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달인은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 같지 않은 느낌을 주며 상대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능력자이다. 이런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달인은 거짓말인지 아닌지 그 경계를 초월해서 자신조차도 스스로 속아야만 완벽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거짓말의 달인에게 실컷 당하다가 나중에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서 이런 대사가 오간다.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 이제부터 거짓말하지 마세요”라고 남자가 말하자 “상대가 날 믿게 한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요? 이건 고도의 지능 이 필요한 게임이라고요. 아무나 할 수 없어요. 거짓말은 천부적인 능력이거든요”라고 여자가 대답한다.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자신이 맞춰보겠다며 내기 질문을 한다. “당신 나 좋아하는 거 맞지요?” 여자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어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그때 여자는 남자에게 그것이 거짓말임을 들키고 만다. 여자의 얼굴에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빨갛게.
거짓이 천부적이고 그 거짓에 속한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거짓인 것을 거짓에 속한 나는 알 수 없다. 침노를 당하듯 ‘나’라는 이름을 가진 육체 안에 거짓과 대치되는 분이 작업을 시작하셨기에 거짓이 인식되면서 신체를 통해 징조로 나타날 뿐이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에게 어른이 진실을 말해주었다. 산타할아버지는 없다고. 진실이 나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기에, 아이들은 그 진실에 충격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행의 보상인 선물의 기다림과 받으면서 느끼는 나의 행복을 망치려는 그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 태어나면서 이미 신의 요소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나를 건드려’라는 마음이 생기는 건 나이나 자리와 상관없고 인간은 배우지 않아도 입으로 꼭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안다.
‘그래도 나는 산타를 믿어요’라고 하든지 ‘난 원래 산타가 없는지 알고 있었어요’라는 말이 별로 의미 없는 이유는 내가 주인공인 이상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유일한 핵심의 다양한 표현일 뿐이며 ‘난 성도예요, 난 성도가 아닌 것이 확실해요’라는 말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선악과를 따먹은 증상이 얼마나 독한지 복음을 들어도 끝까지 너무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나에게 관심을 끊지 못하기에 나의 선한 꼼지락거림이 패대기 처지는 예상 밖의 결과에 나름 순수하게 대응하는 꼴이 ‘그러니까 저는 무식하고 무능하고 아무것도 못 한다고 했잖아요’라는 푸념이다. ‘왜 나에게 이런 걸 시켰냐고요. 박살 낼 거면서 왜 줬냐고요’라는 노골적 감정을 뒤에 숨기는 것도 주의 말씀 앞에 결국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상대로 이런 반응을 보이면 그래도 양반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상상의 그분은 일단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억지 땜빵으로 재치고 ‘너 때문이야’라는 화살을 쏘고 싶어 안달하며 눈에 불을 켜고 보이는 대상을 찾는다. ‘나’라는 것이 등장해서 하는 짓이라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는 나로 짓누르는 일뿐이라는 말씀이 이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작동되어 몸을 통해 표현된다.
영구가 빤히 보이는데 영구 없고 밥을 둘둘 만 김만 보이는 김밥이 맞는데 김밥이 아니다. 영구의 몸에 실린 십자가가 그리고 김밥 안에 담긴 십자가가 사건으로 터져 나올 때 껍질이 해리되어 존재감이 사라지는 낯선 체험 속에서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터진 김밥 보수공사 하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터져 나온 사건만 살리시는 냉정하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서 육체를 통해 자동으로 발산되는 낌새 자체가 입만 열면 나오는 거짓말보다 항상 앞서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끝까지 대치하는 현장에서 십자가가 머금고 있던 예수님의 피가 쏟아질 때 의에서 자유 했을 때는 귀신에 눌린 것을 몰랐던 죄의 종이, 이제는 죄에서 자유로운 채로 의의 주인이 뜻대로 휘둘리심에 종속되어 귀신에 눌린 자임을 시인하게 된다.
인격화를 시도하려는 귀신의 농락에 휘둘리고 짓눌려서 넌 더러워서는 안 된다는 악마의 격려를 받으며 나에게 집중하도록 유혹받는 상황을 허락하시는 건,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도 나를 부인하는 것도 내 힘이 아닌 것을 확인시키시며 고개를 돌려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따로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시범 조교를 세워 기어이 보여주시고자 한 건 멸망의 근거이고 멸망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자체해석을 통해 내놓는 판단은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안에서 통일된 마음인 하나님을 죽이고 내가 하나님 되고 싶은 극악한 죄이다.
예수님을 향한 미움의 광기가 충천한 이곳에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힘을 벗고 나약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채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으로 친히 들어오시어 이 세상을 빠져나간 유일한 증거를 남기셨다.
미워하는 이유도 모르는 채로 예수님을 찌르는 자에게 주님의 죽음을 담은 십자가의 영이 찾아오시매 예수님 십자가에서의 외침이 내 입에서 나올 고백이 되게 해주신다. ‘이 세상은 멸망이 당연한 저주받은 곳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는 버려짐이 합당한 죄인입니다’ 세상을 해석하는 관점도 나를 보는 관점도 내가 원해서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바뀐 후에야 깨닫게 된다. 내가 얻고자 했던 결과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에 속한 죄인이 사랑의 광기에 함몰되고 나면 정녕 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지기에 살 이유가 없는 깜깜한 날이 되고 주께서 그 어두움을 빛으로 깨워서 사용하신다면 그 하루 동안의 살아있는 이유는 주님에게 속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몸과 몸을 관통하며 만드시는 사랑이라는 작품의 완성에 하나님은 인간을 철저히 거부하시며 주의 공의만 돋보이게 일하심에 찬양이 절로 나오는 사건이 신체를 통해 토해지고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살아계신 이미 완성됨이 흘러넘쳐 아무것도 주의 충만한 의를 막을 수 없음을 보이는 증인으로 이 껍데기를 마음대로 사용하심에 감사하게 만드신다.
이 천년도 더 된 한 청년의 과거사인 줄 알았던 한 사건만이 항상 현재로 일하고 있기에 인간의 과거사, 나의 과거사는 예수님의 현재 안에 종속되어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결국 과거가 만든 지금의 나라는 자아는 존재한 적이 없다. 신체와 신체를 주관하는 리듬뿐이다. 강도나 창녀가 ‘내가 남의 돈을 뺏고 사람 죽이느라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내가 여러 남자 상대하며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내 과거를 다 가져가 버리시다니’라고 아쉬워하기보다 오히려 ‘너의 과거는 바로 내 것이었다. 나에게 속해 있었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많이 사함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듯 그분 앞에서 녹아 없어지고 싶은 마음만 받은 사랑의 깊이만큼 깊어진다. ‘주여 무슨 처분이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첫사랑을 잊지 않도록 붙드소서’
첫사랑을 잊지 말라는 말씀은 반드시 잊을 수밖에 없는, 잊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히 대치할 때 드디어 빛을 발하신다. 낮은 마음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매일매일 살리시는 주의 뜻에 의지할 뿐이라는 생각이 소진되고 다시 단단한 입자처럼 나로 환원되어 다 필요 없다는 마음으로 내 손을 놓을 때, 그제야 첫사랑을 잊지 않게 하시는 손길이 항상 붙잡고 계셨음을 확인하는 사건의 연속이었음을 알게 되니 어디에서도 ‘나’는 설 자리가 없고 주의 의만 출렁거림에 함께 출렁이며 흘러갈 수 있는 것이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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