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강-예언과 소유

아빠와 함께 2021. 1. 16. 16:58

2021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2강-사무엘상 강해 : 예언과 소유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제목을 유령의 영토라 했습니다. 유령의 영토에 대해서 만약에 반대한다면 유령의 영토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면 삶의 영토겠지요. 사무엘상 1장에서 브닌나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엘가나가 제사 드리는 날에 브닌나는 본처가 아니고 첩이죠. 그 다음에 한나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삶의 영토와 유령의 영토에서 삶의 영토는 뭐로 집약될 수 있느냐 하면 소유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소유는 소유로 말을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소유가 되려면 이 소유를 제거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태어난 목적은 타인을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다. 남을 죽여야 내가 나답게 되니까 남을 죽이지 아니하면 될 수가 없습니다.

소유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소유에게 말을 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주로 이런 거죠. “됐어, 살아있는 것 잘했어, 살아남은 것 훌륭했어, 대단해.” 살아남은 자들끼리 서로의 찬미, 그것뿐이에요. 살아남은 자체가 승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것은 소유가 있다는 자체, 가진 게 있는 그 자체가 됐어, 잘했어, 대단한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항상 이 땅에서 찬미되는 것은 누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하이파이브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찬미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말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브닌나는 한나에게 말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너는 아들이 없지, 나에게는 아들이 있어. 아들을 소유하고 있단 말이야. 넌 소유가 없잖아.” 자기에 대한 자기찬미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의 삶의 영토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유령의 영토는 언어를 전달하는 거죠. 말을 던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 언어가 뭘 뭉개느냐 하면 소유를 뭉개는 그런 사태, 이게 바로 사무엘상입니다. 말이 소유를 박살내는 그 이야기가 사무엘상이에요. 지금 아무도 동의 안 하고 있어요.

아까 같이 소유는 입자요, 입자는 힘의 집결이에요. 그러니까 말이 힘의 집결, 개별체를 박살내는 거예요. “됐어” 이것도 박살내겠지요. “살아 있는 것, 잘했어” 이것도 박살내는 거예요. “훌륭해, 대단해” 이것도 박살내는 거예요.

그러면 일반 사람들도 서로에게 말을 주고받지 있지 않느냐 하는데 그걸 아셔야 돼요. 그래서 제가 아까 교재에 자아가 문제란 걸 읽어보시라 했는데, 인간은 말을 할 때 그 말을 내가 지금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말해요. 인간은 말을 해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한테 말하기 때문에.

그 이유가 말을 할 때 생각을 하고 말하잖아요. 그럼 말의 내용은 내 생각이 담겨있겠지요. 내 생각은 나만 아는 생각이겠지요. 그럼 남은 못 알아먹지요. 못 알아먹는 말은 누구한테 돌아온다고요? 나한테 돌아오잖아요. 나는 나를 찬미 할 테니까 너는 박수나 쳐라 이 말입니다. 이게 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진리는 아니고 통계인데 통계에 의하면 부부가 결혼하고 7년 동안 말하고 7년 후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뒤에는 말 필요 없어요. 각자 지 이야기하고 끝나는 거예요. 7년이 참 문제라. 부모가 아이에게 말할 때 일곱 살까지만 말하고 그다음부터는 말이 안 돼요. 아무리 해도 동의가 안 돼. 동의가 안 되니 할 수 없이 그냥 넘어갑시다.

소유는 예언을 다룰 수 없다. 예언을 다루지 못하면 언약에서 배제되고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소유는 유령의 영토에 통하는 예언을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언이 등장하는 경우는, 이 소유가 악으로 들추어내기 전에는 예언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언이 등장했다는 말은, 너희들은 자기 찬미는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한나가 자식을 낳았습니까, 언어를 낳았습니까? 이 논리에 의하면 자식을 낳았어요, 언어를 낳았어요? 수능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 한나는 자식을 낳은 게 아닙니다. 자식은 브닌나 네가 해라. 한나가 낳은 것은 사무엘이고 사무엘은 예언자에요. 말을 낳은 거예요. 말을 낳았기 때문에 자기 아들 소유가 아닌 거예요. 하나님께 갖다 바쳐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말은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 내가 우선적으로 내 말을 나한테 수집하기 때문에 들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안 들어도 좋다는 거죠. 그러나 사무엘의 말은 들을 사람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말은 들을 대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언약궤에요. 가로 110센티미터, 세로 68센티미터, 높이 68센티미터 되는 그 상자를 향하여 사무엘은 말을 던집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언약궤가 유령의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말하는 자를 이 인간의 영토, 이스라엘에다 만들어 낸 거예요. 언약궤가. 왜냐하면 브닌나는 아들 낳았다고 자랑질하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궤와 소통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무엘이 언약궤에게 말을 던지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는 기능으로 등장하는 것이 브닌나, 소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소유했다는 것은 됐어, 성공했어가 아니라 사실은 정확하게 말해서, “망했어, 망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소유하고 있고 뭘 갖고 있다는 것은, “나 이제 지옥 가” 그런 뜻으로 보면 돼요. 왜? 언약에서 배제되고 소유가 있으면 예언을 다룰 수 없습니다. 소유가 아깝기 때문에 가진 게 아깝기 때문에 다룰 수가 없어요.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이고 부자청년은 돈이니까 돈을 가지고 예수님께 영생 얻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가진 것 갖고 지옥가든지, 아니면 가진 것 버리고 소유 버리고 말을 선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 하라니까 부자청년이 근심해서 가진 것 가지고 지옥 가겠다고 가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도 얼추 통장에 이십만 원은 있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그 이십만 원이 있다는 말은 우리 자신 속에 유령과 삶의 영토 두 가지 다 겸비하라고 있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스핀이라는 이야기했지요. 전자가 자전하면서 한쪽으로 원자핵 쪽으로 완전히 쏠리지 않도록 하고 바깥으로 튀어나가지 않게 하고 자체적으로 힘의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선과 악이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육신 가운데 들어오신 거예요. 왜냐하면 이 자체가 브닌나, 브닌나는 소유니까 소유가 존재를 출현시킵니다. 존재는 경계선이 쳐져야 되니까. 여기까지는 내 것, 저기까지는 네 것. 이렇게 되면 여기까지는 내 영향이 미치는 나의 존재, 저기까지는 네 것이라고 해줄게. 그래서 소유가 없으면 존재도 없는 거예요.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마포대교에 자살해야 돼. 아무것도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모아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의 영토에요.

그래서 사람들의 대화는 남에게 자기 소유를 이야기하거든요. 너 취직했어, 라는 말은 나 취직했다는 뜻이죠. 내가 취직했다는 말을 상대방에게 물음으로서 되는 거예요. “나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한 달에 이백만 원 받아. 너는 어디에 취직했어?” “난 삼성에 취직했는데 첫 달에 육백 주던데.”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면 속으로, “나 너 죽여 버린다.”

왜냐하면 그 육백 앞에 이백은 없는 존재니까. 나는 내 존재 때문에 사는데 내 소유 때문에 사는데 갑자기 나보다 수입이 많으면 그 인간을 죽여야 내 소유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살에 해결책이 없어요. 서로 죽고 죽이니까. 힘과 힘의 부딪침이니까. 소통이 될 리가 없고요. 한꺼번에 죽여줄 게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만 남기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말씀으로 보내셔서 그 말씀 외에 모든 소유는 다 작살, 그 말씀으로 이 세상 모든 소유를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그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에요. 출애굽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약속이 거대나라 제국 애굽을 이긴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무엘상을 읽어보시면 계속 꾸준히 핵심 내용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옛날에 애굽에 있을 때에 바로의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들을 이런 식으로 끄집어내어 주었잖아, 하는 이야기가 사무엘상 끝까지 읽어보면 그게 꾸준하게 나와요. 사무엘상 2:27, 4:8, 6:6, 8:8, 10:18, 12:6, 8, 15:2, 6. 계속해서 옛날에 하나님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너희들의 부르짖음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었다고 계속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라고요? 하나님의 약속이 뭘 이겼습니까? 거대 힘의 집합체, 국가라는 힘의 집결체를 박살낸 사건이에요. 묵사발 만든 사건이에요. 그 출애굽 사건을 사무엘상에서 되풀이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애굽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나라는 절대로 이세상의 삶의 영토처럼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말씀의 세계고 예언의 세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 그 세계란 말이죠. 약속의 세계에요.

그 말씀이 나오는 원천은 뭐냐? 원천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에 대해서 현재 이스라엘이 얼마나 잘못 사용하고 있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이걸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주는 게 아니고 언약궤를 뺏어온 블레셋 나라를 통해서 그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언약궤를 잘못되게 곡해 했는가를 블레셋을 통해서 이야기해줘요. 블레셋은 언약궤를 액땜용으로 사용합니다. 내 소유에 흠집 낸 것을 보완할 수 있는 그런 액땜용, 액을 땐다고 하잖아요. 내 소유의 재수 없는 것을 처리하는 액땜용으로 사용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무엘상 6장 6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4장 8절부터 먼저 보면, 전쟁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앞장세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핵미사일을 앞세운 것과 똑같아요. 그런 입장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원자폭탄이 없는 적이 하는 말이,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에 있었던 일을 블레셋 사람들이 소문 듣고 아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막강한 무기가 있는데 그 무기는 이스라엘을 늘 승리케 하는 힘을 준 무기였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스라엘도 언약궤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블레셋과 전쟁에서 뭘 앞장세웠습니까? 히든카드,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이만한 힘을 누가 당해내리요, 하고 옛날 언약궤의 그 영광, 우리의 소유가 소유되게 굳히게 했던 승리, 영광의 언약궤를 세워서 이 세상에 누가 당할 수가 있느냐, 했는데 빼앗겨버렸어요. 마치 브닌나가, 형님은 아들 없지요. 난 가졌어요. 그러니까 나는 남편사랑 독차지할 거라고 우기는 그것, 자식을 자기의 힘의 소유로 여겼던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블레셋은 6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을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거기다 뭘 하느냐? 그들은 금독종 형상 다섯을 만들어요. 그들이 재앙을 당했던 다섯 개의 지역이 있어요. 다섯 지역을 대표해서 금독종 다섯을 만들어 그걸 수레에 담아서 이 재수 없는 것은 우리가 가지면 안 된다, 하고 언약궤와 함께 액땜하듯이 보내는 겁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소유를 지키는 용도로 언약궤를 사용한 겁니다. 이게 바로 삶의 영토에요. 살아남으면 성공한 거고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무엘의 말씀은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는가? 사무엘의 모든 말은 언약궤를 지향하는 식으로 쉽게 말해서 언약궤답게 작동하는 예언의 말씀으로 사무엘이 예언을 하게 되지요. 언약궤 쪽으로 사무엘이 말을 하는 거예요, 예언하는 겁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현 이스라엘을 언약궤 안에 집어넣고 못을 박아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언약대로 움직일 거예요. 언약대로 움직인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자기의 소유,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나왔던 원리원칙, 하나님의 약속의 원칙에 위배되게 되면 이스라엘은 망할까요, 안 망할까요? 언약대로 하게 되면 망하지요. 망하는데 어디서 망하느냐? 언약궤 내부에서 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자신도 언약궤 속에 들어가서 위에서 못을 박아 볼까요? 어어, 이러면 안 됩니다. 사실은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야 살아요.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산다고요.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못을 박아야 돼요. 두 번 다시 못 나오도록. 탈출하면 안 돼요. 탈출하면 지옥이에요.

<킬빌>처럼 손가락으로 쑤셔서, 여자 전사, 여자 사무라이처럼 뚫고 나오면 안 되고 완전히 못을 박아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돼요. 내 소유를 죽여줘야 된다고. 그렇다면 사무엘 말씀대로 언약궤가 무사히 성사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죽은데서 이스라엘이 살아나겠지요. 살아 있는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살아 있는 모습이 다윗이에요. 다윗으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나온 것이 다윗이에요. 다윗이 왕이거든요. 다윗이 나오기 전에 죽을 왕을 먼저 줬다는 거예요. 사울 왕이 죽어야 된다는 말은 사울 왕을 옹립한 모든 이스라엘은 사울 왕과 더불어서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울 왕과 더불어 모든 이스라엘은 죽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다윗이 빠져나왔다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의 의미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은, 왕이 있다는 말은 그 다음부터 백성은 알아서 여기서 생산되면 되는 거예요.

왕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백성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윗의 등불이라고 하고 이스라엘 나라의 존립은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 신앙이 아니라 다윗의 등불이고 이게 신약에 오면 뭐냐? 예수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 이름 가지지요.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처음 태어났다는 거예요. 새롭게 태어났다, 새롭게 생산됐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나의 이름은 어디 묻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참 <킬빌> 옛날 영화 한 번 봐야 하는데. 관에 넣고 땅에 묻었는데 힘이 얼마나 센지 손가락으로 뚫어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자꾸 튀어나오면 안 돼요. 나는 죽고 나와 함께 묻혔던 분이 내 대신 먼저 선빵으로 부활된 거예요. 먼저 죽음의 권세를 뚫고 나와서 그 다음부터 우리한테 뭘 하느냐? Hey? 하고 성령으로 우리 이름을 불러주게 되면 우린 그때부터 나의 이름은 죽었고 누구의 이름으로 사느냐?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이름 자체를 늘려보면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인생을 축약시키면 이름이 되고, 그 이름을 늘이면 인생이 된다고요. 야곱의 인생은 흙으로 가는 인생이죠. 야곱이 아니고 아담의 이름은 흙이 되는 이유가 그걸 축약하니까 흙이고 늘려보면 흙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인생,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언약궤를 향하는 모습에 대해서 사무엘이 언약궤에 대해서 보이는 것을 언약궤로 해도 되지만 삶의 영토에서 봐선 이렇게 되는 거예요. NPC가 되는데 이건 Non Player Character라 해서 컴퓨터게임에서 플레이하는 사람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회사에서 미리 작동하게 구비한 거예요.

마리오게임 같은 초창기에 나온. 게임하는 것과 거기에 대해서 반대한다든지 어드밴티지 주는 것도 그렇고 핸디캡 주는 것도 그렇고 막아서야 게임이 재미있잖아요. 그걸 회사에서 그런 걸 해놨어요. 함정이라든지 이런 것, 내가 다룰 수 없는, 플레이가 없는 캐릭터에요.

이 유령의 특징이 뭐냐 하면 고정적이다. 인간이 아무리 설쳐도 주님한테 댄스를 신청할 수 없습니다. Shell we dance? 춤 안 춥니다. 왜? 주님은 늘 고정돼있으니까. 움직인다는 것은 호들갑을 다 떨고 있는 거예요. 주여 이럴 수가. 움직인다는 것은 매사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금식 해보기도 하고 기도, 예배드리고, 헌금도 많이 해보고 전도도 해보고 온갖 호들갑을 떤다는 것은, NPC 고정된 것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모방해서 내가 나를 영원히 고정된 존재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우상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우상이란 말 안 하겠지요. 내가 절대 신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가져서.

이 고정된 것을 폴대라면, 긴 장대라면, 돈키호테처럼 술 취한 사람이 길 가다가 장대나 가로등 하나 있으면 돈키호테도 아닌 게, “야 너 뭐 잘났는데 키 커?” 이런 식으로 할 때 저거 많이 취했다고 하잖아요. 우리 인생은 자기 욕망에 취해 있어요. 가만있는 그냥 여기선 폴대라 했지만 이런 것 하나 집어넣읍시다. 십자가지요. 십자가에선 다 이루었다고 끝냈는데 우리는, “십자가만 다냐?” 술 많이 먹었어, 인간이. “내 몸은 왜 아픈데. 십자가가 그렇게 능력 있으면 날 구원해보라고. 내 병 낫게 해주면 당신 십자가 믿어줄게.” 이건 듣는 사람도 없고 지 혼자 횡설수설.

당신이 십자가 졌는데 왜 우리 교회 교인은 자꾸 주는데? 이런 식으로. 그 짓을 누가 했는가? 사무엘상에서 사울 왕이 한 거예요.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고 내가 잘해야 이스라엘이 사는데 하나님은 왜 날 도와주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절 봅시다. 이제 이 정도 들었으니까 여러분들 응용하세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라고 했지요.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은 탁 나온다. 사무엘이 하는 모든 일은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지향하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말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무엘이 예언을 하고 말을 한다는 것은 죄를 죄 되게 도출되게 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러면 도출한 죄는 지금까지 강의한 것에 의하면 무엇 때문에 그게 죄가 될 수밖에 없냐 하면 내 소유, 나만의 소유가 따로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이것은 출애굽 했을 때 그 정신과는 배치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여기 정인이 포함됩니다. 정인이 알아요. 갑자기 시사 들어가니까 모르겠어요? 양녀로 와서 맞아 죽은 아이 있잖아요. 젖먹이 아닙니까, 젖먹이든 뭐든 간에 그건 입자고 소유에요. 한나는 아들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 아들 있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를 알려주는 그런 자식 있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 브닌나가 아들 있다고. 그래서 사무엘상 1장에 보면 그걸 원수라 했어요. 6절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이렇게 돼있어요.

진멸하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사울이 출애굽 정신에 입각해서 약속이 소유를 개무시하는구나, 이렇게 하고 전부 다 약속을 위해서 해야 돼요. 다 작살내야 되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사무엘상 15장 9절에 보면,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진멸은 했는데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했다고 돼있어요.

교재 1페이지에 보면, “악과 선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경우나 대상체를 악이라고 정해놓았다. 선이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나 대상체로 정해놓았다. 이러고서 진실을 짜 맞춘다. 이렇게 되면 진실은 악의 모서리와 아귀가 맞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현실은 저주받은 것으로 퍼즐 그림이 짜 맞춰지는 것이다.”

이걸 뭐라 했습니까? 이게 삶의 영토라 했지요. 내가 사는데 부담 없이 살면 이건 진리가 되고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란 거예요. 그러면 사울 왕이 왜 진멸을 다 안 했느냐 하면 내가 진멸을 해야 될 것과 안 해야 될 것을 남겨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에게 퀴즈 하나 나갑니다.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두 구의 시체가 장례사 앞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장례사라면 천국 가는 시신과 지옥 가는 시신을 어떤 기준으로 정하겠습니까? 분류를 해야 되는데 이건 천국 가는 것, 이건 지옥 가는 것, 둘 다 지옥 갈 수 있고 천국 갈 수 있는데 그 분류기준이 무엇이겠느냐? 기준이 성립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천국, 지옥은 어느 권한을 벗어납니까? 예언의 세계고 약속의 세계거든요.

아까 했잖아요. 소유는 예언을 다룰 수 없다. 소유가 예언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소유 자체가 뭐가 된다? 죄가 되는 거예요. 이건 이방민족은 몰라요. 이스라엘은 이걸 알아야 돼요. 저와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된다고요. 그런데 브닌나라는 그 여자는 한나에게 아들이라는 소유가 없지요.

없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유 없는 것은 지옥, 소유 있는 나는 천국 간다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그 이야기할 때 그게 누구에 대한 찬미고 누구에 대한 즐거움입니까? 그런 말을 내뱉은 본인에게 찬미가 되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브닌나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는 평생토록 하고 있는 거예요. 브닌나는 자기의 말도 안 되는 걸 몰랐지요.

브닌나를 정신 차리게 한다면 방법은 뭐냐? 기도했는데 아들이 생겼데. 그때는 깜짝 놀라죠. 저게 말이 돼? 저게 가능해? 시험관 아기? 아니. 그럼 뭘 했는데? 너 때문에 한에 받쳐서 가슴 쳤는데 아들 생겼어. 이게 말이 돼. 그러면 너를 구박하는 내가 없었으면 아들 없었지. 그러면 그 아들은 누구의 죄를 까발리기 위한? 너의 죄를 까발리기 위한, 이게 말이 돼? 갑자기 내가 왜 저주받고 지옥 가지. 이게 바로 약속의 위치입니다. 약속의 기능이고 역할이에요. 주께서 오신 것은 우리 죄를 까발리기 위해 오신 거예요. 소유를 버리는 것도 무소유도 마찬가지고 이게 저주받을 짓이거든요.

그러니까 장의사는 모르지요. 장의사는 장의사 마음대로고 나중에 두 시체 심판하는 것은 주님 마음대로고. 그런 거예요. 만약에 장의사가 죽은 시체의 인생을 안다면 백 프로 이렇게 했을 거예요. 착하게 산 사람을 천국가고 나쁘게 산 사람을 지옥 간다고 이야기 할 건데 그것은 좀 더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면 죽은 시신이 장례사 나보다 더 착하게 살게 되면 천국 가고, 죽은 시신이 장례사 나보다 더 착하게 못 살면 지옥 가고, 이겁니다. 죽은 시신은 되게 억울해서 벌떡 일어날 거예요. 왜냐하면 본인은 본인 나름대로 착하기 때문에. 평생을 착하게 살았다고요.

심지어 조폭들의 모임에도 이렇게(차카게 살자) 써놨어요. 착하게 살자고. 맞춤법 틀리지만 하여튼 착하게 살자. 하면 된다. 이런 것 알고 있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하리라. 도대체 성경말씀을 던졌는데 그 말이 전부 다 누구한테 돌아와요? 자기 소유를 강화시키고 공고히 하는데 다 돌아오는 거예요. 브닌나와 똑같은 겁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했을 때 신바람 났지요. 소유가 없는 것은 존재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울이 좋다는 것은 어디에 유효하냐 하면 내가 백성들의 마음을 나에게로 돌릴 수 있는 근거로서 그 아말렉 전쟁을 이용한 겁니다. 쉽게 말하면 진짜 이건 쉽게 말하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했는데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서 구원받았잖아요. 그러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저 사람이 있음으로서 내가 계속 목사 짓을 할 수 있는 정당성이 공고화 된 겁니다. 강화된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 능력 없다고 자꾸 교인 줄어드니까 나가라고 결정하고 난 뒤에 마지막 고별 설교하는 그 자리에 이웃 교회에 문제 있어서 교인 오십 명 들어왔다고 칩시다. 나가겠어요? 안 나가지요. 더 강화되었으니까. 부부가 싸워서 갈라지자고 이혼도장 찍는데 그냥 남편이 던져놓은 주식이 대박 나서 갑자기 25억 들어왔다. 이혼하겠어요? 잠시 보류하지요. 이건 급한 것 아니니까 2년 뒤로 미루자. 일단 돈 어떻게 쓸까 그것만 의논하자.

그러니까 선과 악이라는 것은 자기 소유가 얼마나 강화되느냐 거기에 달린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그 전쟁, 출애굽 했을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니까 출애굽 정신,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 아말렉을 작살내라. 아말렉은 현재 이스라엘 남쪽, 이집트와 그 사이에 사막지역에 사는 아말렉이거든요. 그걸 작살내라 했을 때에 사울은 이때다, 기회다. 이번 전쟁에 승리를 이끌게 되면 나는 백성들에게 인기 높아지고 왕의 권력은 더 강화된다. 강화되면 결국 하나님의 약속으로 유지되어야 될 이스라엘의 위상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상 15장 10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이 후회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후회할 짓을 네가 했다, 라고 그걸 분명히 언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후회했다는 말은 뭐냐? 촉구하는 거예요. 뭘 촉구하느냐? 내가 나한테 후회할 짓을 했습니다, 라고 촉구하는 의미로서 후회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무슨 하나님이 후회를 해요. 하나님이 후회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너 하는 행동에서 네가 후회해야 돼. 내가 너라면 후회하겠어, 이런 뜻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너라는 존재는 나에 도움 되는 존재가 아니고 훼방하는 존재고 방해하는 존재인 것을 이제 알았느냐는 겁니다. 12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기념비를 세워요? 장기 집권할 일 있습니까? 왜 기념비를 세웁니까? 여호와 기념비를 세우는 게 아니고 자기 이름을 새기는 거예요. 결국 사울의 행동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걸 똑똑히 보여줍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자국마다 자기 기념비를 세우는 그 짓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장로님 연금 얼마 나와요? 연금도 일종의 기념비거든요.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 내 소유로 인하여 내가 살겠다는 겁니다. 나는 내 소유에 빌붙어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인간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이 못되지요. 거기에 비해서 사무엘은 어떤가? 사무엘은 나중에 은퇴하는 대목에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 것을 탐낸 적이 있느냐고 물어요. 없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사울의 문제점과 브닌나가 자기 자식 가졌다고 자랑하는 그것과 맥이 통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특징은 삶의 영토와 그 위에 말씀, 예언의 영토, 유령의 영토지요. 그게 중첩되어서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이게 사무엘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심지어 골로새서에서 너희는 땅에서 죽었고 하늘에 있다 했지요.

땅에선 죽은 존재로 있고 하늘에선 산 존재기 때문에 땅에 있을 때는 죽은 존재로 살아야 되고, 죽은 존재로 살아야 될 이유는 매사가 내 육신의 소유 쪽으로 쏠리는 쪽으로 생각하고 그것만 행한다는 그러한 육신적인 행동에 좀 충실하란 말이죠. 충실하라고 부탁 안 해도 잘하고 계셔서 아주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그 일에 충실하란 말이죠.

그 충실한 것, 그것은 누구 이름? 내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리고 그것이 죄일 수밖에 없는 내 이름, 그런데 중첩되어 붙어있으니까 다른 이름이 있지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그것을 죄 씻어주는 주의 이름으로.

그 구조가 바로 이스라엘 구조지요. 이스라엘 구조는 동그라미 쳐놓고 중간에 선반 하나 내부적으로 꽂으면 돼요. 위에서는 예언, 밑에서는 소유. 이 소유가 점점 더 커집니다. 커지면 예언도 커지겠지요. 예언도 커지면 이게 우상숭배로 이어지지요. 우상숭배로 이어지면서 이 소유가 예언을 공격하게 되고 예언은 피해자 입장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에 보면 제사에서 피 흘림으로 용서되잖아요. 그 취지가 신약 쪽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 귀추가 분명해지는 겁니다. 이 세상엔 죄 밖에 없고 피는 메시아만 흘려야 된다는 사실 갈수록 신약에 올수록 점점 더 확고해지는 거예요. 거기 따라 예언은 멈출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습니다. 언약궤가 죄 용서가 되는 것은 거기에 피가 뿌려졌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그걸 그대로 보여줬잖아요.

그 이스라엘을 예언이란 관에 이스라엘을 담고 못으로 쳐버려야 돼요. 못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게 오늘 아침에 설교한 무슨 공간이냐 하면 바로 폐쇄 공간입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닫힌 공간이에요. 그 안에서 일할 사람도 없고 말할 사람도 없고 환경도 어떻게 손댈 수 없는 환경, 광야 속에서 누구와 주고받습니까?

하나님과만 상대하며 상호작용할 때 그 폐쇄 공간, 그것이 그대로 신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그 관계고 그것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는 칼로 찌르는 그 관계가 신약에 오면 예수 안, 또는 십자가 안, 다른 말로 성령 안, 그 안에서 화목하시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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