 아끼지 않고 거침없이 일거에 예수의 발 앞에 다 부어버립니다. 자기 것이 없어진 거예요. 예수님 앞에 다 부어버렸으니까 거기다가 다 집어넣은 거예요. 나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는 겁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 46, 47절에 있지요. 거기에 어떤 죄인인 여인이 하나 있었는데 이 사람도 비슷해요.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비난을 해요. 비난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보고 오히려 비난하기를 46절에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너는 시시한 참기름도 안 부었는데 이 여자는 비싼 향수를 부었다. 47절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주께서 마련하신 것이 뭐냐를 깨달았을 때는 지금 내가 고이고이 나를 나답게 만들기 위해서 나의 영광을 위해서 축적했던 그 모든 향수……, 향수가 시시한 게 아니잖아요. 그 향수가 있으면 있는 만큼 내가 영광스럽잖아요. 자기 영광은 주님의 영광 앞에서는 그냥 있어서는 안 되고 파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나의 영광은.

인간은 하루 종일 하는 작업이 뭡니까? 자기 영광을 챙기고 계산하는 거예요. 그 외에는 인간은 다른 일은 없어요. 자기 단도리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복음에 방해되는지 그게 성경에 잘 나와 있어요. 우리가 태어나서 우리 자아만 알았지 우리의 바탕은 죄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기의 영광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도 잘 몰라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걸 겨냥해서, 즉 율법 자체가 우리 죄를 겨냥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성경 구절 하나 들어볼 테니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쁘게 들리는지 기분 좋게 들리는지 스스로 테스트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천국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는데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9장 11절에 나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면 그것은 무조건 천국 가야 되고 네가 선이든 악이든 행하기도 전에 내가 너는 지옥 가야 된다고 하면 너는 필히 지옥가야 돼, 라는 그 이야기거든요. 이 이야기 듣고 여러분 기분 나빠요, 기분 좋아요? “성급한 답변이십니다.”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본성상 되게 기분 나쁘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그동안 살려고 애썼던 나의 노력과 나의 영광과 나의 희생은 뭐가 되느냐는 거예요. 이미 다 정해놓았다면 그동안 내가 교회 와서 충성 봉사한 것, 물론 충성 봉사 한 적도 없지만, 충성 봉사하고 헌금하고 그 딴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예요. 볼때기 불룩 튀어나오고 기분 나쁜 인상을 하지요. 내가 뭐냐는 거예요.

내가 뭐냐? 그걸 겨냥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기분 나쁘다는 것 자체가 너는 지식이었다. 예정론도 지식이었고 부활 십자가 다 지식이었다. 네가 네 자아를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 영광을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주께서 말씀을 하셨는지, 주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재림하실 때 멋들어지게 오신다, 그것만 자꾸 생각했지 주님의 영광이, 이 지저분한 이 세상에서 이미 영광이 시작이 되었어요. 그걸 갖고 무슨 영광이라 하느냐?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모르면 여러분 끝났어요. 부활이고 영광이고 없습니다. 이 땅에 독생자의 영광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바닥부터 시작된 영광, 그것은 아주 치욕스러운 영광이에요. 굴욕적인 영광이에요. 옷 벗김을 당하고, 뺨을 맞고, 놀림을 당하고,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설움 당하고, 이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하나님의 메시아가 필히 치러야 될, 가져야 될 영광의 시작점입니다. 그게 독생자의 영광이에요.

결국은 그 독생자의 영광은 뭐냐? 과감하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받는 영광, 버림받는 것이 영광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상상도 못 합니다. 왜 상상도 못하는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떤 경우라도 잃으면 안 되고, 다치면 안 되고, 자기는 아프면 안 되고,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데 막달라 마리아나 또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나 진짜로 주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 진짜로 죽어도 부활 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냥 주님 앞에 지식이나 한 수 배우는 것이 아니고 아낌없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려요.

다시 말해서 내가 축적한, 내가 모아놓은 영광과 교체할만한 영광을 얻은 거예요. 아낌없이 얻은 거예요. 불신자는 뭐냐? 바꿔치기 할 영광을 발견하지 못한 자가 불신자에요. 그래서 계속 자아를 버티기에 나서는 겁니다. 저 십자가 알아요, 복음 알아요, 교회 한 5 십년 다녔습니다, 저 신학박사고 목사입니다, 라고 하면서 계속 버티는 거예요.

걸레 같은 더러운 것, 자기 영광을 못 버리는 겁니다. 중들 머리 깎은 것 보세요. 진짜 중한테 묻고 싶어요. 왜 깎았는지. 그거 자기 영광이에요. 그리고 수녀하고 신부들 그 복장 한 번 보세요. 로만 칼라하고 수녀복 입고 왜 그 짓 합니까? 그것은 뭔가 지킬 것이 있다는 거예요. 뭘 지키는데? 천주교 교단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수녀회 수도회의 이념을 지켜야 된다는 것, 지킬 게 있다는 거예요, 주님은 치욕스러운데, 지킬 게 없었는데. 얼마나 거짓된 단체들이에요? 성경에서는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노출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고 또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그중 한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아나니아 삽비라 나오지요. 이름이 길어서 그냥 제가 줄인말로 ‘아삽’이라 아삽부부. 아삽부부가 자기 소유 얼마를 헌금할 마음이 있어서 자기 아내하고 의논하고 베드로 사도발 앞에 내놨습니다. 딱 내놓으니까 사도가 아삽을 보고, 아나니아 삽비라입니다, 아삽을 보고 말하기를 3, 4절에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하고 나서 아나니아 먼저 죽고 그 다음에 뒤에 삽비라 죽고 부부가 다 죽었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을 할 때 이렇게 해야 돼요.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는 거예요. 아삽 부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죽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돼요. 그 사람은 원래 죽었어야 돼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원래 죽었어야 되는데 죽는 이유를 모르면서 자아가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5장에서 어떤 부부가 죽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이해하게 되면, 죽었는데 그 다음에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필름을 거꾸로 돌려서 죽었다, 여기서부터 돌려버리면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지키려는 나는 그 누구로부터 들킬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죽었던 거예요.

내가 지키고자 하는 자아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누구한테 들키고 자시고 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안에 죄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본인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지키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필름을 다시 거꾸로 돌려봐요. 돌려보게 되면 사도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네가 감춘 것이 들켰다는 겁니다. 감춘 것이 들켰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자체가 있더라도 주님으로부터 들킬 것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도행전 5장에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이 땅에서 살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네 죄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네가 모르는 이유는 네가 너를 들춰내는 사람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너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간직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면서 살아온 거예요. 머리 나쁜 분들 이해가 안 되지 싶지요.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아갑니다. 안 들키면 되는데 왜 들키느냐 하는 거예요.

들춰내시는 분이 있어요. 그 들춰내시는 분이 너에게 들춰낼 것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죽을 죄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헌금할 마음을 준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필름이 죽음부터 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마가복음 12장 41, 42절에 보면 거기에도 주님앞에 들킨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이 여자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바쳤다, 누구보다 많이 헌금했다 했어요. 이 과부도 들켰어요. 이 과부도 들켰거든요. 들켰는데 주님으로부터 칭찬이 주어진 겁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놔야 하기에 당연히 내놓은 거예요.

왜? 자기는 가질 권한도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는 죽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한 것이지 뭐를, 동전 두 개를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나 내게 합당한 권리는 나에게 아예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아느냐? 주님이 아시는 거지요. 바로 그러한 태도, 그러한 행위가 예수님이 시작한 독생자의 영광의 최초행위입니다.

나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이 영광을 아버지를 위해서 다 내놓는다. 공동체험이지요.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내놓는 체험, 공통체험으로 인하여 예수님도 죽고 모든 인간도 다 죽어요. 여기서 국소적인, 사적인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보편적 자아가 새로 생긴 거예요.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스펙트럼입니다. 좍 펼쳐지는 스펙트럼, 머리가 있고 지체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아가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주어질 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얻은 영광도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러한 아삽, 아나니아 삽비라를 보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될 것은 아나니아 삽비라가 도둑질을 했습니까? 아니지요. 간음을 했습니까? 아니지요 살인을 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죽었어요.

왜 죽었느냐? 근원적인 것을 들켜서 죽었어요. 너는 네가 아직도 인간인 줄로 생각하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 근원을 뽑아내는 이 작업은요, 주님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도 해요. 인간들도 과학이라는 것을 동원해서 20세기 중반부터 self, 자아를 연구하기 위해서 두뇌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감정 이 모든 것을 연구하고 연구해요.

연구하는데 방법은 뭐냐 하면, 나의 육신을 관찰되는 나로 보고, 나를 관찰하는 나로 보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육신을 가지고 관찰해서 나를 규정하고 규명해 보겠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관찰해서 보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영상), fMRI(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기능적자기공명영상), 그다음에 DTI(diffusion tensor imaging, 확산텐서영상), 이런 것을 동원해서 두뇌를 조사해보는 겁니다.

두뇌에서 반짝반짝 활성화되어서 펄스가 생기는 그것이 모니터에 나오거든요. 기억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추적해서 조사를 죽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감각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시각이 들어오면 뒤통수의 이 부분에 V1이라는 자리에서 반응을 나타내고요. 이게 V2로 가고 그 다음에 거기서 그 모든 지각을 연합하는 지역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게 감각이거든요.

인간들은 두뇌를 조사하면서 감각층과 그 다음에 추상적이고 상징하는 층을 따로 구분했습니다. 추상적인 것을 관장하는 층을 대뇌피질이라고 했는데 진화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거예요. 자아가 어디 있느냐? self, 지금 그걸 찾는 작업을 과학자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자아가 어디 있느냐? 조사를 죽 해보니까 ‘배외측전전두엽’이라는 것이 있어요. PFC(prefrontal cortex)라는 것이 있어요. 이 부분에서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이는데 거기서 세 가지를 합니다. working memory, 자기가 하는 것을 기억을 하고, 두 번째, emotion control, 자기감정을 조절하고, 세 번째 중요한 것, time conscious, 시간을 의식합니다.

이마 앞부분에 대뇌피질이 있어요. 그걸 하면서 드러나는 결과가 뭐냐 하면, 바로 비교하고 추론하고 예측하고 판단하고. 그게 이성적 생각을 해서 그것을 바로 옆에서 promote라 해서 인간의 행동을 조절하는 그 부분에서 신경조직에 명령을 주게 되면 신경조직의 말단근육까지 움직인다는 거예요.

걸리는 그 시간은 0.4초.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빠르지요. 그래서 관찰하는 나가 관찰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느냐? 판단을 하는 그 동네에 나가 있겠지요. 그런데 참 바보 같은 것인지……, 난 과학자들을 사기꾼이라고 보는데 관찰되는 나와 그 관찰되는 나를 관찰하면서 보고 있는 나가 있다는 그것을 누가 관찰합니까? 그걸 누가 관찰하지요?

과학자들은 사람이 서로 악수를 한다든지 두 손을 서로 잡는다는 것은 자기의 기억된 그것이 해마(hippocampus)에서 들어와서 시상(thalamus)이라는 곳으로 가는데 기억을 만드는 것은 해마에서 하고요, 그것을 대뇌피질까지 올릴 것인가 말 것이냐를 조절하는 것은 시상이라는 곳에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데 새로운 것은 올리고 옛것은 그냥 장기기억으로 남겨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판단은 누가 합니까? 자아가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 자아가 어디 있습니까? 실컷 자아가 한 결과들은 모니터 들여다보면서 다 연구해놓고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없는 거예요. 얼마나 이게 바보 같은 생각인지요.

시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째깍째깍 톱니가 물리면서 돌아가서 작동한다. 잘 설명해요. 작은 바늘 큰 바늘 다 설명해놓고. 그러면 시계가 작동하도록 하는 그 시계는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시계가 시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바보 같은 소리지요. 이것은 말도 안 되지요.

인간은 누가 만들었느냐? 몰라요. 나는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요. 나는 어디 있지? 몰라요. 여러분, 모른다는 말은 전면적으로 다 틀렸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에요. 모르는 데서 시작했다는 말은 뒤에 나오는 어떤 아는 것들도, 그야말로 로켓 타고 화성에 착륙하든 말든 그 전체가 아무런 의미 없는 하나의 시계에 불과한 겁니다.

왜 그걸 만들었는지, 목성은 왜 만들었는지 모르고 목성 가고, 지구는 왜 만들었는지 모르고 지구에 살고,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자기 찾겠다고, self를 찾겠다고 그 짓 하고 있고요. 아무 의미 없어요. 그래서 악수할 때 반갑다고 하는 것은 시상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니까 빨리 신호를 보내서 새로운 것이 나왔다, 옛날 아는 것에서 기억해 봐라, 해서 피질에 담겨 있는, 또는 연합지역에 있는 기억들을 조사해서 “아이고, 네가 동창생이구나.” 하고 손을 내밀어서 악수할 때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도 다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과학에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나 눈물이라는 게 여러분, 그런 식으로 과학 한다고 눈물의 의미를 다 알까요? 그게 눈물의 의미가 됩니까? 반갑다, 의 의미가 됩니까? “열차 시간 다가올 때 두 손 잡던 뜨거움~” 이게 과학으로 설명이 돼요? “기적 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이게 김광석이 불렀던 <이등병의 편지>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두 손 잡을 때 그 뜨거움 그게 과학으로 설명이 됩니까? 아주 고상한 사기꾼들이에요. 과학 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영광을 포기를 못 하겠다는 겁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나한테 갖고 있겠다는 거예요.

우주론을 연구하는 사람들, 천문학 연구하고 빅뱅이론 이야기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우주는 왜 있습니까, 물으니까 솔직한 사람들은 모르겠다고 하고 아는 척하는 사람, 휠체어 타면서 연구하다 죽은 물리학 박사가 있어요. 그 사람은 아는 체하면서 우주라 하는 것은 내가 우주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주가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이런 사기꾼, 우주라 하는 것은 내가 우주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주가 있다는 거예요.

폐회로입니다, 폐회로! 갇혀진 회로입니다. 인간 자체, 인생 자체가 갇혀 있어요. 성경에서는 한마디로 이야기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과학이 그리고 종교가 전부 다 악하고 음란한 거예요. 그 모습 자체가. 연애하는 영화만 악하고 음란한 게 아니에요. 종교, 예술, 과학, 다 악하고 음란해요. 거기에 승부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 직장, 생활, 영업사원, 전부 다 승부욕이에요. 그거 빼놓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는 어떤 작업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는데 여러분 들어보면 ‘아! 그 이야기’ 하고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라는 게 있어요.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5천 명 먹일 때 여기 12절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버리는 것이 없게 했을 때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없던 것입니다. 없던 것인데 여분의 것이 생겼어요. 그 여분의 것, 우리의 비교, 추론, 예측, 판단, 우리의 두뇌피질의 기능들, 그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오병이어 없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열두 광주리입니다. 이게 여분의 것입니다.

그 여분의 것의 예는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지만 누가복음 1장 7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관한 것인데요.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엘리사벳은 세례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세례요한은 없는 존재입니다. 엘리사벳이 아기가 없었어요. 임신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 내려오는 어떤 혈통에서부터 탈선하게 만들어요. 거기서 이탈해서 별개로 만들어요. 여분의 것, 열두 광주리, 주께서 손대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못하는 존재, 그게 보편적존재에요.

개인의 자아는 죽여버리고 죽여버렸으니 나는 없잖아요. 원래 나는 없어요. 죄가 나를 행세했지 원래 나는 없 는건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개입을 하니까 약속에 준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 모습이거든요.

그 세례요한이 장성하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7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 합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즉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너희하고 비스무리 한 사람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너희와 같은 공통점이 있는 사람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그러면 세례요한이 도시에 살지 왜 광야에 나갔겠습니까?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왕궁에 있는 사람? 그러면 갈대? 아니야 뭘 보려고 나갔더냐? 옳도다. 바로 나와 연줄 된, 나와 연결된 사람 너희는 그분을 만나야 된다.” 나와 연결된 사람.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독생자의 영광을 이야기할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절에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나보다 늦게 오신 분인데 나보다 앞선 분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보편적시간이에요. 시간의 진행 자체가 time conscious, 인간의 시간 의식 자체를 아주 개무시하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독생자의 영광의 자리가 마련됩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인물과 더불어서 생기는 것이 영광이고 포지션도 인물과 더불어서 생기는 것이 그 포지션 그 자리에요.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새로운 생겨난 인물이 세례요한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지요. 첫 번째 사람. 나보다 앞선 것, 나의 원천이다, 그 말이에요. 골로새서 1장 16, 17절을 이미 보셨잖아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우리 원천입니다. 우리 원천은 예수님이지요. 우리 원천이 죽었다가 부활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그 포지션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난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고 우리의 요구사항이 아니에요. 그래야만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래야만 하는 팔자고 운명이에요. 우리는 죽어야 될 팔자고 죽어도 다시 살아야 될 팔자, 참 희구한 팔자지요.

원망하려면 부활을 원망하세요. 영생 받은 것을 원망하라고요. 영생 받은걸! 그게 기쁘지 그게 어떻게 원망의 대상이 됩니까? 좋아서 입이 늘어지지요. 뭐 양자들이는 데 아동학대하고 애 밟아서 죽였는데 재판해서 무기징역 나왔다. 우리 정의가 살아나서 기쁘지. 그게 뭐가 기뻐요, 부활이 기쁘지요.

왜 세상에 대해서 자꾸 기대합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라는데. 더러운 세상이에요. 지저분한 세상 걸레 같은 세상입니다. 좋은 세상 예측도 하지 마시고요, 기대도 하지 마세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치욕스러운 그 영광, 독생자의 그 영광의 자리, 그 자리에 우리가 이미 같이 거기에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짜 오늘 말씀을 이해하신다면 이 노래 가사도 같이 공감해야 돼요. “어두운 밤에 깜깜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새벽이라는 것은 낮과 밤이 갈라지기 때문에 그때가 낮이 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에 차가운 새벽이었소~ 주님 맘속에 사랑 있음을 나도 느낄 수 있었소~.” 이게 유명한 <실로암> 논산 훈련소에서 합창한다는 그 <실로암>이잖아요.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이 땅은 깜깜한 밤이에요. 새벽도 아니에요. 깜깜한 밤이었어요. 그런데 세례요한같이 “당신은 나보다 먼저요 나는 나중입니다. 당신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었고 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었습니다.”라고 외치는 자에게 이 사람은 움직이는 새벽입니다. 이름을 다 송 새벽으로 지어야 돼요.

새벽으로 이름을 바꿔야 돼요. 우리는 새벽이었습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어둠에서 벗어나서 실로암에서 진흙 바르니까 눈 떴다 그 말이지요. 눈 뜬 거예요. 부활의 영이니까 독생자 주님의 그 치욕스러운 것이 유일한 영광, 정말 나의 살아온 나의 모든 누적된, 축적된 나의 재산과 가치와 내 영광과 명예와 자존심, 이걸 누가 이겼느냐? 주님이 이겼어요. 내 자존심을 이겼다고요. 이걸 뚫어버렸어요.

나의 가치를 밟아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나의 목숨을 이겼습니다. 나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이겼습니다. 주님의 생명, 우리는 더 이상 국소적인 자아가 아니라 보편적인 자아,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우리는 하나의 일종의 송 새벽, 이 사람이 나는 누군지는 모르겠고, 이 새벽, 김새벽, 우리는 바로 새벽이었던 겁니다.

밤과 낮을 가름할 수 있는 기준점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활용하기 위해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는 기준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 죽기 전에, 영광 보기 전에 이 땅에서 치욕스럽지만 영광스럽게 기뻐하면서 살라고 주께서 성령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조차 제대로 몰랐습니다. 내가 나를 분석하고 판단하면 그게 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악마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체가 사기꾼이었고 오직 어두움이었고 거짓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자랑스러워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자신이 어두움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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