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의 변이(빌립보서 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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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의 변이
2020년 8월 30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 3:21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사도 바울의 세상 설명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실시됩니다. 즉 산 자들만의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산 자들의 집합된 활동으로는 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활동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 백성은 후패해가는 몸의 형상을 예수님과 같이 영광된 몸으로 바꾸시겠다는 겁니다.
이 작업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느긋하게 봅니다. 그 어떤 주춤함도 없다고 봅니다. 매사가 이 작업에 지장이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지배하는 분의 활동성을 방해할 거리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에 의해서 인간은 몸이란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희망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세요. 골칫거리입니다. 배고프만 밥먹여주어야 합니다. 몸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주어야 하고 달래주어야 합니다. 늙어보이면 그 서글픔을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형상을 아예 주님에게 바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활동 작업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유월절이 벌어진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각 가정의 맏이를 공출시켰습니다. 그 집안의 기둥같은 맏이를 주님이 데려다가 하나님이 언약이 탑재된 맏이를 바꾸어주었습니다. 즉 땅의 형상에서 하늘의 형상으로 바꾸어주신 겁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2)
도로 그 가정의 맏이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소유된 아들들입니다. 즉 기존의 몸의 형상+지시, 명령, 율법, 언약=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흙+‘선악과 따먹지 말라’=하나님의 형상되는 겁니다. 이를 위해 우리 주님께서 친히 육신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아버지의 뜻=온전한 형상입니다.
유월절의 이러한 정신은 그 후 민수기에 체계적으로 도입됩니다. 민수기 3:40-43에 보면, “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를 계수하니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통 12지파로 여기지만, 그 12지파를 대표하고 대신하는 지파가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기존보다 다른 위상을 갖추게 되는데 이 레위지파는 땅의 형상과 하늘의 형상이 만나는 그 지점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 민수기 구절에서 이스라엘 전체에서 처음 난 남자의 숫자가 총 22,273명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3:39에 나오는 레위지파의 숫자는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 명이었더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22,273-22,000=273(명)의 여유가 있습니다.
이 273명은 레위지파가 제공하는 대신하심의 혜택에서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시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삼 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민 3:46-47)
즉 하나님께서 숫자 조절에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273명을 삐져나오게 하셔서 그들이 추가적으로 합류해야 될 그 레위지파의 가치가 바로 ‘대속’에 있음을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그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면 멸망한다는 겁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의 요소와 땅의 땅의 요소가 만나는 그 레위지파가 하는 기능을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속전을 바치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있어 교회란 ‘성령받은 자’를 말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 언약, 말씀, 아버지 뜻’ 모두를 다 이루었다는 근거에 합류되었음을 통보받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죄를 지었기에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이 흙의 형상을 그릇이라고 합니다.(롬 9:21) 창세기 5장에서 보면, 아담의 형상을 지닌 모든 자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형상’을 선행적으로 생각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의 마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갖춘 인간의 등장입니다. 골로새서 1:15-17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형상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신 길이 있을 겁니다. 그야말로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성령받은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십자가 길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부활의 권능에 이르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인간이 아무리해도 이겨낼 수 없었던 죽음의 힘을 극복한 주님의 능력을 접하게 됩니다.
여기서 성도는 자진해서 ‘무능자’가 됩니다. 즉 주님의 형상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형상을 피(모든 율법을 다 이루심)에게 자진해서 빼앗기는 겁니다. 스스로 자신을 가꾸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가치가 다 박탈당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성도란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엔딩장면(마지막)’입니다.
세상의 최종성을 성도의 삶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에는 오늘 뿐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께서 수립한 ‘맏아들 형상’입니다. ‘맏아들 형상’이란 최종적이고 확정적입니다.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선한 일이요 좋은 일이 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깨어져 가는 그릇이지만 미리 하늘의 형상이 담겨있음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빌 3장 21절(형상의 변이)2008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21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사도바울이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지, 바라보고 있는지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이 세상을,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그 영광스러운 몸, 몸의 형상, 본문에서는 ‘형체’라고 되어 있는데 영광스럽게 변화시킬 수 있는 장으로 봅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이 세상에 살면 건강문제 코로나 이런데 주로 관심이 있지요. 나라문제, 나라걱정 등.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데서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에 아무런 차질이 없다는 거지요. 아무 상관도 없는 거라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밥 먹고 살고, 어떻게 자식들과 사느냐, 거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입장에서 봤을 때 사도바울이 이렇게 느긋하고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보는 이유를 찾아보게 되면 여기 21절입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라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입장에서 이미 죽으신 분이에요. 우리 이 세상에서 죽으신 분은 없는 사람입니다. 죽으신 분을 왜 자꾸 끼워 넣어서 이 세상을 설명하느냐,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분명히 21절에서 “그가……” 할 때의 그는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분명히 죽은 줄로 알고 있는데 그분의 하는 활동, 역사로 활동을 하고 있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세상을 느긋하게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인간입장에서 봐서는 우리 산 사람 끼리나 이야기하자, 죽은 사람 끼워 넣지 말자, 산사람은 산사람하고 이야기하자, 우리끼리 힘을 합치자, 그런 쪽이지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세상을 느긋하게 보는 근거는 바로 죽으신 분을 필히 집어넣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왜 그렇게 필히 집어넣어야 된다고 보느냐 하면, 이 세상은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뭐냐 하면, 낮은 우리의 몸을, 현재 육신에 속한 몸, 맨 날 아프고 늙어가고 있고 허접스럽게 파괴되어가는 우리의 몸을 우리 몸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누가 세월을 막습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거예요.
물론 “있는 사람들끼리 의논하자.” 좋아요. 좋은데 사람끼리 의논해봐야 쇠퇴하고 후패하는 우리 몸을 어떻게 영광스러운 천사의 몸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초조합니다. 세상보기가 늘 암담해요. 요즘 8개월째 암담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책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니 그 딴 것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일 잘되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 보기에.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몸이 우리 보기에는 죽으면 그만이지, 버리지,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버리지 않습니다. 보통 돼지고기는 버릴 것이 없다 하잖아요. 다 쓴다 하잖아요. 우리는 버리고 싶은데 주님은 우리 몸의 손톱 발톱 하나 다 버릴 것이 없어요.
주님이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게 하는데 다 필요한 겁니다. 재료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몸을 어떻게 감당 못하고 주님은 “감당 못하잖아. 나한테 바쳐라. 내가 감당해줄게.”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우리 몸의 형상, 우리 몸의 형체, 이 대목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다 계획한 바가 있었던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우리의 몸을 창조하기 이 전에 먼저 생각한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형상입니다. 우리 몸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형상이 우리 몸보다 우선되니까 하나님께서 그 형상을 형상대로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후패한 몸도 하나도 버릴 필요가 없고 버릴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니까 우리 몸의 형상을 붙들기 위해서 기껏 한다는 것이 필라테스, 근육 키우는 것, 요가, 또는 성형수술, 액세서리, 그것으로 모자라니까 나이야 가라, 나이아가라폭포 말고 그런 노래가 있어요. 나 아직 나이 안 먹었다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나 아직 젊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야 가라.
맨 날 꺼져라, 이런 식으로 버티고 버티는데 그것은 몸에 붙어 있는 형상은 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이 먼저 있고 뒤에 부착되는 형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나의 창조보다도 형상창조가 우선이기 때문에 우리 몸을 자기에게 주게 되면 이게 몸 받고 형상으로 교체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형상은 그냥 후패한 형상이 아니고, 아담의 형상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미 하늘에 앉아서 모든 하늘의 영광을 다 누린 그 형상으로 교체시켜 주겠다는 겁니다. 바꿔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작업을 위해서 이 세상이 다 필요한 세상인 겁니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은 필요해요. 주님의 그 작업을 위해서.
사도바울은 세상을 볼 때 형상중심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형상을 바꿔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상에 대해서 굉장히 아까워하고 집착하고 있어요. 거울에 비취는 내 모습이 바로 내 형상이잖아요. 그게 내 형상이니까 아침에 거울보고 자기 몸을 보면서 온종일 자기 몸을 붙들고 그걸 붙들고 지켜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와서 피곤한 모습으로 거울을 다시 보세요. 골치 아픈 형상입니다. 먹여줘야 되지 잠 자줘야 되지. 이게 골치 아픈 형상이지만 이 형상을 버려버리면 내 할 일이 없어요. 나이가 들든, 몸이 아프든, 이가 아프든, 어쨌든 간에 이 형상을 버리지도 못하고 붙잡고 있다는 이것이 참 불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출애굽기 12장에 있는 첫 번째 유월절사건 보세요. 유월절 사건은 딴 게 아닙니다. 한집에 하나씩 맏아들 공출해라. 이스라엘 사람에게 모든 맏이를 공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약속을 위해서 네 아들을 공출하라는 거예요. 옛날에 중국의 왕이 전쟁을 하려는데 군사가 모자라니까 각 지방의 집안 남자 하나는 무조건 공출하라는 지시를 내렸잖아요.
각 집안의 남자 하나씩 내라는 거지요. 그런데 어떤 여자는 자기 아버지가 병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군에 가야 되니까 자기가 여자면서도 효도한다고 아버지 대신 남자로 변장해서 군에 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뮬란>이라는 영화에 그런 내용이 나온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그런 내용입니다. 모든 남자는 공출해라. 다시 말해서 “맏이를 공출하면 그 맏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꿔줄게.” 그게 유월절입니다. 그게 유월절이고 신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대신 죽으심, 우리 집안의 기둥이 대신 죽어버리면 그 집안이 살게 된다. 그런 현실이 유월절 사건으로서 거기에 탑재되어 있습니다. 잠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보실 때 구약부터 봐야 될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구약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다 구약 이스라엘을 거쳐 오면서 주님께서 주신 암시 같은 거예요. 신약에서 주어질 그 복에 대해서 구약에서 미리 주어졌습니다.
로마서 8장 29, 3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광스럽게 만드시는 일을 하신 겁니다. 이 모든 작업은 유월절 날 맏아들 공출시켜서 하나님께서 공출된 맏아들을 하나님의 형상, 장차 올 예수님의 영광스런 형상으로 몸 자체를 바꿔주는 거예요. 형상 자체를 바꿔주는 겁니다. 그 혜택을 입으라는 뜻이에요.
출애굽기 13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것의 몸으로서 마귀로 인하여 기존에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우겨왔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몸보다 먼저 있는 형상이 주도권과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몸의 영광으로 바꿔지는 것이 바로 주의 백성이에요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내 몸 가지고 내가 관리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지금의 우리의 몸은 죽음을 이 길 수 없는 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꿔줄 몸은 무슨 몸이냐 하면,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상대로 해서 이미 이겼다, 죽음마저도 뚫고 이겨냈다는 그 힘이 살아 있는, 그 힘을 오늘 본문에서는 활동한다, 역사한다는 뜻인데 그 힘이 살아 있는 형상으로 주께서 디자인하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참, 하나님께서 다 줘도 우리는 불만입니까? 주께서 다 줬거든요. 지금 코로나를 퍼지게 한 것은 네 형상, 거울에 비친 네 몸, 쭈글쭈글 한 네 몸을 네가 쥐고 있지 말고 나에게 공출하라. 코로나가 무섭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죄인이라는 뜻이거든요. 의가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 떠는 몸을 이제는 죽음을 이겨낸 의의 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그 원리에 따라서 이제는 그걸 용서하는 힘, 의로 바꿔주는 힘이 작동하는 그 형상으로 내가 바꿔줄게.” 이게 사도바울이 지금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 이 ‘역사’ 자리에 ‘힘’을 집어넣으면 돼요.
“그 힘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해줄게, 라는 이 이야기거든요. 세상을 슬프게 볼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요? 나 자신과 그리고 더불어 세상을 볼 때 슬픈 눈으로, 슬픈 눈물을 흘리는 사슴의 눈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자기형상 위주의 일을 위해서 주께서는 연출을 합니다. 누가복음 4장 26절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나아만 뿐이니라. 이 말은 주님께서 자기 형상을 형상대로 만들어서 천국 만드는 그 시나리오, 그 연출에서 주님께서는 상대역이 필요한 거예요. 배역이 필요한 겁니다. 그 배역이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배역을 뽑는 거예요. “오직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 나아만 뿐이니라.”
‘뿐이고’ 난 내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죽음의 형상을 이기시고 부활했다는 이 영광의 그 길, 영광의 그 시나리오를 보여줄 배역, 상대역이 필요한 거예요. 상대역이, 조연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뽑혀 나온 사람의 특징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목표기 때문에, 주님이 연출자고 시나리오를 주님이 짰기 때문에, 그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그 계획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그 배역이 된 사람은 맨 날 주님께 노래하지요.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이 코로나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뭘 찾느냐 하면, 그 코로나 흙먼지 털고 거기서 주께서 ‘아, 이 코스로 영광의 길에 돌입하셨구나.’라는 것을 찾아내는 눈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지난 빌립보서 3장에서 보셨잖아요.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로 간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십자가의 길로 간다.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 옵기에~.”
이 노래의 제목이 <아내의 노래>에요. 아내가 마땅히 해야 될 것은 뭐냐? 남편이 가는 그 영광의 길을 따라가라. 참, 옛날이야기지요. 남편이 아마 6.25 전쟁 통에 끌려가서 죽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도 당신 따라서 그 영광의 길을 가겠습니다.”
주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께서는 그 원리원칙, 유월절의 원리원칙대로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그 언약은 죽음을 이기신 그 길이 현재 먼지 가득 묻혀 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매일같이 주어진 현실을 털고 보면 주께서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 이 길로 가서 하늘나라에 골인 하셨구나.’ 그걸 아는 겁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그 원리가 출애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민수기 3장에 보면 상세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3장 41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이스라엘 지파가 12지파를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은 13지파거든요. 13지파인데 왜 12지파라 하느냐? 한 지파의 위상이 더 높아요. 다른 12지파는 밑에 있고 레위지파는 우뚝 서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열 두 지파 사이에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의 중첩되는 그 지파의 역할을 레위지파가 돋보이게 등장하게 돼요.
그러면 그 레위지파의 숫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헤아리게 합니다. 민수기 3장 3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명이었더라.” 레위지파의 숫자가 2만 2천명이에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41절의 원리에 의하면 레위인 한 사람당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난 사람을 1 대 1로 대응이 되려면 2만 2천의 숫자와 더불어 어떤 숫자를 헤아려야 1대 1로 증명이 되느냐? 43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모든 자손가운데 “일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에요. 273명이 더 많아요.
“그러면 목사님, 1대 1로 딱딱 안 맞잖아요.” 하지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약간 안 맞게 273명이나 많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완벽하게 일치되지 않게 함으로서 일치했다는 그 하나님의 뜻이 더 부각되게 만든 겁니다.
민수기 3장 44-47절까지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아셔요. 아시면서도 일부러 273명을 더하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273명 더한 사람은 1대 1의 대응에서 빠져 있지요. 그 빠진 사람이 보여줄 기능이 있어요. 내가 빠져 있으면 내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능이 뭐냐? “273명 더 추가적으로 주어진 자는 다시 레위지파의 대신하심의 혜택에 들어가려면 죄 용서에 해당되는 세금 일 년에 5세겔을 내라.”라고 추가적인 지시를 하는 겁니다.
‘몸 + 지시’가 형상이에요. ‘몸 + 선악과 따먹지 말라 =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형상은 액세서리 차고 성형수술 한다고 형상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의 근육을 기른다고 하나님의 형상되는 것이 아니라, 썩어가는 몸이라도 거기다가 하나님의 언약, 지시, 말씀, 율법, 뭐라도 좋아요, 하나님의 지시가 추가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올 때 썩어질 육신으로 왔습니다. 썩어질 육신이지만 아버지의 지시, 명령, 율법을 다 이루었더니만 하늘의 형상이 된 거예요. 예수님의 형상이 어느 정도인가? 상상을 초월하지요.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뭐 그런 몸이 다 있어요? 뭐 그런 육체가 다 있습니까? 우리보고 이걸 믿으래요. 그걸 믿으랍니다.
몸인데, 우리하고 똑같은 몸인데 구름을 탄대요. 깃털도 아니고 우리 같으면 구름 밑으로 빠지잖아요. 그런데 구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갈 그 몸, 그 몸이, 주님께서 이야기 합니다. 그게 나의 몸으로 국한되지 않고 너의 몸이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너희가 부활의 날에는 천사같이 된다.”
천사 같은 몸이 된다는 겁니다. 천사의 몸이 된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믿는 둥 마는 둥 그냥 들었지요. 썩어질 몸에다 주님의 지시를 들었지만 그들은 성령받기 전에는 그대로였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성령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가신 그 노선대로 가야 되는데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그 노선에 있지 않고 노선 바깥에 있는 거예요.
노선 바깥에 있으니까 주님의 말씀이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성령 받은 사람이 다 나옵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란 성령 받은 사람. 이게 정의에요. 교회란 뭐라고요? 성령 받은 사람. 그러면 성령 받지 않으면 교회 아님. 이게 사도행전의 오순절 날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 6장 15절에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 집사가 그 때 성령이 충만했거든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도행전 7장 55, 56절에서 이런 말씀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하늘과 땅이 만나는, 형상이 전이되는 그 지점을 주목하라는 거예요.
성령이 오신 이유가 뭡니까? 하늘과 땅이 겹쳐져서 우리의 썩은 형상이 하늘의 형상으로 전이되는 그 지점을 주목하라고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코로나 신경 쓰라고 오시는 성령이 아닙니다. 코로나는 뒤에서 우리 엉덩이를 막 받쳐주지요. 빨리 죽으라고.
민수기에서 레위지파는 뭐냐? 열두 지파에 속하지 않아요. 초월적 지파입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지파에요. 하늘과 땅의 중간지점, 땅의 형상, 썩어질 몸의 형상이 하늘의 형상으로 바뀔 때에 레위지파의 기능을 보라. 그는 대신, 대신이라는 것은 뺏어가는 거예요. 우리의 썩어질 몸을, 우리 형상을 뺏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레위지파는 고물상이에요. 고물상이 하는 일은 폐지 줍는 거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를 폐지로 사용해서 그냥 뺏어가는 거예요. 뺏어 가면 고물상에서 진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데 거기에 뭘 섞어버리느냐 하면, 거기에 피를 섞어 버려요.
왜냐하면 피는 모든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 모든 하나님의 의가 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피하고 우리의 죄 있는 모습과 섞어버리면 그 피 묻은 채로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하늘의 천사형상의 몸이 될 그런 몸으로 갖춰지는 겁니다. 꼬라지는 이래도.
그 피 안에 모든 말씀이 다 들어 있거든요. 그러면 그 말씀 중에 하나를 볼 것 같으면 창세기 5장입니다. 그 피 안에 말씀이 들어 있으니까 그 말씀이 피라는, 다 이루었다 하심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 1, 2절에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고 그리고 3절에 아담의 형상이 나옵니다.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이렇게 아담의 형상이 나와요. 그런데 아담의 형상에 공통점이 뭐냐 하면, 아무리 수백 년, 9백년까지 살아도 끝에는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로 이미 결말이 나 있는 겁니다.
성령 받은 성도 입장에서 성도가 이 땅에서 보여줄 것은 뭐냐 하면, 항상 드라마나 영화의 엔딩장면이 있잖아요. 그 엔딩장면을 매일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마지막 장면을. 일종의 움직이는 터미널? 성도는 움직이는 마지막 장면이에요. 오늘 아침에 여러분도 받았겠지만 제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어요. 제가 목사니까 아마 저에게만 온 것인지.
“비대면 예배인걸 아시지요? 오늘 모이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다른 교회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주만 있냐? 다음 주도 있잖아. 한 달 뒤에는 예배 드려도 되겠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이 우리의 엔딩의 날, 마지막 날이에요. 내일은 없어요. 내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마지막 날입니다.
그 ‘비대면’이라는 용어 있지요. 그리고 ‘깜깜이 환자’ ‘비말’이라는 것, 전에 안 쓰던 비말, 침 튀기는 것, 그런 용어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권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깜깜이 환자라는 그런 용어에. 이게 뭐냐 하면,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 되잖아요. 네가 죽는 것이 무섭지, 무섭지, 무섭지?” 그게 권력으로 단어 뒤에 딱 받치고 있다니까요.
그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세상이 주는 협박용이지요. 깜깜이라는 그 말 안 쓰는데 그 말을 썼다는 말은 그게 뭐냐 하면, 압박감을 주는 거예요. “깜깜이 환자가 돌아다니는데 너 살고 싶잖아. 너 죽기 싫지? 그러면 네가 조심해. 예배 참석하지 마.” 그러면 “그래서?” “그러면 당신은 더 오래살수 있다. 나이야 가라, 하면서 더 오래살수 있다.” 이 말 이지오. “더 살아서? 더 살면 뭔데?” “우리가 더 산다. 90까지 살았다.” “그래서 뭐?” “건강했다.” “뭐!”
그게 세상읽기입니까? 그게 세상설명입니까?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이것은, 인간은 흙이라는 거예요. 창세기 3장의 원리가 5장까지 이어진 겁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 말이지요.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지금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의 마음은 굉장히 느긋해요. 아무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없다고 여기는 분, 이미 죽었다고 여기는 분, 지금 이 땅 눈에 안 보이는 분이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분이 지금 일하고 있다, 역사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느냐?
썩어질 자기 백성을,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시나리오를 짜고 거기에 상대역으로 뽑아서 “봐라, 나 이렇게 일하고 있잖아. 내가 눈에 안보이지만 엄연히 살아 있잖아. 죽은 너희 몸을 대신 나에게 바치면 내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꿔서 천사의 형상, 아니 더 나아가서 나처럼 영광스런 형상으로 바꿔주겠다.”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오늘 본문의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내용 아니지요. 그런 본문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철저하게 인간을 흙으로 보는 거예요.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니까. 죽어야 되니까. 흙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이 말을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쉬운 예인데요.
별로 크지 않은 작은 그릇가게에 몸집 큰 공룡이 하나 들어왔다고 봅시다. 티라노사우르스, 꼬리 긴 거대한 공룡이 들어왔다고 칩시다. 우리가 만약에 거기 현장에 있고 주인입장을 생각한다면 “몸집 큰 공룡아, 안으로 들어온 것은 좋은데 여기 깨지지 쉬운 그릇이 있잖아. 괜히 그릇 깨지 말고 그냥 곱게 좋은 이야기만 하고 빠져나가. 너 가만히 있어. 네가 설쳐버리면 이 그릇들 다 깨지는 거야.’ 이렇게 하잖아요.
공룡이 그대로 뒷걸음질을 해서 그냥 문 열고 나가면 되는데 이 공룡의 아이큐가 낮은지 나갈게요, 나갈게요, 하면서 몸통을 확 틀어버렸어요. 이때 뒤 꼬리부분이 휙 돌면서 진열대 그릇이 다 깨져버린 거예요. 이 말은, 주님께서 이미 땅에서 올라가셨잖아요. 그런데 아직까지 주님이 몸통의 꼬리가 땅에 걸쳐 있는 거예요. 그 꼬리부분이 뭐냐? 성도부분이에요.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줘버리니까 이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형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이제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주님의 몸통에 속해버렸어요. 이 몸통에 속한 것이 주님의 활동, 역사하는 주님의 힘에 의해서 활동해버리니까 그릇들이 다 깨지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차가 한 대 보도위에 주차되어 있어요.
보니까 차 뒤 유리창에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내용이 “삼남매가 타고 있습니다.” 그런 스티커는 또 처음 봤어요. “아이가 타고 있어요.” 이런 것은 많이 봤는데 삼남매가 타고 있다는 거예요. 삼남매가. 그래서 내가 속으로 ‘어쩌라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삼남매가 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세 개의 작은 그릇이 화물칸에 타고 있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인간은 그릇입니다. 왜? 그릇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딪히면 다 깨지게 되어 있어요. 결국은 깨지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5장 다시 읽어보면,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그가 죽었더라.” 이것을 다시 읽어보면 “그릇이 자식을 낳고 팔백년을 지내며 또 깨질 그릇을 낳았으며 ……그가 결국 깨졌더라.” 그런 이야기에요. 그릇이 그릇을 낳고, 그릇이 그릇을 낳고, 결국은 흙그릇이 흙그릇을 낳고, 흙그릇이 흙그릇을 낳는 거예요.
사도는 그걸 보는 눈을 가졌어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보는 거예요. 부부싸움, 두 그릇이 깨지니까 얼마나 요란스러워요. 서로 안 깨지려고, 그리고 서로 깨려고. 안동에 가면 양반들이 많잖아요. 안동 권 씨도 양반이고. 양반들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 가문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오늘 본문이나 창세기 5장에 의해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본차이나’에요. 도자기인데 뼈 집어넣어서 만든 도자기, 영국에서 만든 ‘본차이나’ 인간은 그냥 언젠가는 깨질 흙으로 만든 질그릇,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 그릇에 무엇이 담기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용서가 담기면 이건 천국이고, 천사와 같이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저주가 담겨버리면 이것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저주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릇이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주님의 시나리오대로 자기 상대역을 하게 되는데 그 상대역이 뭐냐 하면, 아까 누가복음 4장에서 잠간 봤지요.
다시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누가복음 4장에서 그 많은 과부가운데 또는 그 많은 문둥병자 가운데서 하나를 뽑았다, 상대역으로 뽑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있어요. 그게 뭐냐? 전적 무능함이에요. 전적무능입니다. 지금 유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문제가 커지게 됩니다. 무능하기 짝이 없어요.
내일은 무능해요. 오늘도 물론 무능하고 내일도 무능하기 때문에 내일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요. “우리 교회도 문 닫고 한 달 뒤에 봅시다.” 이럴 필요 없어요. 서울의 어떤 교회는요, 학원건물에 있는 교회가 되어서, 교회 문 열수도 있는데, 목사님이 그런 고집이 있거든요, 믿음이 있는데 건물 전체를 봉쇄해서 아예 교회 문 못 열었어요.
지금도 목포에 있는 어떤 목사님은 네 개의 그릇하고 같이 살거든요. 네 개의 그릇하고 살면 그 가정에서 예배드리면 되잖아요. 특징이 무능함이에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백날 해봐야 기존에 부착된 아담의 형상은 손대봐야 더 문제가 일어나요.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그냥 무능해라. 내가 다 바꿔줄게.” 우리가 손대면 손댈수록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의 치욕성이 더 드러날 뿐이에요. 어떤 사람이 경품뽑기 하는데 한사람은 저 멀리 의자에 앉아 있어요. 이 찬원이란 가수가 앉아 있고 장 민호라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경품을 뽑는데 딱 뽑으려다 말고 이 찬원을 향해서 “어이, 찬원아! 어느 것 뽑을까?”
뽑기는 자기가 뽑을 거면서 묻기는 다른 사람한테 묻는 거예요. 이 찬원이라는 가수가 “어, 바로 그거, 그거!” 그래서 딱 뽑으니까 대형냉장고가 딱 튀어나온 거예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그거, 그 타이밍, 타이밍이에요. 밥 먹을 타이밍, 잠잘 타이밍,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기쁘게도 한 없이 무능하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무능하게 보지 않는 이유가, 자기 자신, 인간적인 자기 모습은 스스로 자기 부정, 자기부인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자꾸 내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이 뭐냐 하면, 시소거든요. 내가 살면 주님은 죽어있고 내가 죽으면 주님의 살아 있음이 보이고.
이게 바로 시소, see, saw, see, saw, 본다, 봤다, 그런 뜻이거든요. see 현재형, 그리고 과거형 saw, see, saw, see, saw, 내가 등장하게 되면 상대는 내려가 있고 내가 내려가면 상대가 올라가 있고. 이게 복음입니다. 내가 죽어 무능할 때 비로소 주님은 크게 보이고, 내가 살아서 뭘 하려고 하면 주님은 존재하지 않고, 없는 존재가 되고, 죽어 있는 존재가 되고. 그게 시소거든요.
성령이 와서 다 이루었다 함을, 우리에게 명령을 주는 거예요. 지금 시나리오는 다 이루었다, 의 시나리오에요. 다 이루었다, 기 때문에 우리에게 상대역을 찾습니다. 상대역인 우리가 할 일이 뭐냐?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할 일이 뭐냐? 이 세상의 치욕성을 드러내는 것, 주님이 이겨냈던 그 강력한 어두움의 힘, 그 본부로 들어가는 사명을 준 거예요.
‘아,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벌벌벌벌 떠는 구나. 사람들이 코로나 때문에 벌벌 떠는구나. 사람들이 자기의 출신 때문에 벌벌 떨었구나.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 때문에 벌벌 떨었구나.’ 인간이 벌벌 떠는 그 지점에다 주님께서 보내버립니다. 그게 바로 누가복음 4장의 과부였어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둥병자였습니다. 맡은 배역이 문둥병이었고 맡은 배역이 과부였어요.
세상사람 같으면 자살해버립니다. “나 이래서는 못산다.” 인간이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 지점에 일부러 주님께서는 보내버리는 거예요. 차이점, 주님의 형상의 차이점, 그리고 아담의 형상의 차이점을 보게 하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미 주께서 거기에 동참케 했기 때문에 결국 그 길로 가서 영광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데 그건 여러분이 성경 찾아봐야 돼요. 거기에 문둥병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는데 2절에 문둥병자가 와서 하는 말이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아, 도대체 이 믿음이 어디서 온 거예요? 쉽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주님, 제가 문둥병 걸린 것 주님의 계획 맞지요? 그렇지요? 내가 눈치 챘지요? 알아봤지요?” 그 뜻이에요.
“내가 문둥병 걸린 것은 주님의 계획 맞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그 계획이 문둥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끝이 있지요? 그게 뭡니까? 그걸 저에게 행하옵소서.” 전적으로 무능하지요. 그 계획이 바로 마태복음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병 고쳤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병자 속에서, 병자라는, 썩어진 문둥병이라는 그 형상 속에서 자신의 십자가형상을 거기서 만들어내는 시작을 하는 거예요. “나는 망했다. 나는 이제 끝났어. 나는 이제 자살이야.” 그 자살을 할 수 밖에 없고, 그게 전부야, 하는 그것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천사의 형상의 시작점이에요.
버리지 마세요. 우리의 폐지 버리지 마세요. 다 필요한 거예요 그거 내 인생 다 필요한 겁니다. 남하고 비교하고 좌절하지 마시고요. “나는 인간 말종이야.” 그게 바로 주께서 원하셨던 거예요.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그 다음 말씀이 마태복음 8장 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그 모세의 명한 예물이 레위기 14장 49절에서 53절에 나옵니다. “그는 그 집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취하고 그 새 하나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과 산 새를 가져다가 잡은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번 뿌릴 것이요 그는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산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로 집을 정결케 하고 그 산 새는 성밖 들에 놓아 그 집을 위하여 속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결하리라.”
새를 두 마리 잡는 거예요. 두 마리니까 이것은 상대역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주님의 상대역을 했었어요. 주님은, 우리는 멋도 모르는데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레위기 14장의 율법대로 주께서는 미리 피 흘리고 죽었어요. 그러고 난 뒤에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서 그 다음에 자기의 피의 그 근거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택배로 보내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다 이루심의 완성된 의를 택배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새의 날갯죽지에 묻히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산 새, 살아 있는 새가 되어서 파닥거리면서 무엇을 자랑하느냐 하면, 내 죄를 위해서 누군가 피를 흘렸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자유로운 새로 이 세상을 생애 다할 때까지 날아다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에요.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이 세상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아다니는 새다. 피 묻은 새다. 내 피 말고 주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일체 우리의 어떤 죄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맏아들의 형상입니다.
주님의 형상은 고정적이에요. 확정적입니다. 그 확정된 형상을 위해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되게 바쁘셔요. 우리는 할 일도 없어서 뭐할까 하는데 주님은 되게 바쁘셨습니다. 바쁘셨고 지금도 바쁘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활동이, 이렇게 활발하게 자기 배역 자기 상대역을 하는 사람을 천사와 같이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주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형상이 먼저 있고 우리 몸 창조는 나중이라고요. 주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이 먼저에요.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 다음에 16, 17절에 보게 되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우리보다 예수님이 먼저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먼저 계신 거예요. 끝으로 고린도전서 15장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안 믿는 사람들은 이걸 보고 “장난 하냐? 무슨 이런 위로삼아 있지도 않는 그런 비현실적인 농담을 하냐?” 이렇게 할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은 것이 객관적 사실이고 부활이, 빈 무덤이 객관적 사실이라면 이 말이 농담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썩어진 몸에 이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썩어진 몸 + 말씀)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형상, 공룡의 몸통, 공룡의 꼬리 부분이 되는 겁니다.
우리 때문에 주변 그릇 다 깨집니다. 44-49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렇게 이야기한 사도바울이 코로나를 겁내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성령 받았다면 우리가 개안(開眼), 눈을 떠서 사도바울처럼 세상을 안심하고, 넉넉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교류하고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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