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진실된 거짓말장이

아빠와 함께 2020. 12. 28. 07:10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구석으로 돌아와서 ‘집안 정리 좀 잘해줘, 숙제 좀 잘해줘, 자기 할 일은 알아서 똑바로 좀 해줘,...’라고 식구들을 향해 잔소리가 나올 때 상대가 수군거리든 소리 내어 말하든 돌아오는 대답은 마땅히 내가 들어야 할 말을 주신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말에 발끈 화가 나는 이유는 너의 꼬라지를 내가 다 알고 있기에 잔소리할 자격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타인을 통해 ‘나’의 자격과 가치를 정립하는 인간 있음의 굴레에서 ‘내가 진실 된 삶을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데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라는 똑같은 본질을 쌍방으로 주고받는 행태가 아담의 세계 밖에서 오신 낯선 타인이 ‘네가 너에 대해 뭘 알아’라고 물으실 때까지 계속된다.

지금 무덤 속에 있지 아니한 그 낯선 타인을 향해 세 여인이 이미 죽으셨다는 현실적 생각을 하며 정성스럽게 향품을 들고 다가가지만 여기 있지 아니한 분을 찾아온 여기 있는 너희들은 자신밖에 모르는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며 졸지에 향품을 주님 면상에 던지는 꼴을 하고 무서워 도망가는 일밖에 할 것이 없는 무능자가 된다.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실 때 반드시 내가 누구인지를 함께 드러내신다. 너는 핍박하는 자이고 나는 그 핍박을 받는 예수라고. 그것도 어디 옆집에서 문 열고 나와서 하는 말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중에 완전한 단절을 만드시며 알게 하신다. 도망간다 한들 이미 주께서 정하신 자들은 반드시 찾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십자가로 데려오신다.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네가 갈릴리에서 온 목수의 아들인 것을 뻔히 아는데. 그리스도는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는 것을 내가 다 아는데...’라는 유대 지도자의 반응에 공감의 한 표를 던지며 내가 여전히 산 자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관찰하고 측정해서 진실을 추구하려는 아담의 질서 판에 뿌리박혀 있기에 내가 거짓되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천국 갈래 지옥 갈래 묻는 말에는 애초에 관심 없었고 홀로 독처하며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최종선택조차 자신에게 있음이 당연한 일이지 이것이 문제 있고 상당히 좋지 못하다는 누군가의 마음을 알고 싶은 적도 없었다. 송가인과 홍자가 싸우는 모습을,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모습을, 목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아니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굳이 알 필요 없었다.

바닥의 실체를 볼 수 없는 깊은 물 속에 발 담근 인생으로 태어나 조류와 세파에 흔들림 없는 진리의 삶을 살고자 순수를 추구하는 ‘나’라는 존재가 물 아래 거짓만을 생산하는 판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을까. 이 욕망의 닻들이 바닥에 닿아서 그려진 좌표인 앵커판이 만들어 내는 수면 위 눈에 보이는 수평의 세상만 인간에게 현실이 된다.

지평 위의 브레인들이 만든 질서체계에 교육받고 길든 닻들이 각기 다른 분류를 하며 참된 나를 유지하기 위해 원하는 것을 모은다. 내가 거짓 영의 세계에 발목 잡힌 자라는 것을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진리 자체가 중요하냐 아니면 진리를 추구하는 나만 중요냐를 구별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누군가 억지로 닻을 올려 앵커판 위와 수면 위가 동시에 보이게 해주셔야 한다는 해답이 이미 내 안에 있은들 육에 축적된 지식일 뿐이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성령의 일은 육과 통하지 않는다.

죽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해답을 죽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여놓고 알리시니 내가 스스로 답을 알았다는, 내가 전도해서 저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게 성령께서만 일하신다. 자살해서도 죽을 수 없는 진짜 죽음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언약의 유일한 상대자이신 어린양 예수님이심을 들은 자는 모두 알고 있다.

수면 위의 보이는 세력이 선악의 구별을 무산시키고 한마음으로 죽여서 추방한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그 죽음을 담은 완성된 언약을 들고 방문해 주실 때 닻이 들리며 비로소 사망이 지배하는 저주의 판이 보인다. 앵커판 위의 점들이 수면 위의 다양성을 무의미로 만들며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자로 일괄처리하시니 뭘 해도 제로이고 헛짓이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죄가 되게 해주신다.

아이들이 어릴 때 집 앞 운동장에서 놀고 들어오면 나는 어김없이 문 앞에서 검열을 시작했다. 신발과 옷에 모래를 털고 주머니 속에 이물질 제거하고 욕실로 직행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데 늘 이 규칙에 반발하는 조카가 있었다. 주머니에 돌을 잔뜩 채워서 집으로 오기에 대문 입구에서 입장 불가 판정을 받는다. 운동장에 다시 두고 오라는 설득에 불복하자 어쩔 수 없이 조카와 타협점을 찾았다. “그럼 주훈이가 정말 맘에 드는 돌 딱 3개만 고르고 나머지는 두고 오자”라는 제안에 조카는 수십 개의 돌을 바닥에 펼치고 고민한다. 2~3분이면 될 줄 알았는데 몇십 분이 지나도 고르느라 집을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나가보니 조카가 울고 있었다. 고를 수가 없다고. 그 돌이 다 맘에 든다고.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다 똑같은 현실적으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돌멩이들인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부활의 안목을 십자가에 담아 찾아오셨을 때 나는 그분의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돌이 된다. 내가 하고 있다는 모든 것이 응시 앞에 스탑되고 그 시선 앞에 아무리 봐도 공연히 살고 있는 가치 없는 돌멩이가 되어 그제야 모든 것을 다 하게 된다. 누군가의 발에 채어 굴러가게 하시고 다른 돌과 부딪히게도 하시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놓이게 하시어 흙가루 풀풀 날리는 진상이 되게도 하신다.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닌 주님이 원하는 몸으로 죄의 속성을 맘껏 발휘하게 하신다. 아무리 봐도 다 똑같은 돌멩이들인데 주님이 원하시기에 그분의 뜻대로 친히 펼쳐놓으신 선택의 노선을 굴러갈 뿐이다. 닳고 닳아 형체 없이 소멸 될 때까지 계속 굴리신다.

또 하루를 허락하실 때마다 나의 자리에서 죄의 자리인 십자가 지점으로 옮겨지매 이제는 부활의 영이 만드시는 관계성 안에서 더이상 혼자가 아닌 진짜 죄인으로 그 자체가 움직이는 십자가가 되게 하시어 사건이 남긴 점들로 주님의 그림을 그리실 때

벌거벗는 사건의 연속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다 아시는 주님의 시선이 만드는 관계성 안에서 껍데기에 부어주시는 역할을 하니 뭘 해도 괜찮고 상관없다고 하시는 주님의 눈빛에 이미 마음을 빼앗겨 내 마음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아니 내가 안 느껴진다.

옛날에 본 프란체스카라는 드라마에서 등장인물 두 명이 복권당첨 프로를 보는데 A라는 인물이 공을 돌리는 중에 숫자를 미리 알아맞췄다. 22, 1, 45,... 옆에서 그 상황을 경이롭게 쳐다보던 B가 다음날 바로 A를 데리고 복권을 사러갔다. B는 A에게 어서 이번 주에 당첨될 숫자를 부르라고 하자 A가 대답했다. “나의 예지력은 딱 10초 전만 가능하다”라고. 경이로움은 순식간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뜬구름이 된다. 이 망하는 세상에서 황홀한 주의 사랑을 잠시 경험한들 눈 깜빡하면 다시 체감온도 쭉 내려가는 냉정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낙담하지 않는 이상한 증상이 묘약처럼 박혀있는데 그 약의 이름은 ‘그리움’이다. 나는 알지 못하나 그분은 나를 아는 보이지 않는 응시자, 그 눈동자의 주인공을 기다린다.

가족에게 복음 먼저 내밀지 말고 돈부터 챙기라는 기쁜 소식이 복음은 애초에 내민 적도 없었고 챙길 지분 자체가 없어서 서글퍼지는 기쁘지 않은 소식이 되면서 이 신체성을 충족해줄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며 근심으로 찔려죽어도 좋을 돈을 갈급하는 하이에나 한 마리를 오늘도 다시 살려내신다. 망하는 모습 제대로 보여주라고 비우시기도 하고 채우시기도 하며 주님 맘대로 끌고 다니실 거니 가볍기는 하나 정말 아무짝에 쓸모없는데 왜 살리셨는지라는 의문과 함께 ‘죄지으라고, 주의 의만 빛나게 하라고’라는 봐도 모르는 해답지 쥐고 오늘의 주님 자취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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