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00514b 베드로전서4장 3절(지옥생활)-이 근호 목사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어려운 게 나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3절 끝에 나와요.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에 족하도다” 지나간 때. ‘지나간 때’라고 말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세상 끝의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 이미 지나간 때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사람이 있고 그 옆에 어떤 자동차가 있다고 합시다. 뒤에서 따라가면서 그 차를 세우려고 “서세요, 스톱하세요!” 이거하고 차가 가는 방향과 마주쳐서 차 앞에서 멈추라고 팔을 벌려 “스톱!” 하는 거 하고 어느 것이 효과적이에요, 차를 세우는 데에는? 차보다 더 앞에 서서 먼저 다 모든 걸 알고 스톱하라고 해야 되겠죠. 지금 베드로가 그런 입장입니다. “스톱하세요. 그 방향은 천국 가는 방향 아닙니다.” 팔 벌리고 스톱하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스톱하는 방향이 모든 시간의 앞에 선다는 조건이 붙어요. 지나간 때니까 모든 지나간, 지나간 때. 결국은 끝장 보는 날이 있어요, 끝장 보는 날, 끝장 보는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의 시선은 끝장 보는 그 해답을 이미 알고 지나간 때를 거꾸로 살펴보는 그러한 안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야, 그럼 베드로는 나이가 몇 살이야? 베드로는 도대체 최고 연령의 사람인가?” 이렇게 할 수 있겠죠. 그런데 5절에 보면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로”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모든 때의 마지막 지점에는 뭐가 있다고 합니까?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받는 그 때에서 모든 것은 스톱되게 되어 있습니다.
기차가 달리다가 노선을 안바꾸게 되면 어떤 노선에 들어서게 되느냐면 ‘공사중’이라고 딱 막아놨는데 공사중인지 모르고 기차가 달려버리면 그 큰 기차가 탈선하겠죠? 막아놓은 둔덕에 박아버리면 기차가 선로를 이탈할 게 아니겠습니까. 모든 때가 마지막이 있다 이 말입니다. 심판하는 때. 그 심판하는 때, 그 때에 서서 수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예요. 이런 마음자세를 어떤 마음자세라 하느냐 하면 긴급성 또는 다급성 또는 절실함. 다 같은 말인데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네 자로 ‘목숨 걸고!’입니다. 베드로가 복음 전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목숨 건다는 뜻은 뭐냐 하면 내가 목숨 걸만한 진실됨, 진리, 참 해답, 정답, 이것과 내 목숨을 이미 바꿨다 이 말이에요. 그러한 여유만만과 자신감을 말하는 거죠, 자신감. 네가 게 맛을 알아? 하잖아요. 그건 신구 선생님의 자신감이잖아요. 자기는 게 맛을 안다 이 말이거든요. 그쵸? 네가 진리의 맛을 알아? 진실의 맛을 알아? 네가 해답의 맛을 알아? 그런 뜻이에요. ‘진실의 입’하니까 그거 생각나는데, 저도 로마에 가봤습니다만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에 보면 오드리 헵번하고 그레고리 팩인가 나오잖아요. 거기서 장난친다고 여기 손가락 넣으면 물어버린다 해서 손가락 푹 넣었다가 손가락 없이 나오니까 오드리 헵번이 깜짝 놀라는 장면 나오죠? 그게 진실의 입.
그러니까 진실은 무엇까지 요구하느냐 하면 네 목숨까지 아낌없이 갖다 버려도 괜찮을 만큼의 넉넉한 기쁨과 다행스러움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어야 그게 진실다운 거예요. 우리의 목숨까지 걸어도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판돈 여분을 두고 도박을 하게 되면 그 도박은 결국 도박에 제대로 매진하지 않는 게 돼요. 그러니 판돈까지 싹 갖다 밀죠. 조그마한 동그란 칩을 쓱 밀면서 “콜! 오늘 나 죽는다.” 다 갖다 들이밀죠.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콜”해서 갖다 내놨다. 그래서 목자는 목숨을 향하여 다 내놨는데 그걸 받아들일 양들은 또 목자와 같이 목자의 목숨을 걸고 내놔야 마땅하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 결심하거나 각오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진짜 진리와 진실 앞에서 나 까짓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 돼요. 첫째 시간에 한 중요한 것을 다시 하게 되면, 참으로 하나님께 강제성 있게 끌려가는 사람들은 뭐를 하지 않는다 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이거 지금 나는 음란이야, 정욕이야, 술취함이야, 이건 방탕한 거야, 연락한 거야 라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그렇게 책망하거나 자책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왜? 어차피 내 목숨은 다른 분이 가져갔잖아요.
내가 내 목숨 가지고 잘 다듬고 레시피 대로 요리를 잘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완전히 차압당한 거예요, 가져가버린 거예요. 개뿔도, 나한테 내 목숨도 없어요. 다른 분이 손질하고 있다고요, 다른 분이. 고기 잡았으면 회 전문가한테 맡겨야지, 지가 고기 잡고 회 뜬다고 비늘 냄새 다 피우면서 덕지덕지 비늘 묻어있고, 반은 비늘이고 반은 고기고 엉망진창 이러지 마시고 날카로운 칼을 가진 전문가한테, 일본 횟집에 가면 “이랏샤이마세” 하면서 인사하잖아요, “어서오십시오” 그런 전문가한테 맡겨서 곱게 회를 뜨도록 맡겨야 될 거 아닙니까?
로마서 14장의 말씀처럼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에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자꾸 내가 가지고 주물럭 주물럭 주물럭 엉망진창, 내 인생 도로 엉망진창이에요, 엉망진창. 그래서 진흙 뭉개듯 다 뭉개놓고 “주여, 이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바닥에다 내던지면서 “지옥으로 때려치워라! 이것도 인생이라고. 진작 맡기지, 그래. 무슨 솜씨 있다고 전문가도 아닌 게 네 인생을 네가 맡기지.” 왜 그렇게 했냐 이 말이에요.
주일 낮 설교 때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인생에서 여러 가지 겪고 저렇게 겪었을 때에, 자기 딴에는 인간극장 10편은 찍을 정도로 온갖 변수가 많은 인생을 살았다 칩시다. 그런데 천국에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네가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러면 성도가 할 일은 뭡니까? “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들이 짜장면 사 달라 해서 짜장면 사 준 뭐 그런 거, 그런 정도 밖에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베드로가 그렇게 산 밑에서 요란스럽다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주님이 이야기하는 거 보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갑자기 산 밑에 있었던 자기 인생을, 자기 기억을 다 걷어내 버립니다. 대신 여기, here, 영어로 여기죠, 여기가 good이다. "Here is good." 뭐 영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가 최고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모든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없고.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실컷 아파봐라 이 말이죠. 천국 가면 못 아프니까. 그것도 경험해야 될 문제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천국 가면 아프고 싶어도 아프지 않아요. 울고 싶어도 웃기만 하는 거예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천국 가서 “슬픔이 뭐고? 비극이 뭐지? 아니 슬퍼한다는 게 어떤 감정이 슬퍼하는 거야? 눈물이 흐른다고? 거 희한하네. 왜 눈물이 흐르지?” 오히려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다 잊혀진 바 된다. 다 잊혀진 바 돼요.
그렇게 되려면 뭐가 우리 안에 투입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심판주 되시는 심판주가 우리에게 죄 용서하시는 은혜가 투입되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어서 죽게 하는 이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면 거기서 성도로 뽑혀져 나온 사람은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이 패턴을 계속 가져가는 공식에 동원되는 겁니다. 누가? 성도가. 성도가 동원되는 거예요.
한때만 은혜 받는 게 아니에요. 마치 아담의 후손이 한때만 죽는 게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후손들이 다 죽는 것처럼 의에 속한 새 아담이 주신 하나님의 의와 용서는 우리가 실수하고 죄지었다고 해서 취소되는 게 아니고 그 패턴을 패턴답게 하기 위해서, 은혜가 은혜답기 위해서 뽑혀져 나오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굴곡진 인생들이, 혼란스러운 인생들이, 요란스럽기 짝이 없는 인생들이, 신종코로나 걸리는 그런 모든 인생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 그까짓 것, 신종코로나 그런 것은 전혀 무섭지 않은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취소할 만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새 아담 안에서. 너무 엄청나죠. 너무 엄청난 은혜죠.
그래서 여기에 속한 사람은 후회 없도록 무슨 생활을 해야 하느냐 하면 지옥생활을 하시라 이 말입니다. 더 심하게 말해서 지옥을 알아서 만드세요. 왜? 이게 주님의 방식이니까. 터무니없어 보이죠? 난해해 보이죠? 좀 이상해 보이죠? 이런 말 있잖아요. ‘발라버린다’라는 말 있죠. 발라버린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정으로서 주께서 찾아와서 모든 인간을 발라버리는 그때가 무슨 때냐 하면 바로 심판의 때입니다, 무서운 심판의 때.
따라서 성도는 살아 생전에 이걸 경험해요. 주님의 무서운 진노의 표정과 얼굴을 만납니다. 만나버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건 간에, 어떻게 살건 간에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무서움과 무서운 심판으로 발라버린 이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무서운 하나님이죠. 히브리서 12장에 나오잖아요. 천지도 진동할 정도로. (히브리서 12장 25~26절,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행한 그런 것은 거기서 깝죽대지도 못해요.
모든 곳이 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자국들과 흔적들로 이 세상이 전부다 흘러내리는 거예요. 여기 벽지가 있지만 위에다가 꿀단지를 던져서 꿀이 흘러 버리면 꿀이 모든 표면을 발라버리잖아요. 모든 표면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진노가 발라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거 아니면 은혜가 아니에요.
모든 구석. 무관중 야구 경기. 삼성 또 졌다 이런 거. 두산은 또 이겼네. 모든 축구, 야구, 골프 경기부터 해가지고 청와대, 김정은, 모든 것에 뭐가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흘러내리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빠져나가고 피할 수가 없어요. 개미 10마리가 이 벽을 기어 올라간다 합시다. 꿀이 위에서 내려온다면, 완전히 꿀이 개미를 발라버리면 개미는 안보이고 꿀이 덮쳐버리죠. 마그마가 넘치면 그 가꾸었던 정원과 아담한 저택과 이 모든 것이, 수영장이 뭐로 변합니까? 완전히 마그마에, 용암에 의해서 다 덮여지잖아요, 발라버리잖아요. 산불이 일어나면 그 산불이 캘리포니아의 호사스러운 모든 저택들을 전부다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죠. 그게 발라버린다. 심판이다, 심판.
그게 바로 5절에 나오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3장 5절,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 봅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에 그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입니까? 여덟 명 앞에 뭐가 붙어 있어요? ‘겨우’. 발라버린 거예요.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모든 인간을 아예 저주의 꿀로써 이 벽지를 바르듯이 온 육지를 다 발라버린 겁니다. 어느 구석도 못 빠져 나오도록 발라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아담의 죄가 왕 노릇하고 있다는 이 실제성이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전에는 물로써 발랐지만 이제는 장차,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뭐로써 발라버립니까? 불로 싸질러버리죠. (베드로후서 3장 6~7절,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아까 안양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현재 이 세상은 아이스크림이라 했어요. 지구가 녹아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어떤 특정 지점이나 특정 지역에서 은혜 받은 것을, 은혜라고 그걸로 유지하고 소유하려고 하면 안돼요. 특정 지점, 특정 장소, 특정 시점에서. 5년 전에 은혜 받았다든지 내가 미국 가서 미국의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다든지 특징적인 그걸 자꾸 고집해버리면 이것은 은혜 받은 게 아니고 감정이 돼요. 일시적, 순간적인 감정이 된다. 자기감정은 의미 없어요. 사람이 은혜 받았다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아까 첫째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자기가 자평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경우와 은혜 안 받은 경우를 스스로 자평해버리면,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누가 평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심판하고 평한 셈이 돼요. 본인이 본인을 평할 때는 빠져나갈 구멍을 두고 평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데 온 천지를 발라버리면 이것은 사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발라버린 이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날 어떤 위인이 없다면 차라리 뭘 해야 돼요? 더욱더 지옥을 지옥답게 받아들이자 이 말이죠. 세상 어디, 미국이든 덴마크든 지옥이고 한국도 물론 지옥이고. ‘지옥가지 말자’가 아니라 아예 ‘지옥에서 살자’가 되어버려요. 그게 주님이 저주를 발라버려 놓은 데에 부합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무엇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은 어디서 들려오느냐? 모든 것이 저주로 한 틈도 빠짐없는 모든 틈새까지 전부다 하나님의 저주로 뒤덮였을 때에 비로소 거기서 이 복음의 고귀함과 가치성은 드러나는 거예요. 까짓 거 내 목숨정도는. 내 목숨을 담보로... 우리의 목숨은 담보 가치도 없어요. 담보도 아니에요. 내 목숨 더러워서 받지도 않아요. 가져가라, 도로 가져가.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죄짓는 거. 그거나 더 지어라, 나한테 들이밀지 말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저주가 될 때 그 무서운 하나님의 표정을 여러분이 보셔야 되는데... 보게 되면 그 앞에서 무서움을 완화시키고 달랠 수 있는 어떠한 제스처나 어떤 행함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내 책임 아니라니까요. 이것은 이미 죽었던 아담의, 우리 조상의 책임 때문에 우리는 그 형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내가 선악과 안 따먹었어요. 나보고 하지 마세요.” 라고 아직도 자기 자신의 살 궁리를 챙기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변명하지 말고요.
차라리 충분히 지옥 답자. 방탕, 음란, 정욕, 술취함. 다 이거 나한테 해당된다고 충분히 흡수를 하세요. 그래줘야 뭐가 돋보입니까? 마지막 아담의 의가, 그 하나님의 용서가 돋보이게 되어 있어요. “고맙습니다”가 절로 나오죠. 신종코로나 걸려도 고맙습니다. 이태원 킹클럽 가가지고 부비부비 하다가 걸려도 고맙습니다. 모든 일이 고맙고 고맙소. 또 나온다, <고맙소>가. 모든 일에 대해서 고맙고 고맙습니다.
신앙생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저주 발라놓고 하는 거예요, 저주 발라놓고. 자기 자신을 따로 떼어놓지 마세요. 저 사람보다 낫다든지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든지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발라놔버렸는데 너나 나나 전부다 심판의, 저주의 꿀이 묻어가지고 저주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잘나고 못나고 대조할 그러한 거리들이 아니잖아요.
여기 4장 2절에 봅시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육체의 남은 때가 오늘 강의대로 한다면 주님의 두 가지 원칙이 있죠. 하나는 범죄한 것을 따먹었다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원칙. 그 원칙을 원칙대로 저주로 그대로 밀고 가시는 하나님의 단호하심. 그것은 첫 번째 아담에게 벌어진 하나의 원칙이고.
또 하나의 원칙은 뭡니까? 두 번째 아담은 뭐라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죄가 더한 곳에 죄를 이기는 은혜가 넘치는 원칙이죠. 죄인보고 개과천선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죄인으로 살아. 모든 게 지옥인 줄 알아요. 주님도 알고 본인도 그걸 인정하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걸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의 의로부터 나오거든요.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그게 어떻게 된다?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의로 흘러넘치는 그 원칙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육체의 남은 때는 활용되게 되어있다, 쓰여지게 되어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뜻입니다. 복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우리를 소유하죠. 내가 복음을 써먹기 위해서 가지는 게 아니고 복음이 날마다 우리를 써먹는 거예요. “이런 저주 받을 자도 하나님의 의인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되었다. 어찌 놀랍지 아니하냐.”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적으로 용납이 안 되고 새로운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게 되면 아까도 말했지만 스스로 자기를 자평할 권한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나 오늘 잘 살았다 오늘 못 살았다, 오늘 죄 몇 개 지었다. 그렇게 큐티 하듯이, 일기 쓰듯이 쓰는 그것은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일기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살까요? 잘라내세요, 가위로. 어제 일은 어제로 잘라내고 바이바이 하세요. 안녕, 어제. 그걸 제가 delete. 과거와 그 기억을, 오늘 순간 어제의 과거는 주님이 알아서 다 지워버렸어요. 다 용서하시고 다 지워버려 가지고 “나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서양 사람들 하는 표정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으응?” 하면서 표정 짓잖아요. 나랑 상관없다는 식으로. 시치미 뗄 때 표정 있잖아요. “5년 전에,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으응? 그게 나랑 무슨 관계있어요? 무슨 관계있는데?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았는데.”, “뻔뻔스럽다.” 뻔뻔스럽다고 하든지 말든지 간에, 마음대로 평하세요. 나는 이곳이 지옥인 줄 알기 때문에 나는 지옥에 충실하겠습니다. 지옥 삶에 충실하겠다.
사람이 죄 짓는 것은 본인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죄지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왜 죄짓는다고 했습니까? 유혹받지요. 유혹받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아직도 자기 자신이 유혹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잘만 하게 되면 나는 칭찬받을 수 있고 잘만 하게 되면 나는 훌륭하다는 소리 들을 수 있다.’ 라고 자기가 자기에 대한 유혹의 대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지금껏 내가 아내한테 못된 짓했고 참 나쁜 남편으로 살았지만 지금 예수 믿고 내가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다.’ 라고 자기를 자평하고 평가하는 것, 그거 실수입니다. 그거 실수에요. 인간은 안 바뀝니다. 물려받은 게 있는데 바뀔 리가 있습니까?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는데 바뀌어봤자 뭐 바뀌어요? 수술했습니까? 쌍꺼풀수술해서 바뀌는 그런 거 외에는 바뀔 수가 없어요. 인간은 바뀌지를 않아요.
예수 믿기 전에도 지옥사람이었고 예수 믿고 난 뒤에도 지옥 행세를 하는데, 다만 예수 믿기 전에는 지옥가라고 지옥사람으로 다루어졌고 이번에는 천국 가는 사람이라고 지옥 행위를 하는 거예요. 지옥도 같은 지옥이 아닙니다. “나 같은 인간이 다 천국을 가다니”라고 보여주기 위한 지옥에 충실하게 살게 만들어요, 지옥에 충실하게. 지옥에 충실하다는 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그냥 보통 삶을 의미하는 겁니다. 평범하게 사는 거예요. 그게 지옥 삶이에요. 자기밖에 모르고 맨날 자기 평가하고, 오늘 잘했나 못 했나 자기 측정하고. 6절 봅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아까 첫 번째 나온 설명은 제가 설명 드린 줄 아는데요. 복음이라는 것은 뭐가 전제되고 난 뒤에 복음이 나온다고 했던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옥의 저주로 발려진 상태. 모든 것이,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전부다 지옥 천지에서 복음이 나오죠. 지옥 천지가 되어야 복음이 복음답게 나오는 겁니다.
니느웨 성에 요나가 이야기할 때 요나는 니느웨 성이 멸망할 줄 알았어요. 거기서 복음이 나올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니느웨 성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회개하라고 했습니까, 망한다고 했습니까? ‘회개하라, 금식하라’ 했어요, 안했어요? 요나가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이거 쉬운데. 요나가 ‘회개하고 금식하라’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안했죠. ‘망할 놈 망해라’ 이렇게 했죠. 그게 직설 아닙니까, 직설. 있는 그대로 정답을 말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기로 작정했다. 40일 지나면 망한다. 바른 소리만 했다고요.
바른 소리만 하니까 예상 못할 현상이 벌어졌어요. 심지어 집 안에 있는 고양이, 개까지 전부다 금식 다 시켜버렸어요. 앞으로 이틀 간 사료 없다, 이런 거. 가축부터해서 모든 사람, 남녀는 물론 하고요. 아니 죽을 놈이 곱게 죽지 왜 금식해? 누가 놀랬느냐 하면 요나가 놀랐어요, 요나가.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보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 더 목을 조르소서. 저를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삐져버린 거예요.
이웃사랑, 이웃사랑 하는데 가장 좋은 이웃사랑은 다른 게 아닙니다. “당신 지옥 갑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이웃사랑이 없어요. 화를 내든 회개, 금식하든 그것은 이미 우리 선을 떠난 거예요. 우리가 괜히 짐작하지 마세요. 그냥 예상하지 마세요. 예상하고 안하고 할 게 아니고 그냥 고지식한 사람처럼 “지옥 갑니다. 당신은 지옥 갑니다.” 당신 살아봐야, 뭐 삼성그룹 가져봐야 지옥 갑니다. 문재인 당신 지옥 가요. 김정은도 마찬가지고. 그게 최고의 이웃사랑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응용문제. 최고의 자식사랑은 뭐겠습니까? 아, 이거 너무 쉽다, 응용문제가. 최고의 자식사랑이 뭡니까? “지옥 가서 뒈져라.” 이게 최고에요. 자식 방 문에다가 붙여 놓으세요. ‘지옥문’. 문패 하나 만들어가지고 ‘여기서부터 애 책상까지 지옥의 길’. 노크하면서 “지옥 잘 있나, 지옥아~ 지옥에서 뭐하노? 컴퓨터 게임하고 있지, 지옥아?‘ 지옥문이에요, 지옥문. 성이 지씨고 이름이 옥문이다. 지옥문.
가훈은 ’지옥을 지옥처럼‘ 이런 거. 가훈 멋지지 않습니까? ’더욱 지옥답게‘ 이런 거. 제가 팁을 드리는 거예요, 지금. 가정화평에 이만큼 좋은 게 없어요. 지옥을 더욱 지옥답게. 여기 들어온 자는 지옥의 맛을 보리라. 뭐 세파트 키워놨어요? 이 집에 오는 자에게는 평화가 있으리라 그런 건 천주교 신자들이 하는 짓이고. 이 집에 오면 지옥의 불 맛을 볼 것이다. 라면 끓여다가 고추장 확 타가지고 음식부터 전부 화끈한 지옥의 불 맛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 얼마나 재미납니까? 재미나는 일이에요. 참 재미있어요. 인생을 그렇게 재미나게 살아야 돼요. 그러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나 지옥 가라” 하죠. “나 지옥 가고 있어, 지금. 나 기분 좋아~ 같이 가자, 형제여.” 뭐 이렇게.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예수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주체가 확장하는 거예요. 이거 부산강의에서 한 거예요.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주체를 확장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를 준다는 것은 선물을 주는 거예요, 선물 또는 능력을 주시는 것. 성령의 능력을 주는 게 은혜죠. 은혜를 주셨다는 말은 자신의 범주 안에다가 강제로 집어넣는 거예요. 이거 강제입니다.
자,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강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강제를 뭐라고 했어요? 불가능성. 절대로 우리는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왜? 일체 우리의 어떤 능력도 우리의 처지를 변경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배제되어 있어요. 복음은 주님의 것이지 내가 요리할 수 있는 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이미 복음의 확장에 의해서, 주님의 뜻에 의해서 강제로 우리에게 복음이 침투되고 개입된다면 그제서야 우리는 새로운 아담의 공식을 위해서, 원칙을 위해서, 그 주님의 공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그 공식, 주의 작업을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 뽑힌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 식이에요,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조정하거나 우리가 손에서 다룰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복음이. 그러니까 복음은 날개가 있어가지고 우리가 잡으면 잡히지 않아요. 새처럼 훅 날아가 버려요. 그런데 기다리면 어느새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일 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복음으로 다루기 위해서. 그럴 때 우리의 느낌은 뭐냐? 이게 웬 기적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그야말로 은혜. 은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죠. 내가 복음을 위해서 쓰여 진다는 게 웬 은혜입니까? 웬 기적이고 웬 불가능성입니까?
이렇게 감격할 때에 집구석에 있는 어떤 문제도 그건 시시한 문제고 사소한 문제에요. 하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요. 모든 식구들이 다 마땅히 지옥생활 하고 있는 가운데서 들려오는 것은 뭐냐 하면 천국백성 여기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이게 얼마나 화들짝 놀랄 일입니까? 오히려 천국 보고 놀라야 돼요. 내가 이렇게 지옥생활하면서도 천국을 가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요. 너무 황당해요.
그걸 제가 어떤 글에 댓글로 달았다 했죠. 제가 몇 번 했지만, ‘의외다.’ 이상하다. 내가 복음을 왜 알아야 되지, 내가? 그건 내게 필요한 게 아니고 주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온 거거든요. 목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은 목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천사한테 필요하고 주님한테 필요하기 때문에 천사가 목자에게 찾아가서 아기 예수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을 보고 전파하라고 이야기한 거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알고 전파하라고 한 것은 누구의 일이에요? 우리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쓰고 간 태울 필요 없어요. 내 일도 아닌데 뭐, 주님의 일인데 우리가 왜 간을 태우고 합니까? 이거 실적 없으면 또 이거 지옥으로 내치는 거예요? 그런 거 없어요. 주께서는 자기 백성 건지는데 실수하거나 빠뜨리거나 착오를 일으키거나 누락하거나 하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모든 천국 갈 백성에게는 필히 재해기금 100만원 줍니다. 하나의 누락도 없이 주께서 자기 보혈의 피를 반드시 줍니다. 나한테 주는 게 아니고 주신 자가 ‘나’가 되게 하는 거예요. 나한테 복음이 오는 게 아니고 복음을 받은 그 결과로서의 ‘나’가 되게 하신다니까요.
그걸 어떻게 아는가? 내가 무능력자가 되고 전도도 할 줄 모르고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쓸데없는 존재인 것을 늘 파악하게 하는 거예요. 자식을 하나 제대로 키우나 돈을 벌 줄 아나 뭐 병원을 제대로 경영을 할 줄 아나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노?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부부생활을 제대로 하나, 뭐 재주가 있어요? 하늘의 별을 따 올수 있어요, 달을 따 올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내 몸 건사하는 것도 못해요. 뭐 조금만 하면 피곤하다고 아이고. 뒷목 당긴다고 드러눕기나 잘하고 하지 도대체 내 한 몸, 내가 건사할 수 있는 그런 자질이나 능력이 애초에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옆 사람은 어떡합니까?” 그건 지옥 갈라고 저렇게 열심히 운동하고 헬스하고 요가하고 난리도 아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마음으로 지옥 가는 겁니다. 왜? 자기 자랑질 하기에 바빠 가지고 복음이 비취지를 않네. 복음이 안보여요. 복음이 나오지를 않아. 나 지금 지옥생활 한다는 그 고백이 나오지를 않아요. 난 나름 열심히 산다고 맨날 그 이야기만 나오지 “나 열심히 살아도 그게 지옥생활이야. 그게 저주에 발린 짓이야.”라는 그런 고백이 나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무슨 복음을 알아요.
자, 베드로전서 4장 그 뒤에 봅시다.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죽은 자는 죽어서도 죽은 자잖아요. 그러니 죽은 자에게, 이미 죽었던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은 이미 죽은 자나 아직 덜 죽은 자나 주님 보시기에 다 같이 거기서 거기.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는 것을 측정하는 심전도 있잖아요. 그거 아무 의미 없어요. 멀쩡하게 걸어 다녀도 죽은 자고 심장이 정지 돼도 죽은 자고 그런 겁니다.
어떤 멕시코 여자인가, 할머니는 10분 동안이나 심장이 정지돼서 의사가 죽었다고 판정 내리고 이제 땅에 묻으려고 흙을 파서 그 할머니 머리에다가 흙을 막 집어 던져 넣으니까 “아이고 답답해라” 하면서 깨어났다잖아요. 10일 만에 깨어났다는 거예요. 깨어나면 뭐합니까? 육으로 태어난 건 육으로 다시 태어나도 육인데. 깨어난다고 복음이 아니거든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내가 장담하는데 또 죽었어요, 또 죽었다고. 왜? 우리의 육체의 남은 때는 이 세상이 왜 지옥일 수밖에 없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는. 육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방탕 안할 수가 없고, 세상의 미련과 세상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육체가 있다는 그 자체가.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세상 유혹을 떨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지옥 가는 사람이 맞습니다.” 라는 고백을 한다는 자체가 그런 지옥에서 뭐가 나온다? 비로소 복음의 가치가 나오는 거예요, 복음의 가치가. 불가능성이 나온다니까요. 지옥 갈 수밖에 없고 지옥 갈 짓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반전이 일어나죠, 천국을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공로는 누구한테 돌려야 되겠어요? 이 공로는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자에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 그러니까 때를 이미 다 완결시키신 분이 완결시키신 입장에서 우리를 이렇게 본다는 그 관점을 성도이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이미 최종해답을 다 쥐고 있는 분이 복음 이야기한다는 것은 복음만이 해답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해답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잊을까봐 다시 하겠습니다만 오늘 강의는 딱 두 가지에요. 선악을 알게 하면 죽는다. 금지된 것을 위반하면 죽는다. 금지와 위반에 대해서 주께서 계속해서 이 세상 끝 날까지 알려 주시고 또 병행해서 알려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치도록 두 번째 아담이 그 원칙을 세워서 같이 병행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경책은 누가 알아듣기 위해서 준 겁니까? 누가 알아듣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바로 은혜를 받은 자만 알아듣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다를 알고 있는 거예요, 두 가지 다를. 육체의 남은 때, 심판 그것은 이미 확정된 기정사실인 것을. 이것은 변동이 없음. 세상 끝날 때까지 모든 아담은 반드시 지옥생활, 저주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 주님의 대원칙임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신종코로나 잘 보내셨습니다. 아니 더 변종 보내가지고 9월달에 개학하지 말고 26년 지나서 개학하도록, 고3은 27년째 고3 치르도록 한다 할지라도 잘 하셨습니다. 왜? 복음이 중요하지 학교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7절 봅시다. 7절 보고 6절 설명할게요. 만물의 뭐가 가까이 왔다? 마지막 때. 마지막 때라는 것은 이미 해답이, 정답이 나온 때가 마지막 때에요. 정답 없음이 아니고 정답이 모호하다가 아닙니다. 정답은 더 가봐야 안다가 아니라 이미 정답은 내려졌어요. 복음.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친다. 그러니까 지옥생활, 죄짓는 생활 하라 이 말입니다.
뭐 기본이, 죄에 대해서 알아야 뭐 은혜도 알죠. 지가 자기한테 가능성, 착할 수 있는 가능성 붙들고 살아가면 그게 무슨 죄인입니까? 희망 있는 인간이죠. 구약의 욥이 그런 실수를 한 거예요. ‘이상하다. 내가 죄지은 것에 비해서 벌이, 고통이 너무 심합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구약 사람이니까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요, 구약 사람이니까. 아직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다 안 이뤘으니까 미완성 시대이기 때문에 계속 자기 선악적인 행함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내 행동 따라서 그것과 관련 됐다고 생각한 거예요. 몽땅 다 지옥가야 되고 몽땅 다 저주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못했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나중에는 욥이 그걸 알게 되겠습니다만. 못한 거예요.
그래서 이 베드로전서 4장 이야기가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이게 우리한테 정말 기쁨으로 다가와야 됩니다. 이것은 음탕한 거고 음탕하지 않은 거고 이렇게 구분할, 그러한 평가할 가치조차 나한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게 없어요. 내 딴엔 그게 방탕 아니라고 하지만 주님보시기에 뭐가 됩니까? 방탕이지 뭐, 방탕. 왜? 인간이 이 세상의 유혹에 끌리는 것 자체가 방탕이라 했잖아요. 다 잊어버렸죠? 잊어버리세요, 과거는 잊어버리는 거니까. 내가 세상에 더 미련 갖고 있는 게 방탕이에요. 그게 음란이고 음행이에요, 그게.
어디에 미련 갖고 있는 것, 이 세상에 대해서. 술취함이고 연락함이고 무법한 거고. 이미 인간이 망가진 거 뭐 자기 자신한테 미련을 가질 것 있다고. 잘 할 수 있었는데. 아닙니다. 잘 할 수 없어요. 잘해도 잘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잘함이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의인은 하나도 없고 의인된 순간도 없어요, 그냥. 끝까지 이 육체는, 아담의 몸은 죄를 발산하는 몸으로써 우리는 여기 작용하고 있습니다.
성도한테는 뭐가 우세하냐 하면 ‘금지하면 위반했어. 너는 죄야.’라는 그게 우세한 게 아니거든요. 이건 이방인들, 불신자들한테 우세한 거고 성도한테는 뭐가 우세하냐? 금지했는데 위반했다는 죄보다 뭐가 더 우세하다? 주님의 공로, 주님의 죄 씻음이 이 죄보다 더 우세하고 우열한 거예요. 더 센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옥가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거예요. 지옥에 가지도 안겠지만. 이미 심판해서 옮겼기 때문에 지옥못갑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주께서 우리의 목숨 붙들 때까지 지옥생활 할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자기가 뭘 해도 죄고 지옥이라는 것을 웃으면서 기쁘게, 자유롭게 보는 안목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미리 알아챈 해답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주께서는 복음 있느냐/ 없느냐로 기준한다는 것을 미리 알아챘다는 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귀한 정보를 우리가 획득한 겁니까?
자, 그렇게 될 때에 7절은 다음에 하고 6절,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 남의 평가에 기죽지 않는다. 남들이 나를 좋게 볼까, 나쁘게 볼까 거기에 감정선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죽은 자는 충분히 자유롭다고 제가 수요일날 이야기했죠?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처럼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 하나 믿고, 복음 하나 의지해서, 복음에다가 내 모든 걸 다 걸었기 때문에 어떤 현장이든 어떤 시간대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계획, 복음전파가 쏟아지기를, 그게 발산되기를 우리는 기대하게 되겠죠.
그래서 3절, 4절, 5절을 우리는 마음껏 외칠 수가 있어요. 나까지 포함해서 외칠 수가 있는 거예요. 주께서 심판하신다. 얼마나 이게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냐. 인생의 모든 길은 본의 아니게,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어디로 응집되고 집중되느냐? 햇빛이 초점을 맞추듯이. 이렇게 저렇게 흩어져 사나 결국 어디서 한곳에 모여요? 주님의 심판의 때에 다 모이게 되어 있어요.
다만 성도는 이미 심판에서 면제돼요.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자기가 지옥생활 했다는 것을 자인했거든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무얼 해도 죄가 넘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모르면 율법을 더 줘요. 율법을 더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장 20절,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계속 나온다는 것을 이미 은혜 받은 사람은 알아서 이걸 통해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은혜로 그게 다 해결이 되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의인되게 하셔서 천국 보냈다는 소식이 주님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소식. 이것을 거침없이 하이킥 하듯이 거침없이 이걸 부끄러움 없이 전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발산되는 모든 것이 복음이 세상보다 지구보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을 알리는 일에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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