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0415a 베드로전서5장 7절(겸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5절-7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5. Likewise, ye younger, submit yourselves unto the elder. Yea, all of you be subject one to another, and be clothed with humility: for God resisteth the proud, and giveth grace to the humble.
6. Humble yourselves therefore under the mighty hand of God, that he may exalt you in due time:
7. Casting all your care upon him; for he careth for you.
딱 보면 순차적이죠. 시간의 순서가 나와 있습니다. 먼저 무엇부터 발생되느냐 하면 염려부터 발생되는 겁니다. 순서 ①번, ‘염려’부터 먼저 발생되고 난 뒤에 ②번, ‘다 주께 맡겨버려라’가 성립되죠. 염려도 하지 않는데 다 주께 맡기면 안돼요. 주께 맡기려면 염려될 때만 맡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사람은 염려 없으면 자기가 알아서 하지, 주께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염려가 발생하는 현장은 어디냐? 바로 내가 여기 있는 곳, 여기서 염려가 발생된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염려의 진원지가 됩니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염려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 주께 맡겨버리면 염려가 없겠죠. 염려가 발생되는 게 나의 자리라면 염려를 없애는 방법이 주께 맡기는 게 되겠죠.
이 말은 염려의 진원지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죽이면 죽음이 깔끔한 해결책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죽는 것이 깔끔한 해결책이 되는 거예요. 이걸 네 자로 ‘공소 없음’. 공소가 없는 거예요. 고소할 사람이 죽어버렸는데 무슨 고소를 할 수 있습니까? 검찰에서 공소권이 없는 거예요.
사건은 일어났는데 피해자도 발생되었는데 범인이 죽었어요. 범인이 알아서 도피를 했다는 게 아니고 알아서 집에서 칩거했다는 것도 아니고 죽었어요. 죽어버렸어요. 그러면 죽은 사람 붙들고 옛날처럼 능지처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죽은 시체 내어 가지고 ‘이걸 토막 내어라! 이것을 흩뿌려버려라’ 할 때 비용이 너무 들어, 비용이. 공무원들 월급 주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있는데 염려가 왜 발생되느냐 하는 이것을 따져봐야겠죠. ‘내가 있음’은 여기서 구조가 발생돼요, 구조. 어떤 시스템(system)이 작동된다고요, 내가 있으면. 구조가 뭐냐. 뭐든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뭐냐 할 때 확실한 의미는 반대말을 할 때 확 다가옵니다.
‘구조적이다’의 반대말은 ‘이산(離散)적이다’라고 하는데 이산적이라는 말이 더 어렵죠? 이산적이라 하는 것은 뿌려놓는 거예요. 흩어버리는 거예요. ‘이탈, 이별’할 때 ‘이(離)’자, 분리하는 것. 분리해서 다 던져버리는 것. 두 번 다시 하나로 모이지 않게. 아까 말한 능지처참하고 비슷한 건데 다 잘라서 전부다 흩어버려가지고 다시는 네가 너로 규합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산적’입니다.
그 반대말인 ‘구조적’이라는 말은 항상 나로 강화되고 나로 집결되는 것. 나, 자아로 모든 것이 집결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조적이 되면 여기서 이 구조의 중심은 누가 되겠습니까? 바로 ‘나’가 되겠죠. 내가 중심이 되겠죠. 이산적이라 하는 것은 뿌려서 흩어버리는 거니까 뭐 중심이 될 수가 없죠. 뿔뿔이 다 흩어졌는데.
팔이 저기 있고 발이 저기 있다면 팔이 발보고 “니가 오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니가 내 곁에 오라”하고, 발은 “네가 온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여기 오라는 말이에요. 경상도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경상도 말 안 해도 못 알아듣지만. 니가 와. 니가 오란 말이야. 이 비슷한 노래가 있어요. 양희은이 불렀던 <한계령>이라는 노래. ‘저 산은 나보고 내려오라 하네 올라가라 하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니가 와라. 하와이 니가 가라고 하는 말도 있잖아요.
인간의 모든 몸짓과 생각은 ‘니가 와’가 밑에 전제되어 있어요. 깔려 있습니다. 네가 오라. 그만큼 인간은 구조적입니다. 자기 중심적이에요. 자, 여기까지 이야기 들었죠? 그러면 염려는 어디서 생긴다? 내가 있기 때문이고 그냥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센터로, 이 세상의 옴파로스(omphalos), 배꼽으로 내가 단단하게 조직화되어서, 체계 잡혀서 내가 여기 있는 이게 바보짓이죠. 염려를 사서 하는 겁니다. 흩뿌리면 되는데. 자기를 뿌릴 생각이 없어요.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힘’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나를 구조적으로 구축하는 데에 보탬이 된다면 사람들은 이것을 ‘힘’이라고 부릅니다. ㅎ,l,ㅁ, 이렇게 쓰고 읽기는 ‘힘’으로 읽는 거예요. 너 나에게 힘 되어다오. 이게 아까 말한 ‘니가 온나. 나 있는 곳에 니가 온나.’ 이렇게 되는 거죠.
힘을 여러 가지로 분해할 수 있어요. 권세도 되지만 가장 작은 힘이 뭐냐 하면 ‘나를 위로해주오.’ 나를 위로해달라는, 사랑해달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경배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좀 경배해주면 안되겠어? 안되겠니? 세상은 이걸 가지고 두자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나 있는 데 와가지고 네가 나를 위로하는, 이 내 시스템구축에 네가 좀 보탬이 되면 되지 않겠냐? 이러면 상대방 남자는 얼마면 돼? 이렇게 하거든요. 아니, 돈 말고. 그냥 날 떠나지 말고 내 곁에서 나를 이뻐해주고 보듬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 더는 내가 원하지 않을게. 프로포즈치고는 너무 긴 느낌이 들죠? 좀 길죠?
이것은 남녀뿐 아니라 모든 가족관계도 마찬가지고요, 자식-부모도 마찬가지고 친구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회단체,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도 다 이겁니다. “너 내 줄잡아야 승진한다.” “과장님은 끊어진 동아줄인데요?” “너 날 무시하나?” 이렇게 되는 거죠. 너 내말 안 들으면 어디가도 밥 빌어먹지 못한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너는 내 시스템을, 조직체를 떠날 수 없도록 되어있어, 너는. 나만큼 든든한 버팀목은 없는 거야.
이런 식으로 사회체제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회체계에 대해서 참, 밥 먹고 살기 힘들다. 사회생활하기 힘들다. 아이고 인생이 왜 이렇게 괴롭나. 하는데 성경말씀은 니가 괴로워, 니가. 네가 사회생활이 힘들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내 중심으로 체계를 구축하는데 이게 만만치 않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중심으로 체계를 갖추어야 되는 그 이유를 내가 납득되도록 이야기해봐라. 하면 우린 할 말이 없어요. 제가 여기 있잖아요. 있어서 뭐 어쩌라고? 있는 게 그게 뭐라고?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에게 참 섭섭한 말을 했어요. 너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 차라리 없어라. 이 예수님 조직에 부정적일 것 같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중심싸움이에요. 내 중심이냐, 아니면 예수님 중심이냐. 결국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말은 이 세상에는 주님과 주님의 세계망, 세계만 있을 뿐이지 그 외에는 nothing,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하니까 낮에 했던 안양강의가 생각나네요. 노아홍수 있기 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나름대로 자기 중심체계로서 활발한 상거래와 활발한, 행복한 가정생활과 융성한 인간 문명체제를 갖췄죠, 홍수가 나기 전에. 홍수가 나고 난 뒤에 뭐가 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 많던 사람들 홍수 나고 난 뒤에 어디 갔습니까? 어디 있죠? 없죠. 있는 것은 언약으로 덮인, 언약의 증거물인 물로써 그 인간 세계를 덮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활동력이 셉니까, 주님의 언약이 셉니까? 어느 것이 강해요? 주의 언약이 세지요. 그걸 믿은 사람은 그 시대에 딱 한 가족, 노아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노아이야기가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겨우 여덟 명. 여덟 명이라도 하나님은 좋소. 아홉 명 안돼서 너무 좋고 일곱 명 아니라서 좋고. 딱 여덟 명. 그 여덟 명이 구성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언약밖에 난 몰라. 언약만 알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언약의 최종 완성자는 누구입니까? 주님이잖아요. 그래서 주님과 그 주님의 세계만 있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세상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에 그런 말씀 나오죠. 뭐든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래서 이 그리스도 중심에서 나올 수 있는 우리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 중에 하나를 적어보면 ‘네 자신에 대해서 신경쓰지 말라’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이것도 좀 기쁘지 않습니까? 더 기쁘게 해드릴까요? ‘=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다’.
어떤 짓을 해도 상관있고 내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기쁜 소식이라 해도 겁을 집어먹고 이렇게 안하려는 이유가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 하에 복음 듣기를 원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은 나한테 뭘 해줄랍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소위 신앙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주님의 일을 오해해왔는가 그 사실을 우리가 잘 알아야 돼요. 내가 여기 있는 조건 하에......제가 지금 말해서 그렇지, 보통 사람들은 이걸 전부다 생략하거든요, 이게 전제인데.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은 나에게 기쁜 소식을 한번 전해보세요. 이렇게 된단 말이죠. 주님은 그 조건 빼라는 거예요, 그 조건 빼라. 그 조건을 빼란 말이죠.
네가 만약에 네가 여기 있다는 조건이 있을 때 기쁜 소식, 복음과 내가 여기 없다는 조건 하에 복음이 주님 보시기에는 달라요. 그걸 아주 노골적으로 물으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여기 살아있는 게 좋습니까, 주님이 살아있는 게 좋습니까?”라고 노골적으로 묻는 거예요. 그러면 불신자는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이렇게 되죠. 뭐 그딴 소리를 하느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이렇게 되거든요.
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하면 그런 말을 해서 강력한 반발을 들을 때 이미 모든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은 자기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는 그런 지경에 있는 거예요. 나라는 조건을 뽑아낼 수 없고 무조건 일단 내가 여기 있다는 것부터 이야기 시작하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서 이야기 시작하자. ‘성경 이야기하든 교회 이야기하든 천국 이야기하든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은 철회 못하겠다’ 라는 이것을 한국말 세 자로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이게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 젊을 때는 ‘거짓말’하면 김추자. 그리고 그 이후에는 조항조의 <거짓말>.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 좋아한다는 말도 거짓말 거짓말 다 해놓고. 그래서 이 세상은 거짓말을 원하는 자, 마귀죠, 거짓말하는 자가 상대방보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있어요.
그 말을 분해하게 되면 너 나한테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을 더 강화시키고 더 괜찮게 만드는 그 말을 안 해준다면 나는 당신을 거짓말쟁이로 정죄할거야, 미워할 거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미움 받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 비로소 예수님이 예수님답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신자 같으면 예수님보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거 뭐 소설 제목 같은데.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나는 거짓말이 듣고 싶어. 내가 거짓말하는 이것은 거짓말이야. 내가 거짓말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내 자체가 내 중심이라는 조건을 내 힘으로 뽑아내지 못하는 한 나는 거짓말만 기쁜 소식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거짓된 존재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의 종의 조건이 나와요.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의 종이에요.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문제는 약간 난해한 문제이지만 여러분들이 한번 풀어보세요. 여기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고 하나님을 좋게 하는 이런 건 없고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고 좋게 한다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 졌잖아요.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나는 너를 싫어해. 미워해. 저주해. 죽어버려. 라는 그 증거가 십자가사건이라는 말이죠. 그 십자가 사건이 인간이 예수님을 내침으로써 이 역사에서 무효가 되고 지나간 일이 아니라 그걸 다시 끄집어내는 거예요, 성령께서. 인간이 짓밟은 것을 주께서는 다시 사흘 만에 건져내가지고 인간 코 앞에다 던져버리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복음 전파거든요. 던져버리는 거예요. 너희들이 미워했잖아. 너희들이 미워하는 자, 바로 그 분이 내가 기뻐하는 자다. 어쩔래? 이래도 너희가 나를 알아? 하나님을 아냐고? 이렇게 되겠죠.
어려운 문제란 다른 게 아니고 이겁니다. 국무총리가 말하기를 마스크 쓰지 않으면 코로나 걸립니다. 자, 문제는 이게 거짓말입니까, 참말입니까? 마스크 안 쓰신 분이 이야기해보세요. 거짓말이에요, 참말이에요? 지금까지 강의 들은 공식을 거기다 딱 적용시켜보세요. 공식하나 나왔죠.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을 부정하지 않는 전제하에 나는 참말과 거짓말을 구분 짓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당신은 마스크 쓰지 않으면 코로나 걸립니다. 그 뒤에 말이 뭡니까? 코로나 걸리면 뭐가 됩니까? 당신은 죽습니다. 죽으면 내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코로나 걸리면 죽습니다’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안 죽기 위해서 마스크 쓰자’ 하면 이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아, 이거 머리 나쁜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그런데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기 조건을 뽑아내지 못하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는 거예요.
얼마나 내 중심 체제가 악마의 거짓말과 더불어 공고한지, 그 사실을 느끼겠죠? 그러니 코로나사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주를 위해서 죽으리라는 말 자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 이상으로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나 당신 사랑해’라는 말이 거짓말인 것 이상으로 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지.
주님은 묻습니다. 왜 사랑해야 되는데? 천국 갈려고요. 누가? 내가요. 너 아직도 안 없어졌어? 얼쩡거리고 있나, 지금? 니는 하와이나 가라. 천국가지 말고. 내가 분명히 너한테 이야기했잖아. 흙으로 돌아간다고. 왜 돌아가게 했겠어? 생명이 없다는 뜻이에요. 생명이 없으면 없는 값을 하라 이 말이죠. 생명이 없으면서도 자꾸 있는 값하지 말고.
이걸 제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인간은 자기가 자기인 척한다고. 자기가 자기인 척을 해요. 너무 어려운 말했나? 자기가 자꾸 이상적인 모델과 일치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상상한 것이 없으면 인간은 나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인간이 상상한 모델에다가 나를 같이 겹쳐버려요. 저게 나라는 겁니다. 어느 누가 코로나 걸려서 격리당한 모습을 나라고 보겠어요? 쌩쌩하게 밖에 돌아다니는 그걸 나라고 보죠.
문제는 주님께서 자기백성을 그리스도께 맡기기 위해서 우리 성도의 자아성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신비입니다. 네가 너한테 실컷 한번 시달려보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start, 출발점이에요. 사랑의 출발점. 네가 염려라는 세상 염려는 실컷 하고 난 뒤에 내게 맡겨라.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구약성경 사사기에 너무너무 잘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사사기 아시죠? 다 외우진 못하겠지만 사사기가 있다는 것은 알죠. 사사기, 오늘날 같으면 교회라 보죠.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면 교회죠. 사사기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갈등’ 또는 ‘갈등구조’. 아까부터 계속 구조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규합하는 거예요, 자기중심으로. 그러면 갈등이라는 말은 제대로 정리가 안 되었다는 말이죠. 정리가 안 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층이, 바탕층이 심란하다 또는 불안하다. 안정되지 못하니까 불안하죠. 그래서 그들은 갈등과 심란함이 생길 때마다 누굴 찾습니까? 여호와를 찾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그들이 배부르고 좋은 집짓고 갈등이 좀 적다는 생각이 들 때는 약간의 문제가 있더라도 그 때는 주님께 맡기는 게 아니고 내가 나서서 내 일을 관리하려고 하겠죠.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뭘 원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으로 영광 받는가 안중에도 없어요.
지금 하나님 찾는 이유가 내가 불편해서 찾는 거예요, 내가 불편해서. 헬프 미. 도와달라고. Help me. 도와주세요. 잘 안되면 Why me? 왜 하필이면 저를... 순서는 그게 딱 기다리고 있어요. Why me?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하필이면 저한테 이런 재앙이 옵니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나만 쓰레기인가’ 하는 그 이야기. ‘나만 바닥인가’ 뭐 이런 거요.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께서는 자기 피조물을 갖고 노십니다. 좀 주께서 갖고 노실 때 노시는 즐거움을 드리세요. 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엉망진창이 되어가지고 흔들릴 때 그게 주님 뜻이거든요. 교회가 갈등이 있는 게 교회입니다. 갈등 없으면 주님을 찾지도 않죠.
그 다음에 구약 사사기 말고 또 구약인데요. 사사기에서는 자기들 조건이 사는 게 불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갈등은 외부압력 때문에 그렇죠, 외부압력. 이 외부압력은 항상 강렬합니다. 항상 강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항상 미약하게 만들었어요. 구약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래요. 미약한 것, 이게 오늘 주제에 나오는 겸손인데요. 미약한 것, 미약하기 때문에 힘이 별로 없어요, 미약해서. 힘이 별로 없으니까 이들은 미약한 순간에는 하나님의 언약만 의지하는 거예요.
노아 홍수이야기 때, 노아 방주에 여덟 명이죠. 여덟 명이 물에 빠져 죽은 그 많은 수백만 수천만 사람보다 얼마나 미약합니까. 주님은 언약 자체가 이 땅에 출현할 때 미약하게 출현하고 겸손하게 출현한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덟 명이라 미약하고 힘이 없다고 해서 노아가 섭섭해 한다든지 하나님께 불만을 터트리던가요? 짜증내던가요? 왜 저들과 같이 힘이 없습니까? 이렇게 화내던가요? 노아는 신났어요. 미약해서 신났어요, 미약해서. 자기 아들 이름을 미약으로 지어야 되는데. 큰 아들 미약, 둘째 아들 쇠약, 셋째 아들 연약. 넷째 딸은 비리비리.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이라 하는 것은 외부환경이 나로 하여금 뭔가 주의 언약대로 밀어부쳤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겸손이에요. 내가 얼마나 가진 힘이 세냐가 아니라 내가 내 힘을 측정하지 않고 외부환경이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뤄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도록 조치하는지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어요.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망했다. 망했다는 것은 겸손한 자에게 남의 이야기에요. 원래 망했어, 원래. 뭘 새삼스레 이야기해. 난 원래 망한 거야.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겸손이라 하는 것은......한번 적어볼게요, 중요한 거니까. 반드시 성경적 겸손은 영적인 것과 관련되어야 돼요. 그냥 인간적인 윤리도덕으로 설명하면 안 됩니다. 겸손이란, 마귀로 부터 “너 이제 조졌다. 너 신세 쫑났다. (좋은 표현은 아니죠. 권장할 만한 표현은 아닙니다) 너 이제 죽었다.”라는 이러한 조롱의 대상이 아님을 아는 것이 겸손이에요.
그러니까 협박, 공갈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에요. 원래 망했으니까. 이런 상황을 누가 유발했습니까?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겸손한 자의 특징은 남들이 보면 굉장히 교만해요. 본인이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본인이 잘못한 게 없으니까 남들이 보면 교만의 극치로 느껴지는 거예요. “너 조져놨잖아. 너 망했잖아.”,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이게. 주께서 본래 내 자리 찾아가게 한 거야,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fitness, 아주 최적화된, 적합화된 모습이라.
보통 장례식 끝나고 난 뒤에 전부다 슬퍼하고, 슬퍼하는 척인지 슬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상주가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보고 여기 국밥 하나 말아주소. 옆에 조문객들이 아이고 상주가 그러면 되나. 부모를 죽인 죄인으로 해서 겸손해야지. 이게 내 겸손이라. 이게 내 겸손이야.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쓸 게 없어요. 만약에 신경 쓰게 되면 마귀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습니까? 너는 이제 조졌어. 너는 신세 끝났어. 너는 이제 죽었어. 나 같으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겠다. 이런 식으로. 세상에 나오는 노래들 보세요. 전부다 쫑나고 부른 노래들이에요, 전부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고. 혀가 굳어서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다는 거예요. 백지영 노래, 같은 하늘 어느 곳에 있든지......그게 후회스럽다는 겁니다. 그게 후회스럽다는 거예요.
흔히 말하죠. 부부는 닮아간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는 닮아가는 게 아니고요. 처음부터 닮은 사람을 찾았던 거예요. 부부는 서로 닮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아의 경계선의 확장입니다. 나 혼자 울타리, 프레임 치다가 나 닮은 사람을 통해서 자기 확장을 더 넓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합니다. 크게 써야 돼요. “아무 문제없다.” 아무 문제없어요. 지금 문제가 있다는 자체가 교만이에요. 무슨 문제? What happen? 뭐? 무슨 일 있었어? 무슨 문제 있는데? 내가 없다는 조건 하에는 모든 문제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주께서 나를 뽑아내는, 내가 있다는 조건을 뺀 상태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 잠깐 있다가 나중에 없어져요.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좀 비싸긴 하다만, 거기 갔다 오면 벌써 없어져요. 식구들이 쓰레기 치우듯 다 치워버렸어요. 치우고 지들끼리 국밥 한 그릇 말아먹었어, 벌써.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난 배고파서 안 되겠다. 먹을 것은 먹어야겠다. 무슨 부모를 죽인 죄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악마는 왜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마치 천년 만년 영원히 살 것같이 이 존재, 이 의미가 쭉 간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교육, 양육을 시킨 겁니다, 악마가. 그래서 악마가 요구하는 것이 놀랍게도 겸손이에요. 악마는 입만 떼면 거짓말이에요. 그러니 겸손하겠다는 이 자체가 뭐가 됩니까? 겸손의 반대말, 교만이 되는 겁니다. 겸손해서 뭐 할 건데? 어디 써먹을 건데? 왜 겸손하지? 겸손하려는 이유를 대봐라. 목적이 뭐야?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천당 가려고. 이렇게 나오죠.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민족이 있어요. 이방민족은 언약이 없습니다. 그들은 겸손하든 뭘 하든 간에 자기가 여기 있다는 조건을, 구조적인 체제를 갖추려고 강화시키려고 모든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이에요. 이스라엘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끌어 모으는 거예요. 힘을 모아서 호시탐탐 미약해 보이는 이스라엘을 노리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약하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들어와. 들어와. 들어오라고.
하나님 목적은 우리를 지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자기 자신을 지키는 거예요. 우리가 중심이 아니니까. 주님이 중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미끼라니까요. 악마를 유인하는 하나의 유인책이에요. 뭐 기분 나빠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낚시의 미끼가 된 것이 기분 나빠요? 영광스러운 신분입니다, 이게.
어느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겠어요?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내가 신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은, 이것은 나를 아주 치욕스럽게 만드는 느낌을 느낀다고요. 사람이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살거든요, 인간은. 치욕스럽지 않게 사는 게 인간의 평소 본능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미끼,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하나의 미끼가 되었다는 이 자체를 감사하게 여기고 감지덕지로 여긴다는 것은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 겸손의 시험이 잘 간파되어야 돼요. 악마가 겸손을 요구한다는 말은 이 겸손이 자기 의에 속하거든요. 자기 잘남에 속해요, 이 겸손은. 그래서 부흥사들이 하는 이야기, 멘트가 뭐냐 하면, 톤 쫘악 깔죠. 평소에 기도 많이 했다는 그런 음성으로 동굴 음성을 냅니다.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뒤에 붙이는 상투적인 멘트, 할렐루야. 부족합니다. 믿습니까? 할렐루야. 톡 치면 아야아야, 왜 때려? 이렇게 소프라노 나오다가 이럴 때는 저음으로 베이스가 쫙 깔려버립니다.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치킨 급하게 먹다가 목에 뭐 걸렸는가. 이게 자기 의에 속해요, 이 겸손이.
진정한 겸손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언약에서 나와요. 그럼 언약에서 겸손이 나온다는 말은 언약의 주인공이 따로 계시고 완성자가 그분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죠. 그래서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쫙 나와 있죠. 그는 근본 하나님의 영광을 지녀야 합당한 분인데 그 영광을 버리시고 누구처럼 동등하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자기를 낮추사 죄인들과 같이 되셨다는 거예요. 죄인이 아니신 분이 죄인들과 같이 되셨다는 말은 원래부터 죄인인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죠.
주님 기다리세요. 찾아가겠습니다. 라는 식이 악마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거짓된 겸손이라는 거예요. 겸손해서라도 주님 찾아뵙겠습니다. 이게 악마가 하는 거짓된 겸손이라면 진짜 겸손은 너 거기 죄인으로 살아. 내가 찾아갈게. 이게 겸손이거든요. 그래서 겸손은 뭐냐. 찾아오심이에요. 내가 찾아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나오죠. 주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가 겸손이에요. “아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절감했습니다.” 이게 겸손이에요. 사랑한 게 없으니까 죄가 되고 죄인이니까 요구사항이 없죠. 무슨 죄인 주제에 뭘 요구해요, 건방지게. 그러니까 입는 것 먹는 것, 현재 있는 것으로 범사에 감지덕지이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등장했던 최근 <미나리>라는 영화, 그 영화자체가 왜 이슈가 되었느냐 하면 이 건방떠는, 유행 따라간다고 미쳐버린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미국 남부는 조용해요. 변화가 없는, 다시 말해서 겸손, 진정 이 세대가 필요한 것은 남 유행 따라가고 남 목표 따라가는 게 아니고, 비트코인이나 주식투자, 그렇게 남 돈 버는 거에 합세하는 게 아니라 그냥 텃밭이나 가꾸면서 미나리나 키우면서 맛있는 생생한 채소나 먹으면서 산다. 그 겸손이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아름다운 정서처럼 느껴져서 그렇게 영화가 주목을 받는 겁니다. 잔잔한 영화라 하죠, 겸손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십자가 지고 가는 약간의 광신적인 모습도 등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모든 배치가 겸손이에요, 겸손. 물론 년도도 1980년대이기 때문에 벌써 40여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그때 우리는 작은 것 하나도 귀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나리> 영화를 보게 되면 옛날 구식 TV에 노래가 하나 나와요. 그 노래가 뭐냐 하면 ‘사랑해 당신을’ 하는 노래에요. 아, 그 노래가 미국 TV에 한국 케이블을 했는지 나오는데 기타 치면서 사랑해 당신을. 불러요. 그 개구리처럼 생긴 사람하고 여자하고 등장하는데 욕하는 게 아니고 원래 라나에로스포(Lana Et Rospo)라 해서 라나가 개구리, 로스포가 두꺼비, 이태리말로 개구리와 두꺼비 그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가 <사랑해>라는 노래에요. 옛날 그 노래만 해도 미국에 이민 간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은 뭐 방탄소년단 다이너마이트 불러야 좀 위로가 되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감사하고 고마워했다는 말은 악마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주입시키고 투입시킨 거예요.
TV, 냉장고 말고 뭐 또 전자제품 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땅에 산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교만을 떠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뭘 배우느냐 하면, 우리 집은 참 가난해요. 우리 집 정원사 둘이 있는데 얼마나 가난한지. 그리고 우리 집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자주 고장이 나서 참 골치 아파요. 이 정도로 우리는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꼭 그러한 우스갯소리 같아요. 식기세척기가 고장 나서 짜증나. 그것은 십년 전만해도 아주 교만한 생각이었죠.
참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복 받았다는, 이 복을 받겠다는 자체가 악마가 준 거짓말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