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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없음

아빠와 함께 2021. 1. 16. 17:01

2021겨울수련회, 사무엘상강해 제5강 : 없음 -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비존재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요. 이 시간에는 없음에 대해서,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쉽게 하게 되면 선택 당했다. 선택 당했다는 이 말은 나의 예상한 바에는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없다는 말은 내가 예상한 그 내용 속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없는 거예요. 만약 외계인이 나타난다면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기존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뭉쳐져서 나를 이루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친숙함이에요. 만약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 존재 안에서 친숙하다면 여기에 아프리카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누가 온다면 우리는 당황스럽지요. 공포를 느끼는 겁니다. 영어 잘 못하는 사람에게 미국 사람이 다가오기만 해도 공포의 순간이에요. 그래서 이 친숙함이 있는 여기에 외계인이 온다. 그러면 우리는 공포를 느끼고 내가 감당범주 밖에 있기 때문에 불결함을 느끼죠. 이게 낯섦이 되는 거예요. 낯설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천국 지옥도 미리 정보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비하고 대비함으로서 나의 목적인 존재의 온전함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목적을 인정해 준 적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너의 대비와 예비가 어디까지나,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비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존재를 더 빛내기 위한 수작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너의 목적을 내가 왜 들어줘야 되는데?’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오느냐 하면, 낯섦으로 와요. 낯섦으로 올 때 우리는 여기서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겁니다. 사울 왕이 왕으로 기름을 부음 받아요. 기름 부음 받고 난 뒤에 사무엘에게 사울자신을 소개할 때 사무엘상 9장 21절의 말씀처럼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두지파거든요. 열두 지파인데, 열두 지파 가운데서 제일 대세를 이루는 지파의 대표자가 왕이 되는 게 마땅한데 하나님께서는 그중 제일 작은 자 베냐민 지파의 사람을 뭐로 선택했습니까? 왕으로 선택한 거예요. 사무엘상 10장 20절에 보게 되면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여기서 뽑혔다는 것은 추첨한 거예요.

계속 뽑습니다. 21절에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이렇게 사울을 뽑았는데 그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했지요.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지라.” 없는 거예요. 선택작용만 있고, 하나님의 선택작용만 있고 당사자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서 이것은 의도적으로 사무엘과 사울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요. 그리고 사울이 미리 예상했다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리 봐도 자기가 왕 재목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 재목감이 되든 안 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미 선택을 했어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뽑았어요. 예수님이 뽑았으면 가룟유다는 본의 아니게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파는 역할 기능을 담당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도, 너는 차라리 배우로 안 태어났으면 좋을 뻔 했다. 네가 연기자로 안 태어났으면 좋을 뻔 했다, 하지요. 그래서 없는데, 없으니까 찾는 거예요. 이게 선택의 위력입니다. 선택은 나라는 이 존재 바깥에서 일어난 결정이기 때문에 이 존재가 거기서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가룟유다가 만약에 자기가 예수님 팔아먹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주 공손하게 제안했을 거예요. “예수님, 저 말고 다른 악마의 자식을 선택해서 예수님 파는 일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빠지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가룟유다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소리 하는 것 보니까 네가 악마다. 왜 너는 여전히 네 존재를 지키려고 하느냐?” 너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실인 거예요.

만약에 가룟유다 역할이 예수님 팔아먹는 역할이 아니고 천국 가서 예수님 가장 가까운 측근에서 주님을 영원토록 섬기는 그 일이라면 가룟유다가 “주님, 저 말고 다름 사람 시키지요.” 하겠습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했겠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 선택은, 골라, 골라, 골라잡고 판단하는 것은 내가 하겠다고 나서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친숙함이지 결코 낯섦이 낯섦으로 유지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22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 어디 사이에 숨었다? 숨었다는 것은 여기서 유명한 사자성어 ‘영구없다’ 나와요. 영구는 있어요. 영구는 있는데 본인이 영구 없다는 거예요. 왜 숨습니까? 왜 숨었지요?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부 다 ‘영구 없다’에요. 전부 다 마스크 다 쓰고 있으니까요.

내가 나를, 사울이 자기가 자기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숨길 수 있지요. 인간의 시선에서 어긋나니까. 그런데 이 원칙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시선 뒤에는 응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세상 보는 관점은 응시에 휘둘리고 쫓겨서 내뱉는 시선입니다. 뒤에서 미는 게 있어요. 지켜보는 응시가 있어요.

그게 악마일수도 있고, 그게 성령일수도 있고. 그건 사람마다 달라요. 시선은 나로부터 출발하지만 응시는 나 밖에서부터 출발해서 나를 등 떠미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시선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자기를 지켜보는 응시부터 출발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낯섦을 친숙하게 보는 게 아니고 계속 낯섦을 낯섦으로 계속 살려내는데 내가 뽑힌 거예요. 간택된 겁니다.

시선 뒤에 응시 있었다. 같은 것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은? “부활이다” 이렇게 하고 싶지요? 새로움입니다. 새로움이라는 것은 내 예상 밖에, 내 예상 안에 놓여 있지 않은 연속적인 낯섦이에요. 새로움이 뭐냐? 이게 부활의 힘입니다. 부활의 힘, 부활이 부활되기 위해서는 늘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되느냐 하면,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 거예요. 내 예측과 내 정보, 내 지식, 나는 나를 안다는 이것이 날마다 새로움에 의해서 작살나야 되는 겁니다. 깨져야 되는 거예요. 이게 과거와의 단절이에요. 날마다 새로움입니다. 새롭다고 해서 무슨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고 익숙해져 있는 것도 주께서는 새롭게 보는 거예요.

옛날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저는 초등학교는 다닌 적이 없어요. 국민학교 밖에는 안다녔는데 그 때 늘 도시락 반찬이 김치 그리고 오락지라 하지요, 무 말려서 양념한 그것을 쌌는데 그게 지겨운 거예요. 그런데 정말 배가 고팠을 때는 그 지겹다는 반찬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동일한 반찬이고 동일한 재료인데 상황에 따라서 이게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여러분이 가진 것을 새로움으로 다가가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움으로 다가가려면 늘 잃었다가 다시 얻어야 되는 거예요. 어디를 거쳐야 되느냐? 존재에서 어디를 거쳐야 되느냐? 존재에서 없음을 한번 경유해야 ‘아, 이렇게 있음이라는 것이 소중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요즘에는 옛날에 했던 세계를 여행하는 tv프로그램 보게 되면 그렇게도 약이 오르지요. 왜? 거기 보면 어느 누구도 마스크 쓴 사람이 없어요.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지. 그게 얼마나 자유로운 상황인지를 우리는 코로나 와봐야 ‘아, 그 때가 참 좋았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아는 것을 코로나뿐만 아니고 다 그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새로움을 위해서 출생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겁니다. 태어나서 살아온 모든 것이 때로는 후회스럽고, 때로는 날 원망하고 싶고, 그런 실수를 왜 했느냐 싶지만 그걸 다시 낯섦이 뒤에서 떠미는, 새로움이라는 응시가 떠미는 그 시선에 의해서, 응시에 의해서 늘 바꿔지는 시선으로 볼 때 그것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뭐냐? 말씀이 주는 새로움이에요.

구약 이야기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고 말씀이 주는 새로움이 늘 여기에 있기 마련이에요. 여기 ‘행구사이에 숨었다’ 하는 것은 영구 없다. 있으면서도 없는 거예요. 이게 무슨 작용이냐? 마스크 작용인데 마스크 작용이라 하는 것은 마스크 썼다는 그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화 <마스크>의 그 마스크, 마스크를 하나 썼는데 벗으려 하니 이게 벗겨지지를 않네요. 피부 자체가 마스크화 되어버렸어요.

이게 안 벗겨져. 목 자체를 치든지 해야 돼. 본드도 그런 본드가 없어요. 자기 본 얼굴을 잃어 버렸어요. 그 영화가 아주 오래된 영화인데 현대인의 비애에 대해서, 허무에 대해서 고발하는 영화에요. 남 보기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서 마스크를 썼는데 그게 어느새 자기 자아와 하나가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남들이 원하는 것 아니면 내가 내놓을 수가 없는 그런 인간으로 네가 돌변해 버렸다는 이 암울한 현실상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남들 욕하지만 그 욕하는 그 사람이나 우리가 이미 한통속이 된 거예요. 그러면 마스크를 벗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사무엘상 10장 다시 봅시다. 3절에 보면, 암나귀 찾다가 온갖 사람 다 만나지요.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여기에 세 사람 만나지요. 이 세 사람의 기능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지금 벧엘로 올라가거든요. 벧엘로 올라가면서 그 사람들이 뭘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떡 세 덩이 가졌고, 다른 하나는 포도주를 가졌지요. 떡과 포도주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이 궁핍하지 않고 약속의 땅이 풍족했을 때의 소산물을 갖고 있지요.

그들이 어디로 데려가느냐? 그들을 만나고 난 뒤에 그것을 받고 이미 약속의 땅이 율법대로 완성했을 때 그 때 나타나는 소산물, 생산물을 받고 난 뒤에 하나님의 산에 이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 세 사람이나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사무엘을 만나는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은 이래야 정상이고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길에서 사울은 이런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러니까 영적인 예언의 말씀에 도취되어서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체, 이게 정상적인 이스라엘이 아니고 뭐냐를 사울로 하여금 경험케 하는 겁니다. 여기는 전혀 악신 들렸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우리가 봐야 될 것은 사울을 통해서 없음이 가능 하냐, 그걸 봐야 되겠지요.

지금껏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사울은 선택 당했다. 사울은 선택당한 거예요. 선택 당했다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 선택 당했다. 어떤 선택 당했느냐 하면, 사울의 자리는 사무엘이 기름 부었지요. 기름 발린 자에요. 기름 발린 자. 메시아지요. 메시아 자리로 선택당한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 자리에 선택당한 그 위력이 11장에 1절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이렇게 시작해서 먼저 시비를 걸지요.

6, 7절을 누가 읽어 보세요.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라고 했지요. 아, 상당히 폭력적입니다.

지금 사울이 왜 이렇게 화를 냅니까? 사울이 화를 낼 이유가 없는데 화를 냈거든요. 이 자리가요, 이 기름발린 자리가 하나님이 이미 선택 했잖아요. 선택했으면 이 자리, 왕이니까 머리, 머리는 선택되었지만 이 몸통은 어떻습니까? 몸통은 옛날 그대로지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걸 선택했다는 말은 위쪽은 개선이 되었는데 아래쪽은 죄 그대로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죄가 있다는 것은 뭘 로 아느냐? 이방나라들이 함부로 조롱하면서, 얕잡아 보면서 공격을 하고 있지요.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공격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무서워서 뭐했습니까? 그걸 기뻐했습니까, 그 공격 때문에 울었습니까? 슬퍼했지요. 슬퍼했다고 되어 있지요. 4절에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존재에 대해서 내가 감당 못할 낯선 것이 왔을 때 공포를 느끼고 위기를 느끼면서 어찌할꼬, 우는 거예요. 어찌할꼬, 운다는 말, 지금 사울이 사무엘상 10장에서 왕이 되었잖아요. 그들 소원대로 왕이 되었는데 왕을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까짓 것 그거 베냐민 지파, 조그마한 지파의 사울이 우리를 위해서 뭘 해줄 수 있느냐,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내 존재를 어떻게 보존하고 유지하느냐? 온통 생각이 그것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개선하기 위해서 암몬 사람 나하스를 통해서 공격개시하게 했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가지고 슬피 울었고, 그걸 보고 누가 분노한다? 사울이 분노해서 그 분노의 표시로 애꿎은 소를 찢었어요. 손의 악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지요. 그 힘으로 골리앗이나 잡지. 소 잡지 말고.

분노가 나서 소를 찢어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누가 내 앞에서 기침하는가,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애꾸눈 궁예가 하는 소리, 누가 내 앞에서 기침하는가, 죽여 버릴 정도로. 교재에서는 그걸 가지고 카리스마라, 영적존재, 카리스마. 그래서 6절에 보면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사울의 분노한 이 시선은 뒤에 뭐가 있었다? 여호와의 신의 응시가 있었던 거예요. 뒤에서 떠미는 겁니다. “내 분노를 네 분노로 드러내라” 그 말입니다. 이 자체가 분노할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적들이 왔다고, 슬퍼서 멸망한다고 찔찔 우는 이 자체가 하나님을 개 무시한 분노적 상황이라고, 사울 네가 그걸 그대로 표현하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돼요. 과학은 출발점이 뭐냐? 나의 관찰이에요. 나의 시선이에요. 내 뒤에 다른 영적인 응시가 없는 게 과학이에요. 철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성경은 삶의 영토 말고 유령의 영토가 있는데, 유령이라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것, 철학적으로 표현해서 이데올로기, 이념의 외부, 이념의 외부가 바로 유령입니다.

아까 말한 것, 존재가 감당하지 못하는 낯섦, 낯설다. 그래서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모든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요. 성경은 뭐냐? 우리에게 찾아온 낯선 이웃이다. 그 이웃은 어떤 이웃인가? 우리를 향하여 상처받은 이웃으로 왔다. 이렇게 설명해요. 메시아라는 것도 우리한테 올 때는 상처받은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한테 상처받은 모든 자가 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베풀어줘야 될 이웃이다, 라고 하면서 독일 사람들은 봐주고 있어요.

자기 말이 맞지를 않는 거예요.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나치를 밟아야 된다. 그것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아니, 그냥 넘어가지.” 그렇게 되는 거지요. 사람이 어떤 이론을 끄집어내면 그 이론이 모든 현상을 다 포용할 수 있어야 그게 이론이고 진리가 되잖아요. 일부는 맞는데 일부가 안 맞으면 그것은 진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식이에요. 모든 이론이 다 마찬가지에요. 모든 과학도 마찬가지고.

수식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없다. 수학적공식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수학적공식이 뭡니까? 언어잖아요. 그 언어 밖은, 유령은 우리가 상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바로 네가 유령이야. 네가 악신 들린 거야.” 우리가 세상에서 푹 젖어서 살아야 될 이유가, 우리의 한계가 말씀과 비교할 때 어떤 한계가 있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어제 첫 시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이라는 언어를 놓고 우리만 이걸 다루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분이 있다 했지요. 유령 같은 분이 다루고 있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성경 보게 하는 것은 성경보고 그걸 해석하는 자체가 내가 죄인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기 찾기를 우리가 악마의 부추김을 받아서 훼방자로, 장애물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켜가지 않고 우리를 돌파해서 우리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그 작업으로 성경이 해석되어야 됩니다. 로마서 5장처럼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원수 된다는 그것이 하나의 재료가 되어서, 그 원료가 되어서 원수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뭐가 나온다? 그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구원이 나오는 방식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11장에서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1절에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여기 암몬사람 나하스라는 이 사람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그들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11절에 보면 “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삼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한 자가……” 그 다음에 뭡니까 “없었더라.” 없었지요. 없지요?

그 다음에 승리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누가 있고 누가 없는 겁니까? 이스라엘만 있고 나하스라는 그런 인간이 있었어도 없지요. 그런데 삶의 터전에서는 누구는 있고 누구는 없습니까? 바로 암몬자손 나하스는 있고 누가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 이 자체는 그들에게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승리했다는 그 사실은 없는 것으로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있다는 것은 오케이 인정해줄게.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된 것은 없었던 일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일로 넘기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비밀이고 사도바울은 그 비밀을 이제는 공개적으로 터뜨려 버리는 겁니다.

비밀을 누설함으로서 더욱더 비밀이 비밀다워져야 되는 거예요. 비밀은 감춰놓고 숨겨놓는다고 해서 비밀이 아니라 오히려 공개함으로서 왜 인간은 이 사실이 비밀이어야 했을 정도로 자기위주였는가를 들통 내는 방식으로 이 복음은 비밀로 전달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복음 전파할 때 미리 예측하거나 예상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그 비밀 자체로 이미 완성이 되기 때문에 결핍이 없어요. 모자람이 없어요. 결여가 없어요. 그래서 복음을 외치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 말씀이 들어온 사람은 몸이 아프든지, 집에 돈이 없든지, 그 자체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완성이 되는 거예요. 로마서 3장 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 제가 유념하고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고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사람들이 여기에 치중하는데 그렇게 보지 마시고 로마서 3장 22절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말이요. 차별이 없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런 유령의 세계에서는 차별이 없는데 이 땅에서는 차별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야 돼요. 이 땅의 모든 차이와 차별이 위에서 보면 전혀 차이가 없는 거예요. 차이가 없는 그 시선은 하나님의 응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관통하면서 우리의 시선으로 전달되는 겁니다. 우리의 시선을 수단으로, 매개로 해서 전달되는 거예요. 차이가 없는 거예요.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돈 있거나 없거나 차이가 없는 거예요.

차이가 없는데 내 존재가 방해물로 등장하니까 너는 돈 많고 나는 돈 적다. 차이를 느끼는 거예요. 너는 키 크고 나는 키 작다. 차이를 느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분노 살 만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있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있음을 뭐로 바꾸느냐? 없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무섭고 두렵고 떠는 이 이스라엘 군대는 아무짝도 소용없고 뭐만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한 이 머리 부분, 사울의 분노만 있어도 이번 전쟁에서, 암몬의 나하스와의 전쟁에서는 승리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지요. 자, 없다는 것은 없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 뭐로 정리될 수 있느냐? 이 땅에 뭐가 있어요. 그 있음으로 말미암아 없음이 없는 것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사무엘상으로 넘어가봅시다. 이 사무엘상을 1장부터 차례차례 해주면 좋겠는데 하는데 1장을 차례로 하는 그 방법이 그게 바로 잘못된 해석방법이에요. 1장 설명하고, 2장 또 하고, 차례로 다 했다 합시다. 차라리 설교 듣지 말고 성경 그냥 읽으면 끝나지요 뭐. 할 것 뭐 있어요?

사무엘상 4장 4절에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묻습니다. 여기서 언약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있는 것으로 봤습니까, 없는 것으로 봤습니까? 있지요. 있으니까 가져왔지요.

그런데 5장에 보면 언약궤가 그들 손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언약궤가 없어줘야 ‘아,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은 여기에 없구나.’라는 것이 드러날게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인간 만들기 위해서 언약궤가 집을 떠나는 거예요. “같이 있으니 네가 나한테 제대로 되었기 때문에 같이 있는 줄로 오해했지?”

그래서 자식들 말 안 들으면 엄마가 그런 협박을 많이 하지요. “너 까불면 엄마 이사 간다. 너 혼자 살래? 너는 아빠하고 살아라. 나는 떠날게.” 그런 이야기 많이들 들었잖아요. 저는 물론 그런 적이 없지요. 모범생이니까. 아이고, 나 있음을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악마가 왜 필요하냐 하면, 악마는 매개입자거든요. 복음, 복음, 예수님, 주님, 너무 많이 했어. 지겨워. 잠시 떠나 있으면 누가 들어옵니까? 우리의 마음 밭에 일곱 귀신 들어오는 거지요. 찬스를 봐가지고 “야, 갔대, 갔대. 주인 없어. 친구 일곱 명 데려와서 라면 먹고 가자.” 해서 우르르 와서 라면 끓여먹는 거예요.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인 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를 하기 때문에 ‘그까짓 거 귀신 들어와도 이겨낸다.’ 이겨낼 수 있습니까? 못 이겨내지요. 그게 계속해서 못 이겨내니까 뭘 하느냐 하면, 기도해볼까, 전도해볼까, 헌금해볼까, 열심을 내 볼까, 회개해볼까, 예수 믿습니다, 해볼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내식대로 날 지키는 방법이에요.

어떤 방법도, 어떤 수단도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이유는, 나는 날마다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날마다 있기 위해서 날마다 지킬 내가 날마다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없어져야 될 것이 계속 어제의 나를 고수하니까 마귀가 방문해서 라면 끓여먹고 설거지도 안 해서 집안을 엉망진창 만들어놓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 이스라엘이 있음에서 항상 뭐가 추가되겠습니까? ‘비(非)있음’을 고수하지요. 내가 있음은 있음대로 지키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있음이 더 온전한 있음, 오래가는 있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구하지요. 그런데 이 ‘비(非)있음’을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고 무엇으로 바꿉니까?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방법에 뭐가 개입하느냐? 여기에 언약궤의 있음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언약궤 있음으로 작용하게 되면 언약궤 있음에서 뭐가 나오느냐? 율법시대에 뭐가 나왔습니까? 율법을 줬지요. 언약궤에서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뭐가 나옵니까? 율법을 율법대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사사시대 때 뭐가 오지요. 성신,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사무엘이 율법을 강조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것은 무엇의 있음입니까? 언약궤가 있음이에요. 언약궤가 있음. 조그마한 상자, 가로×세로×높이, 약 1미터 10cm×67cm×67cm의 상자지만 그걸 너희들이 볼 때 있음으로 보지 말고, “언약궤가 있더라도 너희들은 없는 것처럼 굴었잖아. 없는 것처럼 너희들은 행동하고 살았잖아. 내가 진짜 있다는 것을 맛을 한번 보여줘?”

보여주는 것이 뭐냐? 사무엘상 5장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은 없는데 언약궤가 홀로 외롭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상자지요. 상자인데 상자를 가지고 사람들은 드디어 최후의 엄청난 전리품으로 빼앗았다고 좋아가지고 자기 신 다곤신에게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2, 3절에,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그들이 진즉 cctv를 깔아놨어야 돼. 도대체 새벽 몇 시에 작살났는지 알아야 되는데. 그냥 멀쩡할 줄 알았지요. 그들 보기에 언약궤는 그냥 상자고 둘 다 사물이기 때문에. 언약궤가 상자라는 그 의미가 뭐냐? 인간은 자연과 경쟁하면서 문명이 발달됩니다. 자연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연에서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 문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는 모든 문명은 자연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연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자연의 일부를 형상화 하는 겁니다. 형상화한 이것이 오늘날 가재도구에요. 인간에 있는 모든 가재도구가. 가재도구는 예술품이잖아요. 이 모든 예술품이라 하는 것은 자연을 모방해서 형상화한 겁니다.

도구적인 이용이라 할 수 있고 장식용으로도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인간은 뭘 느끼느냐? 인간은 자연과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어요. 자연에게 순응하는 척 하면서 내게 필요한 것은 자연을 누르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면 자연을 누르고 싶을 때는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자연을 응축해서 법칙을 끄집어내면 되지요.

이 법칙에다, 자연에서 끄집어냈기 때문에, 원천이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 법칙에 무엇을 입히는가? 장식을 입힙니다. ‘법칙 + 형상 = 신’ 이게 바로 신인 거예요. 신, 이게 신이에요. 인간의 모든 문명은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지금도 이슬람은 그러한데, 신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고 신이 시키는 대로 해라. 그 말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고 있기 때문에 그 겁을 내부적으로 순화시키고 완화시키는 방법으로서 바깥에 있는 자연을 내 내부와 내 손으로 다룰 수 있는 자연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이 문화와 문명이에요. 이게 예술입니다.

그래서 ‘예술은 길고 자연은 짧다’ 하는 말이 지금은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자연법칙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인생은 짧아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남긴 이 법칙과 이 원칙은 영원토록 지속될 테니까, 하고 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런 식으로 달래는 겁니다.

그러니까 bc5세기경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그리스 철학에 있어서의 모든 시도는 뭐냐 하면, 내부적인 자연의 질서를 법칙화 시키고 형상화 시켜서, 전에는 신과 결합을 했는데 신을 빼놓고 법칙 자체를 우리가 다루자. 법칙 자체를 다루고, 이건 자연의 법칙이죠,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그 자연법칙을 우리 안에 내면화시켜버리면, 인간이 하는 행동과 자연이 하는 행동과 일치가 된다면 우리는 자연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다, 라는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그게 스토아학파라는 거예요.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사도행전 17장에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논쟁했던 그 철학자들. 인간의 목표는 행복에 있고 행복의 방법은 균형에 있다. 너무 과하지도 말고 너무 모자라지도 말고 자연 그대로, 내추럴이라 하지요, 자연 그대로 살자. 아침부터 고기 지지고 그렇게 하지 말고 콘프레이크인가, 자연식 있잖아요, 곡물, 거기에 우유타서 먹으면 우리 몸은 자연과 일치된다고 보는 겁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이게 철학이거든요. 인간이 자연을 법칙으로 할 때 출발점이 뭐예요? 나의 시선이지요. 뭘 놓쳤느냐 하면, 숨어 있는 진짜 없음의 세계, 매개입자를 놓친 거예요. 창세기 3장을 놓친 겁니다. 악마가 그 짓 했다는 것을 놓치는 거예요. 그리고 악마가 성령께서 하는 일을 극구 계속해서 저지하고 방해해 왔다는 사실을 놓친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입니다. 농사지으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것이 내 농사라는 노동력의 개입으로 되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에게 시내산에서 주어졌던 율법, 이 율법에 의해서 율법대로 살게 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대로 살아서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을 대체 수용할 수가 없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율법이 없던 시절이 있잖아요. 약속의 땅에 원래 살던 토착민들 있지요. 원주민들이 있었어요. 그 원주민들은 그러면 어떻게 된 겁니까? 율법 잘 지켜서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풍부한 소산물이 나는 것은 네가 뭘 먹느냐, 가 아니라 그 과정이 사막을 경유했다는, 광야를 경유한 자에게만, 그 약속의 땅의 모든 소산물이 거저 주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라는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고 자비라는 사실이 광야를 거친 사람에게만 그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시선 뒤에 있는 율법적 응시인거예요. 떠미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오게 되면 응시의 시선을 바라보게 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조차도 형식적으로 한 거예요. 사무엘상 2장에 그게 나옵니다.

엘리제사장, 엘리사사라고 볼 수 있지요, 엘리제사장이 있는데 여기 2장 13, 14절에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제사장이 그렇게 할 수 있거든요. 원래 제사장이 그렇게 한다 그 말이지요. 있는데 17절에 보면 그들이 제사 드리기도 전인데 15절에,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육회를 왜 그리 좋아해요? 입맛이 시들하다 그 말이지요. 삶은 것은 그만 먹자,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제사 드리는 사람이 말렸지요. 16절에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취하라” 사환이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그래서 17절에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멸시함이었더라.” 여호와의 제사가 낯섦이 아니고 제사정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배당 지어놓고 예배드리는 것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만약에 예배당 모이지 말라고 하면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제사장이나 사울의 잘못은 이거예요.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을 못하는가를 생각해야 될 것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꽂힌 거예요. 이게 사단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되면 무엇이 긍정됩니까? 나의 존재가 하자가 없다는 것이 긍정되겠지요. 이게 악신 들린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사무엘상 2장 30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이 본문을 보고 왜 하나님께서 일관성이 없냐 하지요.

지금 성경은요, 하나님의 일관성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 하면, 내가 보는 일관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일관성 있게 해야 됩니다, 하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입장이거든요. 인간은 그런 입장이 되면 안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관성이 어떤 게 들어있느냐 하면, 하나님께 일관성을 요구하는 내가 하나님의 일관성을 방해한다는 그 사실까지 포함돼야 그게 하나님의 일관성이에요.

문장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만 창세기 6장을 봅시다. 노아심판 이전이거든요.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리고 7절 끝에 보면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했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한탄할 짓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게 한탄하고 후회할 일을 왜 했는가? 당신은 일관성이 없잖아.”라고 지적한다면 그게 바로 내 일관성을 일관성 있게 드러내기 위한 재료로서 그런 인간들의 주제넘은 평가가 필요한 거예요. 그렇게 보시고 성경 보게 되면 그동안 성경 보면서 막혔던 것이 뚫어 한방에 다 뚫려버립니다.

아, 이렇구나. 모든 것을 응시로부터 출발해야 될 것을 가지고 나의 시선으로부터 출발했구나. 평소에 살아오면서 내가 이 땅에서 교육받은 과학적, 철학적, 합리적, 이성적 사고가 이처럼 복음을 가리는 악마 짓인지 몰랐다.’라고 생각하면서 점심식사를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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