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수련회 소감문

아빠와 함께 2021. 1. 17. 22:57

마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의 실체가 뭔지도 모르고 자체 처방전을 남발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때 예측하고 상상이 가능한 한계를 넘어서는 공포를 만난다. 진실을 마주하는 자리, 내가 누구이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고 더이상 나를 주장할 수 없는 최종상태. 인간의 시선을 넘어서는 응시에서 보내지는 예언이 나에게서 막히지 않고 관통하니 그제야 진리와 만난다. 태어나기도 전에 미움받기로 작정 된 노선인 것을 정녕 죽어야 할 자이고 인간에겐 애초에 축복과 저주를 미리 알고 그중에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은 없다는 그 낯선 사실 앞에 사울만큼 두렵고 떨림으로 마주했는지 사무엘상의 말씀이 익숙한 삶의 영토에 침투해서 유령의 세계로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낮은 마음으로 왕의 자리도 주제 파악하며 겸손히 마다할 수 있는 성인군자가 따로 없고 왕이 되어서도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철석같이 믿으며 하나님의 율법대로 나라를 통치하고자 고군분투한 훌륭한 왕이 사울이다. 자신은 요청한 적도 없는 자리에 일방적 선택으로 앉혀진 것도 어리둥절한데 그 자리에 있음 자체가 죄라고 규정 받아야 하는 운명이 그의 앞에 이미 펼쳐있었다. 백성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셔서 왕이 되게 하셨고 사울 왕은 백성의 요구에 합하려고 질서를 유지하며 안정감 있는 문명사회를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 했을 뿐인데 그것이 도리어 기름 부음의 취지를 거역하는 하나님의 대적자일 수밖에 없는 증거가 되었다. 언약의 나라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말씀을 이루시는 보이지 않는 왕을 위해 중앙의 자리가 비어있어야 하고 왜 인간이 원하는 왕이 있어서는 안 되는지를 보이기 위해 사울이 왕으로서 그 자리를 채워야 했다.

신접한 여인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해체의 극한에 몰려 이성을 능가하는 무언가에 이끌려 무당에게 가는 동안에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 강한 왕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절실함의 진짜 동기가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는 매개 입자의 부추김이고 선악과를 따먹은 증상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을 사울은 꿈에도 몰랐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시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임을 아시기에 인간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그는 몰랐다.

이미 ‘따먹어라. 네가 너의 주인이 되리라’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삼켰기에 ‘따먹지 마라, 하나님의 자리를 너로 채우지 마라, 정녕 죽으리라’하는 말씀과 단절된 상태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어떤 계시도 예언도 인간에게 정상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 듣는 그 무엇도 나 있음의 해석을 거쳐 소유되어 버리며 그건 힘을 위한 축적일 뿐이지 말씀이 아니다.

인간이 놓이게 된 삶의 영토는 소유만이 생존을 보장해 주는 원리 속에서 왜 이렇게 돈에 목말라 하는지 그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음이 중요하다는 이유 하나로 돌고 도는 쳇바퀴 속에 갇혀있다. 그 안에서 진짜 주인공의 의미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에 자신이 주인공이고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의미를 생성하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덮기 위해 나름의 행복이라는 것을 만들어간다. 이 모든 것에 언약이 빠져있기에 삶의 영토에는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이라는 십자가라는 우상은 있어도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는 없다.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들으며 사울은 무당 찾아가서 자신이 무당이고 저주받은 노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를 핍박하는 자로 예수를 죽인 자로 고백하며 축복노선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수상한 마음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이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왜 나는 꼭 괜찮아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이 원하기도 전에 저절로 움직이는가. 선지자의 예언은 우리를 언약궤로 방향을 돌려 세워 도대체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낱낱이 까발리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와 언약궤에 뿌려지는 피의 의미를 분명히 보이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말로 설명이 되는 세상만 관여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 붙잡힐 때 예언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기에 인간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고 언어로 표현하려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적인 죄가 된다. 유령의 영토에는 사람은 없고 영물만 있다. 성신과 악신의 매개 입자가 출몰하는 파동의 상호작용이고 충돌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전쟁만 있다. 이미 완성된 언약의 취지를 드러내는 주의 이름의 전쟁은 소유의 세계가 아니라 예언의 세계만이 현실임을 깨우쳐주기에 이 전쟁에 말린 자들의 고백은 한결같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삼상 14:6),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삼상 17: 47). 그 흐름의 방향성은 언제나 한 곳만을 지향한다. 언약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시는 경로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시는 약속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나란히 에덴동산에 있었고 아담을 하나님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으되 악마의 꾀임으로 정녕 죽어야 하는 첫 아담이 되어 주가 주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뚫고 지나가야 할 죄의 공간을 형성하게 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수평에서 수직으로 두 층을 이루며 선악적 영토는 생명나무 영토의 압력을 받으며 인간이 죄인 이유를 토해내게 되고 하나님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심판 의지가 변함없이 하나님이 죽으시는 지점까지 달린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마땅하며 유일한 인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두 번째 아담을 드러내는 잠시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임이 밝혀진다.

반드시 깨져야 하는 돌판의 의미를 담아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돌판이 담긴 언약궤에서 뿜어져 나오는 두 개의 노선이 한쪽은 내가 나를 구원하고자 하기에 뭘 해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하는 주의 원수가 되고 그 미완료적 결핍에서 만들어지는 미움과 경멸로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를 통해 완료된 노선이 출현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왕의 역할을 위해 사울을 먼저 기름 부으시고 사사와 제사장을 대신해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고 결국 있음의 왕은 언약 나라의 취지를 드러낼 수 없으며 그 왕과 한통속으로 자신들의 존재 만을 지키고자 했던 이스라엘은 죽음의 터전이 된다. 기름 부음의 힘이 다윗을 죽음에서 빼내시고 인간의 소원이나 기대가 배제된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만 왕이 만들어질 때 백성들이 예상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기에 다윗은 없음의 왕이다.

보이지 않기에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받으나 모든 기능의 통합체로 오실 메시아의 자아상을 표현하는 그림자로써 다윗왕은 자신의 자리가 공백으로 유지되도록 혹독하게 기름 부음의 휘둘림에 종속된다. 하나님은 기름 발린 자가 아니라 기름 부음 자체를 지키시면서 내 인생은 반드시 깨져야 하고 주의 인생만이 전부가 되도록 일하시는 것에 양보가 없으시다.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하시고 그 언약 위에 자신의 피를 뿌려 홀로 언약을 완성하고 언약궤가 하나님 형상이 되시는 여정에서 영문도 모르고 연루된 자들이 주님의 지체가 된다. 창세 전 비밀 속에 감춰있기에 누구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아들만 아는 사실이기에 이 세상에는 없는 백성이고 예수님의 대신 이루심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롭게 생산된 백성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관계를 기뻐하고 찬양하며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

이미 죽은 자라는 극한에 몰아세우는 힘이 마지막 한 가닥 희망, 그래도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것까지, 자살도 소용없다는 그 마지막까지 바닥이 드러나도록 힘이 물 빠지듯 완전 배수가 되는 사건을 만났을 때 그 밑바닥에서 만난 괴물은 내가 이길 수 없는 나이다. 진리는 내가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앞세워 등장하시기에 ‘이렇게 했었더라면’이라는 후회도 ‘이렇게 해야지’라는 계획도 일거에 무산시키신다.

안 죽으려고 애쓸 때야 힘을 찾게 되지만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이미 죽었음의 공간으로 날마다 추락하는 노선임이 확실해질 때 혹시 하고 찾게 되는 대상은 힘을 보태줄 자가 아니라 모든 힘을 빼고 죽음으로 달리고 있는 누군가이다. 그때 서야 보인다. 세상에 소외된 자 병든 자 갖지 못한 자가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들은 힘이 없는 자의 대명사라 생각했는데 나를 포함해 세상에는 스스로 힘을 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논개처럼 같이 죽어 줄 수 있다고 같이 죽자고 달려들어 말씀의 쌍가락지를 낀 채로 빠져나갈 수 없게 안아버리는 누군가를 만난 것이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또한 없다. 없기에 없음에서 나오는 있음이 낯선 것이고 새로움이다.

사랑하기에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다가오는 아하수에로 왕을 마다하고 주께서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인 라면의 반을 주겠다는 사람을 자신의 고난의 반을 주겠다는 자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내 안에는 없음을 알게 하시는 사건,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안다는 것이 아무짝에 쓸모없음을 들키는 사건들이 이미 완료된 십자가 사건의 파동으로 반복되며 죄를 배설하게 하시고 틈만 나면 개체를 세우고자 하는 육을 흙가루 같은 죽은 자로 만들어 저주가 마땅한 사울의 자리로 던져주시는 사건으로 주께서 허락하신 오늘이 채워진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감사뿐이고 그 고마움의 출처가 십자가라면 죽기 전에 이미 만난 진실 안에서 받은 은혜가 넘치도록 족하다.

이근호

“듣고 보는 그 무엇도 ‘나 있음으로 해석’해 버리니 기다리고 있던 괴물은 악신이었다”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는 상처 난 자기 몸으로 성도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꼬지 요리에 쓰이는 꼬챙이로서 성도의 열정적인 가슴퍅을 관통해 버리신다. ‘자기 의’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전기로 안에서 온갖 기름기는 쏙 다 빠져 매력없이 퍼석하게 된 통닭처럼, 더 이상 내세울 것 없이 된 ‘나’! 이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자아상(=형상)’이 드러내는 현장이다.

임청일

이 글은 나 있음인가 나 없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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