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주의 일

아빠와 함께 2020. 10. 10. 21:06

서울의존강의20201008a 베드로전서4장 15절(주의 일)-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4절-16절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절,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 성령이 나오죠. 성령이 나올 때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쉬워요. ‘성령은 나와 경쟁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면 ‘나’라는 이 존재 말고 다른 존재, 나와 대비가 되는 존재,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나와 예수님 사이에는 애초부터 합치될 수 없는 요소가 있어요, 애초부터. 만약에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려죽이지 않았을 거다 이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생각과 그 외의 모든 인간의 생각이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대립관계에 있는 양쪽에서 따로따로 어떤 의견을 제시하게 되면 그 의견은 대립적인 의견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경쟁관계에 있다’. 경쟁관계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걸 달리 사도바울 식으로 이야기하면 ‘십자가는 반복된다’. 십자가는 예수님 세계와 인간세계에 대해서 대립이니까 십자가 사건은 그 때, 한 때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대립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대립된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 나왔기 때문에 이걸 이렇게 설명하시면 됩니다. 애초부터 에덴동산에 나무가 두 개 있잖아요. 에덴동산 중앙에 이슈가 되는 나무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악을 아는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또 하나는 생명나무인데 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의미와 취지는 이 나무의 열매에 있어요.

이 열매에 대해서 인간이 선악과 열매를 먹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열매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고 대립관계에 돌입해버려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무가 두 개 있다는 말은 하나는 먹지 말아야 될 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먹어야 될 열매가 되는 거예요. 한쪽은 먹지 말아야 되고 한쪽은 먹어야 될 열매다 이 말이죠.

이 둘 사이가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왜? 치워버렸으니까. 못 먹게 했으니까. 그러면 대립관계가 되게 되면 여기서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가 나와요.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안다’가 되고 생명나무에서는 ‘선과 악을 아는 것 자체가 악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죠. 선과 악을 아니까 인간들의 원리는 뭐냐 하면 선은 행하고 악은 안하면 되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무엇과의 대립관계입니까?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규정이 되는 거예요. 이게 악이 되는 거예요.

선은 행하고 악은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 자체가 생명나무 못 따먹는 입장에서는 뭐 아무리 착해도 그 생명나무는 못 따먹어요. 못 따먹으면 영원한 축복이 주어지지 못하죠. 저주가 되죠. 착해라. 그래, 내가 저주 주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 많이 착해. 훌륭하게 살아. 저주는 너한테 갈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대립관계에 있다는 말을 또 달리 해볼까요? ‘각자 고유영역 확보’가 되겠죠. 각자 고유영역 확보. 자기 편, 네 편, 두 개의 영역이 대립관계에 있어요. 대립관계 또는 경쟁관계에 있다고 제가 말씀드릴 때 제가 뭐를 의식하느냐 하면 ‘교회 다녀서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받아 주겠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대립관계가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연속관계죠. 친화적인 관계죠.

‘우리가 바르게 살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 이것은 대립관계가 빠져버렸죠. 대립관계가 빠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뭐라고 하느냐면 스캔들, 우리말로 하면 ‘걸림돌’이라고 칭합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걸림돌이라 하는 것은 연속을 차단시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살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서라, 말아라 중간에 차단시켜버리는 겁니다. 차단시켜버리죠.

연기를 가르치는 학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줬어요. 숙제는 뭐냐 하면 가장 귀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대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내세요. ‘아무개야, 가지 마.’ 라는 그런 테마를 주고 즉석에서 연기를 시켰어요. 그런데 연기지도 받는 어떤 남학생이 어머니가 생각나가지고 연기를 하는데 “어머니, 가지 마세요.”하고 눈물 죽 흘릴 때, 막 사람들이 야, 즉석에서 눈물이 팍 쏟아지면서 “엄마, 가지 마세요.” 할 때 연기가 대단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있던 다른 개그맨이 자기도 하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현숙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현숙아, 가지 마. 휴전선 넘어 가지마.” 최양락이 팽현숙을 그렇게 불렀다 이 말입니다. 휴전선 넘지 말라는 게 뭡니까? 그 휴전선 넘어가버리면 막 총 쏘고 죽는다는 거예요. “가지 마, 총 맞으면 죽어.” 빵 터졌죠. 그 휴전선이라는 단어를 쓸 생각도 못했죠. 현숙아, 가지 마. 휴전선 넘어가지마. 자칫하면 탈북자 돼서...

가지 마. 어디 너머로? 지금 이 영역 말고 다른 영역으로 가지 말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 한국의 정치적인 현상, 상황이 대립관계에 있고 경쟁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각자 고유의 영토, 영역을 갖고 있는 거예요, 고유의 영역. 그러면 고유의 영역마다 각자 가동되는 원리가 따로따로입니다.

여러분 들었으니까 아시겠지요. 자, 생명이 없는 곳의 원리는 어떤 원리입니까? 선과 악을 내가 구분해서 선은 행하고 악은 멀리한다는 그 원리가 가동되는 지역. 그 나라는 뭐가 없다? 방금 이야기했죠.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이거 무지 쉬운 건데... 생명이 없죠. 영원한 복이 없는 거예요. 선과 악을 구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는 거예요. 개코도 선을 모르기에 네가 선을 행하려하고 악을 모르기에 악을 안 저지르려고 한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게 착한 일인 줄 모르고 착한 일을 하고자 하고 악한 일인지 모르고 악을 안 저지르려고 하니까 너희들은 저주받는다 이 말입니다. 대립관계, 경쟁관계 또는 로마서 9장 33절 말씀처럼 십자가가 걸림돌이죠. 십자가가 걸림돌이라 하는 것은 자빠뜨리고 넘어지게 하는 거죠. 네 영역에서 그냥 있거라. 감히 깝죽대는 네 영역에서 이쪽 영역, 천국으로 넘어올 생각하지 마라. 이게 걸림돌이에요.

그러면 그 당시 걸림돌에 걸린 사람이 로마서 9장 32절에 보면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어디서 다 자빠진다? 십자가에서 다 자빠지는 거예요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만약에 십자가를 말 안하고 치워버리면 그들은 뭐라고 착각하겠습니까? 우리는 행함으로 지금 천국 간다고 다 우길 거죠,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그래서 십자가가, 주의 일이 중요한 거예요.

각자의 영역이, 영토가 달라서 서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한 걸림돌 역할로써, 스캔들 역할로써 십자가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구원받고자 할 때 그들의 아이디어는 뭡니까? 행하고자 하는 그것이 하나님 계시는 나라, 천국까지 이어진다고 할 때 그들은 악행을 하겠다는 시도에요, 선행을 하겠다는 시도입니까? 지금 무슨 말인지 몰라요? 행함 자체가 악행을 쌓아서 천국 가겠다는 말이에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선행을 쌓아서 천국 가겠다고 행함을 하는 겁니까? 선행이죠! 그게 십자가 걸림돌에 다 자빠졌다 이 말이죠. 자빠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라는 것은 대립관계를 분명히 규정하면서 왜 사람들이 천국을 못 가는지 그 이유를 십자가 하나로 완벽하게 다 알려줄 수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 모르는 인간들이 천국 간다하면서 악행을 저지를 리는 없을 것 아니겠어요. 천국 간다, 천국에는 거룩한 사람, 좋은 사람, 착한 사람만 간다. 그래서 그들은 맨날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내가 착했는가, 나빴는가를 살피겠죠.

자기 자신을 보는 그 순간 그들은 창세기 3장의 유혹사건을 재현하고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유혹받고 죄를 범한 이유가 자기 자신을 봐서 그래요, 자기 자신을 봐서. 내가 신처럼 된다는데 나를 다시 보자. 이 몸이, 내가 신처럼 되고 싶어라. 라고 되겠죠. 그게 사단난 거죠. 그게 낭패난 겁니다.

자기 자신이 유혹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선인가, 악인가 하는 측정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오늘 하루도 내가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 오늘 일기장 한 번 써보자. 오늘의 일기- 오늘 내가 착했다, 못했다.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스스로 칭찬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에게 칭찬하고 싶어. 이런 일기장을 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체가 그 시간이 누적이 되면 천하 최고의 내 매혹거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못 버려요.

그렇게 되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네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말 앞에 뭐가 붙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그걸 안양강의에서는 ‘내 존재 안에 부정성이 포함된 존재’ 내가 나를 질책하는 부정성을 내가 포함시키는 나. 전에는 나한테 악한 것을 쫓아내는 나였는데 이제는 나를 지적하는, 내가 죄인이라는 그 사실을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

이것은 뭐냐. 생명나무가 움직인다. 생명나무가 움직이면 “선악과 따먹었잖아.”라는 그 사실도 동반해서 같이 움직이는 원리로 이 인간세계에, 하늘나라 영역에 계신 분이 찾아오신 거예요. 생명나무만 달랑 온 게 아니고 선악과를 동반해서 오는 거예요. 내 다리 내놔라는 식으로.

따먹지 말라는 걸 따먹었잖아. 네가 그런 인간이야. 뭐 선을 안다고? 악을 안다고? 어디서 나를 속여? 너는 네 자신이 지금 네 삶의 목표가 되었어, 너는. 네가 시도하는 모든 것은 네 자신을 못 버리겠다는 그러한 방향으로 너는 평생 모든 역량을 쏟아놓고 있다고. 나 하나 내가 챙기겠다는 그 목표를 네가 못 버리고 있잖아. 자기 부인 안 돼, 넌.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고난과 역경을 겪더라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던 자기 자신이 그렇게 대견해 보이는 거예요. 찬미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한테 찬미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오늘 또 표 하나 던지는 거예요. 표를 던지는 겁니다. 홍진영이라는 여자 트롯 가수가 부른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사랑의 밧데리> 밧데리를 나한테 계속 채우는 거예요. 악은 버리고 선한 밧데리를. 이게 원래 밧데리라고 하면 안 되는데. ‘배러리’ 이렇게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랑의 배러리를 채워주세요’ 이러면 노래가 안 되니까 ‘밧데리’한 거예요.

매일 아침에 눈만 뜨면 밧데리 채우는 거예요. 선행으로 무장하는 것. 왜?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매력적인 대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최고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나를 지켜주고 나를 안 챙기면 누가 챙겨 주겠어요. 그 일의 선배가 누구냐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얘기했죠. 바리새인들은 어디에 자빠졌다고요? 걸림돌에 다 자빠진 거예요. 그 걸림돌은 무슨 걸림돌입니까? 십자가. 십자가 앞에 다 자빠진 거예요. 어디를 넘어 와? 현숙아~ 휴전선 넘어가지 마. 하는 것처럼. 팽현숙이 휴전선 넘어갈까봐 남편 되는 최양락이 얼마나 걱정했다고. 넘어갈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내린 조치는 뭡니까? ‘오지 마’에요. 오지 마. 저리 가. ‘오지 마’보다 ‘저리 가’가 더 강렬하네요. 한번 써볼까요. ‘저리 가’ 이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냥 있어’. 네 자리에 그냥 있어. 저리 가. 밀쳐내는 거예요. 밀쳐내는 것.

생명나무 자체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생명나무입니다. 나는 생명이다. 잠언서 8장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지혜자가 생명나무에요.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거든요. 잠언서 8장 끝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잠언 8장 35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런데 생명나무 올 때 우리는 생명나무만 달랑 그것만 오는 줄 알았죠. 밀어내면서 온다는 걸 몰라요. 뭘 밀어냅니까? 선악적인 의식과 체제를 갖고 있는 자를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적인 체제는 왜 우리가 못 버리는 겁니까?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그렇게 해서 낸 결과가 우리가 포기 못할 결과거든요. 뭘 포기 못합니까? 내가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게 되면 그렇게 낳은 결과는 누가 좋은 거예요? 이 동네에서 내가 보기에 내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유혹거리가 되는 거죠.

죄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영역이 어떤 영역인지조차 모르고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개체적으로 나만 착실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 자기가 어디 소속되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항상 자기한테 시선이 되어 있거든요. 자기한테 시선을 주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유혹되는 나를 보는 그 자체가 이미 죄가 됩니다.

그걸 달리 말씀 드리면 내가 누구와 경쟁관계인가를 놓쳐버린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경쟁관계, 대립관계에 있다는 그 생각이 없는 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십자가에 의한 걸림돌이에요. 아무리 훌륭하고 머리 좋아서 좋은 대학 가면 뭐합니까? 이 동네에서 못 벗어나는데.

영토라 하는 것은 동네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명확히 합니다.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구약으로 따져 볼까요? 율법 안. 더 따져 들어가 볼까요? 언약 안, 아브라함 안. 구약에서는 성신 안, 신약에서는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 전부다 안, 안. 그 ‘안’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밖’이 있다는 말이고 안과 밖은 임의로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집어넣고 성령 집어넣고 하나님의 율법 집어넣고 하나님의 언약 집어넣고 약속 집어넣고 말씀 집어넣으면 그대로 두부 쪼개듯이 안쪽과 바깥쪽이 명확하게 드러나죠, 안쪽과 바깥쪽이.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프로젝트에요. 누가 변경시키나? 아무도 변경 못 시킵니다.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원리라는 것은 변경하라고 있는 게 원리가 아니에요. 원리는 처음부터 그 원리대로 그냥 밀어붙인다는 뜻에서 원리에요. principle, 원리.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내가 착하냐, 안 착하냐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내가 아는 영어로, 네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면, 결코! 결코 내가 잘했나, 못했나에 관심 없어요. 내가 잘했나, 못했나에 관심 있는 것은 악마에 뒤집어 씌인 내가 관심 있어요, 내가. 잘하면 복 받을 거 같은 기분이 들고 악했으면 이제 저주 한보따리 받는구나 하죠. 착하다, 저주받는다고 측정하는 그 자체가 저주에요, 그게.

주님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왜 내가 나한테 신경 씁니까? 뭐 할라고 신경 써요, 나한테, 왜? 그것은 귀한 나를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소유성. 선을 소유하고 싶은 겁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선을 소유하고 싶다’. 그 다음에 ‘선한 □을 소유하고 싶다’. 이 네모에다가 아무거나 집어 넣어요. 선한 ‘가정’을 소유하고 싶다. 선한 ‘교회’를 소유하고 싶다. 선한 ‘회사’를 소유하고 싶다. 선한 몸, 선한 몸을 두자로 ‘건강’이라고 합니다. 건강한 몸을 소유하고 싶다. 착한 ‘성품’을 소유하고 싶다. 전부다 소유라고요.

자, 소유가 되면 뭐가 없다? 대립관계, 경쟁관계 없는 거예요. 나만 소유하면, 내 것 좋은 거 챙기면 그만이지. 이게 뭐냐 하면 대립관계가 사라진 거예요. 십자가도 사라지고 성령 왔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율법이 주어진 이유도 모르고. ‘예수 안’ 그게 무슨 뜻이죠? 그것도 모르고. 다 모르는 거예요.

제가 어제 수요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죠.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들’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아들인 자와 아들 아닌 자. 그러나 인간들은 뭐냐 하면 육이 있으니까 혈육을 좀 옹호해 달라 이 말이에요, 혈육. 혈육을 옹호해 달라.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그걸로 선하다고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혈육.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잉태치 않은 것이므로 네가 잉태한 게 문제라는 거예요, 잉태한 게. 주님께서는 잉태치 못한 자를 천국에 보내는데 잉태한 게 문제다, 잉태한 게.

하나님의 소유성 보세요. 하나님이 소유하는 것은 잉태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잉태치 못한다는 조건 하에 아들이 돼요. 혈육으로 잉태되면 그것은 이미 육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육은 자기의 유혹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선한 가정, 선한 직장, 선한 몸, 선한 교회 전부다 그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원리인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받는다는 원리와 대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이미 무엇과 대립관계입니까? 잉태한 자를 나는 받는다, 안 받는다? 일체 안 받죠. 일체 안 받습니다. 이스마엘 안 받습니다. 누굴 받아요? 이삭을 받죠. 왜? 이삭은 뿌리가 있어요. 약속으로 태어났잖아요. 뭐로 안 태어났다? 약속의 대립관계가 육이거든요. 육으로 안 태어나고 약속으로 태어난 겁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육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약속이 마리아의 몸을 이용했을 뿐이죠. 그러니까 거기에 개입된 단어가 뭐냐.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오실 때부터 이미 두 개의 대립되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성령이 오신 거예요. 대립성을 뚜렷하게, 더욱 확고하게 적용시켜버리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봐주겠다가 아닙니다. 네가 선악과 따먹었냐? 추방한다. 그 추방의 취지를 내가 중도에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고 그걸 더 확고히 할 거다. 추방했다는 것. 네 영역과 내 영역은 여전히 통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휴전선 넘을 수 없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휴전선 넘어서 우리 인간세상으로 왔다고 이야기해도 되지만 분명히 이야기해서 아예 휴전선 자체를 뽑고 어깨에 메고 온 거예요, 휴전선 자체를. 인간에게는 휴전선이 없으니까. 인간은 자기 영역과 신이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착각을 착각이라고 알리기 위해서 이 경계선 있잖아요, 대립되면 경계선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경계선 자체를 자기가 몸에다 짊어지고 오신 거예요. 그 짊어짐의 결과가 뭐냐? 십자가 죽음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그 경계선을 못 넘었어요. 왜? 네가 갈 곳이 없다. 하늘나라에 네 처소가 없다. 베드로에게 처소가 없다 했잖아요.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켜 보세요. 네 자리 없다는 거예요. 천국에 네 자리 없다. 뭐 그냥 베드로 사도처럼 가면 자리하나 마련해주겠지. 없어요. 자리가 없어요. 자리가 없다고.

그럼 “베드로에게 나중에 성령이 와서 자리 마련해줬잖아요.” 할 때는 베드로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죠. “네 자체가 경계선이다, 네 자체가.” 다시 말해서 ‘나 베드로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를 알리는 그런 베드로를 주께서는 구원하시죠. 그리고 왜 구원받지 못했는지 그 이유까지 베드로가 알고 있습니다. 선과 악 자체가, 주님이 오지 마라는 그 원칙에 부합되게, 우리는 그래서 갈 수 없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고집, 열심은 어떤 수를 써도 선악과 따먹은 자는 그 본질 그대로는 절대로 천국에 못 오게 여전히 말리고 있습니다. 못 오게 밀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이 뭐고 악이 뭐냐 하면 선이라 하는 것은 그 경계선 밖에 있는 ‘예수 안, 십자가 안’이 종합적인 선이 되고 악은 그 경계선에 못 오고 있는 모든 결과들이 악이 되면서 그들은 나중에 지옥 가서 악마와 만나게 됩니다. 왜? 악마한테 배웠거든요. 선악과 따먹으면 신이 된다는 것은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악마한테 배운 거잖아요. 악마하고 한통속이었다 이 말이죠.

그걸 지금도 평소에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탁되는 겁니다. 결탁은 서로 협조가 되고 확고하게 교제가 되는 사이.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 안 떨어지는 사이. 안 떨어지고 못 떨어지죠. 안 떨어지고 못 떨어져요. 결탁이니까. 딱 갖다 붙었으니까. 누구하고? 악마하고. 하나님의 원리는 계속해서 포기 안하고 밀어붙이니까. 선악과 좋아하는 인간들 너희끼리 잘 놀아라. 나는 그 선악과 인간들 노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서로 헤어지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같이 한통속에다 갖다 가둬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못 간다니까요. 가도 자리가 없어요. 하늘나라에 처소가 마련 안 되어있는데 어떻게 가요. 자기 자리가 없는데. 처소가 예비 되면 오라 할게. 그러나 처소가 예비 되고 성령 오게 되면 베드로는 무슨 고백을 하느냐 하면 “나는 선악체제를 아는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입니다.”

너희들 죄 때문에 나, 예수가 죽었다는 원리가 그대로 베드로에게 개입이 되어 버리면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평가에 의하면, 죽은 자가 돼요.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었으니까. 예수님 죽었으니까 우리도 같이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은 뭘 동반하느냐 하면 거기에 약속 완성이 동반된 죽음이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또한 그리스도의 원리가 작동해서 함께 죽었다는 그 원리와 이어져 있는 생명 주신다는 부활의 원리와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에 국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가 됩니다, 로마서 6장. 참 쉽죠.

이게 단순한 논리나 이론이 아니에요. 객관적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빈 무덤이라는 역사적 증거에요, 빈 무덤. 무덤에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 이것은 그냥 이론이 아니에요. 인간을 달래기 위해 꾸며낸 좋은 소리 다 모아놓은, 인간의 지혜를 모아놓은 게 아니라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에요.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에요.

마치 이순신 장군이 총 맞아 죽을 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것이 역사적 사건인 것처럼. 그것은 전설이다 할 수도 있지만 그 이순신 장군이 총 맞아 죽은 그것보다 더 생생하고 확실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부인할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함을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다가 꽂아버리는 거예요. 확실함. 따라서 우리는 성령 오게 되면 그 때부터 확실함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확실함을 품고 산다고 하니까 또 이거 노래가 생각나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그 노래 있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 노래보면 희망을 품고 살아가라고 하잖아요, 젊은이들이여. 우리는 확실함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 확실함이 어느 정도 확실하냐 하면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확실합니다. 아니 내가 죽어야만 되고 그리고 이미 죽었다는 사실의 확실함. 십자가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다는 그 사실.

그러니까 죽은 존재가, 죽은 놈이 죽은 놈에 대해서 기대를 가질 필요가 있다, 없다? 내가 착했나, 못했나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내가 죽었으니까 죽은 나는 내 소유대상이 아니죠. 소유대상이 아니니까 내가 나한테 신경 쓸 이유도 없는 거예요. 뭐 결과가 있어야 신경 쓰지. 결과 있을 게 없어요. 따져봐야 이미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결과인데 뭘 따져요.

오직 나올 것은 감사만 나오죠. 고맙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우리한테 박아버리면, 성령이 와버리면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면 내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선악적인 행위가 아니라 ‘주의 일’이 돼요, 어떤 일도. 코 후비는 것도 주의 일이 돼요, 어떤 일도.

왜냐하면 내가 기대한 일이 아니라 덮친 일이기 때문에. 주의 일이 나한테 옴팍 덮쳤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서 내가 뒤돌아서서 잘했다, 못했다 평가할 그러한 입장자체를 아예 죽여 버렸으니까. 나를 죽은 자로 만들었으니까 내가 내 행위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를 평가할 심사위원에서 빠져버리는 거예요.

이게 기쁜 소식 아니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싹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일 낮 제가 설교하면서 아무에게도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란 말이죠. 우리는 미안하다고 할 권리가 없어요. 앞으로 잘해줄게. 개코같은 소리. 뭘 앞으로 잘해줘?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가 구상한 일이 아닌데. 내 일입니까? 앞으로 잘해줄게. 뭘? 잘해줘서 내 소유화시킬라고? 내 거 만들려고요? 내가 누굴 사육할 일 있어요? 내가 내 소유를 따로 챙길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남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미안해, 나야. 너를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친 거 아니에요, 그거? 못 챙겨주면 또 못 챙겨줬다고 마포대교 가서 자살하려고? 우리 둘이 껴안고 죽자. 뭐 내세울 게 없기 때문에.

정리해보면 죄라는 것은 경쟁관계가 빠진 것. 경쟁관계가 빠지고 대립관계가 생각이 안 나는 것. 나는 나만 챙기면 된다.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생각으로 선한 행함만 가득하면 나는 선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체가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걸림돌이 빠진 거예요. 경계선이 있는데 없다고 자꾸 우기는 거예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는 겁니다.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자체가 이미 사단난 거예요. 주님한테 추방된 세계에요.

선행과 악행을 규정짓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심사위원도 아닌데 내가 왜 결정합니까? 지가 노래 부르고 난 합격. 지가 노래 불러놓고 지가 실로폰 들고 딩동댕~ 전국 노래자랑~ 딩동댕~ 송해가 웃겠다. 지가 왜 딩동댕을 합니까, 지가? ‘지가’는 경상도 말이고 자기 자신이 왜 합니까? 안 그래도 천지삐까리로 할 게 많은데, 나훈아의 말에 의하면.

구약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두 원리는 양보 없는 원리입니다. 절대로 양보 없는 원리에요. 경계선을 만들고 대립관계 짓고 경쟁관계 만들고. 양보 없습니다. 그 양보 없는 관계를 주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악행을 주께서는 사태를 통해서 증가시키고 그걸 점점 더 발전시킵니다. 악의 발전이에요.

창세기 4장에서는 무슨 죄만 있느냐. 살인죄만 있었죠. 가인이 아벨을 죽였잖아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벨 세계와 가인 세계가 눈으로 볼 때는 형제간이니까 같은 집안이거든요. 같은 가정이잖아요. 같은 가정이면 형이 드리는 제사나 동생이 드리는 제사나 그 집안에서 드린 제사 같으면 하나님께서 받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개입시킨 거예요. 거기다 집어넣은 거예요. 가정이 두 조각나게 만들었어요. 집어넣게 된 거예요.

이삭 같은 경우도 그렇죠. 이삭하고 맏이 에서하고 한패 먹고, 엄마하고 야곱하고 한편 먹고. 이러면 가정 중간에 홍해바다가 생긴 셈이에요. 갈라져버린 거예요. 경쟁관계, 그게 언약이 주입된 결과입니다. 언약이 들어온 결과가 그 관계에요. 경쟁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그걸, 여러분들 잘 아시겠지만 눈으로 한 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그 다음에 뭡니까? “두 언약이라” 그러니까 언약이 추상적인 게 아니고 언약이 실체고 두 여자들이 비유가 되고. 완전히 반대에요. 인간의 몸은 허구가 되고 안 보이는 예수님 몸만이 실제가 되고. 인간은 지금 허탕 속에 공허 속에 헤엄치고 있어요, 이 땅의 삶이, 인간들의 삶이.

이 복음을 압축시키고 축약시킨 것, 이 세상의 한계성을 압축시킨 노래제목이 방금 떠올랐어요. 이 세상을 한마디로 압축시켜서 사람들이 뭘 추구하느냐. 이 노래제목이 적절해요. <뱀이다> 인간들은 뱀을 추구하는 거예요. 뱀 쪽에 있어야 예수님을 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타인이잖아요. 타인을 물어야 내가 살기 때문에.

그러니 뱀이 뱀 고집을 안 꺾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들의 발꿈치를 물어줘야 뱀다워요. 그렇다면 무는 뱀과 물린 예수님 사이에 대립관계, 경쟁관계가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계선을 계속 유효하게 살리는 식으로 성령이 오신 거예요, 성령이. 무엇과 대립관계가 되느냐 하면 육에서 생각하는 선, 악과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대립관계에 놓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세상은 통합해서 그들은 무엇을 찾습니까? 뱀이다~뱀이다. 뱀처럼 간교하고 뱀이 하는 행세를 계속 하죠. 주님께서는 그러한 뱀, 메시아의 발꿈치를 무는 뱀을 계속 동반해서 부각시키고 살립니다. 그 대목이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가 지팡이 들고 애굽에 내려갈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언급하죠.

자, 기적이란 기적을 유발시키는 동네가 실제이고요, 기적을 받는 이 세상은 인간들은 실제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허풍이 되는 겁니다. 공허함이 되죠. 그 경계선이 지팡이입니다. 언젠가 이야기했죠. 모세가 지팡이를 쥐는 게 아니고 지팡이가 모세를 쥐고 있다고요. 모세는 인간이고 지팡이는 나무 작대기잖아요.

그러면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인간이 작대기를 다루고 인간인 내가 깎아 만든다고 생각하죠. 대립되는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걸 반대로 뒤집어버리죠. 지팡이가 이끄는 대로 네 몸은 따라줘야 될, 종속된 관계라고 보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내가 실제, 이 몸이 실제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을 다루려고 하는데 이 땅에 있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분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가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그러한 종속된 존재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속됐다는 말은 내 자체로서 내가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자기부인이죠. 나는 내가 실제가 아닙니다. 자기부정을 자기 속에 담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를 자기 존재 안에 포함시키는 거예요. 살아가는 것도 이게 바로 내가 허풍이라서, 공허라서 내가 오늘 밤에 죽어도 괜찮은데 살게 하신 이것이 실재하신 분의 실제적인 업무, 작업의 결과로서 제가 오늘 또 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사고방식과 모세가 하는 사고방식과 얼마나 크게 대립되겠어요. 정말 냉혹하게 대립되죠. 그래서 유월절할 때 하나님이 어린 양의 입장에서 개입되잖아요. 보통 집에서 키운 어린 양은 나 좋으라고, 내 먹잇감 되라고 키우잖아요. 그런데 반대가 돼서 어린 양 때문에 누가 살아요? 그 집안이 산다.

이게 바로 서로 다른 두 세계 원리가 아주 확연하게 반대가 되는 모습을 경계선 상에 있는 모세나 아벨, 그리고 이삭, 하나님의 언약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잉태치 못한 사라가 실제고 이스마엘을 낳았던 하갈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실제적인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안 받아주는 사람이 돼요. 그래서 언약이 몇 개냐 하면 상반되는 언약이 두 개의 언약이에요. 이게 두 언약. 여자들은 하나의 비유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다 성령 받았겠지만 정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게 되면 뭐가 날라가느냐 하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날라가요. 이 땅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차이는 차이 값도 못하는 차이에요. 차이가 아닌 차이에요. 왜냐하면 진짜 차이는, 찐찐 진짜 차이는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 이 차이뿐이지 십자가 밖에서 있는 이런 차이, 남녀의 차이,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차이도 아니에요. 구약에서 간음은 뭡니까? 율법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언약 밖에 있는 자들과 관계하는 것이 간음이잖아요. 세상의 간음은 남녀 간에 문제 있는 게 간음이라고요.

쉽게 말씀드릴까요? 내가 아는 것은 다 엉터리이다. 야, 이거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다, 진짜. 내가 아는 것은 다 엉터리이다. 그 목적하는 바가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의로움, 나의 거룩함, 나의 잘됨. 이걸 그대로 밀어붙여서 천국까지 밀어붙이려고 시도하잖아요, 바리새인처럼.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은 악을 모르기에 악을 안 저지르려고 해요. 바르게 살고 조심스럽게 살고. 네가 악을 알아? 몰라. 그냥 내가 상정한 악, 나쁜 짓을 안하면 돼. 살인 안하면 되고 악행 안하면 되고, 여기에 또 나오잖아요, 도적질 안하면 되지. 지옥 가보면 도적질 안한 사람들 지옥 많이 와있어요. 살인 안한 사람들. 간음 안하고 거기에 악행 안한 사람들 많이 들어가 있다고요. 성령은 안 받았는데 되게 착해요. 아니 착하다고 우기죠.

사람은 자기가 보이는 만큼 안다고 자기가 만든 법에 입각해서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에요. 법을 한번 줘봐, 그럼? 법을 한번 줘볼까요? 사람들을 미워하면 그 자체가 살인죄라는 그 법을 한번 줘볼까요?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그걸 찍어버려라. 그러니까 오른팔 멀쩡하고 오른 눈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거의 전부다 위선자에요. 몰라 애꾸눈 선장, 캡틴 그거는 모르겠지만 오른 눈, 오른팔 멀쩡하면 전부다 거짓말쟁이입니다. 진즉에 잘라냈어야 해요. 그러면 왼팔만 있으면 이제 죄 안 짓습니까?

죄라는 것은 죄 안 짓겠다는 그 자체가 제일 나쁜 죄에요. 죄를 안 짓겠다는 그 자체가. 죄를 안 지어서 뭐를 얻고자 하는 겁니까? 죄를 안 지으면 의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가 죄 안지어서 받는 그런 의가 있습니까. 율법은 먹구름이에요. 어떤 인간도 통과 못합니다. 죄 안 지은 채 통과 못해요, 아니 통과 자체가 되지를 않고요.

사람이 왜 통과를 못하느냐 하면 나중에 죄, 죄, 자꾸 죄라 하면 기분 더러워서 그 다음부터 삐쳐가지고 나 통과 안 해. 지가 도로 착한 일이라도 얼추 챙기자. 그걸로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겁니다, 그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까? 자기 것을 포기 못해서 그래요. 자기 유혹을 자기가 못 이겨서 그래요. 내가 어때서? 내가 어때서. 요즘 말로 하면 이 나이가 어떤데. 내가 어때서. 내가 소중해, 예수가 소중해? 내가 소중하지. 그걸 물어보나마나. 왜? 타고난 본능이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알게 된 것을 내가 일부러 버릴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알고 있는 선과 악이니까 선은 하면 되고 악은 버리면 되지. 이게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는 친척들한테 복음 전하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이거에요. “내가 어디를 봐서 죄인이냐?” 그래서 죄인이에요, 그래서 죄인이에요!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죄인입니다. 주님은 다 알고 십자가 지셨거든요, 알고. 우리는 개코도 모르면서 지가 법 만들어놓고 지가 만든 법이니까 지가 다 지켰지.

제가 어릴 때 아주 독실한 유교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집안에서는 대청마루 올라설 때 신발을 나란히 해서 나가기 좋도록 다시 원위치로 하지 아니하면 죄가 돼요, 우리 집에서는. 우리 집에서는 죄가 돼요.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가가지고 신발 함부로 버리고 갔을 때, 신발 나란히 하지 않는 것이 내 죄의 안목에서 볼 때는 이런 못 배운 인간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아시면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01008b 베드로전서4장 15절(주의 일)-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받은 것 내놔라. 네 것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내가 너한테 준 거 있잖아. 줬잖아.”, “뭐요?”, “성령 줬잖아, 성령.” 성령은요, 자의로 말하지 않아요. 성령의 특징이 뭐냐. 성령 자신도 자기부인이 돼요, 성령 자신도.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만 증거하거든요. 분명히 본인이 있으면서도 본인이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를 해버려요. 요한복음 16장에서.

왜 그러냐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베드로전서 4장 15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악행과 도적질과 그리고 살인과 같은 레벨로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나와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 그러니까 악에 서열이 있다, 없다? 악에 서열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 동네가 다 악이기 때문에. 작은 악, 큰 악 이게 없어요. 어차피 하나님의 것이 없으면 전부다 한통속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큰 악을 기르고 어떤 사람은 작은 악을 기르는 것은 뭐냐. 그들은 큰 악을 기를 기회를 얻지 못해서 그래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는 기회를 얻지 못해서 그래요. 가정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파리도 하나 못 잡아요. 북한에서 파리도 하나 못 잡는 착한 사람이 연평도 군인으로 있는데 뭐가 물에 뜨니까 부북 쏘아버린 거예요. 북한에서는 충성이지만 남쪽에서는 살인자가 된 셈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그런 기회를 맞닥뜨리게 되면 내가 예상 못할 악이 항상 나올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농락한 거예요.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통로로, 파이프로 사용해서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죄가 나를 통해서 죄를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죄가 자기를, 스스로 죄를 펼쳐보는 거예요, 나를 통해서.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죠. 행해놓고 자기는 죄 지은 줄 몰랐는데 갑자기 율법으로써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자극받은 거예요.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아, 탐내는 것이 죄라는 거야? 하는 순간부터 이미 탐내기 시작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이 인간세계 속에 주어졌다는 말은 그들이 죄와 결탁된 그 사실을 노골화시키는 데에 하나님의 언약, 율법이 계속해서 자극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걸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의 악의 본성이란 소망하는 건데, 나는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이걸 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에요. 조상부터가 따먹지 마라 하는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금지한 것을 도리어 소망하기 시작하잖아요. 우리가 형편이 되어서 여러 가지 죄를 못 짓지만 기회만 된다면 그 누구도 그 형편상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이 안 끊어져도 죄와 결탁되어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율법, 언약, 말씀에 의하면 그 인간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태어난 지 보름 된 애가 죽는 이유도 죄값으로 죽는 겁니다.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지시약을 이 땅에다가 뿌리는 거예요, 지시약. 율법오기 전까지는 우리 전부다 건전하고 훌륭하고 하이고, 아저씨 왜 그리 착해요. 하고 너무 착한 거 같아. 막 이렇게 하다가 율법만 줘버리면 그게 독자적으로 절대화시키는 하나의 유혹거리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제시하는, 인간극장이나 여러 가지 드라마나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열하는 착한 일들을 보게 되면 전부다 개인적으로 혜택 입은 것들이에요, 개인적으로. 우리 할아버지는 얼마나 좋은지. 엄마가 날 버리고 아버지가 힘든 가운데 날 키우는데 나 같은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색소폰 가르쳐 줘, 트롯 노래 가르쳐 줘, 심지어 할아버지가 자기는 간암에 걸려서 곧 죽으면서도 끝까지 이 손자한테 용기를 부여해 줬다. 그 사람이 누구냐 ‘여백’을 불렀던 정동원이라 이 말이죠. 그거 사람들이 보고 감동 먹죠. 아참, 그 할아버지 훌륭하다. 지금도 할아버지 생각하면 난 눈물이 나요.

그놈의 눈물은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인지 몰라. 전부다 눈물이 절대적 나의 것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것을 티내는 눈물이에요. 내 것이 없으면 눈물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내 것이 없는데 왜 눈물이 나요? 내 것이 없다면 눈물 안 나죠. 눈물 난다는 것은 내 것이 있어서 좋아서 울고 내 것이 빼앗겨서 또 서러워서 울고.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고. 감격해서 울고 슬퍼서 절망해서 울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는 자는 쫓아버리라고 하죠. 우는 자는 쫓아버려라. 제가 설교에 인용했잖아요. 날 위해서 울지 말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다. 없는 존재를 위해서 왜 우느냐. 차라리 울려면 있는 존재를 위해 울어라. 왜? 저들에게 딸이 있거든요. 날 위해 울지 말고 네 딸들을 위해 울어라. 네가 딸 소유하고 있잖아.

이 소유성은 우리가 못 벗어납니다. 우리의 소유적인 본능은. 아침 눈뜨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바로 내 소유를 더욱 더 공고히 하기 위한 나에 대한 헌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사명감이 있어요. 누구에 대한 철저한, 투철한 사명감입니까. 나를 위한 사명감. 나를 위한 사명감이 투철하니까 주님한테 줄 사명감이 남아 있을 리가 있습니까. 사명자니까. 누구를 위한? 나에게 헌신하기 위한 사명자가 있는데 내가 나 빼놓고 달리 또 누구한테 남아있는 사명감이 있을 리가 있어요? 없죠. 존재자체가 악행이에요, 우리는 존재자체가.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말은 그 남이라는 규정을 누가 합니까? 내가 여기 있기에, 내가 여기 확보되어 있기에 내 영역 밖에 있는 것을 남이라고 하는 거예요. 남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내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과 우리 사이가 남남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게 되면 남의 일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없기 때문에 남의 일도 없는 거예요.

남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다는 근거 하에 내가 아닌 것을 남이라 하거든요. ‘남’에서 점하나 떼면 뭐가 됩니까? ‘님’이라는 글자가 되죠. 남에서 님 돼요. 님 되다가 점 하나 붙으면 남이잖아요. 님으로 살다가 남으로 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남 됐다가 님 되는 건 힘든데 님 됐다가 남 되는 건 왜 그리 쉬운지. 점하나만 붙이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남이 아닌 이유가 우리가 주님한테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종속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 그 대표적인 하나가 주님이에요. 마태복음 7장 한번 봅시다. 이것을 유념하면서 마태복음 7장 22절부터 23절 부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되어 있죠.

이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뭘 했어요? 귀신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또 많은 권능을 행했잖아요. 그러나 이것이 말씀이 오게 되면 내가 권능을 행하고 내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어요. 내가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말씀이 완성이 되어 버리면, 말씀이 나한테 완성이 되는 것이 십자가고 그게 성령이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은 누구 이야기한다고요? 성령은 자신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을 이야기해요. 자의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행한 일을. 그리스도의 일화들 속에 모든 말씀이 다 완성되어 있죠. 그 완성이 우리에게 택배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없죠. 내가 오줌 누는 것도 주의 일이라니까. 내가 밥 먹는 것도 권능이에요. 내가 내 일을 구분 지을 그러한 자격 자체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사람이 근심 걱정하는 이유, 이제는 말한다. 근심 걱정하는 이유가 내가 따로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근심하는 거예요. 지킬 내가 있기 때문에 걱정 근심도 따라오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이건 악행이고 이건 바른 행동이고. 악행이고 바른 행동이고 내가 결정지으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우리에게는 나의 일도 없고 남의 일도 없어요.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만약에 이웃에서 떡을 준다. 주께서 주신 거예요. 내가 이웃에게 떡을 주고 싶다.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전에 봤던 베드로전서 4장 11절을 누가 제 대신 한번 읽어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인데 거기 예수그리스도에다 괄호를 해놓고 거기다 내 이름을 임의로 한번 집어넣어보세요. ‘이는 범사에 내 행함으로,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나로 인하여 내가 봉사하고 내가 희생하고 청소한다고 피나가지고 피 줄줄 흘려가면서 청소를 했다. 그러면 이게 희생자는 나니까 나로 인하여 영광 받습니까? 아니죠. 누굴 위하여? 주를 위하여.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 제가 대전강의에다 올려놨잖아요. 자,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 참 은혜가 되는 노래에요. 그러면 제가 비교해볼게요.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하고 <사랑이 지나가면>하고 둘 중에 어느 게 더 은혜가 됩니까?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가사가 있는,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 노래하고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노래하고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이 말이에요. 어떤 것도 자동적으로 영광이 안 되죠.

주께서 나를 삭제시킨다면, 주 앞에서 나를 희미하게, 옅어지게 한다면 그 어떤 노래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원리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원리는, 성령이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죠. 그러면 그 원리가 우리한테 오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나에 대해서 ‘잘했다 못했다, 이것은 내 실수야, 이것은 나쁜 짓이야, 옳은 짓이야’ 가 완전히 날라가버려요. 어떤 것 하나라도 내가 책임질 필요 없는 주의 일이 됩니다, 주의 일. 이게 복음이에요.

지식으로 예수 알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여전히 누가 살아있어요? 말씀 지키고 신앙생활 하는 내가 중요해. 주님이 안 중요하고 주님을 믿는 내가 중요해버려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했죠. 자기 자신을 그대로 지키는 자는 다 어디간다고요? 지옥 가 있어요. 중간에 자기를 밀어내야 되는데 거지 나사로처럼 밀어내야 자기는 안보이고 뭐만 보입니까? 주님만 보여야되는데 자꾸 주님을 이용할 생각하니까 십자가 이용해서 내가 천당 갈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을 천독 만독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성령을 안받아놓고 받은 척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상 내놓으라 하면 뭐를 내놓느냐 하면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잘된 것, 착한 것 내놔요. 주님께서는 받은 거 내놓으라니까, 네 것 내놓지 말고 받은 것. 너의 일 내놓지 말고 주의 일 내놓으란 말이죠. 너를 부인시킨 일 내놔라. 나는 죄인입니다. 이게 아니고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제가 주제넘게 끼어든 그것이 나쁜 죄입니다. 그걸 내놓으란 말이죠. 내가 끼어들 잽도 안 되는데 끼어들고.

어디 내 인생에 내가 끼어들어요. 값도 못하면서. 우리가 값이 됩니까? 내 인생에 내가 콩 놔라 팥 놔라 할 값이 돼요? 참 성경에서는요, 독침처럼 우리를 찔러주는 말씀을 합니다. 네가 네 힘으로 머리를 희게 할 수 있느냐. 뭐 흰머리 계시니까. 한 자나 길게 할 수 있느냐. 꼭 우리가 불가능한 것만 이야기해요. 왜? 우리는 가능한 걸 추구하는 이유가 잘난 척하고 싶어 환장해서 그래요.

내가 빠져버리면 내가 사는 보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 본능입니다. 아니 내가 없는데 내가 왜 살지? 이런 식이에요. 뭐 괴로운 일 있으면 자꾸 자살할 생각만 하고, 자살. 한강 요새 물이 많이 불었다마는 걸핏하면 번개탄 피우고 뛰어내릴 준비하면서 유서는 또 그럴싸하게 쓴다고, 아내야 미안하다. 미안하면 왜 죽어?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짐이 되는구나. 빚이 많은 나 하나 죽으면 너희들이 호강하겠지. 유서 써가지고 번개탄 피워놓고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자살하는 것은 본인이 기어이 안 죽겠다는 항거입니다. 심보가 안 죽겠다는 거예요. 물에 빠지면서도 I'll be back. 이런다고요. 용광로 물에 빠지면서도 터미네이터가 마지막에 하잖아요. 내가 다시 돌아온다. 내 명예는 건지고 내 몸은 장렬하게 없어지겠다는 거예요. 아예 장렬하게 불에 화장을 해버리지. 지옥에 가면 전부다 나때 에요. 커피라떼 이런 것처럼 내 때는 이렇다.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역사를.

공허한 자에게는 그림자도 없어요. 역사라는 그림자가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내 일이 아닌데 자기 그림자가 왜 있어요? 내 일이 아닌데. 빛 앞에서는 그림자가 없어요. 바로 수직으로 서면 그림자가 없어요. 삐딱하게 보니까 그림자가 생기는 거예요, 삐딱하게 서니까. 주님께서는 아예 성도한테 죄의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만들었어요. 너의 그림자가 없어요. 네가 없는데. 그림자가 있다면 그건 주님의 그림자죠.

우리는 주님의 그림자에 푹 싸여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받은 거 내놔라. 네가 받은 것. 성령 내놔라, 성령. 그런데 성령은 자신을 내놓는 게 아니고 누굴 내놔요? 성령은 누구 이야기 한다고요? 주님 이야기하죠. 바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내놓는 겁니다.

그럼 구약 때는 어떻게 되느냐. 구약의 율법의 발전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율법의 발전이라는 것은 율법의 조항이 풍부해지고 늘어나는 거예요. 법조항이 늘어난다. 자, 법조항이 늘어나게 되면 더 지적할 일이 많아지겠죠. 그만큼 이 지상에서 지적할 일이 더 새롭게 생기는 거예요. 계속 생성되는 겁니다. 죄가 계속 많아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죄를 더 지었다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창안해 낸 새로운 자기 의로움과 자기를 지키는 변명거리가 더 많아졌다 이렇게 보면 돼요. 전라도 담양에 대나무 숲 있잖아요. 그 대나무 숲이 촘촘해요, 멀리서 보면. 야, 이거 사람 들어가겠나. 그런데 자세히 보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어요. 아무리 멀리 있어서 법들이 많다할지라도 사람들은 자기의 행함 중에서 법의 지적을 안 받을 구석은, 빈틈은 기어이 찾아내요. 그게 윤리, 도덕입니다. 그게 철학이고요.

철학은 인간이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그러한 논리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끊임없이. 뭐든지 죄가 되고 뭐든지 죽을 죄인 되게 되면 내가 내 유혹거리가 되는 나를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 그것이 위협받잖아요. 그래서 ‘늘 죄만 짓는 게 아니고 착한 구석도 여기 있잖아’ 라고 내놓기 위해서 지킬만한 법들을 발명해 내는 거예요. 발명해버리면 그걸 발명한 나는 지킨 자가 되고 미처 내가 지어낸 법을 모르는 자는 뭐가 돼요? 나에게 범죄자가 되면서 나에게 통치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몰아세웁니다. 여러분들이 아이스하키 하는 것 보면 아이스하키 스틱가지고 조그만 퍽(puck)을 자꾸 몰고 다니죠. 율법이 어디로 몰고 가느냐 하면 ‘왕을 주세요’ 까지 몰고 가요. 사무엘상 8장에. 그러면 사무엘상이니까 그전의 시대는 무슨 시대냐 하면 사사시대죠. 사사시대에 반복구가 나와요. 어떤 일 벌여놓고 꼭 반복구가 나오는데 그 당시에 왕이 없으므로 본인의 소견에 보기 좋은대로 했다.

본인의 소견에 좋은대로 했으면 나라꼴이 잘 되어야 될 텐데 나라꼴이 되지를 않는 거예요. 서로 대장이 너무 많아서. 사사가 너무 많아. 대장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불편한 거예요, 사는 게. 사는 게 불편한 겁니다. 현대 국가가 대체로 정당이 달랑 두 개에요. 실제로 작은 것까지 하면 미국 같은 경우 수백 개 되지만 그러나 대세를 차지하는 것은 민주당과 공화당이잖아요. 딱 두 개라고요. 번갈아가면서 찍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최고의 어떤 고정된, 안정된 권세처가 있어줘야 덩달아 우리가 삶에 있어서 안정감을 얻게 되는 겁니다.

자식들이 부모한테 요구하는 것 중에 많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생계비 제공, 조달하는 것도 요구하지만 정신적으로 자식들이 부모한테 제일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제발 좀 정서적으로 안정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싸우지 말고. 부모들끼리 싸우게 되면 왜 자식들이 불편하냐 하면 내가 어느 편에 설지 자꾸 혼동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빠 편에 서면 엄마한테 당하고 엄마 편에 서면 아빠한테 당하고.

그러니까 에서와 야곱 같은 경우에 패가 갈리잖아요. 아까 제가 얘기했죠. 한 가정에 경계선이 생겨버렸다고요. 백날 신앙대로 살아라, 교회 나와라, 바르게 살아라 해도 아빠, 엄마 싸워버리면 그것들이 다 구라가 되어 버립니다. 자기들끼리 하나가 안 되는데, 뭐. 그럼 하나 되면 되지. 하나 된 게 왕이에요. 그 집안의 왕이 엄마가 기가 세면 엄마가 왕이고 아빠가 기가 세면 아빠가 왕이에요. 아무나 하세요, 그냥. 기 센 사람이 하세요. 아빠 왕 만들어놓고 밑에서 흔들지 말고 그냥 본인이 왕 되면 돼요, 본인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권을 가진 자가 왕 노릇을 하죠. 엄마가 경제권을 가지면 엄마, 기 살아가 되고 아빠가 경제권을 가지면 아빠가 또 지 마음대로 취미생활하고 지가 대장, 큰 소리치고 그러죠, 이 사회에서는. 여기서 이 아파트 명의가 누구냐. 공동명의냐. 과거에 남편이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모든 명의가 아내한테 다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김학래 지 명의 하나도 없어요. 이혼 1위가 되기 전에 빨리 아내한테 알아서 수그리 그렇게 살아야 돼요, 협의해서.

이게 뭐냐 하면 권세를 현실적으로 한 곳에 모아야 우리가 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뜻은 뭡니까, 율법은? 내가 율법으로 그렇게 몰아넣었다. 그게 바로 죄이다. 왕을 달라는 게 죄에요. 왕이 왜 필요한데? 왜 왕을 달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사는 게 정당하다는 것을, 그리고 살 때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안정되게, 평화롭게 살 권리가 괜찮은 왕을 만나서 나한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음을 내가 스스로 확인하고 싶다는 거예요.

무탈하게, 탈 없이 잘 산다는 것은 곧 내가 악이 아니고 의롭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 탈 없이 무탈하게. 뭐 애들이 아프기를 하나 공부를 못하기를 하나. 시험 치면 무조건 백점, 애들은 뭐든지 알아서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면서 지 방에 가서 알아서 숙제 다 하고. 딸애는 ‘어머니, 힘들죠? 제가 도울게요.’ 지가 또 요리 배워가지고 하고 ‘엄마, 내가 주물러줄게.’ 어깨 주물러주고 ‘엄마는 가만히 있어요. 제가 요리해가지고 전부다 갖다 바칠게.’ 접시는 접시대로 집안 살림을 어떻게 그리 잘하는지.

무탈해. 탈이 없어요. 탈이 없으니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역시 우리가정은 의롭기는 의롭구나. 의로우니까 하나님의 징벌이 없지요. 징벌이 없으니까 그만큼 착하다는 거예요. 이게 미친 거거든요, 사실은. 그러면 그 사람은 뭘 내놓겠어요? 성령을 내놓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다를 내놓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다를 내놓겠죠. 그렇게 정당하다를 내놓을 때 주님께서는 우쌰! 성공한 거예요.

율법으로 계속 몰아세운 마지막 모습은 창세기 때 선악과를 따먹은 그 심보를 그대로 노출시키죠. 더러운 이야기지만 종기나면 피부가 볼록하게 올라와 있잖아요. 아이, 나 이거 더러워서 이야기하기 싫은데 이야기 해야 돼요. 팍 터트려버리면 그 안에 들어있는 누런 것이 노출되지요. 죄송합니다. 더러운 얘기 해가지고, 아까 빵 먹었는데. 교묘하게 가식적으로 위선적으로 덮어있는 것을 주께서는 콱 짜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감사해야 돼요. 왜? 주님이 바로 고름덩어리거든요. 누구도 기피하는 겁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저러고는 못산다고 기피하는 대상이 예수님이에요. 아무 흠모할 게 없어요.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그거 미친 거 아니에요? 왜 고름을 좋아해요?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러나 성령은 자의로 자기 뜻을 이야기하지 않고 누구 이야기한다? 그 분이다. 네가 기피했던 그 분이야, 이 베드로야. 네가 도망쳤던 그 분이야. 네가 부인하고 저주했던 그 분, 네가 알아서 버린 패잖아요. 네가 버린 패가 너를 살리는 거야.

그러니까 베드로가 잘 버렸죠. 예수님을 잘 버려야 베드로가 구원받을 때 아무 소리도 못한 거예요. 자기가 버렸으니까. 자기 쪽에서 차버렸으니까요. “나는 너하고 살기 싫어.” 하고 남편이 아내를 내쫓아버렸어요. 아내가 매달렸는데도 불구하고 “꼴 보기 싫어, 나는 다른 여자 있어. 할 수 없어. 잘 가.” 하고 갔는데 그 여자가 나중에 세상적으로 성공을 해서, 또 드라마 쓴다, 애까지 번듯하게 판사에 의사 다 시켜가지고 왔을 때 “미안해, 그 때 내가 잘못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겠어? 너 예수 믿는다며? 나도 이제부터 예수 믿을게.”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입니까? 이게 누굴 위한 거예요.

용서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용서해 달라 소리하면 안돼요. 용서받아서 또 뭘 얻을 건데? 또 같이 붙어 살라고? 어디 꼼수를... 용서를 요구할 깜냥이 됩니까? 그거 되지도 않죠. 안돼요, 우리는.

그래서 <주 예수는 나의 산 소망>이라는 가사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주의 십자가가 나를 부를 때’. 내가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고 주의 십자가가 나를 불러요, 같이 죽자고. 내 십자가에 네가 필요하다고. 너는 가망성 없기 때문에. 가망성 없는 것, 그것이 십자가 사랑을 사랑만,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만 고스란히 100% 드러낼 수 있는 대단한 재료가 되기 위해서 내가 율법으로 너를 몰아세웠다.

물침대 한쪽 누르면 저쪽이 튀어나오듯이 계속 율법으로 몰아세우면 인간은 자기 정당성을 버리는 게 아니고 ‘그래도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해가지고 자기 정당화될 수 있는 요소를 계속 발굴하고 있어요. 계속 찾고 있어요. “너 사람 죽였지?” 그러면 “난 하나밖에 안 죽였다. 저사람 열 사람 죽였다.” 이런 식이에요. 꼭 이런 식이라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계속 발굴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그다지 나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기 내부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자꾸 그 매커니즘이 가동되는 거예요.

우리의 죄악 된 마음이라는 것은 자기 정당화와 자기 의를 계속 쌓는 겁니다, 그게. 지적받으라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용도로 용도 변경이 된 겁니다. 우리는 율법을 써먹을 데가 없어요.

십계명이 주어졌다는 말은 앞으로 어떤 인간도 십계명에서 위배되는 그런 민족을, 십계명을 시작으로 해서 만들어내겠다는 뜻이에요. 어떤 인간도 십계명을 준수한 인간이 없게 그런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한번 몰아세워볼까? 이런 거예요. 결국 이스라엘은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망했죠.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써 비로소 구원자가 나타난 거예요. 같이 망하자. 나도 망할게. 우리 망함의 자리에서 만나자. 라고 성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지만 그 자리를 비우시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졌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 이 독특한 죽으심 이 안에만 거룩이 있고 의가 있는 거예요, 이 안에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 안에만 들어있어요. 그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면 우리가 나만 죽는 것 말고 주님의 죽으심에 일찌감치 같이 합세하도록 성령께서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남이라는 게 없고 간섭하더라도 주님이 보시기에 내 영역, 영토에 해당되지 않는 남이 있을 거예요. 주님께 해당되지 않는, 주님께서 초청하지 않는 남이 있을 거예요. 그걸 내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나 살인하는 거나 도적질하는 거나 악행을 같은 류로, 같은 종류의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라.

다시 복습하게 되면 남이라는 것은 내가 먼저 정립되어 있으니까 남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럼 남의 일에 간섭할 때는 상대적으로 ‘나는 너보다 낫다’를 과시하기 위해서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예요. 아저씨, 차 똑바로 안 해요? 이 말은 뭡니까? 이 말은 나는 똑바로 하고 있는데 당신은 지금 교통질서를 흐리고 있잖아. 그럼 내가 위협받으니까 당신 똑바로 하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묻죠. “너 왜 간섭했냐?”, “내가 위협받으니까.”, “그 위협 좀 받으면 어때.”, “내가 죽잖아요.”, “너 이미 죽었잖아. 또 잊어버렸구나. 네가 이미 죽었잖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저씨, 같이 죽어요. 나도 죽고 아저씨도 같이 죽어요. 물귀신 작전 나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여보, 당신 술 먹고 늦게 들어오지 마.”, “왜? 술 먹으면 좀 어떤데?”, “우리 가정의 분위기를 흐렸잖아.” 누구 가정? 내 가정. “나는 술이 좋아 술 먹는데.” 그럼 “당신은 왜 술 먹습니까?” 물으면 남편 하는 말이 “이거 내 가정이거든.” 아니 하나의 가정을 두고 서로 지 가정이래. 이게 마음이 통할 리가 있습니까? 우리라는 것은 이거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있을 수 없어요.

우리는 누구를 안에 집어넣어야 우리가 성립돼요. 너와 나가 하나 되는 것은 제3의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그 분, 제3자의 처벌이죠. 주님이 너도 처벌하고 나도 처벌할 때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내 기 살리고 네 기 살리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나를 죽은 자로 하고 너를 죽은 자라고 할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죠.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무슨 경계선에서 벗어났다? 선과 악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선과 악에서 벗어났다고 자꾸 고집부리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요. 감사하면 그건 누가 뭐래도 선과 악에서 벗어난 거예요, 감사하면. 감사하는 순간에 나로 인하여 감사 안하거든요. 감사한다는 말은 나 말고 다른 어떤 분에게 감사한다는 뜻이잖아요. 감사가 되면 그 순간 나를 봅니까, 안봅니까? 나 잘했나, 못 했나 안보죠. 나를 죽은 자로 신경도 안 쓰고 나에게서 나를 밀쳐버리니까 내가 없으니까 남는 것은 뭐밖에 없어요? 감사밖에 없죠.

감사가 없으면요, 자꾸 뭘 해야 된다고 여겨요. 다음엔 그런 짓 안해야지. 내가 지금 실수한 거야. 다음에는 제대로 해야지. 감사가 없으면 미흡함을 느끼고 그 미흡함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새삼스럽게 새로운 모험에 나설 수밖에 없어요. 모험은 위험한 거예요. 그 모험이 정당한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또 법을 만들어.

아까 법을 만드는 이유는 뭐라고 했습니까? 법을 만드는 이유는 자기 정당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죠. 그 법과 법의 틈새 사이에 나의 정당함의 근거를 또 만드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이미 우리가 죽은 자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서 빈 무덤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빈 무덤이 될 수 없는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로서 확인이 됐었어요. 부활이 안 되는 존재는 죽어 마땅한 거예요. 죄인인 거예요. 주님이 우리한테 묻는 건, 너 부활할 자신이 있어? 묻는 거예요. 없어요. 그러면 죄인 맞아요. 예수님만 빠져나온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담양에 촘촘한 대나무 숲 같은 새로운 법을 만든다 할지라도 결과는 사형입니다. 어떤 정당한 법 가지고 자기 옹호에 나서도 소용없어요. 그건 사형이죠. 하나님의 뜻은,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나의 존재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근원적으로 감사할 일입니까.

사람이 내 존재를 생각한다면 그냥 존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선악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왕 존재하는 것, 착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되죠. 착하게 살려면 내가 신경을 많이 쓰게 돼요, 자꾸 검토가 되어야 되니까. 자꾸 일을 벌여놓고 내가 스스로 나한테 채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이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에요.

내가 아버지로서 아버지 값을 못했구나. 이게 얼마나 아버지로서 힘든 일이에요. 내가 엄마로서 미안하다.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도 못해주고 엄마가 돈 번다고 뛰어다니느라 따뜻한 밥도 못해주고 미안하다. 자식들이 뭐 감동받을 줄 알아요? 엄마, 걱정하지 마. 또 돈 벌러 나가. 왜? 짜장면 시켜먹게. 엄마밥보다 훨씬 맛있어. 애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감동받고 그런 거 없습니다. 부모를 이용할 재주가 타고났기 때문에. 그러니까 감동받고 눈물 흘리고 그런 드라마에 있는 거를 미리 상상하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분명히 적습니다. 악이 뭐냐. 감사가 없는 게 악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감사가 안 나오면 악이 되는 겁니다. 자기 쳐다봤다 이거죠. 감사 없음이 악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범사에 뭐하라고 했습니까? 성령 안에서 너희를 권하노니 범사에 감사하라. 네 계획은 아예 없다. 성도는 자기의 계획, 기대, 목적 다 없애버려야 돼요. 그게 내 존재의 정당성을 자꾸 보장해주는 것처럼 제공되기 때문에. 나 그 일 때문에 죽으면 안돼. 이런 식입니다.

‘10월 4일에 내 딸 결혼식 하는데 그 때까지는, 나는 딸 손잡고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날 죽이면 안 됩니다.’ 이러거든요. 기도 가운데 ‘절 죽이면 안 됩니다. 아프거나 죽이면 안 됩니다. 딸애 손은 잡고 가야되죠.’ 그러면 주님이 묻습니다. ‘딸애 손 잡는 것이 왜 정당하냐.’ 그러면 기도하는 사람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다들. 다들 그렇게 하고 만약에 아버지 없으면 쟤는 뭐 아버지 이혼했나, 어디 갔나? 궁시렁거려가지고 이상한 나쁜 소리들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묻죠. ‘왜 나쁜 소리를 들으면 안 되는데?’, ‘내 가오 다 무너지잖아요.’, ‘가오 다 무너지면 왜 안 되는데?’, ‘나는 정당하거든요.’, ‘네가 어디를 봐서 정당한데? 왜 자꾸 너는 너만 쳐다보느냐? 네가 어디가 정당하냐? 정당한 근거를 대라.’,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잖아요.’

‘지옥가라고 태어나게 했는데? 죽은 자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리기 위해서 내가 태어나게 했는데? 왜 너는 일방적으로 생각하느냐?’, ‘교회에서 그렇게 안 배웠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엉터리야. 네가 엉터리 하나님을 골라잡았구나. 네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네가 네 마음대로 정했구나. 네 정당성, 너의 사는 보람을 채워주는 그런 희망을 주는 하나님. 그거 네가 만든 거야, 우상이야.’, ‘그래도 하나님은 다들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십자가 걸림돌이 그게 좋은 하나님이야, 그게?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이 날 배척했어. 인간들은 진짜 하나님만 배척해.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배척한 거야.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악마로 인하여 죽임 받고 배척당한 거야.’

배척되지 않는 신은 악마가 만든 가짜 신입니다. 악마는 자꾸 작업을 하죠. 법을 만들고 그 법은 나의 정당성을 보장한다. 이게 악마가 계속해서 그래서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독촉하는 거예요. 우리를 독려하는 거예요. 나쁜 짓 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쁜 일이고 착한 일이고 간에 우리에게는 오직 주의 일밖에 없지, 내가 점검에 나설 나의 일은 없는 겁니다.

들어도 5분도 안 지나서 다 잊어버려요. 5분도 안되어서 다 없어질 걸요. 워낙 삶의 버릇이 되어가지고, 불평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가지고. 심지어는 감사 안하기 위해서 일부러 뭐가 부족한가 그거 찾으러 다녀요. 뭐가 부족한가 찾는 거예요. 감사 안하려고.

나의 가치 평가에서 여러분 자신을 빼주세요. 부탁해요~ 여러분의 가치평가에서 여러분 자신을 빼주세요. 그래야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공부에 처음에는 피곤해서 못가고 두 번째 가려니까 전에 안간 게 미안해서 못나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너 요새 안보이대? 하면 성경공부 참석해야 천당 가나? 성경공부 참석해야 천당 가? 성경공부 참석 안 해도 예수 믿으면 천당 가잖아.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법을 누가 만든 거예요? 그 법은 참석한 사람이 만들었습니까, 참석 안한 본인이 만들었어요? 본인이, 본인이 법을 만들었죠, 전두환처럼 본인이 만들었죠. 이게 뭐냐. 자기가 왕인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은 뭐냐 하면 “본인이~”하는 그런 모습으로 내 내부의 악마성이, 자기 절대성이 출몰하도록 율법이 계속 강압하게 되면 그 율법에 대한 변명이 계속 동반해서 증강해요. 죄 지을 때마다 변명이 100가지가 더 튀어 나오죠. 생각해보세요. 죄를 짓게 되면 나를 선한 쪽에서 보기 위해서 죄가 선한 이유를 100가지도 더 댄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장난질을 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이런 장난질 자체가.

죄는 감사가 없는 게 죄에요. 참 다른 모임 같으면요, everybody repeat~ '감사가 없는 게 죄다' 뭐 이렇게 하겠는데 여러분들은 다 성숙한 사람들이라. 제발 선과 악을 집적거리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선악체계에서 이미 죽은 자이고 거기서 벗어났어요. 선과 악을 장난감처럼 집적거리며 갖고 놀지 마세요. 자꾸 자기 자신이 얼마나 착한지 모험에 나서지 마세요.

50km/h 적혀 있는데 55키로 가서 걸렸다. 아, 아깝죠. 벌금 3만원. 그런데 어떤 사람은 55키로 가도 안 걸렸어요. 60키로 갔는데 안 걸렸어. 70키로 갔는데도 안 걸렸어요. 나중에 100달렸는데도 안 걸렸어요. 그 사람 죽었어요. 이미 죽은 자에요. 왜냐? 스스로 과연 내 행운이 어디까지 이르는가, 자기가 자기를 측정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유혹거리이고 내가 나를 다루려고 한 거예요.

주님께서 주신 걸 내놓으라 하면 감사밖에 나올 게 없거든요. 우리가 세리와 창기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미 우리를 바닥 치는 존재로 본 거예요. 쓰레기로 본 거예요. 쓰레기인데 주님도 같이 쓰레기 되셔가지고 그 주님의 쓰레기에 참여된 자이기 때문에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냥 성령으로 의롭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했다 이 말이죠. 이게 복음 아닙니까? 그럼 받은 복음을 내놔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가 어느 정도 착할 수 있는가 그걸 자꾸 측정한다고요. 뭐 꼭 참석해야 천당 가나. 나 참석 안 해도 천당 갈 자신 있다. 왜? 예수 믿으니까. 나 너보다 십자가 더 안다. 뭐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있을 때는 누구하고 경쟁이 되어 버려요. 그러나 우리는 경쟁 상대자가 없어요. 고만고만한데 도토리 키 재기. 뭘 경쟁해요? 우리가 아직 그런 기회가 안 되서 죄 못 짓는 거지.

장발장이 쇼윈도에 있는 빵을 훔칠 때 장발장이 배터지게 먹은 데에다가 또 그 빵을 훔쳤습니까? 배고파서 빵을 훔쳤잖아요. 그러면 누구나 장발장같이 배고프면 본능 상, 살아야 되겠다는 게 본능이기 때문에 유리창 깨고 빵을 먹을 수밖에 없죠. 그러면 장발장이 성도라면 4년형을 때리든 10년형을 때리든 이미 죽은 자로 있어야 되는데 내가 한 행위에 비해서 죄 값이 너무 무겁다는 거예요.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창세기 4장에서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가인이 이야기했잖아요. 가인 본색 다 드러났어.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관심이 없고. 주의 계획이 뭐냐. 뱀이 발꿈치를 물고 여자의 후손이 머리를 친다. 그런 거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나의 정당성, 비록 동생 죽였지만 남까지는 안 죽였잖아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끝까지 그래도 정당한 게 뭔가 있을 거야. 그게 진짜 나의 진면목이야. 그걸 발굴하는 데에 온 신경을 쓰는 거예요. 교회에 다녀도 마찬가지죠.

16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 받은즉” 왜? 한 영이니까, 한통속이니까. 모든 게 본의 아니게 주의 일에 말려들었으니까. “주께서 얼마나 씹어댈까요. 예수 믿는다는 작자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해?”, “아니, 내가 예수 믿는 작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따지려거든 주님께 따져라, 인간아.” 왜 나보고 따지냐 이 말이죠. 주께서 상황을 그렇게 몰아넣었는데. 왜 내가 마치 그 일을 안 할 수 있는 그런 권한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나를 보지 마. 나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거야.

그러면 “자기변명이 너무 심하구나.”, “심하든 뭐든 네가 너를 측정하는 것처럼 그 측정으로 나를 측정하려 하지 마라. 나는 소속이 다르다. 너하고 가치가 달라. 나는 받은 걸 내놔야 되니까.” 뭘 받았습니까? 쓰레기인데 용서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성령이 이야기하는 그 피, 십자가의 다 이루심. 그거 내놨다고 착하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착한 게 아니고 이것조차도 주의 일입니다, 이 고백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일은 아예 없음을 알고 매사가 주의 일이 됨을 감사함으로 발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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