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0218a 베드로전서4장 18절(겨우 구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7절-19절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여기 18절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구원은 건져냄이죠. 그러면 구원을 둘로 생각해봅시다. 첫째,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부탁한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좀 구원해달라고 누가 요청한 적 있느냐는 말이죠. 없죠. 인간은 구원을 요청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아서 사는 자들이에요.
인간세계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은 누가 나를 구원하는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입니다. 내 가치를 완전 개무시하는 거죠. ‘당신 구원받아야 된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너는 인간도 아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욕을 해도 우회적으로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욕하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오늘 본문에 구원에 대해서 앞에 어떤 부사가 붙어요. ‘겨우’ 구원받는다 했죠, 의인도. 여기에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죠. 누가 구원을 해달라고 했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들이 늦게 들어오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너 집에 들어오길 기다리느라고 저녁에 나 겨우 밥 한술 떴다.”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시다. 그럼 아들이 엄마보고 퉁명스럽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밥 잡수시라 했잖아요! 겨우 한술 떴다고요? 밥 먹지 말라고 누가 말렸어요? 내가 오든 말든 그냥 잡수세요, 어머니. 내 핑계대지 말고. 내 걱정한다 하지 말고.”
‘아니 누가 구원해 달래? 나는 당신한테 그런 구원 같은 거 요구하지도 않고 나한테 나의 구원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나의 일상 자체가 누가 외부에서 나를 건져주는 일상으로 나는 살아간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라고 인간들은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알아서 인생 내가 사는데. 그게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라는 뜻 아니겠어요?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인생 주인이 누구에요? 나 말고 있습니까?
심지어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밥 먹여줘도 자기가 주인이래요. “엄마 아빠가 너에게 밥 먹여줬잖아.” 그럼 애들이 뭐라고 합니까? “입은 내가 벌렸잖아요.” 아무리 도와줘도 최종의 주도권은 남한테 빼앗기기 싫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주님의 뜻은 뭐냐. 바로 그 본성에서 구원하라는 거예요, 본성에서.
사람은 측정하거든요. 내가 행동할 때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오나 미리 측정한다고요. 그러니 측정한다는 자체가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뜻이에요, 내 관리는. 그럼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해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겠다면 흔쾌히 내가 도와줄 용의가 있습니다.’ 이래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아이디어가 평소에 ‘나는 이렇게 구원되고 싶습니다.’ 하는 아이디어와 연결되고 내용이 일치가 된다는 뜻이죠. 그렇게 되어버리면 ‘겨우’ 이것이 성립 안 된다고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아 혹시 너희들 가운데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러면 “저요!” 손들죠. 손들어버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 가게 해주고 영생 얻게 해준다 할 때 그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듭니까, 안 듭니까? 둘 중 하나인데. 마음에 들어요, 안 들어요? 마음에 들죠. 아니 죽어서 천당 가는데 싫어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마음에 들죠. 마음에 들어버리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겨우’가 성립 안 된다고요, 겨우가.
나라에서 “1인당 재난지원금 500만원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사람 있습니까?” “아이 나 500만원 짜증나서 못 받겠다. 너무 작아서 못 받겠다.” 이런 사람 있습니까? 전부다 “저요, 저요.” 하죠. 오늘 설교제목을 <저요>로 할까요. 저요 저요 하면 500만원이 겨우입니까, 아니면 대다수에요? 진짜 집이 재벌이어서 껌 값도 안 되는 그걸로 괜히 생색내지 마. 이런 사람들 빼놓고. 이것은 겨우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대다수가 구원 받죠.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에 필요한 그 장치와 내용과 구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이디어이며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과는 공통점이 일체 없다는 거예요. 그게 ‘겨우’에요, 겨우. 사람이 납득이 되고 사람이 동의가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한다, 안 한다? 구원을 안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 아이디어여야 돼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는 아이디어여야 돼요.
인간이 납득되고 이해되는 구원을 하나님께서는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구원’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구출되려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 방식으로 구출이 되어야 제대로 된 인간 자체가 구원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시는 것하고 내가 아는 것을 같이 협의하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구원이 시작되는 그 구원의 아이디어가 인간이 살아가고 인간이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관리하는 그 가운데에서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 믿어질까, 십자가 피 믿을까 이런 것 있잖아요. 이것은 누구 아이디어에요? 성경에서 준 그 내용을 가지고 내가 낸 아이디어죠. 아, 오케이. 주님께서 이런 구원을 주셨구나. 가만 있어보자. 이거 괜찮네. 오케이 콜. 내가 수용하겠습니다. 이게 인간의 구원이에요. 인간의 구원이라고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오케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입니다. 거기에 인간 자체가 다칩니까, 안 다칩니까? 안 다치죠. 구원받겠다는 인간 자체의 생각이 하나님 앞에 부정당합니까, 아니면 긍정적으로 하나님이 인정할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긍정적으로 인정할 거라 생각하죠. 이게 무슨 구원입니까? 이게 무슨 구출이에요? 그건 구원이 아니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이 시작되는 그 구조, 그 상황은 하나님만이 아는 상황이고 구조에요.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황, 구조에서 나오는 나름대로의 구원 있잖아요, 죽어서 천당 가는 것. 그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성경구절가지고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성경구절 가지고 자기가 구원받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자기가 만들어낸 거예요.
구원이 시작되는 그 환경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시작점이 달라요, 시작점이. ‘겨우’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얼마나 이질적이었으면 ‘겨우’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얼마나 이질적이었으면.
언젠가 제가 유튜브 강의에서 한 것을 다시 한 번 해보면 노아 당시에 홍수가 일어났죠. 그 홍수가 노아가 살던 곳에도 물이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집사님? 노아 홍수의 물이 노아가 전에 살던 자기 집, 거기까지 물이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성경에 나오죠. 지구상에 모든 물이 덮이죠. 그럼 노아가 살던 그 곳에 물이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들어오죠.
그럼 또 하나 묻겠습니다. 출애굽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예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요. 들어왔어요, 안 들어왔어요? 살던 그 골목에 하나님의 그 죽음의 사자가? 들어왔죠.
그럼 다시 묻습니다. 노아가 살던 그 고향이 있죠. 그 고향에는 홍수물이 안 들어온 게 아니고 들어왔죠. 그럼 노아가 그냥 있었으면 물에 빠져 죽었어요, 살았어요? 물에 빠져 죽잖아요. 노아는 당대 의인이라면서.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서요. 그러면 우리 보기에는 착한 사람이잖아요. 착한 사람인데 자기 집에 물이 왜 덮칩니까, 죽으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저 괜찮지요? 저 보호해 주실 거죠?’ 라는 구원이 아니고 죽이고 죽이고 다 죽이는 거예요. 다 죽이는 거예요. 그럼 무엇을 구원하는가. 방주 자체를 구원해요. 방주 자체를 구원하는데 방주가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 말이죠. 언약 자체를 구원하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기 때문에 예수 안이 방주 같은 역할을 해서 예수 안에 있는 자만 구원이 되죠.
그러면 내가 살던 이 고향은 예수 안입니까, 아닙니까? 나의 살던 고향은 예수 안이 아니죠. 예수 안이 아니면 심판의 대상이고 저주의 대상이죠. 이 말은 우리가 구상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지요. 왜?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내가 나를 관리하는 데에 급급하기 때문에, 온통 관심사가 거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저울 한번 그려볼게요. 저울 달아보겠습니다. 여기 저울이 있고 물건을 올려 놓는 데가 두 군데 있다고 합시다. 왼쪽에 ‘내가 나를 관리한다’는 관심사, 오른쪽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관심사. 무게 달아 봅시다.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오늘 전부다 침묵시위하기로 작정했나.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답변하기 곤란합니까? ‘내가 나를 관리한다’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평소에 하루 일과를 여기에 치중합니까, 아니면 ‘주님이 특이하게 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서 빼내려고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느 쪽 무게가 더 나가느냐. 어느 것에 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왼쪽이 더 무겁겠죠. 그럼 왼쪽은 더 내려가고 오른쪽은 힘없이 그냥 위로 올라가겠죠. 구원하나마나 난 신경도 안 써, 난. 지금 내 가정 이것도 바빠. 내 가정을 내가 관리하기 바빠요. 그 중에 자기 몸도 들어있고. 쌍꺼풀 수술 할까 말까. 지금 거기에 관심이 있다니까요. 살을 몇 키로까지 빼야 돼. 여기에 지금 관심이 있어요.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이건 본성이에요, 본성.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니까요.
왼쪽이 더 무거워요. 온통 관심사가 여기 있다니까요. 내가 내 인생 관리하고 너는 너 인생 관리하고 나중에 어느 인생이 관리 더 잘했는지 배틀, 시합 한번 붙자.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다가 예수님이 너를 구원한다 하니까 오케이. 예수님 구원을 받아들여요. 예수를 받아들이는데 내가 내 인생 관리하는 것은 건드리지 말고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식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이렇게 결합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결합이 됩니까? 나의 존재+예수님의 존재가 가능합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하나님의 존재와 내 존재가 결합이 되면 죽어요. 모세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감히 못 봤고 하나님께서 손으로 덮어서 나를 보고 살 자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구상하고 생각하는 그 구원은 내가 생각하고 만들어 낸 구원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더러워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더럽습니까? 묻죠. 너는 너한테 정신 팔려 있거든요. 온통 내가 사는데 정신 팔려 있다고요. 죽어서 천당 가는 데에 정신 팔려 있다고요. 본인을 안 놓치려고 해요. 본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본인을 안 다치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타고났어요, 이것은. 타고났다고요.
오늘 본문에 보세요. 겨우. 이 ‘겨우’라는 말은 어디에 썼느냐 하면 노아 홍수 이야기입니다. 앞에 노아 홍수 때 몇 명 구원받았다고 했습니까, 베드로전서에서? 여덟 명. 이 얼마나 겨우 입니까. 3장 20절. ‘여덟 명’ 앞에 부사가 붙죠. 많은 여덟 명이 아니고 ‘겨우’. 고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노아를 통한 구원 방식은 인간들이 이미 익히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구원의 방법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방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면...... 인간들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 하에 두면서 나름대로 자기가 구상하는 자기의 구원방식이 있어요. 오늘 강의 주제에 제가 서서히 접근해가려 하고 있습니다. 접근해가려고 하는 이 테마를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구원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환경에서 나오는 구원. 하나님의 환경, 조건에서 나오는 구원.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조건이 들어있는 그런 식의 구원.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구에 충족하다고 기뻐하시는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조건이 유지되는 조건 하의 그런 구원. 두 번째는 인간들의 자기 관리 또는 자기 책임 하에 내가 되고 싶은 이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구원.
길었습니다만 하나님이 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 차 있는 구원과 두 번째는 자기 관리 하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싶다는 이 조건이 손상되지 않고 유지되는, 충족되는 조건 하의 구원. 구원이 이 두 가지에요.
그러니까 신이 나를 구원하더라도 이 조건은 건드리지 마라. 이걸 탓하지 마라 이 말이죠. 신이 나를 구원하더라도 나도 내 인생 내가 살고 싶은 그 최소한의 기쁨과 보람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내가 비참한 가운데 구원되기는 싫다는 거예요. 구원될 때 부자 되고 난 뒤에 천당 가고 싶지, 내가 강도로서 구원되는 것, 그것은 나한테 거부당할 시나리오라는 겁니다.
내가 세리와 창녀 되어가지고 구원받는 것 있잖아요. 그것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하나님보고, 나한테 결재 다시 올려라. 내 가치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서도 죽어서는 천국 가는 그런 결재안을 나한테 다시 올리게 되면 내가 땅땅 동의하는 도장 찍어줄 테니까 그런 구원이 나한테 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누가 만든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가 지어낸 거죠. 인간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환경에서의 만족스러운 구원은 어디서 나오는 구원이냐 하면 율법에서 나온 구원입니다. 율법을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언약에서 나오는 구원이죠. 노아 언약이 대표적인 거죠. 아까 질문 다시 안 해도 되죠? 노아가 평소 살았던 고향에도 물이 들어왔느냐. 그 물은 어떤 물이냐 하면 심판의 물이거든요. 노아가 살던 그 동네에도 심판의 그 무서운 홍수 재앙이 들어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들어왔죠.
그럼 다시 묻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던 그 동네에도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들이 집집마다 들이닥쳤냐 하는 문제입니다. 들이닥쳤죠.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 것은 인간성 보고, 아이고 네 인생 알아서 네가 열심히 살았네, 그것보고 넘어간 게 아니죠. 그럼 내가 평소에 나 다운 것 있잖아요. 그걸 죽음의 천사가 봤다는 이야기입니까, 안 봤다는 이야기입니까? 안 봤다는 이야기죠. 고려했다는 이야기입니까, 고려 안했다는 이야기에요? 전혀 고려 안했죠.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보고 있는 것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리는 단지 그 조건에 의해서만 그 집안을 안 죽이고 그냥 넘어갔잖아요. 그 조건, 어린양의 피가 점점 더 구체화되면서 내용이 깊어지고 가미되면서 주어지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율법이 드디어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나중에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그 때부터 율법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광야에 갔을 때 목적지가 있어요.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그 목적지가 시내산이에요. 시내산까지 가서 다른 사람들은 못 올라가고 모세만 올라가죠. 모세가 관광하고 구경하러 갔습니까? 하나님 얼굴 보러 갔습니까? 뭘 받아왔죠. 하나님이 만족하는 조건을 받아온 거예요, 하나님이 만족하는 조건을. 그 조건이 율법이죠. 십계명이잖아요. 그럼 조건은 딱 정해졌습니다. 이 십계명대로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겁니다.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관리하고 싶은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 구원의 상태에 자기가 협조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돕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인간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게 뭡니까? 영생 얻는 거죠. 영생 얻고 안 아프고 편안하게 살고 행복한 것을 원하죠.
그럼 그 조건은 하나님이 주신 조건입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기대 거는 조건이었어요? 오늘 이거냐 저거냐 묻는 게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본인이 원한 거죠. 이것이 본인의 본성에 위배돼요, 본인의 본성에 위배되지 않는 구원을 원합니까? 내가 평소에 나한테 기대하는 본성과 합치되는 구원을 원했죠.
그러면 묻습니다. 오늘 자꾸 묻는데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본인에게 법을 제시합니까, 법을 제시 안 합니까? 또 묻는 거예요. 인간은 자꾸 자기에게 법을 제시해요, 제시 안 해요? 인간이 자기 책임 하에 자기 관리한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자기한테 법을 제시합니까? 규칙이라는 게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이것이 내가 나한테 명령하는 겁니다. 어떻게 명령합니까? 내가 이런 행동하면 내가 살고 안 하면 죽는다. 내가 벌칙 다 만들고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인간이 되어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자기 책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린아이 물에 빠져 죽인 인간도 자기 애 같으면 얼마나 착실한지 몰라요. 괜히 남의 애이기 때문에 보기 싫어서 집에 놔두고 자기는 이사가버리고. 구미에 그런 일 있었죠. 20대 아줌마가 애 놔두고 가버렸죠. 자기가 낳은 애 아니라고 꼴 보기 싫어서. 꼴 보기 싫으면 꼴 보기 싫은 거지 뭐. 건사해서 키우기 싫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애를 왜 유기했습니까, 내던졌습니까? 자기 행복에 대해서 그 아이가 도움 된다고 생각했겠어요,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남의 애를 건사하기 싫다는 것이 누가 누구한테 명령한 겁니까? 내가 나에게 명령한 거죠. 명령의 어떤 확고한 원칙이 있죠. ‘나는 나의 행복을 도저히 포기하지 못한다’ 이거잖아요. 나는 나의 행복을 포기하지 못해요. 나만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거기서 그냥 포기하지 못한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법이 주어져요. 내가 나를 법으로 다스리는 거예요. ‘겨우’라는 말에 이게 다 포함되어 있어요. 아까 숫자로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전서 3장 20절, 겨우 여덟 명이라. 숫자로 표현했다는 말은, 이것은 기적이라는 뜻이에요. 사실은 제로라는 뜻이에요. 인간 본성에 준해서 노아홍수에서 살아날 사람은 실질적으로 아무도 없어야 맞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실시했다고 이렇게 봐야 돼요.
‘겨우’라는 뜻은 누구나 납득이 되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나를 안 다치게 하는 구원은 누구나 납득이 돼요. 그러나 나를 죽은 자로 이미 박살내고, 나의 모든 일은 내가 나를 관리하고 내가 나에게 명령한 이것을 개무시하기까지 나를 구원하는 구원은 인간의 자력으로써는 수용이 안 됩니다.
왜 수용이 안 되느냐 하면 아까 저울 봤죠? 온통 관심사가 나의 의로움을 지키는 거예요. 내가 못 먹고 못 살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도저히 포기 못하는 하나가 있어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런 거. 갈릴레오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식으로 말이죠.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 나보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 나보고 ‘눈 깔아’ 하면 우리는 눈 깔아야죠. 안 그러면 죽으니까. 그 눈 까는 방법이 내가 나를 관리하는 방법이에요. 내가 생각한다고요. 한번 눈 깔아주자. 내가 나한테 명령한다고요. 눈 까니까 상당히 자존심 상하고 기분 더럽잖아요. 그래서 궁시렁거리죠.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눈은 깔았는데. 지구는 네가 돈다고 해서 돕니까? 그런 소리 안 해도 돌게 되어 있어요.
내가 그런 소리 안 해도 지구는 도는데도 불구하고 지구는 돈다고 하는 이 말은 ‘네가 나를 이렇게 업신여기고 나를 짓밟아도 끝까지 나는 나를 위로하고 나를 냉대하지 않겠다’ 에요. 비록 내가 지옥가도 너에 대해서 내가 지켜줄게. 나의 유일한 보호자는 이 세상에 나 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던 악마의 보이스,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악마는 어디 있느냐. 뭐 흉측하고 나쁜 짓 하는 게 악마가 아니라 내가 바로 악마입니다, 내가. 온통 24시간 나한테 관심 있는 그게 악마에요.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협조를 구하는 식으로 구원이 안 되는지 아시겠지요. 만약에 우리에게 협조를 구하고 내 동의가 된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는 셈이 됩니까? 마귀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셈이 되고 그러면 지옥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죠.
지옥이 없는 세상. 여호와의 증인하고 똑같아요. 지옥이 없는 세상. 맹자의 성선설처럼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한 구석이 있다. 우리가 개발 못해서 그렇다. 개발하게 되면 아무리 악한 도둑이라도 양심은 있으니까 착하다. 그게 누구의 음성이에요? 그게 마귀의 음성이라니까요.
마귀는 사람의 편에 서서 어째든 간에 네가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도 네 편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하나님도 네 처지를 이해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하는 소리에요.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이 노래 알죠? 누가 불렀는지 이제 기억난다. ‘닭고기 아줌마’라는 노래 알아요? 성진우가 불렀어요. 다 포기하지 마. 빨리 해보세요, 닭고기 아줌마. 아침에 눈만 떴다 하면 내 속에 내가 나한테 지시해서 매 순간 우리한테 용기와 격려를 아낌없이 부여하면서 하는 말이 뭐냐. 너를 포기하지 마.
이미 율법이 있어요. 이미 내 율법이 가득 찼는데 다른 율법은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다른 잔소리 들어오려면 내 허락 맡고 들어와야 돼요. 나는 나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겨우 구원받는다는 말은 구원이 결코 인류의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특이한 현상이라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대척관계, 대립관계에 있는데 구원이라는 것은 대립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거든요. 맞아요. 반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구원에 도달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도달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안에 딱 집어넣으면 비로소 삽입되어 있는 새롭게 등장한 그 지점, 예수님이라는 그 지점에서 이 어두운 세계에 새로이 아버지의 구원의 조건에 만족스러운 새로운 구원의 개시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로 출발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구원이에요.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어떤 축제기간이 있다고 합시다. 축제기간에 한때 장사하기 위해서 천막하고, 축제라는 게 먹고 즐기는 거잖아요, 간이 음식점, 트럭에다가 패스트푸드 쫙 파는 풍경 상상할 수 있죠. 페스티발 할 때 이럴 때, 장날 때도 마찬가지고 쭉 하더란 말이죠. 그래서 장날이나 행사할 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떡볶이, 치킨, 피자나 이런 것 쭉 팔고 있을 때 사람들이 먹어보는 거예요. 축제기간에 음식을 팔아서 다 먹어봤는데 맛이 없다고 할 때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이 축제기간에 먹을 만한 음식은 없다’가 되죠. 먹고 만족하는, 돈값을 하는 만족스러운 음식은 없다고 결정이 났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할 때 전제적으로 무슨 일들이 일어나야 그게 구원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운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를 미리 깔아야 돼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카펫처럼 미리 쫙 깔아버려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충족할 만한 사람은 없다’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확실하게 깔아버립니다.
자 그렇게 되면 인간이 요구하는 모든 구원조건은 자동적으로 폐기되죠. 인간은 구원하겠다는 것도 구원 안 되고 안하겠다는 것도 구원 안 되고. 어째든 간에 인간세계는 일체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다고 할 때 의인이 없는 그 증거가 뭐냐. 율법이죠. 율법을 줌으로써 어떤 인간도 모든 율법을 위반하지 않고 항상 다 지키는 인간은 없다. 율법을 제시하는 그 이유가 율법대로 사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게 로마서 3장에 나오죠.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입, 사람마다 입이 있잖아요. 입을 열고 막 말하고 싶고 나는 이 정도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고 이 정도로 깨끗합니다, 온갖 입이 나오겠죠. 율법이 그 입을 전부다 막아버리고. 요새 기차 탈 때 마스크를 해서 기차가 한결 조용해졌어요. 옆자리가 없어서 특실 같아, 전부다. 여담입니다만.
여러분들이 <기생충>영화 포스터를 봤죠. 그 포스터의 특징이 뭐던가요. 사람들, 주인공들이 있는데 보통 포스터는 주인공이 조여정이고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뭘 가려버려요? 포스터에 전부다 시커멓게 눈을 가리죠. 눈을 가린다는 말은 인간들이 시각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구성된 이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영화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주장한 게 아니고 내가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봉준호 감독이 그렇게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오늘 강의와 너무나도 밀접한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뜸 들이지 말고 말씀드릴까요? 봉준호 감독은 눈을 가렸잖아요. 주님은 이름을 가립니다. 이름을 없애버려요. 이것은 구원에서 필수적입니다. 이름을 없애버린다고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이름을 지워버려요.
이름은 독자적이에요. 왜 독자적이냐 하면 사람마다 이름이 다 다르니까. 다르다는 말은 각자 각자 자기의 chamber, 자기의 방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201호, 202호, 203호 방이 다 있죠. 201호와 202호의 차이점이 뭡니까.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거예요. 그럼 그 방에다가 201호, 202호 숫자 대신에 자기 이름을 딱 써놓으면 어떻게 살아가는가 확실하게 드러났죠?
집안에 애 둘과 부모, 이렇게 넷이 살아간다 합시다. 보통 30평짜리 아파트 살게 되면 방이 3개는 되잖아요. 그럼 방 하나는 부부가 쓰고 나머지 방은 딸애 하나, 아들 하나 주죠. 그러면 갑자기 그 방은 누구를 대변하는 방, 누구의 챔버입니까? 아들, 이쪽은 딸, 이쪽은 부부. 그럼 택배가 왔다. 엄마가 딸 방에 함부로 못 들어가죠? 똑똑. 애야, 집에 있나? 공부하나? 왜요, 엄마. 너 택배 왔는데...앞에 놔두세요. 택배를 두 번 놔둬야 돼요. 문 앞에 놔둬야 되고 딸 방 앞에 놔둬야 되고. 이것은 내 허락을 맡아야 돼요. 그 방안에서는 내가 관리자이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에요. 내가 신이에요, 내가. 왜? 이름이 있으니까. 이름 봐라. 누구 이름이 있나. 이건 아빠 이름이 아니고 엄마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이라니까요. 이름이 나를 대표해요. 그런데 성경에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 이름은 구원이 안 된다(“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게 얼마나 귀한 이야기입니까, 정말. 뭐 더 진도 나가기 싫어. 다 끝났어요.
여러분 이름이 있습니까? 이미아 성도님이라 하지 말고 201호 이름 있습니까. 201호, 202호, 목사님 203호, 204호, 나 208호. 남의 방에 들어가면 안돼요. 허락 맡고 들어가야 돼요. 한윤범 목사님 209호 할당해드리겠습니다, 209호.
그래서 기독교 문화 속에서 미국 같은 청교도 문화 속에서는 한쪽 이름을 없애버렸어요. 자기 이름이 있더라도 남편하고 결혼하게 되면 여자가 자기 이름을 기꺼이, 사실은 강요된 기꺼이죠, 강요된 자발성에 의해서 남편 이름에 종속이 되고 복속이 되고 여자는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려요. 기독교 문화에서는 부부가 결혼해서 두 몸이 한 몸 되면서 한 몸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면 안 되잖아요. 하나의 이름, 대표 이름을 뭘로 할 것이냐. 남편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유교제도에서는 아내의 이름까지 없애지는 않지만 자식의 성은 남성을 따르지 여성을 따르지는 않죠. 그런데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자식도 엄마의 성을 따를 수 있다. 딸은 엄마, 아빠의 성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이렇게 하겠죠. 그걸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아빠에도 없고 엄마에도 없는 성을 자기 마음대로 해요. 결혼식도 내가 내 스스로 축하하려고 주례도 없애는 판에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데 타인인 아빠, 엄마 성을 왜 붙여. 나는 헨리로 하겠어. 지 마음대로 헨리 ◯, 제임스 ◯, 카펜터스 ◯, 아니면 강다니엘 하든지.
제가 이렇게 사회 법적으로 어떤 형식을 두고 이야기하기 이전에, 형식을 바꾸기 이전에 개인이 오직 자기 이름의 독자성을 태어날 때부터 확보한다는 점이 바로 오늘날 현실 환경입니다.
자기 이름에 미쳐있고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목사님들이 성경을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그 성경이야기가 들어오는 족족 뭐에 달라붙겠습니까. 내 이름을 없애겠습니까, 아니면 내 이름에다 내용을 채우고 또 채우고 채우겠습니까? 채우죠. 자기 이름은 멀쩡하죠. 자기 이름은 안 다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놓고 성경에서 말하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뭔 얘기인지 몰라요. 아, 나라는 이름의 인간이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이 되는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으로부터 살해당한 이름이에요. 제거된 이름이라고요.
오늘 안양모임의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자기 남편은 30년 전부터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킨답니다. 거기에 병명을 짓는다면 예수 발작증세? 부처에 대해서는 아무 발작이 없다가 예수 이름으로 발작을 일으킨대요. 그래서 “아휴 집사님 참 다행이십니다. 정말 복된 분입니다.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마음껏, 느낌적인 느낌으로 풍성히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하니 얼마나 실감나는 구원이겠습니까.” 이랬어요.
만약에 그 남편이 예수님에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에 막 호응하고 나선다면 그 집사님은 어떻습니까? 자기 가정이 지옥 같은 가정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 가정 자체에다가 자기 이름을 붙이고 자기 이름이 안 다치죠. 자기는 구원받은, 괜찮은 이름을 소지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이 다칠 이유가 없잖아요.
아무개 가정 구원받았다. 그 이름을 앞에 붙일 거예요. 그러면 그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고 그 원칙에 위배돼요. 예수 이름을 아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데 예수 이름을 안다는 조건하에 내 이름은 다치지 않고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원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말에 위배되는 겁니다.
예수 이름을 부를 때는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게 여기시는 그 율법에 대해서 구원되는 당사자가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거냐 의인으로 드러날 거냐 그게 확정되어야 돼요. 율법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됩니까, 의인이 됩니까? 저주받을 죄인이 되죠. 그렇다면 저주받을 우리 이름이 그 구원에 들어가야 돼요, 안 들어가야 돼요? 들어갈 수가 없죠.
아까 그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성경대로 하면 내 이름이 들어가서는 안돼요. 두 개의 이름이 동시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의 이름은 모든 인류의 이름,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을 대표로 하는 아담의 뿌리, 아담의 줄기, stem에 합세한 그 단합된 의사결정에 의해서 주님 이름은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래요.
살해당한 그 분이 내 이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이름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 나로 인하여 살해당한 그 이름이 나를 구원하게 되면 나는 당연히 그 이름 앞에서 이번에는 누가 부정당해야 됩니까? 내 이름이 부정당하는 것은 이치상 그건 당연하고 마땅한 겁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은 개시점이 율법 안이죠. 율법은 선합니다. 거룩합니다.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온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시하는 구원이에요.
하나님이 구원 못해서 환장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 구원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혹시 화낼까 싶어서 염려한다면 율법을 주지 않아요. 율법 그거 무시해 무시해. 괜찮아 괜찮아. 안 지켜도 돼. 안 지켜도 될 율법을 주기는 왜 줍니까. 뭔가 교체가 일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는 바로 그 자체의 악으로부터 너를 빼내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들면서 생기는 그 조건을 박살내면서 너를 끄집어내겠다는 겁니다. 그 조건이 하나님 마음에 안 드니까. 마음에 들 수가 없죠.
첫째시간 강의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내 뜻이 아니다. 구원은 내가 예상도 못하고 내 뜻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일체 들어준 적이 없다. 그 증거가 ‘겨우’에요, 겨우. ‘겨우’란 없다, 제로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에요. 당연히 없는 거야. 라는 뜻에서 겨우라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듯이 바늘이 안 떨어진 것보다 바늘이 떨어진 게 물리적으로 더 시끄러워요. 그런데 바늘을 떨어뜨렸을 때 그 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그만큼 조용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늘을 떨어뜨리는 소음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를 구원했다는 말은 아무도 구원될 자격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8장 끝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물을 흠향해서 받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인간이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이것은 너희들 아이디어가 아니고 순전히 너희들이 모르는 하나님만의 아이디어로 너희를 구원한다. 그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10분 뒤에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