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양과 목자1

아빠와 함께 2021. 3. 13. 13:12

서울의존강의2021311a 베드로전서5장 2절(양과 목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1절-4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말씀 중에서 목자, 장로 또는 목자장이라는 말이 등장하죠. 목자장이라든지 장로 또는 목자는 전부다 양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양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여러분들 보기에는 ‘~하라’고 나와 있죠. 방금 한 것이 자칫하면 ‘1. 해야 할 일’ 이처럼 이해됩니다만 해야 될 일이 아니고 ‘2.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어떤 지시가 해야 될 일이 되어버리면 그 일의 성사가 인간들 손에 맡겨지게 되겠죠. 그러면 인간이 실패했다면, 인간의 손에 맡겼는데 목자에게 제대로 양 돌보라 했는데 제대로 양 못 돌보면 그럼 손해는 누가 봅니까? 주님이 손해 보는 일이 벌어지겠죠.

인간들은 ‘목자노릇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여건이 안돼서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뒤로 빠져버리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어야 되는데. 또 일꾼 없나? 아 또 내가 일꾼 찾아야 되나? 맡길 사람이 없네.’ 주님께서 막 머리 싸매고 고민하셔가지고 그렇게 일을 진행시키는 분이 아니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목자 이야기, 장로 이야기, 목자장 오실 때 양들을 제대로 섬기라는 이 모든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냐 하면 ‘부활의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활의 상황 속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지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한 거죠. 이렇게 보게 되면 그 부활의 상황이 예수님 개인한테만 국한되는 일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신약성경, 사도행전이나 마태, 마가, 요한, 누가복음을 읽어본 사람은 예수님의 자기 부활을 누구한테 자꾸 알려요. 특히 요한복음 21장 같은 데를 보면 일곱 제자들에게 한꺼번에 나타났죠. 마지막 세 번째 “베드로야 네 양을 먹이라”할 때, 나타났단 말이죠.

오늘 초반부터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돼요. 부활의 상황이란 것이 뭐냐고 물으시면 이 세 글자로 여러분들이 딱 박힐 수가 있어야 돼요. ‘일관성’. 일관성이에요, 부활의 상황은. 일관성이라는 것은 누가 일을 잘못했을 때 차질이 날까요, 안 날까요? 일관성은 차질나지 않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베드로전서 5장에서 목자 이야기, 양 이야기, 목자장 이야기, 장로 이야기, 양들을 섬기라 너희들이 주장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로 하라고 할 때 딱 듣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가 해야 될 일로 이렇게 이해가 된다 이 말이죠, 명령이니까. 하지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부활의 상황이에요, 부활.

자, 부활의 상황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표현하면 좋으냐면 무덤을 여는 것’이에요. 부활이라는 것은 무덤을 여는 일입니다. 완전히 감이 다르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무덤이 열려서 거기서 살아나온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부활을 사적인 부활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부활을 사도바울이나 500명에게 줬죠. 그러면 부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자기 무덤에서 본인이 기어 나온 거예요. 그게 성령 아닙니까, 성령.

십자가 부활 없이 성령이 일 합니까, 안합니까? 안하죠. 성령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재현해서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죠? 영어로 할까요? What happened?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죠?

토지공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직원들이 토지 투기했잖아요. 걸린 것만 일곱 명인데. 토지공사 현재 밝혀진 것만 일곱 명인데 지금 조사받는 사람은 만 오천 명이란다, 뭐 이렇게 되는데. 토지공사에서 What happened,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몰라. 예수님에게 일이 일어나든 말든 나와 무슨 관계있나. 나는 토지공사 투기한 게 어느 땅인지 그것만 관심 있다.

이렇게 되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일관성이 계속 인간들 쪽에서 내 쪽에서 살아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외면해버렸으니까. 관심을 딴 데 돌렸으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에 무슨 일을 하셨는가. 부활이라는 것은 다시 말씀 드리면 무덤을 열어젖히는 일이에요. 더 이상 사망이 그 사람을 잡아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사망이. 가스펠 송 가사에도 나오죠. 사망이 그 사람을 붙들어 둘 수가 없는 거예요.

옛날 우리나라 고전영화 신파극에 보면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게 있죠. 그 영화에서 남자가 못됐어. 굉장히 못돼가지고 여자가 이용당하다가 나중에 용기 얻어서 남자가 이제 와서 ‘가지마라’고 할 때 여자가 하는 말이 ‘놔라’. 문희입니다. 신영균이 붙드니까 문희가 놔라. 하고 붙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방금 제가 뭐가 못 붙잡는다고 했습니까? 사망이 붙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은 목자가 되라, 양을 쳐라, 이것은 인간이 해야 될 일이 아니고 2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부활의 일관성 또는 부활 상황의 일관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인간들의 행함은 끼어들 자리 없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부활 상황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부활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무엇으로 다 전환시켰어요? 인간 대 인간의 상황으로 다 전환시킨 겁니다. 전부다 엉터리죠.

인간 대 인간의 상황으로 우리 서로 목자가 목자답게 합시다. 베드로전서 5장에 보니까 목사 된 사람은 더러운 이를 위하지 말고 자기 즐거운 뜻으로 하고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본이 되어서 충성을 다합시다. 목자장 올 때까지 충성을 다합시다. 라고 여기 나오는 이 말씀을 부활의 상황이라는 것은 쏙 빼버리고 또다시 예수님 십자가 부활은 있거나 말거나 모르겠고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냥 인간 대 인간들끼리 서로 설득하고 격려하고 독려하고 힘주고 간섭하고 위에서 지시하고 밀어붙이는 것. 그래서 등장한 게 소위 목자들이잖아요, 목자들.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베드로전서 5장을 하고 있는데 5장을 보게 되면 “장로들아 양을 잘 섬기라”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도 장로로서 고생 많이 했다. 그러니까 잘 섬기라. 그랬을 때 듣는 사람이 제대로 된 목자, 제대로 된 장로가 되려면 이것은 인간 대 인간관계에서 수립하면 된다고 오해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일이 안돼요. 인간 대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부활 관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냥 부활해서 팔짱끼고 가만히 지켜보는 게 아니에요. 부활의 영을 뭐라고 하느냐면, 들어나 봤습니까, 성령. 성령이거든요. 성령은 저와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무덤 뚜껑을 열어제끼는 거예요. 더 이상 나의 죽음이 나를 붙잡지 못하게. 가지 마오 가지 마 예~해도 소용없어요. 죽음이 우리를 붙들고 너는 죽음이 겁나지 않느냐. 제발 죽음과 바이바이하지 마. 가지 마오 가지 마 예~ 백날해도 놔라 이거. 부활의 영이 성령이거든요. 무덤 뚜껑을 연 거예요. 관 속에 들어갔다가 후다닥 튀어나온 겁니다. 더 이상 무덤의 관이 나를 덮지 못하게.

바로 그 자들이 누구냐. 그 자들이 바로 양입니다. 그럼 목자는 어디 있나? 목자는 없죠. 순서가 목자장이 목자 줘서 목자가 양을 섬긴다, 이 순서가 아닙니다. 중간에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목자 있고 양 있고 끝이에요. 그럼 원형 목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계시고 양 있고. 그럼 됐잖아요.

그러면 여기 나오는 목자 또는 장로는 중간에 끼어든 거죠. 중간에 끼어든다는 말은 나 장로야, 나는 양 돌보러 왔어, 나를 무시하지 마. 이게 아니고 그 사람이 진짜 우리를 섬기는 목자인지 장로인지 하는 것은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바로 좀 전까지 없었던 양이 결정하는 겁니다. 중요한 거예요, 양이. 목자는 양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양다운 양이 없을 때는 어떤 목자만 들끓겠습니까, 이력서 내겠습니까? 사탄의 종들만 이력서 막 들어오는 거죠. 양이 양답지 못할 때. 그런데 양이 양다우면, 다시 말해서 양이 성령을 받아서 더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이미 죽음과 바이바이한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안목으로 보겠죠. 그러니까 목자냐 아니냐는 누가 알아봐요? 양이 알아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목자는 양을 알고 또 양은 목자를 알아요. 누구의 지시나 명령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나 총신 나왔다. 나 장신 나왔다. 장신은 방배동 신학교, 총신은 사당동 신학교라 해요. 장로교의 양대 전통 있는 신학교. 총신 나왔다. 총신 중에서도 너는 어느 계열 나왔느냐. MDB냐 PHM이냐 있어요. 진골 따로 있고 밑에 계층들이 또 있어요. 백날 나와서 라이센스, 자격증 얻어가지고 나는 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회에서 인정해주는 목사다 하고 자격증을 딱 내밀거든요. 그럼 진짜 양 같으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쩌라고. 뭔데 이거. 찌익. 자격증을 쪽 찢어요. 뭐 어쩌라고. 성적 떼와서 all A다. 그 all A 바이바이해라, 쪽 찢어버렸습니다.

양이 목자에게 묻는 것은 딱 하나에요. “당신, 양입니까?” 그겁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목자 아니죠? 양입니까? 당신의 무덤 뚜껑이 열렸습니까?” 이거 묻는 거예요. 성령 받은 양이 목사를 고를 때는 당신, 양이 맞아요? 왜냐하면 목자는 한분으로 족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하기 때문에 목자는 필요치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필요에 의해서 보낸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죠, 양들을 섬기라고 양들을 돌보라고.

이야기 다시 합시다. 목자와 양이 구축되어 있죠. 오늘 본문대로 하면 목자장과 양은 구축되어 있죠.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 교제가 되죠. 그러면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목자를 보낼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나는 주님이 보냈다고 우길 게 아니고 그 검증을 누구에게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양에게 받아야 되죠.

양이 “당신 목사요? 당신 목자입니까?” 묻는 게 아니고 “당신 양이요?”라고 묻는 거예요, 질문을. 그러면 목사가 “나는 양 아니야. 목자야. 나 총신 나왔어.” 이러면 처음부터 목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목자는 양에서 나오는 거예요. 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목자가 나오는 겁니다.

처음 출발점을 묻고 있는 거예요. “당신, 양이요?” “양입니다.” “그럼 당신은 죽어도 괜찮죠?” 대번 이런 질문 나와야죠. “우리 교회 당신 월급 한 푼도 안주고 죽으라면 죽을 거야? 그래도 오케이? 콜?” 그러면 미쳤나. 뭐 고린도전서 뒤적뒤적해가지고 소가 뭘 갈아서 일한만큼 뭘 주고 먹여야 사료를 줘야 일할 거 아니냐 이 본문 대고. 그럼 양이 있다가 당신이 뭐 줬는데? 당신이 우리한테 뭘 준 적이 있기는 있어? 우리한테 뭘 줬는데? 설교 들어봐야 내가 보니 아무 것도 안 주던데 뭐. 총신 때 배웠던 신학이나 나불대고 있고 신학이나 썰을 풀고 있지 뭐. 뭘 줬는데? 준 게 있어야지. 준 거 내놔봐.

목자 또는 목사는 양쪽에서 다 인정받아야 돼요. 주님에게서 혼자 은혜 받았다고 인정받았다 하면 안 되고 양들에게도 인정받아야 돼요, 양들에게도. 야, 저분은 설교 잘한다. 그렇게 인정받는 게 아니고 저분은 주님이 보내셨다. ‘저분은 주님이 보내셨다. 우리가 그 분 섬기라고 보낸 게 아니고 그분이 목자가 우리를 섬기라고 주님이 보내셨다’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교회에 필요해서 장로나 목자가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결과적으로 나온 거예요. 목자장 되신 예수님 있고 양 있으면 벌써 교회에요. 이 교회를 위해서 주님께서 목자를 보냈다면 이미 구축된 양과 목자 사이에 양의 일부로서, 지금도 양이고 계속 양이면서도 목자 되는 은사를 발휘하는 사람을 하나 첨가하는 거예요. 그럼 기존에 있는 교회가 맨 그 교회가 되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눈에 보이는 교회 뭐 하겠다고 합동측 나온 목사 모시고 위임식해가지고 이웃 동네 목사 불러다가 마지막 하이라이트, 교인들 다 일어서게 해가지고 이제부터 맹세합니다. 여러분 손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세요. 여러분들이 위임한 목사에게 월급 따박따박, 따박따박이라 안하죠, 용어가 달라요, 의수히(정한 수에 따라서), 이름도 어려워요, 의수히 여러분들이 드리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순간이 그 순간이에요. 여러분들이 위임목사 했으니까 정해놓은 월급을 제대로 의수히 기꺼이 드리겠습니까? 예. 그 다음에 부록으로 사모님한테 한복 한 벌, 목사님한테 양복 한 벌. 요새 한복 누가 입는다고... 옛날 촌에는 그랬어요. 갑자기 옛 추억이 밀려오는 것 같아.

왜 위임식을 하느냐 하면 교인들이 이제는 자기 목사를 못 쫓아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맹세했기 때문에. 그 말은 뭐냐 하면 목사로 하여금 이제부터 교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그냥 발라먹을 양으로 생각하라. 그냥 양이 아니고 발라먹을 양. 찢어먹고 볶아먹고 뜯어먹고 뭘 해도 교회에서 입 다물 테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교회라는 그 부동산, 부동산이면 돈이죠, 교회라는 부동산, 사택이라는 부동산, 의수히 드리는 1년 연봉, 매해 자동갱신 되니까 1년치 연봉에 대해서는 이미 권리를 위임목사에게 위임했으니까. 그냥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목사도 아니에요. 위임목사가 되어야 목사다워요. 그냥 까분다고 다가 아니고 연~예인이 되어야 연예인이거든요.

아, 목사 위임식 할 때 목사 일가친척들이 얼마나 좋아들 하는지. 만약에 자기 동생이 목사 되었다 하면 누나가 너 마, 이제 땡잡았어. 쉿, 다른 데서 들으면 안 되니까. 너 이제 성공한 거야. 다시 말해서 동생 어렵다고 누나가 돈 대줄 일은 이제는 끝난 겁니다. 못 사는 동생, 돈 대줄 필요 없어요. 교회가 발라먹고 뜯어먹고 찢어먹고 볶아먹고 다 가능하니까. 그리고 뒤에 축도하는 목사가 마지막 결정적 멘트를 날리는 게 뭐냐 하면 주의 종을 건드리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아주 인테리어 마감재를 반듯하게, 주의 종을 건드리면 저주 받는다.

그걸 보고 후배 목사들이 뭐를 노리겠습니까? 주여, 나도 빨리 졸업해서 위임목사 되어야지. 빨리 이력서 많이 내서 위임목사 되어야지. 그게 희망이에요. 희망이고 교회가 안정되어가면 이제는 차, 사택, 전부다 교회근처 사택 말고 따로 나가가지고 아파트. 교회에 있으니까 짜증난다. 따로 마련해달라고 해서 아파트 그거. 온갖 누릴 것은 다 누리고 한 1년 지나면 설교밑천 다 떨어졌잖아요. 2년째는 부흥사로 밀어붙이고 3년째는 이웃목사한테 전화해서 우리 교회 바꿀까? 바꾸면 그 짓을 저기 가서 또 할 수가 있거든요.

그 위임식 할 때 이 본문을 거론해요. 마치 위임해주는 시찰장이라든지 노회장이 목사 편에 들지 않고 마치 양들 편에 든 것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다 합니다. 여기 한번 볼까요? 2절에,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런데 여기 나오는 단어들 있잖아요. 이 단어 개념을 오직 목사들만 알고 있다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걸 일반 교인들은 이 단어가 뭔 뜻인지 몰라요. 목사들끼리 통하는 특별한 단어사슬이 또 있어요, 이게. 맡긴다는 게 무슨 뜻이며 섬긴다는 게 무슨 뜻이며... 그 모든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순진하게 생각하는 아랫사람이 위를 섬긴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섬긴다는 의미가. 너무 심하게는 다루지 마세요, 이 뜻이에요. 너무 심하게 다 발라먹지는 마세요, 그런 뜻이에요. 좀 적당히 눈치껏 발라먹으세요, 하는 그런 뜻이라니까요. 지금 동의를 안 하니 강의 진도가 안 나가네, 참내.

여러분들이 선뜻 동의 안 되는 이유는요, 이 두 차이를 여러분 한번 보세요. 첫 번째, 부활의 영을 받았습니다. 부활의 영은 무덤이 열렸잖아요. 무덤이 열려서 무덤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에요. 사망이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어요. 그 무덤은 사망이었어요. 사망에서 벗어난 사람. 두 번째, 아직 사망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

둘 사이의 차이가 뭐냐 하면 아직 사망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든 타인을 이용해서 누가 밥 빌어먹고 살려고 합니까? 사망에서 안 벗어나니까 뭔가 틈만 보이면 돈 빼내가지고, 사망에서 안 벗어났으니까, 계속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그 사람의 본성이니까요.

여기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했잖아요.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해서 이익을 취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더러운 이익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돈 내라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5장 이 말씀 그대로 행동에 옮길 테니까 돈 내놔라 이 말입니다. 나는 주님이 인정하는 참된 목자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위임식 할 때 어느 목사가 이야기합니까? 어느 목사가 이야기해주겠어요? 그 다음 차례가 지 차례인데 어떻게 그 조직사회에서요.

조직사회에서 정의?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너 혼자 정의하나? 이 바닥이 어떤 바닥인데 네가 철딱서니 없이. 너도 한 몇 년 굴러봐. 너도 똑같아. 네가 수고하면 양들이, 교인들이 알아줄 것 같아?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안 알아줘요. 왜냐하면 양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둘 다 똑같아, 양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목사가 고생하잖아요. 거의 최저 임금도 안 되는 걸 받으면 양들이 그걸 알아줄까요, 안 알아줄까요? 알아준다?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본이 무덤에서 열고 나온 사람들이 아니에요. 부활의 관계에서 성령 받았다 할지라도 한 번 성령 받은 것으로 나는 이제 어찌 됐든지 목자다, 라고 안돼요. 계속해서 성령께서 꾸준히 이 베드로전서 5장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사람을 쳐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제목으로 할까, 제목으로 하기에는 좀 천박스러운데 <째려봄>. 째려보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 인간의 자아를 규정할 때 가장 기본이 뭐냐 하면 째려보는 겁니다. 주시하는 거예요. 지켜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어른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부터 태어나죠.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 세 가지로 봅시다. 오늘 1,2,3 많이 나온다. 부모님이 1. 따스한 눈길을 아이에게 보낸다. 2. 전혀 아이에게 관심 두지 않는다. 3. 과도하게 아이에게 관심 둔다. 이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사자머리 교수 생각난다. 아동 심리하는 오 박사.

만약에 엄마가 직장생활 한다든지 무슨 이유 때문에 아이한테 정을 안주는 경우가 있어요. 어느 소설책에 보면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아가씨가 있었는데 주둔한 미군이 그 프랑스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그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죠. 주둔하니까 나라가 미군한테 그냥 다스림을 받는 그런 형편이었어요. 기가 죽었어요, 프랑스 국민이 미군한테. 전승국이니까 해방시켜줬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술 먹고 그 남자와 같은 군인 동료들이 프랑스 여자를 좀 안다는 것을 빌미로 해서 강간을 해버린 겁니다, 집단으로. 그 남자부터 해서 그 동료들이. 그럴 때 그 여자가 임신이 되었어요. 임신이 되고 난 뒤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 엄마인 프랑스 여자는 자기 아기를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 아기 눈에서 자기를 폭력적으로 덮쳤던 그 남자의 눈동자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아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과거 아픔 때문에 그렇게 한다 치고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돼요? 아이는 전혀 엄마의 관심을 못 받죠? 이게 뭐냐 하면 자폐증이에요, 자폐증, 정신분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과도해도 마찬가지에요. 과도해도 문제가 돼요.

인간의 눈을 그려보겠습니다. 눈이 무엇을 지켜보는데 지켜볼 때, 눈---a'(이미지)---a, 어떤 이미지를 보면서 방향이 있어요. 방향이 삼각형(Ø▷눈)이 되어가지고 Ø, 헬라어로 타이인데 이것이 뭐냐 하면 그 미지의 욕망을 달성한 그 무엇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지향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런데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엄마의 시선이 자기한테 왔고 자기는 그 시선에 대해 마중을 나오면서 아이는 자아의식이 드디어 굳어지게 되어 있어요. 따뜻한 보살핌, 이런 것으로 인간의 자의식이 형성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만약 없으면 커서도 누가 자기를 째려본다든지 주의 깊게 봐버리면 자기가 감당을 못해요. 보지 마세요. 나를 관찰하지 마세요. 나를 주목하지 마세요. 하고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눈 맞춤이 안 되는 거예요, 눈 맞춤이. 눈 맞춤이 안 되고 중간에 어떤 협상, 타협안이 제시되어야 되거든요.

여기서 누가 미지의 것이 왔을 때는 인간은 전적으로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중간쯤, 이 삼각형(▷)에다가 이쪽에서 밀어내는 삼각형(◁) 이 겹치는 중간에 스크린이 발생되고 이 스크린까지 도달하고 그 다음에 넘어갈 생각을 안 합니다. 여기서 적당하게 협상하고 타협합니다. 숙제 해. 숙제 많이 했는데. 조금만 해. 오케이. 타협됐죠. 타협했잖아요.

‘나’에서 타협안까지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주로 정해지는 겁니다. 이것을 응시로 인한 자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응시, 누가 지켜보는 것, 그 시선에 대해 마중을 나오는 것. 그런데 항상 이렇게 타협을 해야 될 이유가 저 미지의 것이, 내가 감당 안 될 정도로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이 나에게 늘 덮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늘 불안불안한 거예요.

그러면 덮치는 것이 왜 불안하냐. 모든 평소의 우리 행동이 나를 지키고 나를 살리려 하잖아요. 그런데 미지의 것이 덮쳐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죽죠. 어떤 분은 젊을 때 두 번씩이나 강도를 만나서 지금도 공황장애를 일으켜서 기차도 못타고 비행기도 못타고 심지어는 버스도 잘 못타고 기껏 타면 택시타고. 어디 가려면 돈 많이 들어요. 공황장애라 하는 것은 공항에 못 간다는 뜻이 아니고 공황. 자동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몸이. 벌벌 떤다든지 새파랗게 된다든지 어떤 사람은 높은 데에 못 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몸은 자동적으로 나를,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이 있어요. 그런데 지키려고 하는 이것이 어떤 협상카드나 내 쪽에 대안이 제시가 되어야 될 건데 내 쪽에서 나오는 대안은 없고 외부의 것은 밀어붙이니까 몸이 본능적으로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든 것은 정신적 문제라 하는데 문제는 정신이 육신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게 문제에요.

그냥 정신적으로 정신 차려라,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고 아무것도 아니고 끝나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일으킨다니까요. 뭐 얼굴이 새파래진다든지 심지어 졸도하고 기절하고 죽어버리고 그래요, 비틀거리고. 차 타고 가다가 비틀거리면 큰일 나죠. 보통 문제 아니죠. 아 그냥 육체와 분리된 정신만의 문제가 아니고 신체가 정신에 억압되어가지고 자동으로 반응을 나타내는구나.

자, 그렇다면 이런 일의 좋은 예가 무당들의 굿판입니다. 무당들의 굿판은 원래 소비자가 있기 마련이죠. 좀 굿 한판 해주세요. 그렇게 요청이 먼저 들어와요. 무당이 동네방네 다니면서 딩동~굿 한판 해드릴까요? 이런 무당 없어요. 무당들은 아주 깊숙한 데 있어도 일부러 소문 듣고 찾아가죠. 신 내림 받았다는 소문 들으면 찾아가는 거예요. 굿판 해달라고.

그러니까 굿판은 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유령이 온다는 거예요. 유령이라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까지 감당하면서 살아왔는데 이번에 내 인생사에 터져버린 일은 내가 감당할 엄두가 안 나는 거다. 나의 본성은 내가 나를 지키고 더 살아야 된다는 살 일이 남아있는데 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난처한 일이 내 목을 조르고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니까 견디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때는 굿판 벌이는 겁니다.

자, 굿판 벌일 때 무당들이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저기 귀신이 있습니다. 귀신을 한자로 ‘가’라고 하는데요, 귀신 있습니다. 그 귀신이 지금 쳐들어옵니다. 그럼 중개인으로서 무당이 귀신에게 눈요기 감을 제공하는 거예요. 온갖 천박한 색깔 있잖아요, 염색약 다양하지 않을 때 나왔던 원색적인 것, 특히 빨강색, 노랑색, 노랑색 염색도 잘하는 데 좀 하지, 분홍색도 아니에요, 파랑색 해가지고 온 깃대를 꽂아놓고 장대를 해놓고 거기다가 옷도 삼원색으로 해서 거기서 작두, 발 안 베일라고 일부러 뭉툭한 작두, 발 베어서 병원에 입원하면 지만 손해에요. 여기서 춤을 추면서 청중들도 놀라고 따라온 같은 엔터테인먼트 소속된 조가 같이 미치고 온 관람객들 같이 미치고 환자도 미치고 다 미쳐가지고 정신을 쏙 빼놓고 그 다음에, 귀신 물러갔습니다.

유령들에게 눈요기 판 해서 심술들을 완화시키는 이것을 가지고 네 자로 무당들의 ‘진정효과’라 해요. 진정하는 거예요. 애들 말 안 들으면 집에 생각의자 놔두고 앉히죠. 릴렉스 릴렉스 컴 다운~진정효과 하는 거예요. 애가 발작을 일으켰으니까 진정하는 거예요.

그거나 새벽기도 나가 기도해서 쭈여 쭈여 한번 흔들다가 조금 있으면 조용하게 되어버리죠. 자는 건지 아니면 기도 중얼중얼하다가 30분도 안 돼서 전부다 자요. 목사님, 이제 새벽기도 끝나서 들어가야 되는데. 아이고 뭐 이래서 침 이만큼 흘려가지고 보람찬~ 오늘도 새벽기도 했다고. 오늘 38일째, 39일째 카운트 들어가요. 그 카운트 왜 합니까? 39일째가 마지막이에요. 40일은 건방지다고. 예수님이 40일 금식했는데 지가 예수님과 동등된다고. 맡기운 자에게는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않고 이거 스스로 윤리 도덕적으로 겸손한 티를 내면서 그 짓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무덤을 열고 나오는 영이 없어서 그래요. 성령이 없어서 그래요.

교회 운영은 해야 되겠지, 성령 받은 양은 없지, 사람은 끌어 모아야 되겠지. 그럼 하는 방법은 뭡니까? 기독교식 무당을 도입하는 거예요. 인간이 뭔가 조용하게 살다가 파란이 일어나게 되면 인간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어쩔 줄을 모르거든요. 정신 나가죠. 뭐라도 붙들고 싶은 거예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무당이든 뭐든 하여튼 나를 좀 calm down, 안정되게만 해준다면 굿판 돈은 내가 심심치 않게 하겠습니다. 병원에서 손 놓은 환자를 무당들이 데려가서 안정시키는 겁니다. 안정시킬 때 보통 500만원 들어간다고 보거든요. 500만원 돈 낸 소비층이, 무당 지들이 500만원 받고 별로 하는 일 없다고 하는데 현장에 가보세요. 아니 이거 500만원 값을 하네. 값을 하죠. 얼마나 그동안 두 달 동안 못했던 체중조절 다한다고 전부다 뛰고 흔드는데 필라테스가 따로 없어요. 마구 흔들면 쏙 빠지죠. 빠지면서 신나게 땀 흘리고 고함은 고함대로 질러서 목 다 쉬고. 역시 정말 신 내림 받은 사람 맞다.

그 신 내림이나 부흥사들이 부흥회 돈 내라고 고함 질러서 목 쉬는 거나 차이가 뭐 있습니까? 똑같은데. 믿씁니까? 이거하고 차이가 뭐가 있는데요? 따라서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람 찾는 게 아니고 상담가를 찾아요, 상담가. 무당을 찾습니다. 교회는 운영을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무당답고 상담가를 찾으면서 카리스마 받았다, 이렇게 얘기해요. 영빨 센 목사, 그들끼리 그렇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는 알려주마.

예수님만 있어도 충분해요. 예수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공황장애 있다는 이유로 지옥 안 보냅니다. 왜냐하면 공황장애라도 이것은 우리가 고쳐야 될 우리 일이 아니고 일어나야 될 일이기 때문에. 그건 성령 받아야 알아요. 성령 받아야 내가 이거 ‘나한테 문제 있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은 문제 있기 때문에 아예 인간에게 뭘 요구하지 않아요. 문제 있는데 뭘 요구해요? 죄인이 스스로 개과천선할 것 같으면 십자가 왜 졌습니까, 성령 왜 옵니까? 주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귀찮은 일을 왜 했겠어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은 안 받아줍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똑같이 그것은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집에서 민화투 화투치는 일도 쓸데없는 일이고 판사가 재판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고 목사가 설교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고 의사가 병 고치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고 전부다 동일한 일이에요. 전부다 똑같이 하늘나라에는 전혀 가치 없는 똑같은 일이에요.

인간이 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일은 어떤 경우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목자의 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양이 아닌 목자는 목자가 아니거든요. 어떤 일도 양의 일로 하지 않습니다. 양은 일하지 않습니다. 양은 오직 주님만 양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주체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께서 하게 하셨다’. 주께서 공황장애 만들어 주셨다. 주께서 나한테 관심도 두지 않는 엄마를 만나게 해줬다. 난 그 엄마를 통해서 주께서 태어나게 하셨다. 모든 것의 주어를 주님께 다 돌려야 돼요, 모든 것을.

따라서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는 한 이 땅에 양은 없습니다. 주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양들이 나오죠. 그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면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그것을 주님 자신의 일로 스톱, 마감했습니까? 아닙니다.

없는 양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부활의 영을 천하 죄인에게 주니까 세상에 하루 아침에 그 죄인이 양이 되고 말았어요. 김양, 최양, 박양 양이 되고 말았어요. 더 이상 진정효과란 건 필요치 않습니다. 그건 성령 안 받은 자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상담? 무슨 상담이 필요합니까? 뭘 노리고 상담해요? 어쩌겠다고 상담합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부활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부활의 핵심이 뭐냐.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아까 들은 사람 이야기해주세요. 부활의 핵심은 뭡니까? 일관성이에요, 일관성. 초지일관 한결 같아요. 양이 혼자 있을 때나 목자가 올 때나 하나님의 일은 초지일관 똑같이 변동이 없습니다. 변동 없게 하기 위해서 목자를 보낸 거예요. 양 중에서 목자를 뽑아서 그 양을 치게 하는 이유는 주님의 완성된 다 이루심을 이루심답게 초지일관 유지하라고 목자를 보낸 겁니다. 그 내용이 뭘까요? 10분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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