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겨울수련회 사무엘상강해 제 4강 : 비존재 -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사사가 있었지요. 그 다음에 제사장 있지요. 그 다음에 왕이 있지요. 사사라는 것, 제사장이라는 것, 왕, 이렇게 있는데 사무엘 당시에는 왕은 없었고요. 이 제사장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율법에서 온 겁니다. 그런데 사사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성신에 의해서 이루어지지요. 그 다음에 제사장 있지요.
시내산에서 내려온 이스라엘나라의 구성이 원래 율법만 주어지게 되어있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 제사제도를 통해서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언약나라가 되는 겁니다. 위에서 결정된 언약이 계속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한결같이 땅에까지 정착이 되는 이런 구조가 이스라엘 구조에요.
이게 이스라엘 구조인데 여기 성신이 나올 이유가 없어요. 율법과 성신이 같이 나란히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은 율법으로도 언약의 나라가 구성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성신은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이 율법의 구조가, 언약의 나라가 위에서 내려온 이 언약의 취지하고 맞지 않을 때 이스라엘 나라를, 언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을 언약의 취지에 맞도록 돌려세우는 거예요.
원래 ‘율법의 취지 = 언약의 취지’ 이렇게 같은 것인데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구성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원래 언약취지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나라를 구성하기 위해서 다른 노선을, 다른 루트를 개설하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성신을 통해서 사사가 되는 겁니다. 성신을 통해서 사사가 되게 되면 사사의 일은 뭐냐? 재판하는 거예요. 무엇이 옳고 그르고, 그래서 성신에 의해서 재판을 할 경우에는 중간에 뭐가 완전히 날라 가버리냐 하면, 율법이라는 그것의 경로를 거치지 않은 겁니다. 율법이 빠진 거예요.
자, 율법의 결과가 율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율법을 준수할 경우에 복을 받고 율법을 위반했을 때는 뭘 받습니까? 저주를 받지요. 율법이라는 경로를 제거해버리면, 준수하거나 위반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라는 경로를 제거해 버린다면 사사를 통해서 뭐가 오느냐? 사사를 통해서 복이 오고 성신이 없어져 버리면 이것은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성신을 뭐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매개입자, 매개자 같은 입장인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매개자 같은 이 성신은 인간이 이것을 붙들 수 가 없어요. 율법은 항상 있지만 성신은 하나의 사건화 되어서 그 때 그 때 작용될 뿐입니다.
그러면, 성신이 율법화 되었다면 이게 나중에 사무엘상에 사울이 등장해 가지고 성신만 매개자가 아니고 성신과 더불어 같은 매개자가 나타났으니 그게 뭐냐 하면, 악신이 등장하는 거예요. 성신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악신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를 통해서 반대로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악신의 노림수, 노리는 것은 이 지상 이스라엘나라가 언약의 나라라는 것을 방해하고, 그걸 싫어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악신이. 그러면 지금 이 논리가 맞다면 율법을 통해서 언약의 나라를 이뤄야 될 이스라엘이 언약의 나라에 부합되지 못하고 언약의 나라와 틀어졌지요.
언약의 나라와 합치되지 못하고 언약의 나라를 공격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에 의해서 언약의 나라를 구성하겠다는 이 이스라엘 자체와 뭐가 한통속이 되느냐 하면, 여기 있는 악신과 결국 한통속이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시간에 줄곧 이야기했지만 이 예언이라는 것, 예언 말입니다, 말의 등장은 어떤 경우냐 하면, 악이 악대로 드러날 경우에 예언이 등장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성신이 사사를 통해서 내려왔다면 사사의 존재 자체가 무엇의 부정이냐 하면, 이 모든 율법체제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고발하는, 그것을 들춰내는 기능으로 사사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사는 율법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이겠어요, 아니면 어중이떠중이겠습니까? 어중이떠중이에요.
“봐. 어중이떠중이도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이 복을 제공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잖아. 이방나라의 압제에서 구원하잖아. 너 뭐야? 율법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그래서 그걸 지키면 된다고 하는 너희들은 그동안 뭐한 거야?” 그렇게 되지요. 결국 지금 이렇게 봤을 경우에 이게 사사시대거든요. 제사장 있어도 하나의 명목에 불과하고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러면 이 사사시대가 끝나고 사무엘 시대가 되면 무엇을 제거하느냐 하면, 이 사사시대를 끝내버립니다. 그리고 제사장 시대도 끝내버려요. 율법을 가지고 의지하던 것 1번, 그 다음에 사사 가지고 하던 것 2번, 이 1번과 2번 둘 다 실패했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신을 통해서, 사사를 통해서 하던 이것조차도 이게 실패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기 뭐가 등장합니까? 악신이 등장하거든요. 둘 다 실패한 거예요. 둘 다 실패하고 난 뒤에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드디어 왕 시대가 등장하는 겁니다. 왕 시대에서는 다시 율법 시대나 사사시대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사시대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왕 시대가 도래 한 거예요.
그러면 왕 시대가 도래 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 중심으로 백성을 재편성하고재생산하는 그러한 구조로 돌입해 간 겁니다. 사무엘상 4장 18절 보게 되면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의 뭐가 된지 사십년이라고 합니까? 뭐가 된지?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사사된 지 사십년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알기는 엘리는 누굽니까? 제사장이지요. 제사장과 사사를 겸해서 유지했던 이것이 효능이 다 끝난 거예요. 소용이 없었던 겁니다. 그 소용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굴 나타냈느냐? 임신하지 못한 한나를 통해서 사무엘을 출생시켜서 사무엘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예언이 있지요. 예언, 말씀이 있는 겁니다.
사무엘은 그러면 사사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라면 사무엘은 뭐냐는 말이죠. 사무엘은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지자. 자 여기서 네 번째 강의에서 이번 강의 제일 어려운 대목에 직면했습니다. 지금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선지자가 뭐냐? “네가 왕이냐” “아니요” 그러면 선지자, 선지자가 뭐하는 거냐는 말이지요.
“사사 작살내고 제사장 작살냈으면 그러면 선지자 네가 해야지.” 사무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이해할 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어쨌든 우리나라가 이웃나라한테 공격을 받고 압제를 받으니까, 나라꼴이 말이 안 되니까, 사사도 이것은 한계가 있다. 제사장도 뚱뚱해서 자빠져서 죽었다. 그러면 당신이라도, 선지자라도 우리를 통치해 달라.”
사무엘이 하는 말이 “나는 아니야.” 선지자 나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 당신은 뭐냐, 하는 거예요. 사도행전 3장 22-24절 보겠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사무엘을 24절에서 뭐라고 보느냐 하면, 선지자의 처음선지자로 보는 겁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처음 선지자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도대체 뭐가 어렵다는 말인가? 별로 어려운 것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선지자를 동원해서 사사 잘라내고 그 다음에 왕까지 잘라내고요. 가짜 왕이지요. 사사 같은 왕, 사울입니다.
그거 잘라내고 그 다음에 제사장 무용지물 만들고, 그래서 왕 세운다. 이것이, 선지자가 말발을 통해서 예언한다는 그게 뭐가 어려우냐? 왜 어려우냐 하면, 이게 비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지도 않은데 일부러 말 어렵게 해서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선지자가 하는 내용은 비존재, 존재하는 입장, 있다는 입장, 있음의 입장에서 있지 않은 무엇, 있음의 입장에서 볼 때, 있음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나처럼 있지 않은 그 무엇, 그 무엇이 비존재에요. 이게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다윗왕은 뭐냐? 다윗왕은 없음이에요. 없음과 비존재의 차이, 이게 어려운 겁니다. 없음과 비존재의 차이 또는 없음과 비존재의 어떤 어긋남, 층위의 차이, 층이 다른 차이. 선지자 입장에서 그리고 백성들 입장에서 다윗은 어떤 존재냐 하면, 없음의 존재가 아니고 비존재에 속하는 겁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존재하는데 적절한 지도자가 없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현재 있는 이스라엘이 공백된 것, 비어있는 것, 결핍된 것, 빠져 있는 그 대목을 이렇게 괜찮은 왕이 와서 마저 채워준다면 온전한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존재의 결핍을 마저 채워주는, 존재의 결핍 이 자체가 비존재고 이 존재를 존재답게 하기 위해서 비어 있는 그것을 마저 채워주는 것, 이것이 사울 말고, 사울은 천천이지만 다윗은 만만으로 끼어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라는 생각을 사무엘이나 그 당시 백성들이나 다윗본인도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이것이 비존재에 속하는 겁니다.
인간이요, 자기 자신을 없음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이미 있기 때문에 있는 나를 어떻게 완성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타고난 모습이에요. 그래서 아이가 있으면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기성세대가 있고 기성세대가 잔소리 해대지요. 내가 무엇을 원해야 되느냐 하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기성세대가 알려준 그대로 받들어 모실 때 그것이 나의 나다움이 되고 나라는 것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부모의 말을 듣고 기성세대의 말을 들어보니까 기성세대 자체가 결함이 있어요. 문제가 있는 거예요. 기성세대 자체가 뭔가 빠져 있어요. 어떤 게 빠져 있느냐 하면, 내가, 이 육신이 갖고 있는 온전한 욕구, 쾌락입니다. 이 쾌락, 기성세대 말대로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쾌락이 기성세대 요구조건보다 더 커요. 더 깊고, 더 풍부하고.
기성세대 말 듣고 현재 돌아가는 모든 사회 공동체 말을 내가 받아들이면서도 늘 마저 채워지지 못한 요소가 있는 거예요. 마저 채워지지 못하는 요소. 그래서 그걸 마저 채우지 못했다고 설쳐대면 기성세대가 가만있지 않지요. 예를 들면 부모가 결혼식을 하는데 부모는 오지 마라, 우리끼리 좋아하는데 부모가 왜 오나,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정체성, 자아성이라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 성질상 ‘이제는 부모한테 실망했어. 우리끼리 살래.’라고 하더라도 이미 내 테두리 자체가 어쨌든 간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데서 안정성을 얻게 되어 있거든요. 일단 안정성은 확보해놓고 그 모자라는 쾌락의 여분은 밑으로 계속해서 억눌러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게 다에요. 죽을 때까지 이게 끝이에요. 이게 다입니다. 아무리 많이 돈 벌고 아무리 모든 것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역시 산 넘어 산, 일단 산에 가보니 또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산이 또 있어요. 인간의 욕구나 인간의 쾌락이 이미 기성세대화 되어 있는 내 마음으로 다 다스릴 수 있거나, 보듬을 수 있거나, 바운더리 칠 수가 없어요. 그것을 내 것으로 다 만들 수 없습니다.
따라잡으려고 하지요. 그 기성세대중 하나가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믿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짓 왜 합니까? 이런 짓 왜 해요? 기성세대가 나를 어떻게 인정해주는 그것이 바로 나답거든요. 그래서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거예요. 2천년 동안 내려오는 사기입니다, 이거.
하나님은 나한테 기대한 적이 없어요. 기대한 적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뭔데 기대합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기대한 것이 아니지요. 악마가, 하나님이 너에게 기대하고 있으니까 너 제대로 하라고 악마가 뒤에서 부추겼지요. 악마한테 속아온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한테 기대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예수님한테 기대했지 우리한테 기대한 적이 없어요. 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에.
이미 규정된 거예요. 사건으로 규정된 거예요. 우리의 행동 여부에 따라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행동이냐에 상관없이 나는 너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이번 강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체 기대한적 없어요. 기대할까 싶어서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어요? 벌벌 떨면서.
그런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 뜻이 아니었고 나의 쾌락을 내가 보듬어 주려는 나만의 어떤 업무였고 성과였고 나의 나됨의 어떤 알 수 없는 목적이었지요. 내가 나답게 되는 목적, 그 목적을 어디 하나님까지 끼워 들여 가지고 “하나님 저 어때요?”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갖고 놀았냐 그 말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이 존재,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있으니까, 결핍이 되었으니까 마저 채우자. 비존재에서 뭔가 얻어서 존재를 완성시키자, 라는 시도를 해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저를 구원하소서.” 할 때 구원자 사사를 주니까 사람들은 그 사사를 비존재로 생각한 거예요. 내 존재를 마저 채우는 내 기도의 응답으로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냈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 존재가 작살나야 되는 것도 모르고.
율법을 준 것은 내가 소속된 이스라엘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다윗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고요. 사무엘의 모든 예언은 지금 이 비존재를 작살내는 거예요. 끊어버리고 뭐냐? 없음이에요. 자, 없음이라는 이것은, 인간이, 존재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없음, 이것은 누구의 길이냐 하면, 이것은 하나님자신의 길이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선택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찾아가는 그 길, 이게 없음의 길이에요. 왜냐하면 출애굽기 3장 14절에 보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나는 나를 찾는 그 길 외에는 다른 일은 내가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자리는 시작부터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없는 겁니다. 인간이 있을 수가 없어요. 제가 하나 쉬운 예를 들면 어떤 항구에 가니까 항구에 이런 팻말이 있어요.
어떤 팻말이냐 하면, “이 항구에 도달해서 내가 발견하거나 나를 발견하는 그분이 바로 나입니다.” 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고 합시다.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했지요. 어느 낯선 항구, 감포라든지 가게 되면 팻말에 “내가 당신을 발견하거나 당신이 나를 발견할 때 그 발견된 그게 나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걸 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누군데?” 이렇게 되지요.
네가 누군데. 뭐 사람이 보여야 누군지, 당신이든지 하는데 나라고 지칭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팻말만 있다고요. 그게 선지자의 예언, 선지자의 말이에요.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 자기가 하나님 자기를 찾는 작업에서 인간의 존재성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강의 여기서 끝내야 돼요. 너무 어려워요.
자,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거든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고, 선악과 심어놓고 생명나무 다 만들어놨어요. 이것은 자기, 나를 자기가 찾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기 경로에 뭐가 주제넘게 끼어들었느냐 하면, 죄 된 인간이 하나님의 길에 끼어든 셈이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 찾기는 어디를 통과해야 되느냐 하면, 죄악 된 인간의 삶의 영토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기 찾기의 형태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변형되는 거예요.
신 진서라는 우리나라 바둑선수가 있어요. 장로님은 잘 아시지요? 바둑을 잘 두시니까. 자오천위라는 중국선수가 있어요. 어제 응창배 준결승 제 1국을 했는데 거기서 신진서 선수가 자오천위라는 중국선수한테 1국을 역전승했어요. 그 대회가 응창기배에요. 응창기배, 한자로 應昌期杯. 잉창치(應昌期), 이 사람이 대만재벌인데 백만 달러를 내서 세계 바둑대회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바둑대회 이름이 뭐냐? 응창기배에요. 본인 이름을 걸고 시합을 만든 겁니다. 그러면 신진서 9단은 뭐예요? 자오천위라는 그 사람, 저쪽 준결승 대국에는 중국의 셰커, 일본의 이치리키료, 우승상금은 40만 달러, 총 상금 백만 달러.
그러면 우리는 뭘 봅니까? ‘우리나라 신진서 선수가 준결승에서 1국을 이겼구나.’ 그것만 보지요. 그러나 그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응창기는 뭐예요? 이미 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이 뭘 생각하겠어요? 너희들이 바둑 두는 그게 누구 이름을 위하여? ‘이 응창기를 빛내기 위해서 너희들은 나한테 돈 받고 바둑 두는 거야.’
이 돈은 누구한테 갈지를 모르잖아요. 누구한테 갈지 모르는데 여기에 신진서가 준결승에 뛰어든 거예요. 이걸 응창기배는 뭘 로 보느냐 하면, 돈 백만 달러, 돈 판에 네가 선택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택은 그 선택이에요. 나를 위한 선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 자아를 찾아가는 그 길에 자기 백성이 선택된 거예요. 뭘 로? 죄인으로 선택된 거예요.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무엘상 9장에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죽 나오면서 2절에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렇게 되어 있고 3절에 보면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여기서 암나귀 하나 잃어버렸거든요. 지난 시간에 했듯이 유령의 영토 밑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삶의 영토지요. 삶의 영토는 이게 소유의 세계고 유령의 영토는 예언이 작용하지요. 삶의 영토는 소유에요. 사적소유거든요. 사적소유 안에 출발이 뭐냐 하면, 암나귀라는 개인적인 사적소유 하나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암나귀를 위해서 누가 가느냐 하면,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암나귀를 찾으라. <원더우먼> 영화에 보면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활동하는 영웅들, 히로인, 영웅들이 있거든요. 그 중에 원더우먼이 있는데 원더우먼이 평상시 옷을 입고 있다가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갑자기 속도를 가해요.
뉴욕 한복판을 빨리 달려버리면 평소에 입고 있던 그 원피스가 날라 가버리고 작업복장으로 졸지에 변해버렸어요. 머리에 원더우먼 띠 있고, 쫄쫄이 입고, 그렇게 빨리 달리는 거예요. 아주 빨리. 원더우먼도 그렇고, 수퍼-맨도 그렇고. 바지위에 팬티를 입는 게 어딨어요, 세상에! 하여간 막 빨리 달린다고요.
이 사울이 암나귀, 우리 아버지 재산이거든요. 아버지 사적인 재산 소유물 찾으러 갔는데 나중에 도달하는 곳이 뭐냐? 선택의 장소입니다. 기스의 아들이 선택, 택정 받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사무엘 9장 따라서 나귀가 어디 갔는지 한번 찾아보자 이 말입니다. 죽 찾아가는데 이상하게 이 나귀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꾸 이게 안 찾아져요. 그러면 기스의 집안의 암나귀는 비존재에 속합니까, 없음에 속합니까? 이 쉬운 문제를……, 둘 중 하나 찍으면 되는데. 암나귀는 비존재에 속해요. 없음에 속해요. 나귀 자체는 소유기 때문에 잃어버렸잖아요. 결핍되었잖아요. 비존재로 시작해서 어디로 간다? 없음으로 되돌리는 이것이 이스라엘을 정상적으로 되돌리는 하나님의 방식이 되는 거예요.
암나귀를 찾으러 갔는데 ‘그 잃어버린 암나귀 그냥 놔두고 또 새끼 치면 되지.’ 하고 갔는데 9절에 누굴 만났느냐?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그래서 선견자를 만나러 갑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15절에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사울과 누가 만나느냐 하면, 사무엘이 만납니다. 그런데 그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울은 없음이 아니고 비존재적 입장에서 지금 사무엘을 만난다 해도 되고요. 사무엘의 예언과 만나는 겁니다. 말씀과 만나는 거예요.
사무엘은 예언의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예언이 실제적으로 구현되기 위해서 여기에 소유에 해당되는 삶의 영토, 그 다음에 위에는 예언, 또는 유령의 영토지요. 삶의 입장에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유령 같은 존재, 없어도 그만이에요. 다만 결핍되었을 때는 새벽기도 나오는 거예요. 내 존재가 결핍되었을 때는 새벽기도 나오는 겁니다. 내 몸이 아프다든지 앞이 캄캄하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이제 비는 거예요.
뭘 빕니까? 날 없애달라고 빕니까? 아니지요 내 존재를 꽉 채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배웠던 것 복습하면, 내 존재라는 그것은 누구한테 배웠는가? 우리 아버지한테 배웠고 커서는 교회 목사님한테 배웠어요. “그 목사님이 뭐라고 하던데?” “하나님께서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고 했어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나는 천국 갈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존재에서 나온 거예요. 이 존재가 누구존재를 방해하느냐? 주님의 존재를 방해하는 거지요. 더 쉬운 예를 들게 되면 빼빼로-데이 때 먹는 작대기, 밀가루 작대기에 초콜릿 코팅, 제가 어릴 때 빼빼로는 그랬어요. 그 몇 년 후에 뭐가 나왔느냐 하면, 초콜릿 코팅위에 땅콩 부스러기를 뿌린 것이 나왔어요.
그렇다면 그 제조공정을 생각해 보세요. 초콜릿 코팅을 해놓고 그 다음에 뭘 집어넣겠습니까? 땅콩 부스러기를 집어넣어야 완제품이 되겠지요. 그렇지요. 주님께서 자기가 자기를 선택해서 자기를 찾아가는 그 작업에 뭘 묻히느냐 하면, 그 작업과 관련된 자기 백성을 묻힐 때 그게 신약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이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거예요. “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 그렇게 붙어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붙어 있는 것, 그 피의 효력으로 붙어 있는 것, 붙어 있을 때는 우리 입장에서는 비존재에서 뭐로 이동해야 되느냐 하면, 아예 없음이 돼야 돼요. 그렇지 않고 지금 살아 있는 내 존재로, 반대로 코팅하면 안돼요. 나라는 이 초콜릿 빼빼로에다가 예수 피를 묻히면 나는 괜찮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천국 간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주객이 바뀐 거예요.
그 바뀜을 누가 발견하겠어요? 내게 악신이라는 매개입자가 그런 짓해요. 매개입자의 특징은 질량이 없다 했지요. 천사 같아요. 천사 같은 것이 아니라 악마가 천사에요. 질량이 없으니까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아요. 불쑥불쑥 튀어나올 수 있어요. 언제든지. 다윗이 성신 받았다 해서 늘 성신 받은 것이 아니고 사울이 악신 받았다고 늘 악신이 아니에요. 타이밍이 있는 거예요.
이게 구약입니다. 구약의 성신과 신약의 성령의 차이점은 여러 번 했지만 또 알려드립니다. 구약의 성신은 단회성이고 일회적이에요. 하나의 출몰적이에요. 왜냐하면 언약의 보조역할을 하니까 출몰적이에요. 그런데 이 성신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 모든 율법 언약의 다 이루심속에 와 버리면 이 성령은 십자가의 완전함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늘 함께 있어요.
십자가를 경유했기 때문에, 완성상태기 때문에 항상 늘 함께 있는 것이고 성신은 십자가로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그 때 그 때마다, 필요할 때마다 매개입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매개입자의 특징은 너무 악하지 않고, 언약에서 너무 떨어져 나가지 않고, 또 너무 완성도 되지 않고 그걸 묶어주는……, 아직 완성은 멀었어요.
“아니야, 사무엘! 네가 메시아는 아니야. 예레미야? 좋지. 훌륭하지. 그러나 메시아는 아니야.” 이렇게 묶어주는 역할. 예레미야가 성신 받아야 돼요. 이사야도 성신 받아야 되고. 성신 받으면서 성령의 시대를 내다 봐야 되지요.
그래서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 61장 1절부터 나오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이야기를 누가복음 4장에서는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바꾸는 거예요. 그 예언의 완성단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이해할 만한 실력이 됩니다. 제 일방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사울이 사무엘을 봤거든요. 보고 난 뒤에 9장 20절에 “사흘 전에 잃은……” 벌써 삼일이나 찾아다녔어요.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게 되면 암나귀 하나 찾으려고 얼마나……, 이건 오기도 아니고요. 그 동네를 다 해매고 있어요. 요즘 같으면 완전히 성지순례감이라. 온 동네를 다 다녀요. 암나귀 하나 잃어버렸다고.
무려 3일 동안이나 찾아다녔어요.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이 암나귀가 뭐냐?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암나귀는 비존재에서 없음의 자리로 돌아가야 될 이스라엘, 본래 하나님의 취지에 맞는 언약나라 되기 위해서 암나귀를 하나님께서 잃어버리게 한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도 지갑이나 뭘 잃어버리게 될 때에 주께서 뜻이 있어서 잃어버렸다 생각하세요. 정신이 없어서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잃어버릴 때 찾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잃어버릴 때 잃어버리면서 우리가 ‘삶의 영토’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이고 복음이고 현찰보다 더 좋은 기쁜 소식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온 몸으로 절실하게 전율을 일으켜야 돼요.
너 없이는 나도 없다, 이런 식으로. 나는 돈 없으면 나도 없는 거야. 왜? 내 결핍을 채워주기 때문에. ‘역시 나는 내 존재중심이었어.’ 그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돈 잃어버린 것은 이유도 아니에요. 자식 잃어버리면 더 큰 문제지요. ‘나한테 기대하지 않는다. 나한테 어떤 책임도 없다. 왜? 이미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으킨 사태가 아니기 때문에.’라고 머릿속에, 시냅스 안에, 해마, 기억장치에 잘 넣어놓았지요.
그런데 애가 조금만 늦게 와도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책임이야.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가 엄마노릇 못해서 아들 잃어버렸어.’ 이렇게 하지요. 지나가는 사람들 다 붙잡고 “집나간 나귀 어디 없습니까? 내 소유물, 암나귀 어디 없습니까? 나는 걔 없으면 죽어야 돼.” 갑자기 자살충동까지 느끼면서. 뭐, 기억해놓은 이것은 아무짝도 소용이 없네요.
존재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은 그 존재 안에 들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 존재가 그것을 할당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한테 교육받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때부터 뭐든지 내가 결심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판단합니다. 오늘 스케줄은 이렇게 되고, 오늘 읽어야 될 책, 내일 읽어야 될 책, 그리고 오늘 뭘 해야 되고, 스케줄 관리를 내가 하는 거예요.
거기서 뭔가 조금이라도 틀어져 버리면 내 존재가 어쩔 줄 모르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선택하느냐? 내가 나를 선택한 거예요. 내가 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나는 나를 찾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떤 존재, 비존재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존재로. 이것이 악신이 들렸다는 사실을, 악마가 개입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지요.
몰랐지만 사울을 통해서 그걸 알려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사람들이 되고자 하는 그 모든 성격의 집대성이거든요. 모든 속성의 모음이지요. 그 악신 들린 사울이, 지난시간에도 했지만 악신 들린 경우가 평소에 창을 안 던지는데 다윗에게 악신 들린 경우에 사울이 창을 들고 다윗을 향하여 던져서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돼’ 이걸 보여준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존재에는 바로 그 속성, 악마가 태어날 때부터 그걸 깔아놓은 거예요.
“우리 친구 아이가!” 백날 친구 아이가, 해도 급하면 창 들고 “너는 죽어야 되고 그걸로 나는 살아야 내 결핍이 마저 채워진다. 내 결핍이 채워져서 내 존재가 온전한 쪽으로 나간다.” 그러면 친구가 “너 나한테 배신 때리나?” “너는 나한테 배신 안 때리나?”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지요. 그래서 선견자 만나고……, 10장을 봅시다.
10장 1절에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이렇게 지도자가 되었지요. 되고 난 뒤에 10장 3절에 뭐가 길어요.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 나왔지요. 하나는 염소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져왔다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4절에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누굴 자꾸 만나. 그냥 집에 가면 되는데 계속 만나면서 5절에 보게 되면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이게 이상하잖아요. 암나귀 찾으러 갔다가 온갖 안 만나도 될 사람을 이 삶의 영토에서, 안 만나도 될 사람을 예언의 영토에서, 유령의 영토에서 다 만나고 있는 거예요. 10장 6, 7절 보면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래서 10장 10절에 보면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이걸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성령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주어지기 때문에.
11절에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이렇게 했는데 여기서 그러면 제가 문제 하나 내지요. 사무엘상 9장 3절에 가서요.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자, “어느 집에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서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 아들이 암나귀를 찾아오는 과정을 여러분이 한번 지어내서 한번 써보세요. 여러분이 빈칸을 채워보세요.” 이렇게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9장 이야기, 10장 이야기가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지요.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암나귀는 존재잖아요. 존재만 되찾으면 끝나는 문제지요. 그걸 통해서 내가 원더우먼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잃어버린 소유물을 찾으면 그만이지요. 그러니 뭐는 다치지 않아야 된다? 내가 기성세대, 부모로부터 받았던 나라고 하는 나다움은 어떤 일에도 요지부동해서 나는 이걸 안 잃을 거야, 나는 이걸 고수할거야, 라는 것이 인간의 존재의 한계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이스라엘 왕으로 바뀌었다면 이스라엘도 뭐처럼 달라져야 됩니까? 사울처럼 달라져야 될 계기가 마련된 거예요. 그래서 10장 14절에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가로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얻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골치 아프게 할 것 없이 지금 암나귀 찾았어요, 못 찾았어요? 10장 2절에 보면 찾았어요. 암나귀가 유인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집안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의 유인책이에요. 그리고 나의 인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 기성세대 전체가 문제 있고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중 하나인 여러분 자신들을 선택해서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다지 희망 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악마가 개입된 악마가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내가 구축한 나다움을 견고하게, 그걸 ‘본능적으로’라고 해야 돼요. 알지요? <본능적으로> 윤종신이 불렀던 본능적으로, 본능적으로.
인간은 자기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생물학적 유기체의 본능이에요. 세포단위도 마찬가지에요. 해로운 것은 거부하는 겁니다. 세포 내에 채널이 있어서 어떤 화학물질을 받아들이고 어떤 화학물질은 안 받아들이는 그걸 전이, 플러스와 마이너스 전이를 조절하는 펌프 같은 것이 세포내에 있어요.
Na(+)는 들어오게 하고 K(+)는 나가고,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고 하면서 이게 전이화된 것이 세포거든요. 세포 자체가 전기적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의 생명이라 하는 것은 전기의 흐름, 파동이 인간생명이 되는 거예요. 더 깊이 들어가 보게 되면.
거기에 나가 어디 있어요? 전기자기적 힘인데. 그게 있음, 존재, 있다는 존재의 정점이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의, 악마로 인해서 막혀 있던 과학적인식이 성경이라는 예언을 통해서 인간은 영물이에요. 요물이에요 요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몰라요. 모르면서 갇혀 있는 상태에서 그게 전부다 물질로 되어 있고, 118개의 원소로 되어 있다. 그게 끝. 그걸로 알고 인생은 죽음의 심판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다행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아시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