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원리
2021년 5월 2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1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은 천문학을 전공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 가 계신 곳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다녀가신 분이요 거쳐가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바깥 관점에서 총괄적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세상은 그들의 세계 밖으로 추방시켜버렸습니다.
즉 “당신의 관점은 우리 세계에서는 필요없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겁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의 관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더욱 철저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땅은 더욱 땅답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천체를 관찰한다고 하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아무리 탐구하더라도 그저 땅의 일뿐입니다.
인간들의 땅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겁니다. 인간의 마음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판단이나 분석력으로 통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인간 밖에서 찾아들었던 일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그 신기한 일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너희가 …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즉 ‘다시 살아났다’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는 이미 죽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의 출현을 말합니다. 이게 땅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주장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죽은 적이 없으며, 비록 죽을 뻔한 적은 여러번 있더라도 온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성령이 오신 겁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죽어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너희는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느냐가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2에, “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런 식입니다.
즉 “내가 질러넣은 불에 탈 존재야”하는 식으로 찾아오십니다. 인간이 들으면 욕하는 줄로 알겁니다. 오순절 날에서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레위기 9:23-24에 봐도, “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 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24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는 전체 공간을 벌써 저주와 심판의 장소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8장-19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불심판 떨어질 것을 알고 조카 롯이 걱정되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의인들이 악인이 받아야 될 심판을 같이 받을 수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인간사의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다 볼 줄 몰랐던 겁니다. 몽땅 늘 불심판받아 합당한 존재들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안목의 정당성은 바로 인자(人子)라고 지칭되는 인물이 이 땅을 방문하므로서 알려집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살하신 것이 아니라 땅의 세계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당하시는 가운데 고난 속에 죽으셨습니다. 이로소 인간 세상은 언제든지 불심판당해도 마땅한 세상이 되어 있음을 밝혀집니다. 땅의 세계의 사람들은 서로가 한 통속이 되었던 겁니다. 이 하나(1)로 꽉 차있는 이 세상에서 구멍이 뚫린 겁니다.
마치 노아 홍수 당시에 모든 인간들의 살던 공간은 물로 다 덮혔지만 오로지 새롭게 생긴 한 공간만이 심판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노아 방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새로운 공간, 공백을 만들어놓으십니다. 언약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상 6:19에 보면, “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인간들이 언약궤를 제작할 때 죽음을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약궤 자체적으로 그 안의 공간은 죽음을 제공하는 새로운 공간이 생긴 겁니다. 이 낯선 공간은, 인간 세계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신과 그 신전의 공간성을 저주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인간들이 처단하므로서 그들은 모두 일(1)이라는 동질성을 보여주었습니다. 0의 자리가 없어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타인이 요구하는 삶으로부터 그들의 생애를 시작하고 그것이 자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너더러 너다워라고 요구하더냐?” 물으면 “남들이 나에게 요구했어” 이는 곧 타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타인이 만들어낸 ‘나’를 나라고 여기면서 살도록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극히 인간은 타인 의존적입니다. 이 타인 안에 섞여 들어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므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성도를 연결시키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가 살고 싶어도 예수님 쪽에서 이미 죽었기에 벌써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기에 이미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여기는 ‘자기로 다시 살아남’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타인의 것’으로 다시 살았기에 이제 성도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주목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의 시작과 끝을 결합하신 분이십니다. 이 안에서 성도는 “왜 나는 여기 살아있어야 하는지, 왜 나는 지옥에는 못가는 것인지”를 예수님으로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인간이 여전히 자기를 수습하려고 한다면 이 순간, 이 사건은 다시 존재가 되어서 이 무거운 존재를 가지고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의 순간순간의 작용으로 우리의 생애가 이어져가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자신의 잘 잘못을 따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골 3장 1절(하늘의 원리)21050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1절입니다.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실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익숙해진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난 뒤에 성령 받은 사람이 성령 받지 않은 다른 사람과 어떤 차이를 드러내는가 보니까 그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 새로 생겼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신기한 것, 신기한 것을 자기가 익히 아는 그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한 거예요.
인간이 하루하루 삶을 살면서 설명할 수 없는 그 신기한 것이 나를 주도하고 있고, 나를 통제하고 있고,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 특이한 사람들이 출몰했습니다. 그 신기하고 특이한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말씀을 알아듣기 시작한 거예요. 원래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못 알아듣는 이야기입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이 이게 일반인들에게는 통하지를 않는 거예요. 자기가 지금까지 태어나서 죽어본 적이 없거든요. 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다시 살렸다 하니까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냐 그 말이지요. 뭔가 죽어야, 일단 죽어본 적이 있어야 다시 살리심을 받지요. 죽은 적이 없는데 무슨 살리심을 받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아는 지식 한도 내에서 아무리 분석해도 골로새서 3장 1절이 납득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은 뭐냐 하면, 네가 가진 것 나에게 바쳐라, 가 아니라 “내가 준 것 있잖아. 나는 내가 준 것 그것이 너 자신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나는 너를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니고 너에게 제공되었던 하나님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그 자신의 것을 가진 사람은 바로 1절 중간부터 나오는데 위엣 것을 찾게 되어 있고 그러면 하늘의 해나 별이나 달이나 찾으라는 말인가 아니지요. 위엣 것인데 그 위엣 것의 목표가 있어요. 별을 찾고 천문학 전공하라는 말이 아니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거예요.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은 그리스도만 찾으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주님이, 이 땅을 다녀가신 분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따로 만든 것이 있어요. 그냥 하늘이 아니고 하늘 중에서도 주님이 계신 곳을 따로 만드신 거예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 그곳을 3장에서는 진정한 하늘이라고 한 거예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하늘이니까, 인간의 머릿속에는 그리스도가 없으니까 인간은 아무리 천문학 별을 연구해도 그 천문학 우주 전체를 성경에서는 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켓을 타고 아무리 가도 그것은 지구에서 잠시 이사 간 것이고 백날 해도 그것은 땅이 되는 거예요. 땅 안에 인간은 갇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은 너희들은 돌아다니지 말고 살던 땅에서나 살아라, 그 말이에요. 땅에서 살면서 거기서 취미활동하고 거기서 돈이나 벌고 등산이나 가고 여행이나 가고 공이나 차고 야구나 하고 골프나 치고, 그런 식으로 살다가 그냥 죽으라 그 말이에요.
어차피 모르는데요 뭐. 몰라요. 어차피 이야기해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땅 안에서나 그냥 돌아다니고 밖에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신에 대해서 연구한다.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살던 대로 그냥 살아 잘하는 것 있잖아. 돈 버는 것이나 하다가 그냥 죽어. 교회 왔거든 들락날락이나 하고.” 그거 별로 의미도 없는 거거든요.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실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같이 내렸습니다. 이건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질러놓은 불에 타서 죽을 인간아, 내 말 들어라.” 그런 뜻이에요. 주님께서 욕부터 시작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떨기나무가 있거든요. 떨기나무 나올 때 사람과 하나님의 만남에 대해서 잘 설명해 놓았어요. 출애굽기 3장에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직접 만날 때의 광경입니다.
떨기나무가 있었는데 그냥 나무에요. 그 나무를 모세라고 보는 겁니다. 그 불붙은 것을 하나님이라고 본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불과 타야 될 물질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니라. 신명기 4장 2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소멸하시는 불이라고 되어 있어요.
레위기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섯 가지 제사를 줬습니다.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다섯 가지 풀 코스를 다 하고 난 뒤에 어떤 광경이 일어났는가? 레위기 9장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이제 제사를 다 했어요. 다 끝나고 난 뒤에 회막에 들어갔다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난리 났지요. 소리 지르면서 엎드렸어요. 그 불 앞에. 인간이 눈으로 목도 할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누가 라이터로 불 지를 수는 있는데 제단, 가만있는 그 제물에 불이 붙어서 다 타버렸어요. 그게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하나님은 불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처음 성령이 내릴 때 불같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성령 받았다는 말은 일단 죽자, 이렇게 나와요. “일단 너희는 다 죽었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나님은 불인데 어떤 불이냐? 소멸하시는 불이거든요. 소멸의 작용을 가지고 불로서 나타난 것이 성령이다 그 말이지요. 이 말은 일단 너희들은 죽은 것으로 하자. 죽었지요. 죽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죽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일단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3장 1절에 나오는 다시 살리심이 만약에 연속된다면, 살리심이 주어진다면 그때부터는 이것은 인간의 손을 떠난 일이에요. 이것은 주님의 일이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예요.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지 내가 추구해야 될 나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미 너희는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신기한 이야기지요. 아주 소중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사무엘상 6장 19절에 보면 언약궤가 나오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언약궤가 기존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 신이라는 이념,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절대적 존재, 그 신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시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언약궤 만든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설계도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있으면서 받아왔고요. 언약궤를 시내산에서 만든 게 아니에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혼자 뚝딱거리면서 Do it yourself, 혼자 스스로 아카시아 나무 켜서 만든 게 아니고, 그래서 산에서 만들어서 질질 끌고 내려온 것이 아니고 언약궤의 설계도만 가져왔고 만들기는 지상에서 만든 거예요.
언약궤를 만들었습니다. 아카시아나무에 금박 입혀서 만들었거든요. 만들 때 인간은 결코 죽음을 만들지를 않았어요. 만들어놓고 죽음을 인간이 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들어놓고 난 뒤에 거기에 죽음이 담겼어요. 그래서 언약궤, 그들이 만든 언약궤를 들여다보니까 거기서 죽음이 나타나서 70명이 죽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 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웃사라는 사람이 죽습니다. 언약궤가 이동하면서 소들이 뛰지요. 소들이 뛰고 수레에 있던 언약궤가 넘어지려고 하니까 웃사가 손을 들어 언약궤를 붙들었지요. 이건 뭐 본능이지요. 뭐가 물건이 떨어지는데 그래서 그걸 붙잡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어쩌라고요? 그러면 언약궤가 두 바퀴 세 바뀌 뒹굴어도 그냥 놔두라는 그 말이거든요. 언약궤를 인간이 만들었다 그 말이지요. 인간이 언약궤를 분명히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공간이 있는 거예요. 이게, 아, 참 어려운 거예요. 공간인데 사람들은 빈 곳이라고 본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빈 곳이라고 봤는데 주님께서는 거기에 죽음을 담았다 그 말이지요.
인간이 사는 곳이 땅이거든요. 땅은 공간을 의미하는 거예요. 공간인데 인간이 사는 공간, 거기에 공간이 있어요. 질소와 산소와 약간의 탄산가스가 있는 공기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걸 공간으로 보지요. 그러나 거기에 죽음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의 저주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어느 과학자가 그걸 밝혀냈습니까? 바보 같은 과학자들. 이 빈 공간에 저주가 있고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심판이 있다는 것을 누가 그걸 밝혀내겠어요. 그냥 공간은 공간으로 보지요.
과학자만 바보가 아니고 그 과학자 말을 듣는 우리도 같이 바보가 되지요. 성령을 받았을 때에 이것은 주께서 하신 구약부터 내려오는 모든 이야기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알려줄 때 그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인자라고 스스로 칭했던 분의 하실 일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한자로 人子(인자),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 그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을 그분의 영으로서 성령이 우리에게 알려줘요.
그러면 일단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따지지요. “제가 살아서 예수님 섬기겠습니다. 저를 죽이지는 말아주세요. 살아서 찬송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할 테니까 죽었다는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우리가 주님한테 정중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주의 영께서는 그렇게 답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너도 같이 죽은 것이 되었어.”라고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네 운명, 네 사적인 운명은 없어.”
이 땅에서 살았던 나의 인자됨, 인자가 뭐냐 하면, 이 땅에 와서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인자에요. 그 인자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고난의 모습으로 비취는 특징이 있어요. 그 고난이 나와줘야, 이 땅에서 고난받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와줘야 이 세상 전체, 땅의 세계 전체를 심판할 수 있는 정당성이 보장되는 겁니다.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다는 거예요. 네가 고개 숙여야 될 자를 네가 건드렸다는 겁니다. “네가 그분을 건드린 이유는 배후에 수상한 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너희는 그 영이 누군지를 몰라.” 주께서는 분명하게 그렇게 언급한 겁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주께서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겁니다. “Stand up!” 이에요 여기서 please가 빠진 Stand up이에요. 그냥 내가 등장할 때 “동작 그만! 일어서! 고개 숙여! 끝!”
뭐 몸이 아프니, 인생이 꼬였다느니,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느니, 고부간에 갈등이 있다느니, 이러쿵저러쿵, 백신을 맞아야 된다느니 혹은 말아야 된다느니, 그런 것 하지 말고 지금 그러한 사적인 문제는 Stand up, 일어서라, 그분 앞에 일어서라. 그 분 앞에서는 동작 그만, 그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무의미한 거예요. 전부 쓸데없는 거예요.
그분을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집이 팔리는지 안 팔리는지, 코로나가 언제 끝이 나는지, 정권 바뀌면 또 연금이나 깎이지 않을지 걱정하고. 똑바로 그분을 주목하라는 말은요, 일체 너 자신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신앙생활 끝났어요. 목사가 교인이 몇 명이고, 헌금은 얼마가 나오고 그런 것, 누가 나오고 안 나오고 그런 것도 신경 쓰지 말라. 애가 가출해서 집에 안 들어온지 벌써 2년 되었다. 2년이 되었든 3년이 되었든 그것도 신경 쓸 것이 아니에요. Attention! 이에요. 집중하는 것, 그분에게 주목하는 것. 그것이 위엣 것을 찾으라 에요.
문제는 그 위엣 것이 땅에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그냥 위만 쳐다보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나 하고, 구석에 기어 들어가서 주님 구름 타고 오는 것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위엣 것이 땅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무슨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늘에서가 아니라 땅에서 하나님 자기 일을 시작을 했다는 거예요. 개시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인자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시간을 처음으로 돌리고 시간을 끝으로 돌려가지고 처음과 끝을 예수님 하나의 인격 안에 집중시키는 일 그 일을 한 겁니다.
시간을 처음으로 돌려버리면 이 땅에 아무것도 없었다, 가 돼요. 오직 인자만 있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만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따라서 네가 정말 성령을 받았으면 “주여, 내가 왜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줄 알아야 돼요. “주여, 제가 왜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없어도 됩니다. 없어도 되는데 제가 왜 있습니까?”
있는 내가 뭘 해서 바칠까요, 가 아니라 “아예 없어야 되는데 왜 자꾸 내가 아직도 여기 있는것처럼 느껴집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자꾸 가정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꼭 제가 있어야 됩니다. 저 죽이면 안 돼요. 저 살아야 돼요.” 그 말이 아니고 반대로 뒤집는 거예요. “40년 전에, 30년 전에, 50년 전에, 진즉 없어야 되는데 왜 있어야 됩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인생을 70을 산다는 것은 70대를 경험하라고 70을 살게 하신 거예요. 뭐 잘났다고 70을 살게 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80되면 어떻게 망가지느냐. 그걸 경험하라고 80까지 살게 하시는 겁니다. 40대에 죽은 것은 그만 경험하고 죽으라고 40대까지 경험하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시간을 처음으로 돌린 것처럼 그리고 끝으로 돌린 것처럼 성령 받은 우리도 살아가면서 시간의 처음과 시간의 끝을 우리 나이대에 함축해서 느끼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있어서의 이 땅의 삶과 성도의 삶은 순간성인데 그 순간성은 어떤 순간을 포착해도 거기서 정지, 순간에, 화면에 십자가가 포착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 이루심이 포착 되게 되어 있고 예수 하나님의 계획이 그 순간에 계획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들의 아주 신기한 거예요. 다른 사람이, 성령 없는 사람이 멈추면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령 받은 사람이 멈춰버리면 자기한테 attention하지 않고 주님을 주목하게 되면 거기서 왜 없어야 되는데 있습니까, 나는 지옥 가야 되는데 왜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왜 천국 갔습니까,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왜 천국 사람이 되게 했습니까, 그것이 함축해서 순간순간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하늘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이 원리를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땅의 원리도 같이 설명 되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늘은 원래 인간에게는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땅에 인자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땅에다가 구멍을 내요. 빈자리를 만든다고요.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가 어떻게 성도에게는 생성되는지 그 이야기 하게 되면 끝이에요.
없는 하늘이 일단 내려오고 하늘과 땅의 만남에서 땅이 하늘에 계신 분을 내쫓음으로써 이 땅에서 구멍이 생기는 겁니다. 어떤 분이 오셨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빈구멍. 세 번째 그 구멍 속으로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 그 세 가지 작업입니다. 그 세 가지 작업의 모습이 이미 구약 때부터 나타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입니다. 노아의 방주의 특징은 빈자리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리는 다 물로서 덮어 가지고 자리가 없어요. 산이든 들이든 인간 사는동네 심지어 그 육축이 사는 동네까지 물로 다 덮어가지고 물이 덮인 자리기 때문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다 저주와 심판의 자리가 되고 만 겁니다. 그 순간에 유일하게 빈자리라고 한다면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그 방주가 공백의 자리에요. 비어있는 자리에요. 그 자리에 노아 가족이 들어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노아가 약속을 믿은 게 아니고요. 노아가 약속에 편입된 거예요. 노아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노아가 언약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을 하신 겁니다. 허락을! “노아야! 네가 이 땅에 있는 인자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을 내가 허락할 게. 초대할 게, 초청할 게.” 그겁니다.
와보니까 이 지상에 없는 공간이에요. 방주의 공간이. 그 방주의 공간의 특징은 뭐냐? 시간의 모든 게 중지되었어요. 순간성입니다. 정지되었어요. 그 방주가 탁 깨어지게 되면 그게 바로 새 땅입니다. 새로운 땅. 방주가 깨어질 때 그냥 깨어진 것이 아니고 동승했던 정결한 짐승의 피를 머금고 깨어져 버리지요.
피가 함께 있는 새로운 공간이 예수님 앞서서 하나의 예언적 입장으로서 언약이라는 모습으로 노아언약이 이루어진 겁니다. 노아의 후손은 은혜를 입었더라. 피의 용서를 받았더라. 죄사함을 받았더라. 왜 죄사함을 받습니까, 물으면 노아는 죄 사해주는 분과 함께 있기에 죄사함을 받았더라.
노아는 Attention, 죄 사해주는 분에게 경직되어서 쳐다보는 거예요. 쳐다보고 고개 숙이면서. 인자라는 남자분, 남자분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산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첫 번째, 이 땅의 세계에 주님이 오셨다고 했는데 두 번째 생각할 것은 뭐냐? 땅은, 도대체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아야 되겠지요.
저나 여러분이 땅의 세계에 다 살고 있으면서도 이 땅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해서는 마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굳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땅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사람들은 땅은 거기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땅을 가만두지 않았지요. 빈공간에 좌표를 만들고요. 거기다가 숫자를 배정하는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수학에서 데카르트의 좌표라 하는 거예요. 3차원 좌표에 x, y, z 라는 3차원 공간에다 숫자를 배정을 해요. 숫자를 배정해버리면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중심점, 원점이 발생 됩니다.
그 원점이 뭐냐? 나예요. 여러분 각자 자신입니다. 사시는 곳 어디입니까, 물으면 우리 집에서 4킬로에 우체국이 있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우리 집에서, 항상 내가 있는 곳, 우리 집이 있어야 돼요. 사람이 우리 집이라는 집이 없으면 사람은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 땅에서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그걸 사망으로 봐요.
자, 이 땅에서의 사망을 제가 한번 정의해 보겠습니다. 이 땅에서 사망이라는 것은 나의 일이 없고 나의 소유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것으로 봐요. 나의 일이 없고 나의 것이 없으면. 집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은 것으로 간주하지요. 그래서 할 일 없이 놀면 꼭 죽은 것 같아요.
나답다는 내가 없으면 인간은 죽은 걸로 간주하는 겁니다. 나 다운 내가 없으면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그것은 누가 가르쳐 주던가? 그것은 이 땅에 있는 남이 가르쳐줘요.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쉬운 거예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남이 요구하는 사항이 내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누구냐 하면 남이에요. 나와 남이 같은 동질을 이룹니다. 이 말은 뭐냐? 땅의 세계의 모든 인구가 75억이라도 하나님 보기에는 단 한 사람이에요.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남들한테 물어봐야 돼요. “나 누구야?”라고 물어봅니다.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사람은 없고요. “나 참 잘하지? 나 예쁘지? 나 공부 잘하잖아.” “당신 누구한테 묻는 겁니까?” 물을 사람에게 묻지요. 타인에게, 남에게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이 없었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남의 욕망이 없었으면 나의 정체성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남 보란 듯이 살아가는 거예요. 남 보란 듯이.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으면 나는 죽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내 일이라는 것이 남이 나를 인정해주기 위한 일이에요. 남자가 혼자서 뜨개질하게 되면 그것은 일로 쳐주지 않습니다. “남자가 생뚱맞게 무슨 뜨개질? 좀 남자다운 일을 해라.” 하면 영차, 하면서 도끼 들고 나무 찍게 되면 “오늘도 일 많이 했다. 밥 해줄 게. 머슴 밥 이만큼 맛있게 해줄게.”
인간은 남들이 요구하는 그것이 나예요. 남이 요구하지 않는데 일한다든지 어떻게 멋있게 보일 하등의 이유를 못 가질 정도로 인간은 심히 남 의존적입니다. 타인 의존적이에요. 그것은 왜냐 하면 타인은 나의 확장이고 타인의 확장이 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부 다 그 나물에 그 밥 한통속이에요.
중국 사람 걸리는 코로나 한국 사람도 걸리잖아요. 좌표에 지도 그려서 이쪽은 중국이고 이쪽은 한국이고, 가 의미가 없어요. 그것은 인간이 정한 것이고 코로나 19 본부에서는 그런 것을 정한 것이 없어요. 중국 사람은 좀 더 걸리자. 그런 것이 없어요. 중국이건 한국이건 하나밖에 없는 인간류, 아담이 정한 것이지 그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존재, 불로 싸질러야 될 다 똑같은 존재에요 그냥.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서 하늘에서는 한 사람만 와도 충분해요. 인자 되시는 분이 와도 충분해요. 그리고 인자 되시는 그분이, 한 사람이 이룬 일이 자기 백성이 백 명이든 천명이든 구원하는데 충분합니다. 왜냐? 그분이 우리가 생각 못한 우리를 영원히 보장할 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남이거든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그 말씀 그 문제를 출제하신 예수님이 그 이웃을 사랑하라는 문제를 내시고 스스로 그 문제의 해답이 되사 내 안에, 나의 공백 속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나의 빈자리 속에.
그런데 땅의 세계에서는 이미 타인으로 인하여 집중되어 있는 나가 있기에 이 나를 스스로 빈자리로 만들 재간이 없어요. 어떤 능력이 없다고요. 나를 없애기 위해서 나를 파낼 수가 없어요. 아무리 예수님 믿고 아무리 겸손을 떨어도 예수 잘 믿는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구멍 없이 그냥 나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타인은 나를 만들어놓고 나는 타인에게 극히 의존적이면서 남들이 있는 한 나를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를 향하여 이미 죽었다는 그 말은, 너만 죽은 것이 아니고 네가 그렇게 의식하는 남들도 다 죽었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그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미 다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땅의 절대성은 뭐냐? 바로 죽었다는 거예요. 죽어 있다. 그런데 땅에서는 인간의 절대성은 뭐냐? 내가 살아 있고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세상 중심으로 살아 있다는 거예요. 남이 망해도 난 안 죽으면 되고, 남이 코로나 걸려도 나는 안 걸리면 되고. 모든 시작을 나부터 시작하는 참 이 괴물 같은 본성 이것은 찢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어떻게 해낼 수가 없어요.
사람이 남들을 의식해서 남들이 만들어놓은 나기 때문에 그걸 내가 만들지 않고 남들이 나한테 요구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남이 있는 한 내가 죽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이 관심이 없어질 때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지고 나를 천대하고 멸시하고 학대할 때 그때 인간이 타인에게 대들고 복수하고 대드는 마지막 방법은 자살입니다.
‘너희들 말대로 나를 만들어놓았는데 네가 이제 나를 개무시해? 내가 배고파도 돈도 안 줘? 그러면 내가 보란 듯이 죽어줄게. 너희들 마음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내가 장렬하게 죽어줄게.’ 그것뿐인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지게 되면 타인은 뭐라고 합니까? 그 공간의 좌표에 의해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이다. 번개탄 피우고 죽게 되면 그것은 일산화탄소가 인간의 혈액 속의 적혈구에 있는 헤모글로빈과 결합이 되어서 산소의 흐름을 막아서 질식해서 죽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전부 다 과학적 설명이 인간 개인의 죽음을 다 설명해 버려요. 그렇게 다 덮어버려요. 자기가 애 낳은 적도 없는데 남이 말하기를, 이 죽은 애는 DNA가 너하고 동일하기 때문에 네가 이 애를 낳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애 낳은 적이 없더라도 너는 애 낳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경찰에서. 구미에서 자기가 낳아놓고 딸이 낳았다고 했던 그 사건 말이지요. 희한한 사건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자기 심리는 속여도 DNA 유전자 검사는 속일 수가 없어요. 왜? 과학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과학이 절대적이에요. 인간에게는 땅이 절대적입니다. 땅에서 법칙을 만들어냈어요. 빛의 속도는 초당 30만 킬로미터로 변하지 않는다. 그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상대적으로 변하는 겁니다.
사람의 인격, 인권, 사람의 감정, 이런 것 가지고 나는 나답다고 했을 때 그래서 누가 나에게 메일로 욕을 하고 문자 보내서 욕할 때 보란 듯이 죽지요. 자살하면서 복수하듯이. 그러나 과학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인간의 욕설이나 문자라 하는 것은 소리로 된 에너지가 발성기관을 건드려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언어 자체가 그런 것이다. 언어 의미라 하는 것은 발성의 미묘한 차이에서 나온 것이 의미기 때문에 그 의미 때문에 죽는 것은 바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바보가 아닌 것은, 욕을 얻어먹어도 ‘이것은 단지 소리로 된 에너지이며 인간의 말이라 하는 것은 유사성이 있는 것은 환유라 하고 함축된 것을 은유’라 하거든요. 인간의 언어에서 의미라 하는 것은 정확하게 못 집어내요. 인간의 언어라 하는 것은 그냥 개가 짖는 개소리라 여기고 참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그런데 본인이 한번 들어보라고요. 인간이 남이 욕하는데 참을 수 있는가.
이건 뭔가 땅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고요. 욕해도 안 돼. 배고파도 안돼. 배고프다 하는 것은 내 안의 에너지가 부족하고 세포의 ATP가 부족하다는 뜻인데 없으면 그냥 굶어 죽어. 이게 안 된다니까요. 돈이 있어야 되거든요. 돈이 있어야 되는데 일을 해도 월급을 적게 받는다든지 못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 법에 호소해야 되지요. 법은 뭐냐?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게 법이지요. 사유재산보호.
사유재산은 뭐냐?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나의 것. 그러면 나의 것이 왜 있어야 되는가?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왜 있는가? 남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었다. 도대체 이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모습은 인간이 꾸준히 해명을 하고 정답을 내는데 도대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왜 있는가? 남이 있기 때문에 있다. 우리 부모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있다. 부모가 먼저 있기에 내가 있다. 부모가 먼저 있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남이 있어서. 남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내가 있기 때문에. 이게 무슨 이상한 소리에요? 이게 무슨 소리냐는 말이지요.
배고프다. 누가 배고픈데? 내가 배고프다. 내가 왜 배고프다 하는데? 몰라. 내 육신이 배고프다 한다. 내 육신은 어디서 생겼는데? 남이 있기 때문에. 남은 왜 있는데? 내가 있기 때문에. 이게 무슨 소리예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시간만 개기는 거예요, 시간만! 50, 60, 70, 80,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래서 절대적인 것이 뭐냐? 그런 식으로 죽어가는 거예요.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객소리나 하면서, 그런 소리나 하면서 죽어가는 거예요, 그냥.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러면 성경을 봐야 되겠지요. 성경에 보면 창세기 18장 24절부터 보면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와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한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가 걱정이 되어서 기도하는 장면이에요. “하나님, 분명히 뜻이 있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일인 것은 알겠는데 만약에 하나님이여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그 멸망 받을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해요.
창세기 18장 24, 25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기도를 통해서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의인 50명이 있는 곳을 심판해 버린다면 심판이라는 것은 죄인을 향한 처벌이 심판인데 그 죄인이 받는 처벌에 애꿎은 의인 50명이 죽어버리면 하나님의 정의로움의 공정성이 결여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정의롭다를 규정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아브라함이 기도를 통해서 물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물을 때 뭘 전제로 했느냐 하면, 설마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50명 정도는 있지 않겠느냐, 라고 지레짐작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극한 것까지 다 지적하는 것을 생각 못하고 그냥 인간들 수준에서 자기가 보기에 착하다 싶으면 의인인 줄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이 심판할 때는 의인이 하나도 없을 경우를 전제로 해서 심판하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 경험상 ‘아마 한 명도 없을 리가 없어. 설마 한 명은 있겠지.’라고 생각을 한 거지요. 하나님은 없다. 아브라함은 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 자신은 의인이다, 그 말이에요. 뭐든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에서 의인의 숫자가 점점 내려갑니다. 50에서 45명, 45명에서 40명, 30명, 10명. 그것은 바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요, 제가 언젠가 제 아내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볼펜 쓰다가 잉크가 다 떨어졌어요. 볼펜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되겠다. 누르는 꼭지도 눌러도 망가져서 다시 튀어나오지도 않게 되어서 진짜 버려야 되겠다 해서 물었어요. 볼펜을 버리는 시기, 언제 버리면 되겠느냐, 라고 했을 때 제 아내가 잉크 안 나오면 버리면 된다.
아, 그때 제가 이 창세기 18장을 생각한 거예요. 볼펜에서 잉크 안 나오면 볼펜의 기능은 정지가 되고 죽은 볼펜이 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의가 안 나오는 시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잉크가 더 이상,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안 나오면서 계속해서 쓰고 있다는 그 모습을 자기에게서 발견되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를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는가? 아닙니다. 잉크가 다 닳게 되면 거기서 우리가 더 쓰면 뭐가 나오는가? 피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언약의 피가. 이게 노아입니다. 이게 아브라함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고, 거저 주심이 나오고, 거저 살려주심이 나오고, 거저 용서하심이 나오고, 거저 천국의 살리심이 나오는 거예요.
세상을 살면 살수록 성도는 볼펜처럼 붙들고 쓰면 쓸수록 하나님의 은혜만 나오는 거예요. 네것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네 것이 안 나오면 자살할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내 재산 없고 내 자존심 안 나오고 내 자식이 죽는다든지 내게 우환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 죽을 생각만 해요.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그들만 나의 타인이 아니고 그들 타인 속에 섞여 들어온 타인이 있어요. 하늘로서 오신 타인이 자신의 형상, 자신의 모습, 자신의 영,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심정을 우리 안에다 집어넣은 겁니다. 볼펜 안에 새로운 잉크를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궤 안에, 인간이 만든 그 안에 죽음이 담겨 있다면 예수님의 그 피 안에는 뭐가 담겨 있느냐? 생명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만든 게 아닙니다. 내가 생명이라고, 내가 생명 될만한 모든 요소, 성만찬하고 세례받고 교회 만들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모으니까 그것이 생명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생명이 아닌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형식적인 것, 그 모든 것을 기피하는 식으로, 그게 의미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보고 그냥 살라 하시는 거예요.
그냥 주님에게 Attention, 주님 주목하면서 주님 앞에 Stand up, 그분 앞에 서고 동작 그만, 하면서 그냥 살라 하시는 거예요.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왕이 등장하는데 그 유명한 왕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 이와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알려주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식, 공식이 있어요.
인간은 타인을 의존하고 의식하기 때문에 타인의 이야기처럼 들려주고 그게 바로 너다, 라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나단 선지자가 등장하는데요. 이름이 누구하고 비슷한데 나단 선지자. 나단선지자가 등장해서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이야기합니다.
사무엘하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서 죽 하는 말이 부자가 손님이 오니까 자기의 많은 양과 소를 잡는 게 아니고 양이 하나밖에 없는 가난한 자의 것을 잡았다는 겁니다.
2-4절에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그 소리 듣고는 다윗이 대단히 격노, 분노했어요. 자기가 왕인데, 자기가 이스라엘 통치자인데 이스라엘 통치자 가운데 그런 악랄한 자가 있다는 데서 격분하고 용납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여기서 이스라엘의 율법전문가로서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나옵니다. 그것은 네 배나 갚아야 된다, 라고 하면서 “아니, 아니, 네 배 갚는 것으로 모자란다. 아예 그 인간은 죽여 버려야 된다. 율법도 아까워. 그런 싸가지 없는 인간은 죽여버려. 부자가 부자 값을 해야지 그게 뭐냐?”
그럴 때 사무엘하 12장 7절에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즉 “당신이 바로 그 사람 당신이야. 당신은 당신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어. 당신이 좋아했던 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 장군은 바로 당신이 당신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당신을 위해서 희생한 희생제물로써 그 사람은 당신의 명에 의해서 죽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께서 혼자서 십자가에서 자살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칼질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제발 나를 죽여라, 그 말이에요. “네가 일상생활 가운데 나를 죽여버려라, 나를. 너의 것, 가진 것, 너의 하는 일, 네가 남들 의식하면서 ‘여러분, 저 어때요? 잘났지요? 이만하면 사람구실 하잖아요. 사람구실 하고 있지요?’라고 외치는 너희여. 그 너희로부터 똑같이 생긴 몸, 인간이 인자가 너희로부터 고난받을래. 너로부터 고난받기 위해서 난 이 땅에 왔다. 죽임을 당하러 왔다.”
이사야 52장 53장에서는 일그러진 그 얼굴, 형편없이 망가진 그 얼굴을 하나님께서는 내면화 시키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나 하나 잘난 존재로 키우기 위해서 필히 짓밟아야 될 그분이 지금 내 안에 살아 있다.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들어오는 것, 이것이 성령 받은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애매하게 죽었던, 이유 없이 죽었던, 억울하게 죽었던 분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여기서 예수님의 영토가 되고, 자신의 공간이 되고, 나는 그로 인하여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공식이 나오는 겁니다. 뭘 해도, 예수 믿어도 죄인이에요. 설교를 해도, 복음을 전해도 죄가 돼요. 뭘 해도 죄가 돼요.
죄가 된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내세울 것이 없는 것,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내 인생이 쫑나도 그것보다도 주님을 바라보는 그 기쁨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은 주님께 고개숙이는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용납한 적이 없어요. 우리에게. 죽은 자를 가지고 주님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이룬 뜻을 땅에서도 이루기 위해서 이어지는 연속적인 일이 뭐냐? 죽은 자를 가지고 주께서 나를 가지고 노시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림을 당하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신분입니까?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그냥 방치해도 되는데, 그냥 버려둬도 되는데, “이 불 받을 인간아, 이 불에 태워죽일 인간아!” 찾아와 가지고 불을 우리 안에 지펴버리고 우리 속에 타인으로 형성된 내가 있던 그곳을 송곳으로 찌르는 거예요. 구멍을 내버리는 겁니다. 너는 나쁜 존재야, 너는 나쁜 놈이야, 하고 구멍을 내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십자가 사건 가지고.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십자가 끝이 뾰족하거든요. 예배 마치고 뒤돌아서 보세요. 끝이 뾰족해요. 그 뾰족한 것 가지고 내 원점, 내 중심점, 세상을 좌표로 보고 x, y, z로 보고 그 중심에 내가 있는 그 나를 뻥, 하고 구멍 내면서 찢어버려요. 그러면 나 자체가 소멸 되니까 타인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교회도 의미가 없고, 내 인생도 의미가 없고, 내 나이가 몇 살이냐도 의미가 없고요.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야 가라, 내 나이야 가라. 내가 몇 살을 살았는지 그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주님께서 아말렉 민족을 죽일 때는 뭐까지 죽이는가? 젖먹이까지도 죽이라고 했어요. 젖먹이 아이까지. 지금 현대국가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젖먹이 아이 학대하면 난리 나잖아요. 어린이집 못할 지경이에요. CCTV 달아야 되고요. 젖먹이 아이의 인권을 논하잖아요.
그런데 젖먹이 아이든 젖뗀 아이든 간에 그 구멍이 뚫려버리면 처음부터 이것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의 절대성이라는 변치 않는 하나님 보시기에 진리성, 얘는 태어날 이유도 없고 권한도 없다. 그리고 얘는 살아도 천국 갈 이유도 없고 권한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나야 될 존재, 그 젖먹이 아이를 주께서 마음대로 일관적으로 다룬다는 게 그게 주님의 정당성이거든요. 그게 공의입니다.
인간이 거기에 이의 달 것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안 듣지요. 이런 이야기 하는 그 타인을 밀어버렸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타인 이야기를 가지고 “바로 네가 그 사람이다.” 그 타인은 어떤 타인이냐? 이 땅에서 희생된 타인이에요. 밧세바의 남편 하나님을 위해서 전쟁했던 그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아내는 누구한테 빼앗겨 버리고 자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했고.
그런데 자기 아내를 빼앗고 자기를 미필적고의, 고의 아닌 것처럼 해서 죽여버린 그 당사자가 누구냐? 바로 다윗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다윗의 중앙은 구멍이 나야 되고 그 구멍에 죽은 우리아의 귀신이 거기에 박혀 버릴 때 거기서 태어난 자녀가 누구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솔로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 아니고 바로 죽은 자의 아들 우리아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14대-15대-14대 해놓고 14대-14대-14대로 고쳐넣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솔로몬은 아버지가 둘이에요. 그러나 둘로 만들어놓은 이유는 다윗은 아니니라.
그겁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이자 태자 정자, 그분 계시고, 그리고 우리 주님의 아버지,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입니다. 성령께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거예요. 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지를 그것은 바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아들의 자리에 아들이 우리를 껴안아 줘서 “이제는 내가 너의 영원한 타인이 될 게. 너의 정체성이 될게. 이제는 네가 너가 아니라 내가 너라고 불렀던 그 너가 되게 해줄게.”
모든 율법을 다 이루어주시고 주께서 우리를 껴안아 줬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가지 위는 이제는 주님만 주목하면 돼요. 주님만 주목하면서 순간순간 주께서 또 일을 일으켰구나, 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이 사건이에요. 우리가 사는 것은 사건인데 인간이 자기를 수습하면 갑자기 사건이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내 일 처리한다고 주님을 잊어버리지요.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다시 십자가를, 하늘의 일을 땅에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있는 하늘을 쳐다보라. 땅에서는 이미 죽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제발 신기한 것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신기한 것은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다가 자기 수습하려고 부질없이 시간만 때우고 시간만 날려 보내면서 헛되고 헛된 인생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눈을 들어서 이 세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사건이 터졌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