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되지 않는 것
2021년 4월 18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18-19
(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인간의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운명은 자연의 운명에 복속되어 있습니다. 자연이 망한다면 당연히 인간도 망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한계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자연만 의존할 뿐이라는 점입니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들 생존에 유리한 것들을 뽑아내어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인간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자연 현상을 통해서 신과의 결속에 나서려고 합니다. 그런 시도를 하는 이유는 자신을 주인공을 한 소설쓰기를 마음 속에서 지속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예측과 희망을 자기에게서 도려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준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7:1-2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운명은 확정적입니다.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겁니다.
이렇게 죽음이 확정된 바에야 왜 죽는 지 그 이유는 사전에 알아야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잘못된 종교성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가 지적한 것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올바르고 좋은 편에 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대조가 되는 항목을 지정해 버리면 무한한 선택되지 못한 나머지 항목들이, 대조를 통해서 드러난 진리값을 조롱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오늘 영화봤는데 어쨌어. 재미 있었어 없었어?” 답변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재미는 있었지만…” 여기서 생각 못한 제3의 항이 등장합니다. “네 복통은 좀 어때?” 즉 영화의 재미 유무와 배가 아픈 것 하고 아무런 상관없이 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생각들은 선과 악의 가치 개념으로 진리를 추구하지만 항상 제 3의 것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단되지 말라’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이단으로 태어났으며 그 이단성을 겪지 않고서는 성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과장하게 마련입니다. 그 과장의 원천은 자연현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겁니다. 천사마저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온 자연현상을 통해서 신과 연결을 꿰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쓴 자기를 위한 소설책이 영광스럽게 마무리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들 말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항상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그러나 대자연은 보편성으로 움직입니다.
그 보편성이 바로 ‘죽음’입니다. 대자연은 모두 다 이 죽음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대자연의 운명은 죽고 망하기 위함입니다. 이 진리가 유일하게 언약이 들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전달됩니다. 출애굽기 1:22에 보면,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나라인 이스라엘은 이 세상과 접하면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하시는 태도이십니다. 즉 자연 속에 죽음을 집어넣고, 그 죽음에 모든 것들이 응집되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신과의 연결은 애초부터 성사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멀쩡하게 유지된 채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자연은 자신들의 생존을 영원토록 보장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여깁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스토리를 무한대로 이어져 나갈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바위에 붙어 있는 개미들의 행렬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믿는 것은 든든하고 견고한 바위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바위가 금이 간다면요? 그래서 그 바위가 무너진다면 그 표면에 붙어있던 개미들은 같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지역이 다 갈라지고 사정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대자연이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살기 위하여 기대는 곳은 대자연 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애굽나라와 이스라엘의 만남은 대자연을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대조를 이룹니다. 애굽나라는 대자연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대자연은 한결같이 제 자리를 찾아오는 진리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애굽나라와 달리 다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섬기기’입니다.
즉 언약의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하심을 증거하기 위해 등장한 나라가 곧 이스라엘입니다. 출애굽기 8:18에 보면, 애굽나라는 모세를 통해서 떨어지는 10가지 재앙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10가지 종류의 재앙입니다. “그들이 그대로 행할새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니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출 8:17-18)
즉 인간의 학문과 종교는 대자연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과장되지 않는 것은 율법, 저주와 지옥과 심판을 불러오는 무서운 율법밖에 없습니다. 그 율법의 완성이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피’가 발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피를 통해서 자기 백성의 운명을 바꿔치기 하십니다.
성도는 바로 이 심판과 저주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자신을 향한 심판과 저주가 율법적으로 합당함을 받아들이는 바로 이것이 ‘과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에서 본인의 죽음을 기재하시고 책을 덮으세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애초부터 문제 자체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48:19에는 임종을 맞이한 늙은 야곱은 의도적으로 요셉의 두 아들의 위치를 바꿉니다. 그리고 어긋맞게 손을 엊고 축복합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자이신 주님이 높아지려는 자기백성과 운명을 바꾸치기 하신 것으로 천국 백성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어느 것 하나 ‘나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묻는 헬리콥터를 타고 부담없이 지옥 구석구석을 관람하는 것이 성도의 남은 인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하기 인생’말고 ‘빼기 인생’을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골 2장 18-19절(과장되지 않은것)21041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18-19절입니다.
골로새서 2:18-19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이 사항은 이미 인간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렇게 지적을 해주니까 ‘아, 이런 것이 옳은 것이 아니고 옳지 않은 일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 현실 속에서 이런 일들이 빈번하고 포괄적으로 많이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성도들이나 사람들은 여기 하나님이 이래서는 안 된다, 라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기피를 하려고 하겠지요. 18절에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렇게 되니까 나는 이제부터 겸손하지 않겠다, 천사를 숭배하지 않겠다, 그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상이 빼앗기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라고 되어 있으니까 나는 내 본 것을 의지하지 않겠다, 육체의 마음을 좆아서 헛되이 과장하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기피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데 이단에 안 빠진다고 해서 이단이 아닌 게 아니에요.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단으로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늘 좋은 편에 서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벌써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갖지 말라고 했는데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을 구분해서 자기를 선한 쪽으로, 선한 편에 다리를 세웠다는 자체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인간이라고 간주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살면서 사람들은 옳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해서 자기를 옳은 편, 바른쪽에 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게 자기 살길이라 여기는 거지요. 대조가 되는 항목, 인간의 지식은 선과 악, 가치관이라 하는데 선의 가치관 악의 가치관, 그 체제를 만들어서 그런 식으로 세상을 표현하는데 이 대조가 되는 그 항목을 무한한 개념 속에서 따로 뽑아놓게 되면요, 그 나머지 뽑히지 않은 다른 개념들이 그 대조로 인해서 생긴 진리 값에 대해서 조롱하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영화가 재미있더냐, 재미없더냐?” 그렇게 물을 수가 있지요. 그러면 재미있었다, 또는 재미없었다, 둘 중 하나를 이야기할 겁니다. “아, 재미있었어.” “그러면 네 복통은? 네 배 아픈 것은 어떻게 되는데?” 이래 치고 들어온다고요. “너 이단이야, 이단 아니야?” “나 이단 아니야.” “그런데 공부는 왜 그렇게 못하는데?”
대조가 되는 항목, 성경에서 이것은 나쁜 것이고 이것은 옳다고 딱 나오니까 그 많은 개념들 가운데 대조되는 개념만 따로 추려 가지고 옳다, 그르다, 딱 대비하니까 거기서 빼놔버린, 뽑히지 않은 개념들이 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나 이단 안 될래, 나는 바르게 살래, 그야말로 나는 억지로 겸손 안 해, 나는 헛되게 과장 안 하겠어, 라는 식으로 독촉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 성경 말씀을 주는 게 아니고요, 반드시 너는 이것을 거치지 않으면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인간세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빠트린 개념들 속에 이런 것들이 가득 들어있거든요. 내가 어떤 체험, 인간이 살아온 것, 만약에 태어난 곳이 미얀마다 또는 태어난 곳이 북한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북한 자체에서, 또는 미얀마라는 나라 자체에서 옳다고 하는 바에 대해서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옳으려고 하지만 그것이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에서 보게 되면 그 잘했다는 그것이 잘한 게 아닌 게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옳다 그르다, 가 다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하면,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이 되기 때문에 전부 다 사적인 이야기예요. 그래서 ①성도라 하는 것은 툭 건드리면 사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말고 보편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됩니다.
예를 들면 사적인 이야기가 이런 거거든요. 우리 집 양말 공장 했는데 잘됐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그래서 뭐? 너네 양말 공장 하는 것과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또는 “우리 집 주유소 하는데 망했다.” 주유소 하다가 망했다는데 “그래서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사적인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제외되지 않는 그 보편적인 것, 그 이야기만 성경은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단 안 될래, 천사 숭배 안 할래, 나는 본 것을 의지 안 할래, 나는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 안 하겠어, 라는 식으로 그렇게 안하면 그 사람 구원되는 겁니까?
본인을 위하여 본인이 어떤 개념을 뽑아내서 나는 오른편에 그리고 저 사람들은 저쪽 편에, 이렇게 일방적으로 편가름 하는 것, 인간의 태어날 때부터 하는 짓이 그 짓밖에 없는데 그래놓고 성경 말씀 나는 지켰다, 이런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것 말고, 너희 집 양말 공장 하는 그것 말고요, 주유소 하는 것 말고, 사적인 것 말고 보편적인 것 말이지요, 보편적인 것.
성경에서는 보편적인 것의 예가 나와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절이요.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이게 보편적이에요. 4월 15일이 누구 생일이냐 하면, 김일성 생일이거든요. 북한에서는 난리도 아니지요. 물론 다른 사람 누군가의 생일도 되겠지만.
그런데 김일성 생일, 그 출생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낫다는 겁니다. 보편적인 것은 서사적인 것이 아니에요. 스토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인간들이 자기를 좋은 편에 세우는 이유가 자기 나름대로 인생 스토리를 꾸미고 있는 거예요. 모든 하루하루 삶이 자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책을 쓰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 소설책 덮으라 그 말이지요. 그냥 덮지 말고 주인공 죽이고 덮으라 그 말이지요. 주인공이 죽어버린 그 소설의 책장을 덮어버리라 그 말입니다. 죽으면 해결될 문제를 왜 그리 고민을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미 주인공은 죽었어요. 왜? 출생한 날 보다 죽는 날이 낫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선은 뭐냐 응애, 태어났잖아요. 태어날 때 그 인간이 죽는 날을 위하여, 살아 있는 너를 위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니고 네가 죽는 그 사건 그 때를 위하여 너는 방금 태어났어야 했었어, 라는 이게 성경의 보편적인 이야기에요. 내가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것이 결국 이 귀중한 내가 엄연히 죽는다는 겁니다.
내가 결국 사라지는 게 맞아요. 내가 결국 사라지는 게! 그렇다면 오늘 성경 본문에서 ‘과장’은 뭐냐 과장은 내가 나를 위한 내 스토리, 내러티브(narrative), 내 서사구조로 소설책을 쓰는 것, 이게 과장된 거예요. 이게 사적인 것으로 고정된 과장된 겁니다.
사람이 복음 전하는데 화내지요. 그것은 사적인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적인 스토리가 있어서 그래요. 아무리 죽음을 이야기하고 지옥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지금 이 세상은 지옥권보다 역세권이 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에요.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 있을 때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스토리가 짜여진다는 게 이게 문제가 돼요. 그것도 개인적인 스토리, 사적인 스토리가 짜여지는 거예요.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전부 다 오늘 말씀 그대로예요. 과장된 거예요. 본 것을 의지해서 과장된 겁니다.
어렵지만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봤다는 것은 무엇을 봤다는 것인가? 자연의 변동, 자연의 변화를 본 거예요. 지금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가 본 것은 자연을 본 거예요. 보편적인 것은 자연현상이 보편적인 겁니다.
그래서 사람한테 이야기할 때 기분 안 나쁘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날씨 이야기부터 먼저 끄집어내는 거예요. “오늘 날씨 참 좋지요?” 북한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가 이야기할 때 먼저 날씨 이야기부터 하는 거예요. “요즘 봄날에 꽃이 피었지요.”
그런데 이 자연은 누구 말 듣느냐 하면, 하나님 말 들어요. 그런데 인간이 본 것, 자연의 변화를 본 그것을 억지로 누구한테 끼워 맞추느냐 하면, 내가 이 땅에서 안 죽어야 될 이유를 설명하는 용도로써 자연에 있는 모든 변화를 자기한테 끼워 맞추는 겁니다. 억지로 가져오는 거예요. 이게 과장된 것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문제없다고 생각하세요? 자연은 내 말 듣는 게 아니고요, 자연은 누구 말 듣느냐 하면, 하나님 말 들어요. 자연은 죽을 인간 말은 듣지를 않아요. 코로나 19는 하나님 말 듣지 인간 말을 안 들어요. 어차피 인간은 죽음이라는 보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사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사적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거예요.
따라서 사적인 것을 계속 언급하고 우리 집 양말 공장 한다, 우리 집 주유소 한다, 그 자체가, 그 말 자체가 네가 죽을 이유다, 그 말입니다. 그 말 끄집어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사적인 것이 나왔기 때문에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죽음이 더 세니까. 우리보다 더 센 분을 만나야지요. 시시한 인간들 만나지 말고요.
내러티브(narrative), 서사구조라 하거든요. 보통 이야기 끄집어내는 것, 개인적인, 사적인 역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사적인 역사 그 스토리를 안 벗어나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다면 이 자연은 하나님의 말을 들을 때 본문에서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라고 했는데 이 육체가 어디에 포함되어있느냐 하면, 자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물의 신체, 들풀, 그리고 인간의 육체, 모두 한꺼번에 테두리 쳐서 그게 자연이에요, 대자연. 별들의 움직임, 달의 일그러짐, 해가 아침에 뜨는 것, 그리고 내가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것, 전부 다 한통속입니다. 다 한통속이에요. 다 피조세계예요. 여기에 천사가 나오지만 천사도 피조세계예요. 그 자연을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왜 없겠어요? 있습니다. 자연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방법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자연을 설명할 때 뭘 개입하느냐 하면, 죽음을 개입하는 겁니다. 죽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이 자연은, 이 대자연의 변화는 전혀 해석되지 않습니다.
이점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알려준 바가 되었어요. 출애굽기 1장 16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요셉이 알던 애굽왕이 죽고 난 뒤에 그 후임 왕이 아주 폭군적인 왕이 등장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법을 만들어서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남자, 아들 같으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둬라. 벌써 이스라엘은, 그 이스라엘의 사적인 환경이 죽음과 결부된 그러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 뜻을 전하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둬라. 죽일 때 어떻게 죽이는가?
22절에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다 언약을 심어버려요. 그러면 언약 바깥에 있는 애굽의 왕은 죽여라, 강에 빠트려서 죽여라, 그렇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그 죽어야 될 강에서 건져 내는 집단이 이스라엘이에요.
어려운 것이니까 잘 들으세요. 자연을 통해서 인간들은 뭔가 수상한 세력과 결탁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한 자기를 숭배하기 위한 스토리를 만들어요. 소설을 쓴다고요. 그 소설은 나만 살고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남은 죽일 수 있는 그러한 식으로 대자연 속에 작동하고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오느냐 하면, 그들이 하는 짓과 극히 대조가 되는 일을 해요. 너희들이 자기 자신을 빛내기 위해서 죽이는 자를 도로 죽음에서 살려내는 식으로 이 자연을 이용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고, 그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계속 보게 되면 인간이 하는 모든 종교라는 것, 과학이나 철학 이 모든 것들이 자기 민족의 스토리와 관련되어 있고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자연을 이용해서 나 잘났다, 그걸 하기 위한 재료로 자연변동을 이용하는데 출애굽기 8장 18절에 보면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은지라.”
이것은 뭐냐 하면,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세 번째 재앙을 내리려고 할 때입니다. 애굽나라에서 제시하는 그 술객들, 요새 같으면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엘리트층 과학자들이에요. 과학자들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 하면 자연 속에서 반복되는 질서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오로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이나 국가의 스토리를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사람 그게 과학자에요.
과학의 정의를 다시 내리면 과학이란 뭐냐? 자연 속에서 특정 질서를, 원칙을 뽑아내서 인간이 필요한 인간이 더욱 존재하고 보존하는 데 유용하게 써먹을 것을 탐구하는 사람이 과학자예요.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채택하느냐 할 때 그 채택된 것은 우리의 생존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 것들만 진리라는 이름으로, 진리라는 이름이 너무 일방적이에요, 그 진리라는 이름으로 끄집어내는 것, 그 일을 해야 되는 사람이 바로 과학자입니다.
백신을 만든다든지, 영양제를 개발한다든지, 기상예보를 한다든지, 미래를 예측한다든지 하는 이 모든 것,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인류를 위하여, ‘위하여’에요.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정부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브라함 링컨이 이야기한……, 그것도 그냥 링컨이 아니고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거기다 왜 갖다 붙였는지, 아브라함 링컨이에요, 아브라함 링컨.
이 땅에서는 그런 정부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것은 성경에 합당한 겁니다. 부합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땅이 갈라진다는 거예요. 그 땅이! 이 바위, 단단한 바위라고 붙들었는데 보니까 그 바위가 쪼개지고 무너지는 조짐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후다닥 그걸 “야, 바위 갈라진다. 빨리 옮겨.” 해서 다른 바위 든든한 바위를 붙잡았다는 말이지요. 붙잡으니까 그 바위가 또 krevas, 그 틈이 갈라지는 거예요.
저쪽 바위도 무너지고 이쪽 단단한 바위도 무너지고. 이산에서 뻐꾹~, 저 산에서도 뻐꾹~, 인간이 할 수 있는, 밀착해서 붙드는 바위라는 바위는 모조리 다 무너지는 거예요. 이게 이 세상입니다. 인간은 땅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붙잡을 수밖에 없고, 그게 인간의 한계인데 붙잡으면서도 자기를 위해서 붙잡지요.
하지만 그 바위와 이 땅과 모든 세상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사는 데 급급해서. 죽는 이유를 알아야 되는데 살 이유만 찾는 거예요, 살 이유만. 그래놓고 그게 진리고, 과학이고, 철학이고, 문학이고 다 그런 거예요. 그게 종교고.
외국애들 하는 노래가 있어요.
Falling down! Falling down!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My fair lady!
그 노래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런던의 다리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애들이 줄넘기 하면서 부르는 노래에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이것은 한국이고요.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My fair lady!
이건 또 뭐예요? “나의 아름다운 숙녀여!” 그게 왜 나오느냐 그 말이지요. 그 무너진다는 것,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1, 2절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인간들이 사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봅니다. 자연이 보이니까 보고 그걸 과장되게……, 과장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거기다가 스토리를 쓰는 게 과장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집어넣는 게 과장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과장이란 뭐냐? 미리 예측하는 게 과장이에요. 미리 예측 하면 안 돼요. 왜 예측하면 안 되느냐 하면, 우리의 예측은 이미 확정 났습니다. 죽는 걸로.
아까 제가 전도서 7장 1절을 이야기했는데 2절을 마저 보시면 이해 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이게 1절이지요. 죽을 때 축하하라는 말이지요. 태어날 때 축하하지 말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된다는 거예요. 내 안에 나 없음이 이미 장착되어 있다는 거예요. 내 있음이 우세한 것이 아니고 나 없음이 내 있음보다 더 우세하고 더 강력하고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지금 살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데 죽으면 문제 해결 되거든요.
그런데 꼭 지금 자살해야 되는가? 자살할 필요 없어요. 그냥 살다 보면 문제 해결 돼요. 애초부터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없는데 문제 해결하려 들지 마세요. 처음부터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한국에 교회가 많잖아요. 거기에 죽으려고 교회 오는 사람들 몇이나 되겠습니까? 죽으려고 교회 오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이 종교라는 것, 철학, 과학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안 맞는 나의 본질을 과장되게 상상해서 그 과장된, 허구적인 나를 지켜보려고 시도하는 것이 바로 종교요 과학이고 철학입니다. 없는데! 그러니 본인이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주님이 보는 그 보편적인 나를 생각해야 될 것인데. 이건 뭐 마귀가 그런 짓 했겠지요.
마귀가 자꾸 사적으로 네 것만 안전빵처럼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 것만 지키기 위해서는 도마뱀처럼 강력한 빨판을 가지고 짝 들러붙어야 산다는 거예요. 인간이 평생에 습득하고 노력하는 것은 뭐냐? 짝 달라붙어야 돼요. 직업도 짝 달라붙는 직업이 있잖아요. 교사, 약사, 간호사, 의사, 판사, 목사, 이건 짝 달라붙어 있어요. 왜냐하면 따박따박이 되잖아요. 통장에 따박따박 돈이 들어오잖아요. 그리고 공무원.
그런데 허풍처럼 사업한다고 은행 대출받아서 돈 들여서 사업하게 되면 이것은 코로나 이런 것 한번 불면 휙휙 다 넘어갑니다. 그런데 빨판 붙여서 짝 달라붙은 그것은 자기가 달라붙은 땅과 함께 다 무너져요. 거기에 내가 갖다 붙인 그 모든 것이 다 붙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자들의 소망은 뭐냐 하면, 내가 약사하고 변호사 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하는 약사, 공무원, 교사, 거기에 딱 달라붙는 거예요. 군인도 그렇고. 연금 나오잖아요. 거기에 딱 달라붙어 있어요. 그러니 남편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하는 일은 남편 감시하는 거예요. 낙지 빨판도 그런 빨판이 없어요. 짝짝 달라붙어 있지요. 참, 그러니 태어날 때부터, 물론 악마가 배후에서 그렇게 작동했지만, 거짓이 아닌 시간이 없었어요. 우리 자체가 이단이고 거짓이에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새삼스럽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발 보편성 있는 이야기 해라. 사적인 이야기 말고, 너 출세한 것 말고, 성공한 것 말고, 보편성 있는 거, 누구나 통하는 이야기, 그것은 죽음 사건이에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죽기 위해서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옥 안 가려고 예수 믿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어디서 또 탈락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3장 36절에서 탈락합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죽으러 가는 예수님을 붙들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질문을 던집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런데 주님은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거예요. “평소에 하는 짓거리처럼 네가 너를 살리려는 질문을 던졌지? 너에서 나오는 모든 질문이 너의 스토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너의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그걸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것 때문에 예수라는 나를 붙들고, 괜찮아 보이는 나를 붙들고 지금 질문하고 있지? 그치?” 묻는 겁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네가 올 수 없는 곳에 간다.” 이게 딩동댕, 이게 정답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단은 뭐냐? 자연을 통해서 신과 교류한다는 이 모든 것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이단이에요. 교회가 이단이라고 보면 돼요.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끊어져 있어요. 모든 게 끊어져 있습니다.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그것……,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그것을 함축해서 1차원적 존재라고 하는데요. 표면적 존재라고 해요. 바위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요. 그래서 바위 무너지면 같이 딸려서 바다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수학에서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는데 사람들이 숫자 수를 쓰면서도요 이 수가 자기 자신의 실정, 신세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은 잘 몰라요. 자, 곱하기가 뭐냐, 더하기가 뭐냐, 빼기가 뭐냐, 할 때 사람들은 그 자체, 그걸 어디서 써먹을 것이냐, 그것은 아는데 그 자체가 뭔가를 몰라요.
숫자가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마이너스가, 숫자가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게 일차원적 인간의 사고방식의 한계에요. 3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 안을 뜯어보게 되면 ‘1 × 3’이 3이에요. 어렵더라도 그냥 들어두세요. 그냥 3이 아니고 ‘1 × 3’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숫자는 카운트, 하나, 둘……, 헤아림으로 되는 거예요. 헤아릴 때 누구 좋으라고 헤아리느냐 하면, 나에게 이익될지 싶어서 하나, 둘, 헤아리는 겁니다. 그래서 ‘1 × 3’은 뭐냐 하면, 1과 같은 1을 세 번 양으로 더하는 것을 가지고 3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플러스 3이에요. 제가 지금 방언하고 있는 겁니다.
-(마이너스) 3은 뭐냐? 숫자 자체가 어떤 방향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앞으로 가이소, 뒤로 가이소. 앞으로 가던 것이 뒤로 가는 것을 갖고 마이너스라 해요. 흔히 아는 -(빼기)가 마이너스가 아니고 방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마이너스가 싫어요.
왜냐하면 한 줄로 이어지는 나의 스토리, 나의 소설책에서 나는 지금껏 살아왔다. 하지만 살아온 그것으로 족하지 않고 자꾸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자꾸 +(플러스) 쪽이거든요. 그래서 이 플러스 되는 쪽에 있어서는 어떤 조건을 받아들이냐 하면, 이 대자연은 나의 +(플러스), 내가 점점 더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조건은 대자연 안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는 겁니다.
이 말은 대자연이 Falling down, 무너져 버리면 그 안에서 점진적인 성장과 발전과 희망을 갖는 그것도 같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플러스를 좋아하고 마이너스를 싫어하는 거예요. 플러스는 누가, 악마가 제안하는 거예요. 악마가! 마이너스는 누가 하느냐?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마이너스)에요 -(마이너스), 빼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41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41장 25-26절입니다. 열 일곱 살 때 애굽에 팔려간 그 요셉의 그 시절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해니 그 꿈은 하나이라.”
그러니까 아주 튼실한 암소가 왔을 때 사람들은 좋아하잖아요. 이것은 +(플러스)라 여겼지요. 그러나 그 +(플러스) 이야기가 스토리의 끝이 아니고요. 27절에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칠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해 흉년이니……” 그 뒤에도 죽 나오는데 시간관계상 생략하고요.
뒤엣것, 처음의 것을 뒤에 나오는 흉측한 소, 흉측한 이삭이 앞엣것을 다 무효로, 제로로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제시한 인간현실, 참담한 현실의 본 모습입니다. 풍성하다, +(플러스)다, 많다, 좋다, 그것을 붕 띄워놓고 뒤에 나오는 처참함과 저주, 그리고 죽음, 심판, 이것이 앞엣것을 다 무효화시키는 겁니다.
서커스에서 공중곡예 하는 남자, 전문가라 아주 잘 하는데 그 남자가 공중곡예, 쇼를 벌이는데 그 앞에 있는 관객 중의 어떤 여자를 보는 그 순간 마음이 꽂혀 버렸어요. 갑자기 사랑의 빛이 확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여자 만날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놓쳐버린 거예요. 그래서 줄을 그만 놔버렸어요. 밑에는 어떤 안전그물도 없어요. 그대로 15미터의 공중에서 모래 깔린 그 땅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설교시간이니 답변은 따로 마시고요. 질문하겠습니다. 그 남자 죽었게요, 살았게요? 자연과학법칙, 철학이나 종교법칙에서는 그 남자는 땅에 떨어져 그대로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떨어져서 모래더미에 접촉하는 순간 모래더미가 블랙홀이 되어서 지면보다 더 낮은 구멍이 되면서 쑥 빨려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죽을 리가 없지요. 동시에 관객인 그 여자도 빨려 들어가니까 거기에 신세계가 열렸습니다.
<태양의 서커스>라는 그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이에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죽었다고 여겼는데 그 밑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블랙홀이, 화이트홀 웜홀이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지요.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는 1차원인 거예요. 땅 위에 일차원적으로 개미처럼 여기서 저기까지 하나밖에 몰라요. 이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전혀 모르고 자연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이 말은 나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어요.
주님께서 골로새서에서 하는 이 모든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너는 너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감히 십자가 예수 믿고 천당 갈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은 일차원적 구조인데요. 블랙홀이 되어버리면 이게 또 다른 현실이 포개져 있는 겁니다. 중첩이라 하는데 다중 현실이 포개져 있어요.
출애굽기 10장 12절에서, 애굽나라에 재앙이 떨어질 때 애굽나라 술객들, 과학자들이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변동이 없는, 변함이 없는 대자연 속에서 우리 애굽나라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희망적으로 번성할 수 있을까를, 그 법칙을 끄집어내서 곡식 심을 시기에 제대로 곡식 심고, 고기 잡을 때 제대로 고기 잡을 수 있게 하는 그 일을 한 거예요.
오늘날 과학적으로 본다면 원시적이기 한지만 그 나름대로는 과학적입니다. 그들은 별을 관찰했어요. 별이 궁금해서 관찰한 것 아닙니다. 별이 일정한 자리에 찾아오게 되면 경험상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어떤 곡식을 심어야 그 곡물의 수확량이 많아진다는 것, 그 지식이 누적되어 있어요.
그런데 애굽나라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요. 왜냐하면 애굽나라는 이스라엘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겨야 될 민족이에요. 반대로 이 세상 나라는 나를 섬기는데 평생을 다 보냅니다. 배후에 악마가 그 짓하게 했어요. 나를 섬기는 것, 그걸 가지고 천사 숭배 또는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를 섬기는 이 자연 속에서는 단절이 되어 있지 않아요. 모든 것이 연결이 되어 있어요. 안 죽고 갈 수 있는 천국을 그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유포시킨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성도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들 속에 죽음을 탑재하는 거예요. 미리 와서 언약적 죽음을 탑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있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있는 나라만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나를 주님으로 바꾸는 작업을 주님께서는 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표면적 존재가 아니고 무너지는 바윗덩어리에 헬리콥터를 띄우는 겁니다.
그 헬리콥터는 뭐냐? 피 묻은 헬리콥터에요. 그 헬리콥터가 모든 이 세상을 저주와 지옥과 심판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성도가 사는 방법은 뭐냐? 그 저주와 심판을 감수하고 그 헬리콥터에 올라타면 되는 거예요. “나는 저주받아도 쌉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고 그 헬리콥터에 올라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피만을 자랑하게 될 겁니다. 유일하게 과장되지 않은 것은 율법이에요. 골로새서 오늘 본문 앞에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새로운 성도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지요. 14절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겁니다. 악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악함을 아는 자가 이기는 거예요. 내가 악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이것은 내가 못 고쳐요. 과학 세계에서는요, 분자식, 분자구조가 바뀌어야 변화한다고 하잖아요. 성도에게는 “가만히 있어라. 그냥 가만 있되 죽기 위해서 태어났음, 그 상태를 유지해라.” 그게 바로 사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왔는데 오늘 설교 내용을 정리해서 니고데모에게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찾아왔다. 그 말은 자기 인생 소설의 마감을 화려하게, 그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서 내가 살아온 것 중에서 예수 만나서 천국 가겠다, 라는 시도로 찾아온 거예요. 자기 스토리, 자기가 주인공이 된 소설을 포기 못하고 온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중간에다가 단절을 집어넣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너의 서사구조, 너의 스토리, 네 인생 역사를 끝장내겠다는 겁니다. 끝장낼 때는 끝장내는 그 근거가 있어야 되지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완성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자체가 인간을 저주하는 거예요. 네가 죽어야 될 이유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죽기 전에 죽는 이유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죽는 이유를. 율법에 의하면 내 잘못으로 죽는 게 아니고 죄에 이미 사로잡혔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과 처지에 있는 거예요. 이걸 안다는 건 성령 받아야 알아요. 이건 성령 안 받으면 몰라요.
성령 안 받으면 자꾸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고 합니다. 개선해서 더 나은 결과로서 자기 소설을 아름답게 마감 지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은 없어요. 우리 안에서 희망을 도려내야 됩니다. 율법으로. 그런데 그 율법 중의 율법, 율법의 마감이 뭐냐? 십자가에요. 피입니다. 피만이, 바위에서 무너지는 모든 자를 피만이 건질 수가 있어요. 헬리콥터에서.
이 자연 세계, 이 대자연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 흘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 때는 모르고 신약에 와서야 아는 거예요. 사람들이 얼마나 사적이고요, 개인적인 스토리에 집착해 가지고 자기 잘난 맛, 자기 과거 멋있게 산 그 인생 자랑질이나 하려고 살아가는데, 대자연 속에서 나도 이 대자연처럼 평온하게 마감하고 싶다 이런 생각 하는데, 그런 증거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보게 되면 그게 여리고 성이에요. 그 여리고 성 주민들 보세요. 각자 자기 인생 스토리 있고요, 소설 있고, 각자 개성이 있어요. 그러나 여리고 성 무너지니까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그래서 문학책을 안 좋아해요. 소설책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소설은 전부 다 자기 이야기에요. 나는 지옥 갑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안 나온다니까요. 전부 다 계몽이에요. 한 수 가르치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주제도,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여리고 성 주민들 있었지만 주께서 침탈했을 때 딱 한 가정만 살았습니다. 기생 라합의 가정. 라합은 그렇게 꼭 직업이 붙어요. 인간 같지도 않은 여자가 구원받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작살 내는 그 적군의 사람을 영접했어요. 나를 파멸시키고 너는 무너져야 돼, 라는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도리어 천사로 여기고 환영을 했다는 말이지요.
이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그 놀라운 그것을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라 해요. 그리고 그 숨겨준 그것을 가지고 행함이라 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그 예를 들 때 기생 라합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평소의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평소의 우리 삶은 자기 스토리와 소설을, 늘 아름다운 기억을 찾아서 그걸 소설화시키고 구성하려 하는 겁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이게 지금 복음 안 듣고요, 성경 안 보고, 전도서 생각 안 하고요, 죽는 날이 출생한 날보다 낫다는 그런 소리 하나도 안 듣길 때 어떻게 살아갑니까?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이 문세 노래 가사처럼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 돌아보면서 ‘마지막 커튼이 나에게 내려올 때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다. 마이웨이~’ 이런 식으로 모든 주변, 문화와 모든 것이 진짜 나를 감추는 아주 발악 같아.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안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자기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어요.
흔히 이런 인간의 본성밖에 없는데 그러면 무슨 수로 이걸 바꿀 수가 있느냐? 창세기 49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개입이 나옵니다. 요샌 성경 읽으세요, 하는 그것도 얼마나 미안한지. 성경에 관심도 없는 사람보고 그런 것 같아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 되고 난 뒤에 야곱이 요셉 따라 애굽에 갔거든요. 야곱이 아들 빽 믿고 마지막 여생을 편안하게 삽니다. 그럴 때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불러다 복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기 49장 17-19절에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이게 어긋맞기입니다. 어긋맞기. 두 개의 층, 단선밖에 없는 것이 세상인 줄 알았는데 거기에 두 개의 층이 있었어요. 왜 층이 있느냐? 이걸 어긋맞기 하는 거예요.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이 땅에 와서 아무도 찾지 않는 가장 낮은 곳에 오신 하나님이 전부 다 높이 되려고 환장한 악마에 속한 이 인간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뒤집기를 하는 거예요.
어린 자가 큰 자가 된다. 인간에게 무시당한 자가 주가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과장된 것, 겸손한 것, 천사 숭배, 이 모든 것을 뒤집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오직 과장 되지 않은 것은 율법이고, 그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고, 십자가의 완성은 그 피고, 나는 이 땅에서 가장 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죽었다.
그 죽음을 탑재하라. 그 죽음을 장착하라. 그러면 미천한 네가 베드로처럼 천국에 우리 처소가 마련되어 있음을 비로소 이해할 겁니다. 이것을 통과할 때는 반드시 제로로 통과해야 돼요. 공백, 나 없음을 경유 해야 되거든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소위 살았다고 여기는 것을 죽이시면서 그 죽이심 안에 예수님의 살아 있음을 장착시켜서, 예수 그리스도가 의인인 것처럼 우리를 의인 되게 하셔서, 무너졌도다, 세상이 다 무너지는 이 세상에서 헬리콥터 타고 유유자적하게 피 자랑하면서, 날개 팍팍 날리면서 낮은 곳까지 당당하게 날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십자가 왜 있는지, 율법은 왜 줬는지, 우리는 왜 늙어가는지, 다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는데 우리는 그딴 것 다 버리고 그저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천하에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 땅,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불로서 다 타버리고 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