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겸손b

아빠와 함께 2021. 4. 17. 12:48

서울의존강의20210415b 베드로전서5장 7절(겸손)-이 근호 목사

구약의 사사기 이야기 해드렸습니다. 내부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은 외부에서 압력을 가해서 그렇게 되었다 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후딱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했죠. 그런데 그 뒤에 요나 선지자에 와서 어떤 강한 특징이 있어요. 예수님도 요나의 표적을 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보통은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법인데 요나 같은 경우에는 ‘왜 살려주십니까?’ 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어찌 주님을 증언 또는 증거 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요나 선지자의 특징은. 제발 나를 그냥 놔두세요. 나는 주님을 증언할 그런 자격자가 못됩니다. 쉽게 말해서 제발 나를 내버려두시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요나가 도망가니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이유가 뭐냐. 나는 주님을 증거 할 그런 자질이나 능력이, 인품이 전혀 되어있지를 못합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문제는 이게 굉장히 겸손해보이잖아요. 주님은 요나가 생각하는 겸손대로 겸손하지 않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요나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표적이 되니까 요나를 통해서 보여주는 겸손은 기존의 겸손과는 달라요. “내가 원하는 일은 꼭 안 일어나도 괜찮아요.” 이게 겸손이에요. 내가 원하는 일은 꼭 일어나지 않더라도 상관없어요. 라는 겸손.

왜냐하면 요나는 자기가 겸손한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제발 나를 그냥 놔두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나 1장, 2장, 3장, 4장 끝까지 가면서 계속 요나는 요나 나름대로 자기의 포부와 예측을 하게 되고 주님께서는 요나가 예측하는 것을 딱 듣고 전부다 그의 뜻에서 어긋나도록 일을 처리해버려요, 어긋나도록.

그러면 요나가 선지자잖아요. 선지자 뒤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성격을 요나가 대변해주고 있거든요. 요나가 원하는 바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줄테니까 나를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원래 남자는 여자를 그렇게 귀찮게 해요. 오늘 너무 남발된다, 오늘. 너무 심하다. 심하든 말든 간에 이걸 억지로 안하는 것도 교만이다.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둬요. 하나님을 하나님대로 인정하고 대우할 테니까. 요새말로 하면 예수 믿어주고 십자가 다 믿어줄 테니까 좀 내버려둬요, 좀. 가만 좀 나를 내버려둬요. 그게 나의 원하는 바입니다. 원하는 바가 이미 하나 나왔잖아요. 딱 나온 것, 나온 찬스를 통해서 우리 원대로 안 해줘 버려요. 그걸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재작년에 프로야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항상 제일 꼴찌 하는 팀이 대전을 근거지로 하는 한화 이글스팀이거든요. 한화 이글스가 제일 꼴찌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한화 응원하는 사람들은 동정표라도 하듯이 이거 뭐 하나마나 꼴찌인데 했는데, 어? 이거 막 꼴찌가 반란을 일으켜가지고 심지어 10개 구단 가운데 4등까지 막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팬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겁니다. 왜냐하면 한화는 꼴찌를 인정하고 포기를 한 거 거든요. 포기를 하니까 야구가 이상하게 잘 되네요. 그래서 주님은 한화 이글스 뜻대로 안 해준 겁니다. 자기는 꼴찌하고 싶은데 10개 구단 중에서 4등까지, 결국은 4등 못하고 5등쯤 했는가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또 꼴찌, 이번에도 꼴찌거든요.

주님께서 자신의 겸손의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이미 통용되는 겸손이라는 미덕과 윤리도덕이 있는데 그걸 엎어버립니다. 그걸 엎어버려요. 우리가 알기로는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죠. 아까 빌립보서 2장.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입장에서 예수님은 겸손합니까, 교만의 극치입니까? 교만의 극치이죠.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했으니까. 세상에 이것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이 돼요.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된다. 이런 이야기를 했단 말이죠, 요한복음 5장에서. 모든 것을 나한테 일임했다는 거예요. 따라서 나를 존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존대할 수 없다. 요한복음 14장에는 나를 통과하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안 해줘버리잖아요. 그럴 때 니느웨가 회개하는 일에 대해서 구원받은 일에 대해서 요나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요나가 한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죠. 그게 요나의 표적이 돼요. 요나가 니느웨에서 아무 한 것도 없어요. 그래서 요나는 선지자 되는 겁니다. 선지자다워요.

요나가 선지자로 뽑힐 때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나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죠. 굳이 못난 나를 가지고 사용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날 건드리지 말라고 도피하듯 도망갔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중에 그야말로 어제 수요설교처럼 체포됐죠. 자수한 게 아니고 체포가 된 거예요. 풍랑이 와서 흔들어버렸죠.

그럴 때 요나가 거짓말했습니까? 아 나 아니야. 난 보통사람이야. 했습니까? 그냥 날 잡수세요. 하고 솔직하게 다 이야기해요. 나는 선지자인데 도망쳤다. 그런데 내 다리 내놔라는 식으로 끝까지 따라와서 주님께서 나를 찾아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나랑 주님과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신들하고는 문제없기 때문에 나를 바닷속에 그냥 죽이세요. 나를 던지세요. 요나가 심청이처럼 푹 물에 빠지죠. 안 죽으려고 발버둥 칠 것 같으면 미워서 더 집어넣는데 요나가 자진해서 죽겠다니까 뱃사람들이 좀더 추이를 두고 보고요. 자칫하면 사람 하나 잡겠다 싶어서 좀 추이를 두고 보자고 하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를 집어넣으세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미안해하면서 바닷물에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거기서 요나가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안했죠.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는데 어떤 기도는 했느냐 하면 ‘왜 살려주십니까?’ 기도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저를 왜 구원하십니까?’ 아니 구원해줘도 문제라, 구원해줘도. 저를 왜 구원하십니까? 나는 쓸모가 없다니까요. 왜 이러세요, 주님?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세모로 보나 네모로 보나 내가 도대체 아무짝도 쓸모없는데 왜 저를 살려주십니까? 요즘 말로 하면 주여, 왜 저를 천국 보내주십니까? 같은 말이에요.

그것은 네가 귀해서가 아니라 네가 그렇게 내빼고 또 그런 기도하는 방식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방식이고 그 방식 외에는 없어요. 막상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아서 좋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구원 안 받으려고 했잖아요, 나. 나 같은 거 구원 안 해줘도 돼요. 하고 발악하는 그 모습이 찐찐찐, 진짜 찐이에요. 진짜 구원받은 자에요. 왜? 본인의 모든 미래에 대해서 본인이 접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 미래,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 요나한테는 없어요. 그래서 요나는 걸핏하면 자살해요. 또 삐졌어. 나중에 니느웨 회개하니까 또 삐져서 죽겠다 하고.

오늘 본문 다시 베드로전서 와봅시다. 5장에서 “젊은 자들아 겸손하라”고 했는데 겸손해야 될 이유가 겸손한 그만큼 자기 의가 생겨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을 증거하는 그 모든 주체자는 주님 본인이에요. 우리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 주님이 증거 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 5장을 잘 알고 있어요. 어느 정도로 유명하냐 하면 잡지사 이름도 있어요, ‘빛과 소금’이라고. 저도 촌에서 교회에 있을 때 거기 기고해서 원고료를 좀 받은 적이 있어요. 그 원고를 모아놓은 게 <신학과 철학의 역사>라는 겁니다. 빛과 소금이라 할 때, “너희는 빛이라 너희는 소금이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이 듣잖아요. 그럼 이걸 봅시다. 이 듣는 사람이 성도입니까, 아닙니까? 본인이 성도이고 싶어 합니까, 성도 아니고 싶어 해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성도입니까, 아닙니까? 답답해서 내가 답변할게요. 성도 아니죠. 성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은 성도 아닌데 성도이고 싶어서 천국 백성이고 싶어서 빛과 소금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이 모습이 본인이 나, 자아가 성도라는 자격을 얻어서 성도인 나가 된다는 이 자체가 누구를 증거 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증거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증거하는 거예요. 본인을 증거하니까 누구를 가로막아버려요? 예수님을, 주님 되심을 증언하는 능력을 인간들이 가려버린 겁니다. 빛과 소금되어가지고 주님이 하는 일을 가려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만든 사람이죠. 율법을 만든 사람입니다. 산상설교가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해서 율법을 만들었잖아요.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진다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니까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은 누가 주었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그걸로 이미 종결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미 종결되었다 이 말이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의 이야기로 이미 종결되었잖아요. 이미 남은 것은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특히 모세 율법은 바리새인들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가 되어버리면 그럼 예수님 말씀은 부록이에요? 왜 추가가 되어버렸어요. 율법+예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모세 율법 제키고 그걸 대신해서 예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오늘 질문이 여러 가지 많은데 제가 그 질문을 한 이유가 성도라 하는 것은 무엇 무엇을 완성했을 때 나오는 결과적인 거예요. 결과적 신분이에요, 결과적. 예수님께서 무엇을 했을 때 나오는 결과물이에요. 성공작이다, 성공작. 하나의 작품이라니까요.

그런데 성도란 ▭다. 했을 때 여기 인간이 성도에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곧 성도에요. 예수님이 자기 율법을 이루어서 자기 말씀을 이루어서 나오는 성과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이 일하기 전까지는 성도가 발생됩니까, 발생되지 않습니까? 천국백성은 발생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기 전까지는 어떤 누구도 구원될 자격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 성도가 있고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 성도되는 연결점은 중간에 예수님의 개입에 의해 끊어지고 단절되는 거예요. 없어요. 연결점이 없다고요. 빛이 되어라 소금이 되어라. 베드로전서에서는 네가 겸손하라. 전부다 같은 차원이거든요. 이 말씀 자체가 인간과 성도 사이에 이렇게 관계가 끊어져 있음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말씀들이다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기대한 성도는 애초에 성도가 아니었다 이 말이에요. 네가 상상한 것이 성도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 안양강의를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주님께서 사건을 터지게 하시고 그 사건이 의미 있는 사건이 되려면 그 다음에 또 다른 사건이 있어야 된다 했죠. 그럼 앞의 사건이 십자가라면 뒤의 사건은 성령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앞에 있는 사건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성령이 와야 십자가 사건을 이해해요.

그러면 여기서 두 개의 다른 노선이 있을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두 번째 시간이 점점 어려워져서 좀 미안한 감이 드는데 여러분들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십자가. 첫째는 성령 없이 믿는 십자가, 두 번째는 성령세례로 인하여 알게 된 십자가 또는 믿는 십자가. 이것하고 겸손에 대해서 첫째, 성령 없는 자의 겸손과 두 번째, 성령 받은 자의 겸손. 이게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십자가를 성령 없이 믿는 십자가와 성령 있는 십자가와 다르듯이.

그러면 겸손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무엇부터 출발해야 하느냐 하면 더 근원적인 십자가에 대해서 성령 없는 십자가와 성령 받은 십자가의 차이성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그거 뭐 첫째시간에 다 했잖아요. 하신다면 아니요, 그건 하나의 밑밥이고 본격화되는 것은 성령 없다는 말은 성경을 좀더 그 범주를 확대시켜보게 되면 단순히 성령 없는 것이 아니고 악령 속에 싸여있다, 존재한다 이렇게 봐야 돼요.

그러면 인간과 악령의 관계를 생각해야 되거든요. 인간과 성령의 관계. 여러분들 심혈관계 질환이라고 들어보셨죠? 심혈관계. 혈관에 포도당이든지 계속해서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되거든요. 혈관을 통해서 각 세포 내에 포도당이라든지 당 종류가 계속 공급이 돼줘야 세포내에서 미토콘드리아에서 호흡이 돼요. 호흡이 되고 ATP라는 에너지의 결합체가 계속해서 주어지게 된다고 생물학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럼 피가 막혔다면 이것은 고혈압이 되겠죠. 어째든 간에 심혈관계라는 것은 계속해서 피가 공급되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럼 인간들은 여러분들이 다 이해하듯이 여러분 성령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별로 차이 납니까? 생글생글 방실방실 골프 치러 다니고 할 것 다하고 놀 것 다 놀고 꽃구경 할 것 다 하죠.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기분적으로도 아주 멀쩡해 보이죠. 이 말은 계속해서 그들의 에너지를 누구로부터 공급받고 있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공급받겠어요? 악마로부터 공급받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관계가 주님께서 십자가 믿으라, 겸손하라 이 말은 먼저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둘러싸여 있어요. 뭔가에 둘러싸여있다고, 뭔가에. 인간이 있으면 인간 주변에 뭐가 있어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그 있는 것으로부터 계속 정신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사람답게 살아라. 영양분을 계속 공급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에게 영양분을 준 존재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무 갈등을 못 느껴요. 그리고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렇게 사니까. 오히려 악마로부터 영양분이 끊어진 사람이 이상해. 남들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고 남들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최초로 성령 받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죠.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성령님이 오셨죠. 그러면 예수님이 계실 때 주변에 성령님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죠. 성령님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니까 성령 받은 예수님과 성령 없이 그냥 다른 걸로 둘러싸인 인간과 소통될 수 없습니다. 의견이 같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뭐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고 너무 차갑게 대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말의 의미가 달라요.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해요. 깨닫지 못해야 다른 세계란 게 분명히 드러나게 돼요.

그래서 성령 없는 사람들이 믿는 십자가란 것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사건이에요. 그 분 참 훌륭했었어. 그분 참 착한 분이었는데 너무 안됐어. 이게 성령 없는 사람이 보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모범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 우리도 예수님 가신 천국에 갈 수 있어. 이게 뭐냐 하면 성령 없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겠다는 것은 누구를 부인하지 못하고 누구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나를 부정하는 어떤 사건도 나는 거부한다. 거기에서 터진 게 십자가사건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 부정하라고 십자가 사건이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사건을 나를 지켜주고 나를 위대하게 해주는 새로운 source, 재료로 여기는 거예요. 참 훌륭했었어.

그러니까 예수님은 4대 성자 중의 한분이에요. 각 시대에서 착함 배틀의 대표자 나와. 국가대표 나와. 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지금 팬티입고 런닝입고 뛸 준비하고 있어요. 중국 나와. 공자 나와가지고 공자 설치고 있고. 인도 나와. 인도는 띠 비슷한 거 이런 거 하나 걸치고 나오고 뛰고 있고. 중동 나와. 중동은 뭐 있는데? 예수님이 그런 류하고 같이 섞일 수 있는 분입니까? 그들은 살아 생전에 그들이 뭘 했는가가 중요하거든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 받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나랑 죽을 수 있어?” 내가 함께 하면 너는 살 수 있어. 가 아니라 너는 나와 함께 해야 제대로 죽을 수 있어.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들의 십자가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의 환경은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조성된 환경들이에요.

예를 들면 저 TV앞에 완전 담쟁이처럼 식물이 막 기어 올라가잖아요. 저 식물이 왜 그렇게 자라나고 왜 그렇게 키웠습니까? 주께서 목사님을 죽일 수 있다고 키운 거예요. 모든 게. 어떻게 하면 소박하게 사느냐가 아니라......아니 소박하게 살아도 괜찮아요. 어떻게 하면 소박하게 그 다음에 ‘사느냐’가 들어가면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소박하게 ‘죽을 수 있게’. 모든 것은 죽음으로 당겨주는 그 일, 그 일에 개입하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인간들은 본성상 자기를 부인할 수 없어요. 부정할 수 없어요. 자기 십자가를 질 수가 없어요. “못 죽겠지?” “못 죽겠습니다. 내가 지금 자식 놔두고 죽을 수 없습니다.” “안되지?” “안됩니다.” “죽여줄게. 오케이? 콜?” 이게 성령님이에요. 이것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패턴 가지고는 도저히 흉내를 내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흉내만 낼 뿐이에요.

지금 겸손 이야기하기 전에 십자가 이야기 먼저 했습니다. 성령 없는 사람의 십자가는 자기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나를 개선할 수 있는, 나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변경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십자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 나를 낮춰야 돼. 낮추고 더 낮추기. 책 제목에 그런 게 있어요. 나를 낮추기. 낮아짐인가 책 있잖아요. 낮추고 더 낮추기.

이런 모범사례가 예수님을 본받아. 토마스 아 켐피스죠, <그리스도를 본받아> 책 제목도. 내가 보기엔 얼마나 교만한지. 제목 자체가 교만해요. 신학교 때 제가 그 책을 읽었는데 처음에 하도 유명한 책이고 경건에 관한 서적이라 해서 이것은 일요일에만 읽어야 될, 일요일엔 선데이 서울 같은 거 안 보고 일요일에만 읽어야 될 책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경건에 관한 책, 그 책이라 해서 내가 딱 읽어봤거든요. 읽어봤는데 '(놀라면서) 뭐지?' 이게 아니고 뭐지, 이거? 뭐야? 이게 뭔데? 이게 왜 유명해? 어떤 사람 도 닦는 이야기인데. 그런 것은 절에 가면 많은데. 불교에도 그런 거 많거든요. 특히 힌두교 성자, 도 닦는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 많아요. 그 사람들하고 차이점을 모르겠어요. 용어만 예수라는 용어뿐이지 나머지는 똑같다 이 말이죠. 전혀 겸손한 면이 보이지 않아요, 제가 보기에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성령이 임해야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방법은 성령이 와야 가능해요. 그런데 아까 요나 봤듯이 성령은 우리한테 한 수 가르치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본래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끄집어내놓고 그것에 대한 뒤집기, 한라급 씨름 결승전이라. 뒤집기를 해버려요. 엎어버려요. 영암 한라팀 씨름팀 나와서 하는 것처럼 뒤집기 해버리죠. 가만히 기다려요. 주여,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이리 와. 뒤집어버려요. 하여튼 내가 원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원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 뜻을 묵살해버립니다. 그게 성령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의 일은 먼저 나부터 내 의견을 제시해야 돼요, 나부터. 나부터 내 의견을 제시하면 ‘나는 그동안 내 주위에 악령이 시키는 대로 만들어진 세상 속에 내가 푹 잠겨있습니다’가 내가 의견을 제시하는 순간 그 의견 안에 고스란히 다 들어있어요. 성령이 없는 쪽에서 이야기하는 겸손, 성령이 없는 쪽에서 이야기하는 십자가. 성령 없는 쪽에서 이야기하는 자기의 낮춤, 이런 것을 입에서 그대로 다 나오게 만들어요. 그걸 엎어치기로 레슬링 할 때 슬랩시키는 것처럼 완전히 들어서 엎어쳐버리죠.

다시 말할게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라는 그 말은 성령 받은 사람 아니면 못할 말이에요. 못할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금붕어가 물에 있듯이 내가 같이 있는 그 상황을 내 입을 통해서 대변해주고 있는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삼투압으로 나한테 다 스며들어온 거거든요.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겸손은 좀 있다 이야기하고요. 너희는 빛이요 너희는 소금이라는 것은 율법에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어요. 찾아볼 수 없다고요. 그러면 ‘너희는’ 할 때 성령 받은 자의 너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결과물로 나온 너희가 되지만 그냥 너희는 성령 없이 내가 우리를 지칭할 때 쓰는 용어가 너희가 돼요, 나를 포함해서. 성령 없이.

그러니까 너희는 소금이라 빛이라 하니까 여기 성령 없는 사람이 그대로 그걸 바라보면서 내가 빛이고 싶고 내가 소금이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속해있는 악령의 세계는 모든 중심이, 그 시스템, 구조가 이산적이 아니고 구조적인데 그것은 내가 잘되어야 된다, 내 중심주의로 한다는 것을 예수님 말씀 앞에서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티내게 되어 있어요. 티낸다고요. 빛과 소금이 되고 싶어요.

대구 대명동에 가게 되면 거기에 대학교가 있어요.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그 대학교가 개명대학교거든요. 개명대학교의 학훈이 뭐냐 하면 너희는 먼저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하여튼 겁도 없어, 겁도 없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 말은 그 대학 졸업생이나 재학생들은 이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런 것을 부정하라 이 말이에요. 왜? 그건 이방인들이 구하기 때문에. 그 대학교 과의 학문은 입을 거 먹을 거와 전혀 무관한, 연결되지 않는 그런 과들만 있어야 되는데 그 대학이 전문대학이거든요. 계명전문대학이잖아요. 과가 전부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와 관련된 과라. 그 나라 의가 뭔지를 몰라요.

그 나라 의는 성령이 임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 한분밖에 없어요. 성령 받은 분이 성령을 안주게 되면 예수님만 성령 받고 그 다음에 끝났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백성 되기 위해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만 딱딱 하나 놓치지 않고 하나 잃어버리지 않고 다 끄집어내서 뭘 주느냐 하면 두 번째 사건을 줍니다.

첫 번째 사건은 십자가인데 하나마나 사람들은 못 알아듣고 두 번째 사건, 십자가를 아는 성령이 와버리면 이 사람들이 소급해서 무엇을 아느냐 하면 바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을 베드로전서 5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의 손이라는 말은 성령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이거든요. 사람 손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네 손 떼라. 네 털손 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높인다는 미래 이야기는 순전히 내가 기대할 미래가 아니고 이것은 일단 우리가 주님 손에 성령에 넘기우게 되면 그다음 자동 순서로 준비된 것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높여주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답습하느냐 하면 주께서 십자가까지 낮아졌으나 그를 높여서 주가 되게 하신 그 성과를 복제해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거든요. 첫 번째 아담이 우리를 죄로 복제했듯이 두 번째 아담 되시는 분이 복제를 해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의의 산물, 의의 결과물로 성도가 자기 백성이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죠.

이 의가 우리가 기대한 의라면 그것은 성령 없는 사람이에요. 성령 없는 사람은 그 의를 기대했겠죠.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예상 못한 의가 되죠. 그러니까 그걸 은사, 선물이라 하는 거예요. 은혜라 하는 거예요. 예상 못한 거예요. 예상 못한 그 선물을 앞에 두고 우리가 할 소리는, “주여, 왜 저에게 의인이라는 타이틀을 이마짝에다 붙여서 ‘이 의인을 보아라’는 식으로 왜 저를 의인 만드십니까?” 라고 요나의 푸념 같은 게 나오게 만듭니다.

그러면 주께서 너 좋으라고 한 게 아니고 이 주님을 증거하라고 내가 하는 일은 연속적이고 지금도 쉬지 않고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불러내었다는 거예요, 이 어둠에서. 무엇으로? 빛으로. 이건 에베소서에 나온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불러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말고 구원을 증거하면 돼요. 한번 적어볼까요? 구원받지 말고 구원을 증거하는 거예요. 이상한 게 들어왔다는 거예요, 이상한 게. 나한테 이상한 게 갖다 붙었다는 거예요. 그게 나를 지배했다는 거예요. 구원이, 못나고 못난 나를 다 이루심이 덮쳤다는 겁니다.

이걸 요나 식으로 얘기하면 못나고 못난 나에게 방주라는 잠수함, 잠수함도 아니고 배도 아닌 이상한 게 자기를 덮쳤다는 거예요, 언약이. 주님의 언약이 가만 있지 않고 나를 이렇게 잡아먹은 거예요. 삼킨 거예요. 내가 언약 안에 삼킴을 당한 거예요. 죽음아, 어디 있느냐.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그 결과물이 보잘것없는 우리의 현 주소에요.

그렇게 되면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주위에 뭔가가 있다는 겁니다. 내 주위에 뭔가가 있어요. 그 주위에 있는 힘은 전에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서 내 체계와 조직을 이룬다는 것이었다면 성령이란 것은, 이제 강의 다 들었으니까 이야기해보세요, 내 주위에 있는 것은 나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나를 쓸모없는, 아무짝도 쓸모없는 그리고 죽어 마땅한 걸로 내 주변에 있는 힘이 나에게 작용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만드는 일. 좋든 싫든 간에 내가 이 땅에 빛이라 칭함을 받는 정도가 아니고 빛이라 칭함을 받고 그리고 빛으로서 살게 하고 소금이라 칭함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소금으로 살게 하고.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빛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겸손할 수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하죠.

아, 내가 아는 겸손을 나를 통해서 실시하면 되는구나. 이렇게 하는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성도가 빛이 되었다 하잖아요. 그러면 성도가 빛이 되는 동시에 주변의 아름다움은 졸지에 빛이 아닌 어두움으로 전환시켜버립니다. 어둠으로 전환시켜버려요. 나란 인간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함께 계신 분이 빛이기 때문에 그 분이 없는 쪽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둠이어야 하기 때문에 어둡게 하는 그 일을 주님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이것을 실시하는 겁니다. 주님 때문에.

그러니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 때 이 지옥 같은 망망대해의 뱃머리에서 두 팔 쫙 벌린 자세를 취해야 돼요. 팔을 쭉 벌려야 돼요, 뱃머리에서. 디카프리오 있든 없든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가르는 게 아니고 나를 실은 그 배가 세상을 지옥으로 들추어내는 작업을 하고 난 그냥 미끼로 실릴 뿐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은 뭐냐 하면 네가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없죠. 네가 겸손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네가 예수그리스도의 겸손을 보일 수 있는 증거자가 되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럴 위인은 없죠. 그러나 없지? 안되지? 맡겨. 내가 해줄게. 너 구원해줄게 가 아니라 너 겸손하게 해줄게 가 아니라 네가 안 되는 그리스도 증거하는 거 하나님 내가 너를 미끼삼아서 증거케 해줄게.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

그래서 나와요. 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권고하는 거예요. 꾸중할 때는 꾸중하고 주제파악하게 하고. 이것은 주의 능하신 능력이 수시로 우리에게 관여하고 간섭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는 갈등 없으면 안 되니까 우리는 맨날 갈등하죠. 좀 내버려두세요. 내가 언제 주의 종 되고자 했습니까? 그냥 조용히 살도록 해주면 안 되겠어요? 이런 거. 안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주의 증인 안 되려고 하는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땡깡, 억지를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뭐냐 하면 노아가 빨리 문 열고 나가자. 도저히 답답해서 못살겠다.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노아는 방주에 갇혀있는 거예요. 어디를 나가? 밖은 다 물인데. 심판의 물인데. 뭐가 좋다고 나가요? 뭐가 좋다고. 성령 없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 해요. 알아서 다 추립니다.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령 없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구원받고자 겸손, 온갖 뭐 비슷한 빛과 소금 다 하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주변은 그대로인데 본인이 혼자 안달 나서 빛과 소금되는 것, 이것은 무엇과 같습니까? 주변과 성질이 똑같은 거예요. 아까 제가 했죠? 성령 받은 자가 빛이 되면 자동적으로 저쪽은 어둠인데 성령 없이 자기가 빛이라고 우겨버리면 이거 제조기한 지나면 같이 썩어버려요. 뭐 열심히 했는데 잘 안됐다느니 내가 겸손하려 했는데 하나님이 안 도와줬다느니 이런 소리한다고요. 왜냐하면 동화되기 때문에 같은 성질에서 유난떨면서 겸손해봐야 이거 아무 소용없어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 없는 사람은 자기 잘남을 증거하고 자기라는 조건을 빼지를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예수님을 언급하지만 다 나 잘되기 위한 그 본심은 그대로에요, 그대로. 성령이 안 오니까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교회되려면 젊은 자들이여 장로들에게 겸손하라. 우리 교회는 올해 겸손이 목표다. 겸손하자. 서로들 겸손하자. 그러면 그것은 뭐냐면 청학동 훈장 되죠. 청학동 훈장 되고 딸내미는 트롯트 시켜서 보내고. 방언하기 때문에 무슨 얘긴지 모르겠죠. 트롯트 노래 나와서 3등 했다는 얘기에요, 청학동 훈장님 딸이. 청학동 하니 뭐합니까? 세상이 좋아서 하고 있는데.

우리가 세상을 떠날 수는 없어요. 떠날 수는 없더라도 미끼로 사용해요.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구원했다는 이것이 악마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약 오를 일입니까? 약 오르라 해라. 약 실컷 올리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급하게 자기 위대한 조건을 포기 못하는 지를 더욱더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하시기에 우리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주께서 친히 하게 하도록 날마다 주께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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