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그림자와 몸

아빠와 함께 2021. 4. 12. 03:58

그림자와 몸 

2021년 4월 11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16-17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17.  Which are a shadow of things to come; but the body is of Christ.

그림자와 몸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쉽게 인정되는 의미관계입니다. 몸이 있다면 당연히 그림자가 생기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그림자라는 의미사슬과 연결시켜 버립니다. 즉 도대체 ‘율법이 왜 그림자이어야 하느냐?’라는 겁니다. 그림자란 단독적으로 의미가 발생될 수 없는 겁니다.

밤 호수에 달빛이 비쳐 달이 물 표면 위에 일렁거리는 그것을 보고 달잡기 위해 뛰어들어간 자는 필히 호수물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율법에 순종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을 ‘몸’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의미의 최종성을 이미 확정해 놓은 겁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그림자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몸을 배제하고 다른 몸과 율법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인간의 몸은 결코 ‘의미의 종착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율법 준수와 자기 몸을 연결시키므로서 오직 자신의 몸만이 최종적으로 가치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곧 자신은 누구의 그림자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9에 보면,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습니다.

곧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고 분명히 언급해주셨습니다. 이 백부장은 자기 자신의 몸을 의미의 최종성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몸에 대한 미련과 삶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받고 사주받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기 전에 먼저 악마와 광야에서 마주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악마는 예수님으로부터 하여금 ‘떡’에 관심두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모든 인간들을 자기 수하로 만드는데 통했던 방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연과 주변을 살피면서, “왜?”라고 호기심 어린 질문을 쉴새없이 던지는 이유는, 그 바탕에 떡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떡없이는 나는 못산다’로 이해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라는 것이 떡을 기반으로 해서 나오는 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광야라는 지역에 악마를 만난 것을 의미를 두고 봅시다. 이 광야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고 난 뒤에 그들이 통과한 지역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산다’, 혹은 ‘살아 있다’라는 것을 떡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광야로 들어서면서 하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물과 떡을 그들 주변에서 치워버렸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원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원망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4:2에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평하고 계십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 4:2) 즉 하나님께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겁니다.

‘산다’, 혹은 ‘살아 있다’는 다른 데서 찾으시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다’고 보시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마 4:4) 즉 말씀이 살아 있는 자에게만 천국에 넣어주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인간들의 몸은 먼저 말씀, 곧 율법만 만나야합니다. 신명기 28:15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곧 인간의 몸은 율법에 의해 저주받기 위해서 있는 몸이었던 겁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사람들은 악마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서 ‘이 사망의 몸’을 지키고자 했던 겁니다.

버려야 될 몸을 살리고자 한 겁니다. 떡을 계속 투입하면서 말입니다. 이게 인간들의 세상사입니다. 인간들은 기적을 원합니다. 그 의도가 자기 몸을 안 버리고 싶어서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의 그림자’임을 원치 않습니다. 자신이 최종 목적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잡는 것은 자기 몸뿐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도 끝까지 못버리는 것은 자기 몸과 자아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4에 보면,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긁어모은 지식이 곧 진리인 줄압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공부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큼은 안 망하고 오래 살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그들은 이 세대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미 최종성을 못놓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는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있음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인간들이 매일 자는 잠은 곧 죽음입니다. 그때까지 갖고 있다고 여기는 재산과 지식은 다 놓고 잠시 죽는 겁니다. 이 죽는 순간에 자신이 애쓰고 힘들게 이어온 모든 세월은 ‘한 순간’이 됩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 인생은 본인의 기억이 아니라 주님의 기억입니다. 주님 몸으로부터 부채살처럼 퍼져나간 주님의 사건이었던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이 주저 저주 앞에서 공포로 시작했다가 즐거움으로 마무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강-골 2장 16-17절(그림자와 몸)2104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16-17절입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몸과 그림자의 관계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몸이 있는 곳에 해가 비취면 그림자가 생기는 겁니다. 이것 뻔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16절에서 율법을 그림자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 이 모든 것은, 특히 절기 월삭 안식일 이것은 율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하나님의 법으로 여기고 지키고 순종하려고 관계를 엮어보려고 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그림자라는 거예요. 이 말은, 그 율법을 지키는 것 그리고 먹고 마시고 있는 내 몸, 이 몸이 우리 보기에는 하나의 몸으로 보이겠지만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는 겁니다. 몸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최종성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말씀을 지키는 것도, 절기나 월삭 안식일을 지키고 구원받겠다고 예수 믿는 것도 이 모든 것이 그 마지막 최종점에 뭐가 있느냐 하면 몸이 있어요. 누구 몸이냐 하면, 내 몸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고난 겁니다.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배고프면 먹어야 되고, 잠 오면 자야 되고, 그 모든 일어나는 일이 자기 몸을 최종적인 가치나 의미를 두고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몸이다, 하는 겁니다. 몸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여기에서 이의가 없을 것으로 여기는데 사도바울은 그러한 너무나 상식적인 우리를 향하여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지금 최종적으로 뭘 잡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무엇을 잡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렇게 질문하면서 답변을 스스로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그림자인 것을 아는 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당신은 헛방이라는 것,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을 알고 싶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뭐니 뭐니 해도 내 몸이 제일 중요하다는 식으로 살아갑니까?”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그림자라고 할 때 이러한 생각을 하면 쉽지요. 호수의 표면에 밤중에 달빛이 일렁거릴 때 그 illusion, 영상, 그 영상이 바로 그림자지요. 또는 사진기의 필름 같은 것도 그림자에 해당됩니다. 그림자의 특징은 자체적으로 두께나 폭이 용납되지 않아요. 그냥 illusion이라 하지요. 하나의 영상, 이미지라 하지요. 하나의 영상에 불과한 거예요. 어른거리는 영상.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께서 외투 깃 탁 세우고 가로등 불빛 밑에 서 있으니까 저기 뭐가 보이느냐 하면, 그림자가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만 몸이고 그 나머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몸으로 자처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몸은 뭐든지 최종성인데, 모든 가치나 의미의 최종성인데 너의 몸은 결코 네 몸이 최종성을 누릴 자격이 못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누구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그림자. 그런데 인간치고 살아가면서 나는 누구의 그림자이고 싶어요? 그런 사람 봤습니까? 나는 ‘나’이고 싶지. 나는 나야. 나는 누군가의 그림자, 그것은 나는 용납이 안 되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용납하기 싫다는 거지요.


마태복음 8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하도 믿음이 없으니까 주님께서 특이하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 있어요. 마태복음 8장 9절에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걸 보고 예수님께서 10절에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모든 사람, 동서남북 모든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찾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에요. 본인이 최종성이 아닙니다. 본인 몸이 최종성이 아니에요. 모든 의견의 마감이 아니에요.

누가 나더라 가라, 가라, 좀 했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더러 오라, 오라, 고 했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더러 이것 하라, 했으면 참 좋겠어요. 누가 저더러 하지 말라, 고 이렇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그분만 있으면 우리는 그림자라도 좋소. 그게 바로 주께서 원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몸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그걸 최종성이라고 보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은 최종성이 아니고 예수님의 긴 그림자로 보는 겁니다. 모든 만물이 다 그래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만물이 그로 인해 뽑혀 나오되. 떡가래처럼 또는 부챗살처럼 퍼져 나오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말은, ‘모든 의미의 마감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있는 어떤 조그마한 권한을 하나님이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걸 인정한 적이 없어요.

내가 나를 위해 산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러한 삶의 형태, 그것은 땅에서 인간들끼리나 통하는 것이지 하늘나라에서는 그걸 옳다고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흔적일 뿐이지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 하니까 그 율법을 지키는데,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그런 것을 지키는데 무엇은 먹어야 되고, 무엇은 안 먹어야 되고, 그런 것을 지키는데 그 지키는 것이 누굴 위한 지킴이냐, 그 말입니다. 누굴 위한 지킴이냐?

궁극적으로 무엇에 자기가 헌신하고, 궁극적으로 자기가 무엇을 섬기기 위해서 지키느냐?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몸입니다. 몸뚱아리입니다. 최종적으로 나는 내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게 의미다. 내가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면 인생을 살면서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지, 라는 것이, 그런 생각이 우리에게 총 무장되어 있습니다.

“교회 왜 나오십니까?” 물으면 “구원받기 위해서” “누가요?” “내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나온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한 적이 없어요. 처음 듣습니까, 이런 이야기? 주님은 인간을 구원한 적도 없고 구원할 생각도 없습니다. 주께서 구원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이거 명확하게 구분합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 새로운 피조물은……, 지난 수요일부터 발음이 잘 안 되어서 화가 나는데요. 지금 새로운 피조물은 내 이름이 아니고 예수 이름 위에 새롭게 시작되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구원의 시작은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나온다는 그것은 절에 다니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대한조계종에 출석하신 거예요. 대한조계종 소속의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된 겁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그림자 노릇을 제대로 못 했을 때 가차 없이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내 몸이 최종적인 몸이 아니니까, 나는 그분의 그림자일 뿐이니까,몸체가, 실체가 움직이면 그 그림자는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지요. 전봇대에 서 있던 예수님께서 움직이면 예수님하고 그 그림자가 뚝 떨어집니까? 그것은 애초부터 주님과 링크된 존재가 아니지요. 몸체가 따라가면 그림자도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너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 하고 물으면 “나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주인 되시는, 몸체 되시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고 나는 그냥 따라갈 뿐이야.” 이렇게 살면 안 됩니까? 사도바울이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림자는 자체적으로 두께나 폭을 가져버리면 안 돼요. 얇아야 되고, 그냥 어른거려야 되고, 자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없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림자니까요.

그런데 인간이, 타고난 존재가 자기를 그림자로 보지 않고 자기가 최종적인 목적이 되는 유일한 몸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겁니다. 여기 율법 이야기가 나왔지요. 14절에 보면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라고 합니다. 찢어버리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이 가미됨으로서 내가 최종적인 내 인생의 목적이다, 여겼던 이것이 율법이 쏘아대는 그 저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야 되는 겁니다. 율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찾아야 될 것은 거기서 자기 죽음을 발견해야 됩니다.

아, 율법의 차원에서 보게 되면 내 몸을 건사한다는 자체가 시작부터 이것은 글러 먹은 의식이에요. 하나님 말씀 지켜서 현재 있는 나를 구원해낸다든지, 천국 보낸다든지, 복 받게 산다든지, 라는 그 발상 자체가 율법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율법, 그걸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 유명한 율법 중에서 신명기 28장 15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개 같은 존재라 했잖아요. 율법이 없는 인간이나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이나 마찬가지로 율법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감당 못한다, 충족 못한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너는 필히 저주 받아야 돼.” 이걸 명백하게, 명확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좀 죽어줘.” 그 말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갖고 있는 이 몸은 뭐냐? 율법에 의하면 이것은, 우리 몸은 ‘죽음의 양갱’같은 고체가 되어서 그냥 굳어진 거예요. 우리가 커피를 마시든 뭘 해도 그 행위 하나하나 속에 뭐가 들어있느냐? 죽음이라는 것이 확정된 고체가 된, 확정된 그 면면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커피를 마셔야 돼요. 왜? 죽으라고, 죽기 위해서 커피를 마셔야 되고, 죽기 위해서 미국 여행 가야 되고. 그것도 혼자서 가야 되고. 다 죽으려고 하는 짓이에요. “주여,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알게 하옵소서. 내가 구원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알게 하옵소서.”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미 이 세상 모든 일로 가득 퍼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누굴 만나느냐 하면, 악마를 만납니다. 광야 하면 제일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이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할 그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때, 광야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물과 그리고 양식을 치워 버렸어요. 애굽에서 산다는 의미는……, 이제부터 좀 어려우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인간에게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라는 것,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은 앞에 뭐가 붙어요. 내 몸에 숨이 붙어 있고, 내 몸이 살아 있다 할 때 살아 있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살던 그 사람들이 광야에 왔을 때에 자기 의미의 최종성이 뭐냐 하면, 내 몸이 어떻게 살겠느냐, 내 몸이 어떻게 숨을 유지하겠다는 그게 마지막 관심사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도 치워버리고 양식도 치워버렸습니다. 고기는 물론 없고요. 그들은 자기의 본색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달라는 겁니다. 우리는 살려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그겁니다. 네가 아는 네 몸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태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네 몸을 통해서 말씀을 살려내고자 하는 거예요, 말씀을! 율법을 완성 시키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 취지를 아시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를 만났습니다. 제일 먼저 시험이 그 시험이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떡이 있어야 네가 하나님이 아들이 되든 뭘 하든 할 것이 아니냐, 라고 악마가 이야기했어요. 악마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시작은 바로 떡에 있다는 겁니다. 이 떡, 먹을 양식에 있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그래서 내가 일단은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세상의 인간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든 학문, 과학이나 철학이나 모든 기초가 악마의 제안에서부터 시작이 돼요. 떡이 있어야 된다. 그러면 떡은 어디서 오느냐? 영양분이 있어야 된다. 영양분은 어디서 만드는가? 영양분은 세상의 식물 또는 고구마, 쌀 알갱이, 밀에서 나오겠지요.

그러면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식물 속에 엽록소가 있어서 엽록소에서 그게 나온다.그러면 엽록소에는 뭐가 있느냐? 거기에는 캘빈회로(Calvin cycle)가 나와요. 암반응과 명반응. 햇빛이 있을 경우에 햇빛이 물을 분해해서 ATP라는 것을 만들고 거기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거기서 NADPH를 만들고 그것은 암반응, 햇빛이 없는 반응에서는 탄산가스를 이용해서 포도당이나 아미노산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포도당과 아미노산이 들어가서 그다음에 미토콘드리아에 가서 호흡작용을 하게 되면 여기서 탄소화합물이 고정이 되면서 ATP와 산소전달체계에 의해서 산소가 나오면서 사람은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3탄당 5탄당……, 뭐 탕탕 총 쏘는 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TCA회로 (TCA cycle)가 또 있어요. 캘빈회로가 있고 TCA회로가 또 있다는 말이지요.

NADPH(Nicotinamide adenine dinucleotide phosphate), 이런 것 다 알려면 영어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영어과외 받는 거예요. 세상 모든 일들이 전부 다 양식 얻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악마가 우리를 사육할 때 했던 그 법칙 있잖아요. 사육하는 것이 “떡이나 먹어라.” 그 사육하는 그 법칙에서 인간은 못 빠져 나오는 겁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양식을 먹고 농업을 해야 되고, 농사지으려 하면 여러 가지 농기구 필요하니까 장사를 해야 되고, 장사를 하려면 계산을 해야 하니까 수학이 등장합니다. 수학이 등장하고 장사해서 이득을 보게 되면 없는 사람을 괴롭히니까 국가 질서에 의해서 법이 나오고, 법에 필요하기 때문에 변호사가 나오고, 법들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왕이 필요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종합해 보니까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떡 떡을 얻기 위함이라. 악마가 인간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요. 뻔히 잘 알아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예수님께서 이야기했거든요. 네가 나를 찾는 이유는, 악마가 제안한 그 제안에서 1인치도 1센티도 1밀리도 빠져나가지 않는 그런 인간 상태에서 나를 찾는 겁니다.

우리는 떡이 있어야 이것이 숨 쉬는 것이고 살아 있다. 이것을 하는데 사람들이 힘이 없고 자신이 없다 싶을 때는 그 다음 부터는 종교가 동원돼요. 신을 찾자. 예배당 지어서 교회 만들고 빌자. 떡을 먹고 떡을 더 달라고 떡을 교환할 수 있는 돈을 더 벌게 해달라고. 자녀교육도, 너 이렇게 공부하다가는 떡 못 먹는다, 하는 식으로 자녀교육도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게 뭐가 잘못된 거냐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게 뭐가 잘못된 거냐?”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네가 그림자이고 싶어해? 네가 죽는 이유를, 네가 죽어 마땅한 이유를 찾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왔어?”라고 묻는 겁니다. 교회 오나 안 오나 공부를 하나 안 하나 마지막 의미가, 마귀가 기다리는 그 세계로 네가 지금 질주하고 있어요. 브레이크도 없이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고생 직사하게 한 어떤 50대 중년이 이제 직장생활 좀 하다 퇴직할 때 되어서 부인하게 애걸복걸 요청했던 모양이라. “여보, 내가 딴 데 안 보고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왔고 가족 위해서 매진했다. 이제 며칠만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게 해 달라.” 그래서 부인이 “뭘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것 해라.” 하니까 캘리포니아에서 테네시주까지 4박 5일로 자동차 여행을 하는 거예요.

캘리포니아-애리조나-뉴멕시코-텍사스-루이지애나-미시시피-앨라배마-조지아-테네시까지. ‘모텔 6’로 숙소 정하고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가는 거예요. ‘아, 내가 사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제야 하게 되었으니 자부심이 있는 거예요. 나는 그거 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35시간을 운전해서 4013킬로를 달렸습니다. 죽어났지 싶어요. 그렇게 비싼 돈 안 들이고도 남자 같으면 퇴직하고 난 뒤에는 등산복 입고 높은 산 등정을 해요. 높은 산에 올라가면 인생 다 사는 겁니까? “드디어 해냈다!” 뭘? 그게 인간승리에요? 거기서 내려와야 돼요. 어떤 사람은 내려오다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도 있지만.

도대체 인간의 끝이, 나의 끝이 뭡니까? 나의 끝은 바로 악마의 품속이었습니다. 네가 객기 부리고 나가봤자 “Take me home country road~” 결국은 내 품으로, 악마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광야에서 예수님과 악마가 성령의 주선으로 만나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시작도 악마였고 끝도 악마였다. 거기서 1인치도 인간은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몸이 아니고 분해되어야 하고 융해, 녹아져야 될 그림자, 하나의 영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다면 몸은 따로 있어요. 본문 17절에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렇다면 우리 몸은, 내 몸은 어떻게 되느냐? 그게 로마서 7장 24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기에 몸이 하나 등장하는데 무슨 몸이냐 하면, 사망의 몸입니다. 죽음으로 똘똘 무장 되어 있는 몸, 태어나면서부터 죽어야만 될 이유 거리로 가득 차 있는 몸.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 이유를 몰랐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율법의 의미를 앎으로서, 율법과 링크되고 연결 됨으로써 내가 이 몸을 살리려는 자체가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도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위배하는 의식적인 사고방식인 것을 알았던 겁니다.

사망의 몸이라면 사망의 몸답게 살아야 될 텐데 그동안 그는 마귀로부터 발을 빼지를 못해서 어쨌든 간에 이 몸 하나 추스르면 인생 성공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가 사도 되기 전 사울 시절의 모습이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돌이켜 보니까 그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몸이었구나, 자기가 사망의 몸인 것을 알고 “아, 주여, 어떻게 하면 사망의 몸에서 저를 건지겠습니까? 아이고, 예수님!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요. 이미 예수님이 일단 찾아오고 난 뒤에 다시 자기 몸을 보니까 그제야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내가 쥐지 말아야 될, 내가 움켜쥐지 말아야 될, 내가 기대를 걸지 말아야 될 그 몸에 미련 두고 집착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후회스럽게 돌이켜 보는 겁니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해도 소용없는 짓거리.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몸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 17절에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한다면, 그러면 아직도 우리는 장래를 기다려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있겠지요.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말에서 오늘 주보 요약을 오랜만에 보겠습니다.

“<이번 주 설교 요약> 본문 : 골로새서 2 : 16-17 제목 : 그림자” 그 밑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장래 일의 그림자’가 되려면 ‘장래 일’이미 확정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림자 인생 속에는 단 1초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단 1초도. 그 점에 대해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요. 사람이 죽게 되면 죽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세자로 해서 ‘꼴까닥’ 하는 데요. 한순간이거든요. 그 한순간 안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여태껏 살아왔던 90 평생이 그 한순간에 전부 다 같이 빠져서 날아 가버려요. 그 순간, 내가 숨을 거두고 죽는 순간 90 평생이라는 긴긴, 사진 찍었으면 한 3만 장 찍었을걸요, 엄청나게 많은 그 사진, 돌사진부터 해서 찍은 모든 사진이 그 꼴까닥 하는 한순간에 다 녹아져 버려요. 순간이라는 그 용액에 완전히 녹아 없어져 버립니다.

시간은, 매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의해서 토막나야 돼요. 잘게 토막나야 돼요. 단 1초도, 우리는 이 땅에서 내 몸으로 산적은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1초도! 그냥 인간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인생은 시간의 다발이 아니고 사건의 다발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주님이 여기 함께 계시다는 것,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는 하나의 그림자의 기능을 해온 거예요.

시간이 몸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알파요 오메가’거든요.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은 모든 것은 원으로 모아지면 돼요. 원의 특징은 항상 되돌아오는 겁니다. 수학적 원으로 표현되는 것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라 합니다. 모든 것은 다시 되돌아오니까. 끊어짐과 이어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몸을 가지고 세상을 보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상은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제 말이 아니고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4절에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옛적부터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그대로. 물도 그대로 있고 모든 것, 산천초목도 그대로 있고, 태양도 별도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물도 그대로 있다 하다가 작살난 게 바로 노아홍수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기를.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이 그대로 간다는 거예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이걸 누가 모르느냐 하면, 바로 누구의 그림자라는 안목이 아니고 내가 최종적인 의미가 될 때는 ‘그렇고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인생이라 하는 것은.’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 해가면서 노자 나오고, 공자 나오고, 철학이 나오면서 ‘세상은 시작도 끝도 없고 무한의 반복이다.’ 거기서 니체철학도 나와요. 불교 철학이. 하여튼 마귀 안 들렸다 할까 싶어서 티를 내.

그렇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그냥 사는 겁니다. 산이나 올라간다든지 혹은 자동차 타고 4박 5일 동안 무려 몇 킬로, 4만 킬로를 간다든지. “그냥 인생이 뭐 있어요? 인생은 그냥 살다 보면 가는 것이 인생이지.” 맨날 방송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우리는 좋다고 그것 보지요. ‘개는 훌륭하다’ 해가면서. 모든 것이 마귀가 설정한 거예요. 마귀가!

너한테 의미 있는 것은 떡, 떡이 전부에요, 떡이 전부! 떡 빼앗기면 다 빼앗긴 거예요. 네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런 식이에요. 율법도 없고, 말씀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도 없고, 그리스도로 마감되는 것도 없고. 진짜 몸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봤느냐, 하는 겁니다. 알파요 오메가에요.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은 시작도 예수님으로 시작했거든요.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원운동이라는 말이지요. 모든 게 원운동이에요. 그분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가 하시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는 그 일에 의미 있게 끼워달라고 뒤에서 자꾸 밀어대는 그 세력이 있어요.

그게 악마인데 주께서 하시는 그 일에 “네 몸, 네 몸도 귀하잖아. 그러니까 주님보고 너 구원해 달라고 요청해봐. 요청해봐! 너도 주의 일에 보탬 된다고 이야기해 봐. 네 성과를 얻고자 해서 이야기해 봐.”라고 자꾸 밀어내는 세력이 있어요. 악마가 그 짓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자식이 네 명인가 있고 부모하고 할아버지하고 같이 사는데 그 집이 소를 키워요. 그런데 이 손자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요. 친구들이 “네가 그렇게 꼭두새벽부터 소 키우고 저녁때까지 종일 일을 하는데 부모님이 너에게 용돈 주냐?” 하고 물으니까 도리어 소 키우는 청년이 화를 내면서 “부모가 먹여줘. 재워줘.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 그 말입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 되었지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고요.

주님께서 우리를 그림자 만들어줘. 가라 하면 가게 해줘. 오라 하면 오게 했어. 내가 거기에 한 다리를 왜 끼어들어야 됩니까? 거기에 내 구원이 왜 필요합니까?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만 하면 되지. 우리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면 죽어주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력으로 안 되는 겁니다. 이게 성령이 임해야 되는 거지요. 인간이 될 수가 없어요.

시작과 끝을 주님께서 이렇게 하다 보니까 시간이라는 것은 어차피 이미, 자기가 몸이라고 한다면 장래가 성립하겠지만, 이미 자기가 주님의 몸의 그림자라면 주님 몸 안에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일, 사건과 사건만 있는 겁니다. 시간이란 베드로후서 3장처럼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시간이라는 것, 어차피 이 세상은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시간 자체가. 왜냐하면 시간이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시간이 쏙 들어가니까 그냥 휙 하고 지나가는 거거든요. 시간이 지나가는 거예요. 몸체 자체가 시간이 없다 보니까 몸체와 연결된 그림자에도 시간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시간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예측하거나 목적을 둘 인생을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년에는 잘하겠습니다. 다음 해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 희망이나 목적을 그림자 입장에서는 가질 이유가 없어요.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그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속한 이 세상에서는, 주님도 이 땅에 왔지만, 뭐든지 눈으로 관찰해요. 이걸 ‘관찰의 함정’이라고 저는 표현하고 싶은데 자꾸 관찰하고, 관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카운트한다고요. 하나, 둘, 셋, 넷, 저것은 내 것, 이렇게 돼요. 관찰하고, 헤아리고, 헤아려서 내 것과 내 것 되지 않을 것을 따로 구분하고. 그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오늘도 건졌다. 오늘도 살았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 살아서 뭐할 건데? 살아서 뭐할 건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모든 것이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처녀가 임신을 하게 했어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것, 그거 인간들이 예측했습니까? 카운트했습니까? 그게 인간들이 기대한 이야기입니까? 아니지요.

심지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날 때는 별들이 움직였습니다. 그 별들이 움직이는 것 그것 인간들이 예측했습니까? 인간들은 늘 별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지요. 그거 인간들이 예측했습니까? 인간들의 과학 속에 그게 있습니까? 없지요.

인간들은 예측하고 카운트해서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무리한 요구를 해요. “대자연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거라. 내가 가서 너희들을 카운트하기 전에, 내 것 만들기 전에 가만있어.” 네가 하던 대로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대자연을 있는 대로 그 원칙 그대로 간다고 생각했지 하늘의 별이 움직이고 바다가 누구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울렁거리기도 하고, 잠잠하기도 하고,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 이런 것은 인간세계에서 전부 다 배제를 해버리는 거예요. 삭제를 해버려요.

이것은 반칙입니다. 자기 몸이 이해되는 것은 남기고 이해 안 되는 것은 배제해 버리는 거예요. 참 우리가 하는 짓거리가 전부다, 모조리 다 반칙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1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달라. 기적 행하면 기적 보고 당신 메시아라고 인정 하겠다.”라고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하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이게 과학 아닙니까? 그 당시 과학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측정하고 눈으로 관찰하는 그 함정에 빠진 거예요. 이것을 관찰해서 ‘오, 저녁에 하늘이 붉으니 날이 좋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 저녁에 날이 궂겠네. 이것은 맞는 거네 맞으니까 이것은 진리네. 우리의 지식이 진리로 전환되는구나. 아, 그러면 우리는 바르게 살아가는 게 맞구나.’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말하기를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과학, 학문이 이게 하나의 함정, 미끼였어요. 자기가 안 죽어야 될 이유를 지식을 확보하고 진리를 찾음으로써 확보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게 지식이거든요. 인간은 지식을 가지면 안 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지식을 가지면 안 돼요. 인간은 지식을 버리고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려야 돼요.

왜? 주께서 살려주기 때문에. 참새를 그렇게 키우고 잡초를 그렇게 키우는 겁니다. 인간이 해야 될 것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가 밥 먹고 사는 게 자기가 할 일이 아니에요. 인간이 할 일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3절에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하지요. “너희가 기적을 원한다고? 기적 봐서 나를 믿겠다고? 왜 기적을 보여주면 안 되는지 이유를 아느냐?”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이 말은, 너희들은 세상을 보면서 마땅히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찾는 식으로 너희들은 세상을 관찰하지 못한 그러한 죽은 심령이다, 그 말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인간이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서 과학이 발달했는데 그 과학의 발달에 힘을 실어준 것이 1684년 ‘라이프니츠’라는 사람이 뭘 고안해 냈느냐 하면, 미분을 만들었어요. 微分, differential. d자로 시작되는 미분. 골치 아프지요.

미분이 뭐냐? 원의 둘레를 가지고 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호의 두 지점을 찍어서 직선을 그으면 현이라고 하거든요. 호는 곡선이고 현은 직선이기 때문에 남는 게 있어요. 오차가 있다고요. 그 곡선의 둘레를 못 재잖아요. 그런데 라이프니츠라는 사람은 재는 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 각도를 무한으로 쪼개는 겁니다.

무한으로 쪼개고 적분 積分, Integral Calculus, 다 끌어모으는 거예요. ‘인테그랄’이라 해서 s자를 길게 늘어뜨린 ‘∫’ 표시를 해서 미분한 그 쪼가리를 다 모아놓고 그 오차가 극히 줄어들면 그게 똑같은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나머지는 빼버리는 겁니다.

라이프니츠라는 사람이 미적분을 고안했고 그 뒤에 뉴턴이 그걸 인정해서 만유인력법칙을 만들어내는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이니 잘 들으세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 미분, 적분, 그런 과학을 발달시켰느냐 하면, 존재, 인간은 있음을 좋아하고 없음을 싫어해요. 내가 여기 있음을 있음으로 계속 끌고 가야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누구의 사건으로 보는 것을 극히 혐오합니다. 나는 나, 이고 싶어요. 내 덕으로 내가 이만큼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나 있음으로 그걸로 모든 것은 게임오버, 끝났어요. 내가 스스로 있다는데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잘난 나, 옳은 나, 의로운 나로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누구냐? 바리새인입니다.

라이프니츠가 곡선의 거리를 측정하고 면적을 내기 위해서 미분을 사용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인간이 갖고 있는 윤리, 도덕을 동원해서 approach, 접근해서 율법을 지킬 대로 지키고 또 지킬 대로 지키면 얼추 하나님께서 애썼다, 해서 천국 보내주지 않겠느냐. 이게 바리새인, 오늘날 청교도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누굴 공격하느냐? 오늘 본문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비난)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들은 왜 안식일을 철저하게 안 지키느냐고 해도 누가 너희들을 비난해도 비난할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마귀들이 하는 짓이니까요. 마귀들이 하는 짓은 뭐냐?

있음, 존재예요. 존재를 어떻게 떡 먹이고, 밥 먹여서 살게 하느냐? 이게 인간들이 머리에……, 이걸 머리라고 해야지……, 흥분하면 안 돼요, 인간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 이것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내일 돼도 내가 될 수 있느냐? 지금의 오늘의 내가 어떻게 내일의 내가 될 수 있느냐?

주께서는 너 아는 것, 네가 가진 것 다 버리는 그러한 순간들을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에게 매일 꽂아줬습니다. 그게 잠자는 거예요. 잠잔다, 하는 것은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이렇게 자게 되면 자는 그 순간 내가 아는 것도 날아가 버리고 내가 가진 재산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것도 날아가 버려요. 그야말로 시신 시체가 되는 겁니다.

밤에 잠 안 자려고 치킨 시켜 먹고 라면 끓여 먹으면서 밤새도록 노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은 사흘 만에 또 자요. 깜박 졸 때 누가 데려가도 몰라요. 왜? 죽은 시체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원래부터 잠자는 존재, 이미 죽은 존재를 사건으로서 주께서 쓰시는 거예요.

너는 지옥 가거라. 너는 천국 가라. 이미 죽은 시체 덩어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학문이라는 것이 이처럼, 또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이처럼 나의 악마성, ‘떡을 먹어야 된다. 왜? 내가 있어야 되니까. 내가 존재해야 되니까.’ 내가 있어야 된다, 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악마가 결탁 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를 먼저 만난 겁니다.

사람 만나기 이전에 악마부터 먼저 만난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 어떻게 살려줄 거요?”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하나님, 저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 뜻이 살아날 겁니까?” 그 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험에서 빠져나갔어요. “마귀야, 시험하지 말고 아버지 뜻대로 살아라.” 이게 세 가지 시험에서 주어졌던 말씀이에요.

표적을 원하고 기적을 원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미련이 있다는 거예요. 남은 죽어도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그 삼층천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에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고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말이 먼저 있고 인간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그 말씀대로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나를 삼층천에 올려보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주도자는 주님이지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 광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브리서 4장에 있는 말씀 그대로 하면 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주님께서 말씀 위주로 나가고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은 자기 몸 위주로 나오니까 여기서 의견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전부 다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만든 거예요. 이게 뭐라고요? 이게 바로 그림자에요. 그림자, 하나의 영상이에요. 하나의 드라마를 보여준 거예요. 옛날에. 하나님은 이렇게 다뤄서 천국 보내고 이렇게 다뤄서 지옥 보낸다. 그걸 보여줘요. 그들이 다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의 역할을 했다 그 말이지요.

주께서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주께서는 말씀 위주인데 자기들은 소멸할 몸을 갖고 있으면서, 소멸하면서도 이걸 못 놓겠다는 거예요. 마귀한테 사주받아서 그런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이걸 이겨낼 자신과 실력이 있느냐? 성도도 없어요. 그런 실력, 그런 능력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절하게 이렇게 해주십니다. 11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나는 죽었지만 살아계신 쪽이 있잖아요. 오늘 본문이, 골로새서 본문이 살아 있잖아요. 너는 그림자라고. 이걸 우리한테 일깨워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 결과가 뭐냐? “주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냈습니까?”라고 감사하는 겁니다.

따라서 말씀 앞에 우리는 공포로 다가가서 마무리는 즐거움으로 되어야 돼요. 주께서 회를 뜨시겠다는 거예요. 회 아시지요. 주께서 우리를 회 뜰 때는 우리의 시간을 회를 뜨는 거예요. 조각조각. 저녁이 되면 잠자고 아침이 되면 또 회 뜨고, 저녁 되면 잠자고 아침 되면 또 회뜨고. 계속 회 뜨는 거예요. 쟁반 밑에 먹는 배 딱 깔아놓고. 맛있거든요.

평생의 우리의 삶은 결국 주님 입에 다 들어 갈 걸. 이 말은, 몸이 예수님이 자기 그림자를 빨아 당긴다 그 말입니다. 내게 남아 있는 내 몸은 순간으로 소멸되어야 됩니다. 흙이 되어야 돼요. 그동안 내가 살았던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의 기억입니다. 그러니까 내 기억이 아니고, 내 인생 내 기억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기억이에요.

우리는 그걸 뺏지 맙시다. 그걸 훼방하지 말고 강탈하지 마세요. 하루하루 삶이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물이지 나에게 돌아오는 나의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의미입니다. 마귀가 시켜서 “너는 네가 의미 있어야지.” 하고 자꾸 뺏는데 이제는 말씀이 우리를 다시 한번 회 떠서 “주여, 오늘도 주의 말씀대로 되었군요.”라고 해서 감사하고 즐거운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믿음에 화합하겠습니까? 아담으로 태어났기에 마땅히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이 찌질한, 처참한 형편을 저희들이 깨달은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는 죽었지만 말씀은 살았기에 날마다 주님의 일이 되도록, 주님의 일로 기억되게 되도록, 알 수 있도록 해주신 그 은혜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체 배달원  (0) 2021.04.26
과장되지 않는 것  (0) 2021.04.18
십자가라는 철주  (0) 2021.04.04
율법의 실현  (0) 2021.03.29
할례와 코메디  (0) 2021.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