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령의 공기층

아빠와 함께 2020. 8. 10. 07:01

성령의 공기층 

2020년 8월 9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3:15-16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온전한 자’라는 하나님쪽의 평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한평생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 뻔한데 그 전에 ‘너는 내가 보기에 온전한 자야’라는 평을 듣는다면 너무 신나는 일일 것입니다. 이 온전함에 대해서 사도바울에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긴 자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주도권을 하나님께서 넘겨서 온전한 자라는 평을 받은 그런 자’를 내가 소지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온전함’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마지막 주도권은 본인 ‘나’를 떠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 넘겨야 하는데 다 넘겼는지 아니넘겼는지를 내가 최종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대목에서 ‘온전한 자’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봅시다. 고린도전서 2:6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즉 이미 온전한 자들에게만 말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세상 지혜의 유입으로 온전한 자라는 평가를 하나님에게 들을 수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불로서 사그리 멸망의 대상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즉 세상 지혜 안에는 자해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은 온전한 자라는 평을 받는 지혜에 대해서 계속 언급합니다. 자꾸만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왜 사도가 선뜻 지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가 하면, 세상 지혜가 계속해서 참된 지혜를 훼방하고 있는 이 현실상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드디어 말합니다. 지혜가 무엇인지.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에 비밀로서 감추어놓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이 와서 성도에게 운송해주어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지혜를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영이 먼저 있고 인간이 있다’입니다.

즉 ‘십자가가 먼저 있고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 지혜를 바꿉니다. ‘사람이 먼저 있고 지혜가 있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뒤, 선악 지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목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미 인간은 선악을 아는 과실을 따먹은 것 자체로서 위반했건만 선악 지식으로 그 위반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에 ‘너는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단언을 무시하고 본인을 시작점으로 세워놓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나’라는 것은 타인이 등장했을 때 허급지금 구성되는 겁니다. 홀로 있을 때는 나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않다가 타인이 방금하게 되면 자기 추스르에 급급합니다.

그렇다면 타인이 없을 때는 타인은 무엇인가? 바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타인으로 삼아버립니다. 즉 내가 나에게 목표를 제시하는 겁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내가 다스리고 관리합니다. 그 거울이 비친 나는 선악지식에 의해서 나의 이상형으로 만들어져야 될 나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를 닦달냅니다. 나를 책망하고 내가 나에게 책임을 묻게 됩니다.

“너라는 나는 왜 내가 원하는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느냐?”고 날마다 나무라게 됩니다. 너는 왜 나를 98세까지 건강하게 살지 못하게 하느냐고 꾸중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은 여전히 나에게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가 마치 산자처럼 흉내를 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내 인생을 압박을 주게 됩니다.

마치 치과에서 행하는 신경치료와 같습니다. 아픈 이의 뚜껑을 열고 이미 죽어버린 신경에서 내뿜는 독한 가스를 방출합니다. 그리고 난 뒤, 좋은 가스를 내는 물질로 채운 뒤 다시 봉합니다. 신경이 죽으면서 내뿜은 독한 가스가 방출할 곳이 없으면 자꾸만 잇몸이나 내부적으로 압박을 줍니다.

즉 산다는 것이 이래서 힘듭니다. 악마가 우리 자신을 시작점으로 내세우면 압박을 가합니다. “사람이 떡이 있어야 산다. 그래야 네가 살아”하는 식으로 악마가 독촉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을 ‘악마의 자존심’으로 사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도가 죽었음을 선언했습니다.

골로새서 3:3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말입니다. 성도 또한 육신을 갖고 있기에 이미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먼저고 성도의 육신은 나중입니다. 성도의 육신은 ‘언약의 작용체’입니다. 성도 안에는 성령이 만든 공간이 있습니다.

일종의 빈 공간이며 틈입니다. 사람들의 관찰이나 해석이나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종의 땅과 하늘의 완충지역입니다. 그곳에서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획된 뜻과 개념이 마치 시리얼처럼 우유 수면 위를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 공간은 시간의 흐름이 무의한 곳입니다.

이로 인하여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이상형이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이래도 내일은 어떻게 변할 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이나 사도들처럼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는 행위가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지 자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고체들이며 관찰하며 돌을 던져 스데반 집사의 입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죽었던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 진정 살아있습니다. 그렇다면 돌 던진 자들이 죽은 자들입니다. 고체들이 하는 짓은 기껏 자기들끼리 게임하는 겁니다. 악마의 자존심으로 무장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은 ‘이미 죽었고’를 성도를 통해서 알려내십니다.

요한복음 5:28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에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심판에 모여 그의 판결을 들어야 될 처지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사실을 미리 접한 자입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 지혜가 탑재되어 있는 자들은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온전한 자’입니다. 성도는 유일한 고체인 예수님이 뿜어내는 가스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인하여 십자가 복음이 가리워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빌 3장 15-16절(성령의 공기층)2008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5-16절입니다. 신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15-16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온전히 이룬자’가 성경에 단어로 등장하니까 우리의 목표가 되고 말았지요. 하나의 모델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히 이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 엄연히 영광스럽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온전히 이룬자가 어떤자냐? 15절 1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①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긴자. 이게 온전히 이룬자입니다.

온전히 이룬자라는 것을,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는 그 사실을 내가 소유해버리면 주도권은 여전히 내가 갖고 있겠지요. 온전히 이룬자라 하는 것은 주도권이 전에는 내게 있어서 내가 내 인생을 가꿔나가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주도권, 모든 것이 하나님께 넘겨져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 대해서 온전히 이룬자라는 칭호를 내려주십니다.

온전히 이룬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온전히 이룬자의 특징은 뭐냐? ②고정성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다. 아, 난 그 정도 되면 괜찮아.’라는 것이 내일되면 또 바뀌어요. 한 달 뒤면 또 바뀌고. 그래서 온전히 이루었다는 그 모델, 이미지, 그 모델을, 만약에 내가 온전히 이룬다는 그 목표치를 내가 달성했다면 그 온전히 이룬 것은 고정적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주도권이 하나님보시기에 나한테 있기 때문에 흔들어버리지요. 온전히 이룬자는 자기 자신의 온전함을 계속 우기지 않고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매일치로 주시는, 그 다음날 주시는, 또 몇 달 뒤에 주시는 그 ③변화에 대해서 이상스럽게 여기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제도 온전했고, 오늘도 온전이고, 또 내일되면 내일도 온전이고. 왜? 주도권을 가진 주님께서 온전케 하시고 있는 결과로서의 나기 때문에 어떤 나가 된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주께서 온전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온전함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으면 만약에 며칠 뒤에 내가 생각하지 않은 내가 된다면 우리는 실망스러울 거예요. 본인에게 굉장히 실망스러울 겁니다.

‘내가 이런 짓을 다하다니. 이래도 내가 구원받겠는가?’ 하는 의심이 확 다가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갖고 논 겁니다. 온전하다, 하는 이 내용이 고린도전서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에 보면 그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 온전함에 대한 단어 뒤에 이것이 온전하다고 설명이 죽 나와 있는데 그것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워요.

고린도전서 2장 6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온전한 자만 들어라. ‘온전해야지. 난 온전 할거야. 미흡함을 채워서 마저 온전해야지.’ 하는 사람은 듣지 마세요. 온전한 사람만 들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지부동 온전한 사람만 들으세요. 더 이상 남아 있는 게 없는 사람만 들으세요.”라고 하면서 지혜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뭐냐?

지혜가 그 사람을 장악할 때 그 사람은 온전함이 되고 그 사람은 지혜가 부리는 대로, 사용하는 대로 어딜 가도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는 사람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 지혜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지혜가 뭐냐? 지혜를 이야기할 때 이것은 ‘아니요’ 라는 말부터 시작해요.

“이것은 지혜가 아니요.” 즉 “온전한 사람을 온전한 사람 되게 하는 지혜는 이런 지혜가 들어 있으면 그것은 아닙니다.”라고 사도바울이 운을 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상철학입니다. 세상지혜에요. “세상에서 들었던 풍월가지고 나를 꽉꽉 채우는 그런 사람은 온전하기를 시도하는 것은 이해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온전한 것은 ④세상지혜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것부터 시작을 하는 거지요.

이 말은 진짜 온전한 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그 지혜에 대해서 세상 지혜가 방해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어요. 세상지혜가 온전한 것을 가리고 방해한다. 고린도전서 2장 6절에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깊이 있는 사람은 이것이 파악이 되는데, 이 세상의 없어질 지혜가 아니다. 진짜 하나님의 온전케 하는 지혜는 세상 지혜가 아니고, 없어질 지혜도 아니라는 말을 통해서 어떤 뉘앙스까지 같이 알아야 되느냐? ‘아,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구나.’

베드로후서 3장 7절에 보면, 세상은 불로서 멸망하게 되어 있어요.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세상은 어떤 원리, 거부할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원리에 쫓기고 있는데 이 지구가 폭발한다는 겁니다. 유황불에 의해서 완전히. 전에는 물로 심판했는데 그 것은 여전히 봐주는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때는 물이 아니고 불로 한다는 것은 봐주는 여지가 없이 최종적 심판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는 어떤 원리가 있느냐? 망해야 되는 원리가 계속해서 이 세상에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을 예수를 통해서 미리 알았지요. 세상 사람들의 모든 지혜가 합류해 보니까 “하나님 죽여라”라고 나온 거예요. 이게 십자가거든요.

세상이 알고 있는 모든 지혜를 총 집합하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하고, 하나님은 죽어야 마땅한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모든 의견이 종결되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혜의 끝은 어디냐? “하나님 죽여라. 하나님 없애버리고 우리 인간들끼리 살자.” 그런 지혜로 종결하는 겁니다.

그런 지혜라도 없으면 밥 못 먹고 살지요. 그것 때문에 학교라도 다니니까. 모든 학문, 철학, 과학, 인문, 자연과학, 모두가 하나님을 없는 존재로 여기고 우리끼리 힘 모아서 살자, 로 이게 종결돼요. 그래서 이 시대는 종교를 없애버리고 사회적 약자를 앞장세워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왜 사회적 약자를 앞장세워서 새로운 종교 인간을 위한 인간종교를 만들려고 하느냐? 그게 객관적으로 파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온전케 하는 지혜는 이미 세상지혜에 완전히 몸에 배어 있는 사람한테는 관찰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지혜에요. 이 세상에 없는 지혜거든요.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세상 지혜로 중무장되어 있고, 중무장 되어 있는 입장에서 이 세상에 없는 지혜에 대해서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비밀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오직 이 지혜는 비밀이다.” 다시 말씀드려서 ⑤“비밀한 지혜가 네 안에 장착되어 있는 사람은 어디 가서 뭘 하든지, 어떻게 네가 변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너를 온전한 자로 칭할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너 때문이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지혜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지혜가 탐나지 않습니까? 그 지혜가 뭐냐? 또 죽 설명해요. 자꾸 뜸을 들이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자꾸 뜸을 들이면서 지혜가 뭔지를 바로 이야기하면 될 텐데 아니다, 아니다, 를 계속 합니다. 이 지혜에 대해서 9절에 보면, 이 지혜는 사람이 눈으로 보지 못한 지혜고, 귀로도 듣지 못한 지혜고, 사람이 마음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지혜다.

“뜸들이지 말고 그냥 이야기하세요. 지혜가 뭡니까?” 아니오, 아니오, 라고 나열시키지 말고 딱 집어서 이거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가운데 제일 깊숙한 금고 이것은 하나님이지만 ⑥가장 들키지 않는 은밀한 곳에 두었던 그 지혜,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도 찾아들어갈 수 없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속에 있는 십자가가 어떻게 밖으로 나왔느냐? 그것은 ⑦성령만이 운반해줘요. 그 뒤에 11절 12절에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만이 십자가를 운반해준다고 나오는데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쉽게 고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사람이 있다. 이렇게 하면 아주 깔끔해요. 인간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⑦하나님의영이 먼저 있고, 하나님의 은밀한 비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인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인간 좋으라고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가 먼저 있고, 그 지혜가 어떤 내용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이 둘로 쪼개져서 하나는 성도고, 하나는 성도 아닌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난 지혜가 고체로 나타났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또는 지혜가 육신이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사람은 고체거든요. 보이지 않는 영이니까 영이 고체가 되었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고체라는 말을 써서 쉽게 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지난 수요일에 제 설교 동영상을 본 사람은 제가 천하에 맥이 빠져서,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말에 힘도 없고 목소리가 갈라져서 원래도 좋지도 않은 발음인데 그마저 그렇게 되었지요. 멀리 사는 제 딸에게서 어디 아프냐고 연락이 왔었어요. 예, 아팠어요.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은 겁니다.

이가 너무 아파서 신경치료를 받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오늘 본문과 너무 의미심장해서 아, 아픈 것도 주의 뜻이구나, 알았습니다. 의사가 설명합니다. 인간신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 치아인데 처음에 에나멜부분이 있고, 그 다음에 상아질이 있고, 그 다음에 치주가 있다는 거예요. 모자 안에 작은 모자 있고 그 작은 모자 안에 더 작은 모자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경치료가 뭐냐 하면, 치아의 뚜껑을 열어요. 치아의 제일 강한 부분인 에나멜을 갈아서 그 뚜껑을 열어버립니다. 그 안에 신경이 죽어 있으니까 신경이 죽으면 거기서 나쁜 기체가 나오는데 그 기체가 에나멜 때문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있으니까 음식 씹을 때마다 압력을 받아서 그렇게 아픈 거예요.

그 뚜껑을 열고 그 썩은 신경의 기체를 뽑아내줘야 되는 겁니다. 뽑아내주고 긁어내줘야 되고, 그 다음에 다른 물질을 집어넣어서 거기에 괜찮은 기체가 나올 수 있도록 하고, 다시 뚜껑 덮고. 그게 신경치료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뭐냐? 원래 처음 창조할 때는 인간의 몸이 있는데 그 안에 마귀가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영이 들어온 거예요. 기체가 들어온 거예요. 기체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다.” 계속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이 세상 혼자 삽니까? 떡은 가만있으면 주는 겁니까?

으로 살아야 된다고 속에서 압력은 가하지요. 취직하고 돈 벌 데는 막연하지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있지요. 어쩌라고? 압력은 가하는데 몸은 피곤하지요. 나이는 먹지요. 죽도록 돈 벌어줘도 가족에게 좋은 소리도 못 듣지요. “애걔? 이거냐?” 이런 소리나 하고. “어디 가서 당신도 출세나 해라.” 아내는 멋도 모르고 그런 소리하고요.

출세는 두 번째 악마의시험이에요. 첫 번째, 사람은 떡으로 산다. 아내가 하는 말이 “우리가 개인가? 떡이나, 사료나 주면 살게? 나도 좀 사람답게 살자. 출세하는 가정이 되어보자.” 출세의 욕구가 또 올라와요. 스타가 되는 것. 이게 또 압력이 심해요. 기체, 썩은 가스가 또 올라온다고요.

세 번째, 악마가 “세상에, 너는 욕심도 없나? 남들은 출세하는데 너는 세상 모든 것을 가져야 될 것 아니야? 탐심도 안나나? 그러면 가져야지.” 또 탐심이라는 악한 기체가 압력을 가해요. 이 에나멜을. 그러면 하나님은 수술을 어떻게 할 거예요? 이게 신경치료 받아야 아는 거예요. 뚜껑을 잘라버립니다. 안의 내부를 공개해버려요. 공개해버리면 로마서 7장이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었다.” 내가, 나라는 인간자체가 이미 악마로부터 악마의 자존심이 나라는 고체가 되고 만 거예요. 내가 내가 아닌 정도에요. 이게 좀 어렵게 설명하면, 인간이 나라는 것을 언제 느끼는가? 타인이 내 앞에 등장할 때 비로소 나는 허겁지겁 구성이 되는 겁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나라는 것을 못 느껴요.

그러나 타인이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청소하고, 갑자기 옷 갈아입고, 그렇게 되지요. 나라는 것은 타인이 왔을 때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면서 내가 구성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타인이 오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거울 앞에 비춰보면 돼요. 거울 앞에 비춰본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이에요. 내가 거울 앞에 있는 그 내 모습이 나의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 타인은 어떤 남이냐 하면, 선악지식,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이미 선악지식을 알고 있고, 악은 버리고 선을 추구하는 유죄, 죄 있는 자가 아니라 죄 없는 자, 정당한 자로서 타인이 거울 앞에 내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그것이 나를 계속 지적질 하고 있는 겁니다. 남이, 손님이 안와도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저게 내 모습이야’라고 할 때 나는 나를 타인으로 여기는 겁니다.

남는 것은 뭐냐? 자존심이지요. 주님께서 우리보고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어요. 남을 의식해서 바르게 살아라, 이런 것을 한 적이 없어요. 주님은 그런 것을 한 적이 없어요. 왜?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넘겨갔기 때문에. 그런데 이미 악마는 바깥에 있는 선악과를 우리 안에 있는 선악과로 집어넣었어요. 선악과가 사라진 것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안에 있어서 내가 선악을 온전히 책임져야 될 책임자로 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어요. “네가 모든 지혜로 선을 추구하면 내가 구원시켜줄게.” 라는 것을 하나님이 시킨 적이 없습니다.

설교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말씀드릴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자는 인간세계에, 인간에게는 없고 하나님이 비밀하게 간직한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해서 운송해서 택배로 우리 안에 집어넣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온전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의 지혜라 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지혜를 극도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가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요일에 저에게 책이 하나 왔어요.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글 쓰시던 그 분이 쓴 책이에요. 박 윤진씨가 지은 책 이름이 <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인터넷 보면 나옵니다. 얼마나 책이 잘 팔리는지 상위 0.2프로. 그 정도로 교보문고나 큰 서점에서 잘 팔리고 있는 책이랍니다.

그 책의 내용이 뭐냐? 저는 책을 받게 되면 그냥 읽기만 하지 않고 반드시 그 요약을 해서 주신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줘요. 왜냐? 성의니까. 내가 책을 받았으면 이것은 그 사람이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거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책은 요약하면서 성의 있게 다 보고 그 저자의 의도가 뭐냐를 알아서 “나는 이렇게 이해했는데 제대로 했습니까? 그리고 내가 생각한 것은 이렇습니다.” 평가를 달아서 되돌려줘요. 물론 제 책보고 되돌려준 사람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죽 보고 제목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옥보고서. 내용은 이렇습니다. 은퇴하는 사람이 은퇴를 준비하면서 어떤 마음가짐이 되어야 되는가, 그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게 왜 지옥보고서냐? 그 책에 나오는 은퇴하는 사람들, 일반적으로 50대지요. 45세부터 은퇴를 준비해야 된다고 그 책에 보면 나와요.

그 사람들이 본인을 사람으로 간주해요. 영이 먼저 있고 사람이 있어요.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먼저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먼저 있고 그 언약의 작동체, 작동하는 그 작동체가 바로 성도라고 나타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기이한 존재에요.

여기 고린도전서에 보면 기이하다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오직 비밀한 것이라고 되어 있고 고린도전서 2장13-15절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⑧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런 신령한 사람은 특이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지혜가 박혀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에요. 전에 여러 번 예를 들었습니다만 인형의 예가 있잖아요. ⑨인형인데 눌러보면 “알라뷰!(I love yoy) 알라뷰!” 이러지요. 같은 사람인데 누르면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가 나오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이상한 사람이에요. 주님의 감추어진 비밀이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누르면 십자가 십자가가 나와요.

그런데 <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는 책에서는 어떤 구석에서도 십자가가 나오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본인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인간성이라는 것은 고체거든요. 고체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돼요. 인간성이라는 것은. 왜냐하면 진짜 인간은 언약에 의해서 완전한 인간이어야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성이 나쁘다는 것은 인간보고 하면 안돼요. 인간성 좋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 이건 지옥보고서인데 거기서 나오는 몸부림은 마치 좀비들의 몸부림, 저항, 그걸 느끼는 거예요. 이미 본인이 죽었는데 시체인데 시체가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있어서 박 윤진이라는 이 저자는 그런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버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돈 버는 방법이 뭐냐 하면, 돈 벌어 줄까, 돈 내면, 돈 버는 기술을 알려줄게, 라고 하면서 희망도 없는 것을 희망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희망을 주고서는 박 윤진 이 저자는 책 내고 돈 버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 나부터, 나는 인간이다, 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해답이 없는 거예요. 다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의암댐이 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 댐 안에 인공으로 만든 수초섬이 떠내려간다는 정보를 받고 공무원이 먼저 알고, 그 다음에 위탁받은 업체에게 신고하고, 그 다음에 경찰 배까지 출동했거든요.

cctv 보게 되면 배들이 세 채 다 침몰해요. 댐이 있는데 댐 너머로 가지는 못해요. 의암댐은 대부분의 물은 가둬놓고 방류해야 될 물을 한구석으로 내보내는 식이니까 그 안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는 거예요. 위에서 내려오는 속도는 있지, 방류량은 그에 비해 적지, 그래서 그 소용돌이에 배 세척이 다 침몰한 거예요.

제가 그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거기서 죽은 자들이 구멍조끼를 입었다는 사실이에요. 살려고. 천당 가려고 교회 나온 사람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천당 가려고 교회 나와서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전부 다 지옥 간 거예요. 내가 살려고 십자가 믿고, 내가 살려고 하나님 믿은 거예요. 그것은 여지없이 죽은 겁니다.

세례요한 같으면 이랬을 거예요. 도끼로 아주 아작을 냈을 겁니다. 인간도 아닌 게 자꾸 왜 인간이라고 우기느냐? 처음부터 뭔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 소용돌이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3장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주도권이 하나님께 가 있어요. 16절에 ⑩“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주도권이 하나님께 가 있습니다. 이건 뭐냐? 주께서 이 땅의 육신을 입은 한 인간은 소용돌이치는 거예요. 소용돌이치면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뭘 주느냐 하면, 그 깊이 있는 십자가의 지혜를 주는 겁니다. 아까 가스 이야기했지요. 신경치료의 그 가스 긁어내고 새 가스 집어넣고 하면서 그 물질이 액체인데 고체로 바뀌게 돼요.

지금 50대 직장인들은 고체지만 직장에 가게 되면 액체가 됩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세상 흘러가는 대로 같이 흘러가야 돼요. 마치 그릇이 있는데 그릇에 물을 담은 채 차를 운전하게 되면 차가 흔들리는 대로 물그릇의 물도 같이 흔들리듯이 가정에서는 모르지만 직장에 오게 되면 자기 자아를 버려야 돼요.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 직장이 고체가 되고 자기는 그 고체가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야 돼요.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돼요. 액체가 된다고요. 그것도 45세가 되면 나가야 되지만.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지금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그 다음에 뭐냐? 기체로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⑪하나님과 자아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듭니다. 공기층을 만들어요. 그 공기층 안에 있는 개념은 지상에 없던 개념, 이 세상에 없는 지혜거든요. 따라서 태초의 뜻과 개념이 그 공기층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틈입니다. 비어있는 거예요. 그 비어있는 개념은 인간으로서 관찰되지 않고, 인간으로서는 해석되지 않고, 인간으로서는 선택될 수 없는 뜻과 개념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소유할 수 없는 거예요. 소유권은 주님께 가 있는 완충지대가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해서 뼈와 뼈 사이에 연골이 있지요. 완충지대, 연골, 치약 같은 것, 부드러운 것, 거기에다 완충지대를 집어넣게 되면 그 완충지대에 나타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이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예정하신 뜻이 성도 안에 자아와……, 모든 인간은 남 욕할 것 없어요. 우리도 악마의 자존심으로 중무장되어 있어요. 자아는 못 고쳐요. 뚜껑 열면 썩어빠졌어요.

⑪그 썩어빠진 나, 자아,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나와 하나님사이에 완충지대가 성령을 통해서 택배로 전달이 되게 되면 거기는 마치 시리얼 같아요. 시리얼, 우유에다 타는 것 있잖아요. 시리얼 알맹이가 들락날락 수면에서 밑으로 빠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빠졌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계속해서 유동하는데 이 유동의 특징이 뭐냐? 시간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⑫16절에, 네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15절에,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이것은 과거에 한 것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이 계속 시리얼 알맹이처럼 우리 안에 공백, 완충지대, 성령이 함께 하는 그 안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이걸 말로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사도행전, 그 전체는 아니고 대략 보겠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나오지요. 설교 시간이니까 그냥 속으로만 답변하세요. 스데반 집사가 죽었습니까, 돌 던지는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답변은, 돌 던지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지요. 왜냐하면, 스데반집사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돌에 맞는 스데반 집사, 사람들이 스데반집사에게 돌을 던질 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고체입니다.

스데반집사가 지금 설교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요. 관찰되지요. 해석되지요. 내가 돌을 던질까 말까를 본인들이 선택하지요. 그렇게 선택해서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마음으로 스데반집사를 죽였습니다. 죽였는데 그 다음이야기는 스데반집사가 예수님 만나서 함께 있으면서 스데반집사가 하는 말이,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모르니까 용서해 달라, 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런 거예요. 완충지대라는 것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관찰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전혀 달리 보이는 거예요. 또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앉은뱅이를 베드로가 요한이 낫게 하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고체가 앉은뱅이라는 고체를 무슨 기적인지 모르지만 기적으로 낫게 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럴 때 믿음이 있어서 낫게 된 앉은뱅이가 앉은뱅이입니까, 멀쩡하게 생겨서 앉은뱅이를 보고 앉은뱅이라고 한 그 들이 앉은뱅이라 할까요, 할 때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앉은뱅이가 되는 거예요. 뭐 그런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하셨다, 그런 이야기가 사도행전 3장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을 했는데 헌금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여버렸어요. “땅 팔고는 왜 성령을 속이고 다 안 바치고 반만 냈느냐?” 그러니까 전에 수련회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헌금해놓고 죽어버렸어요. 헌금 안했으면 안 죽었을 것인데.

아나니아 삽비라는 헌금을 하면서, 고체인 내가 내 마음의 결심 선택에 의해서 헌금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죽을 일인 것을 본인이 몰랐던 겁니다. 그런 세계를 몰랐던 거예요. 남들 헌금하면 칭찬하니까 자기도 헌금하면 칭찬 받을 줄로 알았지요. 헌금하는 내가 지금 죽은 채로 헌금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영이 먼저 있고 인간이 있는 겁니다. ⑬내가 먼저 있고 나 구원받으라고 영이 오는 것이 아니고. 은밀히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의 지혜 됨에 주도권을 두고 그 지혜가 이 땅에서 어떻게 스스로 작동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도 나에게 낯선 새로운 성도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붙잡지 마세요. 우리는 내일 되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나도 몰라요. 어떤 무슨 짓을 어디서 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는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몰라도 너는 온전하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거에요. ⑭‘어제는 이런 나가 아닌데, 오늘 나는 어제와 같은 이런 나가 아니었는데.’

아니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완충지대, 공백, 틈, 비어있는 곳, 네가 감히 관찰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어떤 틈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성령 안에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예정하시고 작정하신 그 모든 뜻을 너를 통해서 다 비춰 보이겠다는 거예요. 너는 거기에 따라서 움직여질 뿐이고.

그러면 우리는 뭐냐? 이빨 안에 있는 고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니고 그냥 기체지요. 그냥 기체. 그 기체가 세상을 본인도 모르게 압박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가 나와요. 10장에 고넬료가 나오고 베드로가 나오는데 베드로보고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을 먹으라고 했어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는 율법으로 살기 때문에 안 먹습니다.” “먹어라” “안 먹습니다.” “먹어라” “안 먹습니다.” 세 번 거부했어요. 그런데 고넬료가 나타났습니다. 이방인, 율법 없는 자, 율법 없는 자가 율법 없어도 천국 간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던 거예요.

자, 고넬료냐, 베드로냐? 어느 쪽이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십자가의 지혜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거가 될 수 있겠느냐? 그 다음에 사도행전, 많이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체포하러 갈 때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그 때 사울은 이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로 여겼어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로 전환되었습니다. 사울입니까, 아니면 바울입니까? 사울은 자기가 보는 대로 관찰했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사울은 그 순간 잠시나마 장님이 되었습니다. 비늘이 떨어지니까 전에 봤던 세상하고 떨어지고 난 후의 세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확연히 달랐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시간이 정지된 요소가 바울 안에 있었던 겁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계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요.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이 들으면 허풍 떤다, 큰 소리 친다,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게 단순히 허풍이겠습니까, 아니면 실제겠습니까? “너희가 이 땅에 있는 목숨, 잘 보이지?” “잘 보이지.” “거울 보면 보이지?” “보여.” “죽었고. 그거 죽은 거야. 죽은 거야. 죽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겁니다.

죽은 놈을 그리스도께서 지금 다루고 있는 거예요 알라뷰, 알라뷰,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십자가, 십자가,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사용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하늘에, 하늘에, 이게 계속 나오는 거예요. 나는 죽었고, 죽었고, 죽었고, 가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이 고체가 되어버리면 남는 것은 고체끼리의 생존게임만 남아요. 게임은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악바리만 남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세상 사람들, 40대, 50대, 여기 이 책, 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뭐 두렵지 않다고 하는데 그들은 지금 게임에서 남에게 안 지려는 오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가 너에게 질줄 아느냐, 그것만 남아 있어요.

그게 악마의 자존심이에요. ⑮우리는 악마의 대행체로 있는 거예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만약에 죽는다면 오늘 무슨 말을 할 겁니까? 김 정은이 죽었으면 좋겠다, 공산당이 싫어요, 그런 말만 할 거예요? 내일 죽는데 십자가가 나와야지요. 이 땅에 있는 것은 허상이라는 것이 나와야지요. 죽어 없어지는 것이 허상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받은 계시가 얼마나 큰지, 사도바울이 받은 계시가 너무 커서 탈날까 싶어서 주께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특별조치를 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남들하고 게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씨리얼 알맹이를 집어넣은 거예요. 사탄의 가시.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모든 행동은 고체가 아니고 기체에요. 고체는 뭐냐? 고체는 예수 그리스도만 고체고 사도바울은 그 고체가 뿜어내는 기체로 살아가는 겁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하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분이 고체고 주인공이고 사도바울은 그의 똘마니.

그래서 나에게 온 이 가시도 주님이 주도권을 쥐고 집어넣은 거예요. 네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네 스스로 네가 우상시할 가능성이 있어서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주의 이름 안 붙였겠습니까? 세 번 기도했는데 다 거절당했어요. 뭐라고 응답이 왔느냐 하면, “네 은혜가 내가 보기에, 예수님 보기에 주의 증인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충분하다. 네 자존심에 충분한 것이 아니고 내 자존심에 충분하다.”

여러분들도 주의 일 한다고 너무 설치지 마세요. 지금 보시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그대로. 갑자기 위로의 말이 막 나옵니다. 지금 그대로 충분해요. 필요하면 내일 되면 갑자기 무슨 일이 있을 거예요. 갑자기 수술을 해야 한다든지. 그렇게 무슨 일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것도 충분한 거예요. 온전한 거예요.

나에게 책임지우지 마세요. 내가 나에게 타인이 되어서 시달리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안 지려는 것, 그것 우울증입니다. 내가 설정한 나, 내가 생각한 내 목표에 내가 안 지려는 것, 그거 미친 거지요. 그야말로 악마의 병이에요. 내가 없는데 무슨, 왜 내가 나에게 안 지려고 해요? 내가 세운 목표에 내가 왜 안 지려고 해요?

고체니까 배운 것은 경쟁에서 안지는 것 이기는 것 그것만 배웠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겨야 나답다.’ 그것 외에는 아무 규칙을 배운 적이 없어요.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가 옥에 갇힙니다. 잠을 푹 잤다고 했지요. 언젠가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옥에 갇힌 베드로가 편합니까, 옥에 베드로를 가둔 권력자들이 편하겠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옥에 갇힌 베드로가 좋았다는 겁니다. 왜? 얼마나 잠을 잘잤는지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워요. 일어나 베드로야 해서 일어날 정도였어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을 옥에 집어넣은 간수는 벌벌 떨었어요. ‘아이고, 이제 나는 죽었다. 직장에서 잘리고 나는 이제 죽었다.’ 꼭 4, 5십대 직장생활 하는 것 같아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장 31절, 버스 정류소에 많이 붙어 있는 구절이에요. 그러고 나서 ⑯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자기가 죽 전도를 하고 나서의 결론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8장 26절에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게 제대로 된 거예요. 이게 제대로 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꾀어서, 교인 수 모아서 교회 부흥시키는 그런 것은 안중에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주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분이, 죽었다고 다 확정 난 분이 지금 살아 있어요. 어떻게 해, 어떻게.

사람이 우르르 몰려가서 다 죽였는데, 분명히 죽은 것으로 확인했는데 죽은 자가 살아 있어요. 그러면 죽인자는 뭐가 됩니까? 아까 사도행전의 원리 죽 지켜보게 되면 그러면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분이 살아 있는 거예요. 아직 안 죽고 있는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것은 답변 하나마나 아닙니까? 주님이 살아 있고 우리는 죽어 있는 거예요.

죽은 자를 왜 인테리어 꾸미고 장식을 합니까? 요한복음 5장 28절에 보면, “기이히 여기지 말라” 여기에 나오네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참 기이합니다. 성경이. 정말 육에 있는 사람은 들어도 깨닫지 못할 말입니다.

기이히 여긴다는 것을 알아요. 하나님이 아셔요. 요즘 사람들이 성경 모르고, 성경 안 읽는 것을 무슨 자랑으로 여깁니다. 현대의 이 시류가, 분위기가 그래요. 하나님마저 이겼다, 그런 뜻이겠지요. 성경이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 음성을 미리 들어라. 미리 알아라. 결국 죽게 되면 예수님의 음성을 다 듣게 되는데 죽어서 듣지 말고 살아 있을 때,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미 여기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주의 음성을 들으라.” 이 말이에요.

⑰“십자가라는 것이 있단다. 그런 게 있단다. 십자가가. 교회 지붕에 서 있는 그 십자가 말고 살아서 스스로 활동하는 십자가가 있단다. 그 십자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고, 우리 보기에는 눈에 보이는 우리가 고체고 영은 기체지만 그 반대다. 주님이 고체고 우리는 그 영이다. 기체다.”

그러니까, 기체니까 내일이면 우리가 또 어떤 인간이 될지를 우리가 모르고 또 몰라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어딜 가도 십자가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는 중이기 때문에. 세상은 망해도 망하지 않는 것이 십자가지혜라 했잖아요. 고린도전서에요.

그렇다면 망하지 않는 것이 여기에 꽂혀 있는데 나라는 인간은 오늘 죽어도 의암댐 소용돌이에 빠져 죽어도 상관없지요. 누가 비 오라고 했습니까? 경찰관들이 일부러 죽으려고 나갔습니까? 신고가 들어오니까, 인공수초 섬 떠내려간다고 하니까 그거 붙들어 매려고 갔지요. 죽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내일 죽으리라는 생각을 못합니다. 음주운전 차량이 와서 내 차 박아서 내가 죽을지 그것은 누구도 장담 못 하는 거니까 나한테 신경을 좀 뚝 끊으라, 그 말이지요. ‘미안하다 나야! 너를 90까지 못 살려서 미안해. 책임 못져서 미안해.’ 내가 나에게 책임감갖지 마시고요.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안전한 금고에 십자가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깊숙한 곳에 이미 있습니다. 구명조끼 그거 없어도 괜찮아요. 얼마나 불안했으면 구명조끼를 걸치고 교회 다니겠어요. “목사님, 어느 구절 믿으면 구원 받겠습니까?” 그런 구명조끼 말고요.

끝으로 마태복음 16장 25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예수님입니다. 포인트가 예수님이에요. “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주도권을 미리, 죽어서 주님 만나지 말고 살아 있을 때 주도권을 주님한테 넘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살아가는 게 한심스럽습니다. 안다고 아는 것이 기껏 세상 지혜요, 나만 잘났다는 지혜뿐이오니 이것 어떻게 합니까? 수술하게 하옵소서. 신경치료 받듯이 더러운 가스 뚜껑 열고 다 집어넣어서 뚜껑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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