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와 코메디
2021년 3월 21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11-12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할례라는 율법 자체를 살리려고 하십니다. 이는 그 어떤 인간도 율법의 최종 완성인 마음의 할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점이 충분히 검증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자기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전히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전혀 하나님의 할례취지를 부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 되려고 합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생각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8:12에 보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이 세계를 포위하고 있는 영적 세계가 야곱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영적 세계가 인간 세계를 어떤 식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출애굽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터져버렸습니다.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할례는 어떤 식으로 기능하고 보존되는가가 드러납니다.
출애굽기 12:48에 보면,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그날 밤은 보이지 않는 존재자가 모든 보이는 존재자들을 습격하는 날입니다.
의인이고 악인이고 다 죽여버리는 날입니다. 옛 자아로 버티는 자들은 이러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단지 유월절 그날 밤에 문 밖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안의 장자는 살아났는데, 바로 그 하늘의 습격 사건은 할례받은 자의 역할과 기능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즉 이 땅에 영적 요소를 남기는 하나님의 방식이 그것입니다. 이 할례의 취지는 신약에 와서 십자가 취지로 완성이 됩니다. 전에 자아가 있는 그 자리를 심판받아 비어버린 자리로 만드는 겁니다. 폭격맞아 구멍이 난 자아가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라는 것은 죽어서 자기 소식을 듣는 자가 됩니다.
옛 자아를 유감없이 버릴 패입니다. 이 옛 자아를 내부로 넣고 바깥에는 이미 죽어버린 새 자아를 드러내므로서 할례 율법은 결코 하나님께서 양보 못할 사항인 것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담고 있지 않는 장례는 하나님께서 안 받는 장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할례도 없고 세례도 없는 세상이 됩니다.
이 세상에 할례도 무시하고 세례도 무시하는 이유는 귀신들로 점령당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귀신들의 존재 여부는 자아가 자아에게 주목하면서 그 귀신들은 어느새 출몰하여 기자회견하듯이 자아를 둘러쌓습니다. 그리고 쉬지않고 조언을 합니다. “너의 재주는 아깝다. 너는 잘 할 수 있는 자야. 희망을 가져!”라고 충언을 합니다.
그래서 자아를 버리지 않게 하고 도리어 키워나가라고 부축입니다. 이는 할례의 의미를 삭제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할례의 의미는, 인간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에 둘러싸여 조언을 받는 자들은 자신이 기어이 자신을 살려내어 보려고 합니다.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하는 자임을 기어이 감추려고 시도합니다.
‘마음의 할례’란 마음을 벗겨내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인간 내부에 영적인 세력이 들어오기 위해 필요한 절차입니다. 그렇게 되면 옛 자아란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다. 인생은 일종의 코메디같은 겁니다. 하등 진지할 것도 없고 심각할 것도 없습니다. 잘 살아도 코메디요 못살아도 코메디입니다.
인생이란 그냥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자아는 자신을 지킬만한 어떤 권한도 없습니다. 즉 ‘잘 살아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온 몸에 꿀 바르고 벌이 있는 곳에 가면 자동적으로 벌들이 쏘아대는 것처럼, 인간들이 자아를 생각하면 할수록 충고를 해주려고 온 동네 귀신은 다 끓습니다.
누가복음 8:2에 막달라 마리아가 나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그녀는 결국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요 20:1) 즉 부활의 증인이란 먼저 이 세상이 귀신이 통치하고 활개치고 있는 세상의 증인이 먼저입니다.
귀신들은 옛 자아, 곧 아담의 몸에 대해서 여전히 미련을 두고 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를 받는 자는 마음에 영적 세계로 통해서 창이 만들어졌습니다. 옛 자아로 시작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는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자기를 괴롭힐 필요가 없음을 압니다.
즉 자기가 자기 붙들고 질척대지 않는 겁니다. 우리 성도는 조금 전의 일도 잊어야 마땅합니다. 과거는 지워라고 있는 겁니다. 할례받은 성도의 입지는 마치 이 땅에 보내진 심판의 기준같은 존재입니다. 병아리 감별소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그 연기는 수컷으로 분류된 병아리를 살육하고 태워죽이는 화장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할례받은 성도는 자기 것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 질서를 땅에게 그냥 넘겨주면 됩니다. 마치 마른 우동 국수를 넣고 뜨거운 우동 국물에 적셨다가 그 담긴 국수를 손님 그릇을 담아 주고서는 도로 투명한 철망의 조리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체적으로 할례받은 자는 자기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0:1-4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란 마치 잘 익은 석류 속과 같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에 합류된 자로서 이미 구원이 마감되는 신분자가 세례받은 자가 됩니다. 이런 성도는 자신이 먼저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인간들이 귀신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자임이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의미없듯이 그들도 의미없는 자들입니다. 모든 게 코메디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할례나 세례의 취지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골 2장 11-12절(할례와 코메디)21032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11-12절입니다.
골로새서 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오늘 본문에 할례 나오지요. 그리고 세례 나옵니다. 세례라는 것, 신약의 세례라는 것은 구약의 할례라는 하나님의 율법 을 완성 시킨 것이 세례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이 할례라는 것은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을 할례라 했는데 신명기에 10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할례 말고 더 요청한 것이 있었어요. 그게 ‘마음의 할례’라는 겁니다.
할례라는 것은 자르는 거예요. 잘라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네 마음을 잘라라, 하는 뜻이에요. 그 마음을 자르라고 해놓고는 마음을 자를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어떤 인간도 그걸 해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지만 마음의 할례를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신약에 와서 세례가 주어집니다. 세례라 하는 것은 죄 씻음 받는 걸로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방식이 물이라는 것 가지고 자기 마음과 몸에 있는 죄를 씻어내는 것으로 그렇게 여러분이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아니고 물로 장례 치르는 것이 세례입니다.
사우나에서 목욕하듯 물을 뿌려서 씻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물에 잠기게 해 버리는 거예요. 집어넣어요. 죽으라는 겁니다. 이게 마음의 할례에요.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장사 되었다, 하는 말은 장례 치렀다, 장례 치른 거예요. 이게 율법의 시대에서는 계속 지켜라, 지켜라, 가 됩니다. 이것은 미완성이 되지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세례받아 버리면 그것은 미완성이 아니고 이미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 완성이 되었다는 말은 장례 치르고 난 뒤에 비로소 내가 구원받은 소식을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 죽어서 내 소식을 듣는 거예요. 이미 죽은 상태에서. 소급해서 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살아 있을 때는 내가 살려고 애를 쓰겠지요. 그걸 옛 자아, 할례받지 못한 자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삶, 그런 인간, 나, 그 나라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께 거부당하는 나인 것을 인간이 장례 치르고 난 뒤에 그 소식을 듣는 겁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이것을 가지고 전문용어로 ‘나가리’라 합니다. 버릴 패에요. 세례나 할례,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지킬만한 어떤 권한도 내게는 없다는 겁니다. 나를 지킬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뭐가 빠져 있느냐? 이 세상은 뭔가 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것은 미완성이 된 세상, 미완성이 된 나를 보다 완성단계로 성화시키고 보다 발전시키려고 애를 쓰거든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장례 치르기는커녕 점점 더 할례와 세례가 빠져버린 그 세계에서 성공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결혼식 할 때 주례 없는 결혼식을 셀프 결혼식이라 해요. 셀프 결혼식. 누구한테 잔소리들을 필요도 없고 이것은 ‘나 축하나 해줘’ 그 말이거든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할 줄을 몰라요. 키우려고 생각하고 자기를 지키려고 애를 쓰지 나는 나가리 돼야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성공해야 되고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당신이 실패 안 해야 될 이유를 열 가지 중에 두 가지만 대 보세요. 두 가지는 관두고 한 가지도 못 대지요. “왜 당신은 실패 안 해야 됩니까?” 물어보면 “나니까. 나니까!” 그래서 세례와 할례가 없는 이 세상은 모든 게 미확정되어 있어요. 미확정은 불안합니다.
성경에서, 방금 제가 했듯이 할례나 세례나 하는 것은 교회 와서 머리에 그냥 물 뿌리고 세례받았다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성경에서 세례라 하는 것은 할례의 내용물을 품고 완성된 것이 세례입니다.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죽어서 내 소식을 들어야 그 장례식만이 하나님께서 수용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가 두 개가 돼요. 옛 자아, 내가 죽기 전에 세상 성공해보려고 몸부림치는 그 자아, 셀프지요, 나 자신을 위한 그 자아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미 구원받았음을 알게 되는 새로운 자아, 그것은 새 패, 옛 패가 아니고 새 패, 그 두 가지 패.
새롭게 이미 구원받은 그 패는 어디 안에 들어있느냐 하면, 마음의 할례 행했고 세례 안에 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나의 장례식이에요. 그것을 12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따지고 싶지요. ‘왜 그래야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할례 자체가 벗기는 거거든요. 벗긴다. 벗긴다 할 때 여러분, 제일 먼저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바나나 껍질 벗긴다. 바나나 껍질 채로 먹는 사람 없잖아요. 표피를 벗기는 거예요. 벗겨버리면 안의 것이 바깥으로 나오고 바깥에 있는 것이 안으로 밀리게 되는 겁니다.
바깥에는 새로운 자아가 등장하고 안으로 옛 자아가 밀리면서 자리 교체가 일어나요. 자리 교체가. 그래서 성도라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해서 옛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더 확실하게 삶 속에서 느껴지는 겁니다. 새 자아는 뭐냐?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에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이미 구원이 완성된 새 자아는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서 장례를 치른 죽음 이후의 내 모습을 바깥에 내보냅니다.
그러면 그 바깥에 나와 있는 내 새로운 자아를 받쳐주는 것은 뭐냐 하면, 도대체 내가 그동안 어떤 식으로 나를 지키려고 살아왔는가, 그 부질없는 짓거리를 왜 했던가를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부에 그것이 계속해서 심도 있게 감지가 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게 되면 교회 와서 하는 일이 나 천당 보내주세요, 나 구원해주세요, 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내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세례를 세례답게 현실화시키고 할례를 할례답게 현실화시키는 게 목적이에요.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신체에다 할례받은 표식을 한 겁니다. 남성 생식기에 표식을 한 거고 지금 신약에서 우리는 새 마음속에 옛 자아가 있기 때문에 옛 자아와 새 자아가 만나서 어떤 표식을 갖는데 그 표식이 뭐냐?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렸다는 그러한 표식, 사인을 가지고 평생을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게 되는 겁니다.
지난주에 이 세상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 했잖아요. 한주 지났으니 다시 말씀드리면, 철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나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는 모든 것이 철학이다. 그걸 오늘날 뭐라고 하느냐? 그걸 science, 과학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 실체,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실체의 실체를 계속 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계속 실체를 파고 들어가서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실익을 주느냐, 이익을 주느냐, 그걸 생각하는 것이 바로 과학의 속임수라 했지요.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자아가, 거울에 비치는 나가 여기 있다고, 내가 여기 있음이거든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있는 것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되잖아요. 거울에 내가 안 비치면 포기를 하겠는데 거울에 분명히 내가 있고, 째보면 아프고, 이 아프면 이 아프고, 밥 안 먹으면 배고프고, 뭔가 있다는 그 말이지요. 뭔가 덩어리가 있는 거예요.
자식을 낳게 되면 자식이라는 덩어리가 있잖아요. 울 때는 뭔가 조치를 해야지요. 달래 주던가, 딸랑이를 딸랑딸랑 흔들든지 뭐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나에게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 중심이 안 될래야 아니 될 수가 없는 것이 옛 자아의 삶입니다.
옛 자아를 우리가 못 버립니다. 왜? 눈에 보이는 신체가 있으니까. 배고프면 밥 달라고 요구하고, 어디 놀러 가고 싶으면 놀러 가고 싶다고 나에게 요청하니까 뭔가 조치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조치를 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의 전부에요.
과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망원경 동원해서 보고요. 눈에 안 보이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전자현미경 동원해서 보는 거예요. 뭔가 보이는 것이 있을 때 그게 뭐냐? 그게 이 세상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걸 갇혀 있다고 보고 하늘에 창을 내는 겁니다. 창을 낼 때 보이는 이 스크린, 보이는 이 막, 장막, 여기에서 패널 한 조각을 뜯어내요. 패널 한 조각을 뜯어내는 그 지점이 바로 할례입니다. 그게 할례받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할례받는 거예요.
그걸 뜯어내게 되면 우리가 눈으로 현미경으로 캐치하지 못하는 영적 세계, 우리 주변에 이 세상을 포위하고 있는 영적 세계가 뚫린 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마구 쏟아지는 겁니다. 마구 쏟아지게 되면 그동안 나를 위해서 나를 어떻게 천당 보내려고, 나를 어떻게 죽어서 좋은 데로 가게 하고 살아서 복 받으려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나가리된 거예요. 전부 다 거짓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영적인 세계가 왔다면 우리가 이참에 이 시간부로 우리 인생관을 정리합시다. 우리 인생은 뭐냐? 코메디예요
전혀 진지하지 않습니다. 코메디입니다. 자살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코미디인데요, 뭐요. 농담 같은 거예요. 주눅 들 이유가 없습니다. 이래 살아도 코미디고 저래 살아도 코미디고 전부 다 웃음거리에요. 우스갯소리. 내 인생이라는 게 장난 같은 거예요. 왜 장난에 그렇게 진지하게 놀아났습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무슨 인생에 성공이 있고 인생에 무슨 실패가 있습니까? 코메디가 성공한 코메디, 실패한 코메디가 있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장난인데요.
그러면 누가 이렇게 코메디에 불과한 인생을……, 지금 이게 코메디라 하는 이 사실을 여러분이 받아들여야 돼요. 나이 80이 넘어서도 아직 이것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차피 장난이고 게임이고 그런 거예요. 컴퓨터 게임 그런 거예요. 인생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내 인생은 지킬 가치가 없다니까요, 가치가! 코메디에 의미 두지 마세요. 내 인생에 의미 두지 마세요.
자꾸 의미를 두니까 진지해지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되도 않는 소리나 하고요. 코메디 복 받아서 뭐할건데요? 이렇게 갇혀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다라고 자꾸 주눅 들면서 자꾸 악을 박박 쓰고 몸부림치면서 ‘인생 내가 살아남아야, 내가 살아남아야 돼.’ 그 짓 하라고 누가 뒤에 서 부추겼느냐 하면, 바로 세례와 할례를 없애버린 세계, 이게 악마의 세계, 귀신들의 세계에요.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어떤 인물 하나 등장하는데 참 의미 있는 인물 하나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막달라에요. 저는 막달라 하면 갈릴리 바닷가에서 봤던, 영어로 “MAGDALA”라고 썼던 그 유적지, 얼마나 영어로 크게 써 놓았던지 아직도 그때가 잘 잊혀지지 않는데요.
그 막달라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 들린지를 몰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내가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 보이는 형식으로 있는 내가 보이지 않는 형식으로 있는 그 누구로부터 속박당하면서, 추궁당하면서, 고문당하면서 하루하루 힘든 인생을 살아왔다는 겁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 마음에 프레스, 압력을 가하는 그 무엇, 내 자아에 대해서 늘 잔소리를 퍼붓는 무엇이 있어요. 그거 귀신이에요.
사람이 복음을 알고 성령 받았다고 우기더라도 갑자기 자아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자기 자아에 대해서 의식을 해버리면 동네방네 모든 귀신들 다 나와서 기자회견 합니다. “앞으로 당신은 이렇게 하면 잘할 수 있습니다. 왜 좋은 재주 썩힙니까? 더 나아질 수 있어요. 발전성이 있다고! 세상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좋은 재능 썩히지 말고 발휘하라고요. 그러면 세상에서 당신은 유명인사 될 수 있습니다. 돈 벌 수 있어요. 당신은 똑똑하잖아! 잘 하잖아! 더 발전해야지.” 귀신들이 도와주는 것인지 약을 올리는 것인지 온갖 동네에 있는 귀신들은 다 들러붙어요.
여러분, 웃통 벗고 꿀 바르고 벌통 있는데 가 보세요. 오지 말라고 해도 날라 다니는 그 동네 벌들이 다 달려들어서 쏘잖아요. 인간이 자아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바른 인간이 되지, 하는 순간 귀신이란 귀신은 죄다 몰려옵니다. 갑자기 코메디가 아니고 정극이 되고 말았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내 인생 아무것도 아닌데!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른 가정생활 할 수 있고 바르게 인생 살 수 있습니까?” 누구세요? 누구신데 ‘바르게’가 됩니까? 코미디는 바르게, 가 해당이 안 돼요. 죽어야 될 것은 장례 치러야 될 문제지 장례 치러야 될 시신을 가지고 빛깔 좋은 시체 뭐 그런 겁니까? 곧 죽어야 될 인간을, 사체를 가지고 “어떻게 바르게, 무슨 파운데이션을 바르면 때깔 좋은 시체가 됩니까?” 그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이 세상은, 악마가 노리는 것은 뭐냐? 할례라는 것, 영원히 확정되고 고정된 그 최종적인 그 진리, 할례, 세례, 이걸 빼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이걸 빼고. 천국으로 통하는, 영적인 세계로 통하는 그 창, 그 문, 그거 없다고 치고, 없다고 치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이 세상은 그 안에 갇힌 채.
성령이 들어오는, 즉 예수님 세례받을 때 하늘 문이 열렸다 했거든요. 그 열린 창, 그 표식, 그 표식이 성도의 마음에 이미 하늘의 창이 있는 겁니다. 야곱처럼 사다리에 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그것을 이제 우리 몸에 지니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앞쪽에서는 이미 죽은 자로서 다시 세상을 보는 새 사람과, 내가 할례, 세례받지 않았을 때는 어떤 식으로 귀신에 휩싸여서, 귀신에 둘러싸여서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그걸 처절하게 느껴야 될,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느껴야 될 이 육신에 있는 옛사람이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성도 안에는.
만약에 이러한 새사람이 없고 할례나 세례가 없어버리면, 바나나 껍질 벗기듯이 그런 것이 없어버리면,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밖으로 나타나고 안에는 지저분한 내가 들어있지 않으면 기껏 하는 것이 윤리 도덕 가지고 내세워요. 윤리의 문제점은, 그 시작점이 바로 나로부터 내가 살고 싶어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잘나고 싶어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은 배후에서부터 악마가 그렇게 가르친 겁니다. 귀신들이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버지와 자식 간에 간격이 있어야 된다. 부위부강(夫爲婦綱),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된다. 그게 三綱五倫에서 삼강이에요. 삼강하니 자꾸 아이스크림 생각나네.
오륜은 뭐냐?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되고,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와 자식 간에 친해야 되고,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사이는 유별해야 되고,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느 단체도 어른을 모시는 서열이 있어야 하고, 붕우유신(朋友有信), 친구 간에는 신의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뭐가 없어요? 할례가 없고 마음의 패널을 떼 내는 것이 없어요. 세례가 없어요. 구멍이 나야 되는데. 자기 마음 한곳에 구멍이 나야 돼요. 자아가 있던 자리가 빵꾸가 나야 돼요. 그래야 거기에 막혔던 성령이 들어오고 주님의 천사가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없으니까 이런 윤리 도덕 가지고 버티는 겁니다.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복 주겠지.’ 누구 맘대로요?
주님께서는 새로운 존재를 생각해요. 옛 존재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이야기 안 합니다. 나는 너하고 관계 맺지 않아요. 죽을 귀신들, 귀신에 묶여 사는 그것과 이야기해서 뭐합니까? 온통 밖에 나가면 다 귀신들이에요. 여러분, 아침에 가게 문 열거든 손님 들어오지요. 귀신 들어왔다 생각하면 돼요. “어서 옵쇼, 이라샤이마세!” 귀신 들어오는 거예요.
결혼식 때 기념 촬영하잖아요. 귀신들, 늙은 귀신 젊은 귀신, 귀신들 죽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연세 많은 사람은 결혼식 사진 잘 안 찍으려고 해요. 안 그래도 귀신인데 사진 보면 더 귀신 찍는 겁니다. 고등학교 졸업앨범이요. 젊은 귀신들의 초상이에요. 명절 되면 온갖 흩어졌던 귀신들 다 모입니다. 정종 한 병 들고, 화투 한모 들고 젊잖게 와서 술 한 잔씩 하고 전부 다 귀신 되어서 나가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이 공기 없이는 못 살 듯이 성도는 귀신 없이는 못산다는 거예요. 귀신이 돈 물어다 주고, 귀신이 나 취직시켜 주고, 귀신이 날 도와주고, 귀신이 날 위로해줘요. 조기축구회, 귀신하고 축구 하는 거거든요. 내기 골프, 귀신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무슨 낙으로? 그 귀신들하고 잘 사귀어놓으세요. 내 옛사람, 내 옛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나도 저랬었었었었지. 나도 저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었지. 저게 인생 사는 줄 알았었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이 할례를 완성 시키지 못합니다. 육신에다가,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서 그 속을 드러내는 것은 인간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손으로 할례를 하는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할례를 받았던 사람들 죽었잖아요. 다 멸망했다고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손으로 한 할례를 마음의 할례까지 또는 세례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이것은 인간이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해내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해내시는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 세례가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할례를 행하면서 언급했던 사건이 나옵니다.
그 사건이 출애굽기 12장 48절에 나옵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할례받지 못한 자는 이 유월절에 참석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자, 유월절이 뭐냐 하면, 바로 습격하는 거예요. 인간에 대해서 습격한 게 유월절입니다. 난데없이 보이는 인간들만의 현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출애굽하는 그 날밤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뭐 보여야 체포를 하지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온 애굽나라에 전부 다, 비겁하게도 다 자는데 습격을 해버린 거예요. 공격을 한 거예요. 죽으라고. 그 때는 의인도 죽고 죄인도 죽고 다 죽어요. 서로 서로 잘났다, 못났다, 따질 수도 없어요. 다 죽여버려요. 인간이라고 생긴 것은 다 죽여버립니다.
1968년도 히치콕이라는 감독의 <새>라는 영화가 있어요. 공포영화인데요. 처음에는 갈매기가 공격했어요. 검은 옷을 입은 까마귀들이 전신주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공격을 하는데 그 공격을 하는 대상이 착한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 신앙 좋은 사람, 기도 많이 한 사람, 헌금 많이 한 사람, 다 필요 없습니다. 전부 다 공격해요. 전부 다!
나쁜 사람, 사회에서 악한 사람이라고 규정되더라도 그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요, 남 도와줬던 선한 사람이건 뭐건 관계없어요. 무조건 사람이라 생긴 것은 부리를 가지고 까마귀들이 공격해서 물어 죽여버립니다. 주인공은 그 까마귀, 새떼 피하다 영화 끝나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다루려는 그 범주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 다른 세계의 영적 존재가 이 땅과 연결지을 때, 접속을 할 때 한 지점을 정해놨는데 그 지점이 뭐냐? 할례받은 것, 할례라는 그 증표가, 영적 세계가 집중해서 이 땅과 관계짓는 유일한 장소로서 정해져 버린 겁니다. 구약에서. 그게 신약에 오면 십자가지요.
오늘 본문 11절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해놓고 그 뒤에 13절에 보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 죽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 신약의 십자가가 구약에는 뭐냐? 할례고, 그 할례는 뭘 동반하느냐? 어떤 사건을 동반하는데 그 사건은 영적 세력에 의해서 인간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공격받는 것, 저주받는 것, 그게 할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하늘의 창을 몸에 사인으로서 문신처럼 새기고 있으니까 그 할례받은 그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유월절에 살린 거예요. 이스라엘이 예뻐서 살린 것이 아니에요. 맘 착해서 살린 것이 아니고 할례라는 하나님이 내려준 그 징표가 있기 때문에, 그 징표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 그 징표를 없앨 수 없기 때문에 그 징표보고 살려주시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예쁘고 착하고 신앙 좋아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뭔가 내려준 게 있어요. 마음의 할례, 다시 말해서 내 마음 중앙에 구멍 뚫려버렸다. 내 자아가 구멍이 뚫려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멍이 뚫려 버렸으니가 구멍이 뚫렸으면 뭔가 통하겠지요. 영적 세계가 육적 세계와 통하고 있는 그 매체로서 우리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철판에 구멍을 뚫어놓고 그게 구멍 뚫린 네모난 철판이에요. 그냥 철판의 의미는 ‘중앙에 구멍 있다. 구멍 뚫렸다. 내 것이 텅텅 비어 있어.’ 그것 증거 하라고 성도 된 거예요. 성도는 자기 고유의 것이 없어야 돼요. 뭔가 영적 바람이 왔다 갔다 부는 거예요.
이걸 좀 쉽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초밥 뷔페에 가면 초밥도 있지만 다른 음식도 많잖아요. 우동, 국수, 짬뽕도 조금씩 줘요. “우동 하나 말아주세요.” 하게 되면 조리사가 철망으로 만든 체에 식어버린 우동 면발을 뜨거운 국물이 흔들어서 탈탈 털어요. 그러면 국물은 다 빠지지요.
그리고 뜨거워진 우동면발을 그릇에 담고, 고명 넣고, 국물을 부어서 우동을 내놓습니다. 그 때 그 철망으로 된 체, 조리, 모든 액체는 다 빠져버리고 철망 그 자체, 그게 성도에요. 세례받고, 마음의 할례받은 성도의 기능이 바로 그 기능이에요. 자기 고유의 것이 없어요. 없지만 영적인 것이 담기고 그것을 바깥으로 털어내 놓으면 그 기능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냥 조리에요 조리. 참, 코미디 같은 인생 살면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그것을 주께서 활용해 주시는 거예요. 그 성도를 통해서 지옥과 천국 가는 사람이 가려지는 거예요. “너 뭐 내놓을 것이 있나? 내놔 봐라.” 하면 성도는 “나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나는 빵꾸 난 것밖에 없어. 나는 완전히 빵꾸 났어. 내 자아는 완전히 중앙이 허해. 아무것도 안 들어 있어.” 이러면 성도죠.
그런데 “네 것 내놔 봐라.” 하면, 나는 어느 대학 나왔고, 재산이 어쩌고, 펀드는 얼마나 있고, 내가 교회 5십 년 다녔고,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헌금 얼마나 했고, 기도 얼마나 했고……, 아이고, 어어어어~! 귀 막아요. 그것 안 듣습니다. 소용없어요. 그것, 자기 무게가 너무, 자아 무게가 너무 무거워요. 힘들어서 못 살아간다고요.
‘전에는 교회 예배 시작 5분 전에 나왔는데 올해 한 10분 더 당겨야지.’ 이건 뭐냐? 자업자득이에요. 점점 더 자기 무게가 더 나가는 거예요. 이게 마음의 할례 안 받은 겁니다. 그냥 사는 것이 코미디라니까요. <미나리> 영화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 부부가 병아리 감별사로 취직합니다.
농사도 짓는데 농사는 당장 돈이 안 되니까 병아리 감별사 하는데 병아리 감별소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주인공 제이콥한테 그 아들이 물어요. “아빠, 저거 뭐에요?” 아빠가 “수컷 병아리 폐기시키는 거야.” 아들이, “왜요?” 아빠가, “수컷은 맛이 없고 알도 못 낳거든.” 아들은 말이 없지요. 그러니까 아빠가 “그러니까 우리는 쓸모있는 사람이 돼야 해.”
병아리를 감별해서 암컷은 살리고 수컷은 분류해서 전부 다 화장해 버리는 거예요. 죽을 병아리를 분류해서 태워죽이는 것이 뭐냐 하면, 아우슈비츠수용소 같은 그 굴뚝이에요. 이게 바로 유월절입니다. 세례라는 것이 현존하고 그리고 마음의 할례가 현존하는 이상은 주님의 기능은 뭐냐? 세례나 할례, 그 취지 자체를 살리는 거예요.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죄 많은 우리가 필요했던 겁니다. “저 봐라. 귀신 들린 자도 구원받잖아.” 이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결국은 부활의 증인 되었어요. 일곱 귀신 들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구원받은 거예요. “나 전에 귀신 들렸었어요.”
사람이 귀신이 들면 나는 살리고 자꾸 죄에 대해서 죽이는 꼴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모른체 하면서. “얘는 날 때부터 처음부터 똑똑하네. 와, 말도 잘하네.” 이런 식으로. 태어난 지 1년 좀 더 됐나,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그런 애가 있어요. 현서라고. 우리 손자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하여간 말도 잘하고, 똑똑하고, 훌륭하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
자꾸 이 자아가 남들이 칭찬하고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이 자아를 버리질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귀신이 들끓으면서 하는 말이, 귀신이 뭐라고 하느냐? “너 십자가 진다고 잠시 양보했던 네 달란트 이제 다 돌려줄 게. 네가 이제 성령 받았으니, 부활의 영을 받았으니까 너 잘난 것 그것 잘하잖아. 달란트 개발하게 되면 하나님께 상급이 많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 귀신이 부추기는 거예요. 너 스스로 발전하라, 네 자아 아깝다고, 너 대단함과 네 자랑거리를 네가 놓치면 안 된다고. 아직도 교회 와서 짤짤이 할 일 있습니까?
할례라고 할 때, 할례받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공격을 할 때 할례받은 사람은 뭐가 있느냐? 아까 의인이고 죄인이고 다 죽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미 자기도 공격을 받았어요. 공격을 받았다는 말은 자기 바깥에 있는, 곧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자기 안이 되니까, 자기 바깥에 있는 양의 피가 이제 내 피가 되었다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제 내 피가 되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유월절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갔다는 말은, 주님께서 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새 자아에요. 이미 심판에 대해서 묻지 않기 때문에 어째서 나는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왜 나에게 죄를 물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새록새록, 그 때부터는 옛 자아를 통해서 우리가 느껴져야 되는 거예요. 그걸 더욱더 깊이 알아가야 되는 거예요.
‘야, 어디 가도 참 내 잘난 체 하는 것으로 인생의 보람을 삼았구나.’ 남에게 안 지려고 하는 이것이 귀신이 하는 짓, 마귀가 하는 짓이라는 것, 그 사실을 우리는 갈수록 더 깊이 있게 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점을 아시고 여러분이 구약성경 한 구절을 봐야 되는데 제가 좀 뜸 들이고 있는 이유는, 이 본문이 어려워서 뜸 들이고 있는데 이제는 이야기하려고 해요.
레위기 19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할례라는 것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레위기 19장 23절에 보니까 과수원에 있는 감이나 사과나 딸기 복숭아 이런 것도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유월절에 의하면 그것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고 과실이고 간에 일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은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 기도가 되었든, 헌금이 되었든, 봉사가 되었든, 전도가 되었든, 예배가 되었든, 성경공부가 되었든 하나님은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코메디니까.
안 받습니다. 안 받고 구원시켜 주는 거예요. 복조리 기능만 하라고 구원시킨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자꾸 그걸 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우리가 은근히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령은 안 받았지. 나는 죽어서 좋은데는 가야 되겠지. “목사님, 시켜만 주이소. 시키는대로 다 할 테니까 이 나를 착한 인간, 바른 인간 만들어만 주이소.” 이런 거에요.
소비자가 요구하는 대로 주인이 해줘야지요. “이것 하시면 복 받습니다. 저것 하시면 은혜받습니다. 그래서 감사헌금 해서 재벌 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식을 위해서 돈 쓰지 마시고 교회 주일 학교 위해서 돈 쓰세요. 여러분, 자식을 진정 사랑하는 것은 교회에 돈 내서 교회를 통해서 자식 신앙교육 시키는 그것이 진정 참된 하나님이 쓰시는 돈입니다.”
이 한마디에 자식한테 미쳐 있는 부모들은 껌뻑 다 넘어가요. ‘아이고, 내가 자식을 육적으로만 키웠구나. 영적으로 못 키웠구나. 교회에 돈 갇다바치자. 그러면 교회 주일학교에서 내 자식 잘 키워주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식 잘 키웠다, 칭찬해 줄 거다.’ 이런 식으로요. 사람 약점을 간파해서 돈 빼먹는 데는 교회만큼 뛰어난 보이스피싱이 없습니다. 최고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는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에는 세례가 나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세례라 하는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 12절에 ‘함께’라는 말이 나와요. 연합을 세례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세례라는 것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 세례 나오지요. 3,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세례는 석류알갱이에요. 석류라는 야구공만 한, 야구공보다는 더 크겠다, 그 공만 한 석류 안에 알알이 석류알갱이가 그 안에 다 담겨 있어요. 그게 ‘예수 안’이에요 십자가 안, 성령 안이에요. 석류에요. 빨간 석류, 석류 안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왜? 같은 음료를 마셨고 같은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같은 물을 마셨기 때문에. 반석에서 나온 물.
비교하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내 것이 아니니까. 예수님을 죽이시고 살리시던 그 능력으로, 동일한 능력이라는 그 석류 안에, 예수님이 석류라면 그 석류 안에 주님을 죽이시고 살리시는 그 동일한 능력으로 성령에게 우리에게 새사람 되게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마음의 할례요 그게 세례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36절에서 베드로가 크게 오해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유명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대목인데요.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는 이유가 따라가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 가신 곳에 제가 따라가는데 제가 목숨까지 버리면서 가겠다고 하지요. 37절에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제가 목숨 버리고 주께 바짝 붙어서 따라가겠나이다, 한 거예요. 주님 따라 천국 가겠습니다, 한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베드로가 했다는 말이지요. 베드로의 옛 자아가.
왜 그런 소리 하느냐 하면, 예수님 이용해서 자기를 천국으로 살리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지요. 교회 와서 예수 덕분에 나 한번 살려보겠다는 식인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올 필요 없다. 와도 소용없다. 안 받아준다. 너는 네 주제를 알아야지.”
너는 너라는 이유 때문에 안 받아주는 거예요. 내가, 내 자아가, 하나밖에 없는 자아가 나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는 거예요. 참, 그 유행가의 가요 보면, 가사를 보면 자기 잘되기 위해서 타인에게 매달리는 그런 가사에요.
어떤 남자가 사귀던 여자가 맘에 안 들어서 떠나는 모양이지요. 떠나니까 여자가 간곡한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제발 떠나지 말라고. 옛날에는 안 그랬잖아, 옛날에는 너는 나에게 참 예쁜 사람이었잖아, 네가 한걸음 멀어지면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되잖아~. 이 노래 가사 아는 사람 별로 없는 모양이지요.
제발 이러지 마, 넌 날 좀 잡아줘. 이런 식으로요. 그걸 가지고 질척댄다고 해요. 여러분, 성도는 제발 본인이 본인한테 질척대지 마세요. 코메디입니다. 나 자체가 전혀 진지하지 않아요. 나를 지킬 가치조차 없는 거예요. 나 자체는 이게 버릴 패에요. 버릴 패, 나가리, 전문용어로 나가리.
새로운 자아를 얻었기 때문에 가차 없이 버리세요. 이걸, 일곱 귀신 들끓는 그것을 왜……, 일곱×일곱, 일곱의 제곱은 49, 하여튼 귀신들은 죄다 불러모으는 그 자아를, 무엇이 그렇게 소중하다고 그걸 쥐고 있습니까? 네가 똑똑한가, 내가 똑똑한가, 네가 돈 잘 버나, 내가 잘 버나? 자기가 스스로 자기 발등 찍는 그 짓, 이겨도 코메디 져도 코메디, 자살해도 코메디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천국은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곳이에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타날게, 너에게. 그리고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내가 알려줄 게. 네가 한 짓이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할례가 있잖아. 그 할례를 완성 시키는 나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너를 값없이 천국 보내줄 게. 됐냐? 됐어?”
이게 바로 연합입니다. 합류된 거예요. 대전에 ‘뿌리공원’이라는 데가 있어요. 뿌리라고 해서 온갖 식물의 뿌리는 다 모아놓은 공원이 아니고 우리나라 족보의 뿌리는 다 모아서 240개의 조형물을 만들어놨어요. 제가 안 가봤지만 거기 경주이씨 조형물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뿌리 공원에 연리지라는 것이 있어요.
연리지라는 것은 뭐냐? 뿌리가 다른데 자라다 보니까 이 가지가 서로 통하고 있었어요. 분명히 다른 뿌리거든요. 하나는 죄인, 하나는 의인, 이질적인 거예요. 하나는 옛 아담에 속한 인물, 하나는 새 아담 예수님, 다른 하나는 심판의 관계니까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관계인데 그 연접 관계, 할례라는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라는 하나님의 그 복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그 죄인, 골칫덩어리, 자기밖에 모르는 골칫덩이를 자기 품 안에 꽉 안아주는 겁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창세기 2장에 아담과 하와가 한 몸 되는 것처럼.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기한 나무지요.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이 되었으면 ‘옛날에 내가 살았던 내 자아는 이 정도로 개판이었습니다.’ 하고 안으로 집어넣고, 속으로 삭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귀신 들린 내가 막달라 마리아 못지 않은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것은 바깥에 내세우고. 그래서 이게 한 몸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이 된 거예요.
이것은 내가 잘되기 위한 기능은 용납이 안 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는 기능만 나와요. 복음을 위해서만 우리가 활용되는 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고 돈 얼마나 벌까, 그런 것은 지옥 갈 인간들이 하는 짓이고, 너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 딱 필요한 만큼 내가 알아서 그 나라 의를 바라보라고 다 채워준다. 따라서 너는 네가 살 어떤 권한도 그 어떤 책임도 너한테는 사라졌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보고 자신에 대해서 너무 질척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방금 뭐 했지?’ 묻지 마세요. 과거는 잊어버리라고 있는 게 과거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묻지 마세요. 자꾸 그걸 묻게 되면 자기 자아한테 매이게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하루가 지나면 내가 공백이 되니까, 빈자리가 되니까 그냥 할례에 필요한, 복음에 필요한 그 작업만 우리에게 계속해서 숙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에요.
이미 너는 살았고 너의 옛 사람은 죽었다. 그것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겁니다. 따라서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게 귀신들의 세계거든요. 그럴 때는 상대방을 귀신보듯 보세요. “여보, 밥했나?” 할 때 ‘여보(귀신), 밥했나?’ 이렇게 생각하라고요.
그런데 그걸 하려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조건 하에 상대방을 사람 취급 안 하는 거예요. 자기는 귀하게 여겨놓고 남들은 개떡같이 여기고, 이것은 안 돼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세례는 뭐냐? 우리가 이 악마의 세계에서 강력하게 자기를 단단히 지키려고 아주 애를 쓰고 있어요. 세상은 사라져도 자기는 토치카, 내 아지트를 만들어요. 내 아지트, 내 토치카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아요. 이것은 콘크리트 두께가, 철판 두께가 3십 센티가 넘어요. 틈도 없어요. 손가락도 안 들어가요.
이렇게 강력한 나,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걸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구멍을 뚫어서 패널조각을 떼 내면 거기서부터 뭐가 쏟아지느냐? 주님의 준비된, 이미 다 이룬, 이미 확정된 천국의 능력이 거기서 마구 우리에게 쏟아지지요. 쏟아지게 되면 굳이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쥘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냥 내 안에는 뭐가 들어오느냐? 주님의 것만 그득하게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봅시다. 11절에 “또 그 안에서” 아까 석류 이야기 했지요. 석류 알, 그 안의 알맹이 그 안에서,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이룰 수 있는 구원을 받았으니, 그리고 12절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너희는 이미 죽은 너에 대해서 미련 두지 말고, 그것은 그냥 장난치듯이 하루하루 살아간다. 부담 없이.
제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뒤돌아보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귀신 달려듭니다. 온 동네 귀신 다 달려들어서 잔소리해 댑니다. 다시 11절에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주께서 이루신 그게 진짜 할례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네 안에서 충분하게 이루었으니 이제는 너와 나는 헤어질 수가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거예요. 주님의 작품이니까, 주님 자신이 이룬 자기 사람이니까 떼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같이 가자. 천국으로. 아니 천국 안에서 같이 살자.” 바로 이 모든 것이 나의 부지런함이 아니고 주님의 부지런함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부지런 한 것을 따지지 마시고요. 주님께서 얼마나 할례 대상으로, 구원대상으로 나를 삼는지, 그 주님의 부지런함을 매일같이 한 터럭도, 한순간도 놓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내 일에 너무 분주하다 보니까 까마득하게 몰랐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은 없고 주께서 친히 만들어주시는 인생인 줄 알고 몽땅 다 맡겨서 코메디 같은 인생을 그냥 코메디로 가볍게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