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십자가라는 철주

아빠와 함께 2021. 4. 4. 21:45

십자가라는 철주 

2021년 4월 4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15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예수님으로 세상을 이겼다”가 아니라 “십자가로 승리하셨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이든 메시야든 성령이든 신학이든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안 망하기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불행하지 않고 늘 다행스럽고 불편함이 없이 살고 싶어합니다.

즉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돌 들고 와서 예수님에게 부탁하기를 “나를 찍어서 이 현장에서 즉사시켜 달라”고 할 자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평생을 현실 속에서 살면서 ‘나는 망해야 돼’를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늘 부추기는 다른 능력자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메시야를 찾는 자와 같이 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호하고 추정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주께서 그들에게 밝혔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즉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권세자에게 눌려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평소의 모든 사고방식은 그 보이지 않는 권세자의 사주를 받으면서 형성된 겁니다. 그 의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망해서는 아니된다”입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든 자기를 안 망하게 해준다면 마음을 엽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죄가 인간 세상 위에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 인간의 형편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개인부터 전체 국가까지, 더나아가서 악마까지 한꺼번에 관통하는 철주를 꽂아버리신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단순한 ‘예수님의 존재’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인간이 둘러싼 정신적 현실까지 괴멸시켜 버리신 겁니다. 인간의 괴멸의 대상이고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보호받고자 기대한 정신적 환경까지 소멸시켜 버리십니다. 그 모두에 죄가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이미 자멸하는 프로그램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꽃은 지기 위해서 피는 것이고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성도로서 중요한 것은 안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이유’를 미리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양상으로 자기 자신이 놀아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상대할 최종적 대상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상대하는 최종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악령입니다. 마태복음 12:29에 보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보다 더 센 자가 인간을 ‘꼼짝마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진정한 센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은 인간은 모르고 악마는 압니다. 따라서 악령은 인간세계의 운전자로서,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악마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등장하면 급히 핸들을 틀어서 십자가가 보이는 않는 쪽으로 시선을 유도합니다.

악마가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악마는 ‘그 예비된 나라’가 들어갈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변동의 여지가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악마는 각종 유인책으로 인간들을 자기 사람으로 붙잡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 세계의 경계선에 선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이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임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창세기 39:17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어린 요셉(17살)에 빠져서 동침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제안을 여러번 거절하자 그 여인은 강제로 요셉을 범하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나니 다음과 같이 요셉을 모함합니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창 39:17-18) 즉 보디발의 아내는 ‘현실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홀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이 꿈은 애굽의 모든 실제 현실을 가상현실임을 폭로합니다. 진짜 현실은 요셉과 함께 한 그 꿈에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민족의 위상입니다. 또한 열왕기하 13:17에 보면,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왕 요아스는 나름대로 현실을 생생한 현실로 직감합니다. 큰 나라 아람나라가 작은 나라인 북이스라엘을 친다는 그 현실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는 소리를 하면서 엘리사에게 찾아온 겁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위상을 이렇게 봅니다. 세상 현실과 진짜 현실 사이에 낀 경계선에 있는 나라라고 말입니다.

창을 열게 하고 화살을 쏘게 합니다. 세 번밖에 화를 쏘지 않는 이스라엘왕을 엘리사는 나무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생각한 ‘진멸’이라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왕하 13:19)

“How deep is your love?”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죽기 전에, 자신이 예수님을 없애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옥가도 마땅함을 알면 알수록 십자가의 사랑은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의 운명은 다 탄로났습니다. 다 가짜 현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가 협박받거나 지배받은 권세가 능력이 더 이상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강-골 2장 15절(십자가라는 철주)21040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15절입니다.

골로새서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정사와 권세라는 개념, 단어 안에 사도바울은 다 축약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것은 제거 대상이라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패배시킬, 하나님께서 없애버릴 그러한 대상으로 보는 누가 등장했는가? 십자가가 등장했고 십자가가 등장함으로써 이미 그것은 확정된 사실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 세상의 정치와 권력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이제 그것은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는 탈락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정사와 권세, 이 정사와 권세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쉽게 국가라고 하면 됩니다. 이 국가라는 것을 하나님은 없애 버려야 될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느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지금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한다면 너희가 누구냐 할 때 귀신들이 그렇게 고백했던, 그 귀신 나라에서도 유명했던 사도바울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국가와 정치는 이것은 마땅히 소멸되어야 된다,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동일하게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느냐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지요.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는 이유가 있어요. 십자가가 담긴 의미가 그냥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력과 권세와 정치, 인간의 생각의 최종적인 모든 것은 십자가만 남기고 나중에 다 소멸되어야 된다. 그런 뜻이 바로 십자가다.’라고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십자가를 그렇게 알고 있습니까? 제가 울산에서 강의를 하는데 집사님이 오셔서 체온체크를 해요. 안 하던 일을 해요. 그래서 제가 강의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거 목사님이 시켰습니까, 나라가 시켰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이거 누가 시킨 거지요?

체온체크 하라는 이것이 평소에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작년에 그런 일 없었어요. 누가 시키던가요? 그것은 체온체크 하는 우리 생각을 누가 대신 반영해주느냐 하면, 국가가 우리 생각을 대신해서 체온체크 해야 코로나 안 걸리고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흔쾌히 동의한 거지요.

그러면 이것은 국가의 생각과 우리 생각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통하고 있으니까 거부하지 않는 거예요. 내 목숨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체온체크가 내가 사는데 유리하다고 여기는 점에서는 국가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국가를 소멸하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지금 누구 말을 들어야 됩니까? 십자가 이야기가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이야기하는 십자가로서 주장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교회 밖으로 나가요. 220여 개국의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 지구 표면을 덮고 있는 그 모든 나라 그것과 십자가 사건과 관련성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매고 나만 천당 가겠다, 하는 그런 생각은 사도바울에게는 없어요. “네가 십자가를 알아?” “압니다.” “그러면 네가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마땅히 소멸 되어야 되지요.”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사와 권세, 이 모든 권력자 또는 정치가들뿐만 아니고 국가운영 자체에 작용하는 그 힘, power, 그게 힘이라는 말이지요, 그 힘이 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가정까지 내려오고 있어요, 가정에까지. 그리고 가정에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내 안까지 내려와 있어요.

그러면 나부터 시작해서 내가 태어난 가정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가정, 그 위에 학교, 직장, 교회, 동호회, 그걸 통합하는 상위개념으로서의 최고레벨의 단체는 국가, 그래서 국가 밑에 여러 가지, 재벌도 있을 것이고, 낚시 동호회도 있을 것이고,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고, 절도 있고, 방송국도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사회단체도 있고, 학연, 지연, 가정이 있고 가정 안에 내가 있고.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뭐냐? 철주(鐵柱)를 가지고, 십자가 끝이 뾰족하잖아요, 안 보여줘도 알겠지요, 저 뒤에 걸려 있으니까 나중에 보세요, 뾰족한 그 끝을 가지고 어디에 꽂아 버리느냐 하면 내 육신에다 그 십자가를 꽂아 버리는 겁니다. 꽂아 버리면 그 꼭대기가 구름까지, 그리고 하늘을 통과해서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하늘나라까지 이어진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국가라든지, 회사라든지, 동호회, 친목 단체, 교회, 이것은 어디까지 보고 있느냐 하면, 하늘나라까지 보지를 못하고 우리 눈에 보이는 데까지, 국가라는 그 현실까지만 보이지요. 십자가는 그 위까지 꽂아버려서 여분의 나머지 부분이 천국까지 이어졌는데.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겁니다. 승리라는 것은 어느 판에서 나올 이야기냐 하면, 전쟁판에서 나오는 거예요. 참혹한 전쟁판에서 승리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싸울 마음도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인간세계를 상대해서 싸워왔고, 그 싸움의 결과로 주님은 승리했고,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 승리의 확실한 증거는 바로 십자가가 이 세상 권력의 한복판에, 권세의 한복판에, 그리고 내 안에 십자가가 꽂혀 버렸고, 그 십자가만 승리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너는 십자가 밑에 꿇어!” 그런 뜻이에요. 십자가가 너 한가운데를 관통해버렸으니까 이제는 너는 없고 십자가의 승리가 네 속에 하나의 십자가 승리의 현장으로서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정사와 권세까지 포함하고 우리 자신까지 포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십자가가 국가에 대해서 소멸시키느냐? 사도바울은 무정부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국가 자체를 아주 작살 내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간단합니다. 들에 핀 꽃을 보아라……,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6-8절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벚꽃, 목련 꽃을 보세요. 꽃을 보면 꽃은 지기 위해서 핍니다. 벌써 다 졌어요. 비가 와서. 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 그 안에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자체적으로 그게 폭파되도록 시한폭탄을 창조 안에다 집어넣은 겁니다.

꽃도 마찬가지도 동식물 모든 것 심지어 인간도 마찬가지고요. 선악과 왜 심어놨습니까? 인간 죽으라고 심어놓은 거예요. 네 눈에 보이는 이 아담, 아담이 진짜 인간의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작이 있어야 하지만 그 시작 안에, 아담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그 들어있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 아담 속에 들어있었고, 그 형상의 형상됨은 바로 생명 나무와 선악과를 심어놓음으로써 생명 나무가 스스로 어떻게 시작을 했고, 어떤 전개를 이루면서 그것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인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살아 있지만, 태어났지만 결국 죽고 또 태어나도 또 죽고,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지만 결국 죽고. 그래서 인간은 죽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죽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죽는 이유를! 지금 여러분은 제 눈에 보기에는 아직까지 공동묘지에 묻히지 않았고 아직도 숨쉬고 있습니다.

이 찬스는 살 이유를 찾기 위해서 있는 기회가 아니고요. 어차피 죽어요. 늙어 죽는데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를 아는 기회를 아직도 우리에게 허락했다는 점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죽는 이유만 알고 있어야 돼요.

성도의 기쁨은 내가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게 기쁨이에요. 다른 기쁨이 있으면 안 됩니다. 지금 죽어도 ‘아, 참, 아, 이제 죽나. 아, 이제 가는구나. 아, 이때를 위함이요.’ 이렇게 감사할 수 있을 때 그게 죽는 이유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 죽는 이유,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는 몰랐지요. 인간은 죽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나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누가 나를 좀 살려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린애들 보게 되면 전부 다 자기만 살고자 애를 쓰고 있어요.

어떤 인간도요, 주님 앞에 짱돌 들고 와서 “주님, 이걸로 제 머리를 쳐서 지금 저를 즉사시켜 주옵소서.” 하고 부탁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 나를 어떻게 살릴 거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 와도 “나 어떻게 살릴 겁니까? 내가 뭐해주면 저를 살려줄 수 있겠어요? 당신은 메시아니까 날 살리는 솜씨를 한번 발휘해 보라.”라고 다그치는 것 그것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엄청 나와요. 엄청 나온다고요.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 개, 그걸로 5천 명 먹여 살렸을 때에 그들은 세상 전부를 얻은 기분 들었을 거예요.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으로 삼자, 하고 산 넘고 물 건너서, 바다 건너서 계속 따라 오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을 “너희 집으로 가라!” 집으로 보내시는 분은 주님이에요.

네가 나를 찾는 까닭이 무엇이냐, 한번 따져보자는 거예요. 네가 지금 사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나에게 왔느냐, 네가 죽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내게 왔는가, 를 주님이 점검해보겠다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를 인정하는 자냐, 아니면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 마땅합니다, 하는 그걸 찾고 싶어서 왔느냐를 주께서 묻는 거예요. “네가 나를 찾는 까닭이 무엇이냐? 필요한 게 뭐냐? 떡이었지?” 요새 말로는 “돈이었지? 떡이었지? 그러면 나는 너하고 상관없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승리하고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십자가로 승리했다. 예수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승리했어요. 이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 십자가가 터진 그 현장이 메시아 다 인정하고요, 하나님 인정하는 그 집단 한가운데서 이 십자가 사건이 터졌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와탕카카~, 해가면서 콜라병 하늘에서 떨어지니까 신이 내려왔다는 식으로 미개한 민족, 아프리카 난쟁이 부족 그 가운데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최고로 정신문화가 가장 발달한, 소위 하늘나라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던, 신과 가까이 있다고 누구보다도 자부했던 그 집단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터졌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십자가 사건의 정의가 뭐냐, 물으신다면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면 되지요.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싸운 싸움의 현장이 십자가에요.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싸운 거예요. 기독교 교리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지요, 뭐. 후딱 받아들이지요. 천당 보내준다는데 안 받아들일 것이 뭐가 있겠어요.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이십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지요. 그런 신학적 교리를 확 받아들이지요. 문제는 인간들이 기존의 하나님을 못 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 예수님’이에요. ‘1+1’인가요? ‘하나님 + 예수님’이에요. 둘 다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좀 있다가 목사님이 성령도 이야기해요. 성령도 믿어야 돼요.

세 개를 한 묶음으로 파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시어머니 혹은 시아버지가 세분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안 믿었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를 안 믿었어요? 유대인들이 요엘서에서 예언한 성령을 안 믿었을 것 같아요? 다 믿었어요.

유대인들의 그 하나님은 어디서 나온 하나님이냐 하면 자신의 뜻과 통하는 하나님을 그들은 만들어낸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만들어낸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인간은 메시아를 만들 줄 알고, 성령도 만들 줄 알고, 예수도 만들 줄 알고, 하나님도, 삼위일체도 만들 줄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사건이 필요 없어요. 결정적 사건, 충격적인 사건, 자기가 무너지는 사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 어떤 지식을 확보하면 천당 갑니까? 나는 건들지 마시고, 제발 내 인생은 건들지 마시고 어떤 지식을 확보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하기를 “너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사건이 필요하다.” 그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은 철주로 나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왜 자꾸 신을 만들어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을 자기와 관련 있다고 그렇게 전부 다 확보하려고 하는가?

로마서……, 참 이걸 보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미움받았나를 알 수 있겠지요. 로마서 5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사망이 왕 노릇 한다.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만들고, 또 메시아를 고대하고, 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드는 이유는 그게 네가 시킨 것이 아니고 너희 왕이 시켰다는 겁니다. 그 왕 이름이 죄입니다. “너는 너 말고 따로 네 위에서 따로 왕 질을 하고 너는 그 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인 것을 네가 인정하느냐? 인정했어?”라고 묻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도바울도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죄가 자기 왕이고 자기는 똘마니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단순히 예수님 만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홀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나는 악령과 더불어서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악마와 더불어서 함께 있었던 거예요.

인간의 정신문화, 인간의 신체와 더 나아가서 정신환경에서 악마는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딴 동네 사람이지요. 사도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도가 되기 전까지는. 악마가 왕이라는 말은요, 가만 놀고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왕이 왕 다운 어떤 활동에 나서고 있는 그 결과가 이 땅의 모든 정사와 권세, 이 모든 국가 들이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짐승이라고 합니다. 짐승의 힘에서 파생된 것이 국가예요. 다니엘서에 보면. 마지막 날아든 돌이 금, 은, 동, 철, 진흙으로 된 우상을 친다는 그 이야기를 시간관계상 하지 않겠습니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무너뜨리기 위해서 온 거예요. 국가라는 것을.

마태복음 12장 29절에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도둑이 담을 넘어서 세간살이를 도둑질할 때 그냥 도둑질하지 못하고 그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더 이상 주인으로서 그 값을 못하게 해놓고 가재도구를 다 들고 가는 것처럼 메시아가 오는 현상,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왔는지 안 왔는지를 어떻게 판정하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그동안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나를 벌벌 떨게 만들고 나를 공포에 집어넣었던, 나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너 말 안 들으면 죽는다’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담을 넘어온 우리 주님께서 꽁꽁 묶어놓고, 그다음에 그동안 벌벌 떨면서 세상의 힘에 묶여 있던 나를 강제로 전리품으로 강탈해 가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경로 속에서 뭐가 반드시 드러나야 되느냐 하면,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무섭게 하는 더 강한 힘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감이 잡히는 거예요. 아, 나는 철없이 내 맘대로 한다 했는데 마스크 이거 누가 쓰라 했습니까? 지금 그렇다고 벗지는 마시고요. 이거 누가 쓰라고 했습니까? 처음부터 썼습니까? 아니지요. 갑자기 명령이 있었지요. 지시가 있었지요. 김 정은이 시키던가요?

내가 안 시켰잖아요. 중요한 것은 이점이에요. 내가 나보고 마스크 쓰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아, 이거 중요한 점인데 내가, 이 세상은 내 맘대로 못하는 세계라는 거예요. 남자가 결혼해도 철없지요. 결혼해서도 총각 때 놀던 친구와 계속 같이 놀 줄 알았지요.

자기 아내 놔두고 저는 낚시나 하러 돌아다니고, 돈도 내가 번 돈 내가 쓴다 해서 자기가 다 쓰고 돌아다니고요. 취미 생활한다고 로봇 인형 모은다고 다 쓰고요. 내 취미는 차 바꾸는 것이다, 하면서 차 바꾸고 하다가 아이가 태어나 보세요.

우쭈쭈쭈~ 애 보고는 어쩔 줄을 몰라요. 그러면 지금까지의 친구관계 다 끊어집니다. 돈도 그렇게도 아끼고. 이게 인간 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식을 위해서 뭐든지 합니다. 자식은 어차피 남인지도 모르고 그게 뭐라고. 자기 조정에 들어가지요, 자기 조정. 나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고요. 자기 때문에는 울지 않아요. 참아요. 하지만 자식이 아프면 못 참아요. 누가 나를 때리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 학교 가서 얻어맞으면 그 학교고 교장이고 뒤집어집니다. 쇠파이프 질질 끌고 학교 찾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알 수 없는 힘, 그걸 어렵게 해서 존재의 힘인데, 이 존재의 힘에서 못 빠져나와요. 있음, 뭔가 있다는 것에서 못 빠져 나와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그러면 나에서 못 빠져나와요. 이상하게 이 있는 나는 없는 내가 되기 싫어요. 정말 짱돌 들고 주님보고 지금 나를 없애주세요, 하는 그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더 살려달라고, 이 존재를 존재로 계속 이어달라고 기도하지 나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몰랐지요. 우리는 몰랐지요. 그게 죄가 왕이기 때문에. 죄가 그렇게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의 똘마니로서 우리는 맹목적으로 이유도 없이 그렇게 공포 속에서 살아왔던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은 빼돌려버립니다. 바보 등신 같은 인간은 빼돌려버리고 성경은 뭐냐, 악령과 성령, 악령과 주님과의 싸움입니다. 악령과 성령은 끝판왕이에요. 싸움의 끝판왕.

마태복음 12장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관점이 그겁니다. 31, 32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지금 악령 이야기하고 성령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에서 우리가 빠졌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고마워 해야됩니다. “어떻게 착하게 하면 천당 갑니까?” 그런 소리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잘하고 못하고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 대전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출생지가 달라서 죽는다고요. 영토가, 출생한 영토가 다르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끄집어낼 때는 그 출생지가, 이 땅에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한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가 복이 있다고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은 자만이 천국에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게 무슨……, 이런 희한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십니까? 그만큼 악마가, 인간의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집요하게 네 존재를 버리지 말라는 그 집착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악마에게 사주를 받는, 같이 농락당하는 그런 결과를 낳았던 겁니다.

사도행전 20장 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사도바울은 마지막 아시아를 떠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했지?”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너희들 속에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살지는 않았다는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이런 금이나 은이나 의복, 존재에 필요한 것들을 탐하지 아니하고 그러면 사도바울의 관심사는 뭐냐? 악령과 성령의 세계, 바로 그 세계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언급한 거예요. 금이나 은, 이런 것은 중요한 문제도 아니에요. 부자 되었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 문제가 그 문제가 아니에요.

악령과 성령의 문제. 악령과 성령의 문제에서 인간은 뭐냐?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아담 안에서부터 왕 노릇 하고 있었던 거예요. 죄가. 죄가 왕 노릇 하고 있다면 그러면 구원은 뭐냐? 죄가 왕이잖아요. 우리에게는 왕이 있다고요. 왕이 있는데 그 백성인 부하가 왕의 권세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은 아예 없어요. 그냥 거기 종속되어서 예속되어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뭔가 인간은 뭔가 답답하지, 예속되었지요, 죄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을 못 벗어나기 때문에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자꾸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교회를 만들어내요. 신학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메시아도 만들어내고 성경을 참고로 해서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그 모든 배경에는 뭐냐?

내가 뭘 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는 그러한 동기부여 때문에 뭔가 착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체가 누구 시킨 것인가 하면, 그게 악마가 시킨 짓이라니까요, 그게!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게 아니고 십자가가 우릴 구원하시는 것을 아시겠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십자가가 왜 귀한 의미를 담고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이 십자가를 안 넣어준 사건이에요. 너는 우리 세상 아니야, 라고 배제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정사와 권세가 그 노림수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진짜가 나타나는 그것을 밀어버린 거예요. 진짜가 나타났다.

진짜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 인간은 몰랐지요. 하지만 모든 권세와 정사를 쥐고 있는 보이지 않는 악령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 악마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들은 예비 된 자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제일 무서운 개념 중 하나가 예비 된 거라는 거예요. “너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지옥 가야 돼.” 이게 예비 된 거예요.

그래서 악마의 하수인들도 예비 된 곳에 갑니다. 지옥 갑니다. 자기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절대로 바뀔 수 없다는 것. 쉽게 말해서 이런 거예요. 악마가 우리 개인이나 인간의 핸들을 쥐고 있어요. 운전사로. 그러면 저 앞에 예수님이 딱 나타났을 때 다른 사람은 못 알아봐요.

그러나 악마는 알아봤어요. 예수님이 귀신들린 청년 앞에 나타났을 때 대화가 그겁니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당신이 우리를 멸하려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봐서 악마는 알아요. 핸들을 확 꺾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못 믿도록.

그래서 아무리 교회 나오고, 장로 되고, 신학교 나와서 목사가 되어도 악마가 그 인간을 쥐고 있기 때문에 핸들을 그냥 꺾는 것이 아니고 확 꺾어버립니다. ‘나 예수한테 너무 몰빵 안 하련다. 예수가 밥 먹여주나? 예수는 그냥 걸치기만 하지. 어차피 취미 생활이니까. 중요한 것은 내 존재가 중요하지 예수는 그냥 알고 있으면 그만 아니야?’ 하고 휙 꺾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전쟁하실 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테이블 위에 필요한 것들을 놓아봐라.” 그들을 뭘로 유인하겠습니까? 백설공주 동화나 과자, 맛있는 케잌 같은 것 놓고 있으면 그 유인대상이 어린애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테이블 위에 휴대폰이 있다든지 방탄소년단 브로마이드가 있다든지 하면 그것은 청소년들 유인하는 거고요.

너 잘하면 군대 안 갈 수 있다든지, 안 그러면 예쁜 여자 소개해 준다. 그런 것이 있다면 20대라는 거예요. 그리고 테이블 위에 아파트나 고급차를 놓으면 이것은 3, 40대를 향한 유인책이에요. 그리고 테이블 위에 세라잼이나 보약같은 것이 놓여 있으면 60대 이상 70대를 위한 유인책입니다. 자, 주님께서 테이블 위에 뭘 놓았습니까? 피입니다. 피에요. 십자가 피. 누가 그걸 집습니까? 누가 그걸 집어요?

어떤 예능 프로에 젊은 여자분들 유인하기 위해서 놓은 음식 보니까 쌀떡볶이, 김치찌개, 소불고기, 김치전, 커피, 선지해장국, 갈비탕, 꿀떡, 천혜향, 식혜, 이러니까 우와, 하거든요. 막 좋아 가지고. 미스트롯 일곱 명 하고 다 좋아하면서 “이걸 다 가진다고요?” 하는데 자, 여러분이 그 테이블 위에 뭘 놓겠습니까?

악마는 심지어 이것까지 놓습니다. 성경책과 기도와 응답받는 것, 그런 것을 놓아요. 그게 악마가 하는 짓이에요. 그러나 거지 나사로한테는 테이블 위에 뭘 놓았습니까? nothing, 아무것도 없어요. 테이블 위에. 거지 나사로 한테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 언약밖에 없어요.

악마가 그런 짓까지 하면서 핸들을 꺾어버려서 우리에게 메시아가 보이지 않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운전사 때문에 같이 말려들어서 예수 없는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행복하게. 그 잘살고 있고, 행복하고, 몸 건강하고, 제때제때 월급 들어오고, 그런 인간이 짱돌 들고 와서 “주님, 저를 때려 쳐서 즉사시켜 주세요.” 하겠어요? 그런 마음이 듭니까?

이 말은, 우리는 이 악마 속에서 나를 부정할 어떠한 낌새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바보 등신이에요. 우리는 내가 망해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하는 하루하루를 살아요. 이거 누가 조성했는가? 죄가 왕노릇 해서 조성한 거예요. 교회 다녀도 나는 망해야 됩니다, 라는 그 이유를 우리는 찾지 못하고 있어요.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상대하는 것은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 믿을까요? 성령 믿을까요?” “입 다물라. 제발 입 다물라. 하여튼 말이 많아. 입 좀 다물라. 내가 다 해줄 게 입 다물라.”

주께서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고 마귀하고 싸우는데 마귀는 우리에게 자기의, 자기 존재의, 자기 자신의 잘남을, 의로움을 우리에게 심어준 거예요. 그래서 누가 성도냐 하면, 자기 의가 생겨날 때 자기 속 안에 뱀하고 지네, 거미, 지렁이가 설치는 것처럼 온몸이 오그라들고 ‘이게 뭐야? 이게 뭐야!’ 그걸 역겨워하는 거예요.

그런 현상 생겨나신다면 군말 않고 성도라 해줄게요. 정말 자기의, 자기 잘남, 그 자기 잘남이, 속옷에 뱀 들어와 보세요. 미칠 지경이지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미치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가 아닌 사람은 반대에요. 행여나 자기가 남에게 욕 얻어먹을까 봐, 못난 존재 될까 봐, 남으로부터 너 인생 망했다, 라는 소리 들을까 봐 공포에 질려서 벌벌 떠는 것, 아직 악마의 통치 하에 있습니다.

악마가 대통령입니다. 선거 새로 해도 소용없어요. 악마가 또 대통령입니다. 문 재인 대통령에서 또 다른 악마로 바뀌지요. 자,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왜 이제 알려줍니까, 하는데 이제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알려줬어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의 권세에 맛을 보게 하신 겁니다. 신명기 28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을 경우에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된다는 식으로 율법을 준거예요. 일종의 유인책이지요. “이것은 네가 원했던 거잖아.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것, 네가 원했던 거잖아. 그러나 그건 율법 지키면 줄게.”라고 유인하신 거예요.

그런데 머리는커녕 갈수록 꼬리가 돼요. 이스라엘 백성의 95퍼센트가 꼬리였습니다. 잠깐, 반짝, 다윗과 솔로몬 때 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줄줄이 그야말로 처참하게 망가졌어요. 원인이 본인한테 말고 더 영적 세계로 치고 올라가야지요.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잘못 때문에 그리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이 다윗이었어요.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했지만 왕이잖아요. 다윗이 알아챈 것은 뭐냐? 내 위에 뭐 있다? 죄 있다. 이 공식을 알게 된 거예요. 내 위에 악마 있다. 그 공식을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악마에서 내 힘으로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내 힘으로 못 벗어난다. 이게 바로 인간이다. 그걸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악마가 나뿐만이 아니고 내 주변의 모든 삶의 환경을 이미 다 장악했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 시초에 보면 누가 나오느냐 하면, 요셉이 나오지요. 요셉 창세기 39장에 보게 되면, 요셉이 형들에게 모함을 받아서, 미움을 받아서 애굽으로 은 20냥에 팔려나가지요.

그때 요셉의 나이가 17세였습니다. 젊고 아무것도 몰랐지요. 그냥 요즘 같으면 방탄소년단 중 한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물론 그보다 더 어리지요. 열일곱 살이니까. 그런데 애굽에 팔려간 요셉에게는 뭐가 통치하느냐 하면, 꿈이 통치해요.

그러면 꿈의 반대말이 현실이고 현실의 반대말이 꿈이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은 꿈은 개꿈,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의미 있는 것은 이 현실, 애굽의 권세 정사와 권세가 유일한 현실이에요. 지금도 성도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이 국가라는 게 유일한 현실이고 다른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요셉도 마찬가지예요.

애굽나라가 강대국이니까 그게 현실이에요. 그 나라에 요셉은 꿈을 짊어지고 들어간 겁니다. 꿈이 어떤 기능을 할지 요셉 본인도 몰랐지요. 요셉은 그냥 열일곱 살이에요. 요셉이 애굽 보디발 장군 집에 가서 일을 하는데 일을 잘했다는 말이지요. 일을 잘하니까 주인이 예쁘게 봤지요.

그런데 요셉의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동침을 청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틈에 한두 번이 아니고 자꾸 청했어요. 나중에 강제로 요셉의 옷을 잡았는데 요셉이 옷이 벗겨졌어요. 벗겨지고 요셉은 달아났지요. 옷만 쥐고 알맹이는 도망간 거지요. 그 이야기가 12절부터 죽 나옵니다.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해서 요셉이 자신을 희롱했다고 보디발에게 고자질합니다. 창세기 37장 17, 18절에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그 당시에 CCTV 없었습니다. 아무도 목격자가 없습니다. 힘 있는 자의 말이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꿈의 실현입니다. 꿈이 있기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꿈이 있기에. 이 세상이 바로 꿈이라는 것, 이 세상이 바로 가상현실이라는 것, 이 세상은 소멸 될 허깨비 같은 것, 꽃이 잠깐 피지만 금세 지듯이 그렇게 져야 될, 사라져야 될, 손에 잡지 말아야 될, 버려야 될 쓰레기 같은 세상, 이걸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요셉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네가 내 청을 거역해? 네가 아직 어려서 현실의 맛을 못 봤구나. 현실의 맛을 모르는구나.’ 보디발의 아내의 이 생각이 오늘날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국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는 이 현실이 얼마나 진짜 현실, 찐, 찐, 찐, 진짜 현실인지 다른 현실은 없다는 것을 네가 철딱서니 없어서 몰랐구나. 한번 혼나봐야 알겠어?’라고 해서 보디발의 아내 입에서 나온 발언이 그거였어요. 현실의 현실 됨을 네가 감히 무시하지 말라.

열일곱 살 먹은 애가 뭘 압니까? 자기도 황당한 거예요. 너무 억울한 거예요. 희망도 낙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이 요셉에게는 함께 있어요. 요셉이 믿은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아무것도 안 믿었어요. 그냥 꿈이 요셉을 갖고 놀고 있는 겁니다. 요셉 너는 빠져라. 이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짜 현실인지를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아주 특이성이 있습니다. 또 구약의 한 대목은 열왕기하 13장 17절에 나옵니다. 엘리사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사명을 보여준 대목입니다. 아람 나라가 쳐들어왔는데 이스라엘왕 요아스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자,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다시 요약하겠습니다. 아람 나라는 힘이 있는 강대국, 정사와 권세, power, 힘이 있어요. 정치력이 있고 그에 비해서 미약한 정치를 하고 있는 북이스라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나라, 국력이 쇠약한 이스라엘, 그 왕 요아스가 바들바들 떨고 있으면서 엘리사를 찾아오지요.

온갖 미사여구로 인사합니다. 14절에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그리고 아람 나라 대군이 쳐들어오는데 어떻게 조치하면 됩니까?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거대한 존재가 밀려올 때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해서 유지될 수 있습니까? 내일까지 내 존재가 보장받을 수 있습니까?” 그 이야기에요. 이게 이해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 평소에 살아가는 게 그거잖아요. “이러면 우리가 망하겠습니다. 내가 죽겠습니다. 내가 소멸되겠습니다. 내가 더 이상 못 살겠습니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거예요.

엘리사는 답답하지요. 하나님 믿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힘이 하나님보다 더 센데 무슨 하나님을 믿어요. 그것은 그냥 구색 맞추기겠지요. 공포에 질려서 믿는 게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런 것이라는 말이지요. 실제로 우리가 믿는 것은 힘인데 그 힘을 못 가져서 안달 나서 힘 달라고 우리가 교회 오고 기도하는데 그게 우리의 한계 아닙니까?

엘리사가 동쪽 창을 열라고 해요. 창(窓)이 나오지요. 17절에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창이 나오고 그 다음에 활, 화살이 나와요.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시리아군대가 오는 쪽 창을 열고 화살을 쏘세요, 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고 요아스 왕이 화살을 쐈습니다. 몇 번 쏘았느냐? “이것은 구원의 화살이니 쏘세요.” 딱 세 번을 쐈어요.

그리고 땅을 치라고 했는데 땅을 쳤어요. 18절에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번 치고 그친지라.” 그러니까 19절에 하는 말이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갑자기 분노를 합니다.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여기 진멸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람 나라 강대국의 정사와 권세가 쳐들어온 것은, 당신 나라 북이스라엘을 살림이 아니고 당신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정사와 권세가 있는 이 세상 현실에 대해서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를 당신이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창(窓)이라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폭을 가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경계선이에요. 창문틀같이. 바로 뒤에 꿈같은 천국이 있고 바로 앞에는 가상현실, 우리가 흔히 현실이라고 말하는 이 가짜현실, 죄가 왕 노릇 하는 이 현실 전부 다 악마에게 굴복당하는 현실, 그 중간 경계선에 오늘날 같으면 성도가 있고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당신이 적이라면, 적이 당신을 쏜다면 그 정도 쏘고 말겠느냐?” 죽어라, 하고 쏘겠지요. 그러나 죽어라, 하고 쏘는 그 안목, 진멸하라고 하는 그 안목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자. 그거지요.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이 우리 태어난 목적이고 이유야. 우리의 운명이야.”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죽어버리지요. 실패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지요. 현실을 망하는 현실로 제대로 보지 못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구원도 못 받고 망하는 거예요. 정사와 권세에 대해서 후한 점수를 줬기 때문에 그 정사와 권세에서 우리가 못 벗어나는 겁니다.

집주인이 이사 갈 때 세간살이도 같이 가기 때문에 그래요. 집주인이 이사 갈 때 세간살이를 따로 놓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내 힘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은 악마의 죄의 권세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엘리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가가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이 너를 살린다.

하나님의 약속이 너를 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살리지 못할 것은 없애버려야지요.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오히려 나를 살리는데 방해하는 것은 없애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본성이, 살릴 사람은 죽이고 지옥 보낼 사람은 편들고, 교육받은 것이 그런 교육 외에는 받은 것이 없어요.

교육을 많이 받다 보니 이게 본색이 되었어요. 나를 살게 해준다면 그게 부처가 되든 예수가 되든 뭐가 되든 교회를 안 다녀도 나는 무조건 따라가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악마의 힘이 국가의 권세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까지 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뭐냐? 바로 우리 내부까지 파고 들어 와야 되겠지요. 우리 내부까지 파고 들어오면 우리 내부에 뭐가 있느냐? 예수님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제일 암반층의 밑바닥에 있음을 그걸 알게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성도를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왜 살려두느냐 하면, 네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이었음을 알릴 때까지 그 죽는 이유를, 지옥 가는 이유를 알게 해야 그 사람이 천국 가는 거예요. 그걸 알기 전까지는 천국 못갑니다. 천국은 사랑의, 사랑의, 사랑의 깊이가 계속 나오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깊이를 위해서, 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렇게 깊으냐를 알 때까지, 왜 우리는 내 힘으로는 죄를 못 벗어나느냐 그 이유, 근원적인 이유, 내 손으로 내 죄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을 할 때까지 우리는 죽을 수 없어요.

십자가 죽으심, 주님이 필요 없다는데 내가 가담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내가 인정할 때까지 우리를 안 죽이십니다. “How Deep Is Your Love” <비지스>가 불렀던 노래에요. “도대체 당신의 사랑의 깊이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대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지요?”

우리가 지금 오늘 죽어도 되는데 계속 살려주는 것은 그 사랑의 깊이,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그 십자가 피가 다 한 거예요. 우리는 누구 편이냐? 악마 편이지요. 세상 권세 편이에요. 마스크 쓰라면 마스크 쓰고, 백신 맞으라면 맞고, 이것은 의기투합, 국가 의견이나 내 의견이나 서로 통하는 거예요.

악마의 힘이 내 내부까지 있어서 국가를 주장하는 그 악마의 힘이나 내 속에 나를 존재케 하는 힘이나 동일한 힘이에요. 그러면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바로 예수님이 의의 왕 노릇 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5장에 나와요. 죄가 왕 노릇 하다가 이제는 의가 왕 노릇 하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의에 의해서 보면 이미 우리가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팔딱거리는 겁니다. 체온 재 봐야 36.5도 나오더라도 이미 우리는 싸늘한 시체라고 봐야 됩니다. 체온 재는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36.5도건 40도가 되건, 40도 되면 죽겠다, 하여간 뭐가 되어도 우리는 살아도 의미 없이 사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로서 악마의 편에 손타는 자로서 살기 때문에.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주님의 승리가 우리 안에서 우리 안까지 파고 들어온 악마를 이미 이긴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승리, 십자가 승리의 전쟁판이 된 겁니다. 전쟁의 현장이 돼요. 이미 깃발 꽂혔어요. 십자가가 꽂혀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만, 그 깃발만 자랑한다고요. 이 십자가 깃발 자랑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그 사랑을 감사하라고 아직도 이 세상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신분인 것을, 위상인 것을 우리가 놓쳤습니다. 세상에 각종 직업이 있지만 다 죽게 하는 직업이고 정말 살게 하는 것은 십자가 역할 뿐인 것을 이제는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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