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거룩
2020년 9월 27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8-9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에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과 영원히 하는 것은 자신이 전해준 복음에 있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8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복음의 결과가 오늘 본문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성도는 참되고 정결하고 거룩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나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과 같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조건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결과 모두 복음에 의해서 생긴 결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 뭐길래,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이 그 어떤 경우에도 올바르고 합당한 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에베소서 2:3에 보면, 우리 모든 인간의 본성이 나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에 ‘본질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복음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과 본질이 달라지게 되는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근원적으로 ‘저주를 뿜어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런 본성에서 유발하는 그 어떤 행함도 하나님 평가를 통과할 수 없는 것은 뻔합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 본성은 본인들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나타났을 때에, 인간의 본성을 대표한 자들에 예수님에게 보인 태도는, 예수님을 증오와 살해대상자로 결정지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이러하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강력한 악한 힘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에 어쩔 수 없이 놀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악하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것들만 내어놓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인간들이 믿고 있다는 신(神)이란 도대체 뭡니까?
인간들이 믿은 신은 본질상 저주스러운 그 마음에 들어 있는 이미지가 밖으로 나온 겁니다. 영상 띄우듯이 신을 자신들의 상대로 띄어놓고서는 그 신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에게 나오는 기초’를 지키려고 합니다. 애완견 키우듯이, 화초키우듯이 수시로 사료를 주고 성의를 다해 신을 키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 믿는 신입니다. 하지만 천국이란 자아의 범주를 벗어나는 세계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엉터리 신의 기초가 되는 그곳에다 십자가라는 철심을 꽂아버려서 자아를 고사시킵니다. 말라죽게 합니다. 원래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몸입니다. 그런데 악마에 의해서 자아가 그 몸을 접수해버린 겁니다. 몸과 자아라는 이미지의 만남입니다. 몸이 배고픈데 자아는 말하기를 ‘내가 배고프다’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이 인간에게 찾아들면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두 가지 결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저주요 하나는 복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몸은 나의 것이니 내 몸이 아프거나 내 인생이 힘들면 자살하면 그만이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아무리 해도 자기 몸이 죽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지옥에 가도 인간의 몸은 죽지 않습니다. 아홉 번 기적으로 살아나고 아홉 번 죽어도 인간의 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약속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약속답게 하기 위해 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주의 몸은 지옥으로, 복된 몸은 천국으로 가도록 하나님께서 약속이 찾아듭니다. 원래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에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노력이나 권리로 천국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대제사장이 나옵니다. 그 복장이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보석들과 견대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존재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이 이런 것들 있어?” 다시 말해, 더러운 것밖에 없는 이 세상에 거룩함이 드디어 등장했다는 겁니다.
인생이란 ‘간격’입니다. 없음에서 죽음의 몸 사이에 끼어있는 간격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없음’에서 ‘없음’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인생이 힘들면 자살하면 해결된다고 여깁니다. ‘없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몸’으로 인생이 끝납니다. ‘죽은 몸’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은 몸’입니다. ‘죽음’이 실려 있는 몸, 곧 저주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죽은 몸’으로 인생이라는 간격에 끼어들었습니다. 약속으로 끼어드시고 거룩을 품고 끼어드십니다. 죽을 몸을 인생 도중에 납치해서 ‘거룩한 몸’으로 바꿔주십니다. 어떻게요? ‘몸+옷=거룩’식으로 해결하십니다. 인간의 조각난 행함의 가치를 모으는 식이 아니라 몸 전체를 거룩한 옷으로 감싸듯이 통째로 입히십니다.
이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건너니 세상의 물결도 이 거룩 앞에서 흐름을 멈추었습니다.(수 3:15) 이스라엘을 덮칠 수가 없었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자체가 제사장들이 됩니다. 거룩한 옷으로 입게 되면 저주의 홍해바다도 그들 앞에 천국의 길을 열어줍니다. (계 15:2)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전면적입니다. 예외 없습니다. 그 인간이 어떻게 살던 하나님 보시기에 늘 거룩하고 참되고 정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인간의 몸을 거룩의 옷으로 접수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긴긴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본인의 것으로 오인해서 망해버린 역사이야기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늘 새로 만드시는데 그것은 ‘남은 자’ 선별과정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만 남게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도는 홀로 도닦는 식이 아니라 쉴새없이 불신의 세계를 만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의 복장에 담긴 약속의 성취를 위해 예수님께서 불신의 세계 속에서 일구어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인도자와 더불어 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당당하고 주저없이 삽니다. 어떻게 살아도 복음 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눅 15: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중심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내어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2강-빌 4장 8-9절(모든 일에 거룩)2009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8-9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도바울이 상당히 자신감이 넘치고 있습니다. 나한테 들었던 그 복음을 너희들이 알면 책임지고 저주받지 않는다, 지옥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상당히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어떤 일을 해도 덕이 있고……, 여기 기림이라는 뜻은 존경한다, 칭송한다, 그런 뜻이에요. 항상 존경할만하고, 칭찬받고, 칭송할만하게 사는 것, 이런 결과, 내게 배운 복음을 너희들이 제대로 이해한다면 필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 4장 4절에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게 골라가면서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다음에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염려할 것 안할 것 네가 가려내지 말고 모든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오늘 본문에서도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바르고 참하고 사랑스럽게 살게 된다. 그걸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이러한 결과가 필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갖고 있는 그 내용을 아신다면 이것이 상당히 우리에게 무리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외가 되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전면적이지요. 전체적이고 일괄적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복음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추적하고 심사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고 본질 자체를, 본성 자체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본성을 바꾸지요.
그러면 우리의 본성은 어떠했는가 에베소서 2장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그 확정된 내용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본질을 따지는 거예요. 본성을 따지는 겁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점잖고 훌륭했지만 복음을 알기 전까지 너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다는 겁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그리고 복음 안에 그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복음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너는 태어날 때부터 본질상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의 대상이다. 본성 자체가 그렇다 행동을 고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복음이 어떤 복음이었기에 우리는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도대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요. 우리는 이 복음을 모르고, 자기 본성 자체가 처음부터 저주만 나오는 진노의 자녀일 수 있다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꾸 뭐든지 최선을 다하고 향상을 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개선의 여지를 보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점진적 발전을 하면 되겠지요, 라고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에든지’라는 뜻 안에 포함된 것은 예외 없이 네가 어떻게 점잖고 훌륭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본성자체가 바뀌지 아니하면, 복음을 알지 못하면 무엇에든지 경건함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 안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면, 복음은 지난시간에 했듯이 물론 한 주 지나서 다 잊어버렸겠지만,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 대해서 타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사전에 알았던 사람은 제자들마저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영원한 타인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다가왔을 때 인간들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이야기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이 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은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되신 그분은 인간으로부터 증오와 살해의 대상이 되었지요. 미움의 대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진짜 하나님은 미움과 증오와 살해의 대상으로 규정이 된 겁니다. 이게 전체적이고 전면적이에요. 일괄적입니다.
인간이 착하게 소박하게 살아도 인간의 본성자체가 하나님에 대해서 증오하게 미워하게 된 본성을 가지고 나름 착하게 살려고, 바르게 살려고 점진적인 개선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그런 형편에 있었던 거예요. 본인이, 자기 자신이 설마 내가 하나님을 미워할까, 내가 하나님을 죽일까, 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한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이 인간세계에 하나님이 직접 방문을 해서 둘 사이에 맞닥뜨려 보니까 인간들 본인이 미처 모르는 나의 본성과 본질이 노출된 겁니다. ‘아, 진노, 저주의 자식이었구나. 저주의 자식이었다.’ 하나님을 증오하고 살해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가짐에서 그동안 여호와를 믿고 이름상 예수 믿고 그렇게 한 것은 그동안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신을 유지하는 기초를 자기 안에서부터 시작을 한 거예요.
‘신이라는 것은 아마 나는 증오안할 걸? 나는 하나님을 좋아할 걸? 나를 하나님이 싫어하지 않을 걸? 나는 하나님하고 서로 아는 격의 없는 사이일 걸?’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바깥으로 띄워놓고 그 띄워놓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기서 사료주고 화초 가꾸듯이 계속 가꿔 온 거예요.
하나님은 나의 친구, 하나님과 우리 좋은 관계, 이런 식으로 ‘내 마음과 모순되지 않는, 내 마음의 신과 모순되지 않는 하나님이 저 바깥에 영상 띄우듯이 저 바깥에 대상으로 계셔서 나를 지켜볼 것이다. 그분이 모든 세상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내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라고 띄운 거예요. 성령이 없이 육적으로 하나님을 탐구하고 연구한 사람들이에요.
모든 인간의 신은 본질상 진노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진노의 본성이 그냥 본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영상으로 이 세상에 그것이 표출된 겁니다. 방출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하나님하고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죽었잖아요.
“네가 아는 아버지하고 어떻게 내가 그동안 믿던 여호와하고 어떻게 다를 수가 있어? 그럴 수는 없어. 왜 율법에 충실하니까 말씀에 충실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왜 터졌을까요? 십자가사건부터 출발해야 될 텐데 사람들은 내 마음의 하나님부터 출발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철심을 거기다 박아버린 거예요.
내 안에 신이 나오는 그 장소에 십자가로 철심을 꽂아버리면 거기서 뭐가 고사되느냐 하면, 자아라는 것이 고사가 돼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 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항상 경건하고, 착하고, 옳고, 바르게 살고, 사랑할만하고, 칭찬할 만큼 살려면요, 이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한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이 땅에서 항상 세상이 부당해요. 나의 노력한 만큼 대가를 치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만족스러워요. 그리고 내가 나를 봐도 미흡해요. 우리가 항상 인상 그리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과 실제 나와 차이가 있고 내가 나 자신이 보기에 너무 보잘것없어요. 여기에 분노하는 겁니다.
내가 나 자신이 보기에 보잘 것 없다는데 분노하는 거예요. 항상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이것은 없어요. 무엇에든지 옳으며, 이런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질상 저주의 자식인 우리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난 뒤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엇에든지 더럽고, 무엇에든지 추접하고, 무엇에든지 욕심쟁이고, 무엇에든지 자기밖에 모르고, 무엇에든지 독하게 악하고, 무엇에든지 그런 겁니다. 본성상 그래요.
본성은 부분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고 일부를 가지고 티 잡지 않습니다. 전체냐 아니냐의 문제에요. 전체가 다 악하면 다 악한 거예요. 본성이 악하면 다 악한 거예요. 본성이 바뀌었으면 뭐가 되어도 다 선한 거예요. 다 정결한 거예요. 본성이 바뀌면 성도가 되어서 철심이 십자가로 꽂혀서 자아가 고사가 되어버리면 죽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또 우리보기에도 이유 없이 무조건 우리는 선하고 이유 없이 무조건 참되고 정결합니다. 거룩합니다.
이게 믿어져요. 이유 없이 십자가 꽂혀버리면 이유 없이 무조건 의로워요. 이유 없이. 따지지 마세요. 십자가 꽂히면 당당합니다. 여러분, 당당하지 않거든 나대지 마세요. 아예 내가 신을 구성하는 내 마음에다 십자가가 와서 침투해서 박살내 버리면 그것은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자아가 내 몸의 주인공이 아니라 자아는 박살나고 주님이 이 몸을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이 몸을 다뤄요.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몸을 만들었지 자아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는 학교 교육이나 철학에 나올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시작과 끝을 모르기 때문에 몸이 있으니까 몸이 배고픈데 우리는 자라나면서 뭐가 배고프냐 하면, 내가 배고프다고 이야기해요. 몸이 기뻐하는데 내가 기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몸의 자리에 나를 집어넣는 이유는, 몸의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 그래요. 주님이 우리를 보기에 우리가 기쁨이 된다는데 우리는 싸가지 없이 톡 끼어들어서 “내가 보기에 내가 기쁘지 않는데 왜 주님은 나를 기쁘게 보십니까?” 이렇게 싸가지 없이 끼어드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기는 “내가 너 기쁘다 이 말이야.” 우리는, 나는 내가 안 기쁘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왜 거기서 끼어드느냐?” 그 말입니다. 네가 네 몸의 주인이 아닌데 우리는 내가 죽을까봐 걱정돼요. 성경을 보세요. 천국은 나의 범주와 무관한 동네에요. 천국은 나의 범주를 비켜가고 있다고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천국에 못 간다. 그 말입니다. 천국은 내가 박살나야 갈 수 있는데 내가 가는 천국은 내가 아니고 그것은 조작된 겁니다. 날조된 겁니다.
도중에 주인이, 내 몸의 주인이 바뀌어야 돼요. 우리 몸을 받아주는 곳이 천국이지 나를 받아주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몸이 아프지요 내가 아픈 것이 아니잖아요. 내 자식이 아픈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녀가 아프지요. 내 자식이 아픈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은 이미 본질상 저주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 모두에게 살해와 증오의 대상이 된 이상은 확정된 겁니다. 복음이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집단적으로 죽였다. 그 내용이 복음의 내용이에요. “너희들이 나를 죽였다. 너희들은 네 몸을 잘못 사용했다.” 그 말입니다. “네가 네 몸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너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줬던 그 악한 마귀가, 주님의 소유의 몸을 악마가 다뤄서 으쌰으쌰 선동해서 나를 죽이게 했다.” 이게 복음의 소식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딱 받아들이는 순간 ‘아, 내가 헛것을 쥐고 있구나. 나 자체가 헛것이구나. 몸의 주인님께 돌려드려야지. 내가 남의 것을 왜 내가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느냐?’ 돌려드리면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 한데 왜 내가, 쓸데없이 주인도 아닌 내가 쥐고 있으니까 무엇에든지 더럽게 만들잖아요. 악한 것이.
선한데 이유가 없어요. 착한데 이유가 없고, 천국가는 데 이유가 없습니다. 자꾸 이유 만든 착함이 이유 없는 착함을 방해하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살았으니까 나는 착하다, 라는 그것이 정말 이유 없이 착한 주님의 선언, 약속을 방해하고 있다고요. 아직도 악마편이 되어가지고.
이 자아가 문제가 돼요.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옷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자아를 어떻게 빼내느냐? 지난 시간에는 설탕 네 스푼에 찬물에 담가서 핏물 빼는 방법을 말씀드렸지요. 그렇게 하면 핏물이 확 빠진다고요. 오늘은 어떻게 자아를 빼내느냐? 이 몸에서 자아를 빼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이 먼저 시도한 방식이에요. 뭐냐? 옷을 입었어요. 주님께서 준비한 옷으로, 우리를 통째로 그냥 이 몸에다 옷으로 뒤집어 씌워버려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의 옷을 뒤집어씌워버립니다.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몸과 거룩한 옷의 만남이에요.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대제사장 나오는데 그 대제사장이 입던 옷이 아주 폼이 나요. 출애굽기 28장 4절에 보면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리고 12절에 “그 두 보석을 에봇 두 견대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그 뒤 15절에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되.”
28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지시받은 대로 대제사장옷을 특별제조 합니다. 만들라고 지시를 하는 거지요. 이 옷, 흉배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속옷과 관과 띠 그리고 끈, 고리, 사슬이 있어요. 흉배, 방탄조끼처럼 붙이는 것이 있는데 여기 붙이는 보석마다 이름을 새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흉배가 있어? 너희들은 에봇이 있어? 너희들 가슴에 보석이 있어? 그것도 없으면서 뭐라고? 너희가 거룩해?” 이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자아가 결합된 이 몸의 더러움을 지금 거룩한 몸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전개시킵니다. 그 약속을 전개시킬 때 맨 먼저 등장한 것이 약속을 인체에다 부착시킨 것이 대제사장의 옷인데 그 옷이 무슨 옷이냐? 거룩한 옷이라는 거예요. 거룩한 옷이에요. 대제사장 직분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옷이에요. 속된 옷이 아닙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속된 세계에 드디어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뭐 윤리 도덕가지고 깝죽대고 뭐 해봐야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진노 받을 만한 저주거리만 나옵니다. 저주스러운 윤리고 저주스러운 도덕이에요. 여러분은 윤리적으로 살았다, 도덕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까지 갈 것도 없어요. 철학적으로만 따져 봐도 그것은 도덕윤리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힘이 나온 거예요.
남을 용서해도 나에게 힘이 되고, 남을 배려해도 누적된 내가 꼭 살아남아야 되고, 나만 가치 있다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키워내는 정립된 힘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남에게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힘이다 그 말이지요. 주보대, 전화받침대, 얼마나 참하게 만들어놓았는지 혹시 힘 아니에요? 그거 자기의 아니에요? 전부 다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힘으로. 날 무시하지 말라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죽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자체적으로 거룩을 양산하는 그 힘 때문에 하나님께서 튕겨져 나갔어요. 자체마음속에 신이 있거든요. 나를 거룩되게 인정해주는 그러한 자체적인 신, 귀신이지요, 악마지요, 우상이고.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가상 신을 만들어놓았을 때 “아이고, 이 가짜야!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자기 본성도 모르고, 본질도 모르고. 아나, 이게 본질이다.” 해서 십자가로 그 출처, 신을 만드는 그 출처 한복판에 꽂아버리는 것,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을 입었는데 옷 자체가 희한한 옷이에요. 보석에다 심지어 방울까지 딸랑딸랑 달려서 이것가지고 어디서 활동하느냐? 이 옷 입고 거룩한 하나님을, 인간의 대표가 되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이 거룩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소방수가 방화복 입는 것, 잠수부가 잠수복 입는 것과 같아요. 이것 안 입으면 죽어요.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아 죽어요. 심판의 불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일괄적입니다.
이 거룩은 우리가 부분부분 인간들이 지혜를 짜내서, 윤리도덕 짜내서 조각조각 모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주어져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불 심판은 전면적으로 일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 심판 앞에서 우리 교회 몇 명이고, 헌금 얼마 나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불 심판인데, 불 심판.
여러분, 오늘 설교 다시 해보겠습니다. 8절부터 주목해야 할 단어는 ‘무엇에든지’ 에요. 무엇에든지. 어떤 때는 착하고 어떤 때는 안착하고가 아니라 무엇에든지,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어떤 상황이 되든지,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고. 그것은 뭐냐? 골라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뻐하고, 알아서 관용하고 알아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걱정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염려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내가 내 몸이 내 자아의 것이라 여기고 본인의 일상을 한번 측정해 보세요. 한 번 가늠해 보세요. 이게 성사되는지. 이게 성사됩니까? 조금만 가정에 바람 불면 기쁨이 어디 있어요? 날라 가버리고 성질 막 내지요 네가 내 거룩감과 내 행복을 갉아 먹었다고 대들지.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일괄적입니다. 일괄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백날 까불어봐야 나올 것은 저주밖에 안 나오니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따지는 것도 귀찮아. 일괄적으로 거룩이에요. 이유도 없어요. 그냥 거룩이에요. 그냥 정결하고 착해요. 자기가 보기에는 어설프더라도, 자기는 하루 종일 인상 그리고 화만 내고 있어도 주님 보시기에는 “아이고, 칭찬받을만하다. 아이고, 칭찬받을만하다.” 이런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 이게 믿어지지 않아요. 맨 날 자기만 관찰해서 자기 다독이기 급급해서 성경에서 무엇에든지, 모든 것에, 매일같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보시기에 나를 착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본다, 라는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미안해서라도 황송해서라도 우리는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막 들 거예요.
“하나님, 내 성질 압니다. 너무 이러지 마세요. 너무 저를 붕붕 띄우지 마세요. 내가 얼마나 성질 못됐는데요?” 하면 주님께서 “네가 성질이 못된 것이 아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네가 성질이 어떤 때는 인자하고 성인 같고 악하고, 그게 아니야. 본질상 선한 것도 더러워.”
왜? 그것은 네 자아가 네 몸을 기어이 내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아를 어떻게 뺄 것인가? 핏물 빼듯이 어떻게 자아를 바꿀 것인가? 그 점은 바로 통째로 옷으로 뒤집어씌웁니다. 몸과 옷의 만남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몸과 약속의 만남이에요. 다른 말로 몸과 언약의 만남 통째로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그 예가 여호수아 3장 8절과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요단강 건너갈 때 8절에 보면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그 다음 15절에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절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물이 밀어붙이는데 물이 더 이상 그쪽으로 못 가게 만드니까 물이 쌓이는 것에요. 저쪽 물은 이미 빠지고 이쪽으로는 물이 쌓이고 중간에 요단강에 길이 난 겁니다. 그 가운데 누가 장풍을 썼어요? 누가 거기 서 있느냐는 말입니다. 거룩한 옷을 통째로 뒤집어 쓴 언약궤를 메고 서니까 잡아 죽일 듯이 달려들던 그 홍수난 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냥 패스, 통과시키는 거예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요한계시록 홍해 상황으로 나와요. 유리바다 건너갈 때 그냥 통과해요. 왜? 옷이 색깔이 피로서 하얗게 씻음 받은 사람은 그냥 통과해요.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자아한테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문제 삼거나 닦달내지 않습니다. 이게 복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와서 약속의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몸은 우리의 것이라는 그 육신적 현상은 계속 보여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도 남들처럼 우리도 왕 뽑고 대통령 뽑고 헌법 세워서 이방나라처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자. 이왕 사는 것 행복해야 되지 않느냐?” 이 땅에서 그 주의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긴긴 구약 이야기에요.
구약이 두껍지요. 그 긴긴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 몸은 내가 주인이라 여긴 그 이스라엘 전체의 잘못된 역사를 보여주느라 구약이 그만큼 두꺼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죽음에 이르렀거든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없음과 죽어야 될 존재, 그 사이 간격이 인생이라는 거예요. 그 간격이에요.
없는데서 인간이 태어났는데 그 태어난 인간이 죽음이 되는 거예요. 좀 더 어렵게 말씀 드릴테니 여러분 잘 이해하세요. 없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죽고 나서는 없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죽을 몸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안 죽는다는 말이에요. 인간은 자살해도 안 죽어요. 이게 인간에게 악독한 저주입니다.
인간이 살다가 힘들면 죽으세요. 죽으려면 자살하면 돼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자살하는 사람이 38명이에요. 저 바보 같은 인간들이 자기가 죽으면 죽는 줄로 알았어요. 그동안 왜 그러냐 하면, 내 몸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이 몸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몸은 안 죽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만든 몸이기 때문에 안 죽어요.
지옥 가는 사람이 가장 지옥스러운 일은 이 몸이 안 죽는다는 게 문제에요. 힘들면 죽으면 돼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없는데서 왔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보는데 그게 아니고 없는데서 왔다가 죽을 몸이 되는 그 간격이 인생이에요.
절에 가세요. 절에 가도 안 죽는다니까요. 절에 가도 안 죽고, 자살해도 안 죽고, 아무리 밟아도 안 죽고, 차에 깔려도 안 죽고, 위에서 구르고 굴러도 안 죽고요. 압축기에 자기 몸을 집어넣어도 안 죽고, 이미 생긴 몸은 어떡할 수가 없어요. 부도나도 안 죽고. 진짜상어한테 물려서 찢어져도 안 죽고.
인간의 낭패는 나를 죽일 방법이 없다는데 있어요. 그 산 몸이 어디 가느냐? 영원토록 저주의 몸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저주받는 그 몸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몸을 언약이 없고 약속이 없는 이방인들은 다 타고 났어요. 단군의 자손이 이게 문제지요.
그런 몸 가지고 어떻게 자기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나를 측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달난 거예요.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까, 얼마나 착하게요,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요, 그 자체가 사달난 거예요. 나를 스스로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조건에서 자기를 잊으면 돼요. 모든 조건에서 나를 빼기 하면 돼요. 수학에서 더하기 빼기 있잖아요. 나를 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빼기만. 주께서 교회 오게 하셨다. 나를 빼면 돼요. 나는 주님 앞에 다뤄지면 그만이니까.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이스라엘을 자기 것이라고 여길 때에 다윗은 달리 장차 올 천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게 바로 ‘무엇에든지’거든요. 혼자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목자에 딸려서 가고 있다는 겁니다. 목자가 몸체라면 우리는 그 뒤에 따라가는 그림자.
그림자가 홀로 그림자 될 수가 없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에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성도는 예수님의 아토피라고. 주님 때문에 인생 살고 있는 겁니다. 망해도 내 몸 안 망했습니다. 주님 몸 망했습니다. 거지 나사로 거지되어도 거지 나사로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을 거지되게 하셨습니다. 개한테 핥게 만들었고 지옥 간 부자는 부자 되나 안 되나 자기 것이라.
돈도 자기 것이고 모든 것이 자기 거예요. 누가 복음 12장에 보면 어떤 농부가 농사가 잘되었던 모양이지요. 창고 크게 짓고 하는 말이, 스스로 자기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내 영혼아, 이제 걱정하지 마라. 평생 먹고 살 것 다 모아놓았다.” 참, 그 부자농부의 생각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우리의 보편적인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이여, 25억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왜? 이 나이에 25억이면 한 달에 5백만 원씩 써도 다 못쓰잖아요. 계산 딱 나오잖아요. 내가 나를 측정하는 그것이 사달난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새벽 2시 46분에 네 영혼 데려가면 이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뭐 죽으면 죽지 하는데 문제는 죽어도 안 죽는게 문제에요.
죽은 몸이 이제는 원래 주인이 회수해가는 거예요. “네 몸은 네 몸이 아니었다. 내 몸이었어.” 언약을 위해서 나타나야 될 몸이었습니다. 없는데서 생겨난 몸입니다. 언약은 결과가 두 종류에요. 하나는 복, 하나는 저주에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둘로 선별했습니다. 하나는 저주, 하나는 복, 하나는 복, 하나는 저주. 아브라함약속을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 아브라함 약속을 인정하면 복.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어떤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어요. 내 인생 내가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인생에서 내가 주인이라는 그 생각을 빼세요. 그거 빼야 돼요. 아, 안 빠지네. 이게 이스라엘 역사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 내내 안 빠졌습니다. 빠질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떻게 했는가? 로마서 보면 하나님의 하신 작업이 나옵니다. 로마서 9장 27절 보시기 전에 로마서 11장 4절에 엘리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잠시 말씀드리고 로마서 9장 27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엘리야가 훌륭했지요. 자기밖에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밖에 없으니까 바알 믿는 아합왕이 마지막 남은 선지자까지 체포영장 발부해서 수배자로 만들었지요.
그래서 엘리야가 그걸 알고 “나만 남았습니다. 내 목숨만 찾습니다.” 로마서 11장 3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4, 5절에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얼마? 7천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속에 남은자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계속 겉에 있는 이스라엘을 버리는 거예요. 남은자를 이스라엘은 몰랐어요. 누가 남은자인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자를 언약의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 창조의 작업에 구약부터 개입하신 거예요. 인생에 개입하신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뭐냐? 없음에서 죽을 몸 되는 간격이다. 그 간격에 누가 뛰어드는가? 이미 죽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 간격에서 살아서 인생 속에 들어왔다. 그 들어온 사례가 뭐냐? 구약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뭘 하시는가? 이스라엘을 없애면서 이스라엘 속에 남은 자를 찾아내시는 그러한 선별작업에 나서신 거예요.
선별작업이라 하는 것은 가을에 추수할 때 과일 상품 될 것, 상품 안 될 것, 당도 떨어지는 것, 좋은 것, 이렇게 선별하듯이 주께서 선별작업을 하는 그것이 바로 남은자작업이에요. 그 남은자작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행함으로, 자기자신이 여호와를 행함으로, 믿음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모든 것은 탈락이요, 로마서 11장에서 그 남은자가 어떻게 남은 자냐?
행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행함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 남은자가 있을 것이다. 은혜로! 은혜로, 은혜로! 행함이라 하는 것은 자아가 살아 있을 때는 필히 행함이 나와요. 왜냐하면 자아가 내가 살리는 그 작업을 내가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고자 하는 그 작업을 멈추지 못하거든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아의 한계를 이루게 만들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민족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좀 골치 아픈 대목인 것을 염두에 두고 잘 들으세요. 이스라엘로 이방민족을 만나게 해가지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본질상 진노의 속성을 발현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무슨 일에든지,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할 때 이 ‘무엇에든지’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로 하여금 안 믿는 사람, 불신자, 타인들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 걸쳐 있는 장착되어 있는 그 보석……, 그 모든 의미를 예수님께서 그냥 대제사장 옷 입고 오신 것이 아니고 불신자들, 마귀의 종들과 맞닥뜨리면서 이 모든 장착된 의미를 다 성사시켰거든요. 완성을 시켰다고요.
지금 무엇에든지 정결하다 하니까 여러분들의 아이디어가 기껏 기도원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무도 꼴 보기 싫고 나 혼자 도 닦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런 방법을 예수님은 사용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시장 통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모든 사람들과 격의 없이 다 만났습니다.
다 만나서 예수님의 확정된 본질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 그런 식으로 잠복되어 있는 마지막 남은자로서 자기역할 다 했습니다. 남은자는 따로 도 닦는 것이 아니고 쉴 새 없이 타인을 만나요. 오늘날 내가 항상 정결해야지, 마음 단단히 먹고 오늘은 나쁜 마음 절대로 먹지 않는다, 오늘 착한 고운 마음만 쓴다, 라고 가게 문 열었어요.
첫 손님이 오자마자 성질 돋우는데, 우리 집에 와서 남의 가게에나 있는 물건 찾을 때 “소금 뿌려라.” 벌써 정결함은 끝났습니다. 착함 날라 가버렸습니다. 칭찬, 그런 것 없어요. 부딪혀야 됩니다. 만나야 돼요. 그렇게 해서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남은자 선별과정입니다.
내가 스스로 내 힘으로 정결하고, 옳고, 바르게 살고, 경건하고, 사랑할만한 사람으로 되겠다는 이 모든 내가 나를 여전히 포기 못한다, 나는 내가 있어야 나는 나답다, 라는 것을 그렇게 무차별하게 박살내면서 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지요.
나에 대한 희망, 내가 믿어야 구원받고, 내가 잘해야 칭찬받고, 내가 잘해야 하나님형상 본받는다는 이 모든 나에 대한 기대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상황을 통해서 그것이 불가능함을 일깨워줍니다. 인간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없다는 것, 그건 너의 헛바람이다. 헛바람 포기하라는데 무슨 고집이 세서 왜 자꾸 본인에 대해서 포기를 안 해요.
하나님의 평가는 놔두고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놔두고 자기가 자기를 평가해서 자기를 포기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는 식으로 이스라엘속의 남은자를 끄집어내듯이 주님께서는 한평생 우리를 포기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우리를 남은자로 쳐줍니다.
“너는 항상 옳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너는 나의 작품이야.” 너 같은 인간, 자아를 잊어버린 인간이야말로 너의 욕심이 없는, 너 자신의 감각이 없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각, 예수님에 대한 그것만 쳐다봄, 바로 그 세계가 성경에 나오는 천국입니다. 그게 하나님나라, 아들의 나라,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형상의 나라입니다.
우리 힘으로 형상을 이루는 게 아니에요. 형상자체가 완제품으로, 전면적으로 이미 우리에게 침투했어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왔어요. 그러면 우리가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손댈 것이 없습니다. 주께서 알아서 이끄시고 인도하세요.
로마서 9장 27절 보게 되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바다의 모래같을찌라도, 그 많은 숫자가 있을지라도 남은자만, onl,y 오직 남은자만 남긴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남게 될 어떤 시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나밖에 몰라요. 남은 자는 주님께서 내가 스스로 남은 자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태가 우리에게 쳐들어옵니다. 그게 절대절망이에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고 만들어요. 내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 그 말 맞아요. 내가, 나, 자아, 자아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습니다. 자아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그 지옥밖에 갈 수 없는 자아를 주님의 자아가 섞어버립니다. 섞어버린다고요. 만화영화에 그런 것 많잖아요. 주인공이 절벽 끝으로 쫓기다가 결국에는 끝에 가서는 폭포 밑으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데 세상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슈퍼맨이 날아와서 절벽에서 낙하하는 그걸 탁 캐치해서 올라갈 때 그게 이유 없는 정결이고, 이유 없는 착함이고, 이유 없는 사랑이에요.
우리한테는 날개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방안이 없어요. 그냥 본질상 진노기 때문에 지옥이 입을 벌리고 어서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중간에 성령이, 천사가 날개를 펴서 우리를 공중 납치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것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3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그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고 7절에 보면, 모든 것을 참는다. 여기 또 ‘모든 것’이 되풀이해 나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차 떼고, 포 떼고, 다 빼고 나면 마지막 남는 것은 모든 것, 곧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다른 말로 모든 것, 전면적인 것, 부분적이 아니고 전면적인 것, 마지막 전체그림,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내 인생이라고 착각하는 그 인생 속에 개입하신 거예요. 우리를 납치하신 거예요. 그분이 누구냐? 목자입니다. 그분이 바로 목자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다윗이 이야기할 때 다윗은 뭘 생각했습니까?
자기 형편, 꼬라지가 어떤 꼬라지라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왜? 내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부족함이 없어요. 어떤 경우라도. 모자람이 없어요. 미흡함이 없어요. 짜증내고 싶어도 짜증낼 조건이 없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어떤 경우에, 모든 경우에, 주의 지팡이가 더 크게 보이고 주의 안위하심이 더 뚜렷하게 보이게 만들어요. 모든 것. 제가 언젠가 그런 강의한적 있습니다. 교회 나와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그딴 것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이에요. 코로나 불어오면 예배 참석도 안하고 전부 다 마스크 쓰고 앉아서 교회 나오지도 않고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주를 사랑하면 신앙이에요. 집구석에 있든지 화장실에 있든지 주를 사랑하면 그게 신앙입니다. 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기 때문에 이것은 주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본질상 저주받게 되어 있다는 이것, 하나님 보시기에 몸과 자아가 연합되면 잘못된 연합이에요.
몸과 자아가 연합되면 안돼요. 안되는데 결합된 거예요. 몸은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닌데 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영탁이 노래,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자아가 왜 거기 끼어드느냐, 자아가 몸을 왜 납치하느냐는 말이지요. 주님이 납치해야지, 네가 왜, 손톱 발톱 이걸 왜 네가 소유하느냐는 말이지요. 어차피 우린 죽을 몸도 아닌데.
영원히 둘 중 하나 아닙니까? 안 죽어요. 천당 가서 살고, 하나는 지옥 가서 살고. 이 땅에 죽음은 없어요. 한쪽은 죽음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가 되고 한쪽은 죽음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변화될 수 없는, 고칠 수 없는,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저주스러운 저주, 저주스러운 영원함이 그들의 운명이 된 겁니다. 감사의 운명, 사랑받은 운명, 한쪽은 저주해도 저주가 끊어지지 않는 저주스러운 운명.
이제 몸과 여러분 사이에 성령이 개입하고 십자가 철심을 꽂아서 여러분의 자아가 갈수록 고사, 말라죽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것은 싸가지 없는 것 외에는 없다. 끼어들데 안 낄데 구분도 안하고 무조건 끼어들어서 “주여, 내 팔자가 왜 이렇습니까?” 한탄만 늘어놓는 이 악마의 자식, 이것은 여러분, 이 육신이 죽는 순간, 그런 아픈 기억도 옛날 꿈처럼 없어질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문제점이 우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데 그 이루었다 함이 믿기지 않고, 와 닿지 않고, 반갑지도 않은 그 이유가 쓸데없이 우리 자아가 내 것이라고 우기는 이 말도 안 되는 반발심과 반항기가 있음을 저희들이 깨닫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미안한 마음으로, 황송한 마음으로 이유 없는 이 의로움과 착함을 통해서 주 앞에 마음껏 목자로서 대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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