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복음의 대칭성

아빠와 함께 2020. 8. 3. 06:23

복음의 대칭성

2020년 8월 2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3:13-14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KJV 13.  Brethren, I count not myself to have apprehended: but this one thing I do, forgetting those things                  which are behind, and reaching forth unto those things which are before,
      14.  I press toward the mark for the prize of the high calling of God in Christ Jesus.

NIV 13.  Broth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14.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NASB13.  Brethren, I do not regard myself as having laid hold of [it] ye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reach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14.  I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사도 바울은 샘플입니다. 성령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이 모든 성도의 표준이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는 자기 안에 자기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5:5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자신을 1로 봅니다. 나에게 나 홀로 있다고 여깁니다. 타인, 혹은 타자는 나의 허락을 맞고 나와 관계를 맺는다고 여깁니다. 그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나의 결정에 의한 겁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나는 항상 1의 1됨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1은 1로서 유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1인 나의 허락도 없이 쑥 내 안에 들어온 분이 계십니다. 내가 들어오시라고 스스로 결정한 적도 없었는데 침투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내 안에 투쟁이 벌어집니다. 나의 성실함과 착실함과 조심스러움과 착함으로 내가 구원받겠다고 고집하는 ‘나’가 있습니다. 이 나는 불청객 타자가 들어오기 전에 내가 나를 운용하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과 대치가 되고 대립이 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혹은 주님의 영이 들어오신 겁니다. 이 주의 영을 주장하십니다. “너에게는 십자가도 없고 부활도 없고 재림도 없고 승천도 없다”는 겁니다. 이는 곧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너라는 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이러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유기물로 봅니다. 유기물이란 자체적으로 자기 구역을 조성합니다. 반면에 무기물은 그냥 죽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 모든 유기물이 무기물로 전환되도록 확정지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유기물이라고 우기는 것은 기껏 ‘지연된 무기물’의 발악일 뿐입니다.

죽음이, 살고자 하는 유기물의 본성을 이기는 겁니다. 쇠퇴함이 삶의 의욕을 꺽어버립니다. 특히 여기서 인간이라는 유기물에게는 ‘십자가가 없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말은, 천국과 통하는 진리와 생명과 길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로 자신을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1)이 가장 궁극적인 유혹이 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반하면서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에게 충분히 속고 살지를 못한 겁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십자가 사건을 내부에서 발생시키시기에 그 사람은 십자가 자리로 데려갑니다. 마치 무기물을 두 조각되면 그 쪼개진 면을 따라 두 대칭면이 나타나는 식입니다.

한쪽은 가해자의 성질이 나오고 쪼개진 다른 면은 피해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십자가 사건은 되풀이 될 뿐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의는 요한계시록 22:17에 나오는 말씀의 결과를 낳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는 것은, 강제로 타인이 성도 속에 들어오기까지 그 인간은 자신의 수고로 형성된 값을 따로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 결정과 자기 판단과 자기 해석과 자기 의지에가 고스라니 살아있는 채 구원되고자 시도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간다고 했는데 그 푯대는 바로 하나님의 최종 결정입니다.

곧 하나님이 생각해놓으신 모든 예언은 차질없는 성도에게 적용이 되어서 참으로 ‘값없이 구원’을 달성해내시는 겁니다. 그 과정, 즉 어떻게 유기물이라고 여겼던 인간이 무기물이 되고, 그 죽었던 인간이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어지는 가를 그 과정을 성령을 보내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구약의 예를 봐야 합니다. 성도 안에는 구약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가 압축해서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열왕기하 4:16-17에 보면,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돌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넴여인은 엘리사는 자기 앞에 간격을 띄워 서 있는 타인으로 보았습니다. 그 선지자에게 잘해주면 자신이 하나님에게 선한 인물로 여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날린 예언이 훅하고 수넴 여인의 가정에 침투했습니다. 마치 스마트폰에 유심 칩이 박힌 것과 같습니다. 이 예언의 내용은 결코 수넴 여인의 가정이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과연 예언대로 없는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입니다. 이렇게 되니 수넴여인이 엘리사 존재를 향하여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언제 우리가 아들 달라고 하더냐? 왜 이제와서 그 아들을 죽이므로서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 성취는 결코 인간의 자아 1를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나름대로 어떤 구원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들추어내면서 진행되는 겁니다. 엘리사에게 잘해주면 되리라고 여겼던 그 수넴여인의 윤리와 도덕성과 자기 의는 도리어 하나님의 예언을 욕보이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의 침투로 발생된 단면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점잖게 여겨도 내 안에 예수님에게 대들고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주님을 탓하지 않고, 그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기 자신의 구원의지에 의한 처참한 결과라는 것을 알려주는 성령에 대해서 부인하면 영원히 오는 세대에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2:31-32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예언은, 모든 구원결정이 구원받은 당사자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애초에 있음을 알리는 그 사건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왜 몰랐느냐고 지옥보내시는 이 하나님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최후의 유혹임을 날마다 알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빌 3장 13-14절(복음의 대칭성)2008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3-14절입니다. 신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니오’라는 것이 항상 개입됩니다. 여기 12절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 13절에 봐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우리가 성도라면 해야 될 일을 여기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놔버리라. 과거를 놓아버리라. 잊어버리라. 과거를 놓아버리라는 말은 내가 갖고 있는 축적된 힘을 놓아버리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놓아버리면 나만 손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거에요.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게 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13.  For it is God which worketh in you both to will and to do of his good pleasure.]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라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 이런 말씀으로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게 된다.

그 이야기하고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 이것은 바로 우리가 1이 아니라 우리 안에 두 분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1이 아니고 2에요. 내가 용 써서 구원되는 길은 없습니다. 내가 애쓰고 힘쓴다고 천당 가는 그런 것은 없어요.

1이 아니고,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요. 성도한테는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1이 아니고 2라면, 내가 1이라면 나에게 침범해서 들어온 그 사람은 2가되겠지요. 그러면 내 안에 타자 또는 타인이 되는 겁니다.

나는 여기 있고, 나는 나고 나 있는 곳에 다른 남이 나에게 쑥 들어온 거예요. 침범, 침노한 거예요. 공격한 거예요. 들어온 겁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원래 있던 내생각과 나에게 들어온 그 타자, 남의 생각이 같지 않기 때문에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에서 ‘아니오’라는 말을 계속하는 겁니다.

“여기지 아니하고” 정말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들었으면 “나는 아니오” 그게 연발, 연발, 계속 터져 나오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나는 아니요, 내 소원은 아니요, 내 구원은 아니요, 내 평안함도 아니요, 내 행복도 아니요.” 그전까지 교회 나와서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 한번 이용해 볼까, 이렇게 왔는데 정작 쑥 내가 원치 않는 타인 내가 정해서 불러서 내가 집어넣은 타인이 아니라 그냥 나를 지적하기 위해서 나를 정죄하기 위해서 쑥 들어온 타인이 와버리면 내 안에서 그 타인과 나는 싸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네 뜻 아니요 들어온 내 뜻이야.”라고 그분은 우리한테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성경에서, 내 뜻 아니요 내 소원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나의 소원 내 뜻은 뭐냐? 나는 뭐 길래 나는 나 나름대로의 희망과 기대와 소원을 자꾸 만들어내는가? 그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성경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땅 인간들 세계에 와서 처참하게 망가져서 돌아가신 거예요.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뒤에도 멀쩡하게 계속해서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었고 아무 문제없다는 식으로 2020년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망가져서 처참하게 사형수로 되어 이 땅에서 사라지면서 남기진 말이 있어요.

“너희에게는 십자가도 없고, 너희에게는 부활도 없고, 너희에게는 재림도 없다.” 이렇게 된 겁니다. 제가 없다는 것을 세 개로 끄집어냈는데 사실은 더 많지요. 너희에게는 십자가 죽는 것도 없고, 천국과 세상이 통하는 그런 지점도 없고, 너희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활도 없고, 특히 너희에게는 재림도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 재림은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 너희들이 추방시킨, 쫓아낸 예수님에게만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일, 부활이라는 일, 재림이라는 일을 그분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신 거예요.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보면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값없이 먹는데 그게 생명수에요. 요한계시록 21장도 마찬가지에요. 6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을 인간들이 합세해서 의견 다 모아서 쫓아내 버렸어요. 값없이 생명수도 주겠다는데 그게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코드가 안 맞다는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의 뜻하고는 코드가 맞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주께서 그냥 공짜로 주겠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2가 아니고 1이기 때문에. 자기가 태어날 때 나는 나다, 라고 했던 그것을 나이 먹도록 그런 줄 알고 계속 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타인이라는 것은 내 밖에 있지 내 안에 들어오는 타인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오해한 겁니다. 설마 타인이 내 안에 들어올 일은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평소에 나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 내가 이용할 가치가 있는 사람만 내가 알아서 모시면서 내가 그렇게 선택해서 결정해서 내안에 계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받아 들여온 것이 내가 한평생 살아온 하나의 버릇이거든요. 버릇이고 본능이고 그렇지요.

내가 필요하다, 또는 필요 안하다는 그것을 내가 심사를 해요. ‘예수? 나에게 필요하네. 한번 믿어볼까? 하나님 좋은 분이네. 내가 믿어볼까?’ 이런 식으로 내가 결정했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둘 사이에 원만한 사이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내가 제대로 나를 몰라서 그래요.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쳐들어왔다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죽을 때까지 “이래서 나는 안 됩니다. 이래서 나는 엉터리에요.”라는 것을 계속해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내뱉게 되어 있어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십자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통하는 그 통로, 문이 없어요. 길과 진리 생명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십자가가 없어요. 그 다음에 인간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없어요. 치욕스러운 부활은 있을지 모르지만 영광스러운 부활은 없습니다. 세 번째 재림이 없어요. 영광스럽게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서 큰소리친다는 이것은 바보에요. 그걸 갖고 계시는 분은 예수님이 그걸 갖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좋은 말씀 했지만 인간이 내쫓은 그 이유는 우리의 그 나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만큼 수상하고 엉터리에요. 나 자신이.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추하고, 더럽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평가를 내린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우리 자신이 나에게 최후의 유혹거리에요. 딴 것은 버려도 우리 자신은 못 버리고 있잖아요. 이것만큼 강력한 유혹이 없어요. 강력한 유혹. 딴 것은 그냥 나중에 마다할 수 있지만 끝까지 집착하는 것은 나 자신이 날 한번 살려보겠다는 이 고집, 이것은 뭐 버티지요.

그래서 성령께서, 타자께서 우리가 우리 속에 들어가게 만듭니다. 물론 주님과 함께 들어가게 만들어서 ‘네가 너에게 영원한 유혹이었다. 평생 네가 너에게 유혹거리였다. 모든 것은 버려도 네가 너 자신은 못 버리고 있잖아.’ 그것을 다시 한 번 죽을 때까지 깨우쳐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고 추한 그들의 기대와 소원과 소망, 그것은 십자가도 아니고 부활도 아니고 재림으로 이어지지 않아요. 그것은 버려야 될 거예요. 우리 안에 우리가 버려야 될 것이 똥처럼 꽉 차 있는 거예요. 이게 아까워서 우리가 못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여기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하는데 이 푯대가 무엇이냐가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핵심으로 등장합니다.

푯대가 뭐냐? 자, 사도바울은 샘플입니다. 표준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의 샘플을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제시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샘플이에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이해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뒤에 성령 받은 성도와 사도바울을 이 땅에 내세웠습니다.

사도바울은 특이한 사람이에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이 하는 말이, 14절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할 때 ‘그 푯대가 무엇인가?’라는 것, 푯대라고 목표라고 제시했어요.

그러면 그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사이, 예수님 사이에서 하나님이 결정한 겁니다.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채택,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구원이 된다는 것. “내가 나를 선택하는 것은 잊어라. 네가 선택해서 너를 구원하려고 하는 그런 구원의 요건은 이것은 엉터리다. 그것은 네가 선택한 것이지 주님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라는 그 하나밖에 없는 속에 2, 타자가 들어오게 되면 과연 내 구원에 있어서 내가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구원되었느냐, 아니면 주님이 진정 나를 선택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구원되었느냐? 그 두 증거물, 그 재료를 놓고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투쟁해 나가는 겁니다. 싸워나가는 거예요.

주님이 들어오지 않으면 싸울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선택과 자기결심만 있으면 되니까. ‘나는 오늘 기도하기로 결심했다. 교회 나오기로 결심했다. 헌금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충성봉사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한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아름다우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포기 못하는, 내가 나의 유혹거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시험거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있지만 우리한테는 십자가가 없다,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경말씀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에게 장애물, 걸림돌’이에요.

십자가가 오면 자빠지고 엎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에게는 살아오는 속도가 있거든요. 속도가 있는데 막 달릴 때 발 걷어버리면 달리던 애가 퍽, 하고 엎어지잖아요. 막 신나게 달려가서 나 인생 이렇게 살란다, 인생 나 이렇게 살기로 각오했어, 이게 옳은 길이야, 달려가고 있는데 공중에서 발을 걸어버렸다는 말이지요. 십자가가지고.

그러면 꽈당, 해서 코 깨지고 자빠져서 얼굴 갈아버리고 하겠지요. 그게 십자가기능이에요 “잘났다 이놈아” 하고 자빠지게 만듭니다. “왜 너 혼자 뛰냐? 왜 너 혼자 뛰어? 왜 너 혼자 용을 쓰느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툴툴대지요. 나 아니고서는 믿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정말 우리가 우리 아니고서는 믿을 사람이 없습니까? 믿을 분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나의 결정과 나의 선택을 주님에 의해서, 쳐들어온 주님에 의해서 박살낼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주의 성령이 임했다, 라고 할 수 있고요. 이걸 다른 본문에서는 달리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제가 설명을 하고 싶네요.

하나의 구약적 예를 들면, 방금 했던 것은 쉽게 이해가 되실 거예요. 열왕기하 4장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등장하고 그 맞은편에 수넴 여인이 나와요. 8절에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수넴 땅에 사는 여인이 있는데 그 부부가 아기는 없어요. 그 부부가 엘리사 선지자에게 잘해줬습니다. 잘해줬는데 그 수넴여인의 입장에서는 ‘여기 있는 나 1이 저 타인, 타자, 그 엘리사라는 내가 아닌 타인에게 음식을 정성껏 음식을 대접한다. 왜?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지자기 때문에 그분에게 잘해주는 것이 곧 하나님께 잘해주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게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대접을 잘했어요. 관계가 그 정도 관계, 나 여기 있고 약간 간격 띄우고 타인 저기 있고. 우리가 평소에 사회생활 하면서 남을 대할 때 그런 관계잖아요. 나 여기 있고 간격 띄우고 남이 있고. 좋게 지냅시다. 그것으로 당신 자리 지키고 나는 내 자리 지키고. 나는 내 것 지키고 당신은 당신 것 지키면서 좋게 좋게 평화롭게 살아갑시다.

이게 우리가 평생 동안 하고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쑥 들어옵니다. 엘리사가. “아기 없지요 아기 낳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것은 수넴여인이 요구한 것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아기 없는 가정에 아기를 주겠다고 제시한 거예요. 쑥 들어온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 타인이라고 여겼던 엘리사로부터 제공받아 들어온 겁니다. 유심칩이란 것이 있어요. 휴대폰 안에 따로 정보를 담아놓은 메모리칩인데 그게 유심칩이잖아요. 아주 요새 유명하지요. 유심칩을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저 엘리사가 유심칩을 수넴여인 집에다가 쑥 집어넣었어요.

쑥 집어넣으니까 16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이렇게 해서 아기가 생길 것이라고 여기지요. 16절 끝에 “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터무니없어도 너무 터무니없는 거예요. 자 터무니없다는 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내가 저 엘리사라는 타인, 여기서 나는 수넴여인입니다, 엘리사라는 타인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과거 경험상 알고 있는 것을 총동원해서 당신은 이정도 일 것이라는 내 아는 범주 내에서 타인을 평가하는 거예요. 측정하지요. 관찰하고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은 어디까지 반길 것이냐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엘리사는 쑥 들어와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 수넴여인이, ‘이것은 내가 과거에 생각지도 못한 것인데?’ 그래서 하는 말이 “엘리사여, 엘리사라는 타인이여! 나 자아가 당신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를 속이지 마소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남편도 늙고 나도 늙었는데 무슨 아기가 생깁니까?”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왜 주님을 그렇게 미워했느냐 하면, 나 자신에게 충분히 속아 넘어가지 않아서 그래요. 나를 믿어도 너무 믿어요. 나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적된 나의 경험과 나의 머릿속의 정보, 지식과 지혜, 여기에 내가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십자가도 어떤 부활도 어떤 재림도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 있지 않는데 아무것도 개뿔도 없으면서 그걸 그냥 붙잡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내가 판단해서 믿겠다, 하나님 믿는 것도 내가 적당하게 믿겠다, 내가 알아서 믿겠다, 내가 결정해서 믿겠다, 하나님 믿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믿겠다, 교회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가 알아서 조정해서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를 결정하겠다.

그러나 그 결정은 순수합니까? 순수해요?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은요, 죽음에 쫓기고 있는 상태에요.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다’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죽으면 나만 손해야’가 나를 충실하게 압박을 해온 그런 세월을 보낸 겁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죽으면 나만 손해라는 것, 나만 쪼다 된다는 것. 죽으면.

죽는 것이 제일 무서워요. 죽고 난 뒤에 부활도 없고 재림도 없어요. 생명은 없고 있는 것은 목숨밖에 없습니다. 값없이 주겠다는 것은 생명인데 우리는 값없이 주는 생명보다 내가 값을 치른 이 목숨을 붙잡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내 안에. 그리고 우리는 그 목숨을 부양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노예가 되어 있어요. 죽을까봐 매일같이 바들바들 떱니다. 그놈의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를 통해서 우리 본색이 나는 내 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는 것, 나는 내가 유혹거리라는 것이 완전히 탄로 났잖아요. 폭로되었잖아요.

아직도 자기를 신임하고 있습니다. 뭔가 건질 것이 있다고.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착실하고, 이렇게 성실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온 인생이 무가치할 리가 있겠어?’ 그게 잘못입니다. 그거 죽음으로 이끌어요. 그게 세 자로 무기물, 그게 무기물이에요. 쇠, 흙, 철, 동 같은 무기물. 이미 인간은 확정되었습니다. 무기물로 전환되도록 확정되었습니다. 무기물이에요.

내가 나를 안 죽으려고 애썼던 그 모든 것이 모아져서 무기물 된 겁니다. 유기물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코끼리나 코스모스나 고라니나 어떤 것도 죽으면 시체가 되고 흙에 합류합니다. 흙으로 환원됩니다. 무기물이에요. 내가 살아있다는데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연된 무기물이에요.

유기물처럼 보이지만 외, 내부에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무기물이 될 뿐이에요.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유기물인데 목숨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유기물은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 생명 있는 유기물이에요. 그래서 여기 사도바울을 샘플로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무기물이 어떻게 해서 영원한 유기물, 생명 있는 사람이 되느냐?

그것을 주께서는 유심칩으로 성령을 통해서 사도바울에게 샘플로 심어놓은 거예요. 엘리사가 수넴여인에게 제안합니다. “아들이 있을 것이다.” 네가 좋다 마다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내년 되면 애 생겨. 끝.” 이것은 내가 일방적으로 심어주는 거지요. 네 의견 물어서 받아들이니 마니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쑥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아기 생겼습니다. 그 수넴여인과 남편은 착각을 한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엘리사에게 잘해줬더니만……’, 달리 말하면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잘해줬더니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의 내 소원을 들어 줬구나.’ 이렇게 착각을 한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주님 살아계시는 것이 맞다.’ 이렇게 스스로 위로했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문제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평소에 엘리사에게 잘해주니까 내가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과연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따져보지도 않았어요. 귀한 자식 줬으니 그것은 복이라 여겼지요. 그러고 난 뒤에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로 준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전에 들어올 때는 부부가 있었는데 아기를 낳음으로서 두 식구가 세 식구가 되었지요. 세 식구 중에서 생긴 아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 식구 다 죽은 거예요. 유심칩, 엘리사가 아기 생긴다고 집어넣은 것은 없는데서 하나 더 생긴 것이 아니고 지금 있다고 여긴 것 있다고 하는 그 부부, 그 부부 자체가 얼마나 이 죽은 아기와 다를 바 없이 죽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거든요.

타자 엘리사가 유심칩으로 그 가정에 아기를 싹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거기에 묻혀서 다 죽은 것으로 나오는 겁니다. 귀 쑤시개에. 들어갈 때는 깔끔하게 들어갔는데 빼보니까 아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귀청까지 묻어나오지요.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왔을 때 이것은 귀 쑤시개에요. 싹 집어넣고 딱 빼보니까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는데 예수님이 구원할 인간들은 마귀자식이에요.

더러운 악마가 집어넣은 그 유혹에 스스로 휘둘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집어넣었다가 빼내니까 몽땅 그 인간들의 모든 목숨은 목숨이 아니라 유혹거리였습니다. 그걸 버려야 되는데, 그걸 놔야 되는데 자기 목숨을 놓지를 못한 거예요. 그 죄 된 목숨이 자기를 지옥으로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십자가에 묻혀 있는 자기백성의 죄는 뭐냐 하면, 그동안 나 하나 건사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평생을 통해서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하고, 애써서 이만큼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현재 자기의 모습은 값없음이 아니고 항상 기억나는 것은 값있음, 내 수고와 값으로 거기에 듬뿍 담겨 있음, 따라서 하나님이나 예수라도 나 건드리면 나는 화 냄, 왜? 나는 내가 수고한 것을 건드렸으니 용서 못함, 그렇게 되는 거예요.

수넴 여인 난리 났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을 애초에 몰랐어야 될 것을 당신이 왜 이렇게 와서……”, 열왕기하 4장에 괴로움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당신이 왜 우리에게 와서 괴로움을 주십니까?” 엘리사는 이야기합니다. “네가 너보고 괴롭다고 할 권한이 있느냐? 네 인생을 가지고 험하고 괴롭다고 말하는 그 평가할 수 있는 눈은 그게 잘못된 것이 아니야? 잘못된 것 보고 그걸 보호하고 변호하는 그 심보는 대체 무슨 심보냐?” 그 말이지요.

처음부터 무기물에서 무기물로, 죄의 권세로서 흙이 되고 철이 되고 쇠붙이가 될 수밖에 없는 몸을 줬건만 마치 우리 몸을 가지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너는 문제없느냐는 그 말이지요. “내가 너를 찾아간 이유가 뭔데? 네 소원이나 들어주려고 찾아간 줄 알아?”

바로 엘리사에게는 하나님의 예언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말씀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다시 엘리사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수넴 여인 가정 부부에요. 두 명. 그 바깥에, 문밖에 엘리사라는 또 하나의 남자. 그러면 여기서 어떤 대칭이 생기느냐 하면, 2명이 1조가 되어 있는 그 나 라는 가정과 나 밖의 엘리사라는 타인의 가정, 이게 대칭이 돼요.

그런데 엘리사에게는 하나님의 예언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넴여인은 잘해주기는 하는데 하나님의 예언이 없어요. 자기 자신이 왜 문제인지, 나 자신이 왜 문제인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까. 이게 대칭성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푯대라 하는 것은 뭐냐? 나의 결정과 주님의 결정 사이에 항상 대칭성을 유발한다는 거예요. 이미 성령 받았기에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다 이룬 겁니다. 다 이루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의 잔재, 나의 과거, 육신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육신의 욕구가 남아 있어요. 욕망이 남아 있다고요.

남에게 욕 들어먹기 싫은 욕망이 남아 있다고요. 이 욕망에 대해서 광물을 둘로 쪼개면 광물 쪼갠 면에서 새로운 각이 생기고 면이 생겨요. 대칭면이 생기잖아요. 그렇게 주님께서는 쪼개버립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쪼개버리면 하나는 가해자가 되고 하나는 피해자가 되지요.

십자가 이 자체가 주님의 선택하심과 일방적으로 구원하심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이에요. 이 결정이 사도바울의 남은 인생을 통해서 계속해서 수시로 주입돼요. ‘나는 이제 주님의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주님과 살고 싶어.’라고 하는 순간 또다시 성령이 와서 이걸 쪼개버립니다.

쪼개버리면 내가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나 자신과 그리고 아직도 이 육신을 가지고 해야 될 일이 남아 있는 주님의 일 사이에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어요. 누가? 우리 자신이. ‘아, 구원받았다는 이것이 우상이구나. 내가 천당 간다는 이것이 나의 또 하나의 유혹거리가 되었구나. 내가 구원받았다고 까불거리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피해를 입히는 나의 교만이었구나. 옛날 습성이구나.’

나는 내 것으로 자족하고 만족하고자 하는 이것이 주님보시기에 십자가를 유발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무기물의 특징 광물의 특징이 그래요. 쪼개면 절단면이 나오고 절단면은 새로운 대칭면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과거라고 여겼던 그것이 과거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과거가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곧 다시 과거가 되어야 할 텐데 우리는 구원받은 현재를 계속 가져가려고 합니다.

성령이 와서 그걸 쪼개버리면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나의 자의식이 또 하나의 새로운 과거로서 주님이 준비한 미래와 대칭을 보여줍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어떤 경우라도 나의구원을 내가 소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의 구원은 타자의 소유지 구원받은 나의 소유가 될 수 없어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오신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구원의 절차와 경로와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어떤 경륜을 밟았는지 무기물 될 수밖 없는 우리 자신을 가지고 철저하게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부활과 재림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남아 있는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활용도입니다. 우리의 용도에요.

1이 2가 되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타자가 주도권을 쥐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해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그게 그런가, 하고 계신데요. 열왕기상 21장의 예를 들면, 자꾸 구약을 예로 드는 이유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구약을 하나의 유기체로 봐서, 하나님께서 구약을 유심칩으로 삼아서 신약의 성도 안에다 구약전체를 다 집어넣어요.

집어넣는데 열왕기상 21장 19절, 거기 볼 건데 그 앞의 내용을 먼저 보게 되면, 나봇이 있는데 이 사람은 포도농사 짓는 사람이고 포도원이 있어요. 그 포도원을 아합이라는 절대자 왕이 탐을 내서 그걸 차지하고자 했습니다. 나봇은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상속분이기 때문에 내가 내 맘대로 처리 못합니다.” 하니까 아합 왕이 “하나님이고 뭐고 내가 달라고 하면 주는 것이지 말이 많아.”

그래서 안 내놨기 때문에 아합왕이 나봇이라는 사람을 죽입니다. 죽이고 난 뒤에 엘리야가 예언을 받는 장면입니다. 19절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해서 예언을 해버려요.

나봇이라는 포도원 주인의 말이 맞아요. “이 포도원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내 것 건드리면 주님이 가만있지 않는다.”는 말이 맞아요. 그러나 아합은 개무시 했지요. 눈에 안보이니까.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자기하고 멀리 떨어진 타인이기 때문에 내 안의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나봇은 자기 안의 하나님이에요.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내 안의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 위해서 너는 나에게 이미 선택해서 구원되기로 결정된 내 것이라, 해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침투한 거예요.

구약에서는 말씀이, 신약에서는 성령이 찾아온 겁니다. 이 예언한 대로 그들은 나중에 열왕기하 9장 25절 26절에 보게 되면,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개들이 핥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고 실제로 이루어진 거예요.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유심칩처럼 이미 성도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십자가의 피가 너의 죄를 용서하리라, 십자가의 피가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게 하리라, 라는 예언이 이미 우리 안에 유심칩처럼 들어 있어 버리면 그 말씀은 내가 스스로 나를 살리고자 하는 나와 싸우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 점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니다. 이미 심겨진 나의 예언의 말씀, 성취의 말씀이 너로 하여금 구원케 한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제가 알아서 잘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예수 잘 믿겠습니다. 하나님 잘 믿겠습니다.” “아니야. 그것은 아니야. 지금 네가 오해하고 있어. 너는 아직도 네가 유혹거리야.”

주님께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처음 자리, 최초의 자리를 보게 하는 거예요. 뭐냐? 주님에 대한 가해자의 자리. 얼마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련을 갖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그 지킴이 주의 말씀에 대해서, 네 뜻과 주님의 뜻이 어떻게 충돌되는가를 네가 충분하게 체험하라 그 말입니다.

내가 내 식대로 구원받겠다는 그 고집과 주께서 값없이 너를 구원하겠다는 그 고집이 충돌되는 그 지점이 우리의 하루하루의 일과입니다. “주님, 코로나 있으면 나는 교회도 못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교회 나와서 구원 받냐? 네가 아직도 그런 생각하고 있느냐? 구원은 네가 너에게 뭔가 행동을 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푯대가 뭐냐 하면, “일체 모든 것은 주님의 결정 때문입니다. 주님이 선택해서 이렇게 살았습니다.”라는 것이 뚜렷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 푯대가. 그 푯대가 계속해서 미리 우리에게 쳐들어와서 우리에게 대칭면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 주님의 선택이 객관적인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에 우리는 가해자, 주모자, 주님을 힘들게 했던 가해자로서 우리가 들통 나게 만들지요. 매일같이.

이게 성도의 샘플입니다. 성도의 샘플이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이루었다 함이 아니다.” 내가 모든 것을 소유로 가진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생각한 내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을 쥐고, 성령을 쥐고, 예수님 쥐고, 그래서 나는 내가 소유한 이 예수님으로 구원받는다는 이것은 하나님이 생각하지 않은 구원이에요.

이것은 내가 내 식대로 내 인생을 살리겠다는 악마적인 본성의 발휘에 불과합니다. 여호수아 6장 26절에 보게 되면, 여리고성을 함락하면서 이런 예언을 했어요.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둘째 아들)를 잃으리라 하였더라”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예언한 것이 열왕기상 16장 3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게 옛날이야기일까요? 옛날 한때의 이야기일까요?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유심칩으로서 우리 안에 이미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이 결정하고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하신 그 작정의 힘이 우리가 구원받고자 애쓰는 힘을 이깁니다. 우리가 애쓰는 것은 내가 값을 치르는 것이지만 주께서 주시는 것은 값없이 마음껏 마셔라 생명수를 마음껏, 그 ‘값없이’를 ‘값없이’ 답게 기뻐하려면 그 값있게 살아가는 악마적인 천성, 이것을 날마다 부정해야 돼요.

나는 환경 탓하고, 누구 탓하고, 다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남 탓이고, 하나님 탓이고 이래저래 불평 많고, 불만 많고,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면 코로나 탓이고, 이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내일 되면 또 벌어져요. 모레 되면 또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날마다 반복시키지요. 되풀이시킵니다. 계속해서. 아까는 예언이 그렇게 했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성령을 통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처음자리를 보게 하지요. 우리 자신의 처음자리. 우리의 처음자리는 바로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한 욕망, 욕구, 그것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십자가도 없고, 부활도 없고, 재림도 없으면서, 예수님도 없으면서 잘난 체 하는 그 자리로 성령께서 데려갑니다.

늘 맛보게 해요. 맛보게 하면서 동원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김 집사, 최 집사 같은 사람들, 이웃들, 그리고 내 식구들, 나를 화나게 하는 모든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주관자들. 권력 잡은 자들. 뉴스에 나오는 그 권력자들, 국회의원들, 서울시장, 이 모든 자들. 전부 다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어요.

‘왜 세상은 내가 소박하게 착하게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왜 세상은 나를 안 도와주는가? 내가 하나님 잘 믿어보려고 하는데 왜 안 도와줘?’ 다시 나 혼자 있는 그 상황으로 성령은 나를 데려갑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데 빈말이지 나는 나 혼자 밖에 없어. 내 안에 아무도 없어. 내 안에 나만 있어.’

이걸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내가 혼자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누가 나를 지켜줘? 나 밖에, 나 밖에, 나 외에 누가 나를 지켜줘? 천당 가는 것,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나라.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착하고 바르게 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그것은 붙들고 있어야지. 그것 놓치면 나는 희망 없어. 정말 그것마저 없으면 너는 희망 없는 거야. 그거 계속 쌓자. 계속 그거 모으자.’ 이게 바로환상입니다.

이게 우리가 나의 감출 수 없는 나의 본심이 확 드러난 겁니다. 성령께서는 그리로 데려갑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너를 구원하는지를, 그 경로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부터 다시 밟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 자기 잘남 이것을 뚜렷하게 매일같이 보여주는 그런 경우들을 일으킵니다.

복음 아는 은혜, 감사, 다 날려버리고 모든 것에 분노와 화냄만이 남아 있는 내 모습. 그것은 복음 말고, 말씀 말고, 모든 것이 유혹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요. 끝으로 마태복음 12장 성령이 하시는 일을 보겠습니다. 예언입니다. 아까 여리고성 이야기도 예언이었지요. 나봇의 포도원 건드리면 하나님이 죽인다는 그것도 예언이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이 뭐냐? 마태복음 12장 31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 용서함을 얻는다. 그러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예언입니다. 이미 결정한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하게 변경 안 됩니다.

성령을 훼손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데 32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용서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마지막 어려운 것이니 여러분, 잘 들으셔야 돼요.

주님께서 지옥 갈 사람을 어떻게 지옥 보내느냐, 하면 모르게 해놓고, 몰랐다고 주님께서 때려버립니다. 이 불합리화를 여러분들이 이겨내야 돼요. 성령을 안줬다는 말은, 계속해서 타자가, 1이 1로 살게 하고 2가 못 들오는 거예요. 성령이 안 들어왔다는 말은 주님이 안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태어난 채로 혼자 살아가요. 혼자 살아가놓고 “왜 너는 나를 믿지 않는 죄를 범했느냐?”라고 해서 지옥 불에 집어넣습니다. 이게 얼마나 불합리해요? 사람에게 어떤 기회는 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없어요.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둘 중 잘 골라라. 잘 골라야 돼.” 이런 뽑기 하는 기회는 줘야 되지 않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기회가 없어요.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사람만 구원합니다. 그 샘플이 사도바울이에요. 참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예수님의 자기 취지를 제자들에게 설명을 해주셨지요. 못 알아들었어요.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못 알아들었어요. 성령이 오지 않았기에 못 알아들었어요. 사람들에게 말해줘도 역시 못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언제 알아들었느냐 하면, 오순절 날 성령이 오니까 아, 제자들이 무릎을 쳤습니다. 지금 내 일이라는 게, 나에게는 내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부 다 주님의 자신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사랑받을 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한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감 잡은 거예요.

‘아, 이거구나. 이거였구나. 주님의 십자가, 이게 나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철저하게 내 문제, 내 인생, 내 미래,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구나.’ 그리고 그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 보편적인 상황이에요.

여러분이 생각해보세요. 축구장 관중석에서 파도타기 할 때 자기 하나 쏙 빠질 수가 있습니까? 보통 용기 없으면 그러지 못해요. 파도타기 하게 되면 도시락 까먹다가도 옆에서 우우우우우~~, 하면 같이 어깨동무하고 파도 타야 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의 몸은 죄한테 담보 잡힌 거예요. 마귀의 것이에요 남들이 시키는 대로 대충 따라하게 되면, 그게 넓은 길인데, ‘대충 따라가면 나중에 좋은 일 있겠지.’ 그냥 대충 따라가요. 왜냐하면 너도 1이고 나도 1이기 때문에. 세상이라 하는 것은 1과 1이 적당하게 거리를 띄우고 좋게, 좋게 지내자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 안에 일방적으로 쳐들어와버렸습니다. 쳐들어오니까 여기서 우리는 강렬하게 반발합니다. ‘내가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뭔데 들어오느냐? 여기는 나의 구역이야. 그런데 타자인 남이 왜 들어와?’

그런데 이미 들어왔거든요. 들어왔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핍박의 속성이 여과 없이 주님 앞에서 다 드러납니다. ‘주님이여, 나는 잘해보려고 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나는 얼마든지 착하고 바르게 살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고맙지만 십자가 위주로 갈 생각이 나는 없습니다. 십자가도 좋고 나의 착함도 괜찮고,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사이좋게 그렇게 갑시다.’라는 식으로 계속 대들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를 유발시킨 가해자의 본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본심을 겪고 난 뒤에 갈등을 늘 겪으면서 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는 달려간다.”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의 최종결정 난 그것이 지금 나에게 힘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10절에 보면 부활의 권능이라고 되어 있어요. 부활의 힘이 나밖에 모르는, 나를 고집하고 나를 지키려는 그 악마의 힘을 더 센 힘으로 나로 하여금 지적질 해주시는 그게 성령의 일이에요.

지적질 해주시면서 “네 자리가 바로 이 자리였었다. 그런 자리를 주께서는 너를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까지 너를 이끌어줬다.” 그걸 매일같이 반복하게 하심으로 이제부터는 바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권능, 십자가의 부활의 힘, 그게 지금 1이 아니라 2로 나하고 같이 있음을 증거 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나 구원받은 것을 챙길 생각하지 마시고요. 늘 주님 앞에 얻어터질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매일의 주시는 환경가지고 불만과 불평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신앙생활 좀 해보려고 했는데 모든 요소가 나의 신앙을 방해하는 요소고 따라서 나의 잘남과 나의 훌륭함이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 더러운 세상, 그게 바로 우리가 떠나야 될 이 지옥 같은 세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우리가 무슨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나님 앞에 신앙 좋다고 되지도 않는 자랑거리 늘어놓으려고 살았습니까? 하나님이여, 저희들을 맨 처음 자리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 십자가 돌을 던지고 주님 앞에 죽어라, 하고 외쳤던 그 목소리 속에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우리가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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