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0218b 베드로전서4장 18절(겨우 구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구원. 율법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그 제시된 율법이 인간에게 왔을 때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저주 아래에 두게 했고 진노 아래에 두게 했습니다.
그런 것이 율법이라면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중에 구원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우리가 율법을 이루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죠.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대속해서 율법의 짐을 지셔서 그 죄 값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맞는 이야기인 것같이 들립니다.
문제는 나 또는 우리.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와 그 이후의 상태가 동일한 우리냐 하는 그 문제를 사람들이 놓치고 있어요. 결론적으로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나는 나에게 미쳐있는 나에요. 내가 전부였던 나에요. 나는 내 가치와 내 의로움과 내 잘남이 전부였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 힘들지만 살아왔던 거예요. 그것을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느냐면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기 위해서 살아간다.
202호가 제일 좋다. 특별한 나만의 공간을 내가 사수 안하면 누가 사수하겠는가. 딸애 같으면 전부다 인형으로 채워주고 아름다운 핑크빛으로 하는 것은 이것이 내 방이기 때문에 내가 내 취향에 맞도록 전부다 도배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세계는 나만의 세계, 나만의 독단적인 세계이고 독자적인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나는 신이 되는 겁니다. 내가 절대자가 되는 거예요.
이미 절대자의 맛을 봤는데 그걸 미쳤다고 포기해요? 그래서 만약에 내가 신으로 살았는데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내 죄, 스스로 지울 수 없는 내 죄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셔가지고 내가 구원 받았다는 거예요. 기분 좋죠. 기분 참 좋죠. 정말 좋지요. 그렇게 구원받으면 여기 신이었던 나라는 상태가 구원받고 난 뒤의 나라는 상태와 같게 되는 그런 경우가 발생되는 겁니다. 이것은 나로부터의 구원이 전혀 안된 상태지요. 그 나가 그 나인데 무슨 구원이 돼요? 마귀도 천당 가는 수가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구원받은 이후의 나라는 것은 모델이 있어요. 그 모델이 뭐냐 하면 율법의 거룩함 앞에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나’가 그 제단에다 자기의 모든 걸 바쳤어요. 모든 걸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아버지 앞에 바친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에게 바치고 그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의 자리로 부활시킨 겁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자리를 주의 자리로 부활시켰다면 그 주 안에 들어오려면 그냥 그대로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이름은 예수님이 하신 그 율법 완성에 완전히 바쳐져야 된다는 거예요. 바쳐져야 됩니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바쳐지기 위해서 변화된 것이 있어요. 성신에서 성령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파멸은 율법에 준해서 잘린 겁니다. 신약에서 지옥 가는 사람은 율법에서 잘린 게 아니고 복음에서 잘리죠. 고린도전서 16장에 나오죠. 율법을 못 지켜서가 아니라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 물품 파는 가게에 그 많은 액자들 중에 왜 그런 구절은 없는지 모르겠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런 것 액자 해야지 뭐 이상하게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런 천주교에서 하는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런 다단계에서 하는 것 하지 말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것 좀 했으면 좋겠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 그런 것만 하지 말고요.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런 것 있잖아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런 구절 있잖아요. 좋은 것 얼마나 많습니까. 확정 난 구절.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것처럼 확정 난, 저주 앞에서도 자신만만한 구절을 집에다 걸어놔야 돼요, 저주 앞에서도. 엄마야, 아이고 무서워라. 이런 것 말고. 오라 저주여.
네가 저주할 저주의 화살이 겨냥할 내 이름은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사라졌다.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내 이름이 사라졌어요. 그러면 나라는 몸뚱아리는 뭐냐. 주의 이름의 완성태가 적용이 되는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아버지께 바쳐진 그 이름이 나에게 오게 되면 나는 짬뽕을 먹든지 짜장면을 먹든지 뭘 하든지 간에 아버지께 바쳐진 몸으로 짬뽕 먹고 짜장면 먹고 치킨 먹고 피자 먹는 거예요. 빵 먹고. 바쳐진 이름으로.
관리는 누구 하에 들어갑니까? 주님 하에 들어가죠. 주님 하에 관리 들어간다는 말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전처럼 내 자신의 가치와 보람을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식이 너한테 제공되었다는 겁니다. 네 인생이 할당되었다는 거예요.
이걸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렵게 표현하는 멘트가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일을 없앨 수 있을까’ 여러분 좋은 아이디어 부탁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일을 없앨 수 있어요? 어제 말고 내일. 지금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관리할 때는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관리하잖아요. 내일이 오늘의 짐이 되어버려요. 이런 짓해서 내일 큰 탈나지, 이런 것 있잖아요. 그놈의 내일이 문제라.
그러면 내일이 없다고 하면 걱정 근심도 안할 수 있죠. 염려거리가 없는 거예요, 내일이 없다면. 지금 제가 말 잘못했습니까? 내가 말 잘못했나... 모든 걱정과 염려와 불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일을 예상하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분명히 예수님이 이야기하셨다고요, 마태복음 6장에서. 내일은 네 소관 아니라고요. 네가 너무 건방지구나. 어떻게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평소에 네가 네 관리하는 것처럼 그 관리를 그냥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까 계속해서 무거운 짐같이 염려가 되는 거예요.
내 몸이 전처럼 내가 관리하는 내 몸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오죽 했으면 참새 이야기하고 들풀 이야기했겠습니까. 참새, 들풀 관리자가 누구에요? 참새였습니까, 들풀이였어요? 여기서 이북 말 나와야 돼요. 아니디요 아니디요. 아니지요, 그건.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일이 없다면 오늘이 마지막인데 굳이 내일을 걱정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내일 시험 잘 쳐야 되는데. 내일이 없다면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죠. 궁금합니까, 내일 없애는 방법 궁금해요? 뭐 500원 준비 안 해도 돼요. 500원 안 받습니다. 궁금합니까? 궁금하나 안하나 이야기할거면서 묻는 게 잘못되었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을 없애는 방법은 율법, 언약이죠,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이고 다 같은 말입니다, 율법, 언약, 약속 일단은 같은 걸로 보고요,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바닥을 치면 되는 겁니다. 바닥을 치면 됩니다. 어느 정도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늘 바닥입니다. <늘 바닥>. 제목으로 괜찮네. 늘 바닥이라는 말은 애초에 타락은 없었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은 올라가야 뭐 타락이 있죠. 추락이 있죠. 올라간 적이 없어요. 율법이 너무 세기 때문에. 율법이 너무 센 거예요.
초등학교 때는 산수 배우죠. 구구단 배우죠.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구구단 안 가르치잖아요. 왜 고3은 초등학교 때 배웠던 구구단을 안 가르칩니까? 이제 격을 높여야죠. 그것은 기초고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잖아요. 그것도 단절이 아니고 연속되어가지고. 초등학교 공부 마치고 중학교 공부 마쳐가지고 고등학교 공부 마쳐가지고. 이렇게 점점 더 연결되면서 향상되죠. 진보되잖아요.
율법에 그런 게 있습니까? 율법 100개 중에서 10개 어기고 90개 지키면 진보된 거예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던가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양적으로 봤습니까, 질적으로 본 거예요, 성경에?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우리가 우리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스스로 나는 열심히 살았다 자꾸 우기지 마시고 율법 앞에서 자신을 보세요. 율법과 언약 앞에서 보시라고요. 노아처럼 또는 모세처럼. 율법 없애지 마시고요. 하나님의 말씀, 약속, 십자가 없애지 마시고. 스스로 자기가 명령하면 안 되고요.
여기 보면 야고보서 2장 9-10절에,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니까 모든 율법을 365가지라고 보고 365가지 전부에 딸랑딸랑 울리는 종들이 설치되었다고 봅시다. 그리고 조심히 가다가 율법 하나를 탁 쳤다고 칩시다.
톰크루즈가 비밀 금고를 터는데 레이져 광선 쏘니까 온 폼을 다 하면서 마구마구 무작위적으로 있는 선 사이를 들어가서 기어이 비밀무기를 탈취하잖아요. 심지어 땀방울 흐르는 것도 탁 손으로 잡잖아요. 땀방울 흘리는 것도 무게가 감지되면 비상 걸리기 때문에 땀방울 흘린 그걸 손으로 탁 받아낸다고요. 공중에 떠가지고 비밀 금고를 터는데. 묻습니다. 율법에는 우리가 그렇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저주 받으라고 이미 규정한 율법이기 때문에 아무리 틈새를 노려도 그 틈새를 보면 적외선에 다 걸리게 되어있어요. 어떤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이미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그걸 확인 차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 지키면 저주에서 벗어날 거라고 오해한 겁니다.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게 뭡니까? 행함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 관리한 거예요. 자기가 자기 이름 건사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 지키는 당사자가 구원받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율법 지켜서 남이 구원받지 않고 율법 지킨 당사자만 구원받는 그런 식으로 율법을 이해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게 어긴 게 되고 만약 하나를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를 지키면 모든 것이 다 지킨 게 돼요. 문제는 어떤 인간도 단 하나의 율법도 못 지켰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양적이 아니고 질적이기 때문에. 서로 딸랑딸랑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를 어기면 온 천지가 율법 어긴 자에게 나오는 저주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제 이야기입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 이야기죠. 하나를 어기면.
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생각 안하고 자기 구원에 성급할까요? 그것은 평소에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내가 납득되는 쪽으로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아까처럼 그렇게 되면 ‘겨우’라는 말이 무의미해지죠. ‘겨우’라는 말은 정상적인 인간 같으면 구원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특별조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게 ‘겨우 구원’이에요, 겨우.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구원되는 조건은 인간이 이해되도록 사전에 상의하고 협의해서 구원이 되는 조건을 준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차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내가 요청하지 않더라도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율법의 완성이니까 저주 없는 진짜 구원이 우리에게 차고 들어왔으면, 정말로 차고 들어왔으면 그 사람이 예전처럼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관리 안하죠.
정말로 율법이 들어왔으면, 내가 다가가는 식으로 내가 말씀 지키고 예수 믿는 식으로 왜 구원이 안 되는가. 내가 예수 믿는 식으로는 왜 구원이 안 되는가. 주님이 찾아와야 구원되지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믿음 가지고 다가가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실행하는 행함에 속한 가짜 믿음이에요.
진짜 믿음은 결과적으로 쳐들어온 결과로서의 믿음이거든요. 내가 구원의 결과물이 되어야 되니까. 만약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차고 들어와서 구원을 했다면 우리는 졸지에 나는 ▭다. 나는 애초부터 바닥이었구나. 이걸 고백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말이죠. 나는 애초부터 바닥이었어요, 애초부터. 내가 관리하나 안하나 애초부터 주님 보시기에는 1cm도 못 떴어요. 이 저주의 바닥에서. 이 밑창에서 1cm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세 번째 묻습니다. 노아의 고향에 홍수물이 들어찼습니까, 안 찼습니까? 이제는 답변해주세요. 들어찼죠. 무슨 뜻입니까? 방주 없이는 너도 똑같다. 방주 없으면 너도 똑같아. 방주는 외부적인 거예요. 노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만들라는 말은 네가 만든 것 타고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그것으로 인하여 너는 전에 방주 없을 때 네가 살던 네가 네 관리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종쳤다는 거예요.
전에 알던 내가 아니에요. 율법 안의 나 또는 말씀 안의 나, 십자가 안의 나는 전에 알던 내가 아닙니다. 새로운 환경, 조건 속에서 내가 이미 죽은 자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죽은 자로. 죽은 자가 존재되어버리면 어제도 죽었죠. 주님께서 어제 죽은 나를 살려줬거든요. 오늘도 죽었는데 주께서 살려줬죠.
그러면 죽은 내가 미래까지, 내일까지 연속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건 내 뜻이 아니죠. 내일 살려줄지 안 살려줄지 그건 누구 소관이에요? 누구 관리입니까, 누구 책임입니까? 그건 일방적인 주님 관리 하에 있죠. 내가 내일까지 살려달라고 주께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나에게 없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아무 소리 못하거든요. 아무 소리 못하면 주는대로 받아먹고 감사해야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면 우리가 감사 못하는 이유가 내일 때문에 그래요, 내일. 지금 로또 한 20억 들어왔다고 좋아하는데 문제는 내일 사촌동생이 와서 투자한다고 돈 빌려달라고 할 수도 있고 옛날 내가 신세졌던 친구가 와가지고 너 어려울 때 내가 도와줬잖아. 너 이번에 로또 탔다면서? 나 어려우니까 나 도와줘. 이럴 수 있잖아요. 뜯어가는 사람이 더 많아. 복권 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뜯어가는 사람은 200명이네. 안 그러면 깡패가 와서 돈 안 주면 너 확 불싸질러버린다 해서 할 수 없이 정든 고향 버리고 이사 가야 되네. 로또 당첨되고 이사 가기. 전화번호 다 바꾸기. 왜 그런 것 합니까? 오늘은 20억 있는데 내일은 20억 있을지 없을지 보장이 안돼요. 보장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일 몸은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내 몸도 아닌데 걱정은 누가 합니까? 내일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일의 주인공도 아닌 나를 오늘을 사는 나가 쓰잘데기 없이 내일까지 걱정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이런 부질없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이름을 바꿔야 돼요. 바닥이라고. 김바닥 최바닥. 늘 바닥이에요. 바닥이니까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바닥일 경우에는 감사 안할 게 없어요. 아픈 것도 감사하고 돈 없는 것도 감사하고. 모든 게 감사죠. 누가 나를 욕해도 감사하죠. 나는 이미 기생충이니까. 내 이름이 없으니까요.
나는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율법 앞에 대면 십자가 앞에서 내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누구 이름으로 살아갑니까? 주의 이름으로 살죠. 그럼 애가 공부 못하는 것도 누가 공부 못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공부 못하게 하신 거예요. 살짝 짜증나지 않습니까? 왜 살짝 짜증이 나냐 하면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공부 못하면 내일 어떻게 되겠나, 또 내일 생각한다고요. 내일이 있으면 지금이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지금이 만족스럽고 감사하지를 못해요. 아직까지 성신과 성령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타락을 언급할 때는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구원받기 전부터 타락했음을 인정해줘야 되죠. 구원받고 난 뒤에 아, 처음 구원받을 때보다 타락했다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에요. 구원 받았다는 말이, 자기의 본모습이 아무리 노력해도 1cm도 이 타락의 자리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에요. 율법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되비추기 때문에. ‘나는 죽은 자구나’라고 아는 것,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저주받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보고 ‘너는 저주받은 존재야’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복음은 우리를 저주케 하는 복음이에요. 우리를 붕 뜨게 만들고 허영심 집어넣는 복음은 저주받은 복음이에요. 바닥에 있는 존재가 진짜 내 본모습이 바닥을 기고 있는데 누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바닥을 기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고마워하고 감사해야죠. 뭘 그걸 기분 나빠해요.
홍시를 홍시라 하는데 그거 기분 나빠요? 홍시를 홍시라 하는데 왜 홍시냐고 물으시면 나는 어떻게 대답하죠. 죄인을 죄인이라 하는데 왜 거기서 궁시렁궁시렁 지구는 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요? 지구 도는 것하고 너 죄인 안 되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아무 관계없어요.
율법의 압박감이 그 정도에요, 율법의 압박감이. 율법의 압박감은 우리한테만 주어진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도 주어졌어요. 율법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지요? 저주 받았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성경적 문자 나온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보세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지요. 그럼 십자가는 뭡니까? 율법에서 완성이 된 것이 십자가지요. 율법에서 저주 받았으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뭐가 됩니까? 율법에서 저주 받았으면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앞에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저주 아래에 있는 거죠. 나의 이름은 죽고 내 이름을 죽이게 한 그 분의 이름만 살아나는 거죠. 주의 이름이 살아나려면 그 전에 내 이름은 작살나고 박살낸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답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첫째 시간과 연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왜 우리는 자꾸 자기를 관리하려고 합니까? 내일이 있기 때문에. 내일이 자꾸 기다려지기 때문에. 오늘로써 인생 종칠 게 아니기 때문에. 내일 또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내일 또 산다는 그 예측과 기대감 때문에 삽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겁니까? 아, 이거 문제 쉬운 문제다, 정말. 아니 지금 우리가 느낌적인 느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사실이 뭐냐는 거예요. 어떤 느낌이십니까 묻는 게 아니고 사실이 뭐냐.
우리의 생명은 무엇이뇨. 코에 있다. 주께서 생명 끊어버리면 우리는 그냥 숨 거두어지면 죽는 거예요. 그 숨의 주도권은 주님이 갖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상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그게 율법 아닙니까.
그럼 율법 앞에 선다는 말은 주께서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는 그 대상체가 누구다? 그 말씀이 실효성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대상으로 불려나온 사람이 누구다? 나죠. 우리 자신들, 성도들이죠. 구원받은 자죠. 그러면 우리 구원받은 자에게 율법의 내용이 여기 가득 도착해있어야 되죠.
그럼 우리의 고백은 뭡니까? 오늘도 사는 것은 주께서 살도록 허락하신 조치에 의해서 살았습니다. 그 고백을 하면 되는 거죠.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은 결국 내 나름대로의 소원이나 요구조건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바닥이에요. 바닥이니까 내일 내가 산다는 기대는 할 수 있지만 그 기대는 사실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팩트가 뭐냐 하면 나한테 내일은 없는 겁니다.
이 이야기 듣고 오늘 밤에 가셔가지고 햄버거나 피자 사가지고 엄마, 웬일로 맛있는 피자를 오랜만에 사왔어? 너 오늘 나하고 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에 아름답게 맛있는 걸로 끝내자. 엄마, 언제까지 끝내는데? 오늘 12시까지만 끝내자. 12시 넘는 것은 주의 소관이야. 심야영화, 그거 주의 소관이 아니면 못 봐. 여기까지 먹고 주님의 제단, 율법의 제단 앞에 우리의 몸을 드리자. 어떻게 드려요? 자면 돼. 그냥 의식 잃어버리고 자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눈 뜨거든 다시 율법의 제단에서 살아난 줄, 부활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내일되면 또 주어져요. 내가 이거 해야지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명령내리는 거예요. 아침에 눈을 떠서 주님 오늘은 뭐할까요? 그냥 놀까요? 오늘 트롯트 듣고 놀까요? 그것도 주의 지시죠. 주의 지시 아닌 게 없어요. 만약에 내가 나에게 명령한다면 책임을 누가 져야 돼요? 내가 져야 되겠죠. 내가 지면 옆에 십자가 완성, 율법의 완성, 십자가 또는 율법이 나를 어떻게 하겠어요? 이거 저주받은 인간이 왜 이리 오늘 까불고 난리야. 이렇게 되겠죠. 오늘 더 향상된 생활하겠습니다. 뭘 향상돼? 바닥인데. 율법 앞에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또 제목 바꾸고 싶다. <입이 백 개>.
구약에서의 율법의 잘림이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율법을 못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꾸 지연시킵니다. 그래, 못 지키지? 대책 마련해놨어. 그럼 이것은? 그것도 못 지키나. 그럼 이렇게. 예를 들면 율법을 못 지키잖아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못 지켰으니까 율법대로 하면 저주 받아서 망해야 되죠. 그런데 이스라엘에 이방 여인 룻을 보내죠. 룻의 4대손이 누구입니까? 다윗 보내잖아요. 모든 책임을 다윗 중심 제도로 바꿔버려요. 마치 제사장 중심으로 바꾸듯이. 바꿔버리면 다윗 왕이 멀쩡하면 백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기들이 다윗 왕 때문에, 다윗과 하나님과의 왕적 계약 때문에 그들은 혜택을 입게 됩니다, 혜택을. 그러니 다윗 왕이 일종의 세상 죄를 지고 간 어린양 같은 존재에요.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바닥이고 저주 받아야 되는데 놀랍게도 저주받아야 되는 우리에게 십자가 소식이 들려오잖아요. 그러면 내가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율법의 완성, 십자가가 나라는 외형을 통해서 그 내용물이 끊임없이 구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다 널리 전하는 겁니다. 이 문장이 어렵죠?
방금 한 문장을 강남강의에서 했어요. 어떤 내용물이 있는데 내용물이 자꾸 퍼지다보면 외형이 생긴다는 말이죠. 공기 중에 굳어진 이 외형. 외형이 우리 자신이에요. 그럼 우리 안의 내용물이 되는 십자가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주님의 지시에 대해서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면 그 형태가 우리의 외형이 되는 겁니다. 남자든 여자든 뭐 나이가 오십이든 사십이든 관계없이 그것이 남들 보기에는 그냥 보통사람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안에 내용물이 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예수의 증인 되겠죠.
지난 낮 설교에 했지만 골로새서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능력이 사도바울 안에 들었다 했죠. 그럼 눈에 보이는 사도바울은 뭡니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의 외형물이 되는 거예요. 이건 어렵지 않죠? 다시 말해서 나의 내용은 나의 관리 하에 있다, 없다? 내 관리 하에 있지 않습니다. 밀리는 거예요. 내용물에 의해서 밀려서 내가 된 거예요. 참 쉽죠잉? 굉장히 쉽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안 들어올 때는 내 내용물은 누구 관리 하에, 누구 책임 하에 있습니까? 나의 책임 하에 있죠. 나의 책임 하에 있기 때문에 항상 내 가치, 내 잘남, 나의 훌륭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느냐 하면 내가 나한테 명령하고 내가 나를 관리할 수밖에 없어요. 안에 있는 내 내용물은 내가 평생을 통해 일구어낸 나의 모든 노력과 희생과 아픔과 그리고 애씀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못 버리는 거예요, 아까워서.
만약에 자식이 다섯 명 있는데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여자가 혼자서 어떤 직업을 하든지 간에 시장에서 무슨 일이든 해가지고 애 다섯 명 대학 다 보냈다. 그런 분들 있어요. 물론 자식들 보면 다른 이야기하겠지만 엄마는 내가 자식들 키웠다는 거예요. 자식들은 지가 아르바이트했다 하고.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째든 다 키웠다 합시다. 그 자기자식을 내 자식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자식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자기의 성과와 공로와 희생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앞에서 노아의 홍수 앞에서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 덮친 불 심판 앞에서 그것이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하죠. 그 아줌마가 요구하는 것은 뭐냐. 내가 자식 5명 키웠다는 그 공로를 인정하는 조건 하에 나를 천국 보내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그 아줌마만의 생각일까요? 그 아줌마의 생각일까요?
어떤 여자가 있는데 남편한테 충성봉사 다 했어요. 남편이 너 사랑한다는 말만 믿고 충성봉사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여자를 배신했어요. 그럴 때 그 여자가 자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합니까? 눈물 찔찔 흘리면서 하나님 제가 뭐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하나의 가정주부만 되도 저는 더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보통 사는 삶만 살게 해 달라 하겠죠. 여러분 보통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기적을 받아야 가능한 거예요. 그저 보통 사는 삶이에요. 상식이 통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인간은 율법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사람을 원합니다. 다르잖아요. 구원의 내용 자체가 달라요. 다릅니다. 겨우 구원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께서 엉터리 교회를 계속 만들어내시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그래야 겨우가 작년도 겨우고 올해도 겨우고 계속 겨우 겨우의 말씀이 실효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 17절에 보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하나님의 집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 없다. 겨우라는 원칙을 내가 적용시키겠다. 그냥 율법=심판, 십자가=심판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뭐 어려운 것 없어요. 십자가는 심판하는 심판 용도. 그걸로 끝난 거예요. 인간은 중립이 아니고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심판이 들어오는 거예요. 더 이상 네가 너를 관리하지 말라고. 이게 되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발상의 전환을 하면 안 어려워요.
찔찔 울지 말란 말이죠. 좋아서 우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것은 박수칩니다. 내가 바닥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좋은데 절통하고 원통하고 분통하고 하여튼 통증은 다 있는, 통증은 다 쏟아내 가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우는 그 짓하지 마세요.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있어요.
자신을 율법 앞에서 주님의 언약 앞에서 모세 언약 앞에서 다윗 언약 앞에서 안 세워서 그래요. 십자가 앞에서 세우지 않아서 그래요. 아까 저울 이야기 했잖아요. 아침 눈만 뜨면 모든 관심사가 내가 나 살리기에 온통 신경이 다 쓰여져요. 관심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 말은 과연 내 안에, 내 내용물에 복음이 들어왔는지 그게 의심이 될 정도에요. 내 안에는 내가 얼마나 귀한 것들만 들어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 귀한 것들 율법에 작살납니다.
성신과 성령의 공통점이 있어요. 성신과 성령의 공통점은 둘 다 언약을 지킨다는 겁니다. 언약을 지킨다. 지난 수요설교 때 한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유명한 말이죠, 창세기 3장 24절. 여기는 생명나무 있고 여기는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의 두루 도는 화염검, 불 칼이 어느 쪽을 지키기 위해서 어느 쪽을 배척하기 위해서 불 칼이 있습니까?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나무를 지키는 겁니까? 아니죠. 생명나무를 지키는 용도로써 불 칼이 있는 거죠. 인간이 들어올까 싶어서 악마가 들어올까 싶어서 지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성신과 성령의 공통점은 둘 다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나의 구원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을 지키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성된 구원을 지키는 거예요. 너의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안에 박혀야 우리 구원이 되잖아요. 박혀있는 그 예수님을 성령이 보호하는 겁니다. 성령은 오직 나에 대해서 증거 한다고 했거든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는 것은 나 잘났다가 아니라 예수님 자기 잘났다. 예수님은 정당한 거예요. 율법을 완성했기 때문에 정당한 거예요. 이와 같은 말이 나를 배척한 인간들은 정당하지 않다를 증거 하는 용도가 성령이죠. 그러니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정당하지 않다를 그냥 우리에게 퍼붓는 거예요. 너는 정당치 못하다. 먹는 것 마시는 것도 정당치 못하다. 오직 예수님만 정당하다. 예수님 안에서 너의 가치를 따로 그 내용물에 섞어 넣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차이점은 뭐냐. 구약에서는 언약이 종결되지 않았거든요. 언약이 계속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처음에는 노아 언약,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 언약이죠. 이런 말이 좀 어렵거든요, 사실은. 그런데 구약의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다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이고 지리적으로 제한적이에요. 만약 지금도 아브라함 언약 믿어서 구원받으려면 우리는 비행기 타고 이스라엘 가야돼요. 어려워요, 그거. 돈 없는 사람 비행기 타고 가지도 못하잖아요. 제한적이에요, 제한적.
구약의 아브라함언약이나 다른 언약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구원의 한계, 테두리를 이미 정해버렸어요. 오직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대상에 list에 후보감에 들어가 있다 이 말이죠. 이런 게 참 골치 아픈 이야기죠. 왜냐하면 할례언약이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구분하기 위해서 할례언약을 줘버린 겁니다. 할례언약이 아브라함언약이거든요. 누구든지 할례언약을 받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고 내 거룩한 곳에 올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할례언약이 아브라함과 이방인을 가려냈다면 할례언약의 확대가 바로 모세언약이에요. 모세언약 가운데 이미 할례언약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할례언약만이 아니에요. 계속 추가적으로 뭔가 미진한 것이 남아있어요.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은 몰라요. 다만 성신께서 추가적으로 다음, 다음 다음의 언약들을 미리 예보해줍니다. 일기예보 하듯이. 예보하기 위해서 성신 받은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지자.
그럼 선지자는 무엇과 대립되느냐 하면 기존에 내려왔던 율법을 준수했다고 여긴 사람들과 대척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따라서 율법만 있으면 돼.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성신이 미리 예보하는 또는 성신이 예언하는 사람의 말이 무시되는 거예요.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니까. 성신은 예수 십자가 최종언약을 향하여, 백성들을 분리해서 이끌기 위해서 계속 추가적인 언약을 예고해주시는 거예요. 예고한다는 말은 기존에 있는 사람들에게 낯설게 들리죠.
그러면 성령 안에는 이러한 요소가 완성된 채로 성령 안에 들어옵니다. 성신의 이 기능을 성령께서 어떻게 이루느냐 하면 ‘이미 다 이루었다’를 이 어두운 시대에 성도를 선지자노릇으로 만드는 거예요. 앞으로 이렇게 된다가 아니라 이미 다 이루었다는 그것이 선지자의 예언이 되도록 말씀이 되도록 말씀이 곧 현실이 되니까 이것이 현실이 되도록 자기 백성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백성은 없어요. 이미 구원되었기에 확정된 구원의 기능이 성도를 통해 계속 번져 나오고 발휘되는 겁니다. 여러분 형광등의 외형이 있죠. 몇 cm짜리, 몇 cm짜리 유리관이 있죠. 그러면 몇 cm짜리 유리관이 있으면 그걸 형광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형광등의 본 기능은 형광등 모양을 하는 등이 있다고 형광등이 아니고 불이 켜져야 되잖아요, 불. 이 어두운 세계에 불이 켜져야 되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이 밝다고 할 때 ‘아니야 결코 밝은 것이 아니야’ 어두움이라고 세상의 빛과는 다른 빛을 발산해주는 기능이 오늘날 선지자 기능을 하는 성도입니다.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내용물로 들어있는 거예요. 성도는 다 이루었기 때문에 뭐 구원 챙겼는데 나 아무것도 안한다가 아니라 성신과 달리 성령께서는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성도를 통해 계속해서 증거 하게 하는 거예요. 제자리 뛰기 하는 거예요.
끝으로 성신을 받지 못한 사람의 말로, 성신을 받았다가 받지 못한 사람의 말로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사무엘상 28장에 나오는데 수련회 때는 그 대목을 시간관계상 설명을 다 못했어요. 사무엘상 28장 21절에 보면,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이것은 수련회때 자세히 설명 안했어요. 이게 무슨 대목이냐 하면 여자 무당이 사무엘 만나고 지 인생 종쳤다는 것을 알 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절한 거죠. 쉽게 말해서 혼쭐난 겁니다. 내일에 희망을 품었는데 내일이 오든 모레가 오든 한달 뒤가 오든 시간의 경과와 아무 상관없이 이미 끝났어요. 아말렉에 대해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그걸로 이미 인생 종쳤어요.
이것을 9강에 설명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현재는 아말렉이 아니고 십자가죠. 십자가로 운명이 이미 확정 되었어요. 확정 난 확정일자 받아놓고 끝나버렸어요. 인생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구분되었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이 현실로 이미 드러나 버렸어요. 그러면 주를 사랑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야 구원이 되니까. 주를 사랑하는 자는 이미 그 사람의 운명이 확정되었습니다, 천국 가기로.
따라서 처음에는 사울이 성신 받았잖아요. 지금 성령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 이야기 하는 중입니다. 성신을 받았는데 선지자가 누구냐 하면 사무엘이죠. 사무엘 말을 안 들었잖아요. 안 들었을 때 성신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언적 기능을 갖고 있죠. 다시 말해서 기존이 마감이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사울은 기존에 내가 왕인데 이만하면 됐지 하고 멈췄죠. 그러니까 성신 자리에 성신 대신에 성신의 반대말, 악신이 들어가죠. 인물로서는 사울 대신에 다윗이 들어가고. 영적으로서는 성신 자리에 악신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하고 사무엘상 28장 이 대목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게 혼쭐이 난 거예요. 정신이 나가버렸잖아요. 확정되었으니까. 확정된 입장에서 누가 옆에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독려해줄 수 있느냐.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이미 저주받기로 확정된 자가 있어요. 그게 바로 무당 여인이에요. 신접한 여인입니다. 신이 접한 여인이에요. 그러면 사울이라는 이스라엘 왕은 사실은 이스라엘 왕이 아니고 신접한 여인,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는 자와 한통속이 되어서 도움을 받게 돼요.
쉽게 말해서 우리 둘이 한 패아닙니까. 같은 쪽인데 내가 주는 떡이나 먹고 기력이나 회복하소서. 우리는 같은 동네 사람인데 왜 이러세요. 당신이 나를 살려줬잖아요. 당신이 나를 살려줬다는 말은 스스로 내 편이라고 이야기한 것 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무엘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냥 떡이나 먹고 기력이나 회복하소서. 이게 사울이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드디어 마지막 장 31장에 보면 자기 집안 전체가 율법 없는 자의 손에 죽어버려요, 율법 없는 자의 손에. 이스라엘에서 탈락한 겁니다.
구약에는 탈락이 가능해요. 성령이 아닌 성신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러면 신약의 성령 때는 왜 탈락이 불가능하냐.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바닥을 친 자로 뭐 추락할 것도 없어요. 매일같이 우리는 추락되었음이 십자가 앞에서 확정되어지기 때문에 그 인간 속에다가 십자가의 의미를 담아낼 수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의 의미가 두 가지거든요. 모든 인간은 저주받는다. 예수님도 저주 받았으니까. 두 번째로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한 자는 이미 율법 완성의 혜택을 입는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바로 성령이 들이닥칠 때 눈이 열리면서 나도 새롭게 보고 세상도 새롭게 보고 우주도 새롭게 보고 교회도 새롭게 보고. 아, 이게 전부다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니었구나. 나는 다만 주님 하시는 일의 결과물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겨우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그 겨우 속에 다른 말로 하면 기적적으로 성령이 임해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내가 죄인이고 바닥인 것을 도리어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이 용서받음을, 세상 살면서 내 인생에 어떤 굴곡이 온다 할지라도 이 기쁨을 훼손하지 않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랐었습니다. 율법을 업신여겼고 십자가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래놓고 무슨 신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성령께서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겨우 받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혜택을 입은 자라는 것을 또다시 알고 감사케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