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지옥생활 2005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5. 17. 09:21
2020-05-15 00:44:14 조회 : 127         
지옥생활 베드로전서 4:3 200514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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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  (IP:223.♡.58.204) 20-05-17 03:47 
서울의존강의20200514a 베드로전서4장 3절(지옥생활)-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3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3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여기 여러 가지 항목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여러 가지 항목들이 유혹거리가 돼요. 자, 이렇게 정리합시다. ‘이방인의 특징은, 즉 불신자들의 특징은 이 세상 것이 다 유혹으로 작용한다. 유혹과 같은 말로 시험거리로 작용한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현재 인간-남자, 여자-이 모두가 뭘 통과했어요. 뭘 통과했느냐?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의 유혹을 겪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현재 인간-남자, 여자는 유혹의 힘에 질식당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현재 모든 인간세계는요, 모든 보이는 것이 유혹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 세상과 함께 있다는 것은, 여기서 중요합니다,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명령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겁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서 이 점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무엇과 무엇을 대비하고 있느냐 하면 아담의 죄와 새 아담 또는 마지막 아담의 의를 나란히 배열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라 하는 것은 옛날 옛적 이야기잖아요. 현재 우리 인간세계에 인간들이 살고 있다면 분명히 옛날 옛적 이야기가 지금도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그 이후에 인류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그 효력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말이에요. 살아있는 거예요. 이 바이러스는 없어지지도 않아요. 대물림되죠. 계속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금지했는데 그 금지를 위반했거든요. 금했는데 그걸 위반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금지했고 인간은 위반했고. 한쪽은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한쪽은 그 따먹지 말라는 자체를 위반했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금지했는데 위반했다는 이 틀, 시작과 끝 지점이라는 이러한 원칙에다가 인간을 집어넣습니다. 인간들을 여기다 집어넣는다고요. 그러면 아무리 인간들이 세월이 지나서 자식을 낳고 낳아도 자식을 놓으면 놓을수록 금지하고 위반했다는 이 사실은 계속해서 살아있게 돼요, 살아있어요.

쉬운 예를 들게 되면, <고맙소>하는 노래가 있다 칩시다. <고맙소> 이걸 조항조가 불렀거든요. 조항조가 누군지 그런 거 프로필 알 필요 없어요, 그런 사람 있어요. 조항조가 불렀는데 이것을 김호중이 불렀어요, 김호중이 누군지 몰라도 돼요, 그런 거. <고맙소>라는 걸 불렀단 말이죠. 그러면 가수는 바뀌어도 노래는 그 노래가 그 노래죠? 그렇지 않습니까? <돌아와요 부산항>이후에 제일 히트했던 노래, <안동역에서>. <안동역에서> 불렀던 가수가 한둘이 아니란 말이에요. 노래는 계속해서 살아있죠. 안동역 가면 노래비 하나 만들어져 있는데.

계속해서 그 노래는 효과를 보는 거예요. 김목경씨가 작곡, 작사했고 그것을 김광석이 불렀고 김광석이 불렀던 것을 임영웅이 불렀던 <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 가수 누가 불렀건 상관없어요. 인구가 몇 명이고 몇 대를 더 지났나 관계없어요. 하나님께서 추궁하고 있는 근거를 계속해서 효과 있게 가져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죽어야 될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따먹지 마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자신의 엄명, 자기의 선언을 선언답게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게 된 그 사건을 과거 일회성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줄기차게 대대로 지속시키는 겁니다.

그걸 저는 ‘영향을 준다’,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끝장을 보는 거죠, 한 마디로. 갑자기 제목을 <끝장보기>로 하고 싶은데...끝장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어떻게 따먹었냐 하면 뱀의 유혹에 빠졌죠. 뱀의 유혹에 빠졌거든요. 그러면 그 후대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지금 선악과 있어도 따먹게 될까요, 아니면 끝내 참을 겁니까? 따먹게 되겠어요, 아니면 참을 수 있겠습니까? 끝내 따먹어야 돼요. 끝내 이기리라가 아닙니다. 끝내 따먹어야 돼요. 왜? 물려받은 게 그게 전부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의도하신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의 처벌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조치가 정당화되기 때문에.

“금지했잖아. 그런데 너네 위반했지?” 하는 이 원칙에 모든 인간을 거기에 다 집어넣습니다, 다 집어넣어요. 자, 여기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유혹이 나오죠. 유혹 때문에 따먹었다고 되어 있죠?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못 이긴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거예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금지시키느냐를 들추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누가 필요하냐? 아담이 필요하고 인간들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금지시켜 놓은 이유가 있어요. 금지했다. 금지했는데 인간은 금지한 것을 말을 듣지 않고 따먹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 악마와 인간은 단짝이 되었고 한패가 되었다. 하나님이 증명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누구 편이다? 악마 편이다. 인간이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그 내부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 마귀적 의도를 갖고 있다는 거죠. 마귀적 의도는 하나님께 할 수 있는 한 대들고 싶다는 겁니다.

교회도 안 나오고 성경공부도 참석안하고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더 땡기는 게 있는 거예요, 더 땡기는 게. 이게 유혹이에요. 그래서 성경공부 참석하는 게 굉장히 수상하고 이상한 일이에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어요. 유혹을 물리치고 성경공부 참석한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이런 건 없어요. 세상의 모든 걸 끊고 오직 말씀을 사모한다? 이건 미친 짓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그런 시건(철) 난 인간은 없습니다.

여기서 강제성이 동원됩니다. 강제로 복음 듣게 한 거예요. 강제로 구원시킨 겁니다. 구원은 내가 자발적으로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 유혹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자석에 S/N극 있잖아요. 만약에 S극이 천국이고 N극이 지옥이라면 인간이 자발적으로 N극이 당기는 힘을 거절하고 S극,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강제성이 있어야 돼요, 강제성.

여기까지는 여러분 이해하시겠죠? ‘이방인들의 특징은 이 세상 것이 다 유혹으로 작용한다.’ 강제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죠. 가능치 않아요. 그러니까 강제에요, 강제. 그냥 놔둬버리면 세상으로 도로 팽~하고 돌아갈 거예요. 고무줄이나 용수철 같은 게 있어가지고. 하나님께서 계속 당기지 않으면 팽~하고 다시 세상과 딱 붙을 거예요. 그런데 강제성이 있으면 강제로, 눈길은 여기 가는데 귀는 주님이 잡아당기는 거죠. 호기심 많은 애들 데리고 엄마가 시장이나 장난감 가게 들어가 보세요. 거의 강제적으로 질질 끌고 나와야 돼요. 저거 사 달라, 이거 사 달라, 떡볶이 사 달라 온 말해서 그 때는 쥐어 패면서 강제로 끌고 가잖아요.

그러니 불가능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자의적인,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죠. 후려치고 때리고 볼기짝 차고 그야말로 강제성을 동원해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꾸역꾸역 구원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주의 은혜에 기쁜 경우가 있죠? 그거 몇 초 가던가요? 이 세상이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무중력 상태도 아니에요. 이 세상은 강력한 흡입력이 있어요. 진공청소기 200만원짜리 모터 돌아가면 당구공도 막 빨려 들어간다고 홈쇼핑 보면 선전하거든요. 당구공 빨아들여서 쥐어가지고 이렇게 흡입력이 강력합니다. 블랙홀 같아요. 모든 것은 다 잡아당기는 거예요. 강력한 중력에 의해서 모든 것을 다 잡아당기는데 거기에 끌리지 않고 주님한테로 이끌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자,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무슨 힘이 있다? temptation, 유혹의 힘이 있죠. 그러면 세상이 잡아당기는 유혹의 힘과 정반대되는 힘이 누구로부터 나오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나오겠죠. 주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 “정말 우리가 주님한테 강제로 이끌렸을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무엇일까요?” 라고 물을 수 있어요. “우리가 강제적으로 끌릴 때 그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까요?” 라는 질문이 등장하겠죠? 왜냐하면 그걸 알아야 지금 내가 자의로 성경공부 나왔는지 강제로 끌려나왔는지 그걸 우리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마음 단단히 먹고 교회 나오고 성경공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주님의 강제성입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 각오, 그 결심 그거 얼마 못가요. 3,4월은 강제로 못나오게 해서 안 나오지만 5월에 또 나온다 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거든요. 누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강제성. 어떤 마음가짐이 될 때, ‘아 주님께서 나를 강제로 이끄는구나.’ 하는 마음이 될까요?

다 털리게 된 상황.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무가치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마음. 이게 주님의 강제성 동원입니다. 찬송가에 그런 거 있잖아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 다음에 나오는 찬송가 가사가 “이 쓸데없는 자”. 이 쓸데없는 자. 그런 마음이 들 때 주의 강제성이 강렬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면 이 말은 쓸모 있다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이미 세상에서 한번 튀어볼까 하는 유혹의 강한 힘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 쓸데없는 자’ 이걸 아주 함축적으로, 아주 어렵게 제가 표현하겠습니다. 이것은 뭐냐? ‘자기 평가지점이 소멸된 자’. 자기 평가지점, 쉽게 말해서 내가 잘했다 못했다를 내가 평가하는 내 평가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없애버리는 그런 경우.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뭐한다고 평가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3절에 봅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宴樂)과” 연락이라는 것은 파티 즐기는 것 이런 거죠, 킹클럽 나이트 클럽이죠. “무법한 우상 숭배” 자 이거 할 때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에 대해서 본인이 이것은 음란이고 이것은 음란 아니라고 평할 수 있는 그 평가지점이 있으면 그건 이방인이에요. “내가 뭐라고 그걸 평가해.” 이러면 그 사람은 주님한테 강제로 지금 천국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좀 이게 설명이 필요할 대목 같죠, 느낌상?

내가 누구를 평할 때는 그 순간 나는 세상의 옴파로스(Omphalos), 배꼽이 돼요. 중심점이 되어 버린다고, 내가 누구를 평할 때. “이 벽지가 되게 이쁜 거 같아요.” 그러면 벽지 전문가가 또는 우리 목사님께서 “니가 뭐한다고 함부로 그 입을 놀리느냐?” 이렇게 나올 수 있거든요. 벽지 전문가가 보고 있는데 “이 벽지는 참 예쁜 거 같아요. 꽃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분홍꽃이.” 그러면 벽지 전문가가 “내가 보기엔 적당한데 전문가 아니면 그 입 다물라.”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 입 다물라. 이 벽지만큼은 니가 중심점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 무법한 우상 숭배를 규정짓는 그 평가지점에서 너가 개코도 모르는 게 니가 뭘 안다고 이거는 음란이고 이거는 음란 아니고 정욕이고 정욕 아니고 술취함이고 술취함 아니고 그걸 니가 평가하지 말라는 거예요, 니가. 만약에 우리가 이것은 술취함이고 방탕이라고 평가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려요. 이렇게 평가를 잘하는 나를 설마 지옥 보내겠어? 라고 자기 자신을 우상화시킨다 이 말이에요. 절대화시킨다. 자기 평가를 절대화시켜요. 그러면 뭐가 됩니까? 아 쓸데없는 자가 아니라 갑자기 자기 자신이 쓸모 있는 자가 돼요. 말씀대로 세상을 평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 그런 사람인 냥 행세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신약성경 9페이지에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인간이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사람 같으면 이미 눈이 망가졌어요. 평가하는 평가기준이 망가진 거예요. 평가기준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눈이 망가진 입장에서 남을 보니까 그게 티로 보인다 이 말이죠. 안 망가졌으면 티로 안보일 건데 망가졌기 때문에 티로 보이는 그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평가하고 안하고는 누구 손에 달렸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주님에게 달렸지 네가 나서지 말고 네가 나대지 마라. 그리고 이건 남한테 이야기하는 거죠. 남한테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고 들보, 티에 있어서 네가 너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인지를 네가 스스로 자문자답해봐라. 진짜 네가 너 자신에 대해서 알기는 알아? 모르지? 너 자신도 모르면서 남의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이렇게 시비 걸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겁니다. 남의 일에, 너 자신도 모르고.

자, 오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제가 오늘 본문을 유혹으로 생각합니다, 유혹. 이방인들은 세상 것들이 뭐다? 전부다 유혹거리죠, 유혹거리입니다. 1. 저것은 유혹할 만한 것이다. 2. 저것은 유혹거리가 아니다. 라고 기준을 할 때 누가 평합니까? 내가 나 자신의 결심과 결정을 평하고 판단을 내리겠죠. 그거하고 아까 제가 얘기한, 주님에게 강제로 이끌리면서 성도는 어떤 마음을 가진다 했습니까? 나는 세상이나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릴 권한이 없다 했죠? 이것은 뭐냐? 내 인생,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동안 밥 먹고 산 것만 해도 황송합니다. 과분한 조치였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왜? 아무 쓸데없는 자를 지금까지 말씀 듣도록 인도해주셨으니까. 이것보다 주님의 강제성을 더 깊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강제로 나를 잡아당겼다’ 이 말보다도 ‘나는 지금 구원받을 자격 없어. 구원 안 해줘도 나는 주 앞에 뭐라고 할 수 없어.’ 어느 쪽이 더 강제성을 적나라하게 부각시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거죠, 자기 자신을. 나는 아무것도 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에서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가 있는데, 만약에 7개 아니고 49개 항목이 쫙 촘촘히 세밀하게 있다고 한다면 그 틈새를 사람이 어떻게 빠져나가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는 태풍불고 소나기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그 대나무 줄기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사이를 교묘하게 빠져서 나는 비 안 맞고 집에 왔다는 거예요, 무려 2km를. 이게 말이 돼요? 그 빗줄기가 오니까 빗줄기가 안 오는 틈으로 피해서 갔다는 거예요.

마치 적외선을 피해 나가는 톰크루즈 같아요, 미션 임파서블이에요, 이거는. 온 폼을 하면서 보물 있는 데까지 접근하잖아요, 인디아나존스 주인공보면. 고대 유물에 적외선을 해놓으면 그걸 다 피해가지고 사이사이를 빠져나와서 발각되지 않도록 뽑아내는 미션 임파서블. 그야말로 불가능한 사명같이 어떻게 촘촘히 박아놓은 이 모든 항목들을, 7가지지만 사실 더 확장되게 되면 여러 가지 항목, 49가지 될 수 있고 50가지, 100가지를 전부다 요리조리 피해가지고 ‘나는 죄지은 거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이 말이에요, 어떻게 가능하냐.

신종코로나 유행할 때는 “기침할 때 조심히 침이 튀지 않게 하세요.” 그러면 사람들은 기침해놓고 난 조심하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에서 법을 만들죠.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옷소매로 입을 막으라는 거예요. 누가? 보건복지부 장관이 법을 세워서 이걸 옷소매로 막으라 해놓고 지는 회견하면서 주먹으로 입을 막는다고. 옷소매로 가려야지. 그러면 소매로 가릴 때 각도를 60도로 할거냐 90도로 할 거냐 이게 또 나온다고요. 마스크 종류도 또 세밀해진다고요. 촘촘하게 세밀해지고 계속해서 그 리스트를, 카테고리, 조항을 계속해서 늘려 나가는 거예요.

그걸 무슨 수로 빠져나갑니까? 그걸 빠져나가겠다는 의도가 뭐냐 하면 내가 판단 가능한 것이라고 본인이 그렇게 우기기 때문이에요. ‘아, 저건 위반한 경우고 위반하지 않은 경우는 이렇다.’라고 본인이 판단 가능하다는 거예요. 판단 가능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아직도 판단력이 살아있는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그거 악마의 미끼에요. 악마한테 딱 걸렸어요, 그거는. 걸렸어요. 악마는 더 촘촘하게 만들어버릴 걸?

“기도할 때 몇 시간 기도하면 됩니까?”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기도할 때 몇 시간 기도하라고 되어있던가요, 사도바울은? 나훈아가 부른 노래에 이 노래가 있어요. <무시로>가 있다고. 무시로.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라. 그 다음에 복음을 전파할 때 하루에 복음 얼마나 전해야 돼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쉬지 않고 뭐해라? 복음을 전해라. 그 다음에 감사하라. 하루에 몇 번 감사할까요? 어떤 것에 감사할까요?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빠져나갈 틈이 없습니다. 빠져나갈 틈이 없어요. 오른 손이 범죄하면 그걸 잘라 버려라. 완전히 우리는 오른손, 왼손 토막 날 판이에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무슨 죄다? 간음죄다.

성경에서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이것을 제시할 때 이걸 누구보고 제시하느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아직도 끌리고 있는, 세상 자체가 유혹거리고 미련을 갖게 만드는 세상이라고 보는 사람에게 이 3절, 4절을, 방탕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제시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인간은 자기가 세상 것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면서 이것을 분석하고 연구하겠죠? 왜 연구하고 분석하겠어요?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서. 자기 행동은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성경에 나오는 지적질, 여기에 대해서 나는 거기에 빠져들지 않았다. 나는 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인간이다. 그것을 뽐내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거예요, 성경을. 그게 바로 유혹받은 거예요. 그게 악마와 단짝이 된 겁니다. 그렇게 자기 정당성 옹호하고 나 죄지은 적 없다. 고의로 죄지은 적 없다고 우기고 싶은 그 의도가 뭐에요? 그 의도가 뭡니까? 나는 그냥 가만히 놔둬도 가치 있다. 이 이야기거든요. 나는 그냥 가만히 놔둬. 나보고 교회 나오라 하지 마. 성경공부 하라고 하지 마. 나는 이대로 그냥 살래! 왜? 나는 가치 있으니까.

“선악을 아는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되어 있죠? ‘죽으리라’를 □쳐 봅시다. 선악을 제대로 분별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주어진다? (   )이 주어진다? 1번, 칭찬이 주어진다. 2번, 라면이 부상으로 주어진다. 3번, 천국 간다. 4번, 정녕 죽는다. 몇 번입니까? 정녕 죽는다 아닙니까, 정녕 죽는다. 선악을 아는 이 자체가 악마가 인간을 유혹케 한 결과에요. 선악을 몰라야 되는데 알아버렸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이미 사단난 거예요, 이거는.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선악을 아는 것과 단짝이 되어서 선악을 아니까 나는 쓸모 있잖아. 나 사람구실 하잖아. 나 괜찮은 인간이라고 쳐줘. 나를 그런 인간으로 대우해줘. 왜? 선과 악에 대해서 나는 빠삭하니까, 도사니까. 이거 아는 데까지 나 힘들었어. 성경공부 한다고 힘들었어. 주님은, “그게 바로 유혹이야, 이 인간아! 네가 마귀를 몰라도 너무 몰라.”

마귀는요,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있는데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마귀한테 배울 건 배우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싶은 거예요. 이런 나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라고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마귀짓이에요. 하나님 당신이 실수한 거야. 건전하고 괜찮은 인간인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것은 뭔가 행정착오지. 아니 천국을 나 같은 사람이 안가고 누가 가겠어? 무엇이 방탕이고 무엇이 음란이고 무엇이 정욕이고 무엇이 술 취함인지를 내가 모르는 게 아니고 다 알고 있는 이상 실천에 옮길 능력도 있는데 요리조리 피하면 그만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베드로전서 4장 3절은 나한테 해당사항이 없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에이 째버리자. 내 책 아니고 남의 책인데... 째버려요, 나한테 해당사항 없으니까.

음란 안하겠다, 정욕 취하지 않겠다, 술 취하지 않겠다, 방탕하지 않겠다. 그게 유혹인 줄 본인이 모르는 거예요. 마귀가 아담에게 한 유혹이 그 유혹이에요. 스스로 서라 이 말이죠. 언제까지 하나님한테 질질 끌려 살래? 나 봐라, 하나님한테 독립했잖아. 너도 나 따라 독립해. 바로 그 효과. 악마에 물들었다는 그것을 티내는 효과, 효력. 그것이 바로 3절에,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되어 있죠?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자, 이방인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뭐가 동원된다? 강제성이 동원되죠, 강제성. 강제성이 동원될 때 성도의 그 마음가짐은 어떻다 했습니까? 내가 나를 책임지고 나를 평가하거나 나는 이번 일을 잘했나 못했나 하고 측정할 그러한 평가지점이 나에게는 일체 남아있지 않다. 평가지점. ‘내가 여기서 저 사람을 평가할까? 2m 떨어져서 평가할까? 위에서 볼까?’ 하는 지점이에요, 지점. 평가안목을 갖고 있는 지점 자체가 나한테는 허락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을 평가할 의도자체를 나로부터 삭제당한 거예요.

내 앞가림도 못하는 게 뭘 남을 평가해. 내가 남을 평가할 입장이 됩니까? 그저 덤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는 들풀이 옆에 있는 들풀보고 “야, 들풀아, 너 왜 그리 못생겼느냐?” 그러한 권한이 있습니까?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그런 같은 처지에서 그럴 수가 없죠. 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안 듣냐?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진리와 비진리를 평가할 수 있는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아담 대대의 후손들에게 작용하는 죄의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죄란 비판하는 것 또는 평가하는 거죠. 평가는 남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여기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내가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해야 되는 것처럼.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마치 내 행동을 조심해야 될 주인공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거예요.

부산강의를 했는데 부산강의의 제목이 이거였습니다. <주체창조>에요. 사람들은 몸의 창조, 신체의 창조만 생각하죠.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더 나아가는 것은 나의 마음의 창조, 주체 창조에요. 창조라는 것은 없는 데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아담의 때의 후손들은 모두 죄의 지배를 받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5장에서 아담 말고 또 다른 분이 등장하죠. 누굽니까? 예수님이 등장하죠.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또는 새 아담, 두 번째 아담이라고 되어 있다고요.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 첫 번째 아담이 죄를 전수한다면 두 번째 아담은 뭐를 전수하느냐 하면 죄의 반대, 의를 전수하는 거예요. 그래서 죄는 기정사실로 쫙 깔려 있고,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리라 또는 의가 넘치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은혜가 더 넘치는 거예요.             
자, 의가 넘친다는 말은 아담의 후손들이 갖고 있던 악마의 생각이 예수님한테는 없다는 뜻이죠. 그걸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자기가 잘했다 못했다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점 노릇을 나는 할 자격이 없다. 그냥 주신대로 사는 거예요. 그걸 아담에서는 뭐냐. 은혜로 사는 겁니다.

로마서 5장 한번 볼게요. 5장 20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뭐한다? 왕 노릇 하는 거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17절에 보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뭐한다? “왕 노릇 하리로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죄가 왕 노릇 할 때 우리가 죄에서 자유로웠습니까, 아니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까? 죄가 왕이에요, 죄가 주인공이에요. 우리는 거기 쫄따구죠. 그러면 죄 안 지을 수가 없죠. 그렇죠? 죄 안 지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죄 안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은혜에 속한 사람이 그렇게 보는 거고,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이 말씀자체를 거부합니다. ‘멀쩡한 이성과 멀쩡한 양심을 가지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니 이것은 나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다, 모독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들이 베드로전서를 봅시다. 베드로전서 4장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고 또 방탕에 달음질을 한다는 이러한 죄에 대한 항목들이 나올 때에 그래, 나는 이 짓을 안 하고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결국 아담의 후손이에요, 새 아담의 후손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걸 피해보겠다는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죠.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게 죄에요. 내가 알아서 피해보겠다고. 죄의 왕 노릇을 못 피한다는 것이 명백한데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죄인이라는 나쁜 소리는 듣기 싫은 거예요. “내가 착실하게 살아서 피해 볼게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치 인형 눈을 붙이는데 1시간에 10개를 붙인다. 주인이 하는 말이 “아, 이거 버거울 건데요. 인형 눈 붙이는 거 쉽지 않습니다. 1시간에 10개 못 붙일 건데.” 그 소리 듣고 오기가 나가지고 “붙일 수 있습니다!” 하거든요. 그래서 10개를 줬어요. 과연 10개를 붙였어요. 이야기 끝났습니까? 그 다음에 100개를 갖다 줘요. “안될걸?”,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100개. 그 다음에 1000개를 갖다 줘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사탄의 수법입니다. 악마의 수법이에요. 처음부터 하나도 못했으면 거기에 시달리지는 않을 거잖아요.

“뭐 죄인인데 죄밖에 지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거 뭐 유격훈련도 아니고요.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 책임질 수 있습니다. 난 훌륭한 아빠,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너나 수습하세요, 너나. 참 이게...악마가 살살 인간의 약을 올리면서 평생 인간을 질질 끌고 다닙니다, 질질 끌고. 아니 그렇게 죄인 되기 싫은가요? 죄인 되는 그게 그렇게 싫은가요?

죄인 속에 합류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의가 없어요. 의는 죄 안에 들어있습니다. 팥죽 안에 옹심이 들었죠. 엄마가 분명히 옹심이 2개 넣었다 했는데 보이지를 않네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벌건 팥죽을 숟가락 가지고 휘저어야 거기서 하얀 옹심이 2개 나오죠?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가 의를 한다고 그게 의가 되는 게 아니에요. 또 새로운 범죄의 카테고리가 또 덮칩니다. 10개, 100개, 1000개 또 나와요. 내가 형제를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7번 하면 됩니까? 지 딴엔 7번 하죠.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 했어요. 안돼요.

어떻게 하면 돼요? 죄 속에 있으면서 죄인이 아니면서 억울하게 죄인 취급받는 분을 찾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누가 나와요? 주님이 나와. 주님이 거기서 왜 나와. 아니 하늘에서 계실 분이 그 시커먼 죄 속에서 왜 나옵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이 나만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거든요, 나만이. 예수님만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거예요. 다른 사람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만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러면 그 주님의 은혜, 선물이 오게 되면 주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 받아서 십자가 피로 죄 용서 받은 사람은 뭐를 자랑하겠어요? 지 죄 안 지은 거 자랑하겠어요, 아니면 지 죄 지은 거 자랑하겠습니까? 죄 지은 거 자랑하죠. 여기에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 연락, 무법한 우상 숭배 되어 있지만 정말 성도라면 “7개 정도가지고 되겠습니까? 7배에 7배에 7배에 7개 깔아놓으셨어야지. 나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7개만 못하는 게 아니고 7개의 7배도 못하는 죄인입니다.”라고 그렇게 나와야죠, 그렇게 나와야 된다고. 천하에 아무 쓰잘데기 없는 존재인 것을 본인이 기쁘게 그걸 수용해주는 겁니다.

지옥에 간 사람은 끝이에요. 지옥에 갔다가 다시 천국 간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6절에,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지옥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미 우리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기정사실화시키는 거예요. 7개뿐만 아니고 다른 모든 것도, 심지어 꽃에다 물 주는 것까지도 죄가 돼요. 왜? 물 줄 때 의도가 있기 때문에.

밭에 물 줄 때, “왜 물 주려고 합니까?” 물으면, “오이를 잘 키우려고 합니다.”, “오이 키워서 뭐 할 건데요?”, “오이 키우면 이거 장날에 농협에다 납품해가지고 돈 벌려고 합니다.”, “돈 벌어서 뭐 할 건데요?”, “돈 벌면 아이들 시집, 장가보내고 나도 먹고살고...”, “살아서 뭐 할 건데요? 잘 살았다고 소고기 사먹겠습니까? 도대체 살아서 뭐 할 건데요?” 거기에 대한 해답이 없네.

그러니까 개인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해답이, 끝이 안보여요. 끝도 모르면서 그냥 열심히 살려고만 해요. 이게 지옥 가는 짓인지 천국 가는 짓인지 내막도 모르면서 그냥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듣고 열심히 살았다는 소리 들으면서 열심히 살자. 끝. 그게 뭐냐? 방탕이라고 되어 있어요, 방탕. 방탕이란 사는 이유와 목적과 해답을 모르면서 사는 것, 이게 방탕이에요. 이게 방탕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하림  (IP:223.♡.58.204) 20-05-17 03:48 
서울의존강의20200514b 베드로전서4장 3절(지옥생활)-이 근호 목사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어려운 게 나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3절 끝에 나와요.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에 족하도다” 지나간 때. ‘지나간 때’라고 말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세상 끝의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 이미 지나간 때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사람이 있고 그 옆에 어떤 자동차가 있다고 합시다. 뒤에서 따라가면서 그 차를 세우려고 “서세요, 스톱하세요!” 이거하고 차가 가는 방향과 마주쳐서 차 앞에서 멈추라고 팔을 벌려 “스톱!” 하는 거 하고 어느 것이 효과적이에요, 차를 세우는 데에는? 차보다 더 앞에 서서 먼저 다 모든 걸 알고 스톱하라고 해야 되겠죠. 지금 베드로가 그런 입장입니다. “스톱하세요. 그 방향은 천국 가는 방향 아닙니다.” 팔 벌리고 스톱하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스톱하는 방향이 모든 시간의 앞에 선다는 조건이 붙어요. 지나간 때니까 모든 지나간, 지나간 때. 결국은 끝장 보는 날이 있어요, 끝장 보는 날, 끝장 보는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의 시선은 끝장 보는 그 해답을 이미 알고 지나간 때를 거꾸로 살펴보는 그러한 안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야, 그럼 베드로는 나이가 몇 살이야? 베드로는 도대체 최고 연령의 사람인가?” 이렇게 할 수 있겠죠. 그런데 5절에 보면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로”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모든 때의 마지막 지점에는 뭐가 있다고 합니까?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받는 그 때에서 모든 것은 스톱되게 되어 있습니다.  

기차가 달리다가 노선을 안바꾸게 되면 어떤 노선에 들어서게 되느냐면 ‘공사중’이라고 딱 막아놨는데 공사중인지 모르고 기차가 달려버리면 그 큰 기차가 탈선하겠죠? 막아놓은 둔덕에 박아버리면 기차가 선로를 이탈할 게 아니겠습니까. 모든 때가 마지막이 있다 이 말입니다. 심판하는 때. 그 심판하는 때, 그 때에 서서 수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예요. 이런 마음자세를 어떤 마음자세라 하느냐 하면 긴급성 또는 다급성 또는 절실함. 다 같은 말인데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네 자로 ‘목숨 걸고!’입니다. 베드로가 복음 전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목숨 건다는 뜻은 뭐냐 하면 내가 목숨 걸만한 진실됨, 진리, 참 해답, 정답, 이것과 내 목숨을 이미 바꿨다 이 말이에요. 그러한 여유만만과 자신감을 말하는 거죠, 자신감. 네가 게 맛을 알아? 하잖아요. 그건 신구 선생님의 자신감이잖아요. 자기는 게 맛을 안다 이 말이거든요. 그쵸? 네가 진리의 맛을 알아? 진실의 맛을 알아? 네가 해답의 맛을 알아? 그런 뜻이에요. ‘진실의 입’하니까 그거 생각나는데, 저도 로마에 가봤습니다만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에 보면 오드리 헵번하고 그레고리 팩인가 나오잖아요. 거기서 장난친다고 여기 손가락 넣으면 물어버린다 해서 손가락 푹 넣었다가 손가락 없이 나오니까 오드리 헵번이 깜짝 놀라는 장면 나오죠? 그게 진실의 입.

그러니까 진실은 무엇까지 요구하느냐 하면 네 목숨까지 아낌없이 갖다 버려도 괜찮을 만큼의 넉넉한 기쁨과 다행스러움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어야 그게 진실다운 거예요. 우리의 목숨까지 걸어도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판돈 여분을 두고 도박을 하게 되면 그 도박은 결국 도박에 제대로 매진하지 않는 게 돼요. 그러니 판돈까지 싹 갖다 밀죠. 조그마한 동그란 칩을 쓱 밀면서 “콜! 오늘 나 죽는다.” 다 갖다 들이밀죠.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콜”해서 갖다 내놨다. 그래서 목자는 목숨을 향하여 다 내놨는데 그걸 받아들일 양들은 또 목자와 같이 목자의 목숨을 걸고 내놔야 마땅하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 결심하거나 각오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진짜 진리와 진실 앞에서 나 까짓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 돼요. 첫째 시간에 한 중요한 것을 다시 하게 되면, 참으로 하나님께 강제성 있게 끌려가는 사람들은 뭐를 하지 않는다 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이거 지금 나는 음란이야, 정욕이야, 술취함이야, 이건 방탕한 거야, 연락한 거야 라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그렇게 책망하거나 자책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왜? 어차피 내 목숨은 다른 분이 가져갔잖아요.

내가 내 목숨 가지고 잘 다듬고 레시피 대로 요리를 잘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완전히 차압당한 거예요, 가져가버린 거예요. 개뿔도, 나한테 내 목숨도 없어요. 다른 분이 손질하고 있다고요, 다른 분이. 고기 잡았으면 회 전문가한테 맡겨야지, 지가 고기 잡고 회 뜬다고 비늘 냄새 다 피우면서 덕지덕지 비늘 묻어있고, 반은 비늘이고 반은 고기고 엉망진창 이러지 마시고 날카로운 칼을 가진 전문가한테, 일본 횟집에 가면 “이랏샤이마세” 하면서 인사하잖아요, “어서오십시오” 그런 전문가한테 맡겨서 곱게 회를 뜨도록 맡겨야 될 거 아닙니까?

로마서 14장의 말씀처럼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에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자꾸 내가 가지고 주물럭 주물럭 주물럭 엉망진창, 내 인생 도로 엉망진창이에요, 엉망진창. 그래서 진흙 뭉개듯 다 뭉개놓고 “주여, 이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바닥에다 내던지면서 “지옥으로 때려치워라! 이것도 인생이라고. 진작 맡기지, 그래. 무슨 솜씨 있다고 전문가도 아닌 게 네 인생을 네가 맡기지.” 왜 그렇게 했냐 이 말이에요.

주일 낮 설교 때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인생에서 여러 가지 겪고 저렇게 겪었을 때에, 자기 딴에는 인간극장 10편은 찍을 정도로 온갖 변수가 많은 인생을 살았다 칩시다. 그런데 천국에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네가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러면 성도가 할 일은 뭡니까? “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들이 짜장면 사 달라 해서 짜장면 사 준 뭐 그런 거, 그런 정도 밖에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베드로가 그렇게 산 밑에서 요란스럽다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주님이 이야기하는 거 보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갑자기 산 밑에 있었던 자기 인생을, 자기 기억을 다 걷어내 버립니다. 대신 여기, here, 영어로 여기죠, 여기가 good이다. "Here is good." 뭐 영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가 최고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모든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고.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실컷 아파봐라 이 말이죠. 천국 가면 못 아프니까. 그것도 경험해야 될 문제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천국 가면 아프고 싶어도 아프지 않아요. 울고 싶어도 웃기만 하는 거예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천국 가서 “슬픔이 뭐고? 비극이 뭐지? 아니 슬퍼한다는 게 어떤 감정이 슬퍼하는 거야? 눈물이 흐른다고? 거 희한하네. 왜 눈물이 흐르지?” 오히려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다 잊혀진 바 된다. 다 잊혀진 바 돼요.

그렇게 되려면 뭐가 우리 안에 투입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심판주 되시는 심판주가 우리에게 죄 용서하시는 은혜가 투입되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어서 죽게 하는 이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면 거기서 성도로 뽑혀져 나온 사람은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이 패턴을 계속 가져가는 공식에 동원되는 겁니다. 누가? 성도가. 성도가 동원되는 거예요.

한때만 은혜 받는 게 아니에요. 마치 아담의 후손이 한때만 죽는 게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후손들이 다 죽는 것처럼 의에 속한 새 아담이 주신 하나님의 의와 용서는 우리가 실수하고 죄지었다고 해서 취소되는 게 아니고 그 패턴을 패턴답게 하기 위해서, 은혜가 은혜답기 위해서 뽑혀져 나오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굴곡진 인생들이, 혼란스러운 인생들이, 요란스럽기 짝이 없는 인생들이, 신종코로나 걸리는 그런 모든 인생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 그까짓 것, 신종코로나 그런 것은 전혀 무섭지 않은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취소할 만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새 아담 안에서. 너무 엄청나죠. 너무 엄청난 은혜죠.

그래서 여기에 속한 사람은 후회 없도록 무슨 생활을 해야 하느냐 하면 지옥생활을 하시라 이 말입니다. 더 심하게 말해서 지옥을 알아서 만드세요. 왜? 이게 주님의 방식이니까. 터무니없어 보이죠? 난해해 보이죠? 좀 이상해 보이죠? 이런 말 있잖아요. ‘발라버린다’라는 말 있죠. 발라버린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정으로서 주께서 찾아와서 모든 인간을 발라버리는 그때가 무슨 때냐 하면 바로 심판의 때입니다, 무서운 심판의 때.

따라서 성도는 살아 생전에 이걸 경험해요. 주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정과 얼굴을 만납니다. 만나버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건 간에, 어떻게 살건 간에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무서움과 무서운 심판으로 발라버린 이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무서운 하나님이죠. 히브리서 12장에 나오잖아요. 천지도 진동할 정도로. (히브리서 12장 25~26절,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행한 그런 것은 거기서 깝죽대지도 못해요.  

모든 곳이 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자국들과 흔적들로 이 세상이 전부다 흘러내리는 거예요. 여기 벽지가 있지만 위에다가 꿀단지를 던져서 꿀이 흘러 버리면 꿀이 모든 표면을 발라버리잖아요. 모든 표면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진노가 발라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거 아니면 은혜가 아니에요.

모든 구석. 무관중 야구 경기. 삼성 또 졌다 이런 거. 두산은 또 이겼네. 모든 축구, 야구, 골프 경기부터 해가지고 청와대, 김정은, 모든 것에 뭐가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흘러내리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빠져나가고 피할 수가 없어요. 개미 10마리가 이 벽을 기어 올라간다 합시다. 꿀이 위에서 내려온다면, 완전히 꿀이 개미를 발라버리면 개미는 안보이고 꿀이 덮쳐버리죠. 마그마가 넘치면 그 가꾸었던 정원과 아담한 저택과 이 모든 것이, 수영장이 뭐로 변합니까? 완전히 마그마에, 용암에 의해서 다 덮여지잖아요, 발라버리잖아요. 산불이 일어나면 그 산불이 캘리포니아의 호사스러운 모든 저택들을 전부다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죠. 그게 발라버린다. 심판이다, 심판.

그게 바로 5절에 나오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3장 5절,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 봅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에 그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입니까? 여덟 명 앞에 뭐가 붙어 있어요? ‘겨우’. 발라버린 거예요.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모든 인간을 아예 저주의 꿀로써 이 벽지를 바르듯이 온 육지를 다 발라버린 겁니다. 어느 구석도 못 빠져 나오도록 발라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아담의 죄가 왕 노릇하고 있다는 이 실제성이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전에는 물로써 발랐지만 이제는 장차,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뭐로써 발라버립니까? 불로 싸질러버리죠. (베드로후서 3장 6~7절,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아까 안양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현재 이 세상은 아이스크림이라 했어요. 지구가 녹아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어떤 특정 지점이나 특정 지역에서 은혜 받은 것을, 은혜라고 그걸로 유지하고 소유하려고 하면 안돼요. 특정 지점, 특정 장소, 특정 시점에서. 5년 전에 은혜 받았다든지 내가 미국 가서 미국의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다든지 특징적인 그걸 자꾸 고집해버리면 이것은 은혜 받은 게 아니고 감정이 돼요. 일시적, 순간적인 감정이 된다. 자기감정은 의미 없어요. 사람이 은혜 받았다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아까 첫째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자기가 자평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경우와 은혜 안 받은 경우를 스스로 자평해버리면,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누가 평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심판하고 평한 셈이 돼요. 본인이 본인을 평할 때는 빠져나갈 구멍을 두고 평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데 온 천지를 발라버리면 이것은 사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발라버린 이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날 어떤 위인이 없다면 차라리 뭘 해야 돼요? 더욱더 지옥을 지옥답게 받아들이자 이 말이죠. 세상 어디, 미국이든 덴마크든 지옥이고 한국도 물론 지옥이고. ‘지옥가지 말자’가 아니라 아예 ‘지옥에서 살자’가 되어버려요. 그게 주님이 저주를 발라버려 놓은 데에 부합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무엇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은 어디서 들려오느냐? 모든 것이 저주로 한 틈도 빠짐없는 모든 틈새까지 전부다 하나님의 저주로 뒤덮였을 때에 비로소 거기서 이 복음의 고귀함과 가치성은 드러나는 거예요. 까짓 거 내 목숨정도는. 내 목숨을 담보로... 우리의 목숨은 담보 가치도 없어요. 담보도 아니에요. 내 목숨 더러워서 받지도 않아요. 가져가라, 도로 가져가.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죄짓는 거. 그거나 더 지어라, 나한테 들이밀지 말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저주가 될 때 그 무서운 하나님의 표정을 여러분이 보셔야 되는데... 보게 되면 그 앞에서 무서움을 완화시키고 달랠 수 있는 어떠한 제스처나 어떤 행함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내 책임 아니라니까요. 이것은 이미 죽었던 아담의, 우리 조상의 책임 때문에 우리는 그 형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내가 선악과 안 따먹었어요. 나보고 하지 마세요.” 라고 아직도 자기 자신의 살 궁리를 챙기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변명하지 말고요.

차라리 충분히 지옥 답자. 방탕, 음란, 정욕, 술취함. 다 이거 나한테 해당된다고 충분히 흡수를 하세요. 그래줘야 뭐가 돋보입니까? 마지막 아담의 의가, 그 하나님의 용서가 돋보이게 되어 있어요. “고맙습니다”가 절로 나오죠. 신종코로나 걸려도 고맙습니다. 이태원 킹클럽 가가지고 부비부비 하다가 걸려도 고맙습니다. 모든 일이 고맙고 고맙소. 또 나온다, <고맙소>가. 모든 일에 대해서 고맙고 고맙습니다.

신앙생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저주 발라놓고 하는 거예요, 저주 발라놓고. 자기 자신을 따로 떼어놓지 마세요. 저 사람보다 낫다든지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든지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발라놔버렸는데 너나 나나 전부다 심판의, 저주의 꿀이 묻어가지고 저주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잘나고 못나고 대조할 그러한 거리들이 아니잖아요.

여기 4장 2절에 봅시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육체의 남은 때가 오늘 강의대로 한다면 주님의 두 가지 원칙이 있죠. 하나는 범죄한 것을 따먹었다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원칙. 그 원칙을 원칙대로 저주로 그대로 밀고 가시는 하나님의 단호하심. 그것은 첫 번째 아담에게 벌어진 하나의 원칙이고.

또 하나의 원칙은 뭡니까? 두 번째 아담은 뭐라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죄가 더한 곳에 죄를 이기는 은혜가 넘치는 원칙이죠. 죄인보고 개과천선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죄인으로 살아. 모든 게 지옥인 줄 알아요. 주님도 알고 본인도 그걸 인정하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걸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의 의로부터 나오거든요.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그게 어떻게 된다?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의로 흘러넘치는 그 원칙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육체의 남은 때는 활용되게 되어있다, 쓰여지게 되어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뜻입니다.
                      
복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우리를 소유하죠. 내가 복음을 써먹기 위해서 가지는 게 아니고 복음이 날마다 우리를 써먹는 거예요. “이런 저주 받을 자도 하나님의 의인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되었다. 어찌 놀랍지 아니하냐.”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적으로 용납이 안 되고 새로운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게 되면 아까도 말했지만 스스로 자기를 자평할 권한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나 오늘 잘 살았다 오늘 못 살았다, 오늘 죄 몇 개 지었다. 그렇게 큐티 하듯이, 일기 쓰듯이 쓰는 그것은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일기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살까요? 잘라내세요, 가위로. 어제 일은 어제로 잘라내고 바이바이 하세요. 안녕, 어제. 그걸 제가 delete. 과거와 그 기억을, 오늘 순간 어제의 과거는 주님이 알아서 다 지워버렸어요. 다 용서하시고 다 지워버려 가지고 “나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서양 사람들 하는 표정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으응?” 하면서 표정 짓잖아요. 나랑 상관없다는 식으로. 시치미 뗄 때 표정 있잖아요. “5년 전에,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으응? 그게 나랑 무슨 관계있어요? 무슨 관계있는데?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았는데.”, “뻔뻔스럽다.” 뻔뻔스럽다고 하든지 말든지 간에, 마음대로 평하세요. 나는 이곳이 지옥인 줄 알기 때문에 나는 지옥에 충실하겠습니다. 지옥 삶에 충실하겠다.

사람이 죄 짓는 것은 본인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죄지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왜 죄짓는다고 했습니까? 유혹받지요. 유혹받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아직도 자기 자신이 유혹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잘만 하게 되면 나는 칭찬받을 수 있고 잘만 하게 되면 나는 훌륭하다는 소리 들을 수 있다.’ 라고 자기가 자기에 대한 유혹의 대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지금껏 내가 아내한테 못된 짓했고 참 나쁜 남편으로 살았지만 지금 예수 믿고 내가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다.’ 라고 자기를 자평하고 평가하는 것, 그거 실수입니다. 그거 실수에요. 인간은 안 바뀝니다. 물려받은 게 있는데 바뀔 리가 있습니까?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는데 바뀌어봤자 뭐 바뀌어요? 수술했습니까? 쌍꺼풀수술해서 바뀌는 그런 거 외에는 바뀔 수가 없어요. 인간은 바뀌지를 않아요.

예수 믿기 전에도 지옥사람이었고 예수 믿고 난 뒤에도 지옥 행세를 하는데, 다만 예수 믿기 전에는 지옥가라고 지옥사람으로 다루어졌고 이번에는 천국 가는 사람이라고 지옥 행위를 하는 거예요. 지옥도 같은 지옥이 아닙니다. “나 같은 인간이 다 천국을 가다니”라고 보여주기 위한 지옥에 충실하게 살게 만들어요, 지옥에 충실하게. 지옥에 충실하다는 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그냥 보통 삶을 의미하는 겁니다. 평범하게 사는 거예요. 그게 지옥 삶이에요. 자기밖에 모르고 맨날 자기 평가하고, 오늘 잘했나 못 했나 자기 측정하고.
              
6절 봅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아까 첫 번째 나온 설명은 제가 설명 드린 줄 아는데요. 복음이라는 것은 뭐가 전제되고 난 뒤에 복음이 나온다고 했던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옥의 저주로 발려진 상태. 모든 것이,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전부다 지옥 천지에서 복음이 나오죠. 지옥 천지가 되어야 복음이 복음답게 나오는 겁니다.

니느웨 성에 요나가 이야기할 때 요나는 니느웨 성이 멸망할 줄 알았어요. 거기서 복음이 나올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니느웨 성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회개하라고 했습니까, 망한다고 했습니까? ‘회개하라, 금식하라’ 했어요, 안했어요? 요나가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이거 쉬운데. 요나가 ‘회개하고 금식하라’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안했죠. ‘망할 놈 망해라’ 이렇게 했죠. 그게 직설 아닙니까, 직설. 있는 그대로 정답을 말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기로 작정했다. 40일 지나면 망한다. 바른 소리만 했다고요.

바른 소리만 하니까 예상 못할 현상이 벌어졌어요. 심지어 집 안에 있는 고양이, 개까지 전부다 금식 다 시켜버렸어요. 앞으로 이틀 간 사료 없다, 이런 거. 가축부터해서 모든 사람, 남녀는 물론 하고요. 아니 죽을 놈이 곱게 죽지 왜 금식해? 누가 놀랬느냐 하면 요나가 놀랐어요, 요나가.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보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 더 목을 조르소서. 저를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삐져버린 거예요.

이웃사랑, 이웃사랑 하는데 가장 좋은 이웃사랑은 다른 게 아닙니다. “당신 지옥 갑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이웃사랑이 없어요. 화를 내든 회개, 금식하든 그것은 이미 우리 선을 떠난 거예요. 우리가 괜히 짐작하지 마세요. 그냥 예상하지 마세요. 예상하고 안하고 할 게 아니고 그냥 고지식한 사람처럼 “지옥 갑니다. 당신은 지옥 갑니다.” 당신 살아봐야, 뭐 삼성그룹 가져봐야 지옥 갑니다. 문재인 당신 지옥 가요. 김정은도 마찬가지고. 그게 최고의 이웃사랑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응용문제. 최고의 자식사랑은 뭐겠습니까? 아, 이거 너무 쉽다, 응용문제가. 최고의 자식사랑이 뭡니까? “지옥 가서 뒈져라.” 이게 최고에요. 자식 방 문에다가 붙여 놓으세요. ‘지옥문’. 문패 하나 만들어가지고 ‘여기서부터 애 책상까지 지옥의 길’. 노크하면서 “지옥 잘 있나, 지옥아~ 지옥에서 뭐하노? 컴퓨터 게임하고 있지, 지옥아?‘ 지옥문이에요, 지옥문. 성이 지씨고 이름이 옥문이다. 지옥문.

가훈은 ’지옥을 지옥처럼‘ 이런 거. 가훈 멋지지 않습니까? ’더욱 지옥답게‘ 이런 거. 제가 팁을 드리는 거예요, 지금. 가정화평에 이만큼 좋은 게 없어요. 지옥을 더욱 지옥답게. 여기 들어온 자는 지옥의 맛을 보리라. 뭐 세파트 키워놨어요? 이 집에 오는 자에게는 평화가 있으리라 그런 건 천주교 신자들이 하는 짓이고. 이 집에 오면 지옥의 불 맛을 볼 것이다. 라면 끓여다가 고추장 확 타가지고 음식부터 전부 화끈한 지옥의 불 맛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 얼마나 재미납니까? 재미나는 일이에요. 참 재미있어요. 인생을 그렇게 재미나게 살아야 돼요. 그러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나 지옥 가라” 하죠. “나 지옥 가고 있어, 지금. 나 기분 좋아~ 같이 가자, 형제여.” 뭐 이렇게.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예수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주체가 확장하는 거예요. 이거 부산강의에서 한 거예요.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주체를 확장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를 준다는 것은 선물을 주는 거예요, 선물 또는 능력을 주시는 것. 성령의 능력을 주는 게 은혜죠. 은혜를 주셨다는 말은 자신의 범주 안에다가 강제로 집어넣는 거예요. 이거 강제입니다.

자,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강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강제를 뭐라고 했어요? 불가능성. 절대로 우리는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왜? 일체 우리의 어떤 능력도 우리의 처지를 변경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배제되어 있어요. 복음은 주님의 것이지 내가 요리할 수 있는 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이미 복음의 확장에 의해서, 주님의 뜻에 의해서 강제로 우리에게 복음이 침투되고 개입된다면 그제서야 우리는 새로운 아담의 공식을 위해서, 원칙을 위해서, 그 주님의 공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그 공식, 주의 작업을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뽑힌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 식이에요,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조정하거나 우리가 손에서 다룰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복음이. 그러니까 복음은 날개가 있어가지고 우리가 잡으면 잡히지 않아요. 새처럼 훅 날아가 버려요. 그런데 기다리면 어느새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일 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복음으로 다루기 위해서. 그럴 때 우리의 느낌은 뭐냐? 이게 웬 기적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그야말로 은혜. 은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죠. 내가 복음을 위해서 쓰여 진다는 게 웬 은혜입니까? 웬 기적이고 웬 불가능성입니까?

이렇게 감격할 때에 집구석에 있는 어떤 문제도 그건 시시한 문제고 사소한 문제에요. 하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요. 모든 식구들이 다 마땅히 지옥생활 하고 있는 가운데서 들려오는 것은 뭐냐 하면 천국백성 여기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이게 얼마나 화들짝 놀랄 일입니까? 오히려 천국 보고 놀라야 돼요. 내가 이렇게 지옥생활하면서도 천국을 가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요. 너무 황당해요.

그걸 제가 어떤 글에 댓글로 달았다 했죠. 제가 몇 번 했지만, ‘의외다.’ 이상하다. 내가 복음을 왜 알아야 되지, 내가? 그건 내게 필요한 게 아니고 주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온 거거든요. 목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은 목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천사한테 필요하고 주님한테 필요하기 때문에 천사가 목자에게 찾아가서 아기 예수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을 보고 전파하라고 이야기한 거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알고 전파하라고 한 것은 누구의 일이에요? 우리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쓰고 간 태울 필요 없어요. 내 일도 아닌데 뭐, 주님의 일인데 우리가 왜 간을 태우고 합니까? 이거 실적 없으면 또 이거 지옥으로 내치는 거예요? 그런 거 없어요. 주께서는 자기 백성 건지는데 실수하거나 빠뜨리거나 착오를 일으키거나 누락하거나 하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모든 천국 갈 백성에게는 필히 재해기금 100만원 줍니다. 하나의 누락도 없이 주께서 자기 보혈의 피를 반드시 줍니다. 나한테 주는 게 아니고 주신 자가 ‘나’가 되게 하는 거예요. 나한테 복음이 오는 게 아니고 복음을 받은 그 결과로서의 ‘나’가 되게 하신다니까요.

그걸 어떻게 아는가? 내가 무능력자가 되고 전도도 할 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쓸데없는 존재인 것을 늘 파악하게 하는 거예요. 자식을 하나 제대로 키우나 돈을 벌 줄 아나 뭐 병원을 제대로 경영을 할 줄 아나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노?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부부생활을 제대로 하나, 뭐 재주가 있어요? 하늘의 별을 따 올수 있어요, 달을 따 올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내 몸 건사하는 것도 못해요. 뭐 조금만 하면 피곤하다고 아이고. 뒷목 당긴다고 드러눕기나 잘하고 하지 도대체 내 한 몸,  내가 건사할 수 있는 그런 자질이나 능력이 애초에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옆 사람은 어떡합니까?” 그건 지옥 갈라고 저렇게 열심히 운동하고 헬스하고 요가하고 난리도 아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마음으로 지옥 가는 겁니다. 왜? 자기 자랑질 하기에 바빠 가지고 복음이 비취지를 않네. 복음이 안보여요. 복음이 나오지를 않아. 나 지금 지옥생활 한다는 그 고백이 나오지를 않아요. 난 나름 열심히 산다고 맨날 그 이야기만 나오지 “나 열심히 살아도 그게 지옥생활이야. 그게 저주에 발린 짓이야.”라는 그런 고백이 나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무슨 복음을 알아요.

자, 베드로전서 4장 그 뒤에 봅시다.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죽은 자는 죽어서도 죽은 자잖아요. 그러니 죽은 자에게, 이미 죽었던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은 이미 죽은 자나 아직 덜 죽은 자나 주님 보시기에 다 같이 거기서 거기.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는 것을 측정하는 심전도 있잖아요. 그거 아무 의미 없어요. 멀쩡하게 걸어 다녀도 죽은 자고 심장이 정지 돼도 죽은 자고 그런 겁니다.

어떤 멕시코 여자인가, 할머니는 10분 동안이나 심장이 정지돼서 의사가 죽었다고 판정 내리고 이제 땅에 묻으려고 흙을 파서 그 할머니 머리에다가 흙을 막 집어 던져 넣으니까 “아이고 답답해라” 하면서 깨어났다잖아요. 10일 만에 깨어났다는 거예요. 깨어나면 뭐합니까? 육으로 태어난 건 육으로 다시 태어나도 육인데. 깨어난다고 복음이 아니거든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내가 장담하는데 또 죽었어요, 또 죽었다고. 왜? 우리의 육체의 남은 때는 이 세상이 왜 지옥일 수밖에 없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는. 육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방탕 안할 수가 없고, 세상의 미련과 세상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육체가 있다는 그 자체가.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세상 유혹을 떨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지옥 가는 사람이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한다는 자체가 그런 지옥에서 뭐가 나온다? 비로소 복음의 가치가 나오는 거예요, 복음의 가치가. 불가능성이 나온다니까요. 지옥 갈 수밖에 없고 지옥 갈 짓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반전이 일어나죠, 천국을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공로는 누구한테 돌려야 되겠어요? 이 공로는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자에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 그러니까 때를 이미 다 완결시키신 분이 완결시키신 입장에서 우리를 이렇게 본다는 그 관점을 성도이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이미 최종해답을 다 쥐고 있는 분이 복음 이야기한다는 것은 복음만이 해답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해답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잊을까봐 다시 하겠습니다만 오늘 강의는 딱 두 가지에요. 선악을 알게 하면 죽는다. 금지된 것을 위반하면 죽는다. 금지와 위반에 대해서 주께서 계속해서 이 세상 끝 날까지 알려 주시고 또 병행해서 알려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치도록 두 번째 아담이 그 원칙을 세워서 같이 병행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경책은 누가 알아듣기 위해서 준 겁니까? 누가 알아듣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바로 은혜를 받은 자만 알아듣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다를 알고 있는 거예요, 두 가지 다를. 육체의 남은 때, 심판 그것은 이미 확정된 기정사실인 것을. 이것은 변동이 없음.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아담은 반드시 지옥생활, 저주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 주님의 대원칙임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신종코로나 잘 보내셨습니다. 아니 더 변종 보내가지고 9월달에 개학하지 말고 26년 지나서 개학하도록, 고3은 27년째 고3 치르도록 한다 할지라도 잘 하셨습니다. 왜? 복음이 중요하지 학교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7절 봅시다. 7절 보고 6절 설명할게요. 만물의 뭐가 가까이 왔다? 마지막 때. 마지막 때라는 것은 이미 해답이, 정답이 나온 때가 마지막 때에요. 정답 없음이 아니고 정답이 모호하다가 아닙니다. 정답은 더 가봐야 안다가 아니라 이미 정답은 내려졌어요. 복음.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친다. 그러니까 지옥생활, 죄짓는 생활 하라 이 말입니다.

뭐 기본이, 죄에 대해서 알아야 뭐 은혜도 알죠. 지가 자기한테 가능성, 착할 수 있는 가능성 붙들고 살아가면 그게 무슨 죄인입니까? 희망 있는 인간이죠. 구약의 욥이 그런 실수를 한 거예요. ‘이상하다. 내가 죄지은 것에 비해서 벌이, 고통이 너무 심합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구약 사람이니까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요, 구약 사람이니까. 아직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다 안 이뤘으니까 미완성 시대이기 때문에 계속 자기 선악적인 행함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내 행동 따라서 그것과 관련 됐다고 생각한 거예요. 몽땅 다 지옥가야 되고 몽땅 다 저주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못했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나중에는 욥이 그걸 알게 되겠습니다만. 못한 거예요.

그래서 이 베드로전서 4장 이야기가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이게 우리한테 정말 기쁨으로 다가와야 됩니다. 이것은 음탕한 거고 음탕하지 않은 거고 이렇게 구분할, 그러한 평가할 가치조차 나한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게 없어요. 내 딴엔 그게 방탕 아니라고 하지만 주님보시기에 뭐가 됩니까? 방탕이지 뭐, 방탕. 왜? 인간이 이 세상의 유혹에 끌리는 것 자체가 방탕이라 했잖아요. 다 잊어버렸죠? 잊어버리세요, 과거는 잊어버리는 거니까. 내가 세상에 더 미련 갖고 있는 게 방탕이에요. 그게 음란이고 음행이에요, 그게.

어디에 미련 갖고 있는 것, 이 세상에 대해서. 술취함이고 연락함이고 무법한 거고. 이미 인간이 망가진 거 뭐 자기 자신한테 미련을 가질 것 있다고. 잘 할 수 있었는데. 아닙니다. 잘 할 수 없어요. 잘해도 잘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잘함이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의인은 하나도 없고 의인된 순간도 없어요, 그냥. 끝까지 이 육체는, 아담의 몸은 죄를 발산하는 몸으로써 우리는 여기 작용하고 있습니다.

성도한테는 뭐가 우세하냐 하면 ‘금지하면 위반했어. 너는 죄야.’라는 그게 우세한 게 아니거든요. 이건 이방인들, 불신자들한테 우세한 거고 성도한테는 뭐가 우세하냐? 금지했는데 위반했다는 죄보다 뭐가 더 우세하다? 주님의 공로, 주님의 죄 씻음이 이 죄보다 더 우세하고 우열한 거예요. 더 센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옥가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거예요. 지옥에 가지도 안겠지만. 이미 심판해서 옮겼기 때문에 지옥못갑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주께서 우리의 목숨 붙들 때까지 지옥생활 할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자기가 뭘 해도 죄고 지옥이라는 것을 웃으면서 기쁘게, 자유롭게 보는 안목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미리 알아챈 해답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주께서는 복음 있느냐/ 없느냐로 기준한다는 것을 미리 알아챘다는 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귀한 정보를 우리가 획득한 겁니까?

자, 그렇게 될 때에 7절은 다음에 하고 6절,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 남의 평가에 기죽지 않는다. 남들이 나를 좋게 볼까, 나쁘게 볼까 거기에 감정선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죽은 자는 충분히 자유롭다고 제가 수요일날 이야기했죠?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처럼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 하나 믿고, 복음 하나 의지해서, 복음에다가 내 모든 걸 다 걸었기 때문에 어떤 현장이든 어떤 시간대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계획, 복음전파가 쏟아지기를, 그게 발산되기를 우리는 기대하게 되겠죠.

그래서 3절, 4절, 5절을 우리는 마음껏 외칠 수가 있어요. 나까지 포함해서 외칠 수가 있는 거예요. 주께서 심판하신다. 얼마나 이게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냐. 인생의 모든 길은 본의 아니게,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어디로 응집되고 집중되느냐? 햇빛이 초점을 맞추듯이. 이렇게 저렇게 흩어져 사나 결국 어디서 한곳에 모여요? 주님의 심판의 때에 다 모이게 되어 있어요.

다만 성도는 이미 심판에서 면제돼요.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자기가 지옥생활 했다는 것을 자인했거든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무얼 해도 죄가 넘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모르면 율법을 더 줘요. 율법을 더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장 20절,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계속 나온다는 것을 이미 은혜 받은 사람은 알아서 이걸 통해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은혜로 그게 다 해결이 되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의인되게 하셔서 천국 보냈다는 소식이 주님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소식. 이것을 거침없이 하이킥 하듯이 거침없이 이걸 부끄러움 없이 전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발산되는 모든 것이 복음이 세상보다 지구보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을 알리는 일에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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