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3강-정박지120906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3. 17:39

 

2012-09-07 01:16:27 조회 : 549         
정박지 120906 이름 : 이근호 (IP:119.18.7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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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1.16) 12-09-09 15:37 
가락교회-다니엘2장(정박지)120906-3강a-이 근호 목사

제 3강a

다니엘 2장 할 차례입니다. 다니엘을 이렇게 누구든지 보게 되면 첫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뭔가 주변에 다른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다니엘은 느끼게 되죠. 사람들끼리 오밀조밀하게 사는데 이걸 외부에서 바라보고 있는 어떤 시선 같은 것을 느끼게 되죠.


여기 다니엘이 있고 다니엘 3친구도 있고 여기 느부갓네살 왕도 있는데 이 보이는 세계를 왕이나 왕의 신하가 보게 되면 이게 전부예요. 여기 ‘있다, 있음’이 전부가 되는 겁니다. ‘세상 뭐 별거 뭐 있노. 하늘에 달 있고 별 있고 사람 있고 산 있고 밭 있고 논 있고 바다 있고 이거 있는 게 전부지, 여기에 헷갈릴 일이 없다. 이게 전부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다니엘 전체를 읽어 본 사람의 느낌은 다른 어떤 눈동자 같은 거, 이것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어떤 시선 같은 거, 바깥에 포진돼 있는 어떤 다른 세계를 다니엘을 보게 되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 인간 세계 바깥에 있는 이쪽과 이쪽에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관여가 되고 어떤 식으로 이게 반응을 나타내느냐,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세계관이죠.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현재 요 있는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이거는 지나 개나 어린애나 어른이나 다 아는 건데, 예를 들어서 KBS에서 3일 다큐멘터리를 했다 말이죠. 어디서 했느냐 하면 얼마 전에 내가 다녀왔던 그 마을에서 했어요. 경주 괘릉마을에서 묘지를 이렇게 걸어서 땅 파놓은 데를 걸어서 연못에다 묘지를 했던 옛날 신라의 마을이 있는데 그런데 그 마을의 묘지의 은덕으로 인해서 우리 마을이 잘 산다는 그런 괘릉마을의 농촌 생활을 3일 동안 기자가 생활을 같이 하면서 찍었던 다큐멘터리라 말이죠.

그걸 이렇게 보게 되면 12시간 경과 후, 24시간 경과 후, 74시간 경과 후를 쭉 보거든요. 그럴 때 그 다큐멘터리에 그들의 농부와 그들의 옛날 선조들의 괘릉, 잔디밭, 농사지면서 서로 협동하는 거, 한우 키우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에 다니엘에 나오는 다른 시선이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걸 보면서 제가 뭘 느끼느냐 하면 다니엘과 비교해 보는 거예요. TV본다고 뭐라고 하는데 뭐라 하지 마세요.ㅎ

다니엘과 비교해 볼 때 다니엘과 저쪽 다큐멘터리 차이점이 뭐냐, 말이 다큐멘터리지 여러분들이 평소에 시장에서 또는 사회에서 사는 게 다니엘과 어떤 차이가 난다? 그런 생각해보신 적 있죠? 있나 물어보면 안 되잖아요. 회사 다큐멘터리 찍어 보세요. 맨 똑같다니까요. 다른 시선 없어요. 그냥 직원들 일하고 계획 잡고 프로그램 진행시키고 그런 거잖아요.

다니엘을 그게 아니잖아요? ‘다른 눈이 하나 여기 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것에 의해서 여기 이쪽 세계가 젊은 애들 말로 ‘쫄았다. 완전히 주눅 들었다.’ 다니엘이 그 기록입니다. 특히 여기 느부갓네살 같은 경우는 최고 아닙니까? 최고! 누구한테 주눅들 이유가 없어요. 최고인데 이 바깥에 있는 이쪽 분이 이상한 꿈을 꾸게 만들어 버리니까 느부갓네살 이 사람이 당황스러워서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해요. 그리고 자기가 꾼 꿈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해도 신하들은 ‘으흠, 우리 왕 돌았나?’ 이렇게 되고 어떻게 해결책이 없는 거예요.

이것을 칼 바르트란 신학자들은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위기라고 한다는 것은 그냥 낯선 세계의 접합 정도가 아니죠. 낯선 세계 접합하면 오히려 ‘신기하다, 반갑다.‘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반갑다‘가 아니라 ’고맙네‘가 아니라 뭐라고요? 위기, 뭔가 깨어진다는 것. ’야, 우리가 당하겠네. 우리가 그동안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3일 다큐멘터리 괘릉마을 아기자기한 이 3백년 마을 이 마을이 전부라고 여겼는데 여기에 갑자기 위에서 뭔가 조치를 해버리면 뭘 느끼느냐 하면 도대체 새로운 개념들이 나와요.

‘나는 왕이다.’ 했다가 뭔가 하나 쳐들어오면 ‘주여 왕이 뭡니까?’라고 질문해야 되고, ‘저 사람들은 신하다.’ 이렇게 나오다가 위에서 뭔가 계시가 내려오면 ‘하나님, 신하가 과연 무엇입니까?’ ‘나는 잘났다’ 이러는데 뭔가 하나 계시가 오게 되면 ‘과연 나는 잘난 존재입니까?’라는 물음이 생기죠. 위기에서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심각한 물음, 어떤 질문이 나오죠. 그런데 질문 대상이 없어요. 누구한테 질문하는지를 몰라요. 그냥 뭔가 당황스러워요.

이러한 다니엘에게 일어나는 현상은 육의 세계에 대해서 영의 세계가 쳐들어 올 때 공통적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 저 누굽니까?’ 또는 ‘주여, 날 찾아오신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들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영과 접촉이 된 사람 이예요. ‘아, 저 사람 내 딸입니다.’ 이랬다가 주께서 찾아왔는데 ‘딸이라는 게 과연 무슨 뜻입니까? 자식이라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마누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남편이라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개념을 새로 정립하자. 주께서는 니가 갖고 있는 개념을 새로 정립하자는 거예요. 돈이 무엇이며 사회가 무엇이며 국가가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이며 심판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십자가가 무엇이며 모든 개념을 다시, 다시 재정립, 정립 다시 하는 그러한 과제를 우리에게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걸 다시 정리한다면 다니엘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눈에 보이는 사람끼리 찍어놓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냥 다니엘 느부갓네살 그 수다 떠는 것 그게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다니엘도 아니고 느부갓네살도 아니고 우리끼리 땅에 있는 지평적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데서 그냥 침범하듯이 어떤 위기가 조성되면서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쳐다보게 되고 다니엘 또한 느부갓네살을 쳐다보고 과거 이스라엘 유다나라를 다시 한 번 재현해서 다시 해석을 하게 되고 모든 게 뒤죽박죽 가운데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끝났는가, 정도가 아니고 인류의 역사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냐, 무슨 목적으로 그전의 역사들이 왜 있어야만 했던가, 단순히 이렇게 끝난다가 아니라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역사를 왜 위기, 앞에서도 이런 역사들이 이렇게 진행되었어야 했는가를 다시 한 번 소급해서 다시 아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서 왜 이스라엘 말고 이방나라 바벨론은 왜 있어야 되는가,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쳐들어오는 하나님에 의해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의미로 이 땅에서 활동을 해야만 하는가, 그런 문제들이 죽 둘러져 있죠. 이쯤해서 어려우니까 제가 결론부터 미리 당겨주는 것 있잖아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활동과 아무상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활동이 아무 상관이 없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만들어져 왔습니다. 죄가 무어냐, 그 다음에 하나 더 알기 위해서 용서가 무어냐, 다른 말로 긍휼이죠. 죄가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은 그동안 죽 이어온 거예요.

이 죄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우상 섬기는 거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 섬겨서 망했다면 이야기를 그걸로 끝나야 됩니다. 옛날에 한 때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는데 우상 섬겼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야기 끝. 접자. 끝났다. 이렇게 돼야 될 텐데 그 우상 섬긴 이스라엘을 바벨론 품속에다 집어넣는 것은 단순히 우상 섬긴다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 있는 게 아니에요.

다른 거, 이 긍휼로만 구원되기 위해서 맞은편에 수립돼야 될 새로운 가치체제, 이게 바로 죄악입니다. 긍휼과 대비되어서.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이스라엘 살리고 이방나라 조진다. 이방나라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구원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구원 안 해줘.’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로 만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하면 긍휼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것은 죄에 해당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죄가 아니라 짓거나 안 짓거나 상관없이 죄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 이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상관없이 죄이어야 하는 거예요. ‘엄마, 나는 왜 황인종이야?’ ‘이유 없어, 너는 무조건 황인종이야.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니까. 엄마한테 태어났으면 황인종이야.’ 이건 내가 나쁜 짓해서 백인에서 황인종 된 게 아닙니다. 더 나쁜 짓하면 흑인 됩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인간은 무조건 죄인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죄 지었다.’가 아니라 인간은 죄가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겁니다. 선악과는 심어져야 되고 인간은 따먹어야 하고 그래서 죄는 드러나야 하고, 이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왜 기쁜 소식이냐 하면 이러한 원칙을 우리 손에서 조정하지 않고 우리 손에서 변경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굉장히 가뿐한 거예요. 이건 우리 선에서 어떻게 운명을 조절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봄 지나고 여름 오죠? 지난여름 더웠잖아요. 여름 지나면 뭐가 옵니까? 가을 오잖아요. 가을 오는데 여러분 해준 거 뭐 있습니까? 없죠. 그거라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는데 아무것도 우리가 한 게 없어요. 이게 기쁜 소식, 복음 이예요. 어떻게 헌금을 하고 어떻게 전도를 하고 아무 필요 없어요. 그냥 그렇게 ‘니는 천국 가야만 하리. 너는 긍휼을 입어야만 해야 될 사람’이예요. ‘긍휼이 왜 옵니까?‘라고 묻지도 마세요. 그런 질문 성립 안 돼요. 이렇게 물어요. ’긍휼이 무엇입니까?‘ 이러면 돼요. ’죄가 무엇입니까?‘ 이건 되는데 ’내가 죄를 알면 구원받습니까? 긍휼을 알면 구원받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안 돼요.

내 운명은 내 선에서 이미 끝나버렸어요. 내가 어떻게 조치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다루고 관리하고 조정할 대상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니엘은 주님의 계획에 말려든 사람입니다. 다니엘과 3친구의 운명은 전혀 자기가 자기를 손댈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일단 그렇게 시험적으로 결론을 내려놓고 이제부터 어려운 쪽으로 해보겠습니다.

자연 질서에 문화질서가 여기에 어떤 식으로 접촉이 가능한가, 자연 질서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여러분이 거기 있고 부모로부터 내가 태어났고 산은 저기 있고 별은 여기 있고, 그냥 있는 것. 자연 질서라 하는 것은 사람이 손댔다? 안 댔다?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게 자연 질서예요. 사람이 해를 안 만들고 달을 안 만들었잖아요. 태어나 보니까 하늘에 달 떠있고 별 떠있다 말이죠. 이건 자연 질서예요.

그런데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연 질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존재가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쫄릴 수밖에 없고 ‘예, 알아서 기겠습니다.’라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에 이 회사에 딴 거는 다 아는데 국정원에서 물건 하나 ‘사장님 이 물건은 국정원에서 대통령이 맡겨 놓은 물건인데 맡깁니다.’ 해서 물건이 여기 있으면 청소를 하면서 다른 곳은 함부로 하고 깨져도 괜찮은데 그런데 이쪽을 하다가 대통령이 맡긴 물건이 있으면 되게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자칫하다 깨지면 물어줘야 되고 책임추궁 당해야 되고 보통 문제가 아니라 말이죠. 폭발물일 수도 있고, 딴 거는 큰소리치는데 그쪽에 오면 큰소리 못 치는 겁니다. 큰소리 못 치니까 남겨뒀으니까 자기 맘 한 구석에 자유스럽지 못한 어떤 족쇄하나 있잖아요. 고 자리를 뭐로 메꾸느냐 하면 신의 자리로 채우는 거예요.

여기서 요기까지는 내 꺼, 내가 만들지 못하고 내가 손대지 못하는, 예를 들면 나의 미래, 내가 농사짓는데 비가 내리고 적절하게 햇빛 비취고 하는 이런 거, 우리가 갖지 못했잖아요. 그거는 ‘우리 신의 몫입니다.’ 요렇게 해줘야 신과 나 사이에 균형이 잡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종교라 이야기하고 이게 문화질서입니다.

자연 질서에 뭐를 입히는 겁니까? 문화질서를 입힘으로써 이 전체를 합해서 이걸 현실이라 합니다. 다니엘을 설명할 때 이 점을 반드시 언급해줘야 되는 이유는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자연 질서에다 뭐를 추가했습니까? 문화질서를 추가한 거예요. 그 문화질서를 추가하면서 나온 게 종교라 했죠? 느부갓네살은 이 종교로 만들어 국가를 집어넣은 겁니다.

자, 그러면 자연 질서는 반복입니다. 오늘 해가 동쪽에서 떴는데 내일은 서쪽 뜨고 다음 날은 남쪽 뜨고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해는 어디서 뜹니까? 동쪽에서 뜨죠. 이건 사람이 손댑니까? 손 안 댑니까? 이건 손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역사라는 것, 특히 역사라 하는 것은 실체가 있어야 됩니다. 그냥 역사 하면 말도 안 돼요. 무슨 역사? 니 가정 역사야? 국가 역사야? 옳지 국가 역사. 내가 소속된 바벨론 국가 역사는 자연 질서가 아니고 무슨 질서? 문화질서에 속하죠. 문화질서와 자연 질서를 합해서 사람들은 뭐로 본다? 이게 신이 만든 현실, 이게 현실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관심사는 뭐예요? 자연 질서에 있겠습니까? 문화질서에 있겠습니까? 문화질서에 관심 있죠. 신을 믿는 이유도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도 전부 다 문화질서, 다시 말해서 내가 속해 있는 국가의 번영된 역사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16세기 들어와서 이게 문제가 있어버렸어요. 무슨 문제냐 하면 서양의 중세에 카톨릭 있죠? 그게 무슨 질서입니까? 중세 카톨릭 교회는 자연 질서가 아니고 문화질서죠. 자연 질서에다 뭐를 더한다? 문화질서를 포함해서 이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보잖아요.

내가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동그란 원이 있고 길쭉한 타원이 있습니다. 타원은 중심이 2개예요. 원은 중심이 하나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이라면 천체 공정 괘도를,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원으로 만들겠습니까? 타원으로 만들겠습니까? 원이 완전에 가까워요? 쭈그러진 진 게 완전에 가깝습니까? 원이겠죠. 다들 그렇게들 알고 태양계를 바라본 거예요. 그런데 케플러란 사람이 우주의 괘도가 원이 아니고 초점이 2개인 타원이라는 걸 밝혀냈습니다. 그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문화질서 안에 신이 있죠. 신은 완전하죠. 그럼 우리가 완전한 것은 원이 완전한 거예요.

이런 삼각형이 완전합니까? 정 삼각형이 완전한 거예요? 정 삼각형이 완전한 거예요. 우린 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원이 완전한 거예요. 찌그러진 타원은 불완전한 거예요. 문화질서 가운데 신이 있잖아요.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이렇게 생각하죠. 문화질서가 자연 질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니까. 신이 자연 질서를 했다면 자연 질서하고 내가 생각한 문화질서하고 일치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 신은 똑바로 신을 믿고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거예요. 신을 똑바로 믿으면 죽어도 어디 가겠어요? 하나님이 만든 천국에 가죠. 왜, 살아있을 때 제대로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완전한 걸 알았으니까. 왜 문화질서에서 제대로 안 신이 죽고 난 뒤에 자연 질서를 만든 그 하나님이 우리가 문화질서 속에서 믿었다. 딱 일치된다. 그럴 때 우리는 죽어도 안심 푹 놓고 죽을 수가 있는 겁니다.

교회가 해야 될 일이 그 일이라. 교인들, 오는 고객들에게 ‘이거 믿으시면 안심하시고 오늘 죽어도 괜찮습니다. 푹~ 쉬세요. 우리가 알아서 정답 내놓습니다.’ 이렇게 할 때 안심 놓고 ‘믿습니다.’하는 거예요.

수요일 날 했죠? ‘믿습니다.’하는 것은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고 이건 주관성이 아니고 객관적이다. 뭐를 믿느냐, 예요. 어떤 객관을 믿는가가 믿음이고, 행함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주관적인 의지를 행하는 게 행함이라 했죠. 자기 의지를 믿는 건 아니에요. 자기 행함을 믿는 게 아니고 믿는다는 말은 어떤 믿는 객관적인 내용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 내용을 중세 문화질서가 교회가 해줬다니까요. 오는 사람에게. 신부한테 고해하면 하늘에서도 당신의 죄를 신부를 매개로 해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만약에 신부한테 입으로 발설 안 하면 당신은 그 죄를 갖고 있을 것이고 성당에 나와서 삐딱하게 앉아있는 신부에게 고하기만 하면 안 되고, 신부에게 고하고 신부가 용서를 해줬을 때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릴 것이라는 마태복음(16장 19절, 18장 18절)의 말씀에 의해서 당신의 죄는 사해집니다. 돈 내세요. 죄 많이 짓거든 돈 많이 내고 적게 지면 돈 조금 내도되고, 나중에 모아서 연말에 내고, 그런 문화질서를 자연 질서와 일치된다고 여기면서 중세가 그렇게 지내온 겁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오늘날 교회가 무슨 소리합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것, 우리 예배당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한 문화질서에 속한다. 이것은 주께서 인정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 교회를 저주하는 것은 곧 누굴 저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죠. 왜, 문화질서와 자연 질서가 일치된다고 그렇게 교인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왜 가르쳐야 됩니까? 그래야 그 교회에 와서 등록하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땡그랑’하고 합격이 되기 때문에.

교회들이 성만찬, 세례식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를 아시겠죠? 오는 손님들에게 모호하게 해버리면 장사가 될 수가 없어요. 확실한 걸 주고 돈 받고 확실한 걸 줘야 되죠. 돈만 받아놓고 어설프게 해버려서 구원도 못 받으면 돈 내놓으라 하면 환불해줘야 돼요. 안되잖아요. 그래서 ‘당신 교회 목사 엉터리다.’하는 것은 누가 더 화를 내요? 목사가 화내는 게 아니고 누가 화를 냅니까? 거기 다니는 교인들이 화를 더 내요. 자기는 우리교회 짓는데 돈 바치고 눈에 보이는 강대상이 있는 것을 믿는다는 거예요. 객관성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루터, 칼빈 거론하면서 교회 등록하지 않은 사람은 뭐도 없다? 구원도 없다.

소위 개혁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그것에 완전히 빠졌는데 그 교회가 만약에 엉터리라 해버리면 그 교회가 문제가 아니에요. 철석같이 믿었던 자신의 객관성, 자기의 믿음의 내용이 달라져 버리면 지금까지 믿은 것이 결국은 오늘밤 죽으면 자기를 천국에 못 가게 만드는 엉터리 믿음을 믿은 게 되니까 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청춘을 이 역사를 누가 보상해줘요? 누가? 누가 위로해 줘요? 안 되죠. 그러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고 인정해 달라, 교인들이 그것만 요구하는 거예요. ‘목사님 저 믿는 것 맞죠?’ ‘맞습니다.’ ‘됐어~’ 그것만 믿는 거예요.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정기적으로 성만찬에서 떡 떼고 세례만 주면 그거면 공부 안 해도 되잖아요. 물만 뿌리면 되고 떡만 먹으면 되는데 얼마나 편합니까? 그러면 자기는 확실히 구원받으니까. 그렇게 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착한 일은 김수환 추기경이 다하고 우리는 존경만 해주면 되고.

이게 방금 제가 이야기한 무슨 질서라 했습니까? 이게 문화질서죠. 그 문화질서가 오늘날 교회 내에 들어왔습니다만 다니엘에서 이 문화질서를 누가 이룬다? 바로 느부갓네살이 이루는 겁니다. 이 문화질서에는 자연 질서와 일치시키기 위해서 문화질서와 궁극적으로 하나로 만나기 위해서 여기 뭐가 필요 하느냐, 바로 역사(歷史)가 필요했던 겁니다. 우리 역사의 끝은? 천국에 골인이다. 그거였던 겁니다.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을 하면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저씨, 그 길 아닌데요. 사이드카가 인도하는 다른 선수들은 저쪽으로 갔는데요. 혼자 왜 이 길로 옵니까?’ 그래서 보니까 ‘아무도 없네.’ 그건 백날 뛰어도 허공을 뛴 것밖에 안 되죠. 헛짓 한 거예요.

그래서 내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방향이 지금 내가 지금 교회 다니고 하는 모든 문화질서가 실제로 자연 질서와 끄트머리는 딱 아다리, 만나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한 문제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이 역사를 끌고 가는 겁니다. 국가라는 문화질서를 끌고 가는데 느부갓네살이 끌고 가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이 끌고 가는 게 아니고 누가 끌고 가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끌고 사는 거예요.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면 바다로 끌고 갑니다. 야! 이게 어렵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바다의 짐승입니까? 땅바닥 기는 짐승입니까? 땅바닥 기는 짐승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뱀은 어디서 기어 나온 뱀 이예요? 바다에서 나오죠. 어떻게 해서 땅에서 기는 짐승이 어떻게 해서 바다에서 기어 나옵니까? 이거 요번 시간에 해결해야 돼요.

아! 보통 어려운 문제 아니죠? 처음부터 창세기 3장에 바다에서 뱀이 기어 올라와서 뱀이 꼬였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되는데 처음부터 그냥 에덴동산에 있는 뱀 이예요. 뱀이 어떻게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느냐, 그 중간에 뭐가 있느냐, 다니엘이 있습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이 뱀이 바다와 연계된 짐승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거죠.

그 짐승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로 문화질서를 구현한 느부갓네살이 그 역할을 단단히 해줘야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실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주께서는 짐승으로 보거든요.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고 느부갓네살 후임자도 다 짐승입니다. 짐승 1, 짐승 2, 짐승 3, 그런데 그 짐승은 나중에 다니엘 보면 나오지만 짐승들이 어디서 올라오느냐 하면 느부갓네살 이후의 짐승들이 바다에서 올라오죠. 맞죠? 바다에서 네 짐승 올라오죠. 거기에 유념해야 될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요번에 태풍 불었잖아요? 무안 저쪽에 분명히 태풍불기 전에는 섬이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태풍 부니까 파도가 넘치니까 잠시나마 섬이 뭐로 변했습니까? 바다 일부로 변해 버렸어요. 바다 물이 넘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섬겨서 범죄하고 난 뒤에 어느 품에 안겼느냐 하면 바벨론이라는 나라 품에 안깁니다. 이 바벨론의 품에 안길 때는 이스라엘도 생각했고 다니엘도 그렇게 다들 생각했습니다. 바벨론도 다른 이스라엘처럼 땅에 속한 나라라고 그렇게들 알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바다에 속한 나라라는 생각을 감히 어느 누구도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뜸들이지 말고 어렵지만 쉽게, 쉽게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이죠? 땅은 땅인데 무슨 땅? 약속의 땅이죠. 약속의 땅을 그냥 복주머니로 봅시다. 요걸 끈을 풀면 뭐가 나와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약속의 보따리니까 약속이 나오죠. 그런데 약속이 약속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많은 개념들이 묶어서 약속이 되는데 그 많은 개념이 뭐냐 여자, 땅, 율법, 의, 메시아, 인간, 하나님, 바다, 짐승, 악마, 말씀, 온갖 개념들이 약속이 구체화돼서 이 안에 담겨 있다 말이죠.



그러면 약속의 보따리를 툴툴툴 털어내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새로운 의미를 가진 땅이 나올 것이고, 새로운 의미를 가진 바다가 나올 것이고, 새로운 개념을 갖고 있는 창조 세계가 약속 속에서 펼쳐지겠죠? 그 중에 하나 땅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들은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했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11장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인생을 나그네 인생이라 했거든요. 그 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보고 나그네 인생이라 하면 누가 화를 내느냐 하면 서울역 앞에 있는 노숙자들이 화를 내요. ‘무슨 부동산 가진 나그네가 있노?’ 정작 나그네라면 누가 나그네다? ‘부동산 안 갖고 있는 거지인 우리가 나그네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부동산을 가지고 정착해 있어도 나그네예요. 그걸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땅을 많이 가지고 부동산을 가지고 재산을 가지고 지상의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성도는 무조건 나그네예요. 그거는 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언젠가 했는데, 애굽이 무슨 땅이냐 하면 창세기 10장에 보면 애굽이 함 땅입니다. 함 땅인데 셈과 야벳이 있잖아요. 가나안 땅도 함 땅 이예요.

땅이라는 게 이렇게 있다면 그 시대 맞춰서 땅의 개념이 성립되고 그 다음 시대가 되면 새로운 땅의 개념이 성립되고 그 다음 시대에도 새로운 땅의 개념이 생겨나요. 이게 어디로 가느냐 하면 결국 땅은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리스도가 만들어 내는 부활의 세계가 그게 약속의 땅 이예요. 그 약속의 땅이 조명발로 비추니까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3자로 그림자라 합니다. 그림자로서의 땅이죠.

그림자라 하는 것은 실체는 따로 있는 그것의 그림자죠. 현재 우리한테 생명이 있잖아요. 이 생명은 그림자로서의 목숨이고 생명입니다. 그래서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는 그림자 목숨 죽고 나흘 만에 그림자 목숨 살고, 그림자 목숨 날라 가고 나흘 만에 누이동생 보여준다고 그림자 목숨 다시 찾아오고, 군대 2번 간 거예요. 강남 스타일, 가수 싸이 같아. 훈련소 두 번 갔어요.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마르다 마리아가 오빠를 보고 울 때에 오빠 보고 안 됐다고 우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아줌마들이 울었잖아요. 운다는 것은 뭐를 뜻하느냐 하면 ‘아직 나는 살았는데, 아직 나는 안 죽었는데 아이쿠, 저 양반은 나보다 일찍 죽었노, 나는 아직도 이 귀한 생명 아직도 이렇게 간직하고 있는데, 세상에 불쌍한 우리 오빠는 먼저 죽었구나.’ 자기 생명이 생명인 줄 알고 착각해서 먼저 죽은 오빠에 대해서 그렇게 애닳아 하는 거예요. 그게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오빠는 ‘니 갖고 있는 생명 아니고 그림자로서의 생명이다.’ 진짜 생명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 이예요. 예수님 자신. 아, 이 말이 어려워요. ‘생명이 저기 있다.’ 하면 쉬운데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다. 예수님 부활의 세계가 생명이다. 그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으면 우리는 이미 죽어도 산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기존의 목숨과 생명, 이걸 사는 거라고 우기는 사람한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 날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떡으로가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할 때 에스겔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말씀이 작동하니까 그 기능 따라서 에스겔이 움직일 때 그 관계가 살았다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주의 말씀이 안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건 죽은 거죠. 그러니까 저 길에 다니는 사람은 다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거예요. 거의 대부분 다 죽은 사람들이라니까요. 다 좀비라니까요. 김혜선씨 표현에 의하면 이건 기계. 그냥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작동하고 밥 주면 좋아서 헤헤 웃고 없으면 ‘아이고 배고파라.‘ 하는 기계 같은 존재예요. 생명이 끊어진 거예요.

생명이 끊어진 것은 약속의 땅에서 못 삽니다. 다른 말로 하면 땅이 아니에요. 그래서 느부갓네살 보고 ‘니는 다니엘이 있는 곳에, 그게 땅이니까 땅에서 꺼져라. 나가라.’ 이 말 이예요. 그 땅에서 나가버리면 창조 때 땅이 어떻게 됐습니까? 바다에 둘러 싸여서 땅이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땅에서 꺼지면 다 어디예요? 그게 전부 다 바다죠. 바다에 사는 걸 짐승이라 합니다.

문제는 이거예요. 문제는 이스라엘 나라가 유일하게 약속의 땅에서 왔다는 거예요. 그림자가 되든 뭐든 간에 약속의 땅에서 들어온 이상 빼도 박도 못합니다. 지가 ‘나 약속의 땅에서 안 살래.’ 도망쳐도 도망칠 수가 없어요. 약속의 땅이 따라오면서 약속의 땅 되게 만드는 작업이 택한 백성에게 덮쳐옵니다. 우리 예수 믿지 맙시다. 그래야 돼요. 따라오면서 믿게 해요.

사실은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 생각 안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 생각 안 하는 인간을 동원해서 기꺼이 약속의 땅이 뭔가를 우리한테 귀신 씌우듯 우리한테 덮어씌워버려요. 덮어씌워버리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보자, 내가 지금 사는 게 나그네인가?’라는 것을 느끼게 만듭니다. 거지라서 나그네가 아니에요. 소유가 없어 통장이 없어 나그네가 아니라 다른 거 다 갖고 있으면서도 ‘나 분명 나그네지, 아마 나그네일거야. 나그네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그네 같은데.’ 뭐가 없어서 나그네가 아니라 있어도 나그네 같아. 이상해요. 말로 설명이 안 돼요. 이상스럽게 나그네 같아요.

방금 이것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느부갓네살 = 정박지, 정박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해변 가에 배가 한번 대보는 거죠. 오늘 이 항구에 한번 정박해 볼까? 그냥 잠시 멈추는 거죠. 오늘 저쪽 해변에 정박해 볼까? 고 정박. 정박이라 하는 것은 뭣과 뭐의 접촉점이냐 하면 바다와 육지의 유일하게 접촉선을 드러내는데 그 접촉선을 누굴 통해서?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뭐를 꿈꿨다? 문화질서를 꿈꿨다. 그 문화질서는 뭐를 노렸다? 자연 질서와 궁극적으로 일치 될 것이라고 믿었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은 뭐냐 하면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이것이 유일한 땅이라고 여겼어요. 유일한 땅이라고 여긴 거기에 진짜 약속의 땅에서 살아본 이스라엘의 패잔병들, 남은 자, 다니엘과 3친구가 옴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약속이라는 보따리를 가지고 오니까 갑자기 땅의 개념이 몇 개가 돼 버려요? 땅의 개념이 하나가 아니고 둘로 된 거예요. 니 땅이 땅이냐, 내 땅이 땅이냐, 어느 것이 주께서 창조할 때 의미 있던 그 땅이냐, 새로운 땅 개념이 발생되는 겁니다.

진짜배기 약속의 땅이 옴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땅이라고 우겼던 그들은 뭐도 밀렸습니까? 이건 땅이 아님이 드러나고 만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들의 모든 문화질서는 교회라든지 하나님이라든지 신학이라든지 국가라든지 역사라든지 모든 것은 진짜 약속 앞에서는 그것은 다 짐승들이 지어낸, 조작해낸 바다에서 조작해낸 바다의 확장 면이었던 겁니다.
 
이 정박지가 땅에서 보면 정박지지만 바다에서 보면 바다의 끝 지점 이예요. 바다의 끝 지점과 땅의 끝 지점이 느부갓네살 왕의 존재로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은 죽었다? 안 죽었다? 안 죽고 드디어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이게 역사라는 물결과 묵시의 만남이죠. 역사와 묵시의 만남!

그렇다면 자연 질서에다 문화질서를 덧입히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겠죠. 이걸 잘라버리고 자연 질서와 문화질서를 구분해서 잘라서 집어 던져버리면 남는 것은 자연 질서만 남겠죠. 그러면 진짜 있는 이 자연 질서는 결국은 누굴 위한 자연이었습니까? 바로 다니엘을 통해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된 그 자연 질서, 그 땅이요, 그 해요, 그 달이요, 그 별이지, 인간이 지 사는 걸 긍정하고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있어야 될 해와 달과 별은 아니었던 겁니다. ‘나 여기 있다, 자연아 날 먹여 살려라. 왜 비는 안 오느냐, 비야 와다오. 왜 남의 자식은 멀쩡한데 내 애는 아프냐.’ 그게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성립 안 되죠.

이건 성립돼요. ‘하나님이여, 나는 내가 지어낸 날 위한 문화질서는 다 죄악된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연 질서에 합한 사람이 돼 버려요.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면 어디 소속됩니까? 주님의 약속과 결부된 자연 질서 가운데 한 인간이 나가 되는 겁니다.

자, 이러면 첫째 시간에 대충 내릴 결론은 나와 있죠. 새롭게 뭘 없애는 게 아니에요. 그냥 놔두고 다니엘을 통해서 현재 기존에 있는 국가들하고 접촉을 시도해서 이 자연은 오직 나 하나 살리기 위해서, 우리나라 잘 되기 위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있기 위해서, 신은 존재한다고 여기는 그것을 뭐로 교체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에 속한 백성, 돌이 날아와서 우상의 발을 깨뜨릴 때 태산이 되잖아요. 그게 인자의 나라 아닙니까? 하늘나라를 위한 자연 질서에 편입돼야 이게 옳은 겁니다.

우리 속에 남아있는 나 위주의 것은 짐승의 것으로 바다 속으로 분류되고 그러한 우리를 그리스도 나라에 일치시키는 작업이 여기에 있어야 되겠죠. 그게 필요하겠죠.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를 그걸 잠시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모세와 다니엘의 비교, 모세와 다니엘이 어떤 차이점이 있고 어떤 일치점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죠. 모세는 독립투사죠. 웃통 벗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뛰었잖아요. 박 정우 선수가. 그걸 보고 감독이 우리 팀에 독립투사 들어왔다 이야기하거든요. 모세는 독립투사였습니다. 뭘 살리기 위한 독립투사였습니까?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죠. 그 백성 다니엘 시대에 없습니다. 기껏 다니엘과 3친구 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다 떨어져 버리고 없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거론한 것은 모세라는 인간 속에 바깥에 있는 엄청난 것이 모세 안에 이미 담겨있다는 거예요.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일 때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쳐 죽인 게 아니고 모세 품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비전과 꿈이 있었던 거예요. 박정우가 독도는 우리 땅 들고 있는 것이 지가 동메달 안 받기 위해서 그 짓 했습니까? 이참에 ‘일본 놈들아, 독도는 우리 것이다.’라고 알리고 싶어 하는 그 애국심이 안에 내장돼 있잖아요.

모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전체 우리 히브리인들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그런 게 다 들어있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각각 개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이미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제가 그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개인 속에 ‘나는 우리 집구석 밖에 몰라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밖에 나가면 태극기 나오고 하면 눈물 흘립니다. 인간 속에 국가라는 것, 내 민족, 내 국가, 나의 문화질서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뭐 어린애라고 적게 들어있는 게 아닙니다. 어릴 때 우리 배웠잖아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애들도 다 이게 들어있다니까요. ‘아이고, 나는 개인이니까 내가 뭐 압니까? 나는 조금밖에 생각 안 합니다.’ 그러한 핑계를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핑계 댈 수 있다? 없다? 핑계 댈 수 없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무한이 나와요. 요거 설명하고 10분 쉽시다. 1을 뭐로 나누면 ∞(무한)이 나오느냐,  1을 1로 나누면 1이죠. 1을 0.5로 나누면 뭐가 나옵니까? 2 나오죠. 1을 0.1로 나누면 10이 나오죠. 결국은 1을 0.00000001로 나누면 점점 뭐에 가까워요? 무한에 가깝죠. 1을 신이라면 신의 무한은 뭐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너무나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점점 더 느끼면 느낄수록 세상은 무한이 되겠죠.

그런데 보세요. 0.00000001이 자기는 작다고 생각하는데 동그라미가 몇 개입니까? 엄청나죠. 이 동그라미 숫자만큼 이게 뭐냐 무한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 ‘아이고, 난 단출해, 난 나밖에 몰라.’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거예요.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다? 무한(∞)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악마 들어있다. 우리 안에 바다 들어있고 짐승 들어있어요.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 안에 선악과 따먹었으면 이미 우리 안에 신 들어있는 겁니다. 작은 신 아닙니다. 큰 신이예요. 아주 엄청난 신입니다. 이것과 바깥에 있는 신이 어떤 대결을 이룰 것인가,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 (IP:203.♡.41.16) 12-09-12 16:27 
가락교회-다니엘2장(정박지)120906-3강b-이 근호 목사

제 3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모세와 다니엘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모세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기존의 인간에 대한 애착이라든지, ‘하나님 우리를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그런 정신 같은 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의 뜻에 거부했잖아요.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안 한다.’ 이렇게 할 때 모세가 자기의 뜻을 독립투사의 뜻을 꺾어버리고 그냥 자기 인생을 목동으로서 그냥 사는 거죠.

그럴 때 뒤 늦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 때 모세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모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부르신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 때는 모세가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거부할 수밖에 없죠. ‘나는 못합니다. 나는 말도 못하고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될 수 없습니다.’라는 뜻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겠다는 거예요.

만약에 구원됐다면 니 능력으로 구원된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전에 절대로 ‘내 능력으로서는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가 확증돼야 되죠. 그것은 뭣을 의미하느냐 하면 모세와 다니엘에 있어서 모세한테는 자기가 독립투사 해봤잖아요. 해보고 ’독립투사?‘ 아니라는 뜻이 분명하죠? 독립투사 아닌 자를 가지고 지금 독립투사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거예요. 그럼 누가 오해합니까? 모세를 추종하는 수십 만 사람들은 모세를 뭐로 오해합니까? 우리를 이끌 독립투사로 보죠. 그런데 모세 본인은 뭡니까? ’나는 독립투사가 아니거든요.‘ 라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는 우리의 독립투사다.’라고 이해하는 새로운 집단 이름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만드는 거예요.

다니엘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다니엘은 독립투사고 뭐고 간에 다니엘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는 다니엘과 다니엘 3친구를 포함해서 어느 인간도 해내지를 못해요. 왜냐 하면 모세는 자기 백성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걸 알고 뭔가 ‘야, 불쌍한 우리 백성, 한번 건져 볼까?’라고 시도를 할 수 있는 건덕지는 있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은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일 이예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 우리민족을 해방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유다나라가 바벨론에 너무 포로 잡혀 있으니까 제가 해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 모르는 새로운 아이템 하나 저한테 주세요. 그러면 제가 탁 풀어서 구원하겠습니다.’ 라는 낌새조차 할 수 있는 그게 없어요. 아무런 비전도 없고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자격도 박탈돼 있고 그야말로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 본인이 어떻게 종잡을 수가 없어요. 마치 브레이크 고장 난 벤츠 타고 내리막길 내려가는 것처럼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는 지경, 결국 다니엘은 절망이죠. 절망 가운데 있고 모세는 계속해서 희망을 품으면서 ‘이상해, 내가 한 게 아닌데 이건 분명히 내가 한 게 아닌데,’ 그런데 백성들은 누가 했다고 해요? 자꾸 모세가 했다고 했기 때문에 어려울 때는 ‘모세야, 당신이 기도해라.’ ‘아니야, 난 기도해도 소용없어.’ ‘당신이 기도하면 된다.’ 계속해서 모세에게 기대를 걸고 있고. 그만큼 희망이 있다는 이거거든요. 지금 우리가 약속의 땅에서 잘하면 살 수 있겠다고 희망이 있는데.

다니엘은 아예 희망이 없죠. 절망이죠. 절망이 뭐냐 하면 바로 지옥입니다. 모세와 다니엘의 차이점은 다니엘은 지금 지옥을 경험하고 있고 모세는 지상 일상의 생활을 경험하고 있고, 보통 그냥 살아가는, 보통 우리 장사하고 살잖아요. 이 삶, 그걸 경험하고 있고 다니엘은 지금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그야말로 이거는 빼도 박도 못하고 있는 지옥이죠. 그래서 다니엘 주변에서 일어나는 2가지 일이 뭐냐 하면 사자 굴에 들어간다는 것, 그것도 너무 많이 먹어서 더 먹을 게 없는 사자가 아니고 굶겨 놓은 사자 굴에 들어가고 이건 다리오 왕 때고, 또 하나는 다니엘 3친구는 불 속에 들어가죠. 불 속에 들어간다. 사자 굴에 들어간다. 이것을 모세가 경험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모세는 그런 것을 경험할 이유가 없죠. 왜, 계속해서 희망, 희망이 있으니까.

결국은 모세에서 다니엘로 넘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일말의 희망도 뭐로 바꿔야 한다? 일말의 희망도 절망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한테는 구원이 없습니다. 일말의 희망도. 야, 잘하면 숨통 트겠다. 그것도 막혀야 돼요. 논산 훈련소 화생방할 때 문 닫아놓는 거와 똑같아요. 안에 가스가 꽉 차 있어요. 이 세상은 지옥으로 꽉 차 있습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어디 창문 틈도 없고 창문도 없어요. 그냥 지옥의 가스에 꽉 차 있어요. 거기서 구원을 체험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 돼요. 구원은 생각도 하지 맙시다. 이건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구원이 안 되는 자를 주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천국을 만들어 내는 솜씨, 그 솜씨를 우리가 다니엘에서 보자 이 말입니다. 그야말로 반전의 이야기 아닙니까? 병 속에 있는 새가 빠져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거죠. 그것도 닫혀 있는데. 봉인된 유리병 속에 새가 있는데 새가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병을 깨면 되겠죠. 병이 깨진다는 게 무슨 의미냐, 이건 다니엘에서는 뭐냐 하면 땅의 개념 자체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땅의 개념이 이스라엘 때문에 2가지로 바뀐다 했죠.

이스라엘 사는 땅도 땅이고 바깥에 일반 국가가 사는 땅도 땅이라고 여겼던 그 시절이 있었었는데 이스라엘 사는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할 때 우리가 사는 땅은 약속의 땅이고 저쪽의 이방인이 사는 땅은 그냥 땅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했는데 둘 다 땅이라고 생각한 그것도 오해고, 우리 땅은 약속의 땅이고 저쪽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한 그것도 오해고 진짜 이스라엘, 유다 망하고 난 뒤에는 땅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땅이 없어질 때 나타나는 땅, 땅을 없애는 그 땅, 그 땅이 유일한 약속의 땅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에서 길게 할 거 없이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다니엘은 세상에 있는 우리의 모든 개념들을 다 지워버리고, 삭제해서 없애버리는, 모든 걸 없애요. 사람이고 땅이고 하늘이고 바다고 전부 다 모조리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걸 그림을 그리면 여기 느부갓네살이 있고 다니엘 있고 다니엘 3친구가 있잖아요. 이 전체를 ‘없다’고 그렇게 간주하는 거예요. 이게 없어져 버리면 하나님이 천지를 뭐했습니까? 창조하셨잖아요. 창조했으면 뭐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바다가 있든지 땅이 있든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이걸 없애면서 나타나는 것이 원래 의도했던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모든 걸 없애는 거예요. 그 만다라에서는 병 속의 새가 병이 깨져야 나온다는데 새까지 없애버려요. 전부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전부 다 없애버리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만드는가, 약속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약속이 누구냐, 약속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이잖아요. 인자가 약속이잖아요. 다니엘을 인자라 하잖아요. 인자에 의해서 등장하게 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없는 게 돼요. 여기서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하여 그들은 없는 존재로서 꼭 있어야 될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있다고 여겼던 것들은 전부 다 사실은 그런 게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있다고 확인하고 싶어서 문화질서를 챙기기 위해서 그동안 자연 질서를 문화질서 위주로 해석들을 그렇게 해온 겁니다.

자, 본격적으로 내용에 들어갑시다. 2장 1절에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다니엘의 모든 글들은 굉장히 신속하게 빠르게 전개됩니다. 완전히 핵심만 집어가요. 잠을 잤는데 꿈 때문에 잠을 못 이루어서 그 다음에 신하를 불러서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불러서 그 꿈의 내용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돼 있죠?

느부갓네살 왕이 왜 번민했을까요? ①, 지가 꾼 꿈 내용을 몰라서 그렇다.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안 맞죠. 왜냐 하면 일반 사람들도 꿈 꿔도 꿈은 원래 잘 잊어버리게 돼 있어요. ‘아, 어제 꿈 꿨는데 잊어버렸다.’ 잊어버리면 잊어버린 대로 그냥 일과 시작하면 되지, 그것 때문에 번민하지는 않잖아요. 그렇잖아요.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을 꿨는지 몰라요. 뭘 꿨는지 모르겠는데 그 꿈으로 인하여 느부갓네살 본인이 이게 있는 존재가 아니고 이게 없는 존재라는 감을 느낀 겁니다. 뭐가 정상이 아니야. 단순히 꿈이 아니고.

강의 다시 해야 돼요. 자연 질서가 있잖아요. 자연 속에 누가 있다? 바벨론 왕궁이 있잖아요. 바벨론 왕궁은 문화질서 아닙니까? 이게 자연 질서와 일치해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바깥의 꿈으로 인하여 이 전부가 부정당하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거부당하는 겁니다. 이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을 감을 잡은 거예요. 어떤 꿈인지 모르는데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의미 없이 여기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가 예수 믿을 때 필히 겪게 되는 체험입니다. 집에 돈도 있고 가정도 화목하고 다 잘 돼 가는데 어느 날 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그냥 맹목적이라는 겁니다. 이건 기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이렇게 해서 꾸역꾸역 시간을 때우는 것도 의미 없고 그렇다고 어떤 내 인생 의미와 목적도 모르는 채 자살하기도 뭐하고 내가 있다는 자체가 나한테 짐이 되는 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이 덩치가 있어야 되는 자체가 이걸 청소기로 치울 수도 없고 삽질해서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버려봐야 쓰레기통에서 ‘내가 왜 문제지?’ 이럴 테니까 버려도 소용없고 물속에 들어가도 안 되고 그야말로 진퇴양란이죠. 번민입니다.

내가 누군지 누가 알려주고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알려주고 인간은 왜 생겼는지 뭣 때문에 있는지 그걸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 요청, 그런 것이 어느 순간 찾아옵니다. 그런다고 느부갓네살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자기의 종들을 그렇게 다 관리하고 다루는 거예요.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렇게 다루시는 거예요. 오늘은 이렇게 웃고 이렇게 구부리고 하듯이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다니엘에 보면 이쪽 세계를 누가 바라본다? 이 바깥 세계에서 뭔가 조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말이죠. 다니엘 전제가. 거기에 대해서 여기에 함께 누가 있습니까?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다니엘도 의미 없고 아무 희망도 없고 이 자체가 뭐라 했습니까? 지옥이죠.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고 완전히 병 속에 갇힌 새처럼 갇혀 있다니까요.

누가 와서 빼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을 다니엘도 알아요. 우리 성도가 그래요. 성도가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 아닙니다. 주께서 건져줘야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괜히 착각하지 마세요. 지가 지식 가지고 발 돋음 밖에 안 돼요. 백날 해야 소용없어요. 그래서 늘 그냥 사시면 주께서 어떻게 조지든지 조진다고요. 그냥 사시면 된다 말이죠.

다니엘은 굉장히 빨리 진행됩니다. 그래서 꿈을 알게 해달라고 했죠. 이 순간에 느부갓네살에 있어서 자연 질서, 해와 달과 별 이게 중요하냐. 아니면 국가, 제가 아까 뭐라 했죠? 문화질서, 이 문제가 지금 문젯거리 입니까? 아닙니까? 문젯거리가 아니에요. 뭐냐 새롭게 침투한 Dream, 꿈, 도대체 꿈이 뭐냐 이 말입니다.

성도가 삶이 이래야 돼요. 지금 사업이 중요한 게 아니고 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도대체 뭐가 중요하냐. ‘예수님, 당신이 누구십니까?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이 주님보고 뭐라 했습니까?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했죠. 그때 사도바울의 눈이 안 떠지고 벙어리 되고 이건 문젯거리가 안 돼요. 우리나라가 장애인 메달 몇 개 따고 강남스타일 말 춤추고 이건 의미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어요. 다만 뭡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쉽게 말해서 ‘당신 모르고 당신이 나타난 이상 내가 당신을 모르는 한 내가 지금 살아도 이건 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뜻 이예요. ’내가 예수님 당신 모르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도 이건 더 이상 의미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 당신이 안 나타났으면 내가 하루에 애들 잘 키우고 어떻게 하고 이런 것이 의미가 있는데 막상 나타났다가 그냥 사라져버리면 헐~~ 괜히 안 온 것만 못해요. 이렇게 사람을 약을 올릴 것 같으면 찾아오지를 말든지, 이걸 가지고 통속적으로 말해서 이걸 ‘사랑’이라 해요.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차라리 사랑하지를 말걸. 괜히 사랑했어. 괜히 사랑해서 이렇게 아픈 걸. 그거 노래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바다가 육지라면, 진정 난 몰랐네. 당돌한 여자, 다 그런 노래예요. 모든 내용이 차라리 사랑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사랑의 아픔도 몰랐을 텐데, 괜히 찾아와서 이제는 우리는 다시 못 만나고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해서 돌아서면 가슴 아프고, 이문세 노래 들어보면 전부 그런 노래예요. 광화문 연가부터 해서 노래가 사랑의 아픔 이런 거.

찾아옴 자체가 완전히 다 깨져버렸어요. 그동안 문화질서가 다 깨졌어요. 문화질서, 자연 질서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꿈, 꿈을 밝혀내라. 이제부터 특명입니다. 비상사태예요. 국회 해산해 버리고 법원도 없어요. 이제는 내 꿈을 알아내라. 이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꿈을 모른다면 다 죽여 버린다.

이건 느부갓네살을 탓하지 맙시다. 어차피 느부갓네살부터 다니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은 어차피 지옥 안에서는, 지옥 자체가 다 죽어야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뭘 모를 때는?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고 꿈을 모르면 인간은 다 모르는 거예요.

여기서 약간 어려운 걸, 해겠습니다. diagram(다이아 그램)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과 비교되는 말이 뭐냐, program(프로그램)이예요. pro는 앞에, gram은 밑그림, program이라 하는 것은 미리 앞에서 시나리오를 짜서 그 짠 대로 진척하는 것을 프로그램이라 합니다. 그런데 diagram(다이아 그램)은 밑그림이 그때그때 같이 가는 거예요. 밑그림이 미리 만들어진 게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데 되어 진 상황 따라서 같이 밑그림이 창출되면서 새롭게 만들어 지면서 가는 거예요.

사업이 어느 쪽으로 해야 사업 이예요? 프로그램보다 diagram(다이아 그램)이 더 현실에 적용될 수 있겠죠? 그때그때마다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다이아로그(dialogue)라는 말이 뭐냐 하면 대화란 뜻이잖아요. 원 뜻이 dia는 관통하다, logue는 요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로고스, 로고스를 서로 이성과 지혜를 서로 관통하는 것을 대화라 하는 겁니다. 대화라 하는 것은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들을만한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걸 dialogue, 대화라 하는 거예요. ‘우리 대화하자‘ 하는 것은 농담하자는 뜻이 아니고 진지하게 진지한 알맹이 있는 내용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자는 이야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바벨론 나라에 프로그램으로 하는 게 아니고 다이아 그램을 주는 거예요. 관통하는 걸 줬는데 느부갓네살 왕은 뭘 내놓으라 하느냐 하면 프로그램을 내놓으라 하는 거예요. 앞으로 장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이건 다니엘을 해석할 때 다이아 그램으로 해석해야 될 것을 대부분 주석은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프로그램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세상은 이렇게 했다가 이렇게 끝난다. ‘헤헤, 그런 우리는 그 프로그램을 눈치 챘으니까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겠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다니엘에서 느부갓네살이 그때그때마다 누구의 일하심을 느꼈습니까? 여호와하나님의 일하심을 느꼈죠? 그러면 느부갓네살이 구원받았습니까? 그게 다니엘 읽는 사람 다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느부갓네살 왕이나 다리오 왕이 뭐라 합니까? 세상에 그런 찬양이 없어요. ‘다니엘아, 너희 하나님만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그러면 다리오 왕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느부갓네살이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그 왕들은 구원을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구원 못 받습니다.

사람이 프로그램을 알았다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고거 프로그램 안채로 지옥 갑니다. 십자가 아는 걸로 지옥 가는 거예요. 안다는 뜻은 내가 여기 있는데 저쪽에 있으니까 내가 아직 몰랐는데 ‘알았네.’ 하고 집어서 챙기는 거예요. 지금 느부갓네살은 그러고 싶은 거예요. 꿈, 꿈, 누구 좀 이야기해줘. 그 꿈을 알면 하나님이 준 프로그램이니까 계획이니까, 계획만 알면 나의 문화질서는 이제는 자연 질서와 일치될 수 있다? 없다? 있다. 고거 지옥 갑니다.

내가 하나님 재림 언제 오시고 하나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채면 나는 천국 간다. 고거 지옥 갑니다. 왜 그러느냐, 그 계획이, 그 다이아 그램은 그 느부갓네살을 악마로 규정하면서 만들어 가면서 계획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주체를 부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알아채고, 이런 거 없고, 그것이 나한테 오게 되면 ‘내가 알았고’ 한 그것이 와장창 깨집니다. 알기는 개 코나. 내가 알고 안 알고 관계없이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그걸 오늘 유튜브 설교에서 했거든요.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십자가 할 때 십자가만 달랑 끊어서 받아들이면 안 된다 했죠? 뭐도 받아들어요? ‘어리석도다.’를 이게 누구한테 해당된다? 바로 내가 어리석은 만날 영을 육으로 끊을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고 다이아 그램 속에 포함된 사람 이예요. 프로그램 속에 포함된 게 아니고 다이아 그램 속에 포함된 거예요. ‘주께서 나를 제대로 사용 하는구나’하는 것을 알아채면 되는데 사람은 고집이 있어서 지가 프로그램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자기 주체는 안 깨지고 안 깨진 상태에서 어딜 간다 말 이예요? 주체 안 깨지면 지옥 갑니다.

천국은 내 것은 다 깨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는 곳이 천국 이예요. 그럼 우리는? 우리는 거기서 면류관도 반납해야 돼요. 우리 자신을 위한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자신을 위한 세계가 아니거든요.

다이아 그램 알았으니까 해봅시다. 느부갓네살은 ‘무조건 꿈을 알아내.‘ 왜, 내 이 국가는 유지돼야 되니까, 나는 왕으로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미리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느부갓네살을 뭐로 바꿉니까? 짐승으로 바꾸죠. 인간이 아니고 짐승으로 일곱 때 동안, 나중에 설명하고, 짐승으로 바꾸죠. 그럼 짐승이 뭐를 만났다? 꿈을 만났는데 느부갓네살은 오해하기를 꿈이 나라는, 짐승이 아니고 인간인 나에게 꿈이 주어졌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건 아니거든요. 그건 잘못된 생각이거든요.

느부갓네살은 인간이 아니고 짐승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인간은 누굽니까? 다니엘입니까? 다니엘도 짐승한테 잡혔으니까 짐승보다 못한 짐승이죠. 짐승의 세계에 지금 포로 잡혀 있잖아요. 그러니까 짐승보다 못한 짐승이죠.

그러면 인간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이제 꿈이 만들어 낼 거예요. 누가? 꿈 자체가!! 예수님이 유일한 인간입니다. 유일한 인간에 포함될 경우에만 유일한 인간 이예요. 그래서 꿈이 날아와서 다니엘과 3친구를 뭐로 만든다? 짐승인 인간들을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이제 만들 겁니다.

그래서 약속의 자녀를 따로 약속의 자녀답게 만들 것이고,  약속의 자녀도 아닌 게 인간 행세하는 것은 짐승으로 만들 것이고, 인간은 어디에도 없어요. 약속의 인간이냐, 아니면 짐승이냐, 이 둘 뿐이지, 인간 따로 있고 약속의 자녀 따로 있고 이건 아니에요. 인간은 두 종류예요. 짐승이냐, 약속의 자녀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언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죽느냐, 사느냐, 사느냐, 죽느냐, 죽은 인간, 산 인간, 산 인간, 죽은 인간, 둘 밖에 없어요. 양이냐, 염소냐, 오른 쪽에는 양, 왼쪽에는 염소, 둘 중에 어느 거야? 난 둘 말고 딴 데. 안 돼요, 안 돼. 양이면 양이고 염소면 염소고, 나쁜 고기는 나쁜 고기고 좋은 고기는 좋은 고기지, 나쁜 고기 중간은 좋은 고기, 그런 고기 없습니다. 알곡이면 알곡이고 가라지면 가라지지. 집사님 내일 아침에 출근해서 사원들 죽 보세요. ‘알곡 한번 봅시다. 가라지 봅시다.’ 그 소리 듣고 어떤 사람이 ‘저는 알곡도 아니고 가라지도 아니고 중간쯤 하겠습니다.’ 하면 ‘그런 거 없습니다.’ 알곡 가라지 어중간한 것 없거든요.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알곡이면 알곡이고 가라지면 가라지고.

알곡은 뭐냐 하면 알곡은 없는데 주께서 새로 만들어 내는 게 알곡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다시 태어난다 하죠. 디오니소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철학자인데 그 뜻이 뭐냐 하면 ‘2번 태어난 사람’ 이예요. 옛날 철학가도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환장했던 모양이라. 이름도 디오니소스, 2번 태어난 것처럼 지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육으로 태어난 거지, 영으로 2번 태어나야 알곡입니다.

그러니 제가 말을 해놓고도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가능성이 있는 소리를 해야지 영으로 2번 태어나는 이것은 말이 그렇다 뿐이지 사실 이것은 성사될 수가 없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 성사될 수 없는 이야기가 왜냐, 환경 때문에 그래요. 환경이 느부갓네살 밑에, 바벨론 밑에 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로 하면 자본주의 밑에서 누구나 눌려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돈 없이는 못 살거든요. 이제 본색 나온다. 돈 없이는 못 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거듭 내어날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되는 거예요. 그 속에 갇혀 있으니까.

이거 하면 얼마 줍니까? 항상 우리는 그거뿐이라니까. 우리가 믿는 객관적인 것은 바로 내가 돈을 좋아하는 내 문화질서와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것들이 내 문화질서를 옹호하기 위해서 같이 일치점을 가지고 움직여줄 때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신이란 이름의 문화질서를 우리는 간직하게 되죠. 그게 바로 바벨론에 갇혀있는 꼴이 된다 말이죠. 그래서 거기서 꾸는 꿈들은 그걸 개꿈이라고 하죠. 꿈도 아니고 비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개꿈 이예요.

지금 느부갓네살은 미칩니다. 완전히 미친 사람 다 됐어요. 이거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건 지도자가 아니고 미친 인간입니다. 무신에 나오는 그런 인간 비슷하다니까요. 한번 정권 잡았다고 선대 왕 가족들 다 죽이고, mbc에서 하는 무신, 안 보는데 딱 보니까.ㅎ

뭐라고 하느냐 하면, 꿈과 해석을 해내라 하니까, 신하들이 말하기를 ‘왕이여, 정신 좀 차리세요, 이건 신만이 풀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이 못 풉니다.’라고 알아듣게 이야기하니까 하는 말이 뭐냐 하면 8절에 보면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 천연하려 함이라는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려 한다 말이죠. 지연시켜서 내가 죽이려하니까 니 목숨들이 아까워서 안 죽으려고 질질 끄는 줄을 내가 안다.

그러니까 내 앞에 그런 헛된 수작들을 하지 말고 반드시 꿈을 나한테 안 내놓으면 5절에 보면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꿈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너희가 만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야~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신명기 28장이예요.

만약에 내 말씀을 지키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로되 만약에 못 지킬 경우에는 쪼개버린다. 너희 집을 거름 터로 만들어 버린다. 저주냐, 아니면 축복이냐, 축복이냐, 아니면 저주냐, 단지 그 둘밖에 없어요. 알곡이냐, 가라지냐, 염소냐, 양이냐, 좋은 고기냐 나쁜 고기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그 둘밖에 없다니까요. 오늘 강의에서 그거 알면 끝나요. 둘밖에 없다는 거, 둘 중에 어느 쪽에 속한다는 거. 둘 다 속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거. 반드시 내가 인간이라면 둘 중에 어느 한 곳에는 내 포지션, 내 자리는 반드시 둘 중에 어느 한 곳이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돼요.

그러니 이 느부갓네살은 일종의 메시아 같아. 만약에 니가 알지 아니하면 너를 불태워버리고 쪼개버린다. 느부갓네살이 너무 심하다고 미쳤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더 미쳤어요. 느부갓네살뿐만 아니에요. 느부갓네살을 누가 미치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미치게 했잖아요. 그럼 하나님은 느부갓네살보다 더 도가 심한 분이죠.

감춰진 하나님!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성품 이예요. 얼마나 성질도 급한지, 좀 시간주면 알아낼 텐데, 그것도 아니에요. 니가 시간을 질질 끌려고 그 수작하는데 그 수작에 넘어갈 줄 모르느냐, 이렇게 나오니까 당장 무슨 수로 꿈을 아느냐 말이죠. 다니엘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수로 압니까? 여러분, 다니엘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리 그거 잊으면 안 돼요. 다니엘이 해석 잘 하고 요셉이 꿈 해석한다고 요셉이 천지 창조 만든 분이 아니잖아요. 요셉은 그냥 꿈 꾼 사람이지, 꿈을 제공받은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여기서 정리하면 무서운 말씀의 기능 가운데서는 바벨론도 해당이 되고 그리고 유다나라도 이 무서운 말씀의 기능에 같이 기능의 저촉을 받습니다. 이 사람(바벨론)들을 비 성도라 하고 이 사람(유다나라)들을 성도라 하면 비 성도가 되었든 성도가 되었든 만약에 알지 못하면 쪼개버린다는 이 무서운 말씀에 다 같이 적용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우리는 왜 이렇게 편하게 삽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행운이 너무 많이 우리 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행운, 그냥 무심코 월요일 날 아침 8시 45분에 sbs 블랙박스를 소개하는 그 시간에 보면 조금만 일찍 출발했으면 박살날 일들이 많이 나와요. 뭐냐 하면 블랙박스가 가는데 앞 차는 옆에서 내려 온 유조차한테 박아서 나뒹굴어졌는데 블랙박스 찍는 기차는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만약에 조금만 갔으면 박을 뻔 했는데 그런 경우처럼, 우리는 무심코 살아가는데 무심코 살아가도 주님은 무지무지 바빠요. 피할 길을 재앙들을 빼준다고 주님과 그 천사들은 무지 바쁜 거예요. 우리는 멋도 모르고 이렇게 가는 거예요. 미국의 만화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바보 고양이가 기분이 좋아서 이게 빌딩인지 뭔지도 모르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지혜로운 쥐가 고양이 다치지 말라고 다친 데를 다 뽑아내고 가는데 고양이는 룰~루 랄~라 노래 부르면서 가는 뭔지도 모르고 가는 그 대목 알죠?

우리가 얼~마나 행운들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안 아프고 참석할 수 있도록 얼마나 그동안 많은 사건 사고가 그냥 지나가버린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햇빛과 공기와 그리고 단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니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신다는 말은 이 세상이 니 힘으로 니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 다~ 천사를 통해서 돌봐서 살아왔는데 그 살아온 것을 다 끄집어내서 감사하라 하면 하루 종일 감사해도 감사 못 해요. 그리고 우리가 감사해봤자 소용없고, 또 감사했다고 지 자랑할 게 뻔하니까 안 돼, 우리는 어리석은 자야. 될 수가 없어요.

무서운 말씀을 우리가 말씀을 못 지킵니다. 못 지키면 무서운 처벌, 쪼개야 돼요. 쪼개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안 쪼개진 것은 여기에 하나님이 사용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쓰여 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거예요.

지금 느부갓네살을 만약에요. 꿈을 아무도 모른다.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명령을 철회시킬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돌아도 완전히 돌아버렸어요. 아마 다니엘을 포함해서 다 죽일 겁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그래서 다니엘은 꿈 하나 못 풀어서 포로 잡힌 지 몇 년 만에 거기서 죽고 말았다. 끝’ 다니엘이 그렇게 끝나도 괜찮아요. 누구만 개입 안하면? 주님만 개입 안 하면, 그렇게 끝나 버려요.

그런데 주님께서 꿈을 가지고 개입할 때는 아까 이야기했죠? 다 잊어버렸죠? 하나님께서 할 때는 반드시 약속의 땅과 약속의 백성을 새로운 개념의 땅과 백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개입했다고요. 그래야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창조의 취지가 그대로 살아있으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성취를 봐야 하니까. 그 약속의 백성과 그 약속의 땅은 전에 생각했던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한 그 땅과 그 백성이 아니거든요. 그게 아니라는 게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 작업을 다니엘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그 시발점이 뭐냐, 느부갓네살을 환장하게 만드는 게 시발점 이예요. 꿈을 꾸게 만들어서 사람의 능력 밖의 있는 일을 벌려 버린 겁니다. 아무도 꿈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그 다니엘이 누굴 찾아가느냐 하면 11절에 보면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당시 술객들이 합리적인 사람들이죠. ‘왕이여, 정신 좀 차리세요. 이는 신들 외에는,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육체가 없는 신들만 알 이야기지, 우리는 육체가 있는 인간들은 육체가 지녔다 싶으면 어떤 인간도 이건 풀 수 없는 문젭니다. 왕이여’ 이 소리 듣고 화가 난 이유가 뭔지 압니까? 그걸 왕이 압니까? 모릅니까? 방금 신하가 이야기한 것을 알아요? 몰라요? 알잖아요. 이게 뭐가 화나느냐 하면 신하가 내가 지금 뭐 때문에 환장하는지 너희들은 왜 내 맘을 안 알아주느냐, 이 말이죠. 신하들은 할 말이 있죠. 내가 당신의 맘을 왜 알아야 되고 무슨 수로 알아냅니까?

결국은 느부갓네살은 아까 적었던 정박지 역할, 정박지, 배가 정박하는 정박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이 이런 지경에 있는 것은 떠밀려 온 거예요. 떠밀려 왔다는 것은 짐승이 떠밀 수가 있고 주께서 떠밀려오도록 유도할 수도 있고,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바다와 육지, 여기 육지라 하는 것은 현재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땅이라 하는 것은 새로 생길, 다니엘로 인하여 새로 생길 새로운 인자의 나라, 영원한 태산을 이루는 돌멩이로 이루는 인자의 나라가 땅이거든요. 그 땅과 바다의 정박지, 그 접선 지점을 느부갓네살은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가 이 땅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결국 진짜 의미에서 우리는 무슨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이 땅의 정박지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집사님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사원들은 ‘지금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돌았어요? 지금 이 회사가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우리가 노력하고 계획 잡고 전략을 짜서 우리 물건을 집어넣느냐, 이렇게 우리가 밤잠 안자고 노력해야 이 덕분에 살아가는 겁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그러면 집사님은 ‘나는 정신 차렸다.’ 하면 안 되고, ‘그래 나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누가 나를 미는 것 같아.’

느부갓네살이 지금 돌아버렸어요. 완전히 누가 뒤에서 미는 것 같아요. 주께서 당기고 마귀가 밀고 난리 났어. 어쨌든 간에 이거는 그동안 지가 알았던 현실이라는 거, 문화질서 + 자연 질서가 전부라고 여겼던 이것이 완전히 파괴된 거예요. 현실 속에 낯선 현실이 침투해서 엉망진창을 만들어 버린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암에 걸렸다 칩시다. 암에 걸렸다 치면 ‘아니야 꿈일 거야, 꿈일 거야, 암 아닐 거야, 지금 꿈꾸고 있는 걸 거야. 미안합니다. 암이라 했는데 오진이었습니다. 아마 내일이면 이럴 거야.’ ‘아무리 부인하고 부정해도 지금 암 세포는 살아나서 6개월밖에 못 삽니다. 정리하세요. 병원에서도 이제는 손들었습니다.‘ 이거는 성경을 100독을 하고 교회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아도 현실은 현실 이예요. 현실은 현실입니다. 이걸 부정하면 안 돼요.

지금 느부갓네살이 화가 나는 것은 뭐냐, 현실을 왜 신하들은 이 엄연한 현실을 왜 이걸 모르느냐고 화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십자가를 아는 성도들이 세상을 향하여 화를 내는 이유가 분명히 예수님이 죽으셨잖아요. 사흘 만에 부활했죠? 이게 돈 번다고 예수님이 부활 안 한 거예요? 지가 복권 당첨됐다고 예수님이 십자가 안 죽은 겁니까? 낼 되면 제가 장례식에 참석하는데 어떤 분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든 안 돌아가시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잖아요.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뭐가 돼야 되느냐, 부활 현실이냐, 십자가를 우리의 현실 속에 집어넣읍시다. 집어넣어서 우리도 같이 돌아버립시다. 세상 사람들이 내 말을 이해하든 안 하든 간에 우리 혼자 답답하고 우리 혼자 신나고 그럽시다.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영적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육적이니까. 육적으로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것은 육적 이예요. 그거 말고 성령이 오게 되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예요. 돌을 피하지 왜 맞았어요? 죽으니까 주께서 오른편에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스데반 집사 오른편에 예수님 보고 있네. 알아주지도 않아요. 지 혼자 본 거예요. 그러니 지금 이 다니엘을 우리가 아까 같이 나 여기 있는데 다니엘 지시 받아서 구원받겠다, 이러한 어떤 지식, 하나님의 프로그램 식으로 하지 말고 다이아 그램, 이걸 아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뭉개지고 말씀이 우리를 찢고 말씀이 튀어나와요. 내가 설치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내가 있는 현장에서 설쳐대는 그러한 역사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다니엘은 감 잡습니다. 감 잡고 그걸 누구한테 묻는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이거 하나님이 일 저질렀죠? 내가 안다니까 내가 알아. 우리나라를 이렇게 망하게 하시고 나를 이렇게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오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작업개시 했군요. 그래서 하나님, 이것이 약속의 땅, 이스라엘, 유다, 모든 하나님 말씀의 모든
의미가 이제 지옥 같은 이곳에서 어떻게 새롭게 마그마처럼 폭발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진짜 하나님이 약속한 진짜 그 안의 알맹이가,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작업을 개시한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18절에 봅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아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했죠? 안 타나나면 어떻게 됩니까? 안 나타나면 이건 조지는 거죠. 이건 큰일 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이유가 우리는 어제 믿었다 해서 오늘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매일같이 나타나야 되고 매일같이 도와줘야 돼요. 하루 믿음이 좋다고 해서 내일 그 믿음 가지고 우려먹을 생각하지 말고 매일같이 주께서 나타나셔서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돌보시고 함께 하사 좁은 길로, 영생의 길로 가게 하셔줘야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내 한번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늘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기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내 힘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자꾸 성경은 말하기를 참새도 내가 키우고 들풀도 내가 키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고 내 힘으로 산다고 우깁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이 지옥 속에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시고 나그네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매일같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