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7강-다윗의 등장

아빠와 함께 2021. 1. 16. 17:03

2021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7강-사무엘상 강해 : 다윗의 등장

제 7강 시작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4장에서, 사무엘한테 사울이 망령되이 행했다는 소리를 들었죠. 그게 몇 장이냐 하면은 13장이었습니다. 그 망령되게 행했다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13장 13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14절,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15절,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당신 잘렸다는 이 말이에요. 당신의 인사권자가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제거합니다. 왜? 하나님 자기가 자기를 드러내는 데는 당신이 기름부음에 적합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맞는 사람을 구해서 당신하고 교체를 할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교체될 사람이 있느냐? 없죠. 없고, 뒤에 요나단이 등장해서 요나단이 왕보다 더 율법에 적합한 사람이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사무엘상 14장 6절에 할례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루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전쟁의 승패는 율법이 없는 그걸로 끝났다. 우리는 그걸로 실행에 옮기면 된다. 이게 바로 율법에 맞는 우리 이스라엘의 행동 모습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요나단이 왕이 되면 어떻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요나단이 전쟁을 통해서 드디어 사울은 왕으로서 기름을 제대로, 백성들한테 무시당할 정도가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이 사울이 한나가 예언한대로 적대적인 관계, 기름 부은 자에 대해서 공격하는 그러한 악한 모습을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이 꼭 필요해요. 그리고 15장에 전에 이야기했던 아말렉 할 때에 다시 사울이 그 전쟁을 하면서 일단은 승리했습니다. 승리했는데, 왜 당신은 다 진멸하라고 했는데,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좋은 것을 왜 남기십니까? 라고 하니까, 사무엘상 15장에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21절에 나오죠.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했습니다.”라고 하니까 이것을 사무엘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은, 23절에 보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하는 짓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 이것은 율법을 위반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아주 적극적으로 율법 말고 다른 식으로라도 나는 이스라엘을 지켜내겠다고 마음을 품을 때나 나올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생각한 이스라엘이 아니고 당신은 당신위주의 이스라엘을 지금 챙기고 있고 따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라고 사무엘이 아주 직격탄을 날리는 거죠. 왕이 할 일은 제사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자세로서의 제사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만약 이 정신이 없다면 당신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가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간단히 말해서 이런 뜻이에요. 내가 율법을 다룰 수 있는 입장이 안 된다. 율법은 누가 다루느냐, 하나님께서 왕에게 줬으면, 왕은 율법의 주인공은 주님한테 있거든요. 주님한테 있고, 하나님한테 있고, 그 하나님이 율법을 내주는 거예요. 다시 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줬죠. 하나는 뭘 줬다? 사사 주죠. 사사에게는 뭘 줬다? 성신, 여호와의 영을 주죠. 아무 자격도 없는데. 제사장에게는 뭘 줍니까? 율법을 주잖아요. 그러면 계속 율법이, 사사의 영이 어디서 흘러나와야 돼요? 하나님께 흘러나와야 되죠. 하나님의 형상화된 것을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궤죠. 언약궤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겁니다. 언약궤에서.

흘러나올 때에 이 왕은 뭘 쳐다봐야 해요? 계속해서 율법에 대해서 새로운 지시가 있는 것을 쳐다보면서 순종해야 되죠. 그런데 이걸 꺾어버리면, 이것은 자기가 율법을 시행해야 된다는 의도가 뭐냐, 내 나라를 못 놓겠다. 이 이스라엘이 갑자기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누구 나라가 되느냐, 나의 나라가 되는 거예요. 나의 나라. 이거는 국가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목사는 자기 교회고 교인들은 자기가 구원했고요. 내가 아니면 구원이 안 됐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우상숭배에요.

이런 우상숭배인 교회가 대면이니 비대면이니, 대면예배니, 비대면 예배니, 앞에 그런 게 왜 붙습니까? 그냥 예배죠. 순종하면 될 게 아닙니까? 죽으라. 순종할 때 목적이, 어떻게 하면 죽습니까? 니가 순종하면 죽는다. 이래 되거든요. 목적이 어떻게 하면 살겠습니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습니까? 지금 코로나 걸릴 때가 안 됐어. 오지 마. 이래 하면 그것도 순종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습니까?” “니는 아직 죽으면 안 돼. 더 살다 죽어야 돼.” “아이, 아깝다. 이때인데.” “기다려. 순종해.” 그러면 교회 안 나와야죠. 그런데 안 나오는 이유가 죽으려고 안 나오는 게 아니고 살라고 안 나오고. 다시 이 가정은 주님의 가정이 아니고 내 가정이고 내 인생은 주님의 인생이 아니고 내 인생으로 사울처럼 지키겠다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조치를 하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죠.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거예요. 15장 23절에. 그 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사울이 사무엘을 붙드는 겁니다. 뒤늦게 순종의 모습을 보이겠다고, 가시면 아니 되옵나이다, 하고서 붙드는데, 하필 27절에 보면 “사울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 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도대체 이 옷의 제품이 어느 제품인데, 홈쇼핑도 이런 제품이 안 나와요. 너무 쉽게 찢어지잖아요. 좀 든든한 걸 잡으라고 하지. 조금 잡았는데 쭉 찢어진 거예요. 찢어진 면적을 보니까, 28절에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사무엘은 찢어진 천까지 전부 다 당신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울이 그 사무엘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33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거는 아각한테 이야기한 것이고요. 34절,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 35절, “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후회했다는 이 말은 내가 일을 잘못했구나가 아니라 그 잘못한 것이, 그러한 핸디캡이 있어줄 때 비로소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어떤 식으로 어떤 존재이냐를 보여주는 계기로서 작용한 겁니다. 하나님이 후회했다는 말은 이거는 나의 후회가 아니라 차라리 니가 후회할 일을 내 대신 보여준다는 겁니다. 니가 하는 짓이 너에게 후회할 짓이 될 짓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16장에서 그 다음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예상하죠.

자, 사울이 잘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왕이 된다는 것은 뭘 거쳐 왔습니까? 사사 폐기하고 제사장제도 이거 극복하고 그걸 통합한 체제가 왕 체제잖아요. 왕이 없다고 해서 다시 사사시대로 돌아갈까요? 다시 제사장제도로 돌아갈까요? 그런 것은 없어요. 이미 그런 것의 한계를 다 드러내고 난 뒤의 왕이기 때문에 어쨌든 그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왕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왕으로. 나라가 대통령이 못한다고 대통령을 없애버리고 공석으로 만들면 그게 나라입니까? 쥐나 개나 다 하는 거예요. 청와대에 애들 데리고 가서 잔디밭에서 놀고. 그러면 나라가 되겠어요? 안 되겠죠.

왕 제도가 왔으면 이미 왕 제도를 통해서 왕 제도 자체가 이게 멸망의 신호탄이에요. 멸망의 신호. 멸망의 신호인데, 여기서 분기점이 등장해요. 분기점. 분기점으로 누가 등장합니까? 누가 등장할 거예요. 한나가 예언한, 장차 기름 부은 자가, 합당한 기름 부은 자가 나온다는 그 왕은 왕의 실패 자리와 병행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의 구원정신은 심판 속에서만 뭐가 나온다? 구원이 나온다. 구원은 어디에서만 나온다?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이 안 나와요. 보편적 심판이 이루어진 가운데서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다 유황불을 받아야 비로소 거기서 롯의 가정이 나오죠. 여리고성이 다 무너져야 기생 라합이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누가 구원받았다고 하거든 이 세상 망한 건 줄 아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자는 어디서 나옵니까? 전체 심판의 경우에만 구원이 나와요. 구원받았다는 말은 이 세상 멸망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 멸망했다고 하면 너무 안 좋게 들릴까 싶어서 나 구원받았다고 이런 소리하는 거죠.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이 구원자는 누구냐? 다윗이다. 그럼 다윗은 사울이 하는 그 나쁜 짓을 안 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거는 엄청난 오해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백성들이 원해서 됐잖아요. 그렇다면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원하는 왕의 한계는 드러났어요. 그러면 기름부음은 있어야 되고, 왕의 자리는 있어야 되고, 이미 예언된 거고. 그럼 이 왕은 인간의 요청과 전혀 배제된 채, 인간의 요구사항이 전혀 스며들지 않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그 사람이 그 다음에 뭐가 되겠어요? 차기 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면에서 이 다윗이 왕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에는 일체 왕이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왕이 없어요. 왕 다음에 솔로몬이 아니에요.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 아니고. 다윗1, 다윗2, 다윗3, 다윗4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다윗의 자손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원했던 왕은 이미 끝났으니까. 인간이 원해서 망해버린, 심판받은 그 자리에, 심판 자리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다윗의 왕 자리는, 비록 다윗은 죽어서 시체가 됐지만 그 다윗의 자리는 거기서 부활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윗의 후손, 다윗의 자손이 일어나서.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가 된다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다윗은 다시 살았다가 돼요.

다윗은 다시 살았다. 왜? 자손이 아버지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굴 구원합니까? 아브라함을 구원하듯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다윗을 구원하는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자리가 인간이 예상한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리니까.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쉬운 예인지 어려운 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있지도 않은데 기름부음이 먼저다 이런 식이에요. 사람이 있지도 않은데 기름부음이 먼저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배를 타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그 배 안에 그 사람의 소지품이 발견되었다. 이게 앞뒤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안 맞죠. 나는 그 현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배에 타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물이 빠지고 난 뒤에 바닥을 조사를 해보니까, 그 배 안에 그 사람의 핸드백에서 소지품과 신분증이 나왔다. 이 사람은 배에 타지도 않았는데. 이게 말이 안 되죠. 이게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왜?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을 배제하는 방식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창세전에 구원받았다. 이 원리가 이 원리예요.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 뭐 미움의 대상이 없는데. 내가 에서를 미워하기 때문에 에서는 나중에 꼭 태어나야 돼요.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거는 모든 철학자들을 분개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입니다. 사람의 잘잘못이 뭔가 해서 심판하는 것이 이게 공정성에 맞는 이야기지, 사람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꼭 잘못하기 위해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야 하는 거예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윗에게 가능한 겁니다. 사무엘상 17장 봅시다. 진도 안 나간 것 같은데 지금 진도 많이 나간 거예요. 다윗의 경우가, 왜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다윗에게 기름부음이 먼저 있어줘야 하느냐 하면은, 이것은 다윗의 모든 발언은 언약궤를 향한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언약궤를 향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이 짐작했겠지만, 다윗의 기름부음의 정당성은 나중에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은, 무엇과 만나겠어요? 언약궤와 만나는 겁니다.

이게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나옵니다. 다윗이 여부스족 수도, 지금의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언약궤를 내게로 가져오라. 내 모든 지시는 어디서 왔는가, 내 기름부음의 모든 명령은 어디서 왔는가, 언약궤에서 온 거예요. 언약궤를 가져오라. 언약궤가 나보다 먼저 있음이에요. 언약궤가 있음으로 내가 있게 된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에게 뭐가 보였습니까? 언약궤가 있죠. 언약궤의 언약궤다움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언약궤에서,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거든요. 이 형상을 위해서 이 땅에서 기름 부은 자, 기름 부은 자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자화상이죠. 하나님의 이름인데,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의 과정을 보여주신다? 적들을 물리치는 일이 완료가 되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궤의 취지에 부합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과 언약궤가 만나는 거예요. 사무엘하 6장을 한번 볼까요?

6장에 보게 되면 다윗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원래 언약궤가 여리고에 있다가, 요단강을 건너와서 여리고에 있다가 그 다음에 길갈로 갔다가 그 다음에 실로에 왔다가 그 다음에 에벤에셀, 아벡이라고 하는데 에벤에셀에 갔다가 아스돗에 갔다가 그 다음에 가드에 갔다가 에그론에 갔다가, 이 다섯 군데는 전부 다 블레셋 지역이에요. 빼앗겼으니까. 그 다음에 벧세메스에 왔다가 기럇여아림으로 끝나요.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가지고 거기서 언약궤가 옵니다. 오다가 그 다음에 오벧에돔에 집에 가서 드디어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누굴 만나느냐 하면은 다윗을 만납니다. 다윗을 만나서 언약궤가 왕궁으로 오고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면 성전에 안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시내산에서 내려왔던 그 언약궤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스스로 있는 자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겨냥해서 일하시니까, 자기의 자아 찾기, 자기완성을 위해서 길을 냈고 그 길에 이스라엘이 총동원이 된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찾기와 주와 주 되심, 시편 110편에서 주와 주가 되기 위해서, 주와 주를 만나기 위해서 그 부역에 나선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오늘날 우리들이고. 사무엘하 6장에 14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서 춤을 추는데 에봇을 입었더라고 되어 있죠. 사무엘상에도 다윗이 한 두 군데인가 에봇을 입어요.

왜냐하면 왕이라는 자리는 사사의 역할과 그리고 제사장 역할을 통합해서 백성들은 나만 봐야 돼요. 나만 바라봐야 돼요. 왕을 바라봐야 돼요. 개인적으로 율법 지키는 것, 그거 의미 없어요. 왕이 율법 지키는가가 중요합니다. 왜? 통합되어 있으니까. 적들에게 백성들이 침범을 당해도 다윗은 왕다운 면모로서, 사사다운 면모로서 사그리 그 블레셋 사람을 쳐버립니다. 용맹한 부하들을 통해서 쳐버리죠. 그게 사무엘하 초반에 죽 나오는데, 여기서 사무엘하 6장에 보게 되면 거기서 에봇을 입고 즐거이 나팔을 불며 오죠. 그걸 보고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에 사울의 왕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사울의 딸 미갈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울 집에 미갈이 나중에 애기를 못 낳아요. 23절에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기 성과를 왜 사울 집안은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고 거기에 대해서 적처럼 마치 하나님의 대적자처럼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불만을 가졌느냐 이 말입니다. “다윗 왕이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춤을 춘 이유가 20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이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임금이여, 체통을 지키소서! 어떻게 천한 여종 앞에서도 몸을 드러내십니까?” 그러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하는 말이 “니 뭐꼬?” 이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다 기뻐하는데 너의 관점, 너의 시선, 너의 관심사가 어디에 가 있는데? 니 체통이나 챙기고 있느냐. 이게 니가 사울다운 거야. 사울집안 식구답다 이 말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쳐버려요. 사울의 DNA를 그대로 딸이 받은 거예요. 사울의 DNA를. 하나님보다도 자기 체통 지키고 자기 자존심 지키는 것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뭐냐 애기 없는 여자의 수치심을 니가 받아라 이 말입니다. 어쨌든 간에 이 다윗이라는 존재는 참 희한한 존재가 돼가지고, 참 희한하죠.

뭐냐 하면은 기름부음을, 다윗이 뭔가 한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겁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난 뒤에 17장에서 기름부음의 효과가 나타나는데, 사무엘상에서, 아마 구약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골리앗을 치는 그 대목이 나와요. 골리앗을 치는 대목이 나와요. 골리앗을 치는 이 대목을 통해서 무엇이 포기되느냐 하면은 요나단이 자기의 왕 됨을 포기하게 됩니다. ‘아, 차기에 왕이 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다윗이다. 그러면 내가 여기서 취할 태도는 뭐냐, 다윗과 미리 사전에 계약을 맺어서 우리 집안 작살내지 않도록 우리 같이 언약을 맺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렇게 된 겁니다.

사무엘상 20장에 보면 그게 죽 나오거든요. 사무엘상 20장 42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그러니까 이 사울 집안에서 배신자가 등장한 거예요. 변절자가 등장한 겁니다. 사울 집안에서 사울 자기 집안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도와주느냐, 자기 아버지가 원수라고 여기는 다윗을 아들이 도와주는 겁니다. 이제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죠.

자, 그렇다면 사무엘상 17장 골리앗과의 만남인데, 이 의미가 뭐냐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골리앗과의 모든 만남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게 뭐냐 하면은 우연이에요. 우연히. 우연이가 불렀던 그 ‘우연히’있잖아요. 우연히. 인간의 예측과 예상하지 못한 것. 우연히 전쟁을 했다는 말은 다윗이 있었고 다윗의 자리는 우연히 만들어요. 이 우연을 두자로 이야기하면, 이게 뭐냐 하면은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은 이게 사건이기 때문에 개인이 이 사건을 소유할 수가 없어요.

개인이 그 사건을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은 골리앗이 죽었으니까 망정이지 골리앗이 중상을 입고 난 뒤에 한 6개월 뒤에 회복되었다면, 골리앗이 다윗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우리 모든 게 삼세판이다. 우리 한판 더 붙자.”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소년 다윗의 자질이 승리케 한 게 아니에요. 소년 다윗과 하나님께서 제공했던 그 다윗의 기름부음의 자리, 그 자리에 철없는 소년 다윗이 거기에 그냥 얹었다. 얹어져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싸운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웠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싸웠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 어디에 종속되어 있느냐 하면은 사울 왕에게 종속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빠개버리기 위해서, 사울 왕을 완전히 백성들로부터 이제는 더 이상 왕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사울 왕의 기름부음의 자리를 뺏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블레셋 골리앗을 사울 왕에게 대동한 거예요.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이 붙기 전에 먼저 누구와 전쟁하느냐 하면은, 골리앗과 누구의 전쟁이라고 보면 됩니까? 사울 왕과의 전쟁입니다. 골리앗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귀찮게 여러 명이 달려들 것이 없이 대빵끼리 붙자. 대빵끼리 붙어가지고 이긴 사람이 다 갖기.” 골리앗이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울 자체를 문제 삼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겠죠.

사울 너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사울 너에게. 이스라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사울 너에게. 뭐 이스라엘도 문제 많죠. 그런데 다른 대안이 없죠. 왕이 사울 밖에 없으니까. 소년 다윗을 찾으러 가자! 이럴 형편이 아니잖아요. 소년 다윗이 어디에 사는 것도 모르고. 자기 아버지 이새도 뭐 자기 아들에 대해서 신통치 여기지 않는 판에. 누가 소년 다윗에 대해서 그 존재감을 알아주겠어요. 다윗은 존재감이 없어요. 없고, 다만 이 상태에 대해서 사무엘은 알죠. 사울 왕은 잘리는데 어떤 식으로 잘리느냐. 그 추이를 보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잘리는가.

기름을 부어주시는 분이 기름 받은 자를 어떻게 처단하고 제거해버리시는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이 기름 부어놓고 자신의 기름부음을 다시 철거해나가는, 회수해나가는 방식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구약이니까 가능한 거죠. 선택해놓고 선택을 취소하는 이런 거. 생명책에 이름 적어놓고 그걸 지워버리는 방법, 다 같은 이야기거든요. 욥의 경우가 그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완전히 혼돈이 왔잖아요. 어떻게 복을 줘놓고 빼앗아 갑니까? 처음에는 욥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가져가도 너무 가져가는 거예요. 사람이 좀 정신 차리게 가져가야 하는데 정신도 못 차리게 가져가시니까.

도대체 내가 아는 하나님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맞기는 분명히 맞는데, 내가 예상하지 않은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당황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황한 겁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오실 메시야가 모든 인간을 당황하게 만들고, 모든 인간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말은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진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이니까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계신 줄 알았지, 그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나타날 때는 어떤 사건을 유발해서, 어떤 사건을 대동하고 나타나는지는, 우리의 전혀 예상을 뛰어넘는 식으로 우리에게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윗을 잊어주시고 사울과 함께 하세요. 사울 앞에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입니다. 기름부음이 있어요. 기름 부은 자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기름 부은 자를 처리하고 다루시는지를 보라 이 말이죠. 기름 부은 자 앞에 골리앗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뭐 숫자가 많기 때문에? 숫자는 저리가라. 대빵끼리 붙자. 대빵끼리. 전에 주일학교 설교할 때, 여자 사사 드보라 이야기거든요. 드보라. 드보라하고 같이 있던 장군이름이 뭐죠? 바락. 독일대표축구선수에 바락이 있죠. 수비수에요. 발락인가? 바락이 남자로서 총사령관이에요.

그런데 바락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기 지위를 포기하고 드보라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러면 이 드보라가 여성이지만 어떻게 해야 하냐면 남성처럼 행동해야 돼요. 그처럼 사울 왕은 왕으로서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다 빠지고 골리앗이 일대 일로 붙자 이래 나온 겁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고 하면 사울 왕은 구원받은 자에요. 구원받은 자라고 자처하고 자부하는 나에게 이 구원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사태를, 골리앗이 찾아오는 사태를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신다는 거예요. 구원받은 것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쓸데가 없어요. 구원받은 게. 좀 써먹으려고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은 내편이다. 뭐 임마누엘,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좋은 것은 다 동원했는데, 아무짝도 소용이 없어요.

차가 가다가 차가 빵꾸가 났는데, 목사도 그냥 가고 집사도 그냥 가고 누가 도와줬느냐, 신천지가 도와줬어요. 아무도 안 도와줬는데 통일교, 신천지, 안식교, 여호와증인, 뭐 유월절장막, 그런 것들이 막 도와줄 때, 대한예수교장로회 괄호 열고 합동측 괄호 닫고,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그런 것입니다. 아무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식들 앞에 내가 예수 믿는다고 그렇게 자랑질 했는데, 안 믿는 자식은 더 용감하고 믿는 나는 더 비겁하게 자식들 뒤에 숨고.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아버지. 뭐하십니까? 뒤에서 나오세요.” “니가 해라” “아버지 떨었어요? 왜 겁을 냅니까?” “내 믿음이 아무짝도 실효성이 없네.” 이래 되거든요.

사울 왕 앞에서 골리앗이 등장했을 때 사울 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졌어요. 골리앗이 내비칠 때 이미 진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은 없음이에요. 이스라엘은 없는 겁니다. 그럼 골리앗의 지배는 증강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이 있더라도 이 이스라엘은 허수아비가 되어가지고 골리앗이 치게 되면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을 사울 왕을 끄집어내가지고 그걸 다시 한 번 확정짓게, 확답한 거예요. 분명히 보게 한 겁니다. 실효성이 없는 거죠. 사사의 기능, 율법의 기능 몽땅 다 없어졌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없는 거죠.

근데 우연히 여기에, 아들 세 명을 전쟁터에 보낸 아버지가 도시락하고 아들들이 잘 있는가 안부를 물으려고 가게 했는데, 마지막 여덟 째 다윗이 가가지고, 형이 있는 전쟁터에 갔다 이 말이죠. 가가지고 자기가 끼어듭니다. 여기서 형들이 다윗을 말립니다. 애들은 가라. 여기가 애들이 노는 데가 아니다. 이게 뭐냐 하면 니가 끼어들면 어른들이 무시당한다. 어른들이 무시당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다윗이 보기에는, 요나단도 마찬가지에요. 이 골리앗이 뭐냐 하면은 할례 받지 못한 자에요. 할례 받지 못한 자.

이스라엘은 없지만 뭐는 살아있습니까? 율법은 살아 있잖아요. 율법은 살아있죠. 그러면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살아있는 율법이 들어온 사람, 그 사람이 지금의 이스라엘이에요. 지금 현 상황에서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싸움이 골리앗과 이스라엘의 싸움이 아니고, 율법 있는 자와 율법 없는 자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누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까? 율법 있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어요. 이걸 어디서 아느냐 하면은 바로 출애굽이라는 것, 출애굽 사건 자체가 율법 있는 자의 승리가 된다는 사실을 벌써 이미 보여줬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출애굽 율법의 정신을 계속 실행에 옮긴다면, 이렇게 벌어진 이 연출된 상황은 뭘 증명하기 위한 겁니까? 하나님의 율법 적용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소년 다윗은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7장 45절에서 이 싸움은 사람이 하는 싸움이 아니고, 이 싸움은 여호와의 이름이 벌인, 지상에 오신, 이 땅에 오신 여호와께서 벌이는 싸움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싸움. 그러니까 하나님의 싸움이니까, 하나님의 싸움은 반드시 무슨 정신? 율법의 완성정신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이름이 살아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벌여지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골리앗을, 큰 골리앗이라고 하지만, 이 골리앗을 작게 그릴 필요가 있고, 사울은 없으니까, 작은 소년 다윗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크게 그리면 돼요. 그러면 소년 다윗은 곧 골리앗이 되고 키가 3미터가 가까이 되는 이 골리앗은 소년처럼 조그만 사람이 되겠죠. 이 시선, 이거를 주님의 응시가 밀어내게 되면 이렇게 보이는 겁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조그마한 게 어디서 까불고 있어?”라고 한다면, 소년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율법도 없는 게 어디서 까불고 있어? 율법도 없는데 어디서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에서 뭔가 힘이 있는 것처럼 하고 있어?” 이래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골리앗이 예상한 것, 골리앗 이거는 사람의 힘으로 벌이는 전쟁에 속하죠. 다윗은 뭐냐 하면은 전쟁은 사람의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죠. 이거는 질적 전쟁이고 저거는 양적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기 사무엘상 17장 47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여기에 구원문제가 나오거든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자기 자아상, 자기 형상, 자기 구체화를 위해서 필요한 인물을 이 전쟁터에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쟁한다면 어떤 식으로 전쟁하는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식으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바로 힘과 전혀 상관이 없이 소년 다윗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율법이 인격화 되는 모습입니다. 율법의 인격화되는 모습. 자, 우리가 아는 것을 다시 해봅시다. 율법이 주어질 때 율법대로 순종하게 되면 복이 온다. 이건 승리죠. 율법을 위반하게 되면 뭐가 옵니까? 저주가 오고, 이건 패배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전쟁하면서 이미 경험했던 거예요. 이것을 확인 차 이스라엘에게 골리앗을 등장시켰다는 것이 전쟁에 임하는 소년 다윗의 마음가짐입니다.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실효성이 있게 현실화되는 과정 속에 이 전쟁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 골리앗 전쟁이 지금도 늘 임의로 반복해서 우리에게 사건으로, 매일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 골리앗 전쟁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게 해 달라. 이러면 이미 그 사람은 골리앗 전쟁에서 승자가, 승리하나마나 이미 승자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 골리앗을 이겨보겠다고 설치면 이것은 자기 전쟁이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잖아요. 다윗은 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율법의 전쟁에서 그 전리품, 생산물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스라엘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 누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본인이 들어있죠. 본인이 여기 이스라엘 속에 율법의 성취로 들어있다는 말은 이미 이거는 전쟁하기 전부터 우리는 뭐다? 승리자 입장에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거예요. 마치 여리고성을 돌 때 나팔 불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돌잖아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리고성이 무너진 이유는 나팔소리의 그 음파 때문에 지반이 취약해서 무너졌다고 해요. 그래서 옛날 1차, 2차 대전 때 독일에서 만든 무기가 큰 나팔을 만들어가지고 그 나팔을 불게 해가지고 프랑스군인들이 고막이 떨어져서 죽게 만드는 무기로 했는데, 막상 전쟁에 나가보니까 적들의 고막이 떨어지기 전에 자기 편 고막이 다 떨어져나가 가지고 그거 안 쓰기로 했답니다. 얼마나 나팔이 큰지, 수십 미터 되는 나팔을 만들어가지고 우왕~~ 불어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그렇게 하겠다는 거예요.

여리고성이 그래서 무너진 게 아니고, 이미 그거는 하나님께서 접수를 한 거예요.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니까 마찬가지다. 이 전쟁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이미 승리는 다윗의 그런 율법의 승리로 결정이 난 겁니다. 그래서 이미 합격이 되고 난 뒤에 시험 치는 것은, 그것은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 칠 수 있죠. 이미 서울대학교에 합격하고 난 뒤에 서울대학교 본고사를 치게 되면 이거 뭐 장난이죠. 3+7=76, 5*3=88 이런 것처럼. 뭘 써도 합격 자체가 정답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불합격의 취소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자,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에서 핵심은 뭐냐, 다윗은 이 골리앗을 뭐로 봤느냐, 성경에 나옵니다. 이걸 개돼지로 본 거예요. 이거는 누가 고백하고 있느냐 하면은 골리앗이 입에서 그걸 이야기합니다. 여기 사무엘상 17장 43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여기 나왔느냐” 다윗은 이렇게 했어요. “막대기도 아깝다. 너한테는.” “니는 지금 사람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어른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막 패도되는, 아무 가치도 없는 그냥 개로 보느냐? 그래서 니가 막대기를 들고 왔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보기에 니가 개가 아니고 하나님 보기에 니가 개야! 하나님이 너를 살려줄 어떠한 근거가 니 속에는 없어. 니는 이미 죽은 자야. 니는. 다만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하기 위해서 잠시 사용한 것뿐이지. 너는 그냥 허수아비야. 아무것도 아니야. 허깨비야. 허상이야.”

그리고 난 뒤에 49절에, 다윗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해서 물매를 던지는데, 이 물매를 어떻게 던지느냐 하면 이게 옛날에 짐승을 잡을 때 그때의 심정으로 휙휙 돌려서 던집니다. 왜냐 하면은 앞에 서있는 인간이 짐승이기 때문에. 율법이 없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평소에 짐승을 잡듯이 또 하나의 짐승을 잡은 거예요. 그게 뭐 어려워요. 평소에 짐승을 잡았는데. 내 양을 지키기 위해서 오는 이리 늑대를 잡기 위해서 돌팔매질을 해가지고 했는데, 그거 뭐 이스라엘을 잡기 위해서 온 짐승과 다를 바가 없죠. 이런 소리를 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다윗은 멘탈이 강하다고 하는데, 멘탈의 문제가 아니고요. 자기의 실력이나 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는 현재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에 지금 영광스럽게 참여하고 있었던 겁니다. 뭘 대표해서?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그렇다면 이 소년 다윗은 지금도 살아있어요. 소년 다윗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일은 이미 끝났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났어요. 끝났다는 완료된 입장에서 오늘도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고 답답하고 걱정거리가 넘쳐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거 다 끝난 일이야. 끝났어.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영생을 얻는 거야.”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끝난 안목, 주님의 응시에서 시선이 주님의 시선으로 바뀌어서 세상을 보는데도 그렇게 봐야 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그렇게 봐야 돼요.

하나님의 승리의 전리품으로, 우리가 선물로 받은 것이 현재 우리의 꼬라지고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즐겨야 되죠. 아무리 세상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굳이 나의 승리를 따로 챙길 이유가 없잖아요. 나의 승리를. 상대방이 오른뺨을 친다,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가져간다, 속옷을 싹 내놓죠. 이미 승자가 보여주는 여유. 너무 여유부리다가는 나중에 홀랑 다 뺏길 수가 있지만. 그게 뭐 의미가 있냐. 세상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한다, 우리는 이미 승자가 된 그 나라의 의. 참 세상 살기, 이 전쟁 같은 지옥에서 살기에 참 우리가 편하게 되었습니다. 쉬고 그 다음 강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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