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었다
2021년 5월 7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3:2-3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상을 뭉개버릴 원칙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자아는 죽은 자아입니다. ①우리의 생각이나 행동도 죽음에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어떤 직위나 남녀노소나 인품이나 성격이나 재산유무나 학력이나 지식도 우리 자신의 본질을 바꿀 수 없습니다.
‘죽었다’는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나 생각마저도 모두 죽었다는 말입니다. 회개, 반성, 전도, 기도, 헌금, 희생 등등 모두다 다 죽은 것이고 나를 구원하는데 소용없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살려달라”혹은 “죽여달라” 혹은 “구원해달라는 말도 죽은 자, 곧 죄로 죽은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제 과학과 인간 지혜의 한계입니다. 구차하고 끈질지게 목숨을 연장하려 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목숨 붙어 있음’과 ‘목숨 붙어있지 않음’을 대등한 대립개념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저 뒷면을 닮은 앞면이요, 앞면을 닮은 뒷면일 뿐입니다.
②진정한 대등한 대립은 ‘나’와 ‘남’입니다. 나는 남이 될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사랑으로 남에게 다가가도 ‘나’라는 덩치를 그대로 타인에게 들이대는 식입니다. ‘자아’를 소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창조 때에 일어난 타락의 현장 속에 인간의 마음은 범죄한 채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신만 그대로 인 것이 아니라 타락했음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이어보려고 천국을 찾고 하나님을 찾지만 타락한 자아가 요구하는 ‘죽어야 될 성품의 발산’일 뿐입니다. 아담이 악마와 결탁하고 난 뒤에, 악마의 품성을 그대로 유입되었습니다.
이런 관계가 ‘죄의 종’이 관계입니다. ③죄의 종의 성품이란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악마는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단도리부터 하라고 독촉합니다. 자기 것부터 챙기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인간의 범죄성이 최초로 내뿝니다. 그것은 바로 살인입니다,
살인이란 ‘나의 존재만 살 가치가 있다’는 태도에서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자아 절대성이란 자신과 동등한 둘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짜 천국만 상상할 뿐입니다. 천국이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골 1:13) 마치 주인집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④“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남의 집에 들어가려면 나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구원이란 나를 위해서, 나 중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문제는 이 ‘함께’에 지금의 ‘나’가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⑤심지어 내가 나를 타인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일어났습니다. 전에 그는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고 난 뒤 그의 이름을 바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사울은 죽은 자입니다. 그때도 분명히 하나님 섬기고 활동하고 숨도 쉬고 했지만 그것은 ‘자아’가 안 죽은 상태의 경우였습니다.
자아는 절대로 자아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타인이 이 자아의 궁궐 속으로 쳐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는 방식은 율법입니다. 출애굽기 32:33에 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책은 어떤 이름이 지워지고 어떤 이름이 새롭게 적히는가 그 절차와 과정을 땅의 역사에 발산하게 하는 책입니다. 누가복음 10:17-20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결코 너희들이 능력이 아니라 생명책의 위력이라는 겁니다.
모세에게 준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두고 하십니다.(롬 3:19) 즉 하나님께서는 타자의 이름으로 오셔서 모든 아담에 속한 자아들을 죽여버립니다. 이 말은 곧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는 작업을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가지고 시범 실시하시는 겁니다. 이는 자아의 이름으로 생명책의 본질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집 주인은 아무리 세들어온 사람들이 나름대로 화려하게 그 집을 장식하고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친구나 친척들이나 가족들을 불러모아도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당장 쫓겨나가고 설치한 건축물도 사정없이 철거됩니다. 집 주인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인간들은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을 명단이 있는 기록책은 오로지 생명책의 주인공의 사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자신의 이름으로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이름은 주님의 이름이기에 영원히 지워하지 않는 ‘최종적 은혜’입니다.
기존의 아담에 속한 옛이름들은 율법에 의해 죄로 드러나기에 제대로 생명책에서 명단이 지워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타인이 되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와 같이 죽어버리십니다. 즉 자신의 자리를 빈 자리로 만드시는 겁니다. 들어갈 수 없는 자리를 만드시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4장에서 ‘처소 만들기’입니다. (요 14:2) 아담의 세계 안에 ‘타자에 의한 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만 인간의 이름을 지우고 예수님 자신의 이름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⑥“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이렇게 되면 인간의 옛 자아의 자리에 두 개의 타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죽은 자아요 다른 하나는 타인의 이름으로 등록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아입니다.
⑦이미 죽은 자에게 있어 생명여부는 행위여부를 따져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여부를 따져 밝혀집니다. 그러니 감사와 감사의 연발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우리 자아를 배제하고 순전히 하나님께서 다 해내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나의 것이 모두 타인의 것이 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골 3장 2-3절(우리는 죽었다)21050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 2-3절입니다.
골로새서 3:2-3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사도바울은 우리의 모든 일상을 한꺼번에 뭉개버릴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당신은 죽었다는 겁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학력이나 지식, 신분, 재산유무, 남녀노소, 지위, 성품이 좋다 나쁘다, 상관없이 그냥 죽은 거예요. 끝이지요. 그게 끝이에요. 그냥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여기에서 반발이 나오지요.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그 평가를 못 받아들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괴물 같은 것이 우리 안에서 자극받아서 드디어 튀어나옵니다. 분명히 성경은 죽었다고 되어있는데 나 자신은 살아 있는 증거로 간주하고 싶어서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내 행위를 내가 측정하고 평가합니다. ‘잘했나 못했나?’
죽었는데 죽은 자가 무슨 착한 짓이 있고 나쁜 짓이 있습니까? 죽었는데! 착한 일 해서 뭘 노리는 거예요? 나쁜 짓을 자기 스스로 반성한다고, 회개한다고 그 회개하는 의도가 뭡니까? 죽었잖아요. 죽었다 그 말이지요. 게임 끝났다는 이야기에요. 인생에 어떤 희망이라는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구원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남의 이야기에요. 죽은 자에게 무슨 천국이 있어요? 죽었는데. 죽을 뻔 한 게 아닙니다. 죽을 수도 있겠다, 가 아니에요, 그냥 죽은 거예요. 사도 당신이 자기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공히 죽었다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 라고 했을 때 나에게 사울 시절이 있었다. 사울 시절이 죽은 시절이에요.
사울이 바울 되었잖아요. 사울이 바울 되었으니까 사울 그 시절의 나의 모든 것은 사울이 바울 되고 보니까 죽은 거예요. 죽었다는 말은 내 행위를 가미한다든지 내 행위를 인위적으로 조작을 해서 내 본질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 살고 보니까 발견한 겁니다.
그동안 여호와 믿고……, 사울이 유대교니까 여호와를 믿었지요. 여호와를 믿고 율법 지켰지요. 그게 죽은 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죽은 자가 죽은 자의 본질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게 과학의 한계에요. 인간의 지혜의 한계 초등학문들의 한계에요. 언어학, 철학, 문학, 예술, 모든 한계는 자신의 본질을 바꿀 수가 없는 겁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로서 어떤 이론을 내세우고, 기술을 개발하고, 신약을 제조하고, 타고난 예술적 솜씨를 발휘하지만 그러나 전혀 자신의 본질은 달라진 바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 갈 수 없습니다. 왜? 죽었기 때문이에요. 죽었기 때문에 못가는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구원론은 이건 보이스피싱이에요. 이것은 사기입니다. 구원론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죽은 자에게 구원을 언급한다고, 그거 믿는다고 사는 법은 없어요. 죽은 자에게 이야기할 것은 네가 죽었다는 그것뿐입니다. 전도의 내용은 달랑 하나뿐이어야 돼요. “당신은 죽었습니다.” 이게 전도에요. 교회 와도 죽었고 안 나와도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이미 죽은 자의 기도도 의미 없고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괴물이, 악마가 하나님의 이 복음을 인간은 죽었다고 말하는 이 복음을 가리기 위해서 수작들을 벌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들의 마음에 호응해서 교회 목회 성공해 보려고 성경 본문 동원해서 온갖 사기질을 하는데 그게 2천 년 동안입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요. 교회가 하는 짓거리가. “당신을 구원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그들이 하는 수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이스피싱 수법 알려드릴게요.
목숨 잃는 것과 현재 목숨 가진 것을 대립으로 간주하는 수법을 사용해요. 내가 목숨이 유지되는 것과 목숨을 읽는 그 순간부터가 대립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예수를 믿든지 십자가 피를 믿든지 조치를 해야 그래야 네가 산다는 겁니다. 지금 이 세상하고 천국이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지요.
그러나 대립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뒷면을 닮은 앞면입니다. 앞면을 닮은 뒷면이에요. 같은 동전이에요. 이래 보면 오백 원, 이렇게 보면 이순신 거북선, 같은 겁니다. 진정한 대립은 나와 타인과의 대립이에요. 그것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때려죽여도 남이 될 수 없습니다. 타인이 될 수 없어요. 내가 남이 될 수 없어요. 이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죽은 자 구원은 타인으로부터 시작돼요. 주님이 남으로서 오면서 성립이 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남으로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해서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구원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냥 나를 고수해버리면 계속 해서 내가 구원받고자 애쓰는 거예요. 지금 살아 있는 이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 나가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라는 그 연속성은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다. 도중에 내가 타인이 되어야 돼요. 내가 남이 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남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야 됩니다. 그게 어떻게 인간적인 결정과 선택으로 가능합니까? 나는 나인데 어떻게 내가 아닌 나가 될 수 있겠어요? 인간의 생각과 모든 행동은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서 모든 것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내가 내가 아니고 남이라면 우리는 출발점부터 끄집어낼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그러면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셋집에 살 때 보통 주인하고 셋집이 같이 살던 집들이 많았어요. 대구나 부산에 6.25 때 피난 내려온 집들 보면 그 집에 주인도 살고 세 든 사람도 같이 살고 그랬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주인의 자기 집 한 울타리 아닙니까? 늘 아침에 얼굴 맞댄다 그 말이지요. 주인이 돈 준다고 해서 아무나 세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품, 걸음걸이, 말씨, 그런 것 다 봐요. 주인이 일찍 잠을 자고 있는데 세 들어 사는 사람이 타닥타닥, 막 뛰어다니고 심지어 애까지 뛰고 있으면 주인이 나와서는 “어어어어!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내가 같이 안 살지요.”
그러니까 옛날의 셋집은 뭐냐? 주인하고 같이 산다는 개념입니다. 세만 주고 주인이 따로 사는 것이 아니고 같이 산다는 개념이에요. 세놓을 때는 분명히 달랑 부부 둘이 산다고 해놨는데 한 달도 안되어서 멀리 살던 자식들, 촌에 있는 친구들 다 데리고 와서 살게 되면 주인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나는 내가 함께 살고 싶은 사람만 살게 합니다. 나는 내가 살고 싶어하는 사람과만 함께 삽니다. 나가세요.” 이렇게 되겠지요.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여기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이 나옵니다. 천국은 나의 나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나라에요. 하나님 나라거든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나라에요. 그 나라에 누가 살고 누가 안 살고는 누가 정하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같이 살고 싶은 사람만 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자꾸 놓치는 거예요. 지금껏 2천 년 교회가. 이 땅에 살면서 자기가 고생 많으니까 불교처럼 죽고 난 뒤에 편안하게 살고자 나 천국 갈래요, 손들고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셋집에 살면서도 주인 노릇 하고 있는 겁니다. 주인집 맘 대로에요.
우리가 성경의 기본으로 한번 돌아가 봅시다. 기본이 히브리서 3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셋집 이야기로 연관시켜 보면, 집은 하나님이 주인이니라.
그러면 그 집에 영원히 세 들어 살 사람은 하나님이 결정하느니라. 그 말이에요. 이게 기본이에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부탁하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했을 때 세 든 사람치고 주인에게 부탁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부탁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다 받아주지는 않잖아요. 그 살 집이 주인집이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그 집에 살고 싶더라도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느냐? 주인한테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 그 집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은 철저하게 내 결정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내가 아닌 타인, 집주인이 결정했기 때문에 여기 산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그러면 나는 내 생각이 있더라도 내 생각이 없어지고 타인의 생각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절대로 나는 남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불가능한 거예요. 불가능하니까 지옥 가는 거지요 뭐. 천국 못가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으니 불쌍히 여겨 줄 것이다,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의 인간이고요. 이미 창조하고 난 뒤에 악마와 인간이 결탁되어 가지고 인간의 육신은 그대로 갖고 있지만 육신만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타락성도 같이 갖고 있어요. 그 타락성을 같이 갖고 있다고요.
그 타락함이 뭐냐 하면, 인간은 악마의 심중으로 그대로 꽉 차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특히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그걸 죄의 종이라 하는데요. 죄의 종의 특징, 죄의 종이란 뭐냐? 남을 용납 못하는 것이 죄의 종의 특징이에요. 악마의 특징이 그래요. 악마는 최고가 되고 싶은 겁니다. 자기가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신은 대등한 신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이 오로지 신이어야 돼요. 그래서 모든 아담 치고 남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인간은 아담의 세계에는 없습니다. 항상 자기 우선이에요. 오죽했으면 <이기적 유전자>겠습니까? 도킨스가 지은 책 <이기적 유전자>
그 책에서 도킨스가 하는 말이, 남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겉모습이고 안의 본질은 뭐냐? 나만의 DNA를 퍼뜨리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생물학적으로 나만의 DNA를 퍼뜨리기 위한 것. 이 말은 뭐냐? 어떤 이 세상 생물종도 자기 DNA를 저주하고 그걸 부정하는 일은 이 생물세계에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RNA바이러스인 코로나까지도 말이지요. 그 미생물까지. RNA나 DNA나 비슷비슷 한 거예요. 악마는 항상 우리에게 격려하고 그리고 용기를 부어주는 것이 뭐냐? 네 단도리부터 해라. 너부터 챙겨라.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다 추려내고 추려내서 그 바닥에 뭐가 깔려 있는가 보세요. 그것은 뭐냐? 내 것부터 단도리하고 챙기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단디 해라 단디, 단단히 해라. 네 것부터.
살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만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그것이 살인입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가 나만 존재해야 돼요. 이 땅에, 그것도 가치있게. 어느 정도로? 신처럼 절대적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온 게 살인입니다. 살인, 간음, 거짓말, 십계명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 하지 말라 하라, 하는 이 모든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미 인간이 악마라는 괴물에 젖어 들어서 나만 이 세상에 존재할 유일한 자라 하는 그러한 생각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걸 감안해서 주께서는 십계명을 이야기한 겁니다.
지킬 수 있거든 지켜봐라, 하는 겁니다. 지킬 재주 있거든 지켜봐라.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킵니다. 왜 못 지키느냐? 나는 나를 떠날 수가 없어요. 내가 타인, 남이 될 수 없습니다.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도 타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 바치고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타인이니까. 남이니까. 어떻게 나를 버리고 타인에게로 갑니까?
하나님 뭐라 뭐라……, 하게 되면 더러워서 안 믿어요. 인간은 자기를 바꿀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자 이 재주 없는 것, 재주 없는데 주께서는, 성경에 말씀은 나와 있거든요. 내 백성 건져서 구원한다는 말씀은 나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지킬 수가 없고. 그렇다면 그 말씀이 말씀으로 현실화시키는 그 담당자 책임자는 누구겠는가?
그것은 하나님 그분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일을 벌이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타인으로서 남으로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타인으로 찾아왔다는 그것은 어려운 말 같지만 사울에서 바울 되는 것 보면 이게 그냥 헛말이 아니고 그냥 이론이 아니고 지금도 이루어지는 현실 그 자체라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나옵니다만 깊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렇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자신의 행위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에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주님께서 죽은 자에게 행위 여부를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이 전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행위를 죽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안 받으면 하나님께서 그 죽은 자의 행위를 방치할거냐?
죽은 자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되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은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잘했다 못했다, 행위를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서 뭘 보시느냐? 은혜 여부를 보는 겁니다. 네가 은혜받았느냐, 은혜가 없느냐의 여부를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은혜라는 것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라고 생각하겠지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은혜지요. 비를 내리시고. 은혜지요.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렇게 다 은혜지만 그 은혜의 최종완성되는 지점의 최종은혜가 있어요.
그 최종은혜가 뭐냐? 구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최종은혜를 구약출애굽기를 통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누구든지 범죄하면 내책에서 지워버린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은혜의 최종적으로 진짜 최종은혜에 골인한 사람, 드디어 영원한 은혜가 계속 지속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의 책이 있는데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 최종확정된 사람, 그 사람이 은혜중에 은혜, 은혜의 완성태, 최종태입니다. 제일 마지막 모습이에요.
출애굽기 32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모세가 자기 백성들을 걱정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용서 안 하시려거든 차라리 나를 이 책에서 지워버리소서, 라고 모세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모세만이 알고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에요. 왜 하나님과 모세만이 그 이야기를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불러올릴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네가 시내산에 올라오라. 3일 후에 거기서 만나자.” 시내산이 만남의 장소가 되었어요. 3일 후에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서 40일 동안 함께 있으면서 들었던 하나님의 그 모든 말씀의 최종완성상태가 뭐냐 하면, 책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책에 기록된 사람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그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햇빛 주는 것도 은혜 맞아요. 공기 주시는 것도 은혜 맞고 단비 주시는 것도 은혜 맞는데 그 은혜의 최종정점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등록되는 겁니다. 그게 최종적인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 인간들의 이름은 어디에 있느냐? 인간들의 일생이라 하는 것은 평생토록 볼펜 들고 은행에 가도 또 공공기관에 가도 서명하면서 일생을 다 보내요. 서명하면서.
이름 생기고 난 뒤부터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서 시험 칠 때부터 번호 쓰고 이름 쓰는 것, 서명하면서 평생을 다 보내는 겁니다. 무슨 서명? 누구 이름? 자기 이름을 쓰는 거예요. 자기 모든 행위의 집결이 서명하는데 나와 있습니다. 이 서명의 내용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죽어 있으면서도 사는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내가 책임지겠다. 이름대로. 이것은 소유권이 나에게 있다는 겁니다. 맞아요. 자기 소유권이 자기한테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네가 쓸 수 있는 이름 말고 예수님이 쓸 수 있는, 예수 이름을 쓸 수 있는 생명책의 이름을 위해서 너는 네 자리와 너 자신이 너의 것이 아니고 남의 것으로 바뀌어야 돼요. 남의 것으로!
내 것이 내 것이 아니어야 돼요. 그렇다면 나의 것이 내 것이 아니려면 주님이 나에게 하나의 타인으로 들어와서 내 안에 일단은 나도 있고 타인도 있고 그렇게 되다가 그 타인 되시는 예수님이 나라는 존재를 죽여버리면 나는 내 자리에 두 개의 타인이 성사되는 겁니다.
이 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말을 창조라고 이야기합니다. 새로 시작하자. 너는 천국이라는 나라의 셋집에 들어갈 자격이 없어. 새로 시작하자.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도무지 모른다. 나 너 모르겠다. 이 말은 뭐냐? 나는 너랑 같이 살기 싫다는 겁니다. “내가 살고 싶은 자가 어떤지 너는 너밖에 모르니까 너는 알 수가 없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내 생각 밖으로 내가 못 벗어나니까 항상 나는 나밖에 몰라요. 나만 안다는 말은 남은 모른다는 뜻이에요. 남을 모른다는 말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께 다가가고 하나님께 다가가도 여전히 나는 나만 아는 식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그것은 모르는 게 되는 겁니다. 이게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쉬운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타인으로 들어올 때는 뭐냐? 율법을 가지고 들어와요. 이게 하나님의 법인데 지켰냐 안 지켰냐, 지켰냐 안 지켰냐, 따지는 거예요.
몇 개 지켰습니다, 하고 거짓말을 하면 다른 것을 집어넣어요. 이것은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 계속 따집니다. “오른손이 범죄했는데 그 손을 찍었나, 안 찍었나? 멀쩡하다고? 멀쩡하다면 네 오른손이 범죄 안 했다는 이야기야?” 이런 식으로 자꾸 묻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지켰다 해도 하나를 어기면 다 안 지킨 것이다.”라고 들이대고 묻는 이유가 뭐냐? 계속 묻는 이유가 율법으로 저주해서 죽이겠다는 거예요. 우리를.
나라고 하는 이것을 심판주 되시는 주님이, 심판주라는 타인이 와서 꼬치꼬치 캐묻고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게 자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 뭐가 남는가? 우리는 죽었다. 그것만 남는 게 아니에요. 죽었다는 그 안에, 그 다음에 뭐가 같이 거기에 구석구석 스며드느냐 하면, 얘는, “이 인간은, 아담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에 합당한 겁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죽었으니까 얘의 죽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것이다, 라고 되는 거예요. 그냥 죽이고, 그냥 권총으로 쏴 죽이고 손 털고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죽였다는 그 사실도 주께서는 버리지 않습니다. 다 활용합니다. 저는 이걸 ‘유황오리진흙구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거 잡숴보셨습니까?
오리 배를 갈라서 거기에 각종 한약재에 온갖 곡물 땅콩도 넣고 실로 묶어서 한참을 진흙 속에서 구워서 “다 됐습니다” 하고 오리진흙구이가 쟁반에 담겨서 나오거든요. 보게 되면 오리살 구석구석에 한약재 여러 가지 몸에 좋은 곡물들이 혼합되어서 나옵니다. 설마 뱃속에는 뭐가 없겠지 하는데 배를 열어보면 거기에 찰밥이 소복이 들어 있어요.
인간들은 날갯죽지, 허리,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모든 구석구석에 주님의 율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꽉꽉 쟁여져 있고 채워져 있어요. 속속들이 들어 있어요. 주님께서 요리 잘했어요. “이거 잘~ 죽었다.” 예쁘게 죽었다는 거예요. 율법은 살아나고 나는 죽고. 주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하고 결혼할 때 그 사라가 아브라함 보기에는 살아서 내 자식을 낳아줄 여자로 간주했겠지요. 그것은 아브라함 생각이고! 그것은 네 생각이고! 자기 부인이 자기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여자 되게 하시는 그것은 하나님 생각이고요.
하나님은 일체 인간의 모든 기대와 모든 소망이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살아 있는 한 하늘나라에 세 들어 살 수가 없어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3, 4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새생명이 나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은 내가 목숨이 붙어 있는 것과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대등한 대립으로 보는데 그것은 인간들의 상상에 불과하고요. 그것은 교회의 속임수에요. 자아를 천국에 보내주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립은 뭐냐 하면, 나와 타인의 대립이에요. 새생명이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나 말고 타인이 점령해 버린, 집주인이 와서 점령해 버려서 율법대로 새창조를 구성하는 하나의 원료, 재료로 활용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기존에 타락을 유지하던 타락도 날아가 버리고 기존의 모든 것은 날아가고 오직 거기서 새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사울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울이 바울 되었을 때 자기의 육체가 있었어요. 육신이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옆 사람이 봐도 예수님 만나기 전이나 후가 달라진 것이 없어요. 사울은 알지요. 사울은 아는데 하지만 다른 사람 보기에는 그 사울이 맨 그 사울이에요.
그런데 본인은 자꾸 우깁니다. “나는 사울이 아니고 바울이라니까.” “아니야. 너는 사울이야. 내가 보기에는 그 코, 입, 그 신장, 그 체중 다 마찬가지인데.” “아니야. 나는 새생명이야. 나는 새생명이 있다고. 이름도 바뀌었어. 바울로.” 다른 사람이 납득을 할 수가 없어요. 웬 고집이 그리도 센지.
“그러면 사울은 어디 갔노?” 물어보니까 “사울은 남이었지.” 새생명, 새롭게 창조된 입장에서는 옛날 아담에 속한 것은 뭐냐? 그건 남이 되는 거예요. 이제는 예수님과 한집에 사니까, 예수님과 함께 세례받았으니까,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사니까 예수님과 친족이 되어버리고, 가족이 되어버리고, 형제가 되어버리고 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조건은 딱 하나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켰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것은 당연한 현실이고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아가 고집을 못 부리는 이유가 그 율법 때문에, 말씀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말씀에 비춰봐서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 아닙니까? 죄인이면 죽는 것이 당연한 코스인데 그게 뭐 생소해요? 이상합니까? 당연한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한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게 술술 나와야지요.
당연히 나오는 겁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는 이 원리가 그대로 현실화되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와서 우리를 죽여버리는 그 원리와 동일한 원리인데 설교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생명책이 있는데 최종은혜는 그 이름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지워지지 않으려면 그 이름이 아담에 속한 인간은 필히 다 지워져야 돼요. 다 지워지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이름만 예수님이 영원한 것처럼 같이 영원한 이름으로 거기에 박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려면 어떤 절차와 과정이 필요하냐 하면, 아담을 지워버리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이름이 있더라도 지워지는 절차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겁니다. 아담에 속한 자아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금 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생명책이 있는데 이 생명책은 이미 타락한 아담한테는 생명하고는 관계없어요.
생명 나무쪽으로 들어오기만 해봐라. 생명나무 못 따먹도록 천사들이 불로 다 막았기 때문에 못 들어와요. 생명이 주님한테 있지만 인간하고는 관계없어요. 무관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준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인물들이, 존재들이 있다는 거예요. 아담은 못 들어가는데 생명책에 명단이, 이름들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죽은 인간하고는 상종을 안 해요. 하나님께서. 참 이게 중요한데요. “주님, 제가 잘못됐습니다.” “그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니까! 나는 너하고 상대를 안 해.” “주님, 회개합니다.” “회개한다는 그 입 다물라.”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는 그 입 다물라는 말이지요. “뭐 죄인이라고 더 봐줄 줄 알아?” 그런 것 안 봐줘요. 나와 상관없이 일한다고요. 상관없이.
제가 국민학교 때 1967년도에 TV 처음 들어왔어요. 암스트롱 달에 간다고 그 기념으로 우리 할아버지가 TV 샀는데 그 때는 좀 사는 집에나 TV가 있었어요. 김일 레슬링 보려면 TV 있는 집에 모여서 보든지 만화방에 가야 볼 수 있어요. TV 드라마 중에서 제일 충격스럽게 재미있게 본 것이 뭐냐 하면, <제5 전선>이에요. <제5 전선>이라는 것이 나중에 영화화 되었는데 그 제목이 <미션임파서블> 다섯 명의 특수요원이 나오는데 첫 번째 장면에 똑같은 것이 항상 나와요.
007 영화 도입부에 눈동자에 총 쏘는 그 장면 늘 나오듯이 그 첫 장면에 뭐가 나오느냐? 알 수 없는 단체에서 지시가 내려오는데 “당신이 체포되더라도 우리는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테이프는 3초 내에 사라집니다.” 3초 뒤에 연기 피시식 나면서 타버려요. 기억나는 게 뭐냐? “당신이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혹 체포되든지 간에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인간이 아담에서 내가 얼마나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사로 가고, 봉사하고, 교회 물걸레질 하고 백날 해도 하나님은 나는 너 모르는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성경 공부하고, 그런 것 모르는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내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는 너 모르는 것으로 하겠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시기 때문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다 지워버리기 위함입니다. 죄지은 것들……, 두 번 이야기 잘 안 하는데 두 번 하겠어요. 출애굽기 32장 3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33.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Whosoever hath sinned against me, him will I blot out of my book.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내 책에서 지워버리는 겁니다. 범죄하냐 안하냐, 를 어떻게 아는가?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제공해서 지워버려요. 지워버린다는 것은 그 범죄가 어디서 나왔는가? 악마하고 한통속이 되어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너밖에 모르는 것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교회 와서 천당 가는 사람 지워버리는 겁니다. 생명책에서. 교회 와서 은혜받아서 지옥에서 빠져나와서 주와 함께 있다는 그런 발언들, 그런 요구, 희망, 기대사항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언제 사울이 예수 믿으려고 환장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환장했지요. 바울은 알아요. 내가 사울 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아요. 조금만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율법에 비춰서 잘했는가 못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내가 잘했는가 못했는가, 이것만 민감하게 생각한 게 사울시대였어요.
그러나 바울은 감사, 감사, 고맙소, 고맙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이 타인이 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 뜻에 의해서 죽은 나 외에 주님이라는 타인이 어떤 상황도 주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만 확인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에 속한 내 이름은 지워지는 것이 마땅함을 날마다 감사하면서 확인하는 거예요. 더 이상 천국 가는데 내 사인이 필요 없이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습니다, 라는 말 없이 천국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왜? 믿음은 선물이기 때문에. 행함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 자체가 믿음이에요.
선물이 선물로서 의미가 유지가 되려면 자아에서 했던 모든 것은 지워지는 것이 마땅하지요. 누가복음 10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제자들이 귀신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17절 먼저 보면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우리라는 말을 잘못 사용했지요. 자아지요. 자아에게 항복하더이다. 주님께서 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 이름은 지워진 이름을 대신해서 들어간 이름이에요. 지워져 버린 이름을 대신해서 들어간 이름입니다.
같이 지워져야 될 이름인데 특혜를 받아서 주님께서 우리를 나가 아니라, 나는 죽여버리고 타인이라는 주님께서 와서 나를 자기 이름으로 그 생명책에 집어넣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 생명책은 어린양의 생명책이기 때문에 오직 어린양만이 그 생명책에 기록할 권한이 있습니다. 이게 은혜의 최종적인 상태에요.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도 나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8. And all that dwell up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짐승에게 경배하든지 아니면 주님이라는 타인에 의해서 내가 미리 죽임을 당하든지 그 두 경우밖에 없어요.
내 이름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나가 없어요. 지킬 나의 자존심이나 체면같은 것이 없어요. 지킬 체면과 자존심이 없기때문에 마귀로부터 어떤 공격을 당해도 공격당할 거리가 없어요. 너 코로나 걸리면 죽는다, 하니까 “죽는다는 말 오랜만에 듣네. 나 벌써 죽었는데. 십자가에서.”
너 죽인다, 하면 죽인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니 이미 죽었는데. 나의 모든 일상에 대해서 주께서 선언하기를 나의 일상이 뭉개져 버리는 원칙을 줬는데 그게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꼼지락거리든 뭐든 그것도 죽은 현상이지요.
지금 인도의 코로나 사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겁니다. 병원이 꽉 차서 침대도 없고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병원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예요. KBS 기자가 “왜 병원에 안 들어가십니까?”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집에 가시지 왜 안 돌아가십니까?” “누구 하나가 죽어줘야 다른 환자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누구 하나가 죽어 줘야 된다는 거예요.
천국에는 아담에 속한 자의 자리는 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육신이 되셔 가지고 죽어줬기 때문에 빈자리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에게 타인이에요. 자아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자리를 타자에게 용납을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없는 자리를 만드신 거예요. 만들었기 때문에 그 자리는 누구의 자리가 되느냐 하면, 주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좀 유치한 예지만 어느 주인집에 세 들어 살려는데 방이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네 자리 있다고 들어오라 하는 거예요. 보니까 자기 아들이 있는데 자기 아들을 집 바깥으로 내어버리고 자기 아들 살던 그 방을 내주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감히 누릴 은혜가 아니고 내가 감히 들어설 자리가 아니다. 이건 횡재한 거지요.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라 하잖아요. 내 선물하고 네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하고 한번 평생토록 한번 비교해 보세요. 내 믿음은 전부 다 저주받을 믿음이에요. 구시렁거리면서 변명으로 일관된 믿음이에요. 말씀 지키려고 애썼는데 잘 안되나……, 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주님이 주시는 믿음은 내가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날마다 은혜받은 것을 혜택받은 것을 확인할 뿐이에요. 날마다. 타인이 와서 나에게 이런 혜택을 줬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할 뿐이에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거예요.
타인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내가 타인이니까. 여기서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하게 되면 이미 아담의 자리에 주님의 자리가 마련됐기 때문에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뭘 쥐고 있느냐 하면, 모든 이 세상의 불신자들, 악마의 자손들의 운명을 그 사람이 다 쥐고 있는 거예요. 신자가.
어렵다 이야기했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대립을 시킬 때 지옥과 천국을 대립시키거든요. 그러면 지옥이 지옥답게 지탱할 수 있는, 그 구조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그 권한을 누가 갖고 있는가? 천국의 자리에 들어가서 그 처소에 들어갔던 그 성도가 그 권한을 쥐고 있는 거예요.
성도가 구원받지 아니하면 지옥 가는 사람이 지옥 가는 줄을 모르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런데 ⑧성도가 천국에 감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은 지옥 가는 것이 현실이 되는 겁니다. 이 사명이 얼마나 큰 사명입니까? 주님께 감사함으로서 주께 감사하지 않는 자는 꼭 지옥 가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노력 정도가 아니지요. 이것은 당연한 거지요. 지옥 갈 자들이 꼭 지옥 가도록 그것이 진짜 실재인 것을, 현실 자체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구원받지 못할 인간이 구원받았으니까 이게 구조적으로 대립구조가 형성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나 구원받았다 자랑질하지 말고, 내 구원만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안목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주님의 안목으로 보게 되면 구원받지 못할 자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버릴 자를 철저히 버리고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질 자를 지우시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마무리했다는 그 증거로 나를 구원한 거예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거예요.
물어보세요. “네 이름이 생명책에 있나?” 하면 “나한테 미친 소리 하지 말아라. 내가 아는 소리나 해라. 내가 모르는 소리 하지 말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20장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13-15절에 보면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진다. 따라서 생명책의 절차, 지워지고 기입 되는 그 이름이 들어가는 그 과정 전체가 그게 이스라엘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일대기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심으로서 없는 자리에 자기 백성을 거기다가 집어넣을 권한을 가진 분이에요. 그래서 그 권한을 가졌다는 말은 사인한다는 뜻이거든요. 서명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의 이름으로 서명한 거예요.
“너는 이제는 옛날 자아의 너는 없어졌어. 죽었어, 이제.” 새로운 창조의 이름은 뭐냐? 내 이름으로 새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창조되었으니까 네 육신은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이니까 80, 90, 백 살을 살도록 죽어가는 겁니다. 이게 현실 그대로 아닙니까? 현실과 뭐 차이 납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현실상과 뭐 모순되는 것 있어요? 없잖아요. 참 쉽죠 잉.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의 종이라 하는 것은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용납할 수가 없어요. 내가 있는데 왜 남까지 용납해요? 봐주는 것도 어느 정도지 궁극적으로 는 내가 나를 봐줘야 되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전에는 서글퍼서 이야기했는데 지금 옛 창조 옛 타락에 속한 그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육신을 주의 이름으로, 마음껏 주의 안목으로 주님의 관점으로 마음껏 나 자신에 대해서 부정할 수 있는 겁니다. 부인할 수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마음껏 자기를 기분 좋게 부인할 수 있는 게 바로 십자가의 영입니다.십자가가 들어온 사람은 함께 죽고 함께 살았으니 이제는 오늘 본문 말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죽었고, 기분 갑자기 좋아졌지요.
그리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너는, 이 생명은 진짜, 진짜, 진짜 생명은, 너는 하늘나라에 셋집으로 주와 함께 더불어 사느니라. 이 더불어 산다는 것, 이제는 남이 아니고 같은 몸이 되었기 때문에 더불어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옛사람을 볼 때 이제 나는 남입니다. 내가 남이에요. 나는 내 가치, 의미, 내 잘난 것 그것 챙기고 남에게 욕 얻어먹을까 봐 남이 평가하는 거기에 신경 써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우울증 걸릴 정도로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벌벌 떨면서 살던 것이 그 모습이 이제는 남의 관점에서, 주님의 관점에서 그 모습을 내가 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저렇게 살았었지. 아, 저게 바로 악마의 죄의 종, 악마에 속한 인간들이 벌벌 떠는 거구나.’ 날마다 죽었던 자기의 모습이 얼마나 아찔한지를 매일같이 산뜻하게 온몸으로 짜릿하게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었다는 이 사실이 이제는 기쁘게 들려와서 감사합니다. 돈 벌어서 살아보려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남이 보기에 사람 사는 것처럼 살려고 이 부질없는 짓거리,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이제는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찬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