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1장(시차적 관점)120823-2강a-이 근호 목사
제 2강a
다니엘 오늘 이 시간에는 여호야김 3년 바벨론은 605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다니엘이 귀족들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옵니다. 와서 오늘 이 대목에서는 뭐냐 하면 1장 7절에서 이름을 부여받게 되죠. 다니엘은 벨드사살로 되어 있죠. 벨드사살은 뭔 뜻이냐 하면 엘이시여, 엘은 하나님, ‘엘이시여, 우리가 쟁취한 것을 보호해 주소서.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끌어 모은 것을 포로와 전리품을 신이시여 지켜주소서.’ 그런 뜻입니다.
그런 뜻이라면 결국 다니엘과 3친구라 하는 것은 바벨론 입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전리품이죠. 전쟁에서 쟁취 품이니까 이 전리품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느냐 하면 이것은 우리가 승리했다는 증거물이 되겠죠. 그래서 포로 잡힌 것이 많으면 큰 승리한 것이고, 변변찮으면 변변찮게 승리한 거예요. 포로 잡힌 것이 계속해서 우리 수확이 있어줘야 우리는 전에 승리했던 승리 도취감을 계속 유지가 돼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니엘 3친구가 이름이 바뀌었다는 개념은 무슨 의미냐 하면 그 전까지는 너희들이 포로 안 잡혔을 때는 여호와가 너희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누가 승리자다? 여호와가 패배자고 자기들 믿는 신, 마르둑 신이 승리자가 돼서 너는 우리 속에 포로 됐기 때문에 너희들이 포로생활 하면서 우리의 위대함을 너희들 통해서 이제는 우리 신이 간접적으로 높임을 받아야 되겠다. 우리는 제대로 된 신을 믿었고 너희들을 엉터리 신을 믿었다 이 말이거든요. 우리 종교가 너희 종교보다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제로 살아있는 신에 합당하다, 이렇게 본 겁니다.
다니엘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이게 어떻게 반전되고 어떻게 역전되는가, 한번 보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은 상당히 흥미진진한 겁니다. 분명히 삼킨 자가 오히려 삼킴을 당하는 거, 얼마 전에 박 윤진 성도님이 글 썼죠. 죽음이 생명에 삼킴을 당한다. 보통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살고 죽는 것보다도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 여러 가지 환경들을 얼마나 축복이란 이름으로 제공할 것인가, 주게 되면 우리가 바치면 복주고 이러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은 이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죽음이라고 보고 그리고 이 전체를 죽음이라고 봤을 때 죽은 자를 돈을 몇 푼 가졌든 출세를 했든 승진을 했든 이게 의미가 있다? 없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나이, 남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지금 같은 죽음이란 바구니에 들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여기서 생명이 와서 이걸 삼켜버리면 비로소 그것은 뭐가 되느냐, 영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곧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것을 기뻐할 수 있고, 예수님이 생명이라면 우리가 흔히 생명이라고 여기는 돈과 건강 이것은 이 생명 앞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렇게 되겠죠.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신약 때에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밝혀낸 현실이고, 지금 다니엘에서는 그게 아니고 포로 없었는데 포로 생겼다. 우리는 복 받고 있다. 이러한 수준이죠. 이걸 오늘날 현대 용어로 하게 되면 소유 수준이죠. 얼마나 가졌느냐 하는 것 가지고 많이 가졌으면 복이고 적게 가졌으면 저주고, 소유를 가지고 축복이냐, 저주냐, 그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호와는 뭡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여호와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문제죠. 어느 것이 생명이냐, 어느 것이 저주냐, 어느 것이 영생이고 어느 것이 저주냐, 그걸 밝히면 되겠죠. 그러면 제가 다니엘 할 때 반전되고 역전되죠. 뭐냐, 소유를 가지고 뭐로? 축복으로 봤던 그 시대 마르둑 신, 바벨론 신의 세계에서 뭐가 밑에서 솟아올라 옵니까? 패배했다고 여기는 여호와가 사실은 패배한 게 아니고 웅크리고 있었죠. ‘날 잡아먹어라.’ 사실은 몰래 잠입한 거예요. 포로 잡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몰래 잠입해서 아주 내부 깊숙이 들어와서 이렇게 기지개를 켜버리니까 이것은 덮었다고 덮었던 그것이 감당이 안 되니까 다 찢어지겠죠.
만약에 여호와 신이다. 이걸 둘러친 것이 바벨론 마르둑 신이라면 자기는 이불로 덮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만약에 기지개를 켜니까 이불들이 다 갈기갈기 조각조각 찢어져서 이건 망사도 아니고 노끈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해체돼 버리죠. 신도 아니죠. 찢어지는 신이니까 이건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비현실적인 신이다 말이죠. 이게 오늘날 21세기에 적용시킨다면 소위 나는 교회 안 나와도 돼, 나는 신 같은 거는 몰라. 하지만 나는 돈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장이야, 나는 회장이야, 니는 교회 다녀도 꼼짝 마라, 이렇게 했던 그것이 막상 거기서 기지개를 켜버리니까 오히려 ‘형제여, 어떻게 하면 나와 내 집이 구원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나오죠. 구원문제, 돈 누가 많고 적은 이 문제에서 갑자기 죽으면 지옥 갈까봐서, 이런 식으로 하면 지옥 간다니까 문제가 큰 문제라 이거죠. 지옥은 돈 문제로 해결이 안 되잖아요.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먼저 믿음을 준 거예요. 돈이나 건강이나 권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진짜배기 현실이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 때문에 초청받는 것이고 결국 다니엘 3친구는 사실은 잡힌 것이 아니고 잡혀줬죠. 잡혀줬는데 누가 그렇게 잡히도록 했습니까? 비밀요원으로서 누가 그렇게 잡히도록 했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전략이, 언약이 결코 도중에 포기할 수가 없다.
이게 시편 89편1절에서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이게 유명한 다윗언약이거든요. 이 다윗언약은 영원한데 이걸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은 바보같이 이걸 자기 나라 형식으로 이게 영원한 줄 알았어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방식으로 그 언약을 세울 줄이야 상상도 못한 겁니다. ‘하나님, 저 예수 믿어요. 저 축복해 주세요.’라고 생각했던 하나님께서 거지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역전의 방법을, 반전을 베드로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어요. 그거 안 사람이 없을걸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 역전을 펼치시는데 그런 실마리가 다니엘에 나오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는 정말 어렵습니다. 저부터 정신을 차려야 되겠어요. 제가 웅크리고 있다 하고 그리고 기지개를 펴니까 눌렸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다 찢어지고 낡아빠진 천 조각처럼 낱낱이 다 찢어져 버리죠. 금 신상으로 연결되는 그 바벨론 제국은 무너져도 인자의 나라, 돌멩이로 표현되는 작은 인자의 나라는 그 무너진 바벨론 나라에 영원한 태산이 되어서 세워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는데 뭐가 어려우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안과 밖의 문제가 있어요. 안과 밖의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집단에 있어서 창세기 4장 이야기부터 하면 거기에 가인 이야기가 나오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벨 이야기가 아니고 이 뒷부분에 가인이 하나님께 벌을 받을 때 니가 이곳을 떠나서 다른 동네로 가라 할 때에 가인이 깜짝 놀랍니다. ‘제가 거기로 가서 나그네로 가게 되면 그쪽 토박이들이 나를 함부로 때리고 죽이고 해서 나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할 텐데 내가 견딜 수 없습니다.’라는 그 대목이 뭐냐 하면 어떤 집단이 있고 어떤 공동체가 있으면 이 공동체 안에서 일이 잘 될 경우는 괜찮은데 못 될 경우는 그 원인을 밖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요소 때문에 잘 꾸려나왔던 이 공동체가 문제가 생겼다. ‘누구야? 우리 허락 없이 밖에서 들어온 거, 끄집어 내.’ 끄집어내고 돌로 쳐서 이 이질적인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다시 원상대로 잘 굴러가게 되겠죠.
이러한 공식 입장이 모든 신, 그 사람들이 믿는 신과 관련돼 있습니다. 인간들이 믿는 신이라 하는 것은 뭐냐 우리들끼리는 괜찮은데 우리들과 속성이 다른 것이 왔을 때는 반드시 골라내어서 버리지 아니하면 너희들도 망한다. 그러니까 그게 보통 신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단결을 하거든요.
여호수아에 보면 아간 있잖아요. 아간이 여리고성을 칠 때 하나님께 바칠 물건, 외투나 금을 자기가 챙겼죠? 그런데 어떻게 처리합니까? 제비뽑기해서 아간을 집어내어서 돌로 쳐서 저주를 하죠. 저주를 하니까 다시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이 성을 회복해 줬죠. 이게 뭐냐 하면 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의 신과 자기 집단과의 연락체계가 그런 연락체계입니다. 우리들끼리의 아주 순수한 혈통, 또는 순수한 신앙심, 또는 순수한 사상으로 하나 돼야 되는데 이것이 유지되면 복 받고 만약에 거기에 엉뚱한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 때문에 망하니까 밖에서 나온 것을 끄집어내어서 돌로 쳐야 된다는 거죠. 이걸 가지고 희생이라 해요.
이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거와 일리가 있어요. 뭐냐 하면 몸이 아프다 하는 게 뭡니까? 우리 속에 자생했던 바이러스가 아니고 외부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병원균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면역성이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찾아내서 고름을 만들어야죠. 백혈구가 달려들어서 세균하고 싸워서 고름으로 바깥으로 배출하도록 하잖아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항상 자기 동질화를 유지하는데 살아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녀가 친구를 데려왔다고 하면 그러면 대충 ‘빨리 보내라, 빨리 보내라.’ 하는데 왜냐 하면 결국 낯선 사람이 집 안에 있으면 온 식구들이 옷도 못 갈아입고 생활하기 불편하다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올 때는 포로 잡아서 이름을 바꿔서 전에는 저쪽 신을 믿어서 저쪽 공동체를 갖고 있던 것을 이름을 바꿈으로서 이쪽 지배하에 있을 때에는 오히려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으로 유지할 가치가 있죠. 그래서 벨드사살로 이름이 바뀐 겁니다. ‘나의 어획물은 신께서 보호해 주소서.’하는 거예요. 그럼 다니엘 뜻은 뭐냐 하면 ‘여호와는 심판이시다.’라는 뜻이거든요. 여호와는 심판하시는 여호와인데 이것이 저쪽에서는 ‘우리의 곡물을 보호하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을 보게 되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바로 그 자리에서 장차 올 것을 찾는다는 거죠.
그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베들레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사람이 돼 버려요. 의도적으로 애굽에 갔다 와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갈릴리 사람으로 갔는데 그곳은 빛이 없는 곳 이예요. 이방의 나라입니다. 왜 이방의 나라라 하느냐 하면 거기는 앗수르 군대가 침범했을 때 예루살렘 빼놓고 전부 다 초토화 박살났어요. 그래서 앗수르 제국이 혼혈정책을 펴서 아브라함 혈통 자체를 DNA를 섞어버린 짓을 한 거예요. 그래서 갈릴리, 사마리아 전부 다 혼혈아 들입니다. 거기는 그쪽 사람들, 빛을 잃은 그쪽 사람들 속에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서서히 예루살렘 쪽으로 다가오는 방법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쓰여 진 거예요. 요한복음은 달라요.
결국 이것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이잖아요. 우리는 높이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복음적 내용을 보면 가장 낮은 곳, 어느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곳, 십자가의 길, 빌립보서 2장 8,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걸 인정치 아니하고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하니까 십자가보다 더 낮은 복종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거기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거예요.
오히려 저 높은 곳이 아니고 저 낮은 곳으로 갔죠. 그런데 그곳이 뭐냐, 예루살렘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가장 빛 된 도성 이예요. 가장 고상하고 거룩하고 근본 된 도성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여기가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이 딴 데는 없고 성전이 있는 지옥이 돼야 되는 겁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지옥은 지옥이 아닙니다. 진짜 지옥이 뭐냐 하는 것은 성전이 있는 그곳이 지옥일 때 가장 지옥다워요. 그냥 ‘아유, 죽어서 지옥가면 뜨겁다.’ 뜨거운 게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성전이 있는 곳에 가야 알 수 있습니다. 거기 어린양이 죽으니까.
너무나 복음은 간단해요. 복음은 내가 ‘저 사람은 죄도 안 짓고 나는 죄 짓고.’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복음이 안 나타납니다. ‘저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나는 못하고.’ 이래서는 안 되고 어린양을 만나야 돼요. 내 죄 때문에 대신 죽은 분을 만나야 돼요. 그 곳이 성전이고 그 십자가 있는 그곳에서 비로소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한, 야!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구나.’ 하는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 대신 죽으신 어린양이 있는 그 현장에서만 이게 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 오늘날 성령을 줘서 성전을 가지고 이동하죠. 움직이는 성전이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외칠 때 그것이 움직이는 이동식 성전이 되는 겁니다. 저 시골에 가면 이동식 도서관이 있고 이동식 보건소 있듯이 고을고을마다 가는 그곳이 바로 지옥을 앞장세우는, ‘내가 바로 지옥 가야될 존재였습니다.‘ 라는 걸 이야기함으로서 십자가를 증거케 하죠.
성전이 있는 곳이 지옥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유대인들은 자기는 성전이 있으니까 이건 뭐다? 천국이 되고 지옥은 어디 있느냐 하면 성전 바깥의 이웃나라로 본 거예요. 일단 천국은 고정돼 있으니까 다른데 있으면 천국이 둘 돼 버리니까 안 되죠. 천국이 둘되면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천국 만들었으면 다른 데는 지옥 돼야 하잖아요. 시편에 봐도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퍼부으소서.’ 딱 그 말 들으면 우리는 언약 있고 저쪽에는 언약 없으니까 저주 받아야 돼, 인간으로서 유대인이 해석하면 그 외 다른 해석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지옥일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성전을 지옥 만들 줄이야. 불바다 만들 줄이야. 그것도 누굴 앞장 세워서? 그것도 안 믿는 바벨론을 앞장 세워서. 구원하는 것도 안 믿는 사람이 구원해요. 고레스, 바벨론 그 다음 나라가 뭐냐, 바사나라예요. 바사 나라의 왕 이름이 고레스예요. 고레스 때 구원을 받아요. 고레스가 이사야에 보면 메시아예요. 얼마나 수치스러워요? 법정스님이 메시아란 말과 똑같은 소리라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메시아라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가 메시아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유일하게 깨닫는 사람이 구원받은 유대인이죠.
70이레 논문 보면 나옵니다. 70이레 논문을 보게 되면 다니엘이 70년의 비밀을 알았는데 그 비밀이 뭐냐, ‘70년 되면 돌아간다.’가 아니라 70년 동안 있어 보니까 비로소 우리가 지은 죄가 무슨 차원에서 지은 죄인가를 유일하게 알게 된 거예요. 쫓겨 가면서 알게 된 거예요.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죄인입니다.’라는 건 소용없어요.
내가 천국 백성이라고 여겼던 것이 취소당할 때 비로소 지옥이 뭐며 천국이 뭐라는 것을 알아가는 기회를 받은 거예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게 천국이고요. 지옥이라 하는 것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말씀과 십계명이 있으니까 말씀과 십계명과 제사 가지고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다른 민족보다 더욱 더 지옥스럽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는 알죠. 율법을 준 것은 저주아래 있게 하려함이니라. 그래서 3장에도 나오지만 사도바울의 복음에도 나오지만 이 당시에는 몰랐죠. 언젠가 돌아갈 거다. 돌아가도 소용없어요. 다니엘은 안 돌아가잖아요. ‘그게, 그게 아니야.’ 천국은 이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붕~ 떴어요.
여기 공간이 있다 합시다. 공간에서 이렇게 70년 포로 잡혀서 나오잖아요. 바벨론 아닙니까? 여기 공간이 있고 바벨론 있다면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와 같은가 하면 여기 이게 하나의 판때기라면 이게 공간이라면 이게 다시 나가서 들어오게 되면 요 공간 말고 또 하나의 판때기가 있으니까 2개 있으니까 이중적이죠. 땅도 이중적이고 씨도 이중적이고 약속도 이중적이고 하나님의 의도 이중적이고, 아브라함의 약속이 뭐냐 하면 씨와 땅과 하나님의 의에 관한 거거든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오잖아요. 니 씨가 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씨, 땅, 의 다 나온다고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한 것은 아브라함이고 그들 모두가 보기에 단일 공간에 있다고 여겼는데 한번 갔다가 오니까 이게 공간이 두 개로 떴어요. 이 위 공간이 바로 천국이고 이 밑의 공간은 뭐냐 지옥에 편입됩니다. 요거만 지옥이 아니고 바벨론 땅 전부가 지옥 이예요.
우리의 약속된 생명은 위에 있다고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나오죠. 니는 땅을 보지 말고 뭘 봐라? 위를 봐라. 그냥 위로 본다고 안 돼요. 여기 그냥 위를 보면 목성, 달만 보이지, 소용없어요. 여기 위라 하는 것은 약속이 있는 성전이 세워진 그 공간을 위라 합니다. 봐도 안 보이죠. 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지상에 같이 언약에 있는, 같은 엘리베이터 통로 속에 같이 놓여 있을 때만 위고 아래고 보이지 엘리베이터 통로 바깥에 나오면 그냥 보면 목성, 달만 보이지, 위가 안 보입니다. 위를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이사야가 있던 요 자리가 새 언약의 자리가 형성돼야 거기서 위를 볼 때 어린양의 보좌, 요한계시록에서 ‘보라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가 보이지, 요걸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고난, 예수를 인하여 받는 고난, 고난의 자리에 있어야 어린양이 보이지, 지금 고난, 주님과 관계없는데 백날 봐야 어린양이 안 보이죠.
어린양 보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릴게요. 카메라 앞에 어린양을 그려서 앞에 붙이면 어린양 늘 보입니다.ㅎ 그렇죠? 사이비가 뭐냐 하면 벽이 있는데 벽에다가 천국을 낙서하는 게 사이비예요. 벽을 뚫을 수 없으니까 뚫고 지나 갈 수는 없으니까, 왜 행함으로 뚫릴 천국이 아니잖아요. 육으로 백날 거듭나야 육밖에 안 되잖아요. 육에서 영이 될 방법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육으로 할 수 있는 건 낙서만 하는 거예요. 천국, 십자가, 언약, 좋은 것은 들어서 다 써놓는 거예요.
여기에 언약에 의해서 내리 꽂는 이 현장은 죄인이 필수가 되는 겁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내가 땅이 몇 만평 있고 돈이 있어도 이건 내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지난주일 날 설교에 인용한 예레미야 9장 23절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건강 자랑하지 말고 니 똑똑한 거 자랑하지 말고 자랑할 것은 여호와의 주신 총기 그것을 자랑하라 했죠? 그게 바로 에베소서 1장에 나옵니다.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신령한 지혜라 하죠. 제가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상에서 돈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건강하든 아프든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게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나는 더 당해도 싸고 지옥 갈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것, 그것이 바로 언약이 되는 거예요. 그게 전에 1초, 2초 했죠? 그게 일종의 불꽃놀이인 거예요. 불꽃놀이 한번 터지면 몇 초갑니까? ‘우와~’ 하다가 몇 초 안 지나서 없어지죠. 밤의 적막에 싸이잖아요. 그럼 또 터지면 ‘아!’ 하잖아요. 그런데 불꽃을 계속 더 쏘아 올리면 재미없어요. 가끔 팍팍 쏘아 올려야 불꽃이 아름답지, 늘 불꽃이 터지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겹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속에 불꽃을 탁 피워 올려 버리면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얻었다면 거기에 이미 누가 죽음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해결됐다는 거예요. 주일 아침에 이야기했죠. 그걸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지금 당장 죽어도 ‘저는 상관없어요.’ 하는 그런 말이 된다 말이죠. 그럴 때 어린양이 보이는 거예요. 이걸 바깥에서 보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고 이야기를 약간 깊이 있게 봅시다.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게 이중적이라 했죠? 어떻게 이 땅에서 나왔다가 들어오면 이중적이 되느냐, 그건 설명 안 했습니다. 그걸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수준이 되니까 어려운 거 하는데 이건 어려운 게 아닌데 이건 여러분이 옛날 공부한 걸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이 이렇게 있을 때 여기 해가 있고 해를 공전하는 것이 지구잖아요.
시차적 관점이 뭐냐 하면 이 별의 대한 거리를 측정할 때 뭘 계산했느냐 하면 지구가 공전하는 걸 계산한 거예요. 그러면 지구의 공전의 거리는 나와 있고 각도가 여기서 이 별을 봤을 때 각도와 별에서 본 각도 차이에 차이가 나죠. 고 차이와 요 거리를 알게 되면 별과의 거리를 측정할 수가 있습니다. 요 각도의 차이를 시차라 해요. 관점의 차이죠. 시차를 통해서 어느 지점에 별 있다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을 때 인간적으로 볼 것이냐, 신으로 볼 것이냐, 문제 있잖아요. 이걸 시차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건 신약 성경으로하면 너무 어렵고 구약부터 할게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죠. 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 ①번, 모세가 명령했다. ②번, 모세 지팡이로 갈라졌다. ③번, 하나님이 갈랐다. 몇 번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갈랐죠? 하나님이 갈랐으면 지팡이는 왜 필요하냐 이 말이죠. 그렇잖아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 팔이 올라가니까 승리하고 모세 팔이 내려오면 패배했다. 그러면 밑에서 칼싸움하고 있는 여호수아의 칼은 왜 필요합니까? 쓸데없이 왜 그 짓 하는 거예요? ‘여호수아야, 이리 와라, 와서 지켜보자.’ 이러면 될 텐데 왜 하는 겁니까?
하나님은 시차가 아니면 포착되지 않아요. 시차가 아니면 포착되지 않는 이유가 인간이 하게 되면 신을 무시하게 돼 있고 신을 생각하게 되면 인간을 무시하게 돼 있어요. 인간의 관점이라는 게. 인간이 다 했는데 신이 왜 필요해? 신이 다 했는데 인간이 뭐가 필요해? 지금도 이 시차를 모르는 게 개혁주의 신학 아닙니까? 여기서 삼위일체, 개혁주의 신학이 나온 거예요. 기껏 하는 게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한다. 통해서 하는 이유가 뭡니까? 몰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개입됨으로서, 인간은 그냥 개입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죄인의 입장에서 개입을 해줘야 돼요. 죄인의 입장에서!! 죄인의 입장에서 개입을 해보면 그동안 인간이 생각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예요. 그런데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고, 이런 나쁜 인간에게 맥없이 죽은 연약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연약한 하나님과 누구의 만남? 죄인의 만남. 이것이 시차적 관점 이예요. 이게 십자가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존재론 적으로 생각해요. 인간이 여기 존재하고 신이 여기 존재하니까 신은 일단 전지전능하니까 ‘하나님이여, 무슨 고상한 노래를 부를까요? 대중가요 말고 땡 벌, 땡 벌 말고 무슨 노래 만들어 드릴까요? 그러면 영광 받겠습니까?’ 돈도 그냥 장터에서 꾸겨진 돈 말고 다림질한 돈 드리면 영광 받겠습니까?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을 드리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게 인간이 하는 방법 이예요.
우리는 성전이 있다. 우리는 씨가 아브라함 씨다. 이 땅은 모세가 데려다 준 약속의 땅이다. 땅 있고 씨 있고 하나님 있고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무슨 선지자? 거짓 선지자. 진리에 거짓 선지자가 등장해야 돼요. 거짓 선지자한테 죽은 사람이 이사야입니다. 이게 시차 아닙니까? 이사야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을 앞당겨서 미리 앞당겨서 죽게 하신 거예요. 죽어도 좋죠. 왜냐 자기는 성전에서 천사를 봤기 때문에. 천사 봤는데 뭐. 볼 거 다 봤는데 뭐.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데 뭐. 살 마음 없어요. 누가 가겠느냐 할 때 ‘제가 갈게요.’ 사나 죽으나 관계없어요. 볼 거 다 봤는데요 뭐. 아버지와 어머니 다 아는데 뭐. 부부간에 볼 거 다 봤는데 뭐. 부부 사이에 뭐 가리고 할 필요 없죠. 주님과 우리 사이가 볼 거 다 본 사이예요. 우리는 무조건 죄인 이예요. 죄를 짓고 안 짓고 상관없어요. 무조건 죄인이고 주님은 무조건 여기 창 자국 있는 분이고 못 자국 있는 분이고, 그러면 됐잖아요.
놀라운 사실은 그 외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성경에는. 전지전능하고 뭐 어떻고, 저떻고 아니에요. 유대인이 이사야를 모르겠습니까? 책을 달달 다 외우는데, 모세를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메시아 오니까 ‘당신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악마의 대장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그게 주의 전략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 있죠? 하나님이 사람에게 포로 잡힌 거예요. 사람보다 더 못한 하나님! 여러분, 이거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보다 재주가 많다고 해서 우리보다 더 듬직하다고 해서 우리가 못한 것을 당신이 해낼 수 있다고 여겨서 그래서 교회 가서 가정사 어려운 거 다 가지고 빌려고 갔잖아요. 그런데 내 신앙보다 실력이 더 없어. 이 세상사는 그 실력이. 요령도 없고 아부할 줄도 모르고 뇌물도 줄줄 모르고 사법 줘서 공천 받을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사는 재주가 없어요. 안철수보다 더 못해. 전혀 지도자가 될 수도 없어.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그만큼 혜택 입고도 ‘나 저 사람 모른다.‘고 했겠습니까? 공천자가 있어야 하는데 누가 공천해? 아무도 공천자가 없어요. 이상한 데로 끌고 가요. 십자가로 끌고 갈 줄 상상도 못했죠. 물론 그 전에 이야기했죠. 나 따르려면 십자가 지라 하는 것은 그냥 흘러가는 잔소리인 줄 알았지, 실제로 십자가로 몰아갈 줄은, 미쳤어요? 내가 예수 믿고 망하게.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때는 니 자랑하지 말아라, 내가 그냥 너를 그냥 구원시켰기 때문에 그냥 구원되는 거예요. 우리가. 토 달지 마세요. 이유 없어요. 무조건 선택해서 무조건 그냥 데려가서 천국 들어간 거예요. 무조건 면류관 반납하고 런닝이고 팬티고 전부 다 갖다 바치는 거예요. ‘주께서 받으심이 합당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우리가 뭐 개척교회 했습니다. 뭐 했습니다.‘ 말도 안 돼. ’주님 때문에 내가 손도 아프고 어떻고 저쩌고...‘ 그런 거 익숙지 못해서 그렇죠. 아직 시차 이야기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시차에서 한번 정리해 보면 방금은 죄인과 그리고 희생자라는 시차를 신약에서 언급했는데, 다니엘서에서는 뭐냐, 역사와 묵시라는 시차를 사용합니다. 역사적으로 되돌아가면 맨 그 땅이 그 땅 이예요. ’야, 이 땅에 있는데 역사니까 역사적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 공간 그 땅이 가나안 땅 이예요. 팔레스타인 땅, 블레셋 땅이지만, 현재 이스라엘 땅, 그 땅, 시간은 70년 만에 돌아온다. 그런데 이 70년이 뭐로 바뀝니까? 70년이 아니고 70이레로 바뀌죠.
시간이 70이레로 바뀌면서 이 땅의 의미는 누구하고 하느냐, 돌아올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죽어야 될 장차 오실 죽을 메시아가 이 땅을 접수해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이 땅에 돌아간 사람들은 뭐냐, 메시아를 죽여야 될 나쁜 역할을 담당하는, 그러니까 옛날 영화에서 허 장강 같은 역할, 나쁜 역할을 담당하는, 그런데 본인들은 몰라요. 본인들은 하나님이 축복한 이 땅, 이 땅은 메시아가 오셔서 감람산에 오실 것이라고 여겼던 그 사람들의 역할은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이 인류를 대표해서 메시아를 창으로 찔러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야.’라고 외쳐야 될 그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왕을 죽인 거예요. 누가?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오신 왕을 죽인 거예요. 왕은 죽여 놓고 백성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사도행전 2장 37~38절에 보면 ‘우리가 어찌 할꼬’ 라고 나오죠. 이 이야기를 전하니까 ‘우리가 어찌 할 꼬’ 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찌 할꼬, 우리가 실수했는데.‘ 이게 보통 실수한 게 아니잖아요. 사실 하나님이 실수를 유도한 거예요. 실수 다 할 수 있는데 너희들이 뽑혀서 대표로 실수 한 거예요. 사실 그 실수 가운데 우리도 다 거기에 같이 한패가 돼 있습니다.
사람들의 집단성에 보면 항상 사람들은 능동적이 아니고 수동적 이예요. 누구 하나 외치면 그제서 우르르 따라갑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 인간 마음속에 선악과가 심어져 있어서 이것은 누가 지시와 명령을 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어요. 목사가 이걸 잘 이용하죠. 명령과 지시를 하게 되면 교인들은 그걸 굉장히 좋게 여깁니다.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명령과 지시를 하는 목사도 본인이 기분 좋아요. 누굴 명령한다는 것은 자기가 그런 위치에 있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명령이 아니고 뭐냐 하면 상황을 이야기하거든요. ‘너는 죄인이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8장에서 성전에 어떤 죄인이 고개를 못 들고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주님께서 ‘너는 의인이다.’라고 했죠? 반대편에 있는 바리새인은 이레에 2번씩이나 금식하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쫓겨나죠.
만약에 그것을 하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한테 의인 소리 듣기 위해서 전부 다 꿇어 엎드려 ‘죄인입니다.’라고 할 거다 말이죠. 그건 명령이 아니고 네가 이렇게 된 상황을 내가 일부러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나서서 만들어진 상황 속에 네가 지금 나의 작품으로 있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이 사실은 따지고 보면 주께서 그렇게 간통하게 만들었어요. 그 여자가 간통하다 안 걸리는데 하필 전봇대에 cctv가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게 아다리예요. 주께서 그렇게 조절한 겁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다른 데 갈 수 있는데 하필 예수님이 제자들 있는데 맞닥뜨리게 한 것은 조치를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실로암 가서 진흙 바르고 닦아서 눈 뜨게 했잖아요. 모든 상황이 가만히 두고 관찰해 보면 주님께서 ‘에이, 주님이 다 하셨지?’ 나중에 보면 가만히 보면 내가 실수해서 죄 졌다 하는 것도 가만히 따져보니까 ‘주님, 일부러 했죠? 일부러.’
진짜 다윗도 그럴 만해요. 다윗도 암몬 전쟁할 때 지는 인터넷이나 하고 있지 왜 심심하다고 주택도 왜 허가해 줘서 그 밑의 장군 우리야가 못난 여자하고 결혼 안 하고 잘 빠진 여자하고 해서, 가만히 따지고 보면 ‘에이, 주님이 일부러 그런 거야.’ 전부 다 그 배치가.
우리가 뭐 되게 하기 위해서? 죄인이라는 거죠. 그걸 알고도 의인된다는 것은 이슬람교에서. 모든 것은 우리 알라신이 해줍니다. 이걸 알고서 의인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걸 알고 뭐가 된다? ‘역시 죄인이구나.’ 우리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시는 거, 죄가 넘치는 곳에 뭐가 넘치기 위해서? 은혜를 더욱 더 넘치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신약에선 아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선 뭐냐 모든 율법에 뭐가 있습니까? 사랑이 있다는 말은 ‘니, 우리는 사랑 안 받으면 지옥 가.‘라고 할 정도로 너는 사랑 안 받으면 형편없어.’라는 그 ‘형편없음’의 자리가 주께서 만들어 낸 자리예요. 그 형편없음을 그냥 우리가 수용하고 그걸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없이는 그것도 지난 사랑 말고 매일같이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 없이는 우리는 형편없습니다. 그 형편없음을 우리는 받아들이면 돼요. 이름도 이 형편없음이라고. 이 무가치 이런 거.
결혼할 때도 김 무가치는 이 무가치를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하면 ‘예, 아멘’ 하면 잘 살죠. 지 잘나서 결혼하니까 싸우고 나중에 이혼하고 하죠. 실제로 나 무가치, 너 무가치하면 아무 문제없잖아요.
여기 역사와 묵시라는 것이 다니엘에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오느냐, 야, 이게 진짜 어려운데 70이레 논문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몇 명 되겠는가 의심스러운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육에서 나온 역사와 묵시가 따로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래요. 묵시라 하면 전부 다 영적이라 생각하면 굉장히 편한데 저는 그걸 시비 걸었던 거예요. 인간의 시간성 속에는 역사 말고 아직 남아있는 이것을 델로스(telos)라 하는데 목적, 역사가 흘러가면 언젠가 어떤 목적에 이를 것이다. 그 목적의식이 미비 된 그 목적을 묵시라 하자. 라는 아이디어를 영이 아니고 육이 끄집어낼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을 끄집어 내줘야 약속의 땅에 돌아가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묵시적 메시아를 그들이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묵시를 무시한 게 아니고 묵시를 알았어요.
묵시를 알았는데 주께서 역사로 올 줄이야 그들은 꿈에도 몰랐죠. 자기는 구름 타고 올 줄 알았죠. 구름 타고 올 줄 알았는데 세상에 베들레헴 어린애로 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묵시를 역사로 놓고 역사를 묵시로 바꿀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수를 써도 주께서는 결코 인간의 행함과 그 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해도 다 반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해서 반대로 기도해도 그것도 반대예요. 안 돼, 백날 비비꽈서 안 돼요.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