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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진실
2020년 9월 6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1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주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사도가 제시합니다. ‘주님 안’이라는 세계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 때 품었던 그 원리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주님과 백성이 함께 사는 상태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시피 인간 조상의 그 세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세계’는 그것으로 끝입니까?
‘주 안’이라는 세계 자체가 기준이 되어 이 세계의 현존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구분짓습니다. 즉 ‘주 안’이라는 세계가 있다면 이는 곧 ‘주 밖’이라는 세계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히 ‘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주 밖’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가 다릅니다.
다른 정도로 아니라 상호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주 안’의 세계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 말은 곧 ‘주 밖’에 그대로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정죄함, 곧 저주가 여전히 작렬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주 안‘의 세계를 위하여 꾸준히 구약부터 신약까지 역사가 흘러왔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받아들일 자와 내 보낼 자는 철저하게 구분하는 작용을 벌리고 계시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가인의 벌은 그 땅에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어쫓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즉 이 주 안의 생활에 부합되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 안의 세계의 최종 원리는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2:10-11에 보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으신 ’전지적 최종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피‘로서 세상 전부를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지막에 노출시킨 바가 이 ’십자가 피‘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입니다. 이 비밀은 너무나도 하나님 마음 속 깊이 들어 있기에 그 어떤 인간은 알 수 있었던 자는 없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결코 ’십자가 피‘에 도달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즉 인간들은 모두 헛짓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헛짓이 바로 ’가상현실‘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반영하고 모방합니다. 거울 앞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 거울에 비친 영ㅌ상은 결코 아무런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저 거울 앞에 펼쳐져 있는, 본인들이 있는 그 영역을 되비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어떤 공간 안에 있으면 공간과 자신이 더불어 그 안에 있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주 안‘에 있지 않고 ’방 안‘에 있다면 방 안에 있는 물건이나 가구, 그 어떤 것도 나를 변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일부로서 모방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나를 굳이 없앨 정당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방 안‘이 아니라 ’여론 안‘에 있을 경우에는 인간들은 당황스럽게 됩니다. 타인들이 나를 욕하고 비난할 때, 인간은 자살충동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어떤 경우라도 나 자신을 잊지 못하고 지워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나 중심으로 왜곡되게 보게 됩니다.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할 때, 그냥 곱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가치나 의미‘를 타인들이 요구에 맞춰주면서 현실을 변질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왜곡되고 변질을 가상적인 현실을 독자적인 것으로 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제시한 ’주 안‘이란 참으로 생뚱하는 세계입니다. ’방 안‘도 아니요 ’여론 안‘도 아니라 ’주 안‘입니다. 즉 이 세계 안에서 ’나는 이미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세계‘입니다. 거울 앞에서는 내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주는 것은 나의 다른 손 뿐입니다.
하지만 ’주 안‘에서는 주님이 손을 내밀고 주님의 내민 손이 나의 손을 잡아 당깁니다. 너무나도 신기한 일입니다. 이는 나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깊숙이 들어있는 그 십자가 피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내어보낼 자는 내어보내고 받아들일자는 받아들이는 그 지점이 어디일까요?
구약에서는 ’성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거룩함과 속됨이 가려집니다. 출애굽기 25:16-17에 보면,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죄소를 만들라는 겁니다. 죄를 용서하는 지점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만드는 방식은 뚜껑을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위해서 덮어주시는 그 뚜껑에 희생제물이 피가 묻히게 되면 용서가 되는 기구를 만들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성막이 커져서 나중에 성전이 됩니다. 에스겔 10:18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죄를 씻어주는 기능을 해야 하는 그 성전에서 성신이 떠나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돌아오는 성전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입니다. 마치 ’주 안‘의 세계와 같습니다. 에스겔 43:4-5 “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모든 일은 이처럼 이 성전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뿐만 아니라 이 성전은 에스겔 47장에서 언급된 물이 나오는 에스겔 성전처럼 생명의 물이 나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로지 성령에 의해서만 움직이시는 이유는 십자가 피를 통해서 모든 성전 기능을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이제는 그 성령님을 통해서 성도를 기어이 찾아내셔서 피흘리심에 나오는 죄사함 능력을 기어이 적용시키십니다. 이렇게 되는 성도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구원할까”라는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진실이 아닌 가상현실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지 말고 피의 가치만 보이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9강-빌 4장 1절(가상과 진실)2009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주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사도바울이 제시합니다. ‘주 안’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를 않지요. 원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안과 밖’이라는 사실을 우리 인간들이 누구라도 눈만 있으면 아니 눈이 없어도 측정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주 안”이라는 이 말은 우리 힘으로 주 안과 밖의 측정이 불가해요. 생뚱맞은 공간 영역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한테 이것을 딱 들이밀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주 안’이라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단어를 사용했는지를 제가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방 안이다. 방안에 딱 들어오게 되면 침대 있고, 가구 있고, 창틀 있고, 고양이도 한 마리나 두 마리 살고 있고.
방안에 있는 어떤 물건도 나 자신을 졸지에 변화시키고 그런 것은 없어요. 가구가 네 자리에 있듯이 나는 내 자리에 있으면 되고, 책상이 네 자리에 있고 테이블이 내 자리에 있으면 나도 내 자리에 있으면 되지요. 우리가 방안에 있으면서 나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보통 ‘안’이라 하면 방안에 있는 것, 어떤 건물 안에 있는 것, 그런 것을 두고 ‘안’이라 해서 평소에 별로 중요치 않게 여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하나 더 나가봅시다. 여론 안에서. 야, 이러면 문제가 큽니다. 여론 안에서. 댓글 달리고, 전화 오고, 사퇴해라, 그렇게 되면 방안에 있는 것과 달라요. 여론 안에 있어버리면 뭔가 나를, 내 목숨을 쥐고 흔드는 것 같아요.
그만두라고 하고, 가짜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되는 그런 뉴스가 난무하고, 특히 연예인들한테는 “tv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하면서 “왜 나오느냐.” 하는 식으로 억압을 하고, “얼굴 시커먼 게 tv 왜 나오느냐?” 하면서 방송국에 압력을 가하고, 놀음했다고 노래 못 부르게 하고, “군대나 가라” 이런 소리 나오고요.
방안에 있을 때는 관계없어요. 여론 안에 있을 때 이걸 참아내지 못한 사람은 심지어 자살해버립니다. 여론 안에서. 그러면 여론 안을 피하는 방법은 쉬워요. 전원생활을 하면 됩니다. 지리산에 오두막 짓고 피하면 돼요. 인터넷 다 끊어버리고, 휴대폰 없애버리고, 조용한 산속에서 짹짹거리는 새소리나 들으면서 살면 됩니다.
피신하면 되고, 이민가면 되는데 요새 이민도 못가니까 할 수 없이 산속에 들어가면 되겠지요. ‘방 안’에서와 ‘여론 안’에서가 벌써 다릅니다. 분위기가 환기되어 있어요. 완전히 달라요. 나를 흔들기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여기서 더 나갑니다. 주 안에서.
이건 뭐 ‘여론 안’에서 정도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주 안에서’는 뭐냐? 너는 이미 죽은 존재라는 거예요. 여론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죽은 귀신이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 안에서’라고 사도바울이 사용할 때 근거가 고린도전서 2장 10절, 11절을 근거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장 깊숙이 감춰놓은 것, 이것은 마지막 때 공개하고 나타내는 비밀 중 비밀, 하나님에게도 비밀, 하나님에게도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가장 비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깊은 곳,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 그 비밀,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할 때 그 비밀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일하셨던 그 목적지, 최종 도착지,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피죠.
그 십자가로부터 시작된, 십자가가 놓여 있는 새로운 공간, 그게 바로 주 안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갑자기 소름이 끼쳐요. 이 말 들으면 소름이 끼칩니다. 주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같은 말로 주 밖에 있는 자는 오직 정죄밖에 저주밖에 없나니.
이게 엄청난 비밀이라니까요. 이걸 인간의 마음으로 캐낼 수가 없다고요. 울산강의 끝나고 난 뒤에 새순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와서 질문을 해요. “목사님이 강의 중에 ‘깨어진 심연(深淵)’ 이라 했는데 그 깨어진 심연 안에, 그 중앙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심연 안에 뭐가 들어 있기에 그것이 나오게 되면 모든 것이 다 깨어져야 마땅합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의 피에요. 그 중심에서 피가 나왔어요. 피는 죽음이지요. 죽음의 효과, 죽음의 위력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깨버리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깨어질 때 깨어질 이유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주 안에서’라는 것을 사도바울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알리는 이유는, 처음의 것 처음의 세계를 그대로 유지시키겠다는 겁니다.
처음의 세계가 뭐냐 하면, 에덴동산이지요. 하나님과 주님과 인간이 함께 살았던 그 세계, 그 상태를 계속 유지시켜 나가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그 세계의 특징이 뭐냐? 받아들일 사람은 받아들이고 내보낼 사람은 내보내는 원리가 가동되는 세계요.
창세기 4장에서 형제간이 있는데, 두 사람 가인과 아벨이 있는데 가인은 적절치 않다는 거예요. 이 ‘주 안’의 세계에 적절치 않다는 겁니다. 내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이 받은 벌은 사형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아니고 이 동네에서, 아벨이 죽은 동네에서 놀지 말아라, 예수님이 죽은 동네에서 놀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가치를 네가 훼손했으니까 아벨이 죽은 이 동네에서 너는 나가!” 그거예요. “십자가 있는 동네에서 나가.” 하나님이 궁극적인 십자가 피,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유일한 피, “피가 있는, 유일하게 정죄함이 없는 동네에서 나가.” 그게 바로 가인의 운명입니다.
그 ‘주 안’의 세계가 구약에서 보게 되면 거기서 뭐부터 시작되느냐? 성막부터 시작됩니다. 출애굽기 25장 16, 17절,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데 실측, 실제로 측량된 성막을 제가 이스라엘에서 보고 왔습니다. 지금은 못갑니다. 코로나 때문에. 거기에 속죄소가 있어요.
16, 17절에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여기 속죄소를 만든다 했지요. 이름 자체가 속죄소, 죄를 씻어주는 거예요. 죄를 씻어주는 곳입니다.
죄를 씻음 받음, 그걸 거룩이라 하고 죄를 씻음받은 적이 없으면 그걸 가지고 더럽다, 그래서 죄를 속한 동네 거룩함과 속됨을 구분 짓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속죄소 뚜껑입니다. 그게 나중에 성령이 되는데 여러분, 성전이라 할 때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성전은 위에서 덮어주는 것과 밑에서 생명수가 빠져나오는 것, 흘러내리는 것, 덮어주는 것과 흘러내리는 것 두 가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에덴동산과 성전의 차이점은, 에덴동산은 덮어주는 것이 없어요. 속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서 덮어주는 기능이, 그 차단막 같은 것이 에덴동산에는 없어요. 그냥 노출되었어요. 나가, 하고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에덴동산 뒤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기능을 줬느냐 하면, 덮어주는 거예요. 죄를 덮어주는 거예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지옥 불에서 덮어주는 기능, 그게 피가 묻어 있어야 됩니다. 그 피 묻은 뚜껑을 가지고 속죄소라고 이야기해요. 언약궤, 법궤의 뚜껑.
지금 제가 계속 이야기하면서 무슨 이야기가 빠져 있느냐 하면, 나 이야기는 빠져 있지요. 나 이야기는 빠져 있다고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전지적 관점, 전체를 다 보는 관점에서 반드시 나는 빠져 있어야 돼요. 세상이 사실 그대로 어떻게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는 나 빼고 이야기해야 된다니까요. 나를 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런데 주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 주 밖에 있으면 정죄함을 받느냐 하면, 주 밖에 있으면 주님이 없어요. 주님이 없으니까 주님 자리에, 중심자리에 누가 있느냐? 내가 그 자리에 걸쳐 있어요.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습이 뭐냐 하면, “목사님, 저 구원 안 받은 것 같아요.” 이게 전지적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 깊은 곳에 있는 전지적관점이 아니에요.
그 순간, “나 구원 안 받은 것 같아요.” 하는 그 순간 그분은 바로 자기생각만 하고, 자기생각만 하게 되면 감사와 고맙소, 가 날라 가버려요. 매사에 감사와 고맙소, 가 날라 가버리고 항상 자기걱정으로 스물네 시간을, 평생을 다 보내게 됩니다.
코로나 19가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께서 내 보낼 교회를 코로나 19를 통해서 알게 하시는 거예요. “네 걱정, 네 교회 걱정하는 교회는 나가라.” 그 말입니다. 평소에 코로나 19 오기 전에 교회 운영하면서 무슨 생각했겠어요? 내 교회 교인 수 몇 명이냐, 헌금 얼마 나왔냐, 그것만 생각했을 것 아닙니까? 나가라, 이 말이지요. 나는 그런 교회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내 보내는 거예요. 그들이 문을 닫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보시는 거라니까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작업과 내보내는 작업이 하나님의 속죄소에 의해서 성전에서 그게 작동이 돼요. 그 원리가. 가인은 내보내고 아벨은 받아들이는 그 작동이 성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진행되는 겁니다.
진행을 할 때 내보내는 작업과 받아들이는 지점이 어떤 지점이냐? 지금 ‘주 안’이 눈에 안보이니까 그 지점 찾기가 굉장히 힘들지요. 힘든 게 아니라 불가능하지요. 제가 만화영화 잘 안 보는데 몇 년 전에 만화영화에 제가 잠시 의도치 않게 빠져야 했습니다. <엄마까투리> 왜 그걸 봐야 했느냐 하면, 내 집에 외손녀가 와 있었기 때문에, 그 애 때문에 <엄마까투리>를 봐야 했어요.
어떤 장면이 나오느냐 하면, 비가 오니까 아기까투리들이 나뭇잎을 가지고 우산처럼 덮어서 빗방울을 피하면서 지나가는 그 장면이 나왔어요. 그 때는 ‘까투리들도 아이디어가 있구나.’ 이렇게 봤는데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서 ‘바로 저거다. 바로 저거야!’ 하나님께서 ‘주 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드시고 그 영역을 어떻게 유지하시는가?
보낼 자는 내보내고 받아들일 자는 받아들이는데 내 보낼 자는 우리는 관심 없고 받아들일 자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 라고 생각해 보니까 엄마까투리에 나오는 그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엄마까투리를 개미로 해봅시다. 개미가 자기 집에서 나올 때에 나뭇잎사귀를 가지고 나온다고 해봅시다.
그 잎사귀에 먹을 양식을 담아서 밑에서 도르래처럼 끌고 가게 되면 위에서 보면 개미는 안 보이는데 나뭇잎은 보이고 거기에 실려 있는 양식들은 개미집이라는 도착지점을 고정적으로 보여주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게 되지요.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겁니다. 성령을 보내면 성령은 나뭇잎이 돼요.
성령은 나뭇잎이 되어서 주님께서 반드시 구원되어야 될 ‘주 안’에 들어가야 될 자를 그 나뭇잎에 실어서 목적지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주 안’이에요. ‘주 안’에. 인천의 주안 말고요. ‘주 안’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했느냐는, 밑에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데 성령은 또 눈에 안보이거든요. 모르지요.
모르는데 정말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주께서 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딱 꽂아서 ‘주 안’으로 실려 갈 때 그 실려 가는 택한 백성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께서 꼬깃꼬깃 숨겨놓은 비밀, 바로 십자가의 피가 기다리는 곳으로, 영원한 속죄소가 있는 그곳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게 돼요.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주님의 서핑이라 하는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보드에 올라타고 빠졌다가 들어가고 또 빠졌다가 들어가고, 마치 개미가, 부지런히 개미가 들락날락 하듯이 성령께서 부지런히 들락날락 하면서 구원받을 자를 기어이 십자가의 효과, 능력으로 주의 속죄소, 요한계시록에 언약궤가 보인다(계 11:19) 했으니까, 언약궤 있는 그곳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데려갈 때 반드시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으로 이마에 도장을 받았다. 택했다.”는 방식으로 가져갑니다. 그렇게 가져가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주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능력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주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의식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돼요.
그 한 예를 들게 되면 구약에 나옵니다. 여호수아 2장 3, 4절에 보면 정탐꾼이 여리고성에 들어왔지요. 그런데 탐지하러 왔다가 신고가 들어왔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리고 4절에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숨겼어요.
그러고서 하는 말이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라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진실이에요. 주안에 있는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해도 진실이고 주 밖에 있는 사람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그것은 거짓이 되는 겁니다.
목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상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사랑제일교회는 확진자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꼭 북한 같아요. 북한 김 정은도 북한에 환자가 한명도 없대요. 마스크 다 쓰고 다니면서. 사랑제일교회 확진자 한명도 없다는 겁니다. 진실입니다. 왜? 많이 나왔기 때문에.
이걸 우리가 ‘주 안에서’라는 관점, 전지적관점이지요, 그 ‘주 안에서’ 그 관점 말고 여론적 관점으로 보게 되면 구상권 청구해야 됩니다. 한 40억 물어야 돼요. 입만 떼면 거짓말했기 때문에. 여론 안에 있다면 “너 때문에 온 나라가 다 죽게 됐다 지금.” 여론 안에 있다면 그래서 그게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사랑제일교회, 지금 예를 들어서 그런 것이지 그 교회가 ‘주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니고요.
만약에 ‘주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밖’에 있게 되면 “이번사태는 내가 원인 제공한 사태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생 라합으로 하여금 남들 보기에 거짓말 같지만 본인은 진실을 이야기한 것은, ‘주 안’에 있는 사람과 ‘주 밖’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그걸 구분 짓는 하나의 상황으로, 경우로서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차이성, ‘주 안’과 ‘주 밖’의 차이성을 계속 성도를 통해서 발생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기생라합이 거짓말 한 것을 몰랐는데 나중에 안다면 여리고성 지도자, 왕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누구편이야?”라고 하지요. 다른 말로 하면 “너 지금 네 인생 어디로 몰고 가는거야?”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면 기생라합 같으면 신약적으로 이렇게 하지요. “나는 내 인생을 내가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당신들은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진실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진실로 갖고 있는 그 십자가의 세계, ‘주 안’의 세계, 원래 에덴동산 만들 때 그 세계, 하나님과 함께 있던 세계로 당신은 지금 달려가고 있지 않고 그 길이 아닌 엉뚱한 길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요. 결국 모든 이야기가.
방향성이 중요한 겁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게 중요한 거예요. 거짓말 했느냐, 아니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행동과 태도와 말이 당신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그런 행동과 태도와 말을 지금 내놓고 있습니까?”라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가치를 지킬 요량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피의 가치를 지킬 요량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묻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방 안에, 더 나아가면 여론 안에, 또는 공동체 안에, 라는 뜻이겠지요, 그 당시 사회 안에, 인간으로 하여금 방 안과 여론 안, 그 사이에 가두어 두었지요. 그 밖으로 못나가요. 그러나 여기에 새로운 세계 ‘주 안에서’라는 말을 감히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툭 던지고 있습니다.
“주 안에 서라. 주 밖에 서지 말고 너는 주 안에 서라.” 자,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했다는 것은 물론 성령을 통해서 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주 안’이라 하는 것은 구약적으로 어떤 식으로 예언돼 왔던가를 보셔야 돼요.
그것은 제가 아까 언급한 성전이라는 겁니다. 에스겔 40장 3절에, 어떤 아저씨 하나 등장하는데 얼굴이 놋으로 빛나는 아저씨가 등장했는데 작대기를 들고 있어요. 한 3미터 되는 작대기. 그것은 성전을 측량하러 온 겁니다. 그런데 그 성전은 현장에 없어요. 방 안에도 없고 여론 안에도 없어요.
그러나 ‘주 안’에는 있는 성전. 성전을 측량하는 그 사람도 인간이 아닙니다. 천사에요. 천사가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한 성전을 측량하러 왔다고 성신을 통해서 선지자 앞에 등장한 거예요. 정말 이건 흔한 말로 뭐하는 시추에이션이에요 도대체 현장에 없다니까요. 현장에 성전이 없는데, 없는데 하나님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기는 거예요. 지금 우리 눈에 없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 비슷한 예가 마태복음 16장의 변화산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야고보 요한 베드로 세 사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기 전에 그냥 산이에요. 올라가니까 졸지에 거기서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고 거기에 없어야 되는데 모세도 있고 엘리야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정신이 없었어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주 안’에서 봤던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던 그 상황은 땅의 시간으로 얼마 가지 않았어요. 다시 뿅, 하고 사라지니까 그 현장은 그냥 나무와 돌, 풀, 이것밖에 없어요. 베드로가 나중에 베드로 후서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너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보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측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측량을 하면서 새롭게 만드는 그 에스겔 성전의 특징중에 하나가 에스겔 44장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야……, 이 성전의 특징이 뭐냐? 문 닫는 특징이 있어요. 내가 내 사람 다 채우거든 이 성전문은 다시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닫혀 있는 겁니다. 이 성전은 제한적이에요.
이 말은, 사도바울의 ‘주 안’이라는 세계도 숫자가 제한되어 있어요. 택한 백성만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1장에서는 그걸, 피로서 택했다. 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택했다는 거예요. 택하는데 뭘 피로 택합니까? 피 알면 선택받은 사람이고 피 모르면 선택받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뜻이에요.
지금 피 아는 것 말고 피가 최종적으로 전지적관점, 모든 것이 피 때문에 생긴 개체고 사물이고 그런 체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전지적관점을 성령을 통해서 공유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엄마까투리 만화에 있는 대로 나뭇잎이 움직이는 식으로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왜 택한 백성이 성령에 의해서만 주 안에 들어올 수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성령의 서핑을 했거든요. 성령의 서핑 보드를 탔다고요. 성령을 보드로 사용해서 썰물 밀물, 빠졌다가 들어갔다 하면서 이 땅에 들어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는 모든 기적과 모든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된 거예요. 성령의 세례를 받고.
참 희한한 세계지요.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요. 20절에 보면 문이 닫힌 문이라는 거예요. 닫힌 문인데 ‘내가 문을 열게 되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 없다’는 그 원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닫혀 있는 거예요.
닫혀 있다는 말은 내가 내 쪽에서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내 행함으로 말미암아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세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기도하신 집사님의 기도내용 그대로에요. 내 행함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그 원리원칙이 계속 통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결국 피를 내게 했고 십자가에 죽게 만든 그 이유는, 어느 인간도, 심지어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뭐 하러 이 땅에 왔는지를 아는 자가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불가능한 겁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니까 제자들도 걱정이 되어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지요. 주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사람은 할 수 없다.” 에요. 그 사람 중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내 구원을 구원받게 할 수가 없어요.
왜 이렇게 성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참조로 해서 그걸 바탕으로 해서 가상천국을 계속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거울작용이라 하는데 우리 앞에 거울을 세워보세요. 그러면 거울에 비친 모든 광경은 현재 거울을 보고 있는 이 기존에 있는 내 자리가 거울에 되비칠 뿐이지요. 반영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손을 내밀게 되면 거울에 손 내미는 것이 보이지요. 그 손을 누가 잡아줍니까? 누가 잡아줘요? 내가 손을 잡아줄 때 그 손이 잡히는 거예요. 주님이 잡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거울 때문에, 거울작용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머릿속에, 인식 속에는 거울이 들어 있어요. 그걸 뇌 과학자들은 거울세포, 거울 시냅스라 하는데 거울작용을 어떻게 하느냐?
항상 세상을 반영을 합니다. 그걸 모방이라 하는 거예요. 교육이라 하는 것이 모방부터 하는 거예요. 모방이 교육의 시작이에요. 항상 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베낀 것 또 베끼는 거예요. 컨닝한 것 컨닝하고 또 컨닝하고. 전부 다 탈락이에요. 새로운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모방이에요. 반영이고. 가상세계입니다. ‘hyperreality’라고 하는데 가상세계에요.
천국도 가상세계요, 천국의 그 내용은 전부 다 땅에서 모방한 거예요. 그리고 천국 가는 그 사람도 현재 내가 나를 의식하고 있으니까 나는 필히 반드시 기본적으로 천국 가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면서 천국을 생각해요. 내 구원은 기정사실로 여기면서 구원을 생각한다고요. 구원이란 말을 할 때 항상 그 내용은 ‘나는 당연히 가고’ 이게 포함이 되어 있다, 그 말이지요.
그 가상세계, 하이퍼리얼리티. 이 가상세계의 특징은, 모든 것이 이미지에 불과한 겁니다. 모든 것이 내 욕구가 담겨 있어요. 기호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에요. 그 이미지의 세계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베끼기 때문에 이것은 뭐냐? 모든 것이 왜곡입니다. 뒤틀려 진 것이고 변질된 거예요.
뒤틀려지고 변질됐고, 나중에는 뒤틀려지고 변질되고 왜곡된 그 자체를 하나의 독자적인 것, 독자적인 실재, 현실이라고 간주해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성령의 서핑보드를 타고 오면서 왜곡된 것을 왜곡시켜 버려요. 기생 라합같이. 거짓말 하는 거예요.
“혹시 정탐꾼이 여기 왔습니까?” “아니요. 온 적은 있는데 가버렸습니다.” “그러면 여기 없단 말입니까?” “여기 없어요.” 진실입니다. 왜? 여리고성 자체가, 인간세계 자체가 왜곡됐기 때문에 왜곡에 대한 진실은 거짓말에 대해서 거짓말로 덧입히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어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왜? 그 밑에는 뭐가 달려 있기 때문에? 성령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가 그 엄마까투리 나뭇잎 밑에, 내가 도사리고 앉았어요. ‘나 교회 와서 천당 갈래. 교회 와서 구원 받을래.’ 그래서 “목사님, 저 구원받는 방법 알려주세요.” 이 ‘나’라는 덩치가 나뭇잎 밑에 있기 때문에 그게 실린 것은 가상천국 외에 아무것도 실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성과 속, 거룩과 속된 것을 누가 판정을 내리느냐 하면, 내가 판정을 내립니다. 그 판정내린 자들이 바리새인들었어요. 사두개인들이고. 오늘날 목사들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 했어요. 당신이 지금 마이크 쥐었다고 마이크에 폭력을 행사하느냐,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아, 내가 그럴 수가 있구나.
그래서 제가 성경말씀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본인이 압니다, 라는 말을 했어요.
목사는 “나 이렇게 끌려갑니다.” 그 이야기 하면 되지 다른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교회사를 보게 되면 이 가상현실을 모양냈던 단체가 서양 11세기 말에 등장합니다. 베네딕도 수도회에요. 수도회를 왜 만들었을까요? 여론에서 피하고 싶은 겁니다. 나만의 방을 원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거예요.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세 가지의 율법을 동원합니다. 청빈과 순결과 순종, 세 가지 율법을 가지고 평소에 스케줄이 어떻게 되느냐? 기도하고, 독서하고, 명상하고, 노동하고,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울타리를 쳐버려요. 눈에 보이는 ‘주 안’이라는 영역을 인간의 힘으로 만든 거예요. 그 뒤에 여자들도 그걸 만들어서 수녀원, 참기름 짜고 된장 만드는 그 수도원을 만듭니다.
참기름 하니 기장에 있는 박태선도 참기름 짜서 그렇게 크게 된 겁니다. 그 수도원을 그렇게 세웠고 국가도 장려했어요. 세금과 십일조를 베네딕도 수도원에 냈습니다. 청빈이 계율이었기 때문에 받은 수입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국가적 구제활동을 했습니다. 최초의 복지사업을 수도원에서 한 거예요. 흔히 말하는 이웃사랑을 그렇게 실시한 겁니다.
왜? 그래야 교회 이미지가 좋아지거든요. 아까 모든 가상현실은 이미지세계라 했지요. 여론의 장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교회가 생존하느냐 마느냐가 달린 겁니다. 교회가 자진해서 문을 닫고 코로나 방역에 협조할 때, 그래서 앞으로 코로나가 물러갔을 때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교회는 사회에 공헌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지 않을 것이고 교회는 그 숫자를 채울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교회가 지금 문을 닫은 거예요.
이게 뭐냐?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엄마까투리에요. 그거 생각하세요. 나뭇잎 밑에 성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내가 웅크리고 있는 거예요. 내가 웅크리고 있어요. 이 교회가 웅크리고 있어요. 가상이고 조작한 거예요. 날조고 왜곡한 거예요. 교회가 없어지는 것이 무서운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이 무서운 거예요.
죽기 살기로 산다, 하는데 죽기 살기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죽으라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성령의 서핑보드를 타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성령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뭘 해도 우리는 십자가로 가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이 죽는 일이어야 해요.
죽기 위해서 우리는 건강진단 받아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죽기 위해서 맛있는 것 잡숴야 되고 돈 악착같이 벌어야 됩니다. 죽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프거든 빨리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요. 왜? 죽기 위해서. 애들은 죽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해야 돼요. 죽기 위해서.
왜냐하면 가는 방향이, 관심사가 달라요. 죽어서 주와 합류하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자살하면 안돼요. 지리산 들어가지 마시고, 기도원 같은데 가지 마시고 진짜 죽어라고 살아야 돼요. 오늘 이상한 말을 하게 되는데 목적은 뭐냐?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을 수 있느냐에 목적을 두고 악착같이 살아야 된다 그 말이지요. 자포자기 하지 마시고.
왜 자꾸 살려고 하면 안 되느냐 하면, ‘주 밖’에 나가면 정죄함이 있는 세계에서는 그 정죄함을 모방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를 해소하려고 하면 기껏 성령자리에 윤리와 도덕으로 완전무장 해야 돼요. 그래야 약간이라도 자기 의가 남게 되면 설마 이것까지 내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거울작용이에요.
거울 앞에 있는 나를 비추면 저 거울에 비친 저 인간을 방치하면 안 되고 누가 살려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나를 살리는 거예요. 성령은 없지요. 구원은 받아야 되겠지요. 하는 방법은 뭐냐?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외에 뭐가 있어요. 그게 바로 수도원 아닙니까? 묵상하고 말씀 지키고. 바리새인들처럼.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갈라진 것이 시토수도원이 있어요. 시토수도원이 뭐냐 하면, 십일조 안 받겠다는 거예요. 오……! 와……! 그리고 나라의 혜택도 안 받겠다는 겁니다. 와, 그래서 그들이 한 것이 뭐냐? 자체적으로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자체적으로 판매조직을 만들어서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겁니다.
역시 사는 거예요. 수도원 살리겠다는 겁니다.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까만 옷을 입었거든요. 시토 수도원에서는 하얀 옷을 입었어요. 차별화하기 위해서. 웃기지도 않아요. 전부 다 목적은 뭐냐?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목적이에요. 이 수도원을, 이 교회를 어떻게 살아남게 하느냐? 목적은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마귀가 바보입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게. 뻔히 다 아는데요. 에스겔 10장 18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러니까 인자 눈에는 보이지요. 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측량된 이 에스겔 성전과 비교되는 현재 솔로몬 성전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솔로몬 성전에서 하나님의 성신이 성전 제일 깊숙하게 있는 하나님의 지성소를 떠나버려요. 더러워서 여기서 떠나버린다. 이 말은 뭐냐? 성전에서 성신이, 성령이 떠나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의 기능을 못합니다. 성과 속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지를 못해요. 그래서 에스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성령이 떠나버리면 끝났다. 이 말은, 만약에 성신이 성전의 동쪽으로 빠졌는데 동쪽으로 빠진 그 성신이 다시 들어온다면 어디로 들어오겠느냐? 그것이 에스겔 43장 1,2절에 나옵니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여호와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다시 들어와요. 동쪽으로 빠진 그 자리에 주님의 영광이 다시 들어와요. 그러면 그 성전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되면 빠지고 들어오는 것, 하나님이 ‘주 안’에서 빠지고 들어오는 그 ‘주 안’의 세계가 구약에서는 성전개념으로 성전이 하나의 사령부가 되어서, 중심체가 되어서 거기서 성신이 들어갔다가 빠지고 들어갔다가 빠지는 이 작업을 구약부터 해왔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그 성전이 어디 입니까? 몇 번지입니까?’ 하겠지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하는데 예수님 몸이 성전이에요. 그리고 요한복음 7장에 보게 되면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내 몸에서 물이 나오듯이 내 몸에서 성령이 하염없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에스겔 그 새로운 성전에서 동쪽으로 시냇물이 흘러요. 시냇물이 흐른다 하면 이것은 뭐를 생각하게 되느냐? 에덴동산의 물 흐르는 그것 생각하시면 돼요. 주 안에 있는 사람들, 주 안의 세계는 뭐냐 하면, 생명을 낳는 물, 생명수가 계속 흘러내리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21장에 들어가면 어린양의 보좌,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흐른다고 되어 있어요. 눈에 안보여요. 우리는 여론이 중요하지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눈에 안보이지요. 눈에 안 보이는 이야기를 에덴동산부터 출애굽기로 해서 성막 → 성소 → 성전, 계속해서 마지막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이것은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배제해 버립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인간들은 뭐하고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인간들은 뭐하고 있느냐 하면, 가상현실을 만들어요.
‘주 안’ 그것은 성령을 받아서 가능한데 우리는 성령으로 정죄함이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구원하는 모방과 그리고 왜곡과 그리고 독자적인 나, 독자적으로나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나한테 손질하는 겁니다. 다듬는 거예요. 매일같이. 나를 평가하고 측정하고.
그 한 예가 제가 말씀드린 베네딕도 수도회, 시토 수도회, 그런 겁니다. 경건에 경건의 극치를 더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잖아요. 그렇다면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 받는 사람은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쥐고 있어야 됩니까, 라고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데 이게 ‘주 밖’에 있는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반영, 모방하고 그리고 그것을 왜곡해서 독자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주 밖’의 인간들이 하는 일이라면, 그게 가상현실이라면 심지어 명분이 교회가 되었든 천국이 되었든 그것은 전부 가상현실이에요.
그 가상현실 말고 진짜 현실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최종통일성에 대해서는 본인이 거기에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냥 떠먹을 뿐이지요. 예를 들면 오므라이스 할 때 계란 피(皮)를 덮잖아요. 숟가락 가지고 오므라이스를 한 숟가락 떠보세요. 숟가락으로 뜰 때마다 오므라이스의 그 피(皮, skin) 한 조각이 숟가락에 얹히지 않습니까?
성도가 행동하고, 말하고, 잠자고, 춤추고, 노래하고, 뭘 해도 피가, 주님의 피가 그 숟가락에 늘 얹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라는 이미지, 거울에 비친 ‘나’라는 이미지를, 피가 나를 부정하는 겁니다. “너는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야. 너라는 이미지는 너한테 우상이고 형상일 뿐이야. 너는 왜 네 이미지에 놀아나느냐?”
이미지가 있어버리면 타인의 이미지에 우리가 몸 둘 바를 몰라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얼마나 착하다고 할까? 얼마나 못됐다고 할까?’ 여기에 몸 둘 바를 몰라 해요.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어요. 여론의 장에서. 십자가는 안보이고 거울 앞에 내 모습만 보이는 겁니다.
이런 영화가 있어요. 아주 고급진 대리석이 깔린 살롱이 있는데 젊은 남녀가 춤을 추는 장면이 보여요. 그 다음에 똑같은 장소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30년 전에 춤을 췄던 그 젊었던, 파릇파릇했던 남녀 청춘들, 동일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춤을 춥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 장소는 그대로인데 몸은 다 후졌어요.
누구입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누가 이렇게 나를 만들었어요? 이미지는 다 후져지기 마련이에요. 다 닳아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그게 이미지에요. 성경에 후패한다 하잖아요.(고후 4:16) 우리 자아는 후패한 거예요. 우리의 윤리도덕도 다 후패해져요.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래도 이 땅에 살면서 육신이 있다 보니 맨 날 나는 나밖에 생각 안하는데요.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오늘 아침에 고딩이 까먹는데……, 고딩이라 하면 경상도 사람 아니면 못 알아듣지요. 표준말로 다슬기. 다슬기를 까먹고 있는데 손에서 놓쳐버렸어요. 놓쳐서 다슬기 껍데기 더미에 빠져버렸어요.
아, 그 다슬기 껍데기들 속에서 아직 덜 까먹은 껍데기를 찾아내는데 땀이 비질비질 나옵니다. 찾아내면서 느낀 점은, 주께서 찾아내신다는 거예요. 주께서 기어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우리가 쓰레기 맞거든요. 이 껍데기, 쓰레기라는 말이지요. 쓰레기더미 속에서 아직 못 빼먹은, 주께서 양식이 되는 고딩이, 아직 못 빼먹은 그 걸 기어이 찾아내는 거예요.
왜? 주님이 그걸 빼먹기 위해서. 성령을 받은, 인 치심을 받은 사람을 주께서 안 놓칩니다. 쓰레기 중에서, 쓰레기 맞아요, 우리는 쓰레기 맞습니다, 쓰레기 중에서, 쓰레기위에 쓰레기인데 무슨 큰소리칩니까, 쓰레기인데, 쓰레기인데, 개미집에서 나온 성령이 기어이 “너 나와! 너 나와!” 해서 기어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빼먹습니다.
네가 아니고 네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영, 로마서 8장 10절 11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는 하나님의 약속, 주님의 약속, 십자가의 능력, 그 능력을 우리한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게 우리에요. 끝으로 그러면 그 능력이 임한 사람은 어떠한 통일성을 갖추는가?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네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든, 자유자든, 여자든, 남자든, 그런 것은 이왕 껍데기기 때문에 네가 남자 껍데기, 여자 껍데기, 아무 의미 없어요. 남자고 여자고간에 그냥 죽을 껍데기, 껍데기라는 말도 너무 호사스럽다, 쓰레기, 그냥 쓰레기에요.
쓰레기인데 4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명분을 얻어요. 4, 5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아시지요. 성령은 아들의 영이거든요. 아들의 영이 오게 되면 주께서 선택하신 그 영이, 주께서 움직이는 속죄소가 되어가지고 자기 백성이 이 땅에서 무슨 죄를 지어도 속죄라는 기능을 예수님의 자기 피와 연루시켜서 전부 다 정죄함이 없게 만들어요.
참, 제가 예수님이라면 “진짜 이거 모르나!” 하고 고함지르고 싶은데 제가 십자가 안 졌기 때문에 그냥 지신 분만 전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속죄소, 죄를 속하는 것, 또는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음을 자기 영, 자기 마음을 성령을 통해서 서핑, 미리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온다는 것, 쓰레기, 이 껍데기 같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찾아오게 되면 그 공통점이 뭐냐?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헛될까, 헛될까 두려워함이라. “네가 뭔데 네가 네 생각 해가지고 내가 준 이 십자가용서함을 네가 뭔데 헛되게 하냐? 네 윤리도덕으로 왜 가리느냐? 네가 왜 네 행함으로 너를 구원하려고 하느냐? 주님께서 하셨는데, 보이지 않는 분이 다 해주신다는 데 왜 거울 앞에 비추는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지키는 분이 따로 있는데.
아이고, 답답해서 설교 그만해야 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피 말고 다른 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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