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0611a 베드로전서4장 7절(복음의 해석)-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5절-7절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여기 나와 있는 이 스케줄 있잖아요. 사람하고 하나님이 뭐 사전에 의논한 거 없죠? 일방적으로 그냥 추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때에 인간적 입장에서는 모든 의견을 하나님께 드리면 되는 겁니다. 열차가 달릴 때 승객 입장에서 그냥 타고 있으면 되지, 기차 기관사한테 찾아가서 일부러 운전 똑바로 하라고 간섭질 하면 안 되죠. 저 뒤 객차 18호석 앉아가지고 잠자든지 책보든지 하면 되지 나설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이 스케줄은 모든 인간을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스케줄의 열차는 어디를 향하여 달리고 있느냐 하면 ‘모든 것을 심판’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라는 것이 이처럼 마지막 신약 때에, 복음을 위하여 창세기부터 구약을 거쳐서 신약까지 줄기차게 하나님께서는 멈추지 않고 질주해 온 겁니다. 심판 앞에서의 인간의 처신은 맡기는 것. 맡기는 거죠. 간단하죠? 그냥 맡기면 되잖아요. 맡긴다는 것은 모든 권한과 모든 권리가 자기한테 있겠어요, 없겠어요? 자기한테 없죠. 모든 걸 맡겼으니까. 모든 것을 맡긴 자의 자유함. 그것이 심판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죠.
모든 것을 맡기게 되게 되면 본인이 걱정할 것은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있겠어요? 모든 걸 맡겼으니까 본인이 걱정할 것은 남아있지 않죠. 없다 이 말이죠. 모든 권한을 주님께 맡겼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걱정이 있고 근심을 늘어지게 하고 있죠. 걱정, 근심한다는 것은 주님의 스케줄, 주님의 이 심판 스케줄을 못 믿겠다는 겁니다. 안 믿겠다는 거죠. 맡길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그러니까 내 인생은 맡기지 않고 내가 관리하겠다 이거에요. ‘아, 야간되면 좋던데 주간되면 좋던데.’ 이게 뭡니까? 맡기지 않는 거예요. 주간되면 하늘에 별 따겠다는 거예요, 야간하면 다 따겠다는 겁니까? 왜 계산하냐 이 말이죠. 주간이 되든 야간이 되든 그것마저 하나님의 심판의 스케줄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나한테 모든 것을 맡겼느냐 아니면 따로 네 것 챙겼느냐 지금 그걸 보시거든요. “주님께서 심판하겠다” 이 말은 무장해제하고 그냥 내 앞에서 살아. 그러니까 네가 계획하는 것이 KTX가 아니고 네가 계획하는 것이 무궁화 열차도 아니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 현실을 끌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적인, 창세기부터 구약을 거쳐서 신약까지 오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인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계획대로 다 맡겼는데 내 뜻대로 안 해주면 실망스러워서 어떻게 합니까?” 라고 걱정을 하죠. 주춤하겠죠, 주춤. 맡기고 싶은데 “아 이거 맡겨 놨더니만 영 실망스러울 때는 어떻게 합니까?” 라고 했을 때에, 여기 6절에 보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다 이 말이죠, 죽은 자에게.
그러니 복음이라 하는 것은 앞에 모든 인간을 무슨 자로 보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봐요. 주님께서 음부에 가셔서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그 죽은 자에게 전한 복음이나 지금 죽으려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복음이나 교과서와 같아요. 똑같은 복음이에요, 똑같은 복음. “내가 좀 여유 있을 때 복음 믿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여유 있을 때도 그 복음이고 여유 없을 때도 그 복음이고. 형편이 나아질 때도 복음이고 형편이 궁핍할 때도 복음이에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못 맡기는 것은 본인이 갖고 있는 그 소유와 자기가 안다는 그 재주가 이제는 얼추 본인의 인생을 본인이 꾸려나갈 것 같은 어떤 자신감 또는 거기에 대한 어떤 시도, 나름대로 자기가 갖고 있는 은밀한 계획,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좀 어려운 말로 해서 8절에 봅시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심판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왜 사랑을 거론했느냐 하면 내 것을 따로 감추면 그것은 뭐가 되느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간음이 되고 이게 음란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간음과 음란은 내 것 때문에 발생하는 거예요, 내 것. 여기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죠?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하도 세상에서 사랑이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해가지고 사랑에 대해서 막 혼선이 일어나는데...사랑이란 ‘내 것으로 도로 가져올 게 없는 관계, 없는 상태’가 사랑입니다. 내 것으로 도로 가져올 게 없어요.
사랑한다고 결혼해놓고 나중에 남편이 하는 말이 또는 시갓집에서 하는 말이 “너 집에 올 때 혼수 얼마나 해왔다고 큰소리 치냐?” 이렇게 나올 때 “어머니, 결혼할 때 저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빈 몸으로 오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빈 몸으로 왔어요.”, “얘야, 빈 몸으로 오란다고 빈 몸으로 오나? 그래도 숟가락 하나는 가지고 와야지.”, “아니 빈 몸으로 오라고 해서 빈 몸으로 왔는데요?”, “야야, 네가 염치가 있어야지, 그래. 너 결혼한다고 네 시아버지가 집 사줬다.”
요새 아들 결혼하는데 아버지가 집 안 사주면 아들 쪽에서 의절하기 때문에, 아들 쪽에서 아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뭐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관계 끊겠다고 협박, 공갈로 나오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아버지가 아들 장가보낼 때 집 사줘야 돼요. 그런데 집을 사주면 좀 큰소리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쵸? 집 사주고 고맙다 소리 못 듣는 거예요. 아들 낳은 죄가 그래요. 집 사주고 좋은 소리 못 듣고 어느 날 집에 가면 장모가 차지하고 있고. 장모가 다 차지해가지고 집 구조부터 해서 스타일까지 전부다 장모 쪽으로 다 바뀌어져 있어요. 물론 장모도 할 말이 있죠. 아이 키워줬는데 좋은 소리 못 듣고 차비까지 썼는데 용돈 하나 제대로 못 받고 아이 교육 잘못했다고 맨날 딸하고 싸우고. 장모가 그런 소리 듣죠. 그래서 안볼 때마다 초콜렛 막 먹이고 설탕 덩어리 젤리 막 입에 넣고 아이는 좋다고 먹으면서 “할머니가 좋아요.” 그러는데 할머니가 좋은 게 아니고 젤리가 좋겠지.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내 것을 가질 게 없을 때 그건 사랑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뭐해줬는데?” 이렇게 되면 그것은 사랑한 게 아니죠. 상대에게서 내가 원한 것을 빼먹으려고 어떤 연기를 벌인 거죠. 이건 속임수죠, 속임수. 사랑한 게 아니고 속임수죠. 상대의 마음이 완강할 때 그 상대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상대가 내 마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마음 활짝 열어줄 때를 늘 은밀하게 노렸죠. 노리다가 자기 마음을 열면 훅 들어가는 거죠. 완전히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세포 속에 들어오는 거랑 똑같죠. 와서 기생해서 자기 원하는 걸 다 빼먹겠다는 거잖아요. 그건 사랑이 아니고 도둑이죠, 도둑.
따라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요. 이것은 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느냐? 이게 맡겨야 될 문제거든요. 이걸 맡겨야 될 문제이지,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사랑해보겠다고 나서면 안돼요. 그러면 “맡기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됩니까?” 라고 물을 때, 그건 6절에 나오죠.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죽어서 죽은 자 되지 마시고 일찌감치 죽은 자가 되세요. 백부장처럼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게 뭐 산 사람이겠어요? 주님 앞에서 완전히 죽은 자이죠.
주님 앞에 미리 죽은 자가 될 때에 그걸 ‘맡겼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맡기게 될 때, 그러면 죽은 자 되려면 어떻게 죽은 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세상을 복음적 입장에서 볼 때에, 지금부터 조금씩 어렵습니다, 복음적 입장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이미 물 건너 간 거죠, 이 세상은 심판대상이에요, 심판대상.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복음만 받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의 의는 안 받거든요, 받지를 않아요. 인간의 의라는 것은 받지 않습니다.
복음만 받는다는 것은 복음에 비해서 인간들이 하는 이 세상은 저질이고 하나님이 받을 가치가 전혀 없음을 복음을 통해 이미 확정 났어요. 확정이 난 겁니다. ‘확정’ 한 번 쓸까요? 이거 중요한 말인데, <확정된 복음> 오늘 제목 같다. 이미 복음으로 구원하기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확정이 되었으면 꾸물떡 꾸물떡 이 세상에서 자기 괜찮은 것, 자기 의로움, 자기의 양심, 선행, 이것을 주물떡거리고 자기가 갖고 있을 이유가 없어요. 어디 진흙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아유, 내가 이렇게 하면 더 착할까? 이렇게 하면 내가 더 이쁘게 보일까? 그렇게 혼자서 소꿉놀이하지 말란 말이죠. 주께서는 복음을 받지, 내가 주물떡거리는 내 착함,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거부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음 앞에서 이 세상은 이미 질적으로 심판받기로 확정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나옴으로써 복음이 성사됐거든요. 예수님은 홀로 오셨고 예수님은 홀로 나가심으로써 예수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이미 정해져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데 세상은 예수님한테 뭐 보태준 거 있어요? 뭘 보태줬습니까? 보태주기는커녕 훼방질만 했죠.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이걸 사랑이라고 한다면 세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죠? 간음과 음란. 간음과 음란의 특징은 어떤 게 있다? 뭘 항상 놓지 않는다? ‘내 것’을 놓지 않는 것. 내 것, 나 됨을 놓지 않는 것. 맡기지 않고 내 것을 꼭 챙기는 거예요. 간음과 음란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결혼식치고 간음과 음란 아닌 결혼식이 없어요. 전부다 사랑한다고 결혼해놓고 전부다 자기 것 챙기고 있다 이 말이죠. 가전제품 놓고 이건 누가 사온 거고 이건 누가 벌어서 산 거고.
처음에는 부부가 그렇지는 않았겠죠. 요새는 여보라 안하고 전부 오빠라 하대요, 남편보고. 처음에 신혼여행가서 “오빠, 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하게 되면, 오빠 그럼 한 달에 얼마 버는데?” 그러면 남자가 어이쿠, 훅 들어왔나 싶어서 방어 나서죠. “그런 것은 네가 몰라도 돼. 내가 생활비 줄 테니까 그런 것은 내 비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얼마 버는지까지는 하지 마. 너도 네가 번 건 네가 하고 내가 번 건 내가 하자.” 그러면 부인이 있다가 훌쩍거리고 흑흑흑 울면서,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 봐. 부부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감추고 이게 무슨 부부가? 나 그럼 신혼여행 갔다 와서 이혼할까?” 뭐 이런 식으로. “말로만 사랑하잖아.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을 보여야지.”, “그래. 통장 니가 관리해라.” 하면서 아내 줘버리죠. 일단 경제권은 접수했어요. “니가 해라.”, “비자금 챙기면 안돼.” 또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단디 한다고 단도리 또 이렇게 하죠.
그러면 다음에는 한 달 지나고 남편 쪽에서 역공이 들어오죠. “가계부 한번 보자.”, “뭐 가계부 그거 쓰기도 귀찮은데.” 이러죠. “가계부 한번 보자. 내가 다 맡겼는데 제대로 하나 한번 보자.”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자는 또 훌쩍거리면서 “오빠는 나 사랑하지 않아?” 뭐 엉뚱한 소리하고 앉았고. 가계부 보자고 했는데 사랑이 왜 튀어나오냐?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나만 사랑해요.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신 이유가 인간의 실상, 인간의 본성, 인간은 전혀 자기 외에 사랑하는 대상은 일체 없음. 아무리 세상에서 사랑을 남발하고 뭐 어떻게 하든 간에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음.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 이것을 충분히 보는 겁니다. 충분히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그러면 미리 하나님의 복음 속에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데 받겠어요. 인간의 간음, 행함, 이런 것, 사랑, 믿음, 소망 이런 거 받겠어요? 받지도 않아요. 자기 사랑하면서 “주여, 사랑합니다.” 그런 거짓말을 받겠어요? 택도(어림) 없는 소리죠. 안 받죠.
그러면 이미 이 땅에서 이 세상은 내가 해도 안 되고 내가 안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오직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안목을 입느냐면, 이제부터 중요해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는 그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성령을 받았으니까, 복음을 받았으니까, 동일한 안목이 성령을 통해 자기 안에 장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볼 때 세상을 그냥 보지 않고 어떻게 보느냐 하면 7절에 나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이거 누구 안목이냐 하면 이거 뭐 사람들 길거리에서 인터뷰해서 얻어낸 결론이 아니에요. 주님의 안목, 성령의 안목으로 봤을 때는 이 세상 만물은 뭐냐? 이미 마지막 때가 된 거예요.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질적인 성숙이나 이런 것은 이제는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요란 떨어도 맨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이죠. 달라질 것 없어요.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끝난 거예요. 그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외침, 그 주장, 그 의도, 그것은 평소에 본인이 본인 인생을 챙기면서 내가 내 식대로 살겠다는 그 본성을, 예수님을 가학하고 예수님을 때리고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이고 밀치고 믿지 않음으로써 자기 본색은 다 드러난 겁니다.
그 사실을 이미 성령 온 사람은 알죠. 그러니까 마지막 때라는 것을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보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러므로 너희는” 그 다음에 뭡니까? “정신을 차리고”되어 있죠. 정신을 차리고. <확정된 복음>보다 제목을 <정신을 차리고>라고 할까? 정신을 차린다.
이 세상에 어떤 힘이 있는데 그 힘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더러운 힘이 작용하고 있어요. 제가 더럽다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더럽다는 말은 자기 것, 자기 소유에 미쳐있다 이 말이죠. 어떤 경우라도 내 것은 마지막까지 쥐고 예수나 하나님이 아니라 우하나님이 와도 절대로 내주지 않는 나만의 것을 꼭 쥐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 패, 나만의 것. 하나님께 주면서도 마지막 것을 쥐었다 놨다 쥐었다 놨다 하면서 하나님께 약을 올리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놓아라 할 때 “주여, 모든 걸 줬는데도 천국 안보내주면 나 이거 못 놓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이 같은 거라든지 카드 같은 거, 마지막 자기 현찰 같은 게 있어서 이걸 딱 내놓으면 주님이 가져갈까봐 “잠깐만요!” 이렇게 되죠. “Just a moment! 잠깐만요. 이거 가지고가고 나 지옥 보내면 안 되는 거 알죠? 그러니까 확답 주시고 가져가세요.” 이런 식이라. 이거 정신 못 차렸어요, 정신 못 차린 거예요.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따로 어떤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적절한 자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구석에 가도 심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보셔도 안 들키겠지? 하는 소박한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쉼터, 자기만의 밀실, 자기만의 벙커, 이거 전혀 없습니다. 나만의 공간은 주님께서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꾸 도피하려고 하거든요. 여차하면 나만의 숨 쉴 공간으로 자꾸 도망을 쳐요. 마음속에, 이 안에서는 내가 왕이 되고 이 안에서는 내가 주도권을 쥐는, 최후의 보루같은 그런 거, 딱 이렇게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어디를 찾아오느냐 하면, 성령께서 찾아올 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보는 게 아니고 인간이 마지막까지 안 빼앗기려고 꼭 쥐고 있는 그 지점에 성령께서 직접 찾아오죠. 가장 고귀한 것. 정말 이거 없으면 나는 이제 남는 것은 자살밖에 없다. 마포대교에 가서 뛰어내리는 것밖에 없다. 마지막 자살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홀라당 뺏어가게 되면 더 이상 나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죠.
성경에 나오는 쉬운 예를 들면,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모자간에 먹고 죽으려고 최후의 식사를 하고 있는데 마침 마지막 식사, 이거 떨어지면 이제 없어요, 양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 엘리야가 찾아와가지고 그 모자간에 마지막 먹고 죽으려고 하는 그 양식을 엘리야가 뺏아서 자기가 먹고 말았어요, 홀라당 뺏어가지고. 단팥빵 하나밖에 없는데 “단팥빵 아이고 맛있겠다.” 하고 본인이 가져가버렸어요. 마지막 죽는 것까지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댁을 그냥 가만 두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건성건성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약속을 이루는 게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것은 기어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내가 나다운 가장 고귀한 것과 바꿔치기에 나서는 겁니다.
뭐 돈 십일조 받고 돈 몇 푼 받고 십자가 줄게. 이런 거 없어요. 십자가를 줄 때는, ‘정말 이거 없으면 난 그냥 죽겠다.’ 하는 그 정도로 나에게 소중한 것, 그 소중한 것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한번 비교해봐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그게 인생 헛장사했죠, 헛장사한 거예요. 복음은 끝이 없지만 우리의 목숨은 이게 한도가 있어요. 심지어 휴대폰 밧데리도 한도가 있잖아요. 밧데리도 한도가 있듯이 인간의 모든 것은 끝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아주 어리석게도 아직 끝이 안됐다고 해서 중간이라 해가지고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들의 세상 보는 눈이 그 정도로 허접해요. 아주 어설퍼요.
끝이 있는데 끝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고요. 특히 남자들 화장품 사게 되면 남자는 깨작깨작 이렇게 쓰잖아요. 그러니 화장품 사면 끝이 없을 것 같아. 그래서 한 3년 뒤에 보면 끝이 나요. 촛불도 그렇고 연필심도 그렇고 볼펜 알도 그렇고 뭐 여유 있는 것 같지만 어느새 세월 지나버리면 벌써 한도가 다 끝나는 겁니다. 심지어 인간의 몸이 그래요, 인간의 몸. 젊을 때 아이돌이지 지금 머리 깎는다고 아이돌 되는 거 아니거든요. 이제 한도가 40넘어가고 50넘어가거든 트롯트로 데뷔하든지 44살 먹고 트롯트 데뷔해가지고 하든지 하여튼 모든 것은 제한되어 있어요.
사렙다 과부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식, 그리고 기름과 밀가루는 이게 한도가 있어가지고 퍼내면 나중에 바닥을 치는 겁니다. 그 바닥에다가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깔아버리죠. 분명히 바닥인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의 오병이어와 같이.
주님의 사랑, 주님의 복음의 한도는 어디까지냐 하면 바로 택한 백성, 그리스도의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그것이 한도입니다. 이 사람, 마지막 백성 데려가면 그 다음부터는 게임오버, 끝나버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유지할 이유가 없죠. 그 마지막 한 사람을 본인이라고 여겨라. 그게 정신 차리는 거예요. 정신 차린다는 말은 내가 정신 차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스케줄을 다 아는 거예요, 하나님의 스케줄을. 복음 앞에서 세상은 이미 어떤 것도 내세울 게 없음을 안다면 그 사람이 최후의 증인이죠. 복음에 대한 최후의 증인. 항상 우리는 최후의 증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 이름을 이나 최나 박이나 성이 뭐더라도 이름은 뭐냐? ‘마지막’으로 해야 돼요. 이 마지막, 박 마지막, 최 마지막. 이것이 7절에 나오죠. 만물의 뭐가 가까웠으니?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니 성도의 세상보기, 성도가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세상자체에 대해서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돼요. 그냥 나와 관련되어 있으면 매사가 걱정, 근심으로 다가오는데 끝 지점, 마지막 그 끝 지점에 서서 뒤돌아보면서 마지막 세상 전체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바로 보는 입장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던 간에 그것은 그다지 중차대한 문제는 아니에요.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외치고 난 뒤에 산위에서 어떻게 망하는지 보는 것처럼 요나입장에서는 그 니느웨성은 그냥 끝난 거죠. 그래서 여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되어가는 그 현실에 자기가 몸을 담고 있다, 자기가 그것에 그런 식으로 살아온 적이 있음을 뒤돌아보면서 파악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럼 성도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성령께서 성도 안에 들어온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는 복음이니까 ‘복음이 성도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 말씀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복음에 대한 해석도 같이 들어왔다’가 돼요. 복음에 대한 해석. 복음에 대한 해석이 곧 실제 현실이에요, 실제 현실. 그렇다면 성도 본인이 복음에 대한 해석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성도 본인이? 해석이죠. 왜냐하면 본인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니까.
복음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미워한다’가 기본 사양이에요, 기본적인 요소에요. 그런데 복음을 사랑한다? 이것은 기존에서 온 게 아니고 새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관여이고 개입인데 저는 이 시간에 그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해석’이라고 하는 거예요, 복음에 대한 해석.
그러니 복음은 주님이 하셨고 복음에 대한 해석은 성도의 몫으로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해석하는 것도 본인의 능력이나 지식이 아니에요. 완료된 복음의 해석이기 때문에 이 해석도 완료가 되는 겁니다, 완료가. ‘완료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완료된 해석이 아닌 해석은 어떤 해석이 있습니까?” 라고 반대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해하기가 쉽겠죠?
완료된 해석이 아닌 해석.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하나 예를 들면 고고학이라고 보는 겁니다, 고고학. 어떤 둔턱, 언덕이 있다. 옛날 문헌에 보면 분명히 이 동네가 옛날 마을의 중심부였는데 지금은 마을은 없고 그냥 언덕이 있다. 그걸 텔(tel)이라고 해요, 언덕. 옛날에는 집 지을 때 기초 닦기 싫어서 기존에 집 지은 데 위에 그 다음에 집짓고 그 다음에 집짓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고고학자들은 수직으로 그걸 파들어 갑니다. 파들어 가보면 기원전시대, 그다음에 기원후시대, 그다음에 백년시대 이런 게 다 있어요. 로마 유적 같으면 어떤 언덕이 있으면 여기 언덕 위에 집이 지어져 있어서 여길 파들어 가면 옛날 여기 집터가 이 안에 쭉 있는 거예요. 층층이 쌓여 있는 거예요, 쌓여 있다고. 다 파들어 가면 여기 단층이 나오겠죠. 단층을 보면서 여기 토기가 나오고 여러 가지가 나오는 거예요. 토기도 나오고 돌도끼도 나오고.
그래서 고고학은 이 지점, 지구상에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이 있으면 A라는 지점에서 나오는 어떤 유물, 이쪽에 나오는 어떤 물품, 이런 걸 볼 때에 때려서 도구로 사용했다, 타제석기. 타제석기, 돌처럼 생겼는데 중간에 탁탁 끊어서 사용하는, 날카롭게 만들어서 칼로써 사용하는 게 있어요, A라는 지점에서 타제석기가 나오고 B라는 지점에서 동일한 타제석기가 나온다면, 거리가 5000km라면 이것은 같은 시대, 이것은 같은 시대, 구석기 시대의 산물이다. 이렇게 평가되는 겁니다. 그다음 그 시대 끝나게 되면 때리지 않고 앞의 두뇌피질이 더 복잡하게 구성되게 되면 인간은 이제 생각을 해서 갈아요. 그걸 마제석기라고 하는데 구석기 후반 또는 신석기 초반 시대가 돼요. 그러면 그 시대 촌락 같은 것을 조사를 하면서 거기서 데이터를 정돈 시켜요.
그다음 신석기 되면 토기를 만들어요. 토기는 흐르는 액체를 보관하는 거예요. 토기를 만들어서 흐르는 액체를 보관해줘야 거기서 나중에 뭐가 나오냐? 발효가 돼요, 자동적으로. 발효라 하는 것은 화학적 작용이거든요. 그 발효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술을 빚게 될 것이고 또 화학적 작용에 의해서 염색기술이 또 발달될 거예요. 그런 가설에. 나중에 신석기 후반으로 들어가면 금속들이 발견돼요. 메탈, 금속이 메탈이거든요. 메탈(metal)뜻은 그리스어로 찾아냈다,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에요.
메탈 되면 그다음 나오는 것은 청동기시대. 그다음 철이 만들어지면서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되면서 촌락은 수렵채집시대에서 드디어 금속이 발견되면 도시의 발달. 도시가 발달되면 계급이 생기고 그 계급에 따라서 엘리트는 언어가 나오고 그 언어는 무역하는 사람들이 저쪽 촌락과 이쪽 촌락이 무역하기 위해서 기호를 사용하면서 숫자를 세게 되고 그 숫자나 언어를 해독하는 자가 그 시대에 높은 계급을 차지해요, 엘리트가 된다 이 말이에요. 메탈, 금속, 무역에 좋은 상품, 금부터 먼저 발견됐어요. 금이나 은이나 구리 같은 게 발견되니까 이걸 다른 나라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서 무역이 발달되죠.
광산업도 발달되지만 무역이 발달되면 여기에 또 뭐가 필요하냐 하면 노예가 필요한 거예요. 노예를 얻기 위해서 뭘 하냐? 전쟁을 벌이죠. 전쟁을 벌일 때 필요한 건 뭐냐? 국가, 다른 나라의 백성들을 우리가 가져와야 되기 때문에 이것은 메탈, 금속으로 된 무기를 가지고 또는 수레가 있는 마차를 가지고 수메르, 지금으로부터 기원전 약 6세기나 8세기, 6000년~ 8000년 그 정도, 6000년 메소포타미아 그 시대에요.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수레 가진 자가 승자가 되는 소위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청동기시대가 되면 BC2000년경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오는 그 시대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고고학이에요, 고고학. 문명이 확산되는 겁니다. 언어 그리고 광산을 파려고 하면 더욱더 깊이 있게 파야 되겠죠. 나중에 광산을 깊이 있게 해서, 석탄을 캐기 위해서 18세기에 들어가면 영국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나죠. 증기기관 만들고 증기기관에 의해서 기차를 만드니까 세계의 모든 시간은 기차의 시간표대로 통일되어야 되고 자오선 만들어서 시간단위로 끊어버리죠. 기차가지고 빠르게 연결하고 또 기차시간 가지고 서로 연락하다 보니까 무선이 발명되는 겁니다. 무선이 발달하면서 인터넷.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세계는 단일 세계가 되어 버렸어요, 단일 세계. 단일 세계 되면서 모든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구는 폭발적이고 인구만 폭발적인 게 아니고 인간들이 도시에 집중화되어야 더 힘이 생긴다는 걸 발견했어요, 도시화. 이제는 전 세계가 도시화가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하니까 이걸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밀림까지 개발하죠. 밀림에 가서 박쥐들이 살고 있는데 그놈의 박쥐 다 쫓아내버리고 자기가 하니까 박쥐에게 주어진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을 숙주로 해서 이제는 인간이 도시화되었으니까 바이러스가 파급되는 속도가 비행기 속도와 동일하게 된 거예요. 왜? 비행기타고 가니까.
방금 제가 쭉 이야기한 것, 결국 이 이야기한 것은 해석이죠. 해석인데 사랑이 빠진 해석이죠. 자, 아까부터 얘기했는데 사랑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간음과 음란인데 성경적으로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간음과 음란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오거든요. 이스라엘에서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잖아요. 이 사랑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은 우상으로 바꾼다고요. 하나님을 섬겨야 될 인간들이.
하나님은 어떻게 섬기느냐? 언약대로 섬겨야 되요. 그러나 언약을 거부해버리면 이 하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우상이 된다고요. 우상을 섬길 때 그 우상 앞에 꼭 붙는 게 있어요.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나를 포기 못하겠다 죽어도. 하나님이 뭔데 내가 포기되어야 돼? 예수가 뭐길래 나를 포기해야 돼? 십자가 그게 뭐가 도움 된다고 왜 십자가 앞에서 나를 포기해야 돼?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서 포기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너는 죽었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포기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죽어야 돼요. 십자가는 너는 죽었다는 사실을 통과하는 게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천당 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자기 걸로 가져와요. 이거는 사랑이 아닙니다, 소유지. 소유지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를 가져온다는 것, 내 소유를 한다는 것. 그것을 성경에서는 우상숭배, 간음, 음란,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미워하는 거라고 아무리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뭐로 그것을 확 덮어버리느냐 하면, 방금 이야기 길게 했듯이 자기를 위해 사는 걸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고고학입니다, 고고학. 문명의 발달 이걸로 덮어버린 거예요, 전부다. 주님의 뜻을 인간의 지식의 집합으로 집결해서 그냥 덮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정신 차리라 이 말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너 자신을 알기는 알아? 이런 뜻이에요. 네가 세상을 알아? 세상은 지금 마지막이야. 끝났어.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미 심판받아야 돼. 안 믿겨지지? 왜? 너희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멀쩡하면 되니까. 자기만 멀쩡하면 돼요, 자기 행복하고 편하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뭐가 없기 때문에?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복음은 그 언약의 완성으로 마지막 때에 주어집니다. 마지막 때에 주어진 거예요. 그 마지막 때에 복음이 완성되게 되면 자동적으로 세상은 어떤 때입니까? 마지막 때에요. 십자가 때문에 마지막 때에요. 뭐 마지막 때라고 해가지고 마지막 때의 증거를 찾자, 신종코로나로 서로 미워하고 666이 어떻니 저떻니 그거 찾지 말고 그냥 십자가 꽂혔으면 마지막 때에요, 그냥. 십자가 꽂혔으면.
하나님께서 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피 외에는 일체 가져오지 마라 이 말이죠. 천국 갈 때는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가거든요. 믿습니까? 천국 갈 때, 유월절 할 때 뭐 발랐어요? 문설주에다가. 어린 양 피 발랐죠? 그러면 지금 천국 가는 것은 뭐만 바르면 돼요? 우리 마음에. 피 바르면 되죠.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고귀한 것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교환하죠, 교체해버립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할 때 주님의 목숨이 우리 목숨과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또 예수 믿고 십자가 목걸이하고 반포대교에 검푸른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지 말고 이미 십자가 들어왔으면 우리가 교체 안 해도 이미 교체된 양상으로 주께서 친히 우리의 인생을 다루십니다.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하라. 그게 ‘정신 차려라’. 내 것이 없으니까 사랑은 절로 되는 거예요, 절로. 또 절에 가서 사랑한다 하지 말고. 내 것이 없으니까, 내 생각 안하니까, 도로 내 것 찾을 생각 안하니까 그게 사랑이 아니고 뭡니까?
“아 목사님, 우리 성도는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성도 자체가 해석이라니까요, 복음의 해석! 복음은 예수님 십자가가 복음이고 그 해석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증인 또는 증거자 또는 전도자로 쓰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누구냐면 복음의 해석자입니다. 마치 누구와 같이? 오늘 본문에 나온 베드로같이. 베드로가 이 이야기해가지고 몇 푼 받았습니까? 이렇게 복음 전하면 베드로가 월급 받고 그런 거 있습니까? 없죠. 정신 차리라고 했다고, 서로 사랑하라고 이야기했다고 돈 내놔라 뭐 그런 거 없죠? 왜냐하면 이런 외침조차도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의도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첫째시간 끝을 맺으면서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나에게는 어떤 권한도, 어떤 권리도 없다. 긴급생계자금인가 받았어요? 그것은 아내 이름으로 안주고 가장(세대주) 이름으로 주거든요. 하나님께서 그거 왜 주신 줄 알아요? 죽으라고 주신 거예요. 그 돈쓰고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살라고 주는 줄 알아요. 살라고 준다는 건 나라에서 그렇게 하는 거고 주님께서 그걸 허락하신 것은 그거 써가면서 죽으라고 한 거예요, 죽으라고. 그래서 이번에 돈 떨어지기까지 아직까지 안 죽었잖아요. 그럼 또 죽으려면 또 돈 받아야 되겠죠.
생각하는 게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죽으려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살려고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죽으라고 살아가기 때문에 따로 내가 챙길 내 권한이나 권리 같은 게 없어요. 사람이 어떤 자기 권한이나 권리가 없어버리면 시험들 이유도 없죠. 아니 죽겠다는데 뭐 “너 이러면 잘될 수 있어.”, “잘되고 뭐고 난 잘되는 것도 짜증나. 나 그냥 죽을래.” 아니 죽겠다는 사람에게 뭐 이렇게 하면 네가 잘될 것이고 그런 이야기가 소용없죠. 우리는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사기를 왜 당합니까? 죽으려고 하는데 사기 당합니까, 아니면 살려고 할 때 사기 당합니까? 살려고 하니까 사기 당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그러면 살려고 하는 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데 어떻게 복음 앞에서 죽으려고 하느냐? 정답은 주님한테 목숨을 빼앗기면 되죠. 누가 와서 내 목숨을 가져가면 되요. 이제 네 목숨은 내가 간직할게, 하늘에. 네가 관리하지 마. 네가 뭐 경제권 쥐고 이러지마. 하늘에서 내가 네 목숨 관리할게. 주님은 그거 가지고 뭐하려고? 나의 복음의 해석이 되기 위해서. 이제는 어디서 뭘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복음, 세상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어느 시간이든 어느 공간이든 내가 너를 굴릴게, 사용할게. 그게 바로 사랑의 의미,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고 얼마나 힘들어요, 이게. 얼마나 힘든 윤리고 도덕처럼 느껴지지요. 힘든 이유가 있었어요. 내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해도 조건부 사랑이 되기 때문에 이게 힘든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와서 성령이 내 목숨을 가져가 버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버리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되는 겁니다, 사랑이.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의존강의20200611b 베드로전서4장 7절(복음의 해석)-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사랑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인간이 여기 있음으로써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간은 아무리 사랑해봐야 대가를 찾기 마련이고 은근히 노리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나니” 라고 해서 먼저 인간 사랑에 대해서 강력하게 밀어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게는 사랑이 못나온다. 안 나온다. 나올 수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절대로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복음을 설명하면서 왜 사랑을 같이 연계해서 생각하느냐, 언급했느냐.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그것은 사랑 아니면 모든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어디를 추구하느냐 하면, 옛날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되면 인간은 자기 영광을, 스스로의 영광을 추구해요. 자기 영광을 추구한다 이 말이에요, 스스로.
이걸 좀 어렵게 설명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먼저 하나님께서 일을 할 때 인간의 행태 또는 행위를 먼저 쫙 깔아놔요. 쭉 깔아놓고 그다음에 주께서 그걸 하나하나 파헤치는 거예요. 지적하는 거예요. 인간은 기껏 이런 행동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죄 아닌 게 없다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펼쳐 오는 겁니다. 인간이 먼저 일을 시작하게 해요. “해봐, 해봐.”,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 네가 생각한대로 해.” 하고 뒤따라가서 그러니까 조목조목 “네가 잘못되었다, 네가 잘못되었다.” 이렇게 하십니다.
구약성경에 특히 그런 게 많죠. 먼저 율법 줘가지고 율법대로 한번 해봐, 해봐. 해놓고 율법의 정신과 율법의 뜻과 너희들이 한 것과 서로 틀렸다. 따라서 율법을 위배했으니까 너희는 매 맞아도 할 말 없지?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처벌해버리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먼저 시작하게 해놓고 그것을 전부다 거부하는 거예요, 부정해버리고. 거부하는 식으로.
그렇다면 그 모든 죄에 대해서 열심히 하면 되지 않습니까? 바르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착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바르게 하는 것하고 뭐 착하게 사는 것. 그렇게 하려면 뭐가 되요? 본인은 본인에게 어떤 가능성,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인이 계속해서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나 착할 수 있는데. 나 어질 수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런데 여기 8절에 보면 끝에 “사랑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러니까 덮으려면 뭐가 올라와야 됩니까? 죄라는 것이 규정되어야 되죠. 죄라는 것이 퍼질러져야 되죠, 죄라는 것. 죄라는 것이 퍼질러져야 되고 여기서 덮는 것으로 합쳐져서 죄와 덮어주는 것을 합쳐서 이걸 뭐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랑.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안 받아요. 죄는 안 받지만 덮어주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그걸 사랑으로 인정해주는 거예요. 죄가 있으매 그걸 덮어주는 것으로.
그러면 죄를 덮으려면 죄보다 어느 것이 더 우세해야 되요? 어느 것이 더 세야 됩니까? 더 많아야 되고 어느 게 더 넉넉해야 됩니까? 죄지음보다 뭐가 넉넉해야 되요? 덮어주는 사랑이 더 넉넉해야 되겠죠? 그래서 죄짓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목숨 아까워서 바들바들 떨면서 자기 살려고 죄를 짓죠. 아까도 자기 것이 있으면 뭐가 된다? 사랑이 아니죠. 그러면 덮어주는 것은 인간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오신 주님의 사랑으로 이걸 덮어주는 겁니다. 인간의 것에다가 뭐가 덮인다? 하늘의 것이 덮여서 그걸 사랑으로 규정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우리 인간이 남을 용서하는 것은 그건 사랑입니까, 사랑 아닙니까? 사랑이 아니죠. 주제넘게 왜 남을 용서해요? 아니 죄인에게 죄짓는 것이 그게 죄입니까? 같은 죄인이 같은 죄인에게 등쳐먹고 사기칠 때, 그 죄인이 나는 피해자라고 우길 수 있어요? 없지요. 인간은 자기가 당한 것만 크게 생각하고 지가 남한테 해코지하는 것은 아주 작게 축소하고 감추고 조작하는 그런 재주가 있어요, 인간에게는. 내가 한 실수는 별로 작고 남이 한 것은 죽일 놈이라고 달려들고 그런 게 있는 겁니다. 너무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요.
이 허다한 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에 대해서 진짜 해야 될 말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아까 그 고고학을 했죠? 고고학을 하면서 같이 언급한 것이 인간의 문명에 대해서 문화 또는 문명, 인간이 하는 모든 업적들, 인간의 지혜로 하는 모든 업적들, 문화와 문명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현실로 봐요. 현실은 실제적으로 의미 있고 실제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가치가 있고 없고는 뭐로 매겨지느냐 하면 가격으로 매겨지는 거죠, 시장에서. 가격으로 매겨지는 겁니다.
전에 19세기 말 미국에서 뭘 발명했느냐 하면 접시 닦는 기계를 발명했어요, 1800년대 중반에. 발명가가 만들어놨는데 시장에서 팔렸겠어요, 안 팔렸겠어요? 안 팔렸죠. 여자들 할 일도 없는데 앉아서 접시 닦으면 되지 뭐 때문에 그걸 시장에서 사겠어요? 생각해보세요. 자기 딴에 가치가 있다고 했죠. 가치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가격이 매겨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아는 사람이 뭐를 발명하는 걸 좋아해요, 처가 쪽에서 아는 사람이. 돌아가셨는데. 그 분이 뭘 발명했느냐 하면 연탄불에 올려놓으면 연탄불의 화력이 세지는 것을 발명 했어요. 그거 가지고 사업 크게 벌여보려고 했는데 그게 사업이 안됐었어요. 왜냐하면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연탄을 안 때고 기름을 땠거든요. 그 사람이 노력을 안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시간을 투자 안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나름대로 했는데 그게 자기는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데 그게 가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의미와 가치는 어디서 결정되느냐 하면 바로 시장, 소비시장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여기 시장이름이 신곡시장이라고 했죠. 신곡시장은 작은 시장이고 세계 시장, 시장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시장이라 하는 것은 남들의 의견이거든요. 남들의 의견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물어봅니다. 이 시장에서 사랑과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이 얼마짜리입니까? 이거 얼마짜리에요? 시장에서 가격이 형성되지 않으면 이것은 비실제적이고 이것은 현실과 위배돼요.
어떤 사람이 대학을 나왔다. 전공이 뭐냐? 전공은 미생물과 나와서 지금 신종코로나 백신 개발에 하나의 팀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러면 이 사람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되죠. 백신 내지는 치료제. 걸리고 난 뒤에 치료하든지 아니면 걸리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약을 만들든지. 그러면 그 사람은 대학 4년 나와 가지고 갑자기 시장 몸값이 올라가는 거예요. 아이고, 너 좋은 대학 갔다. 좋은 대학은 뭐 좋은 대학이에요. 미생물학과 들어갈 때는 입학률이 별로 높지도 않고 수능 점수도 낮았는데. 그런데 이게 타이밍이 딱 들어맞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원자력 발전소를 있는 것도 다 부순다고 하는 판에 서울대 원자력과 나왔다. 그러면 이것은 타이밍이 안 맞는 거죠. 이 운때가 안맞는 겁니다, 운때가.
전부다 가수한다고 아이돌 한다고 할 때에, 전부다 출세하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획사에 들어가서 어릴 때부터 춤추고 다 합니까? 요새 아이돌의 아이들은 별로 안 쳐줘요. 정동원, 이찬원, 탑 세븐, 임영웅, 김호중. 성악해서 독일까지 유학 갔다 와도 트롯트. 이게 운때가 맞는 거예요, 운때가. 그런데 문제는 이 소비층이 몇 개월 갈지 그걸 또 아무도 모르네. 이제는 너도 나도 실용음악과에 트롯트과 몇 명 뽑습니다. 지금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올해 지나고 트롯트가 확 시들어버리면, 트롯트 좋아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다 죽어버리면 그다음부터 딴 게 또 나오는 거예요, 딴 게. 그러니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은 인간도 장담할 수 없는 자본주의 시장, 시장 경제 원리에 의해서 된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베드로는 뭐라고 하느냐면 한결같이 가치 있는 것이 뭐냐?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만약에 어떤 사람이 2차 대전 끝나고 난 뒤에 독일에 교회가 있는데 2차 대전 방금 끝났습니다. 끝났는데 1945년 쯤 되었겠죠. 독일에다가 폐허가 된 교회에 미국의 부흥사 목사나 또는 영국의 목사나 독일에 살아남은 목사가, 나치 반대하는 사람들이 교인들 모아놓고 베드로전서 4장 “여러분,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 그런 형식적인 사랑은 필요 없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어줘야 그게 사랑이라” 이렇게 외치면 얼마나 그 사람들이 은혜 받고 주께 돌아오고 감사하겠습니까, 1945년도에. 그런데 2020년도에 교회에서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면 지금 교회 사람들이 내가 무슨 죄를 졌는데? 무슨 죄졌는데? 복음도 때가 맞아야 돼요. 같은 복음인데 먹힐 때 있고 안 먹힐 때가 있는 거예요. 별로 인기가 없어요. 시장성이 떨어지니까, 시장성이.
지금 이 시대의 복음은 뭐냐 하면 동성애해도 구원받습니다. 이게 또 먹히네, 이게 또 먹혀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동성애도 그 사람개성이니까 봐주자 이런 소리 해가지고 와, 저래야 교회가 커지는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목사들이 설교할 때. 요새는 뭐가 이슈인지, 교인들이 원하는 소리가 뭐냐? 그걸 체크하는 거죠. 전광훈 목사 쳐야 인기 있는 목사 되는 거예요, 뭐에요?
그러니 베드로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이렇게 할 때 뭐 옳은 소리네, 뭐 그럴싸하네, 복음적이네 아무리 해도 우리 가슴에 와 닿겠어요, 안와 닿겠어요? 안와 닿는 겁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 원인을 이제 설명해 드릴께요.
죄라는 것 속에 본인을 포함시켜야 돼요. 죄 속에 본인을 포함시켜야 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본인을 죄 속에다가 안 집어넣는 거예요. 남의 허물을 덮어줄 생각하지 본인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 말은 내가 뭐 죄인이냐고 하는데. 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잖아요, 복음이잖아요.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조작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자기 이상적인 모델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기가 내가 생각해봐도 괜찮다고 하는 그쪽에 닮아간다고 스스로 자기를 계속해서 변형시키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인간은 내가 누구라고 얘기하는 것을 인간의 어떤 학문이나 인간의 어떤 지혜도 내가 누군지를 이야기해준 인간의 지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아요.
군에서 선임자가 새로 온 신병들 애먹일 때 하는 말장난 같은 게 있어요. “김이병!” 이병이 군에서는 제일 낮은 거예요, 일병이 낮은 게 아니라 이병이 낮아요, 군에 안 갔다 온 여자분들은 잘 모르는데 일병이 더 높아요 이병보다, “김이병, 너 고향이 어디야?” 그러면 “대구 대명동입니다.” 그러면 선임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명동이 다 네 거야?”이렇게 하거든요. 누가 내 거라 했어요? 또 말대꾸하면 얻어맞으니까 말대꾸도 못하고.
나는 누구냐? 여자다. 여자가 다 너야? 모든 여자가 다 너야? 아니죠. 여자인데 나는 아직 결혼을 안한 처자다. 결혼 안한 여자가 다 너야? 그러니 이게 도대체 나를 규정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 어떤 것도 나를 규정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규정이 안 되니까 따로 무리를 짓습니다, 애들이. 따로 무리를 지어가지고 공통점을 끄집어내요. 특히 비행소년들, 날아다니는 거 말고 나쁜 짓하는 거 있잖아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괜히 길거리에 침 뱉어 보는 거예요. 그러면 비슷한 친구가 “야, 너 우리 청계천 왕자파에 들어올래?” 자기들끼리 뭐냐 하면 “너 담배 피워봤어?”
자꾸 자기가 소속을 정해요. 담배피운 ‘나는 누구다’를 알기 위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담배 피워본 그 무리 속에 포함됐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 찾아다녀요. 찾아다니고 무리지어 그룹을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학교 출신이고 누구하고 동창생이고 자꾸 동그라미를 걸치고 그러면서도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방에 ‘네가 누구냐’를 이야기해줘요. 너는 죄인이다. 이 말은 죄인은 죄인이 누구를 덮어주거나 용서할 권한이 없어요. 그것마저 뭐가 되느냐 하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용서해주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죄인이 아닐 것이라는 본래 의도했던 이상형이 있어요.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그렇지. 나는 죄인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러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자기에 딱 맞는 그 규정을 본인이 찾아가는 데 사람은 아주 평생을 다 소모합니다, 소비합니다, 거기에. 내가 누군지를. 그러면 성경에서는 죄인이라 했죠? 그것은 듣지도 않아. 내가 왜 죄인이야? 그것은 아예 제껴 버려요, 제껴 버리고 ‘내가 일단 죄인은 아니고 과연 내가 누구지? 누구지?’ 찾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성도란 성령을 받은 사람을 성도라 해요, 성령 받은 자. 성령 받은 자에요. 그러니 ‘성도란 이렇다’라는 것을 성령은 어디서 오느냐? 십자가 영에서 오거든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영이 성령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와야 예수님과 처소를 같이 해서 영원히 천국에서 처소를 같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왔다는 말은 성령이 오기 전에 성도가, 인간이 자기를 스스로 규정하는 그 어떤 많은 규정들이, 그런 자기 정의들이 성령이 옴으로써 이건 다 무산되는 겁니다.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동안. 성령 옴으로써.
성도라 하는 것은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 있지요? 8장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몇 년 다니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이거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해야 돼요, 성령이 임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성령이 내게 임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게 바로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 말은 뭡니까? 봉사하면서도 본인이 봉사의 주인공이 아니고 성령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나의 인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10절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것은 받는다는 이야기가 먼저 선행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주셔야 되느냐 하면, 안주게 되면 인간은 뭐이기 때문에? 그냥 죄인이에요. 여러분들 잘 아셔야 되는데 죄인이라는 말은 그냥 죄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누구냐를 하나님의 규정 말고 내가 내 마음에 드는 내 규정을 따로 챙기려고 부지런히 시도하는 거예요.
그것은 불신자들 모습 보게 되면 딱이에요, 딱. 불신자들이 뭐냐 하면 바로 성령 받지 않은 진짜배기 딱이에요. 딱 찐이야. 진짜 불신자의 찐은 뭐냐 하면 내가 지금보다 향상되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러나 죄인은 나아져봐야 죄인이에요. 못해도 죄인이에요. 죄인되는 역할은 내가 더 나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힘이, 다른 영이 와서 내가 성도되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그 기능으로 사는 게 성도에요.
자, 성도라 하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본인이 뭘 해도 죄인이고 그다음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만약에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살아가느냐? 안 오면 나를 좀 더 좋게 하기위해서 좋은 존재 만들고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는 그러한 칭찬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부지런히 쉬지도 않고 노력한다니까요, 불신자들이.
아니 사람들이 남한테 욕 얻어먹는 거 싫어해요. 왜 싫어합니까? 본인은 죄인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본인은 죄인은 아니고 완전하지도 않지만 자꾸 다른 이상향을 찾고 있어요.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된 모습이 저 모습, 그게 나일거야.’ 라고 자꾸 상상들을 하는 겁니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 얼마나 많은 모델들이 있는지 몰라요. 엄청나게 많은 모델이 있어요.
명절날 친척들 모였을 때 시집 안가고 있으면 “너는 어떤 타입의 남자가 좋아?” 이렇게 묻잖아요. 박보검? 난 박보검이 칼인 줄 알았어. 뭐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데? 박서진? 머리카락 좍 올려가지고 가운데만 섬처럼 남기고 다 깎아버리고. 하여튼 드라마 나오는 미남자, 유아인, 얼마나 많은 후보감들이 있어요. 나는 누구 타입이다, 누구 타입이다 하잖아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예수님 모델 하는 사람, 스데반 집사를 모델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망가져야 되고 죽어 지옥가야 될 본질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본모습은 애써 안 듣고 세상에 눈에 보이는, 건전하고 괜찮아 보이는, 마치 자기가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타입이 되어 버렸어요. 그게 바로 죄에요, 그게 죄라니까요. 그래서 허다한 사랑으로 덮음을 당했으면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음흉한, 나는 이런 스타일, 이런 사람 되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아예 그런 것을 넘보면 안돼요.
이걸 아까 뭐라고 했나. 나한테는 어떠한 권한, 권리가 없다. 내가 나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닦달내지 않는다. 나를 심하게 학대하지 않는다. ‘이 바보야, 등신아. 네가 이것도 못하고 왜 사냐’ 라고 나에게 질책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실수를 해선 안되지. 왜 실수했어?’ 라고 나를 나무라지 않는 거예요. 왜? 주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했잖아요.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아담에서 나온 것은 다 죄인이에요. 신종코로나 걸려 죽어도 우리는 할 말 없습니다. 처음부터 죽어있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죠.
자 그렇게 세상이 마지막이다, 심판이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 죄인이다 할 때 시장에서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사랑의 가치가 어떻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만 시장에 나오는 어떤 전자제품보다도 냉장고보다도 이 세상에 천억 로또보다도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 제일 귀하죠. 이게 진짜 찐이에요. 진리가 아니고 찐리에요, 찐리. 언제? 지금! 찐찐찐이에요, 언제? 지금.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그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입니다. 그건 복음에서 나오죠. 그러면 그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안 되고 바로 하늘의 은사가 내려오는 거예요.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쭉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 되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시켰던 해석이에요. 복음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가 베드로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우리도 동일하게 성도 같으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으면 우리 자신이 해석입니다. 어떤 해석? 나는 죄인인데 허다한 죄를 사랑으로 덮임을 받았다. 참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떳떳하죠.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당하고 이렇게 떳떳할 수가 있어요? 복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래요. 기죽지 않아요.
넓은 저택에다가 호사스럽게 금으로 떡칠을 하고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온갖 물건들을 다 구비해서 살아도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 그 자랑에 대해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뭡니까? “우리 집에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 있다.” 그거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너 신종코로나로 죽는다.”,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아. 원래 죄인이 죽는 게 당연하지.” 이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하늘의 은사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8절에서 10절이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허다한 은사는 그 본질상 뭐가 되느냐 하면 재주꾼이 되는 게 아니에요. 탤런트 되는 게 아니고 그 본질은 동일해야 돼요. 뭐냐? 허다한 죄를 덮는 것, 사랑으로 움직여야 돼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있죠? 천사의 말을 하고 아무리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다 이 말이죠 (고린도전서 13장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찹쌀모찌 하나 먹어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고 감사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겁니다. 사람 사는 게 그거에요.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월급 적고 집안이 좁고 하더라도 돌아보면 하나하나가 전부다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신 택배에요, 택배상자. 주님이 주신 사랑이에요, 전부다. 죄인 주제에 이 요구르트 하나도 아깝다, 너 같은 게. 요구르트 하나도 아까워요. 하나 잡수세요, 나중에 주께서 뺏어가기 전에 잡숴 놔야지. 이거 먹는 것도 아깝다.
물어요. “왜 먹느냐?”, 배웠잖아요. “너 살려고 먹지?”, “아닙니다. 왜? 이거 먹고 죽을 거예요, 앞으로 50년 살다가 나 죽을 거예요.” 이거 먹고 죽는 거예요. 생계자금 타가지고 죽는 거예요. 왜? 죽어야 사랑해주신 그 분을 만날 게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마지막 때 지금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전부다 거창하고 대단하고 똑똑하고 잘살고 부자 되고 그걸 각자 전부다 이상적인 자신의 모델로 봐요, 모델로 여긴다고요. 전부다 그 경쟁해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 죄인인데 허다한 사랑만 있으면 족해요.” 라고 그걸 모델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오직 하늘의 은사 받은 사람 빼놓고요.
은사 받은 사람이 남보다 손해 아니에요. 소위 잘난척하는 사람들은 그냥 주신 모든 햇빛과 공기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몰라요. 돈은 많은데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고 고마움도 없어요. 그런데 은사 받은 사람은 뭐 개코도 별로 가진 것도 없고 간당간당 살아가면서도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는 겁니다. 비록 시장에서는 돈 다 끄집어내봐야 그건 가격 쳐주지도 않지만. 사실은 하늘에서 온 건데 어떻게 가격을 매기겠습니까? 죄인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죄인인데 사랑으로 다 덮임을 받아서 용서를 받았다는 이런 생각이 어떻게 불현듯 확 떠오르죠?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자 한번 정리해봅시다. 자꾸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고. 죄라는 것은 뭐냐? 자기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는 것. 세상 영광을 취하는 것. 죄라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세상의 귀한 것, 영광스러운 것과 일치시키는 것,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건 타고났어요,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육을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자연적으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자연적으로 세상의 영광을 향해 달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기 안합니다. 잘난 맛에 살아가요. 이게 이 세상에서는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자연스러운 가운데서 예수님 오셔가지고 십자가 짐으로써 그 자연스러움이 심판받기에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어요. 다 심판 받아야 되요. 마지막 때고. 시간적으로 이게 마지막 때라는 그 인식, 심판받아야 된다는 인식, 십자가 지심으로 세상은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그 인식, 이게 어떻게 인간의 교육으로 가능할까요? 안되죠.
그리고 자기가 뭐다?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 죄인도 슬퍼하면서가 아니고 죄인이라는 사실이 기쁘고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요. 내가 무슨 시건이 있어서 주님이 보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나를 죄인으로 볼 수 있는가. 내가 죄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이 땅에 죄짓기 위해서 태어나고 그 죗값으로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러한 안목이 자연스럽게 서슴없이 “뭐 어때서? 이게 진리인데, 이게 현실인데. 딴 소리하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라고 이걸 아주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진짜 주님의 사랑에다가 모든 걸 일임한 사람에 해당되는 그 자유함, 넉넉함이에요.
그리고 9절 봅시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베드로가 보기에, 베드로의 뜻이 아니고 주님 뜻이지만, 인간이 대접하라고 할 때 아, 원망을 얼마나 했겠습니까? 참 이거 참 누구 이야기 아니지만, 우리 집 이야기이지만. 우리 사돈, 사돈의 주특기가 뭐냐? 대접이에요. 뭐 부산서 아예 차타고 와가지고 귀한 따님 주셔서 감사하다고 대접을 해요. 대접을 하면 우리 집사람은 또 가만히 있습니까? 농심이죠. 받은 대로 또 “아니야, 이건 사돈이 받아야 됩니다.” 주고. 내가 옆에서 제3자 입장에서 볼 때 그냥 안주고 안 받는 게 최고인데 왜들 이러십니까, 정말? 왜들 이래요.
그래서 대접을 하는데 우리는 서로 자기 걸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를 하는데, 만약에 세상사람 같으면 원망 나옵니다, 원망 나와요. ‘내가 작년에 준 것만 해도 세 번인데 입 싹 닦고 한 번도 안줬지? 그래서 니 딸이 친정에서 그따위로 배웠더냐?’ 이래가지고 며느리한테 구박을 할 수밖에 없죠. 괜히 자기만 뭔가 바보가 된 거 같고 자기만 유난떠는 것 같아가지고. 지가 홀로 자기가 생각해놓고 남들로부터 자기 예상대로 어떤 대가가 주어지지 않을 때는 자기 혼자 설쳐댔는데 괜히 제 뜻대로 안됐다는 원망을 그 사람에게 퍼붓게 되어 있어요. 그게 원망이라는 거예요.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느냐에 대해서 제3자, 무작위적으로 이제 공격하는 거예요, 무작위적으로.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강의를 쭉 들어보니까 모든 원인은 어디에 있어요? 내 것이 있다는 것에. 다 넘겨야 되는데 안 넘기고 꼭 쥐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에 단풍 두 장 딱 쥐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에 포커 쥐고 있는 거랑 똑같아요. 그거 왜 쥐어요? 아이고 내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그 자존심 해서 뭐하려고, 그래? 하나님께서 십자가만 받아요. 다른 건 안 받아요. 죄를 덮는 허다한 사랑만 받아요, 다른 건 안 받아요.
유월절 출애굽할 때 천사가 뭐만 봤습니까? 이 집이 양반이나 그런 거 안 봤어요. 뭐만 봤습니까? 흠 없는 양의 피, 피만 보고 넘어갔다고, 피만. 왜?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충실해요. 인간이 제시한 약속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 약속에 충실한 겁니다. 우리가 가룟유다를 이해해야 돼요. 우리가 성도입장에서 가룟유다가 참 답답하죠.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내 살과 내 피로 네가 생명이 있다고 했는데 왜 그 주의 말씀을 안 받아들일까?’ 라고 참 측은해 하는데 가룟유다가 그 소리 들으면요, 가룟유다 본인도 가슴 칩니다. 내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냐, 안 믿어지는데. 그러면서도 왜 안 믿어지는지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왜 안 믿어집니까? 물론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건데 그럼 사탄이 뭐를 거부합니까? 뭐를 받아들이고 뭐는 계속 밀어냅니까? 바로 인간이 행함 없이 구원받는 것은 사탄이 제일 싫어해요, 행함 없이 구원받는 거. 그딴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뭘 실천해야, 뭘 해야 구원받지 행한 것도 없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그거는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끊임없이 그걸 밀어내요. 심지어 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행함을 했다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기어이 자기 행함을 챙기려고 해. 이것은 결국 교회에서 봉사해봐야 티내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11절 봅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이거 굉장히 설교자에게 올 시험이죠. 설교할 때 나는 주의 말씀대로 설교한다. 나는 그냥 마이크다. 나는 그냥 스피커에 불과하다. 앰프에 불과하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말하신다. 이렇게 주장들을 하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앰프 이거 발로 차도 괜찮죠? 킥해도 괜찮죠? 앰프 꼬라지하고는.” 분명히 자기는 앰프고 그냥 나오는 대로 외쳤을 뿐이라고 했는데 “아이고 설교 꼬라지하고는. 차라리 죽어라. 그것도 설교라고.” 하면 괜히 또 화가 나는 거예요.
나는 글을 쓸 때 주님의 은사대로 썼지, 이건 내 글이 아닙니다. 주의 글입니다. 권투할 때 슉슉, 이건 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주먹 치는 소리라고 하듯이 이건 내 글이 아닙니다. 했는데 거기서 수상한 댓글 있잖아요, 수상한 댓글. ‘똑바로 믿어라’ 라든지 ‘니가 십자가 복음을 알아?’ 했으면, 앰프 같으면 그냥 가만히 두면 되는데 거기에다가 열불내가지고 분명히 200자 칸에 10자 썼는데 자기는 200자 다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400자 채워가지고 콜! 갔다 내밀면 저쪽에서도 화가 나서 저쪽에서 콜! 이거 뭐에요, 이게. “말하거든 주의 말씀대로 하라” 하거든 앰프, 마이크 차고 앰프 걷어차더라도 ‘나는 뭐 나하고 관계없다.’ 이렇게 되어야죠.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리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 봉사하는 것. 자, 봉사가 뭐냐? 봉사는 허다한 죄에 대해서 사랑이기 때문에 죄에 사랑을 덮어서 봉사가 나왔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봉사라는 것은 어떤 봉사든 봉사가 되려면 내 것이 유지되어야 돼요, 사라져야 돼요? 이것은 봉사해본 사람은 알아요. 봉사하면서 봉사하게 되면 힘들죠. 나만 바보된 거같아. 나만 혼자 남아 청소하는 것 같아. 바보된 거 같죠. 바보된 것 같은데 일단 그러한 경험, 마음이 들어야 돼요. 해놓고 아, 이게 바로 봉사함으로써 죄라는 게 내 것이 생길 때 죄도 같이 발생된다는 사실.
봉사하면서 사랑이 와버리면 정말 진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렇게 귀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감격하면서 봉사를 해야 돼요.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데 그 봉사, 청소할 때 그게 8분 43초밖에 안가요. 8분 43초 지나면 점점 바보 같아. 아니 나만 봉사하나? 왜 제가 8분 43초를 강조하느냐 하면 백인 경찰이 흑인 모가지 밟은 게 8분 43초거든요. 주님이 밟아줘야 돼요. 진짜 그 뉴스 듣고 저게 복음이다. 우리는 놔두면 안돼요. 주께서 무릎으로 밟아줘야 돼요, 이렇게. 까불락거리고 촐랑대는 우리를 그냥 꽉 밟아줘야 되죠. 그래야 이게 우리가 복음의 해석이 돼요.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내 해석이 나와 버려요, 내 해석이.
“누가 봉사하려거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야, 이게 또 어렵네, 그 다음에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이게 확정된 거거든요, 확정된 것. 자 아까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처음에 뭐라고 했냐 하면 마지막 때라고 했죠? 복음은 무슨 용이다? 심판용이라고 했죠. 왜 심판용이라고 하냐면 세상 것을 안 받습니다. 왜 안 받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 받기 때문에. 받는다는 말은 그만큼 그것이 영광스럽다. 영광스러움이 단일화된 영광스러움이에요, 오직 그것밖에 없어요. 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다 이루심만 받아요. 영광스러워요. 확정된 거란 말이죠, 확정된 거. 그러면 이것이 확정된 게 복음이거든요.
여기에 봉사하고 설교하는 사람은 뭡니까? 복음의 해석이 되어야 돼요. 오늘 제목은 <복음의 해석>인데 복음의 해석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복음의 해석이 복음을 대체하면 안돼요. 이현리라는 그런 이단이 있어요. 대구 지방교회인데 위트니스파의 계열이거든요, 워치만 리 계열. 그 사람들 예배시간 설교 들어보면 뭐 말 한마디 해도 아멘, 신천지도 그거 베끼는 거 같아. 한마디만 하면 아멘이에요. 물 좀 마시고 아멘! 그러므로, 아멘. 진짜 이거는 북한도 아니고 왜 이러는지.
북한이 종교단체인 이유가 거기에 있죠. 무조건 따라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아까 소속감 때문에, 내가 누구냐를 거기에 기댐으로써 자기 자신을 규정을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죄인 아닌 쪽으로, 잘난 쪽으로 규정을 시키는 거예요. 그 이현리의 설교 주제가 뭐냐 하면, 사람들 끄는 방법이 뭐냐? 예수를 믿지 마세요. 예수 처음 믿을 때 초신자나 예수믿지, 믿지 마세요. 여러분이 예수입니다. 그거에요. 여러분이 예수라는 거예요. 한 때 인기 끌었어요. 아, 신선하다. 못 듣던 이야기다. 뭐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그 분위기 자체가 성령이 와서 자기를 잊어버려야 되는데 복음이 와서 자기를 잊는 게 아니고 우싸우싸하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거기서 몰입되어 가지고 자기를 잊어버려서 마치 자아를 부인하고 마치 은혜 받은 것처럼 그 분위기로 인간적인 집단으로 조작해내는 겁니다. 조작한다는 말은 노림수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내가 이 집회에서 은혜 받아야지. ‘은혜 받아야지’ 노림수 자체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방향이 반대방향이에요. 그냥 살면 되는데 은혜받아야 되겠다는 말은 또 무슨 욕심이에요, 그게. 은혜 받은 성도된 내 모습을 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는 겁니다.
여기 10절 끝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은혜를 받았다. 은혜란 말은 선물을 받은 거예요. 아까도 강의했는데 다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언제 감사합니까? 바로 자기가 죄인이고 더 살 이유도 없는데 집구석 돌아보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이 뛰고 있는 심장도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힘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힘입니다. 그 힘은 어느 용도냐 하면 너는 죄인이고 내가 너를 사랑으로 덮었다는 것을 해석하도록 우리에게 지금 목숨을 유지케 하시는 거예요, 어디를 가더라도.
복음을 해석하는데, 방법은 나는 죄인이고 주님의 사랑이 덮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유일한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너 봉사 많이 했네, 설교했네.” 하면 아니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 해석, 유일한 복음에 대한 그냥 해석자로, 스피커로, 앰프로써 우리가 이 땅에 주님으로부터 뜻이 있는 한까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주께서 허락하시는 한까지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제파악하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이 내가 그럴싸한 내 모습이, 이상형이 내가 아니라 이미 죄인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알게 된 그 선물을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봉사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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