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생명책의 현실성(빌립보서 4:2-3)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EdTGPVQqsK4, Hit:4

아빠와 함께 2020. 9. 14. 14:59

생명책의 현실성

20020년 9월 13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2-3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생명책을 사도가 거론하므로서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에 의해서 독점되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즉 인간은 생명책에 들어 있는 내용에 대해서 변경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처리가 매우 간단합니다.

즉 생명책의 명단에 있는 자만 생명을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불에 집어넣으면 그만입니다. 그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떤 애씀과 희생과 수고를 했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최종적인 것은 생명책, 곧 ’책‘입니다. ’책‘이란 내용이 기록된 것을 두고 말합니다. 그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기록된 내용을 누가 그대로 현실화시킬 것이냐입니다. 그분은 바로 모든 것에 결정하시면서도 이 ’이름‘으로만 성립하는 이 세상에까지 들어오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은 ’나와 너‘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나가 아니면 너이어야 함을 당영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구성한다고 자부하는 나와 너들은 이 생명책을 베재하고 살기로 결심합니다. 즉 모든 미래는 인간들 각자 하기 나름이다는 식의 사상을 인정합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 증거가 바로 1948년 12월 10일, 프랑스 파리에게 있었던 유엔총회에서 결정한 [세계인권선언]입니다. 총 30조로 되어 있지만 그 중에 1조에서 3조까지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이 사싱에는 ’생명책‘의 존재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생명책이 따로 존재한다면 이는 ’죽음의 책‘이 따로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20:12-15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명책에 명단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 세상을 보냈든지 간에 유황불로 직행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 얼마나 간편합니까!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전혀 협상할 의지가 없습니다. 왜 세상의 최종 마감이 이 생명책으로 드러나는가하며는 이 생명책이 이름들로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성을 중도에 단절되지 않습니다.

즉 이름은 영속성을 유지합니다. 몸은 비록 흙이 되지만 그 몸에 부여된 이름을 영속되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은 근거는 바로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육신을 입었지만 그 이름은 ’주의 이름‘이 됩니다.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자(人子)‘곧 사람의 아들로서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주의 이름‘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 변화가 생명책이 명단이 담긴 자들의 소속 조건이 됩니다. 비록 그들에게 개인적 이름은 있지만 ’주의 이름‘이 지닌 능력에 의해서 ’주의 이름‘을 위한 개인적 이름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영원성을 보장받는 이유는, 출애굽이 3:13-15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즉 이 인간 세계에 주님의 영광과 몸으로 그대로 와 버리면 그 어떤 인간도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몸은 없이 ’이름‘으로만 오신 겁니다. 이 이름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던져주신 그 약속대로만 움직이십니다. 그런데 기존의 이 땅의 인간들은 이 언약의 내용과 반대되는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은 이방민족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한없이 모욕을 받게 됩니다. 그 이름에 부합되는 몸은 이 지상에서는 비참하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몸‘이 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죄의 영향력입니다. 출애굽기 32:31-33에 보면,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명단에서 지워지는 것은 죄된 육신 때문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죽으심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겁니다. 이는 생명책에서 명단이 지워지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다시 사흘만이 부활되시는 것은 원래 있던 명단들의 근거가 ’죄사함‘에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이란 죽음과 부활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가능한 겁니다.

바로 이 이름 속에서 능력이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삶이란 이 땅에서 ’차이 자체‘를 보여주는 삶이 됩니다. ’차이 자체‘란 자체적으로 그 어떤 나만의 것이 필요치 않는 겁니다. 나의 의로움이나 나의 점수나 나의 선행이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생명책없는 세계와 있는 세계의 운명의 차이만 보여주는 것이 성도가 주 안에서 맡은 보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가치를 생산하고 보유하지 않게 하옵소서. 천국은 시장원리에 따라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는 차이 자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0강-빌 4장 2-3절(생명책의 현실성)2009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2-3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2-3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생명책 언급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주안에서’라는 언급을 했습니다. 나와 너로 구성된 이 세상에는 없는 이야기에요. 생명책, 만약에 실제로 생명책이 이 땅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죽음의 책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데스노트’에요.

그러면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간단하게 정리가 돼요.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리는 것,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살리고 데스노트, 죽음의 책에 있는 자는 죽이고. 끝. 하나님께서 이 세상 다루는 방식이 아주 간편합니다. 우리는 굉장히 복잡해요. 왜 우리가 인생사는 것이 복잡하냐 하면, 최종적인 책이 없어서 그래요.

살고 안 살고는 나 하기 나름이다, 라고 지금 밀이붙이고 있는 겁니다. 생명책은 이게 최종성을 의미하는 거예요. 최종성이고 그리고 생명책의 명단이 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생명책의 명단에 다는 없기 때문에 이 생명책 자체가 폐쇄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라 하는 것이 그 생명책의 명단에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나버려요.

그래서 그 생명책의 언급을 누가 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생명책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면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입장에서는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내 인생을 살려보겠다는 것은, 이것은 아주 시원하게 깔끔하게 포기해야 됩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마지막을 설계하신 분이 있는데 그 마지막을 설계하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마지막 설계의 계획에 의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소용없는 것으로 최종 나타났습니다. 판정 지어졌습니다.

만약에 생명책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이 땅에서 레이스 하는 거지요. 달리기 하는 거예요. 거북이가 되느냐 아니면 토끼가 되느냐, 그 치열한 경쟁이 생기기 마련이고요.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요. 그게 힘든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투쟁한 것을 자꾸 뒤돌아보면서 점검 또 점검하는 겁니다. 왜? 앞을 모르니까. 앞에 데스노트, 죽음의 노트가 있는지 생명책이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아는 것 안에서만 활동해야 되거든요.

아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것만 아는 거예요. 다른 것은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 그러니까 믿을 것은 나 밖에 믿을 것이 없어요. 믿는 것은 나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생명책이 있다, 그 존재를 언급하는 그 자체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폭력적입니다.

그리고 생명책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인간과 상관없이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이미 최종적으로 종결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 쉽게 말해서 신앙이 있다, 이 말은 이 생명책의 존재를 기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받아들이게 되면 나의 운명의 종결성도, 이것은 내 행함과 무관하다는 것을 기꺼이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빌립보서 4장, 물론 1장부터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만, 환란을 줘버려요. “네가 이 환란가운데서도 네가 생명책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더 심한 환란을 줘 봐?” 이런 식으로.

사람이 고생이 오고 환란이 오게 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몸을 자기가 감싸게 되어 있어요. 막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집에서 베란다 유리창은 덧대기 안하지요. 조용한데 유리창 합판 같은 것을 덧대기 하면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노아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런데 태풍이 온다. 처음에는 덧대기 안합니다. ‘그냥 지나가겠지.’ 그런데 막 유리창이 흔들리게 되면 그 때는 덧대기 하겠지요. 인간은 어떤 예상 밖의 어려움이 오게 되면 자아를 지키는 것이 더욱더 공고해져요. 자기영역 지키기, 동물로 하면 자기구역 지키기입니다. 영역 지키기에요. 자기 지키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환란을 주시는 것은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거봐. 너는 너만 믿잖아. 거봐. 들통 났잖아. 코로나 19 때문에 들통 났어. 이제는 다 들통 난거야. 네 관심사, 최종관심사가 생명책에 있지 않고 너 자신에게 있잖아. 봐. 다 드러났잖아. 왜 네가 네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참, 이런 물음 자체가 인간세계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세계는 생명책이 개입된 것이 아니고 나와 너가 구성된 세계가 인간세계입니다. 나와 너의 세계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지키고 너는 네가 지키고 끝. 이게 인간이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등장하느냐 하면, 나는 내가 지키고, 가 성립 안 되는 사람이 등장했다고 칩시다. 와, 그거 뭐 배짱인가? 태풍이 와도 유리창 덧대기도 안하고 그냥 이거 뭐 배짱도 아니고, 내 배 째라도 아니고, 그렇게 할 때 그런 사람을 가지고 빌립보서 4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장 11절부터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비결이 뭐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은 지금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 하신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 오산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평소에 이대로 사셨고, 그 예수님의 성령을 사도바울이 받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오디아, 순두게, 순두부 아니고 순두게, 이 두 아줌마들, 여자들이거든요, 이 부녀들도 동일하게 나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산다는 그 말은, 내가 먼저가 아니고 능력이 먼저고, 그 능력은 ‘날 살리는 능력이라면 살고 나를 죽이는 능력이라면 나는 죽겠나이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몸체가 가벼운 새가 기류에 따라서 올라갈 때는 올라가고 내려갈 때는 내려가고, 공중을 날개를 활짝 펴고 날 듯이, 천사가 그냥 날개치고 날듯이 인간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생명책의 명단에 있는 사람에 한해서.

더 이상 너의 세계가 아니라 ‘나 좀 빼줘. 인간세계에서 나 좀 빼주면 안 되겠니?’ 하는 거예요. ‘내가 너와 같다고 생각 좀 안 해주면 안 되겠니?’ 이런 것. “내 인생은 꼬이든 풀리든 상관없어. 어차피 이것은 내 능력이 아니니까. 주님의 능력이니까.”라고 고백하는 사람의 정체, 그 사람은 바로 환란가운데서 비로소 부각된다는 겁니다. 부각, 아주 도드라지듯이 드러나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왜? 너무 특이하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명단을 언급합니다. 너무나 특이하게 때문에. 그렇고 그런 사람의 류가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이 공부해서 배워서 그런 류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 복음에 대해서 성경공부하면서 얼마나 훈련을 많이 합니까? 군에 가면 유격훈련 할 때 이런 것이 있어요. 낙하산타고 내릴 때 착지훈련이라는 것이 있어요. 착지훈련은 땅에서 하는 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낙하훈련은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질 때의 훈련인데 낙하를 실제로 하기 전에 먼저 땅에서 땅으로 뛰어내리는 훈련을 해요. 팔짝 뛰면서 데구르르 굴러서 발목 안 부러지는 훈련을 한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맨 날 뭐만 하느냐 하면, 지상에서 지상의 훈련을 해요. 성경공부에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서 “이러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굴러봤다가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굴러봤다가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 지상에서 지상으로의 훈련을 하는 겁니다.

빌립보서 오늘 본문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라.” 하는 이 본문,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하는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떤 목사가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를 제가 옛날에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은 종류라서 요약해 왔어요.

빌립보서 4장 2-3절을 보면서 또는 4장 1절을 포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이 구절까지 포함해서 이 본문을 가지고 이런 설교를 내놨어요.

첫째 개척팀을 만들어라. 빌립보 교회 개척팀이거든요. 두 번째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 세 번째 개척상황을 증언하라. 네 번째 교회개척은 영적전쟁임을 자각하라. 다섯 번째 본격적인 핍박을 대비하라. 환란이 있으니까. 여섯 번째 영적승리를 확신하라. 일곱 번째 균형 있는 목회를 추구하라.

이렇게 내려놓고 그 뒤에 죽 설교를 해놨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빌립보교회가 원래 없었는데 여기 부녀팀, 개척팀이 사도바울과 함께 들어가서 빌립보교회 개척에 성공했다, 복음의 전진기지를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죽 이야기하는데 루디아 이야기도 나오고,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해요.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세자입니다. “돈 내라.” 입니다. 거 뭐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고. 돈 내라는 이야기에요. 하늘나라를 확장하고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전진기지가 있어야 되고, 성경대로 우리는 살아야 되고, 이런 온갖 그럴싸한 이야기를 다 하는데 뭐냐 하면, “나, 이 목사를 믿고 나에게 돈 내라. 성경대로 맞춰줄게.” 이거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걸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아까 지적했던 이 교회, 빌립보교회 개척시대에 이 사람들이 동역해서 빌립보교회가 생겨서 복음을 전파해서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이런 논조, 그 논조는 결국 뭐냐 하면, 생산성에 관한 이야기에요. 성경을 통해서 생산성을 높여라, 그 말입니다.

생산성. 기업의 생산성과 같은 취지에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가지고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은, 생산과 소비가 일체 거기에 나올 수 없는 현실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차이성이에요. 생산성과 차이성의 대결이에요.

차이성이 뭐냐 하면, 생명책이라는 새로운 현실과 생명책이 없이 움직여나가는, 오직 시장경제원리만 통하는 이 세상과의 그 차이성에 등장하는 것이 누구냐? 사도바울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과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생산과 소비에 역점을 둔다면 그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아니에요.

그게 목사가 되었던 교인이 되었든 십자가 어쩌고 하든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생산을 요구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뭐든지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왜? 그게 시장성에서 잘 팔려요. 그게 시장의 원리입니다.

없는 제품을 신상, 새로 만들면 그게 많이 팔리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본인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의 상품이 되는 거예요. 저를 사 달라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생중계, 인터넷에 무슨 문제가 있는 가 본데요. 이 땅에는 생명책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요. 생명책의 존재를.

그러면 믿을 사람은 나, 나의 열심과 나밖에는 믿을 존재가 없어요. 최종적으로. 내가 나를 믿어야지 누굴 믿는다는 말입니까? 나 천당 가는 것 나에게 달려 있지 누구한테 달렸어요? 내가 믿어야 천당 가지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우리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본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쨌든저쨌든 내가 나를 지켜야지 다른 것은 일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내 운명은 내 손에 달렸소이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운명이 생명책에 달렸다.” 이래버리면 그러면 내가 인생을 왜 살았냐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지금까지 내가 산 게 헛살았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화를 막 내지요.

제가 분명히 말합니다. “헛산 것이 아니고 당신 죽은 자야. 당신 죽었어.” 자, 생명책이 굳이 있어야 될 이유는 이 땅이 몽땅 다 죽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뜻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이름 자체가 생명책인데. 이 땅에 생명책이 없다는 말은 “네가 백날 해봐야 너는 죽은 존재야. 죽음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네가 태어난 것은 죽음이 생산된 거야. 이 땅에 죽음, 죽음을 소비하고 교환하고 생산하고 그게 시장이라고 하는 거야.”

이 죽음의 특징은 뭐냐? 생명책의 존재를 공격하고 저항하고 가리는 거예요.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란에 대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빌립보서는 뭐냐? “환란가운데 기뻐하라.” 에요. 지금 이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 사람, 여기 또 한 사람 글레멘드, 이 사람들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교회에 미혹되지 마세요. 이 사람들은 이 땅에 없다고 여기는 생명책, 생명책의 존재를 “아니야 있어.”라고 드러내는 증인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어떤 사고방식, 철학박사고 문학박사고 과학박사고간에 어떤 박사들도 모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게 뭐냐? 차이에요.

“너희는 기껏 그것까지는 알지, 그지?” 그러나 너희들이 아는 것과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아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요. 갭이 있다고요. 차이 그 자체가 성도입니다. 성도. 성도는 그래서 자체적인 자기 점수를 가질 필요가 없어요. 내 점수가 몇 점이냐, 이걸 가질 필요가 없어요. 내 의는 어디까지 쌓았느냐, 그걸 가질 필요가 없어요. 내 가치를 따로 가질 필요가 없어요. 성도의 특징은.

생명책은 예수님의 일기장이에요. 생명책의 존재는 예수님이 등장 안했으면 그 생명책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구약에 나오지만 그것은 모호해요. 왜 객관적이 아니니까. 객관적이 아니에요. 실제로 그 책을 본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생명책의 그 내용은 그 생명의 노트에 있는 그 명단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뽑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께서 출몰하셔가지고 예수님 하는 모든 이야기가 데려갈 자만 데려가고, 생명책 명단, 명부에 기록된 사람만 구원받기 위한 작업으로서 주께서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작업의 과정중 하나가 인간의 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름으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몸을 이름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죽여 버리고 우리의 이름을 죽은 이름으로 간주해서 그 죽은 이름과 그 다음에 누구의 이름이냐 하면, 예수님 자신의 이름을 결합시켜서 그래서 자기 이름으로 된 그 생명책, 주님의 일기장에다 “나는 10월 00일에 또 하나 건졌다.” 하는 그 일기장, 일지 쓰듯이 일기장에다 죽은 자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등록시켜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 명단, 리스트, 그 명단은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창세전에 이미 의논이 끝난 이야기에요. 다 이야기 된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얼마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습니까? 사람의 몸은 죽으면 이름도 죽는다는데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이름이 성도한테는 그냥 이름이 아니고 인자의 이름이거든요.

인자(人子)라는 말은 뭐냐? ‘사람의 아들’이에요. 내가 하나님이지만 사람으로 왔다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에 끼어들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일의 출발점이 이 땅에서는, 하늘나라에서는 아니고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일의 출발점을 나는 사람의 아들로부터 출발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람의 아들이니까.

이것은 누구 이름이냐 하면, 이것은 사람의 이름이지요. 인자에요. 사람의 아들 이름이에요. 예수가. 예수라는 그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이 사람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사람의 아들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구약의 말씀, 기록된 그것과 결합이 되어버리면 사람의 아들이 이게 주의 이름이 되어버린다고요.

이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 마시고요. 여러분은 ‘예수님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what happen,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름 자체가 자기를 인자라 하고, 분명히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자기를 인자라고 호칭을 하는지?’ 그 의미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다 담겨 있어요.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약 올리듯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자, 인자는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기록된 것과 결부되어 있어요. 모든 말씀과. 나는 성경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 절차대로 가게 되지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자와, 진짜 사람의 아들과 사람도 아니면서, 흙이면서도 사람이라고 우기는 자들의 그 차이, 그 차이를 예수님께서 최초로 우리보다 먼저 앞서서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 차이성을. 그러니까 성도가 할 일은 차이남, 그것만 하시면 돼요.

차이 나는 거예요. 개척교회 팀, 그런 것 하지 마세요. 개척교회 팀 해서 교회 만든 그 교회 앞에서 네가 생각하는 교회와 내가 생각하는 교회가 이렇게 차이남, 그걸 언급하면 되는 겁니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제정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세계인권선언>이라는 겁니다.

2차 대전 끝나고 3년 만에 이걸 만들었는데 여기에 유엔총회에 58개국이 당시에 가입했고요. 파리총회에서 전문을 발표했는데 전부 30개 조항이에요. 그 조항들의 단어 하나하나 개념 하나하나 확정짓기 위해서 1400번이나 모여서 회의하고 투표해서 결정된 그 내용이 세계인권선언입니다.

총 30조가 있는데 다 보기는 뭐하고요 1, 2, 3조만 보면 제 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음으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시고 세계인권선언 1조를 보게 되면 여기서 뭐가 빠지냐 하면, 차이남이 딱 빠져버려요. 왜? 생명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명책 없이 우리끼리 살자는 거거든요. 생명책 없이 우리끼리 살자. 궁극적인 생명책은 최종적으로 나타납니다.

최종적인 차이점은 뭐냐 하면, 생명책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생명책의 내용은 예수님의 자기 행하심으로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생명책의 내용에 대해서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자리나 내가 보탤 것은 전혀 없어요.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보탤 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님의 나라에 가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또 책 하나가 있는데 그걸 데스노트, 죽음의 책이라 했는데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책들이 있고 또 다른 책이 있어요. 그 책들은 자기 행한 대로 기록한 책이에요. 한쪽 책은 인간이 행한 대로 기록된 책입니다. 행한 대로 기록한 그 행함의 모든 집대성, 거기에 정신이 결집이 되어서 나타난 결과가 뭐냐 하면 십자가 죽음이거든요. 인간의 모든 행함, 생명책에 없다고 여기면서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그 정신의 집대성, 집결된 그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을 유발한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을 결집할 때 그들은 말씀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거든요. 그 책은 행함책이에요. 다시 말해서 행함책이라 하는 것은 생명책의 명단에서 빠져버린 지옥 갈 자들의 명단이 모여 있는 책, 생명책 외의 다른 모든 책, 그래서 모든 책은 자기 이름과 관련된 책이에요. 자기 이름대로 살았던 사람의 전력이 죽 기록되어 있는 각 개인의 책들이에요.

책들이니까 그 책들이 죽 있는 거예요. 그런데 생명책은 뭐냐? 각 사람이 행한 그런 내용은 여기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의이름으로 행했기 때문에.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기 때문에. 오직 주의 이름만 드러나는 책이 생명책입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에 보니까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음으로……” 모든 사람이 이상과 양심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고 악령을 부여받은 거예요.

여러분이 복음을 알고 이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 2조, 모든 인간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다른 지위와 같은 그 어떤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이렇게 하는데 인간은 자격 없어요. 인간은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본인이 자존적이라면 권리가 있어요. 본인이 자존적이고 자립적이라면 권리가 있는데 인간이 운명은 자존적이지 않고 자립적이지 않아요. 독자적이지 않습니다.

제 3조, 모든 인간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권리 없습니다. 태풍 신종코로나19에 다 죽습니다. 권리 없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30조까지의 이야기가 전부 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권리 이야기에요. 인간은 이런 권리가 있다, 또 이런 권리가 있다, 체포 구금 추방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모순되게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어요. 인간은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차이가 없다고 해놓고 종교를 선택하는 이런 종교는 오락이고 취미지 그게 종교겠어요? 그냥 취미생활이지요. 교회 안다니고 놀든 교회 가서 놀든 네 맘대로 놀아라. 이 얘기잖아요. 교회가 노는데 입니까? 사람 없으면 운영이 안 되고 뭐 그런 곳이에요? 생산적이어야 되는 그런 데입니까?

인간의 몸이 다가 아니고 이름이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실 때에 몸부터 먼저 보내신 것이 아니고 이름부터 먼저 보낸 거예요. 그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이라고 구약에서 죽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으로 오셔야 될 이유가 뭐냐? 이름으로 오셔야 연약한 인간들과 함께 동행이 가능해요. 그냥 몸으로 와버리면 너무 영광스럽기 때문에 다 죽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뒤에 얼굴도 못 들었습니다. 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같이 살 수가 없어요. 너무 영광스러워요. 짐승이라도 시내산에 올라가면 다 죽습니다. 짐승이든 인간이든 다 죽습니다.

모세가 살았던 것은 주의 이름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산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제는 이 산위에서는 모세라는 네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너는 모든 혜택을 입게 되어 있어요. 그 이름으로.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걸 보직이라고 합니다.

회사에서나 직장에서나 군에 가서 제일 비참한 것은 뭐냐 보직이 없이 출근했을 때. 아, 참, 참, 비참해요. 내가 이런 식으로 살아야 되나 싶지요. 아침에 출근하면서 이름 써진 신분증 찍고 출근 했는데 자기가 일보던 책상이 빠져 있어요. 컴퓨터도 없어요.

남자 화장실 앞에서 책상 하나 놓고 하루에 화장실 출입하는 사람들 몇 명이나 되는지 세라는 하루 일과를 줬다면 그것은 결국 나가라는 이야기거든요. 여러분 예수 믿지요? 묻는 것이 주제넘은 줄 알기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안에서 보직이 뭡니까? 어떤 보직이 있어요? 하는 일이 뭡니까?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다 일이 있는데 여러분은 일이 뭐예요? 보직이 뭡니까? 생명책은 성도들의 직장이에요. 회사입니다. 내가 결정한 스케줄이 아니고 주님 결정한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복음의 기쁨이 있는 사람은 지상에서 낙하훈련하는 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자꾸 뛰어내리려고 해요.

지상에서 낙하훈련하는 이것은 지식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해봐야 땅의 일이거든요. 실제로 그런지 하늘에서 자꾸 뛰어내리려 해요. 누가 좀 말려야 돼요. 옥상에 못 올라가도록. 생산도 없고, 소비도 필요 없고, 나의 의도 필요 없고, 나의 예의범절도 전혀 소용없는 그냥 차이남에 대해서 아무나 막 쑤시고 들어오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하고 만났을 때 모세가 묻지요.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는데 들어올 때 원칙을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을 무슨 이름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도 예외가 없이 반드시 특정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름으로 특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구별이 돼요.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딴 몸이고 딴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이름이 달라요. 명단을 부르잖아요.

초등학교 학생들 출석 부르듯이 이름이 다르다는 말은 “우리가 아는 신 말고 또 뭔 색다른 신이 너를 보냈느냐, 할 때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이 신이 보냈습니다, 할 때 그 신의 이름을 언급해야 되지 않습니까?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할 때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이름 없는 이름을 제시합니다.

이름 없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구별이 불가능한 이름을 줘버려요. 인간세계에서 해석과 설명이 막혀 있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게 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자, 이 이름으로 인하여 이 세상 모든 신들,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이렇게 스스로 있는자가 투입함으로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신에다가 생명책에 명단이 있어 결정 났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고 스스로 결정할 몫이니 구원받는 네가 거기에 개입하고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네 구원에 대해서 뭔가 설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신자체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날개 달고 뛰어내려야지요. 이 땅에서. 어떤 사람, 친구가 와서 나 부자다, 할 때 난 가난하다, 고 하면 안돼요. 이 땅에서는 부자의 반대말이 있어서 문제인 거예요. 부자의 반대말은 가난한 자에요. 따라서 이 땅에 있는 차이 가지고 언급하면 안돼요.

성도는, 나 부자 아니라서 좋거든, 이렇게 이야기해 버려야 돼요. 네가 말하는 설명이 가능하고, 해석이 가능하고, 구별이 가능하고, 배치가, 배정이, 보직이 가능한 그 보직에서 나는 넘어서 버린 겁니다.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어요. “집에 개 키우니 좋대?” 그 반대는 뭐냐? “개 안 키우는 것이 좋다.”가 되거든요.

그럼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 키우나 안 키우나 나는 좋아.” 이러면 끝날 문제에요. “너 신종 코로나19가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 살기 힘들지 않아?” “힘들지 않아? 여기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면 ‘빨리 끝났으면 좋다’가 ‘코로나로 힘들다’의 반대가 되거든요. 거기서 벗어나야 되지요. “코로나 있으나 마나 거기서 거기인 세계지 뭐. 똑같지 뭐.”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이건 훈련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가 실습해야 돼요. 이 땅에서. 보통 만나는 사람에게. ‘네가 감히 나를 해석할 생각하지 마 이런 식으로. 너 나를 분석할 생각하지 마. 네가 추구하는 세계와 내가 추구하는 현실 자체가 달라.’ 스스로 있는 이름, 그 이름에 의한 부산물, 그 이름에 의한 생산물, 그 이름이 우리 이름이에요.

스스로 있는 이름에 의해서 똑같은 본질로서 반복해서 재생해서 이 땅에 퍼트려진 이름이 바로 성도라는 이름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인데 성도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거예요. 그 이름이지요. 그래서 성경전체에서 그 이름의 특징은 뭐냐? 왜 이름이냐? 왜 몸체가 아니고, 사물이 아니고, 개체가 아니고 이름이냐?

이름은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연속성 끊어짐이 없기 때문에. 너는 죽지만 나는 기록된 대로 인자는 영원한 거예요. 그러한 연속성이 어떤 식으로, 리스트가 이 세상에 어던 구체적인 현실을 보여주느냐? 그 리스트가 지워지고 다시 기재가 되는 그 과정을 거쳐서 진행됩니다. 그러니 인간세계에서 생명책의 리스트 해석이 불가하지요.

출애굽기 32장 30-32절에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주께 책이 있고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책을 봤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뭐밖에 없다? 책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 남는 것은 기록된 말씀밖에 없다. 그런 뜻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기록된 말씀이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남는다는 것은, 마감이 책밖에 없다는 것은, 시작이 책으로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알파요 오메가가 책으로 나와요. 두루마리 책으로.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이 책을 그 시작과 끝을 누가 구체화시킬 것이냐? 이걸 누가 풀어서 세상으로 완전히 현실화 시킬 것이냐’ 하며 울고 있을 때 ‘울지 말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책의 앞뒤를 다 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러니까 이 책의 내용은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활동,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의 활동에 의해서 일기장처럼 기록된 것이 생명책이에요. 그러니 생명책은 그냥 책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책에서의 내용이 지상에 구체적인 현실로 전개되고 펼쳐진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펼쳐지고 그것이 응집되고 다시 모아지면 그게 책이 되는 거예요. 생명책과 그리고 그 외의 책들, 인간의 행함책들. 불 못에 들어가는, 유황불에 들어가는 책들, 기록된 명단 리스트. 이렇게 인간이 이름위주로, 이름으로 살아야 될 운명은 바로 인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는 이름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그래요.

몸이 아니고 이름으로 활동해요. 인간의 몸무게가 얼마고, 키가 얼마고, 예수님은 하루에 몇 끼를 드시는지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름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 이름은 아까 출애굽기 3장에 의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이름을 대시고 그 스스로 있는 자가 뭐냐? 15절에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그러니까 이 영원한 이름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께서 던져준 언약대로 실시된 결과가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언약대로. 그러니까 성도에게서 나올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된 것만 나와요. 약속된 것만!

하도 같은 예를 수십 번 들어서 나도 지겨운데요. 또 그 예를 이 자리에서 들 수밖에 없습니다. 꼬마인형인데 말을 못하는데 배를 꾹 눌러보니까 “알라뷰!(I love you) 알라뷰!” 자꾸 말을 하는 거예요. 그게 숨겨진 정보인데 그것밖에 말을 못해요. 성도를 쑤시면 주님의 약속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알라뷰. 주님으로 된 나라는 뜻이거든요.

“주님 때문에 내가 있어요. 나로 인하여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로 인하여 제가 있습니다. 주님이 먼저 있고 나는 나중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자꾸만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남들 보기에, 세계인권선언 주장하는 사람이 보면 폐쇄성이지요. “너는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하겠지요.

그 때는 우리가 말하기를 “그걸 폐쇄성이라 하지 않고 최종성이라 한다. 이 인간아, 말 바꿔라. 그게 최종성이야. 마지막 때, 위기 때 마지막 나타나는 특이한 인간종류야. 이게 특이한 인종이야.”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 어떤 권리도 없는 것. 행함도 없는 게 권리가 있을 리가 있습니까?

모세가 ‘주님께서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달라.’ 할 때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그냥 사람을 건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워짐이 뭔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이 뭔지를 실제로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서 하나님 명단이 회복된다는 것이, 이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이 뭔지를 부활을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그 기록, 예수님이 하신 그 기록이 여기에 장착된 자들이 성도에요. 성도는 주님의 기계요, 인형입니다. 주님의 운명이 우리 운명이에요.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미혹되지 마세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렇게 했어요. 대구강의였지요. “신앙생활 하지 마시고 그냥 사랑하세요.”

주를 사랑하면 되지 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굳이 그 개념을 확보해서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겁니까? 그러면 안돼요. 그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행함이 되지요. “너 신앙인 아니야? 뭐하는 사람이야?”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러면 될 것 아닙니까?

구약 때도 주의 이름으로 나타날 때는 그 당시 이스라엘과 차이 나는 모습이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붙잡고 그것으로 자신의 목적 희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은 또는 주의 이름으로 온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주의 이름은 그들의 계획과 목적과 기대를 부숴버려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로 해보자.’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갑자기 해가 멈춘다든지 그래서 전쟁에서 이긴다든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의 이름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생명책에 있는 그 내용은 인간 네가 끼어들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끼어들 내용이 없어요.

인간이 생명책을 가지고 자기 소유화시킬 수가 없어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살만큼만 살면 됩니다. 지낼 만큼 지내면 되고요. 어떤 세상적인 가치에 대해서 휘둘릴 필요가 없어요. 그들의 평가에 놀아날 필요가 없다고요. 이 땅에서.

아브람과 아브라함. 언제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려고 애를 썼습니까? 야곱이 이스라엘 언제 야곱이 이스라엘 이름을 사전에 예상을 했겠습니까? 야곱은 인자의 이름, 육의 이름이에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이냐? 주의 이름입니다.

주님이 얍복강에 찾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이 몸이 내 이름으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다뤄진 야곱의 몸인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지금 오늘날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교회를 세우게 하신 것도 주께서 하시고 아주 깊은 환란, 강한 환란을 때려서 빌립보교회가 결국은 없어지지요. 교회는 다 없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여기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지난 시간에 ‘주안에서’ 했거든요. 오늘은 생명책. 생명책, 주안에서. 그 다음에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 다음에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이 관용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해석불가라는 뜻이에요. 네가 나에 대해서 해석할 수가 없어. 왜? 나는 차이 그 자체니까. 차이 그 자체에요. 내가 예수님을 갖고 다닌다든지 예수님을 내 맘대로 한다, 그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차이 나는 그 자체를 보이듯이 우리도 차이 나는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8장을 보겠습니다. 빨리 지나갑니다. 8장에 처음 나오는 것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았어요. 돌로 치라는 바리새인, 그리고 차이 나는 해석이 뭐냐? 나는 너를 용서한다는 차이, 바로 요한복음 8장 자체가 처음부터가 이 해석의 차이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여자는 돌로 쳐야 되는 것이 율법의 뜻입니다. 율법의 해석에 대해서 너희가 해석하는 것과 내 해석이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8장 마지막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나를 봤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나를 봤다는 겁니다. 지금 너희들이 나 예수에 대해서 해석할 때 너희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너희들의 한계고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데 나는 내가 아브라함을 봤다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이미 아브라함을 봤대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기뻐한 것도 봤대요. 이게 차이점이에요.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요한복음 8장 23절에서 그 이유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다는 거예요. 이것도 차이 아닙니까? 이것도 차이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골로새서 3장 3절입니다. 하도 유명하니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나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이것도 차이라 그 말이지요. 이쑤시개 한 통 모아놓으면 이게 이쑤시개 통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가게에서 이쑤시개 하나 달라고 하면 통 줘요. 이쑤시개 하나 빼서 주는 가게주인은 없습니다. 통 전체를 줘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너 나 식으로 뭉쳐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너나 나나 한 통, 이쑤시개 통 안에 들어 있는 한 그룹이라고 우리를 다루시는 겁니다. 주 안에서 너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으로서 순두게나 유오디아, 글레멘드 이 사람들이 전부 다 같은 생명책의 한 형제니까 오늘 본문에, 마음을 같이 하라, 함께 하라.

순두게, 순두부가 생각나는데 “유도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왜? 너희는 이쑤시개, 한통이니까, 주의 이름으로 사는 형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1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이쑤시개 한 통에 같이 살아가라.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 따로 챙기지 말고 주께서 이 땅에 자신의 차이남을 보인 것처럼 사람의 이름과 주의 이름의 차이남을 보이는 하나의 기계로서, 증인으로서, 우리가 이런 보직을 맡은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