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악마추격자

아빠와 함께 2021. 5. 15. 09:49

서울의존강의20210513a 베드로전서5장 8절(악마추격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8.  Be sober술취하지않은, be vigilant방심하지않는; because your adversary상대방.적수 the devil, as a roaring lion, walketh about, seeking whom he may devour집어삼키다:
9.  Whom resist stedfast변함없는(=steadfast) in the faith, knowing that the same afflictions are accomplished in your brethren that are in the world.


여기 나오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하나로 엮여져 있습니다. 그 중심점은 마귀의 활동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 마귀의 활동에 의해서 성도에게는 고난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을 세상 사람들은 찾아낼 길이 없습니다. 세상은 모든 뉴스에서 정치적인 이야기 나오고 경제적인 비트코인 이야기 나오고 이렇지,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깜깜한 거죠. 그런데 여기 8절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라고 하는 걸 봐서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 본문을 보려면 마귀가 활동하고 있는 증거, 흔적 그것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내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귀 추적자에요. 서부 영화에 보면 현상금 노리고 살인자들 찾아다니는, 그것 가지고 생활해 먹는 무법자들이 생기잖아요. 개척시대에 경찰 치안은 안 되어 있고 보안관 숫자는 적고. 그러면 범인들이 설치니까 돈으로 현상금 걸어서 아무나 나쁜 사람 잡으면 되지. 그러면 현상금 추적자가 등장하겠죠.

‘마귀야, 오라’고 기다리는 게 아니고 마귀를 찾아나서는 겁니다. 누가? 믿는 자가. 성도=믿는 자죠. 이 믿음의 내용 속에는 마귀의 활동이 그들에게만 확인된다. 그들만 알아챌 수 있다. 이게 오늘 본문 5장 8절-9절에 나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도한테만 이 마귀의 활동이 포착되는데 왜냐하면 성도는 특별한 고난을 받기 때문에, 성도만. 성도는 특별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 고난은 마귀로 인하여 맞닥뜨리면서 생긴 고난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 자체가 허황돼도 보통 허황된 게 아니에요.

악령을 청소해주는 악령 청소대행업체가 있어요. 귀신을 청소해주는 대행업체. 그 영화가 있었는데 노래도 유명해요. <고스트 바스터즈> ‘고스트 바스터!’ 노래에 나와요. 청소기 돌아다니면서 귀신을 빨아당기며 소제(掃除)해주는 겁니다. 어디 흉가에 귀신 들었다고 하면 고스트바스터가 출동해서 청소기 윙~하면 그 안에 다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귀신이 상당히 물질적이죠. 유물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귀신을 포착하는 데에 있어서 이 우주를 구성하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4대 힘으로 가능하다는 거예요.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력. 이것 가지고 귀신을 뽑아내겠다는 겁니다. 참 그걸 보면 그런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신앙생활을 설명하는데.

옛날에 영어로 된 영화 <고스트(Ghost)>, 우리말로 하면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데뮈 무어하고 패트릭 스웨이지 나오는. 그 남자가 죽어서 귀신이 되었는데 귀신이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동전 가지고 그것도 아주 애를 써서 힘주어서 튕기니까 동전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죽은 남자 애인이 살아있다는 것을 데뮈 무어가 알죠. 그 유명한 장면 있잖아요, 도자기 굽는 장면. 뒤에서 팔로 안아서 하는 그 장면, 음악도 유명한 음악이죠.

그런 악령, 유령, 귀신 이야기가 왜 비신앙적이냐 하면 이런 귀신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 자체가 죄인이다’ 를 증명해내지를 못해요. 증명 자체를 못합니다. 귀신을 추방하는데 급급해요. 재수 없는 거 저리 가. 이런 식으로. 지가 더 재수 없는데. 자꾸 재수 없는 거 떠나라 하면 본인 스스로가 종교재판 벌인 게 돼요. ‘인간 자체가 죄인이다’를 증명해내지 못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마귀 추적자. 마귀가 오도록 소극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마귀를 찾아가는 거예요. 왜? 성경에 나오니까. 마귀 너 어딨니? 마귀 까꿍. 마귀하고 숨바꼭질하는 거예요, 성도가. 그러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믿는 자잖아요. 성도는 믿는 자거든요. 믿는 자라는 말은 마귀가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 이게 성도죠.

일단 공식 한번 봅시다. 공식 중요합니다. 1.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같은 시시한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질병관리청하고 상대 안 해요. 성도는 정은경 관리청장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스트 바스터이기 때문에, 귀신 추방자이기 때문에. 코로나 추방자가 아니잖아요. 귀신 추방자잖아요. 그러니 성도는 인간하고 상대를 안 해요.

그러니 아내가 성도고 남편이 성도 아니라면 아내는 남편하고 상대 안 합니다. 상종할 가치도 없어요. 이거 봐요. 고개 끄떡이잖아요. 벌써 신앙인이잖아요. 상대가 뭐 말할 가치가 있어야죠. 남편 상대하라고 믿음 주신 게 아니잖아요. 상대하지 말라고 믿음 주신 거예요.

두 번째 공식이 중요한데 두 번째 공식은 성도가 마귀를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박살내느냐, 그 공식입니다. 그 공식은 뭐냐 하면 처음에 마귀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이유를 성도한테 없애버리면 돼요. 그 이유는 선악과에요. 선악에 대한 지식이에요. 선악에 대한 지식 때문에 인간은 꼼짝 못하고 악마한테 휘둘리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선악.

그래서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성도가 알아서 죄인 되면 되죠. 참 쉽죠잉? 성도는 알아서 죄인 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 안하죠.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하고 상대 안 하냐면 이 불신자들은 자기 의를 주장해요, 자기 의를.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 이유가 사람들은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이미 악마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부리는 대로 하는 거예요. 너 선해야 되잖아. 악하면 안되잖아. 악하면 저주받잖아. 이런 식으로 악마가 인간을 갖고 놀거든요.

성도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 할 때 이 사람은 뭘 주장합니까? 선악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의를 포기 못하죠. 그러면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성도가 알아서 자기 의를 포기하면 되잖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성도가 만든 성도의 자리는 성도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여기에 휴지통, 쓰레기통을 마련하는 거예요. 쓰레기통을 마련해가지고 자기의 모든 행위를, 지금 하는 또 과거에 했던 모든 행위를 이 더러운 쓰레기통에다가 다 집어넣으면 마귀를 이깁니다. 마귀를 이겨요.

만약에 내가 부모께 효도했다. 효도를 하잖아요. 효도했으면 그 효도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효도한 것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효도한 것도 죄가 되니까 2.성도는 항상 큰 쓰레기통을 갖고 다녀요.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은 알아서 이것도 죄고 이것도 죄고 전부다 죄를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겁니다. 컴퓨터에 휴지통 있죠? 파일들 커서로 다 끌어당겨서 휴지통에 넣어 없애버리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선악구조가 되어있는 이 체제, 시스템에서 마귀가 인간을 전부다 붕 뜨게 만들었어요. 누가누가 착하냐, 누가누가 선하냐, 누가누가 많이 훌륭하냐, 악마가 시합을 붙인 거예요. 배틀을 붙인 거예요.

그러면 성도라 하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죠. 이 땅에서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았기 때문에. 성도의 있는 위치가 그 저주의 구멍 난 지역에, 선악체제에 구멍 난 지역에 위치해버리면 내가 한 어떤 일도 전부다 저주받을 짓으로 간주해서 그 빈 구멍에다가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한테는 선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선한 일 없~다. 가 되죠. 그게 바로 원천적으로 악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참 쉽죠잉? 그쵸? 되게 쉽죠. 그래서 불신자 남편을 신자 아내가 상대할 필요 없는 이유는 남편은 입만 열면 뭘 주장합니까? ‘나 잘났잖아’ 에요. 나 정당했고 나는 정당할만해서 정당하고. 이런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내는 복음에 대해 관심이 있고, 아내가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는 그만큼 나한테 관심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뭔가 불만을 갖고 있는 남편이 아내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는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 모든 취미생활, 여가생활 다 자진해서 반납하고 포기하고 오직 이 더러운 세상에 돈벌이 위해서 희생을 다했다. 그래서 이 가정을 이만큼 건사했다. 그런데 이 가정을 건사하는데 있어서 당신은 어떤 점에서 기여했는가?” 라고 불신자 남편이 복음에 관심 있는 아내한테 이야기한다면 아내는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문제가 모호합니까? 다시 할까요? “나는 결혼할 때 당신과 함께 이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짐을 했고 그렇게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지금도 변함없이 이 가정에 대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면서 온갖 설움 받아가면서 돈 한 푼 더 벌려고 애를 썼다. 거기에 대해서 당신은 이 가정의 한 책임자로서 어느 정도 호응을 해야 될 임무가 있지 않느냐? 적어도 인간적으로 양심적으로 호응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당신은 복음이나 그런 데에 빠져버리면 내가 당신에 대해 어떻게 신뢰성을 가지고 자식이나 당신을 위해서 또다시 헌신할 의지와 용기가 생기겠는가. 당신도 내가 한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이 가정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겠다는 그런 약간의 의사는 보여야 마땅하지 않느냐?”라고 했을 때 복음을 아는 그 여자분은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객관식으로 했으면 좋겠지만 객관식은 너무 길고 주관식으로 답변해보세요. 십초 드리겠습니다. 귀한 시간이기 때문에. 포, 쓰리, 투, 원, 땡! 정답 알려드리겠습니다. 방금 이거 답변 못하면 1번 공식 안돼요. 성도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이게 이해 안 됩니다. 답변: “네가 감히 나한테 명령을 하다니! 요즘 많이 컸대이” 이게 답변이에요. 이게 답변입니다.

그럼 남편이, “너무 과격하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왜 이런 답변을 했는지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한다면 아내는 이렇게 해야 돼요. “결혼은 남남이 만나서 결국 남남임을 확인하는 게 결혼이야. 네가 뭐 가정을 위해서? 개뿔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목표가 없어요. 당신은 복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조작하지 마. 당신은 선한 이데올로기, 선한 신념, 선한 명분 가지고 그 뒤에 당신의 자기 위주, 자기 잘남을 간교하게 숨기지 마.” 윤리도덕 뒤에 숨지 말란 말이죠.

당신이 가정을 위한다는 그걸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혼내주면서 그게 바로 ‘집착’이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할까요? 그게 정신병이에요. 환상을 쫓는 정신병이에요. “당신은 결혼해서 아직도 시건 안 났어? 그거 몰라? 솔직하자 이 말이죠. 솔직해. 누구 좋으라고 결혼했는데? 뭐 나 좋으라고? 가정? 가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당신 좋으라고 결혼했어. 감히 누구보고 명령질이야, 이게. 내가 좋아서 가는데 니가 왜? 뭐 동정을 유발하면 따라갈 줄 알았지롱? 당신이나 자격을 가져. 애초부터 나는 나의 의를 가질 자격도 없는, 철저히 나밖에 모르는 죄인이야. 됐냐?!” 이게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에요.

어디서 어쭙잖게 동정을, 그것도 이기적 동정을 유발시키려 하지 마세요. 이것을 인간은 모르지만 귀신은 압니다. 왜? 귀신 같거든요. 귀신은 귀신같아요. 어떤 인간도 선악체제, 자기 의, 자기 착함에서 발을 뺄 수 없고 포로가 되어있다는 것은 악마가 귀신이 자신만만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고 인간의 선한 윤리에 호소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할 말을 잊을 것이라고 악마는 자신만만해합니다.

그러나 이 신자 된 아내는, “난 개거든. 개인데 주님의 개야. 지시받아도 주님한테 지시받아. 너한테 지시 안 받아.” 이걸 선빵 날린다고 이야기해요. 이게 선빵 날리는 거예요. “싫으면 갈라서든지.” “뭐 당신이 믿는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맺어준 것은 한 몸이니 갈라서지 말라고 하던데.” “어디서 불신자가 성경을 언급해! 니가 복음을, 십자가를 알아? 알고서 언급해! 개뿔도 모르면서 어디서 써먹을라고. 그게 윤리책인 줄 알아?” 갑자기 제가 지금 누구보고 나무래나. 미안합니다.

악마의 실체를 들추어내는 것은요. 성도가 누구보다도 내가 개 같은 죄인이라는 그러한 자리를 확보하지 않으면 악마를 이길 생각하지 마세요. 대적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파생된 공식, 3.성도의 자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을 발생시키는 자리’가 성도의 자리에요. 따라서 이것이 무의미가 되죠. 이 무의미가 세상에 유포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이깁니다. 모든 의미의 바탕에는 자기 의, 자기 잘남이 깔려 있기 때문에. 자기 잘남이 깔려있거든요.

남편이 과거에 미션 고등학교 나와가지고 아는 체하면서 “성경 에베소서 5장에 보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하라 하는데 니는 같은 예수 믿는 교회 가서 뭐 배웠노? 남편에게 복종을 해야 내가 교회 가줄까 말까 하는데 너는 뭐 배웠노?” 또 이래 나오죠. 그러면 이렇게 해야 돼요. 마귀도 성경 인용한다고. 마귀도 성경 인용하죠.

그 말씀은 어느 누구도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단 말씀이야, 이 인간아. 이제 알아들었나? 그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 내놓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것은 전무하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기에 주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발생시켜요. 기포 발생기 있잖아요,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

아무것도 아닌 것이 올라옴으로써 그 자리가 이 땅에 남긴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 완성의 자리, 곧 저주의 자리입니다. 그 저주의 자리를 우리가, 성도가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을 이기는 거예요. 역설이죠. 역설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어떤 것도 이기는 거예요.

자식한테 “밥 차렸다. 빨리 먹어라.” 하니까 말 안 들어요, 사춘기 돼가지고. “엄마, 저 게임하고 밥 먹을래.” 엄마가, “빨리 밥을 치워야 내가 그 다음 일을 한다. 내가 지금 안 치우면 내 일이 네 일 때문에 미뤄지잖아. 피해보잖아.” 그러면 “내가 하겠다는데 엄마가 왜 내 일에 간섭합니까? 나 엄마 말 안 들어요. 엄마는 무식하고 내 친구들은 유식하고. 엄마한테 이야기해봐야 아는 것도 없고 엄마하고 이제 나 이야기 안 해.” 하니까 몽둥이 들고 와가지고 문 잠그면 그 문을 아예 통째로 박살내고 패죠. “엄마 신고한다, 경찰서.” “신고해라. 나 엄마도 아니다. 나 네 엄마 아니다. 나 죄인이거든. 나 엄마 아니야.”

진정으로 상대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본인이 망가질 때나 가능한 일이에요. 본인이 하나님한테 철저하게 존재가치가 없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 그럴 때 나의 결심과 의지로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어떤 업적이나 실적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겁니다.

주께서 아무것도 아닌 성도를 보내가지고 악마의 존재성과 그 활동성을 들추어내는 작업에 자기 사람들을 동원시킨 겁니다. 어느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냐하면 선악을 따져볼 때 따질 가치조차 없는 그런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 도적 이런 사람들이죠. 배신자. 베드로 뭐 이런 사람들이겠죠.

그래서 성경 읽을 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도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를 무의미하고 아주 죄인으로 박살내시는 그 주님이 모든 성경 말씀을 현실화시키고 실현시켜나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장 10절의 한 대목을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이 있죠.

방금 이론에 의하면 이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주의 말씀을 주님이 지키죠. 주님이 지키면 성도는 이 말씀을 본인이 지킨다, 못 지킨다? 본인이 지킬 수 없죠. 주님이 이 말씀을 지켜 나가겠죠. 그러면 성도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죽도록 ‘네 일’에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

죽도록 네 일에 충성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도록 얻어맞겠죠. 주의 말씀과 틀리니까. 왜 ‘죽도록’이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최우선 관심사가 자기 일뿐이거든요. 죽도록 내 일에 충성하는 거예요. 시험 칠 때는 시험 공부하고. 죽도록 자기 일에 매진하는 거예요. 돈 한 푼도 아끼고 시장가서 상인들하고 막 싸우면서 당신 100원 빼준다 했잖아. 이렇게 싸우고. 이 모든 일이 누구 일입니까? 전부다 죽도록 나의 일이죠. 버스가 왔는데 버스가 왜 나를 놔두고 그냥 가버려? 이런 거. 전부다 누구 일이에요? 전부다 내 일이죠. 비트코인 누구 말 듣고 샀는데 그 다음날 폭락해서 같이 폭락하고. 에이, 팔았는데 그 다음날 다시 급등하고. 도대체 아주 나를 갖고 놀아.

주께서 일으키는 모든 일은 성도로 하여금 주의 일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자기 일만 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일을 하셔요. 자기의 가오,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명예, 위신 결국은 그거 챙기면서 어쭙잖게 주의 일 했다는 핑계 대는 이 위선적인 모습을 성도를 통해서 마음껏 들추어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주님 앞에서 감히 본인이 주의 일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죠.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성도한테 누가 보이느냐 하면 악마의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윤곽이 잡힙니다. 저기 나 같은 인간 또 있네. 지밖에 모르는 인간 또 있다고. 지 잘난 체, 자기 의 주장하는 사람 또 있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를 활용하시는 거예요.

자,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인간이 악마한테 꼼짝달싹 못하게 된 이유가 그 원인을 보면 간단해요. 선과 악에 대한 지식확보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왕 확보된 지식을 어~한다고 잊어버립니까? 약물 주사해서 그게 사라집니까? 죽을 때까지 선악이 사라지지 않죠.

선악지식은 의미를 유발해요, 의미를. 이건 선하다. 이건 악하다. 의미를 유발한다고요.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돌아서서는 반드시 거기에 대한 자평이 있기 마련이에요. 스스로 평을 해요. 잘했나 못했나, 잘했나 못했나. 그러니까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갈 어떤 대안도 없죠. 무슨 대안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죽도록 자기 일에 충성하세요. 충성했는데 뭐가 주어졌습니까? 세상에,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져버렸네.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죽도록 내 일만 했는데 생명의 면류관 얻었을 때에 그 성도는 누구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 자랑하겠죠. ‘나 같은 죄인~’ 노래 부르면서 십자가 자랑하겠죠.

그게 악마의 약을 올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진해서 죄거든요. 자진해서 죄인이잖아요. 알아서 손 들었다 이 말이에요, 알아서. 알아서 손 든 거예요. 교회에서 하는 짓 중에 제일 어리석은 짓이 인간이 자기 믿음으로, 자기 의로 악마를 이기겠다고 설치는 것. 그것이 악마가 원했던 바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악마를 찾아 나섭시다. 악마 어디 있나? 어디 있어요? 악마가 벌벌 떨도록 악마 한번 찾아나가 봅시다. 악마 추격자니까. 크게 쓰겠습니다. 악마가 어디 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악마는 역사 안에 있다’. 악마는 역사 안에 있어요, 역사 안에. 역사를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식 안에 악마가 있습니다. 시간의식이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이 계속 흘러간다고 생각하죠. 제가 과거, 현재, 미래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 지금, 그리고 아직 안 이루어진 것 있죠. 그 사이에서 의미가 생깁니다.

자, 악마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 무엇을 계속 생산해낸다? 의미를 생산해내는 겁니다. 의미라는 것이 어려우면 다른 말로 하면 가치 있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쓸모 있는 것을 생산해내요. “하나님, 나 쓸모 있죠?” 그럼 하나님께서 “네가 네 스스로 자평하기를 스스로 쓸모 있다고 하니까 그 근거를 대봐라.” 그럼 성도라 할 것도 없이 그 교인은 “과거에 내가 선교사 했잖아요, 과거에. 과거에 내가 교회 충성했잖아요. 과거에 내가 주일학교 했잖아요. 성가대 했잖아요.” “방금 뭐라고 했어?” “과거에. 과거부터 지금껏 계속 성가대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너는 날마다 안 죽었구나.” 내가 너한테 시간 속에서 과거를 준 것은 날라가버린 거예요. 소실되어버린 것이 과거죠. 끊어진 거예요. 인간에게는 항상 시간이라는 꼬리가 생기면 생길수록 현재가 과거를 가위가지고 생길 때마다 싹둑싹둑 끊어줘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겁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하는 것은 과거와 단절시키라는 거예요. 애굽과 단절시켜라. 이것은 성경을 봐야 돼요, 그냥 설명하는 것보다도. 출애굽기 15장 26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그 다음부터 중요해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자, 보세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그 질병이, 그 재앙이 너희한테 유보되어 있다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모든 율례와 계명을 지키는 경우에 그 재앙은 유보되어 있는 거예요. 안 내리겠다는 게 아니라 유보된 거예요. 그러면 그 율례와 법도와 계명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치료하는 효과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치료하는 효과.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럴 거예요. “우리에게 마음껏 율례와 법도, 계명을 이야기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님께서는 “애굽 생활을 잊어라. 끊어내라. 끝내라.” 그 애굽 생활을 끊어내고 이제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주께서 함께 하사 약속의 땅이라는 앞을 보고 들어가야 되는데 과거는 끊어내야 되는 거예요. 과거란 잊으라고 있는 것이고 앞은 기대하라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물 없고 양식 없을 때 그들 입에서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말은 Go to the 애굽. 고 투 더 이집트. 이집트로 돌아가자.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는 기억덩어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아는 기억덩어리에요.

기억은 인간의 두뇌 해마에서 만들어져가지고 다른 곳으로 퍼져요.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쪽으로 쭉쭉 퍼져나간다고요. thalamus라고 하는 시상, amygdala라고 하는 것은 扁桃體, 그런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어요. 기억이 인간의 두뇌에서 쓸모가 있는데, 무수히 들어오는 감각에 대해 인간이 다 소화를 못 시킵니다. 그럼 그것을 어디서 관리하느냐 하면 시상에서.

thalamus라고 하는 視床에서 조절해가지고 이것은 새롭다 싶으면 받아들이고 안 그러면 제어를 해요. 통제를 해버립니다. 하나의 conductor,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stop한다고요. 새로우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받아들이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자아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감각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걸 차단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아는 어디에 들어있는가? 그 자아는 인간 속에 없어요. 그러니까 뇌과학적 설명이 이게 혼돈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분명히 누가, 인간 속에 뭔가 주인공이 있는데,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조절이 되는데, 조절자를 나와 보라고 하니까 그 조절자가 없어요, 인간의 두뇌 속에. 귀신같아. 인간 속에 누가 영적인 귀신이 지배하는 거 같아요.

저건 유리하다, 불리하다를 누가 결정해야 되잖아요. 결정하는데 결정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억된 것 가지고 참고적으로 한다는 거예요. 누가? 셀프(self). 자아가. 자아가 어디 있는데? 없어. 도대체 이게 보통 문제 아니죠.

과학을 하는 인간들이 사기꾼 아닌 것 같은데 살짝 사기꾼들이에요. 해답도 없으면서 되게 큰소리치거든요, 해답도 없으면서. 그런데 오늘날 믿을 구석은 과학밖에 없어요. 철학도 종교도 믿을 게 없고 오직 믿을 것은 과학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합니다. 자아는 어디에 있느냐. 내 바깥에 있다. 바깥 어디에? 환경에. 환경 어느 환경 말이고? 자연? 아니. 뭐? 국가. 바로 다니엘 7장 짐승의 등장입니다. 짐승의 등장.

악마가, 귀신이,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는 국소적인 질문이 성립돼요. 데카르트가 말한 좌표 속에서 x,y의 좌표점을 찍을 수가 있어요. 존재니까.

그런데 귀신은 천사거든요. 천사라서 이 좌표를 뛰어넘어 우발적이에요. 우발적이고 돌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야 돼요. 악마가 어디 있느냐 하지 말고. 있으면 뭐 찾아갈래? 네비게이션으로 찾아가면 거기 있습니까? 흉가 아니에요. ‘악마는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악마는 무엇을 가지고 활동합니까?’ 또는 ‘어느 속에서 활동합니까?’라고 할 때 다니엘에서 인간은 국가를 통해서 활동합니다.

그러니까 그 철학자의 말이 맞죠. 인간 개인이 듣고 보고하는 모든 것은 다 어디서 주어지는 겁니까? 지가 소속되어 있는 국가로부터 주어지는 거예요. 북한 김정은이라는 젊은 사람 밑에서 늙은 할아버지들이 박수치는 것 좀 한번 보세요. 무겁게 훈장 달고 박수치고 있어요. 만약에 억지로 친다 그러면 그 다음날 아오지탄광 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카메라 비디오 다 찍어서 어느 인간이 억지로 웃는 척하고 박수치는지 다 조사하기 때문에. 또 그 일하는 기관이 있잖아요, 북한에서. 그래서 전부다 그렇게 박수치는 거예요.

여러분들 뉴스에서 봤죠? 그게 어느 점에서 비정상입니까? 어느 점에서 비정상이에요? 비정상은 맞잖아요, 분명히. 100% 투표에 100% 찬성. 이건 말도 안 되죠. 인간이 기계도 아니고 붕어빵도 아니고. 그러면 여러분 보기에 어느 점에서 그들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관심도 없어요? 그런 거 내 일 아니라고, 우리 아이 키우는 거하고 관계없다고 이야기를 안 하시는 겁니까?

우리하고 어떤 차이가 나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어느 점에서 그들이 문제가 되느냐. 또 알려드려요? 오늘 알려드리는 게 왜 이리 많노. 북한은 우리가 하는 혼잡스러운 노선을 통과해서 최종적 짐승이에요. 극단적 짐승입니다. 한결같죠. 균일화되어 있죠. 개성 없죠. 그런 북한 욕하지 말고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바로 그 세계에요.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희한하게도 그 나라는.

여러분들 히틀러 알죠? 나치 한번 보세요, 나치. 히틀러가 콧수염 달고 연설하잖아요. 그 사람 나이 오십쯤 더 됐는데 그 사람이 연설할 때 그 많은 군중들이 반발합니까? 반발 못 하죠. 그냥 미쳤죠. 집단 최면에 걸렸죠. 그런데 그 히틀러가 얼마나 많은 자국민들을 죽였는가 생각해보세요. 무지무지하게 죽였어요, 정치범들. 자기의 정치적 정적을 많이 죽였습니다. 공포정치죠.

죽이는 이유가 그것이 악마가 쓰는 무기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한다 (히브리서 2장 15절). 딱 그 구절이 가장 우리 가슴에 와 닿는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한다면 비록 우리가 이 남조선에 살아도 우리는 북조선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를 바 없어요. 뭐 이만갑, 삼만갑해도 소용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한다면 한국이 아니고 미국 가도 마귀의 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겁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국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 그게 인간의 희망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 세계.

그 세계의 특징을 말하라면 목숨을 보장해주는 세계에요. 국가 없이는 죽잖아요. 그러니까 목숨을 보장해주는 세계이고 주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죽으라고 하는 거고. 반대도 그렇게 반대일 수가 없어요.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라하시죠. 십자가 지고 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이에요. 죄인 주제에 어디서 살려고 깝쭉대? 죄 지었나? 죄 지었습니다. 그럼 죽어. 그게 바로 악마를 파악하는 유일한 지점이에요, 그게. 내가 죽어야 될 이유는 천하의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성도죠. 그 사람이 바로 구원되는 사람이에요.

아까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아내한테 징징대면서 나는 이렇게 희생하는데 당신은 좀만 도와주면 안 되느냐. 복음 같은 취미생활 하지 말고 같이 협조해서 내 말 잘 들어라. 그러니까 가부장제도가 옛날처럼 술 먹고 엎고 때리는 가부장제도도 있지만 요즘 현대판 가부장제는 싹싹 빌어가지고 자기의 통솔 아래 노예로 만드는 그러한 가부장제도.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유발하고 늘 징징대면서 난 너 없이는 못 사는 거 알지? 그치? 그런 가부장제도. 수법은 달라도 노리는 것은 ‘나 죽기 싫어’란 뜻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 따먹은 자는 이미 죽은 자이죠. 그런데 악마는 살 때까지 한번 살아봐야지. 버텨라, 너의 착함과 너의 선함과 너의 우수함과 너의 훌륭한 자질, 그거 아깝지 않냐? 널 죽여버리면 하나님도 아까울 거야. 하나님도 쓸모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 착함을 유지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 이게 바로 악마가, 살고자 국가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외치는 그들의 교리입니다. 종교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10513b 베드로전서5장 8절(악마추격자)-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시간, 역사가 의미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만드는 그 주도권자 또는 역사의 주인공, 인간들의 자기 의지와 개혁적이고 발전하겠다는 그 지혜의 통합, 지혜를 모으는 것, 그것이 역사를 좋은 쪽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역사의 발전은 반성에서 오는 거예요. 반성,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실제로 해보고 현실에 더 적당한 것은 없는가, 더 나은 게 없는가를 자체 검증을 통해서 오류를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한다고 보는 거예요. 발전, 또는 진화.

역사가 진화, 발전한다는 것은 역사의 주인공은 역시 인간이고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가 있고 그 되돌아보는 계기는 실제 일어난 현실과 부합되는지 안 되는지를 검증해보는 거예요. 검증해서 오류가 발생되면 오류를 없애는 방향으로 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자질이 인간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되는 쪽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자화자찬 또는 인간, 인류의 자기 숭배 같은 게 있죠. 거창하게 인류의 문명까지 이야기했지만 거창한 인류 문명 말고 여기에 개인 인생사를 적용시켜 보세요, 인생사를. 개인 인생사를 집어넣으면 항상 인간은 지금의 자기 자신을 과거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그렇게 자부하고 싶어요. 과거보다 못하다는 생각보다도 더 나아졌고 더 시건 났고 더 지혜롭고. 그래서 과거보다 훨씬 더 우수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역사 안에 무엇이 작용한다 했어요? 바로 악마가 작용하죠. 그래서 다니엘 7장에 나오는 국가, 짐승은 다른 짐승으로 바통을 이어서 계속 교체가 돼요. 그리고 인간 역사의 모순점이 이것인데 기존의 국가보다 더 강한 국가가 와서 기존의 국가를 무너뜨릴 때 발전이라는 게 성립이 되잖아요. 그렇죠?

이세돌이라는 바둑 두는 사람 압니까? 바둑 둘 때 인공지능이 한 판 졌잖아요. 졌는데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기 개발해가지고는 어떤 인간도 한 판도 인공지능을 그 뒤에 이긴 사람이 없어요. 인간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빨리 발전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오류를 수정하고 더욱더 수를 넓혔기 때문에. 지금은 인공지능이 같은 인공지능하고 싸움하고 있어요. 만들어낸 인공지능끼리 시합을 하는 겁니다. 중국에서 만든 인공지능, 한국에서 만든 돌바람 뭐 있고 미국에서 만든 그런 것들끼리 서로 또 경쟁하고 있죠.

오류를 발견하고 그걸 개선하고 더 완벽한 내용을 채우고. 그런데 성경에서는 날이 갈수록 인류의 국가 문명은 발전이 아니고 질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 때 다니엘 2장에 보면 처음에는 금이었는데 어느새 은으로 바뀌고 어느새 놋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 철로 바뀌었다가 잡것들, 철과 진흙이 혼재되어 있는 그런 국가 체제로 가다가 조그마한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금신상이 단일 금신상이거든요.

그러니까 인류 역사라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봤던 그 바벨론 국가의 범위에서 한 치도 벗어난 국가는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의 18장, 19장에 나오죠. 큰 성 바벨론. 화로다 너희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인류의 모든 국가를 단일 국가로 쳐버리는 거예요. 단일 국가를 찾아내지 마세요. 언제 또 단일국가해서 유럽연합 만들었다,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있어도 그게 단일국가에요, 그냥 있어도.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오늘 강의에서 처음으로 어려운 게 나옵니다. 그럼 마귀를 어떻게 찾는가? 역사가 이렇게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계속 이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역사 안에 악마가 들어 있는 게 아니고 역사를 가지고 악마가 활동해요. 인간은 악마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디 활동 안에서 만나요.

주님이 여기 역사 속에 끼어들면 악마가 마중을 나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잖아요. 악마는 역사 없이는 일 못해요. 악마는 숨어있는 것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유인할 수는 있어요. 성도가 만약에 여기 역사 속에 들어가게 되면 필히 악마가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어떤 집에 개가 있는지 없는지를 개가 있다, 없다 살펴봐도 몰라요. 가까이 대문 앞에 가게 되면 멍멍 짖게 되죠. 아, 개 있구나. 접근해보니 대번 아네. 아, 개 키우는구나, 알 수 있듯이 악마가 싫어하는 것은 선악지식에 구멍 난 사람을 제일 싫어하거든요.

다시 첫째 시간 강의를 간단히 반복하게 되면 선악지식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의미가 있고 자기는 더 나아질 수 있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했죠. 그러나 선악지식을 갖고 있으면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악마에 속한 인간들의 주장이고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선악지식을 알게 된 그 자체가 죽음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죄이고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거예요.

바르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너는 선악을 알았으니까 이왕 안 것,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라가 아니고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거예요. 그래서 악마가 감당 못하는 사람은 누구냐. 인간은 이미 아담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선악을 못 버려요. 못 버리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나는 이미 죽은 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악마가 더는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살겠다 해야 겁박을 하든지 유인을 하든지 매혹을 할 수 있는데 아니 죽겠다잖아요.

“여보, 당신 우리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드세. 나도 돕고 당신도 돕고 애들도 같이 해서 행복한 가정으로 한번 살아보세.” 하면 복음을 아는 여자가 “난 죽었어” 이렇게 하는데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나 죽었다는데 뭐. “나 죽었으니까 당신도 죽어. 그게 행복한 가정이야. 당신이 행복한 가정 안 되는 것은 당신이 지금 멀쩡하게 잘난 척 하니까, 자기 의가 안 죽으니까 행복한 가정이 아니야.” 그럼 남편이 화내면서 “그 성경공부 하지 마!” 그럼 아내가 있다가 “거 봐. 당신 마귀 본색 드러났잖아, 봐.” 살고자 하는 자는 악마에게서 못 벗어납니다. 이렇게 살다 그냥 죽을래. 내비 둬. 내비 둬. 그냥 살다 죽을래.

그럼 이제 뜸들이지 말고 들어갑시다, 어려운 것.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흘러가잖아요. 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중간을 끊어버려요. 끊어버리면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무(無)시간적 존재에요. 묵시적 안목을 갖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3장 3절에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죠. 이게 말씀이죠. 그 말씀이 작용하는 존재, 성도죠, 성도가 역사 안에서 골로새서 3장 3절을 외쳐버리면 이 과거 시간은 허구가 되어 버려요. 실재하지 않아요. 없어요. 세상이 없다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시간 자체가 이것은 속임수였던 겁니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는 시간 자체가 속임수였어요.

앞으로 2개월 뒤에 돼보세요. 가보면 이것은 미래였었어. 안 갑니다. 맨 오늘이죠. 6월 1일 동네 병원에서 아스트라젠인가 백신 맞게 되어 있거든요, 제가. 어제 예약했습니다. 이거 맞는 것은 미래야. 안 가죠, 그냥. 오늘 할 일이죠. 오늘 주사 맞는다. 오늘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현재 뭘 하느냐’가 되어 버리면 이것은 성도 같으면 ‘주께서 ‘주사 맞으라’‘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역사의 주도권은 누구입니까? 인간은 수동적이죠. 주사 맞게 하는 것은 주님이 주관하시는 그러한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사건이라 하죠. 그냥 주사 맞는 사건에 참여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뭐 미래에는...... 미래까지 생각하지 마. 내일 일을 네가 알지 못한다. 그것으로 끝났어요. 내일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는데 내일 뭐 할고 하지 마라. 그건 다 어리석은 것이다. 다만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

주님이 이것 하라 하면 이것 하면 되고 저것 하라 하면 저것 하면 돼요. 그 뭐 고민이 돼가지고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중국집 들어가면서도 계속 생각해. 뭐 시키겠습니까? 가만있어 보세요. 짬뽕 할까 안 그러면 짬짜면 시킬까. 할 때 그냥 아무거나 먹자. 그 순간 아무거나 먹는 게 주의 뜻이다.

그것 때문에 벌써 4시간 전부터 고민했다는 것이 꼬리 자르기. 과거에 고민한 것은 뭐였습니까?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죄였지요. 자기가 주도권을 쥐어버리면 오늘 내가 짜장면 먹기로 한 나의 결정은 잘했어. 하고 의미가 생겨버려요. 의미가 생겨버리면 그 의미를 갖고 있는 나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리면 거기서 나는 살아야 될 이유가 생겨버립니다. 왜? 나는 짬뽕 먹기 위해서 살아야 될 이유가 생겨버려요.

죽겠다는 게 아니고 살아야 될 이유를 확보한 게 되어버리면 거기에 일곱 귀신 다 달려듭니다. 다음엔 짜장면 먹어야지. 다음엔 맛있는 거 더 먹어야지. 달려들어요. 그래, 나 내일까지 살아야 돼. 왜? 내일은 탕수육 먹을 거야. 뭐 이런 식으로. 어느새 벌써 역사가 형성된 거예요. 주님, 재림하지 마세요. 왜? 다음 달에 딸 결혼식 할 때 손잡으러 갈 사람 없어가지고. 이거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오늘 재림해버리면 딸내미 결혼식 할 때 손잡고 갈 아버지가 없이 되니까. 딸은 땅에 있는데 아버지 혼자 올라가면 손 뻗어서?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사 자체 속에 무(無)-역사를 개입해버려요. 무-역사는 어떻게 들어오는가? 역사로 들어오는 방법이 이렇습니다.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역사적입니다. 역사적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에 준해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기억에 준해서. 이렇게 기계적으로 하는 것을 습관이라고 합니다, 습관. 습관은 친숙한 거예요. 고민할 거리가 없어요. 친숙한 겁니다. 친숙하다는 것은 기억의 바탕 위에 그 행동이 나온다는 뜻이에요, 기억의 바탕 위에.

그래서 기억의 바탕 위에 습관이 나와 버리면 이 습관의 문제점은 이 습관에서 자신의 죄성을 발굴 해내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발굴 해내지를 못해요. 그러면 주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의 성령으로 반복케 하죠. 반복을 할 때, 이게 진짜 진리이고 현실 그 자체인데요.

왜 그러느냐 하면 수박을 먹는데 여기 수박이 원, 투, 쓰리, 포 네 개 있잖아요. 네 개 있을 때 얼른 보면 첫 번째 수박 먹을 때 반복적인 근육조직의 기억에 의해서,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에 기억되어 있는 지역의 기억에 의해서 근육이 움직여 먹었다 이 말이죠. a조각을 먹었습니다. 또 b조각 먹고 c조각, d조각 네 개 다 먹었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똑같은 행동을 네 번 한 걸로 보이죠.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순간도 동일한 인간은 없어요. 똑같은 행동을 인간은 해낼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행동을.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면서 연애할 때 문자 보내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트 팡팡 날리잖아요. 그 다음에 또 ‘사랑합니다♡♡’ 팡팡 날리면 여자 쪽에서는 왜 저번에 두 개 했는데 이번에도 두 갠고? 삐쳐버리는 거예요. 이번엔 세 개 해야지. 그 다음날 돈 주고 산 하트 더 멋진 걸로 날리면 이제 좀 내 마음에 든다. 그 다음에 또 날리니까 왜 저번에는 돈 주고 날리고, 이번에는 하나 더 얹어야 될 게 아니냐.

인간의 욕망은 멈출 수가 없어요. 인간은 같은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미 확보된 기억은 욕망의 달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외에 추가적으로 드러나는 욕망은 미흡한 욕망이 되어버려요. “엄마, 이번에 우리 반에서 5등 했어.” “그래, 잘했어. 다음에는 4등 해라.” 다음에 애가 4등을 해야 되는데 이 아이가 눈치가 없어가지고 1등을 해버렸네. 그 다음부터는 “1등 유지해라.” 하는데 어떻게 1등을 유지합니까? 그것도 우연히 1등 되었는데. 엄마의 욕망은 이미 지평이 달라졌어요. 1등 아니면 내 자식 아니야. 이미 달라졌다 이 말이죠. 달라졌어요.

뿐만 아닙니다. 오뎅집에 가서 오뎅을 먹어도 오뎅이 그 맛인가? 벌써 입맛이 달라졌어. 주인이, 똑같은 국물에다가 똑같이 했는데? 아니야 맛이 좀 다른데. 아저씨 집안에 부부싸움 했죠? 맞네, 부부싸움 했어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나는 집중한다고 하지만 그 일에 이르기까지 발걸음부터 해서 심장 뛰는 거, 교감, 부교감 신경, 차분히 calm down하는 부교감, 뭔가 열정적인 건 교감 신경이라 하거든요. 그렇게 행동하는 모든 것에 수천 가지, 수만 가지 변수가 다 주입됩니다.

상해에서 나비 하나의 날갯짓이 뉴욕의 폭풍우를 일으킨다는 butterfly effect, 나비효과처럼 수많은 변수가 다 투입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에게는. 누가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한 순간도 같은 경우를 만들어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습관상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라고 우깁니다. 자기가 얼마나 달라진 걸 몰라요.

사진 찍어보면 알죠. 귀신이라. 꿈에서는 분명히 내가 젊었는데 사진 찍어보니 이건 ‘안 죽고 왜 살아있나?’ 할 정도로 완전히 귀신이에요. 그래서 노인네들은 주민등록사진도 안 찍으려 해요. 내 사진을 내가 못 봐요. 앞에 부사 하나 붙일까요? 차마 못 봐요, 차마. 차마 볼 수가 없어요. 심지어 아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들이 사진 찍을 때 같은 옷을 안 입습니다. 전보다 훨씬 더 젊게 보이는 어떤 장치 또는 옷차림, 태도, 좀 과격한 행동, 이런 것들을 해서 더 돋보이게 하면서, 신경 써가면서 사진을 찍죠. 그러다가 애 놓고 배 불룩하니 뱃살 나오고 하면 사진 끝났습니다. 찍지 마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역사를 줍니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너라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동일한 나로 되게 한 적이 없습니다. 매일 죽이고 매일 살리니까. 동일한 게 아니에요.

언제 죽어도 우린 할 말이 없고, 더 살려낸다 할지라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좋아하지 마세요.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이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말은 오늘 밤 죽인다는 말이 아니고 그동안 살려준 것도 네가 원해서 살려준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주의 뜻 때문에 살려준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오늘 여러 번 나옵니다만, 선과 악의 지식을 끝까지 고수하고 싶은 겁니다. 이왕 따먹은 거 계속 밀어붙여라. 선과 악을 안다는 것, 하나님만이 아는 걸 알았으니까 너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 존재를 너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인간은 생명나무를 못 따먹어요. 못 따먹는 동네가 무슨 동네입니까? 지옥이죠. 지옥의 특징은 생명나무가 없다는 거예요. 없어요. 결핍되어 있어요. 지옥 가서 죽으면 좋죠. 지옥 가서 안 죽으니까 문제인 거예요. 지옥 가서 안 죽어요. 영원한 저주를 받습니다.

선악을 아는 자가 영원한 저주를 받는 근거가 어디 있냐? 당신 근거 대 봐라. 하면 바로 예수님이 영원한 저주,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중에서 저주에 해당되는 그 속성이 이 세상을 규정하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악마를 탈출하지 못하는 자는 십자가 저주와 동일한 저주를 영원히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귀에게 눌려있는 모든 자를 고쳤다는 것은 마귀에게 눌려있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예수님의 성령과 능력 외에는 없죠.

그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럼 이 뜻을 알아야 돼요. 성령과 능력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지금껏 인류가 마귀한테 모가지 눌려 살아 왔다는 것이, 성령이 와야 비로소 소급해서 밝혀지는 사항, 진실입니다.

마귀 들린 인간들은 제가 어제 수요일에 설교한 것처럼 돼지를 실험실 쥐처럼 사용해가지고 한번 귀신을 넣어보니까 그 돼지가 자기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무조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죽음의 길로 질주하죠. 비탈길로 내려가 갈릴리 바다에 다 빠져죽죠. 똑같은 현상이 인류의 현상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는 ‘악마에게 눌렸다’고 하죠.

악마에게 눌렸다는 이 사실은 누구만 아느냐 하면 성령,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만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슬그머니 자기 목 부분을 만져보는 거예요. 미국의 경찰관이 어느 대목에서 신발로 밟았는지. 마귀가 그동안 나를 밟고 있었던 겁니다.

마귀가 그동안 나를 밟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벌써 마귀로부터 풀려나온 사람이에요. 그 사람만이 마귀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마귀에 눌렸다는 말은 인간의 품위라든지 자질, 성격, 지위 그리고 착함과 선함, 그것이 마귀한테는 통하고 싶어도 통할 수 없는 아무 영향력 없는 짓이구나. 마귀야 물러가라, 마늘 던지고 십자가 던져 봐도 이것은 주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마귀에게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성령을 받아봐야 이것을 알죠.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억만금 주고도 살 수 없는 마귀한테서의 해방을 주께서 성령을 거저 주심으로써 해방되었으니 그때부터 우리는 철저하게 오로지 자기 일만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 일에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나는 뭘 해도 의미 없다는 사실, 이 사람만이 마귀를 대적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럼 그 다음에요. 시간 속에 침투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연속적으로 있는데 이 시간을 끊어버려요. 끊어버리니까 역사가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거짓말, 구라였습니다. 역사는 사건의 연속이었지, 인간의 노력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인간들은 의미를 유지하기위해서라도 지금 존재의 의미를 주기 위해서라도 지금 내 인생의 의미를 주기 위해서라도 어제, 한 달 전과 지금을 억지로 잇는 거예요, 자꾸 강제로. 이을 수 없는데. 계속 잇고 싶은 거예요, 그냥. 그래야 나라는 덩치가 지금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했는지 그 가치가 빛이 나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부정하기 싫은 거예요.

‘지금 나는 어제 죽어야 되는데 주께서 살렸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싫은 거예요. 그러면 나만의 고유 의미가 없잖아요. 그럼 내가 뭘 시도할 때 나의 기억과 습관은 나 잘난 맛에 하고 있는데 내가 애초부터 잘난 게 없다면 무슨 맛으로 일하겠습니까?

직장생활 하는 간부가 아침에 출근해서 모아놓고 “하.면. 된.다! 하.면. 된.다! 이길 수 있.다! 실적 올립시다. 파이팅! 밖에 나가세요, 전부 다. 코카콜라 오늘도 200만원 파세요. 계약 맺고 오세요.” 이렇게 해서 보내거든요. 코카콜라 영업사원이 자살하고 그러잖아요, 실적 못 올려가지고. 안 그러면 무슨 정수기 파는 것, 영업사원들이 다른 기술 없으니까 그거라도 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하자. 파이팅. 이러고 있는데 어떤 사원이 딱 들어와서 “여기가 어디에요?” 이러면 갑자기 과거와 연결이 안 되죠. 연결될 수가 없죠. 물론 그런 소리는 불신자한테 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역사를 강제로 이을 때 여기에 주인공이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짐승이죠. 이건 어려운 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그 다음에 잘 보세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또는 왼쪽에 있는 염소가 어디를 가느냐 하면, 그들을 벌하기 위한 곳은 없어요. 없고 누구의 사주를 받았고 악마로부터 결탁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오야봉, 그 대장을 처벌하기 위해서 만든 곳에 가요. 그게 “악마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천사죠, 반역자, 배신한 자, 데모한 자, “악마와 그 천사들을 위해서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왜 이 말을 강조하느냐 하면 우리가 악마하고 싸우는 게 아니에요. 악마는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주님이 악마하고 싸우는데 그 대전쟁에 각자에 소속된 인간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에 속한 인간은 악마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싸움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고 주님 쪽에 있는 사람은 그 착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인생 하루 사는 것은 결코 내 인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하루 사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냐 하면 나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뜻이 있어서 나를 살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다고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이 그런 믿음을 가질 때 괜히 심술 나서 백부장보고 욕하고 하면 안돼요. 백부장은 서양 사람들이 좀 당황스러울 때 하는 표정 있잖아요, 어깨를 슬쩍 올리면서. 내가 뭐? 주님이 하라 했어. 왜 나보고 닦달 내? 나한테 책임 묻지 마, 책임 묻지 마. 난 몰라. 내 목숨 붙어 있는 것도 주님 뜻인데 내가 뭐 이것저것, 아이고 내가 생각해도 주제 넘는다. 난 몰라.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에 속한 사람은, 악마에 속한 사람은 악착같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불신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권력’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권세입니다, 권세. 이 권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고난’이 나오는 거예요.

이 권세, 권력이라 할 때 세상에 많은 권세가 있지만 주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킬 때 여기 필히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권력 단체, 권세가들이 예수님을 마중 나와 줘야 돼요. 본디오 빌라도부터 해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 마중을 나와야 돼요. 그런데 사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본디오 빌라도, 마귀는 사실은 주님한테 유인당한 겁니다. 이용당한 거예요.

그들은 모든 권세를 악마의 권세로 보지 않고 인간이 결합했고 단합했고 인간이 지혜를 끄집어 낸, 끝까지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권세라고 우기고 싶었는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권세라면 나올 수 없는 초과적인 영적 힘을 주님에 의해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주님에 의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나는 순수하게 같은 인간들끼리 동창회 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고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는 것으로 보지만, 성도의 입장, 주님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마귀가 그들을 불러 모았다 또는 마귀가 거기에 권세로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성도의 눈에는 보이죠.

지금 강의 내용이 뭐냐 하면 성도만이 악마를 포착할 수 있죠. 성도가 악마의 추격자죠. 그리고 지목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냥 평범한 동호회고 동창회죠. 너도 같은 고등학교 나왔으니까 참석해라. 참석할 수 있어요. 참석해서 보니까 성도의 눈에만 뭐가 비치느냐 하면 마귀가 그들을 주도하고 있고 마귀의 통솔을 받고 있다는 것이 성도의 눈에만 보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의 모임 속에 반드시 안개처럼 악마의 권세와 권력이 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가 아니면 그게 안 보이죠. 쉽게 예를 들어서 성도가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교회 다니는지는 모르죠. 자기도 그냥 친구라고 만나가지고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30분 정도만 이야기해도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는지 대번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 달리면서 무엇을 유도했습니까? 땅의 권세의 실체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낸 거예요. 이 권세가 어디 가겠어요? 안 가죠. 그냥 먹구름처럼 계속 끼어 있잖아요. 그럼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또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무슨 이야기 나옵니까? 세상 권세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자기는 그냥 정치 이야기하고 뭐 우리 사장님 좋은 사장님이라고 그 얘기하고 있는데 성도 입장에서는 네가 바로 예수 죽인 인간이다.

나도 전에 그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 너무 잘 알지. 나도 저렇게 사는 게 인간 사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대번 확 파악이 되죠. 파악이 되면서 이야기하다보면, 30분 지나면 저쪽 불신자가 마귀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벌써 낌새를 느껴요. 너 이상한 교회 다니지? 뭐 선을 봐도 그렇고. 너 이상한 교회 다니지? 딱 낌새를 알아차립니다.

흔히 무당이 예수 믿는 사람을 알아본다는 가짜 뉴스 비슷한 게 있지만 성도가 아니고 불신자, 악마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발전과 혁신, 개혁, 나의 인생설계, 인간은 더 나아지고 진보한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그들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되고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이 인간성이 좋아야 되고 겸손해야 되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많은 사람이 너를 도와준다는 그런 충성어린 조언까지 막 듣게 돼요. 듣게 됩니다.

그럼 이 사람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곧 깨지겠습니까? 여지없이 깨지죠. 그러니까 불신자 남편이나 불신자 아내하고 사는 집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그쪽에서 헤어지자는 말하기 전까지는 헤어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사도바울은 위로하는 것인지 약 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사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위로처럼 들리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그냥 혼인에 매이지 말고 주를 위해서 혼자 사는 게 낫다’ 라는 너무 가혹한 말씀을 했어요.

이 전체를 가지고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당했던 그 권세 세계 안에서 성도는 어디를 가더라도 고난 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봅시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이걸 공통체험이라 했죠. 예수님과 동일한 체험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구절이 나와요. 제가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아마 기억날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게 동일체험, 예수님이 갖고 있던 고난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지, 지 돈벌이하다가 사기 당한 것은 고난 아닙니다, 그건 고생이지. 고난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악마의 세력과 권세가 발각되는 그런 상황을 두고 고난이라고 해요. 그냥 내가 고생한 게 고난이 아니고 ‘거봐, 세상은 그럴 줄 알았어. 세상 별 거 있어? 예수님 죽였던 그 성깔 어디 가겠어?’ 가 눈에 띄고 그게 느껴질 때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지 잘난 체하고 자기 의 자랑하고 지 과거 자랑할 때 너도 좀 자랑해봐라. 뭘 자랑해? 개뿔도 내가 무의미한데. 하는 것마다 죄인데 뭘 자랑해. 그럼 저쪽에서 그런 이야기하면 우리 사이에 대화가 안 되지. 굳이 대화가 되어야 될 이유가 있나?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그게 부부야. 알려줘? 한 수 가르쳐 줘? 자식은 그냥 사는 거야.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자식을 자식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친구라 생각하세요. 괜히 자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쓸데없는 기대감 때문에 실망이 더 큽니다. 웬 친구하나 생겼다 하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분은 저한테 그런 이야기했어요. 내가 딸하고 날마다 통화하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은 신앙적 친구가 또 있는지 몰랐다는 거예요. 자식이 신앙적 친구에요. 엄마가 가르친 게 아니고 본인이 삶 속에서 느꼈던 그거나 엄마가 느끼는 경우나 어떻게 그리 똑같은지. 그럼 뭘 느꼈다는 말인가. 뭐가 똑같다는 말인가. 무슨 일이라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의미 없음을, 그 기쁜 체험을 놀랍게도 엄마나 딸이나 같이 느낀다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모녀지간도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무슨 뜻입니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주님께 속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뜻이에요. “세상에 속했으면 자기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여러분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까? 안 받고 있죠.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지금 분투노력하고 있는데 세상이 안 알아줄까봐 오히려 걱정이 늘어지고 세상이 나한테 돈 안줄까봐 걱정하고 있는데 무슨 미움을 받아요.

그러나 성령께서 말씀대로 진행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 말씀이 그대로 오게 되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무(無)시간이 되어버려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과거의 짓거리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면 우리 시간이 싹뚝 잘라져버리죠.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마법의 시간이 주어지는 거예요.

이 순간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고 나는 그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껍데기, 아무 쓸모 짝도 없는 그냥 헝겊조각으로 주님의 바람이 나부끼는 대로 그냥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나풀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게 얼마나 사도바울적인 삶입니까? 사도가 그런 길을 갔잖아요.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이러한 인생이 여러분들 보기에 어떻습니까? 무겁습니까, 쉽습니까? 이게 가볍죠. 그러니까 역사를 인정하세요. 인정하시고 바깥에서 다른 말로 위에서 관찰하며 사세요. 역사를 관찰하면서.

그리고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성도의 행동은 뭘 해도 아예 죄가 되는 그런 지점을 떠나지 마세요. 그 자리가 성도의 자리입니다. 뭘 해도 죄가 되는 자리.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한다는 것이 유일하게 보이는 지점이라 그래요. 그들은 자기를 조작하고 위장하거든요. 자기가 잘났다고 이걸 자꾸 꾸미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안 꾸미나? 우리도 육신이 있으니 꾸미는데 꾸미되 이미 결론 나 있어요. 뭘 해도 나는 죄인이라고. 그런데 불신자들은 뭘 해도 비겁하고 구차한 변명, 맨날 변명과 핑계와 그래도 나는 아직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우기고 아직은 나에게 뭔가 약간은 남아있다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죠. 주님이 가루를 만들어주니까 허겁지겁 떨어진 가루를 주워 와서 그것도 딴에 조합해가지고 자아, 셀프라고 떡하니 만들어 놨다가 또 성령이 때려 부수면 혼나다가 가루 몇 개 건져가지고 아이고 요게 바로 내 자식아, 이건 내 조각인데 하고 그것도 과거 기억에 준해서 그걸 또 조립하네.

자 이제 진짜 결론입니다. 성도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 역사의 속성, 지 잘난 맛에 사는 속성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십자가로 때려버리면 부서지기는 하지만 역사의 영향을 받아서 허겁지겁 또 자아를 구성해요. 그러면 성령께서 또 때리죠.

그게 역사 속에서 성도가 팔딱거리는 모습이에요. 이 특이성. 팔딱거릴 때마다 자기 인생의 그 특이성 또는 초과성, 내가 역사로서 인간으로서 해명될 수 없는 그 여분의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악마의 세계고 이 역사는 이미 망하는 세계, 죽음으로 지옥으로 치닫는 그런 세계인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로서 성도를 아직도 이 땅에 떠나게 하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 없는 줄 알아야 될 텐데 우리는 항상 내 것 어떻게 지키고 키우느냐에 정신 팔려 있는 이 모습이 천하에 살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죄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러한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통해서 악마가 이 세상을, 인간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그들이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십자가를 근거해서 증거 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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