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배달원
2021년 4월 25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20-23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인간에게는 타고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해도 변경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온전치 못함을 그대로 대물림 되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죽음 아담의 시신을 후손들이 그대로 짊어지고 더 후대까지 배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인간들의 실정을 인간 당사자가 전혀 모르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혀줍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19) 즉 인간은 주님과 떨어지는 순간, 이미 대책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 본인이 결코 ‘머리’가 아닙니다. ‘머리’는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머리로 인정하여 자신이 ‘나 다움’이 되는 것에서 온전함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주님이라는 머리로부터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들이 저지르는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전치 못한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곧 인간들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노력들을 ‘초등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 세계의 학문이란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 안에서 인간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법칙을 뽑아내는 것을 뜻합니다. 옛날에는 과학과 철학이 하나였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분화되었습니다. 과학은 자연세계 안에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라면 철학은 인간들의 삶의 의미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그 어떤 노력도 이사야 1:18에 나오는 말씀 앞에서 무용지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로 ‘논쟁하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즉 온전치 못한 인간들이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너 철학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그 온전치 못함이 온전하게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열된 일들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가능성’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일으켰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실력을 신뢰하려고 합니다. 달리 믿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겸손’입니다. 겸손이라는 미덕에 희망겁니다. 왜냐하면 겸손 정도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인간상은 이 겸손마더 여지없이 불가능한 것임을 보입니다.
출애굽기 8:32에 보면,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9:17,35에 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자고하고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여기에 등장하는 ‘완강’, ‘자고’, ‘강퍅’은 모두 겸손의 반대쪽의 말입니다. 바로가 원래 성질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니 인간들의 본성과 근성이 이런 강퍅으로 드러난 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인간들 관계에서 무리하게 교만떨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사회생활을 도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의 본성 자체가 절대로 겸손하지 못하고 강퍅하다는 사실을 들추어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이 옛적에서부터 누구의 한 인격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죽은 아담’입니다.
아담의 죽음은 악마와 결부되어있기에 벌받아 죽은 겁니다. 이 아담조상의 죽음을 육의 모습으로 매일 재현하고 있는 실정이 오늘날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삶입니다. 자신이 행하지도 않는 일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아담에게 담겨진 죽음과 저주의 무게가 고스란히 오늘날 모은 이에게 덮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원한 일이 아닙니다. 아담의 죽음으로 야기된 수치심도 그대로 오늘날 후손인 우리의 몫으로 넘어왔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일상의 일이란 아담의 수치를 허급지급 덮는 일입니다.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은 늘 자신을 견고하게 지탱해야 함에 쫓기는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복음 전달자는 자신의 무너짐을 반깁니다. 왜냐하면 온전치 못함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아예 자신을 죽여 없애는 것이 복음의 일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 전달자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 쓸모없는 자’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쓸모없음’이 장착되는 식으로 성도는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구원은 성도의 임무가 아니라 주님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출현은 예수님의 자기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실패를 당연시해야 합니다. 자신이 짊어진 아담의 시체가 자신의 운명임을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으로 인한 악마의 공격을 맞선 주님의 무기가 됩니다. 악마는 죽은 자에게는 더는 뜯어먹을 것이 없는 법입니다. 아담과 결탁했던 악마는 오늘날도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다룹니다. 이사야 14:12-13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7:8-9에서는 무역해서 막대한 부를 모은 두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마음씨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전히 네게 임하리라”
우리의 죽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살펴서 파악되지는 않지만 엄연히 실존하셔서 찾아온 그 십자가의 피용서에 대해 범사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더 이상 나의 계획으로 인해 울지 않고 감사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골 2장 19-23절(시체배달원)21042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19-23절입니다.
골로새서 2:19-23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사도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세상을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봤습니다. 그것은 18절에 보면 천사 숭배, 일부러 겸손한 것, 저가 본 것을 의지하고 육체의 마음을 좆아……, 육체의 마음이니까 영혼이지요. 영혼을 좆아 헛되이 과장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신비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그런 쪽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초등학문에 나와 있는 그런 규칙 같은 것, 종교적인 규칙, 법도, 그리고 자기를 학대하는 것, 그래서 자기 몸을 23절의 말씀처럼 괴롭게 하는 것, 그런 식으로 해서 자기 육체를, 자기 몸을 괜찮은 존재로 바꾸려고 하는 두 가지의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신비주의인 것도 아니고, 자기를 학대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안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당신은 무엇에 근거해서 감히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것을 평가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19절에 보면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머리 부분이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거예요. 머리가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예요. 그리스도가 없이 자생적으로 자기 스스로 살려고 하니까 기껏 해봐야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 겁니다. 신비적인 것에 몰입한다든지 자기를 잘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 몸을 괴롭게 하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서 엄한 규칙에 복종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 두 가지가 둘 다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 긴 이 말, 상당히 긴데요,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온전치 못한 것을 아주 억지를 부리면서 온전한 것으로 위장하는 광기를 부리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의 일이 일어났다는 말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온전치 못한 거예요.
그리고 온전치 못하면 온전치 않게 살면 되는 겁니다. 이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게 안 어려운데 이상하게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온전치 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극도로 그걸 기피합니다. 발광을 해요. 아주 발악을 합니다. 온전치 못하다는 비난을.
그래서 온전치 않게 살지 않기 위해서 어떤 수완들을 다 동원하는 겁니다. 자기가 스스로 온전치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 오는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보다 자기를 남보다 더 온전한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어서 천당 가려고 교회 오잖아요.
벌써 시작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부질없는 짓거리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낱낱이 다양성 있는 그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20절에 보면 나옵니다. “너희가 세상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여기에 초등학문이 나오는 거예요. 초등학문에 대해서 지난 번에 설교를 했습니다.
초등학문은 고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어떻게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느냐에 동원되는 학문, 그걸 초등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 보기에는 초급, 초등학문이에요. 사도바울 보기에는.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다입니다. 18절에 보면, 저가 본 것을 의지하니까 인간 눈에 보이는 대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무시하지 못하고 그 세계 속에서 늘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달이 보이고, 별이 보이고, 해가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기가 농사지을 밭이 보이고 논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기가 키워야 될 자식들이 눈에 밟히고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속에서 어떻게 살아볼까 싶어서 애쓰는 것, 그게 뭐가 잘못이냐 하는데 사도바울은 그게 초등학문이라는 거예요.
“네가 네 힘으로 네가 살려고 애쓴다는 것, 그것도 자연에 갇혀서 자연이 현실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어쩔 거야? 그것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거야?” 그렇게 묻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인간들이 살아가려고 버티기 위해서 했던 그 초등학문의 부정성을 부각하는데 그 부정성을 부각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 법을 지키면 되겠지, 내 몸을 학대하면 되겠지, 천사를 보면 되겠지, 이런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 그 역량을 신께서 좀 존중해주고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는 왜 졌는데? 내가 잘났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 뽐내려면, 그것 뽐내 가지고 하나님께 오려면 그러면 십자가는 왜 졌는데요? 구약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하나님 쪽에서 인간세계, 이스라엘에게 시비를 겁니다. 우리 변론하자, 우리 한번 따져보자, 따져보자, 하는 그 내용이 이사야 1장 18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한번 따져볼까, 그런 뜻이지요. 뭘 따지는가?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 말은, “이거 너희들이 할 수 있거든 해봐라. 한 번 따져볼까? 너희들이 할 수 있는지. 진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희어질 수 있는지, 네 재주껏 한번 해 볼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지, 누구만이 할 수 있는지를 한번 따져볼까?”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변론하자, 그렇게 나옵니다.
자기가 죄가 진홍 같다, 온전치 못하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기 쪽에서 손댈 수 없어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요청하는 인간의, 존재의 명분은 이미 정해졌어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미 확정 난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인간들이 뭔가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그 가능성과 자기 행함, 그것과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상태냐 하면, 바로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끊어진 상태, 끊어진 상태에서 기껏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다양한 것, 초등학문, 요즘 같으면 과학과 철학 그런 거지요.
옛날 같으면 과학과 철학이 같은 학문이 되기 때문에 옛날에는 분화되지 않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분화가 되는 겁니다. 어쨌든 초등학문이 있다는 이것은 뭐냐 하면, 위에서 내려오는 힘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그 물이 끊어져 버렸어요. 메말라 버렸어요.
위에서 끊어지다 보니까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그대로 다양하게 내놓는 게 기껏 이 정도에요. 신비주의, 그리고 법 지켜서 나는 바르게 살았다. 기껏 이 정도에요. 왜? 본인이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그런 거예요.
여러분이 서양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분은 아니지만, 서양철학이 뭐냐?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을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어떻게 맞춰드릴 수 있는가의 역사가 서양철학의 역사에요. 하나님이 먼저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는데,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롭기를 원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의 따질 수 있는, 동물과 너무나 차이 나는, 동물보다 뛰어난 인간의 자질과 본성과 성격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고의 의로움과 선함과 도덕과 윤리를 우리가 맞춰가는 모든 방법론에 대해서 최선의 지혜 진리를 뽑아내자. 그게 서양 역사의 철학이고 과학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질서 있게 자연을 만들었다. 그러면 자연 속에 하나님의 질서가 있을 것이고 그 질서를 뽑아내면 된다는 거예요. 그 질서를 뽑아내서 그 질서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은 죄용서는 기본이고 이 땅에서 풍요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원칙 같은 것, 네가 더 자연을 이용할만한 것들을 이미 허락하셨다는 그것, 주께서 준비해놓은 선물 같은 것을 뽑아내서 지금보다 더 풍요하게 살 수 있다, 라는 그 희망, 애씀, 그런 것이 서양철학, 과학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놀지 말고 뽑아내자, 그 원칙을 뽑아내자. 그래서 로켓 가지고 화성까지 간 거예요. 지구가 온난화로 망해버리면 화성으로 이사 가서 살겠다고요. 그게 신이 주신 지혜라는 것,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신 지혜라는 겁니다.
따라서 무지한 자는 계몽하고, 이걸 가지고 계몽주의라 하지요, 깨우치고, 그걸 가지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구금 하지 않도록, 그래서 나온 것이 노예해방이고, 모든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고. 일한 사람이 부자 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게 자본주의고.
오늘날 이 시대가 전부 다 초등학문 속에,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오는 그 주홍같이 붉은 죄를 양털같이 희어지는 그것하고 아무 상관 없는, 그것이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우리 식대로 한번 살아보련다, 애쓰는 그런 노력, 그런 노력이 오늘날 우리 자신들을 만든 겁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따져서 정확한 것, 예측 가능한 것, 그런 것들만 공부하니까 17세기, 18세기, 특히 19세기부터는 윤리 도덕이 밀리니까 철학자들이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과학의 그 냉혹함과 그 차가움에 대해서 도저히 참지 못해서 철학자 중에서 특별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겁니다.
과학이 냉하고 차갑다는 말은, 인간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인간을 분해해 버리거든요. 해부를 해요. 전에는 인간 됨, 신에게 기도하고 겸손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그런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과학적으로 따져보니까 인간은 60개 조의 세포로 되어 있고, 그 세포를 활성화하는 그것이 건강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선한 것이라는 거예요.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Zion.T가 이야기했지요.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전에는 기도했잖아요. 이제는 과학으로 의학으로 안 아프게 하는 방법을 얻었으니 이것도 신의 지혜가 아니고 뭐냐,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너무 냉혹하고 너무 차가워요. 기계적으로. 세상이 전부 다 양적으로 측량하니까. 돈이 있냐 없냐, 그것으로만 따지니까 사람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후설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진리, 과학에 진리란 없다. ‘3×5=15’ 그게 진리냐? 너는 뭔가 빠트렸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빠트렸다. 그것이 뭐냐? ‘3×5=15’라는 것을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느냐? 네 의도가 너를 불행하게 한다. 이걸 후설이라는 철학자가 이야기 했어요. 지금 초등학문이 성경에 나오니까 안 들어도 그만인 철학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현상학이라. 저 자연법칙이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까부터 생각하지 말고 도대체 나는 나를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 의도가 옳은지 그른지부터 따져본 적이 있느냐, 그거에요. 내가 이공계 선택한 그 의도, 그게 옳은 선택이라고, 쁜 선택이 아니라고 결정한 그 기준을 내봐라, 그게 옳았다는 기준을 내봐라. 그러면 네가 놓친 네 자아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 자아 문제를 현상학이라고 하고요 그게 인간의 마음, 영혼이나 의도 말고 인간의 몸 자체가 뿜어내는 의도, 이걸 몸의 현상학 메를로 퐁티라고 하는 철학자, 하여튼 이름도 어려워요, 그 학자가 그 이야기했고요. 그 뒤에 인간의 자아가 중요하고 자아가 중요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얼마나 기술이 발달하고 얼마나 과학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존재의미가 뭐냐,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해석학이라 하는데 그것은 하이데거예요. 하이데거라는 독일 철학자가 해석학을 들고 나선 겁니다. 그 해석학을 통해서 인간이 사는 의미가 뭐냐? 과학이 아니다. 그러면 뭐냐? 시(詩)다. 인간의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자기 속에 있는 열불 나는 것을 시로서, 운문으로서 언어로 표현할 때 그게 사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 주고 맛있는 것 줘도 사람이 말 못하고 마스크로 입 닫아버리면 못산다는 거지요. 말을 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뒤에, 하이데거의 해석학 이후에 인간의 의미가 사회에 나가면 하나의 숫자로 취급되고 하나의 질량으로, 기계로 취급되기 때문에 사회의 무의미성 앞에서 인간의 의미는 한계가 있다. 이게 라캉이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뭔가 몸부림을 쳐요. 뭔가 몸부림을 치는데 뭐가 끊어진 상태냐 하면, 십자가가 끊어졌어요. 주홍같이 붉은 죄가 아무리 노력해도 양털같이 희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보면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요. 흑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그래서 “할 수 없지? 너희는 할 수 없어. 왜?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악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은 끊어진 상태에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모든 힘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부터 십자가에 다 이루심부터 내려오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초등학문이라는 거예요. 뭔가 온전치 못한 인간이니까 뭘 건드려봐야 다 온전치 못한 거지요.
그래서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어떤 인간치고 온전한 인간은 아무도 없다, 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와서 실제로 체험해 보니까 실제로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에 합당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했던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전부 다 자기 밖에 몰라요. 자기의 의무감으로 자기를 조성해 나가고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내가 나답게 되는 의무감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성도는요, 자신의 의무감으로 성도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의무감으로 성도가 된 거예요. 나의 요구사항이 아니에요. 주님 자기의 계획에 의해서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초등학문 속에 있는 인간들은 자의식에서 못 벗어나요. 같은 인간들끼리는 잘 통하지요.
자의식에서 못 벗어나서 항상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성공/실패, 성공/실패,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실패하면 안 되지. 왜 실패 하면 안 되는데요? 이유는 없어요. 소시지하고 막대자석의 차이점이 있어요. 소시지는 어느 부분을 끊어도 소시지가 나와요. 그런데 막대자석은 어디를 끊어도 남극 북극, S극 N극으로 나눠어져요. 어느 부분을 끊어도.
인간 자체를 아무리 끊어봤자 항상 거기에는 선과 악, 항상 대립 되는 요소가 같이 갈등을 일으키는 그런 처지에 있어요. 20대에 나는 차만 사면 그리고 아파트만 사면 갈등이 없다. 30대 되어서 차도 사고 아파트 사보세요. 또 갈등이 생기지요. 40대 되어서 애가 아직 말도 못하는데 애 학교만 들어가면 이제 우리 집은 아무 걱정 없다. 학교 들어가 보지요. 자아 찾기 한다고.
요새는 사춘기가 왜 초등학생 때부터 오는지. 자아 찾기 한다고 말도 안 듣고요. 새로운 고민이 또 생기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인간이 뭔지를 몰라서 그래요. 노래에 이런 노래 있지요.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시작부터가,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본다~”
그거 왜 봅니까? 왜 보느냐? 저 빠따에 누워~, 발음 조심해야 돼요. 저 바다에 누워 나는 한 마리 물새가 된다. 왜 갑자기 물새가 돼요?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내가 원치 않는 물건을 배달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원치 않는 물건이 뭐냐? 아담의 시체입니다. 죽은 조상을 배달하다 보니까 내가 원치 않는 중량감이 있어요. 이 시체가요. 아담의 시체는 이게 죽어가는 시체에요. 죽어가는 시체, 거기에 수치스러움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배달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쑥 들어왔어요. 그걸 아담의 형상이라 하는데 아담의 형상을 계속해서, 평생 내 인생 다 가도록 그걸 배달해야 돼요. 그 배달하는 아담이 죽은 아담이거든요. 죽을 때는 죽는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조상 아담이 무너진 거예요. 인간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흙으로 끝난 거예요. 바위에서 흙으로 끝나버린 거예요. 얼마나 지저분하고 얼마나 무겁겠어요? 바위를 평생 동안 짊어진다고 해 보세요.
그런데 이 초등학문들, 철학자들, 과학자들이 이들이 우리 조상을 아담을 배달한다고 생각을 못하고 자꾸 짊어진 짐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니까 여기서 자꾸 그 중량에 자기가 주저앉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반발로 철학자나 과학자, 모든 인간의 특징은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을 알고 성도는 무너진 것을 감사해요. 실패하면 안 된다, 가 아니라 실패를 너무나 고맙게 여깁니다. 당연한 거예요. 그 실패를 전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상을 잘못 만났는데 잘못 만날 수밖에 없지요. 그 조치가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이 아담을 죽이는 그 정당한 죽음을 정당하게, 당당하게 그걸 영접하세요.
‘아담 당신이 죽었어요? 그럼 나도 죽지 뭐.’ 이거면 되잖아요. ‘우리 조상 죽었고 그다음 밑의 조상 죽고, 또 죽고, 그러면 나도 죽지 뭐.’ 그 운명, 그 죽은 조상 아담, 그 시체의 중량감을 버리게 되면 나도 같이 없어져요.
그런데 버릴 수가 없어요. 참 애석한 운명이에요. 우리 인간이라는 게. 인간이 알고 싶다. 이제 알려드릴게요. 배달원이에요. 배달원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셨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옛 아담 자리에다 그걸 죽이고 거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영생, 죽지 않는 영원한 둘째 부활의 그 사신 예수님의 형상을 성도에게 집어넣어서 죽을 때까지 배달시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 배달부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짬뽕 국물 다 쏟아집니다. 주님의 주신 그 십자가 복음이 쏟아져요. 그게 귀중한 거예요. 내 가 몇 년 동안 살았다, 가 귀중하지 않습니다. 내가 운반체로서 운반 해야 될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 인간의 목숨과 다른 영생, 생명, 영광스런 그 모습이 귀한 거예요.
그래서 복음인 겁니다. 내가 잘났다, 가 아니라 내게 짊어진 이것이 그냥 세상적인 초등학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를 목 졸라 죽이고 헉헉거리고 힘들게 하는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고진고래(苦盡苦來)에요. 고진감래가 아니에요. 고생 뒤에 낙이 오는 게 아니라 고생 뒤에 고생이 와요. 의사들 보세요. 실컷 고생해 놓고 개업하면 또 고생하잖아요.
이런 사도바울의 복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사도바울에게 감사할 것이 아니고 주님께 감사하지요. 주님께 얼마나 고마운지요. 사실은 고마운 이것이 참 죄에서 태어나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기껏해야 저 바다에 누워서 한 마리 물새 될까, 그것밖에 모르는,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기껏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고, 뉴스에서 배운 것이 전부 다 그거예요. 눈에 보이는 게 다다.
그러나 커피 휘젓고 나서 그 빈 수저를 컵에 놓고 한 주간 지나 보세요. 거기에 곰팡이 피지요. 이 세상에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렇게 깨끗하게 보이는 물속에도 뭐가 있어요. 물론 박테리아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이미 아시지만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 이 말이지요. 인간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약성경, 이스라엘 역사를 허락하신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 역사를 볼 텐데 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꼭 오늘날 불신자들,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겨서 자기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자기 것을 지탱하려고 애썼던 그런 노력하는 대표자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옵니다.
이름은 바로예요. 바보가 아니고, 바보나 바로나, 하여튼 바로 왕, 그 바로 왕이 바로 자기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어디서 팔십 넘은 노인네가 하나 와 가지고 무슨 소리 하느냐? 이런 소리 하고 있다고요. 시작이 이래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그래서 나를 섬길 백성을 너에게서 뽑아낸대. 그러니 보내라.”
이상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 아무리 확인하고 확인해도 미확인 되는 이야기, 인간의 가능성을 아무리 해도 접촉될 수 없는 그러한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미친 노인네구나, 하고 당연히 거절했지요.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를 거절하고 복음을 거부하듯이, 하나님 믿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그것이 전부였던 우리에게 갑자기 어느 날 성령이 찾아와서 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지요.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나의 모든 가능성을 짓밟는구나.’
출애굽기에서 바로 왕이 막돼먹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것은 모세 만나고 나서 대화 가운데 나오는데 오늘 읽었던 본문 가운데 그 대목이 있어요. 23절에 보면 자의적 숭배와 겸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자의적 숭배와 겸손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겸손이라는 말, 겸손이라는 것,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짓이에요? 참 위험한 짓이거든요.
겸손이라 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한테 미련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겸손하면 천국 보내줄 거예요? 마음을 낮추면 천당 보내 줄 겁니까?” 이런 식이에요. 여러분 자신을 그만 괴롭히세요. 그만! 우리 교인들은 전혀 괴롭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그만 괴롭히라고요. 겸손하지 말고 좀 그냥 놔둬요. 여러분 자신을 그냥 내버려둬요.
주님이 놀고 계신 분 아니잖아요. 뭘 또 겸손 떱니까? 나는 죄인이라고 그러지 마세요. 자꾸 뭐 나는 복음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꾸 이런 소리를 하는데 그러면 한번 짓밟아 줄까요? 한번 짓밟아 드릴까요? 짓밟힌다고 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짓밟아 주지요. 짓밟혀도 구원 안 돼요, 인간은!
죄인이라고 했으면 짓밟아도 앞뒤 논리가 맞는데 죄인이라고 해놓고 짓밟아 줄게, 하면 “안 돼요, 안돼요, 안돼요!” 뭐가 안돼요? 앞뒤도 안 맞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 정도의 겸손, 인간이 가능하고 성사될 수 있는 겸손 떨지 마세요. 겸손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훅 가시는 그런 분 아니에요. 외부에서 건드려 줘야 돼요. 외부에서 건드려주는 게 겸손입니다. 그게 신앙이에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의 일종이에요. 그걸 자의적 숭배라 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무슨 짓거리도 다 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하여간 국민소득이 3만 불이 넘는 미국사람들이 인도 그 가난한 나라의 도인 찾아가서 거기서 한 수 배운다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그런 것을 보면요. 아이고, 가관입니다, 정말!
거기 뭐 볼 것 있다고요? 배운다는 그것 다 돈 보고 하는 거예요. 도 닦는 그런 것 있잖아요. 돈 보고 하는 겁니다. 저 깊은 산에 가서 머리 깎고 도 닦는 사람들 있지요. 그 사람들이 제일 신경 쓰는 것은 뭐냐 하면, 전기세 낼 때예요. 주민세 낼 때고. 세상은, 인간은 돈을 초월 할 수가 없습니다. 돈 버는 하나의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무슨 도를 닦아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돈보다 친구가 좋다고 얼마나 친구가 그리웠으면 그런 소리 하지요. 하지만 역시 ‘돈 있는’ 친구가 최고예요. 앞에 뭐가 붙습니다. 사람들이 감사하라고 하는데 자꾸 조건이 붙어요. 성경에서는 조건 없는 감사를 원합니다. 조건이 붙지 않는. “날 구원해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것도 벗어나야 돼요. 날 구원해서 감사하지 마세요. 그냥 감사한 거예요.
내버려 뒀는데, 그냥 흐르는 강물 위에, 흐르는 바람 위에 던져 놨는데 그 하나하나가 감사해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다녀가서 실정을 알고 난 뒤에 예수님 같은 심정으로 살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힘주실 때 생겨나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조건 없는데 이상하게 감사해요. 남들은 실패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감사해요. 남들은 당신 몸 아프니 병원 가보라 하는데 이상하게 감사해요.
그건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맑은 물인데 일주일 지나니까 거기에 곰팡이 피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생겼어요. 그 생긴 것이 내 의도와 기대가 아닙니다. 내 현상학도 아니고 내 해석학도 아니에요. 내 철학도 아닙니다. 과학도 아니에요.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기 배달하라고 빠라빠라빠라빰~, 오토바이 타고 배달하라고 택한 백성에게 이거, 복음 전하라고 배달원 시킨 겁니다. 모세가 와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니까 출애굽기 8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니까 인간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요, 둘 다 아담의 형상이기 때문에 통하는 게 있어 가지고 이 사회는 까불면 안 된다, 까불면 취직 안 된다, 건방지면 사람들이 날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다 알아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겸손할 수 있는 자질 같은 것은 다 갖고 있어요.
진짜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 아니고서야 어딜 가도 자기 처신 정도는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지하철에서 마스크 쓸 정도로 그 정도로 사태파악은 되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 사람보고 마음이 교만하니, 강퍅하니, 완강하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요새 한국 사람들 80퍼센트가 대학진학률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로 다 나도 배울 만큼 배웠어, 그렇게 나와요.
그런데 적어도 왕 정도 되면 기본 인격과 인품은 억지로라도 갖춘 사람인데 여기에 외부에서 모세가 날라 오니까 마음이 완강하게 되지요. 9장 17절에 보니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자고하고(마음을 높임)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고요, 출애굽기 9장 35절에 보면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니까 겸손치 않은 것, 강퍅한 것, 그 강퍅하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파악하지 못해요. 꼭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주님이 찾아와야 돼요. 주님이 훅, 자기완성, 십자가완성을 들고 찾아 들어올 때 내가 이 땅에 곱게 태어난 그것도 강퍅이요, 완고함이요, 이게 자고함이요 완강함이라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모든 평소의 삶을 쑤시고 들춰버려요. 너희가 살아가는 것이 기껏 이게 한계잖아. 겸손하고 신비로운 것으로 영적으로 해석해서 그것을 섬기고 본 것을 과장되게 하고 법을 지켰다. 나는 율법에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었고 먹으라 하면 먹었다. 또 만지지 말라고 하면 안 만졌다.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그 결과가 뭐였던가요, 그 결과가!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자기를 꾸미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꾸미는 거예요. 자기가 감추고 싶은 것을 꾸미는 거예요. 자기 수치를. 아담의 시신을 옮긴다는 말, 평생 인간은 시신을 옮기게 되어 있다. 그것을 육이라고 하는데요. 아담의 육을 분배받아서 그 분배받은 아담의 자투리를 나눠 가져서 아담의 몸을 가지면서도 일방적으로 터무니없이 이게 나야, 라는 자의식을 부여하게 된 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내 주인이라면 내 몸이 내 맘대로 되어야 되는데 내 맘대로 되지를 않으니까 여기서 뭔가 문제 있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특히 조상 아담이 준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수치스러움이거든요. 수치스러움, 수치스러우니까 아담이 하는 행세가 그 수치스러움을 감추는 것으로, 감추기에 급급한 것으로 자신의 본성 인간의 본성이 정해져 버렸어요.
인간의 본성이 뭐냐? 자기 수치스러운 것을 어떻게 한다? 꾸미고 감추고 안 들키려 하는 것, 끝! 그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인간의 행동과 태도와 말하는 내용이 다 그거예요. 한치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인간은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꾸미는 이것은요, 언제 끝나느냐? 내가 사라질 때, 내가 죽을 때 내 꾸밈도 그제야 끝나는 겁니다.
나 이렇게 잘났다, 이것도 할 줄 안다, 잡채도 잘 만든다. 이런 것도 나 죽고 나면 다 옛날이야기,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매일 같이 날 단위로, 날짜 단위로 매일같이 위에서 공급을 하는 겁니다.
everyday, 매일 같이, 매일 유업이에요. 매일 우유, 매일같이 주시는 거예요. 새로운 사태 속에서. 우리는 부끄럽다고 위장하고 그 위장한 것을 주님께서는 주홍 같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진다고 하면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네 의 말고, 네 겸손한 것 말고,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님이 이뤘던, 예수님만이 이뤘던 그 의, 율법 지킨 것 말고 율법 외의 한 의, 그걸 바라보라 그 말이지요. 그것도 매일같이.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또 반발하지요. “우리는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한번 이야기하면 딱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안 오셔도 됩니다.”라고 하는데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시체를, 우리 안에 역사를 길게 끌어당기면서 아담의 삶을 재현시키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아담과 결탁된 악마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우리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 우리 육신을 통해서, 철학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악마의 모습은 뭐냐? 유명한 말씀이지요. 악마가 등장하는 구절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계명성 나오니까 계명대학교 생각나네요. “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이게 그리스 철학의 제우스신의 모습입니다. 올림푸스 산 위에서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신,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 아담과 결탁된, 아담이 지니고 우리에게 유전시킨 전해준 그 DNA구조 안에 있던 그런 영적 요소지요. 최고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본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라캉에 의하면 무의미하거든요. 숫자로 보거든요. “야, 25번! 85번!” 숫자로 불러주는 거예요. 이 일 제대로 못하면 대체가능, “너 빠져, 빠져 일도 못하는 게 어딜 회사를 다녀. 다른 사람 넣을 거야. 너 빠져, 빠져. 인턴사원 너 빠져.” 모든 것이 서글프기 짝이 없고 애석하게도 대체하는 거예요.
“설교도 못하는 것이. 나가, 나가! 전에는 설교 좀 하더니 요새는 뭐 감 떨어졌는지 설교가 안돼. 이제 나가라 나가. 너 돈 좋아하잖아. 돈 줄 테니 나가.” 어릴 때야 ‘아, 우리 엄마는 요리도 잘해주고……’ 이러다가 나중에는 사춘기 되어 가지고 “엄마 필요 없어. 나 친구 만나러 갈래.” 엄마도 대체해 버려요.
“엄마, 무식해서 엄마하고 말 못하겠어. 엄마는 오일러의 법칙을 알아?” “뭐 주유소 이야기야?” “아니, 그거 아니야. 수학을 알아?” 엄마가 수학 공부한 게 언제인데 그걸 알겠어요. 그때에도 빵점인데 지금까지 뭘 기억하고 있겠어요. 말이 안 통해서 이야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 서글픔,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내가 문제가 아니에요. 나한테 아무 문제 없어요. 나는 그냥 심판받아 저주받아 죽은 아담의 그 저주가 뿜어내는 그 시체 배달한다고 거기에 같이 휩쓸려서 그렇게 된 거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보고 뭘 요구하는 게 아니고 아담을 그렇게 버려놓고 망하게 한 악마를 겨냥하는 겁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에요. 사람 아닙니다. 정권하고 싸우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난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성도가 구원받았으면 다 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무기에요. 그 무기가 뭐냐 하면, 그냥 죽었다, 실패했다, 하는 그 자체로 무기에요. 내가 의미 없기 때문에 주님에게 달려드는 악마의 무기를 이길 수가 있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게 되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와요. 제가 보기에는 참 재미있는데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제가 재미있다는 대목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냥 사자가 아니고, 할 일 없어서 그냥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우는 사자, 우는 사자니까 이건 뭐냐 하면, 배고파서, 굶주려서 먹잇감을 찾는 거예요.
악마가 사자와 같다는 뜻이에요. 악마의 활동은 배고파 환장한 맹수와 같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를 화나게 하세요. 뜯어먹을 고기가 아예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잘난 체를 해야 마귀가 먹을 것이 있다고 달려들지요. 잘나기는 뭘 잘나요. 그냥 나는 배달의 기수인데, 오토바이 타고 주님의 십자가를 운반하는 운반체인데 독자적으로 내가 잘난 게 뭐가 있습니까? 죄인인데요, 죄인의 괴수인데요. 실패/성공은 우리한테 해당 되지도 않아요.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그것도 해당 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자가 아픈 게 뭐가 의미 있겠어요? 그래서 이사야 보게 되면 악마가 최고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사야 47장 8절에 보게 되면 두로 지방은 더 가관입니다. 두로는 그 당시에 무역상사를 해 가지고 돈을 많이 벌었거든요.
두로가 지중해 바닷가에 있는 도시인데 지하자원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중개무역하는 겁니다. 싸게 물건 떼어 와서 비싸게 팔아서 큰 사업을 한 거예요. 모든 무역은 두로 항을 다 경유해서 유럽 쪽에서 아시아 쪽으로 넘어간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47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이런 식으로 그냥 나뿐이에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그거지요. 너는 이제 들을찌어다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두로에서 일어난 이 무역이 자본주의 세상을 표현한 요한계시록 15장, 16장. 17장. 18장, 19장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다 무너지는 거예요. 이게 초등학문 속에 놓여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주신 그 영생의 힘이 끊어진 세계에서는 어떻게 독자적으로 아담의 형상, 아담의 시체를 배달한다는 그런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나뿐이니까 이제는 악마한테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출애굽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데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모세가 다가오니까 그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과 관계 맺는 언약의 백성을 가져가자, 하니까 그 점잖은 바로 왕이 갑자기 완고해졌지요. 강퍅해졌지요.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이 오시기 전의 우리 모습인데 주님이 안 오셨으니까 우리는 그걸 몰랐던 거지요.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천하의 선비처럼 살아 가지고 나는 부족하다, 낮췄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부족하다 아니까 부흥사 목사들 생각이 나지요. 부조캅니다, 이렇게 하는데 주께서는 부족한 것을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쓸데없다고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쓸데없다고.
부족한 게 아니에요. 채우면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 쓸데 없을 때 가장 주께서 쓸모 있게, 그 순간을 노리고 주께서 쓸모 있게 일을 시킵니다. 온전한 배달원으로. 우리는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고 주의 일에 방해자예요. 주의 일의 방해자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 빼낼 때, ‘애굽하고 우리는 달라. 하나님이 함께 있어 좋다.’고 이야기했지요.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빼낼 때 열 개의 재앙을 내렸습니다.
민수기 14장 22절에 보니까 이제 광야에 다른 민족은 없어요. 애굽사람도 없고 바로 왕도 없어요. 달랑 남은 게 이스라엘 백성밖에 없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밖에 없는데 자기 백성을 향하여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광야에서 죽여버리겠다. 다시 말해서 “남보고 강퍅하다, 완고하다, 하나님을 모르느냐, 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잘 안다는 너는, 복음을 잘 안다는 너는 어떠냐? 너는 안 강퍅해? 너는 자고하지 않느냐?”는 말이지요. 인간의 세상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장하고 꾸미는 것, 그것 다 부질없습니다.
‘미국의 모나리자’라는 작품,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어요. 돈으로 치면 천억도 넘을걸요. 그 작품을 영국의 왕립 미술관에서 미국에 전시하려고 가는데 거기에 실무자로 따라붙은 사람이 ‘미스터 빈’이에요. 처음 들어요, 미스터 빈? 미스터 빈은 영국의 세계적인 코미디언이지요. 영화 이야기입니다.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라는 것은 진짜 그런 그림이 있고요.
그렇게 그림 가지고 가는데 얼마나 말썽을 부리는지 그 미국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라는 그 작품에 손을 대서 그 유화가 찌그러졌지요. 찌그러지니까 급한 마음에 미스터 빈이 물감을 찍어서 손으로 문댔는데 그림을 더 망쳐서 코를 곰보로 만들었어요. 그 영화를 보면 아주 정말 우스워요.
무엇을 시사하느냐 하면, 그럴싸하고, 대단하고, 고상해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의 실정이 물감을로 캔버스라는 천위에 덧입혀 놓은 위장이고 조작된 거예요. 인간의 예술과 위대함은 아무것도 아닌 천 쪼가리에 지나지 않고 거기다 기름쪼가리 처바른 것밖에 안 돼요. 지금 여기 화가가 없으니까 그런 소리 합니다만.
인간의 모든 노력은 그런 행위를 통해서 나는 지금 독자적으로 내가 최고, 뭇별 위에 나름대로 나는 의미 있잖아, 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평생을 그런 식으로 악마가 없는 척, 이 세상의 영적인 존재가 없이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면 인생 성공 아니냐, 그것뿐이지, 라는 식으로 허세를 떨면서 살아가는 것, 그 무거운 짐,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쓸모없는 자를, 이렇게 주홍같이 붉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했으니 이것만 자랑하는 그런 힘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면서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부질없는 염려 걱정으로서 우리의 인생 그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린 바보 같은 짓을 해 왔었습니다. 이제는 바보 같은 짓을 기쁘게 바보같이 살아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