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2강-시차적 관점12082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1. 19:16

 

2012-08-24 01:29:55 조회 : 536         
시차적 관점 120823 이름 : 이근호 (IP:119.18.7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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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1.16) 12-08-31 17:46 
가락교회-다니엘1장(시차적 관점)120823-2강a-이 근호 목사

제 2강a

다니엘 오늘 이 시간에는 여호야김 3년 바벨론은 605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다니엘이 귀족들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옵니다. 와서 오늘 이 대목에서는 뭐냐 하면 1장 7절에서 이름을 부여받게 되죠. 다니엘은 벨드사살로 되어 있죠. 벨드사살은 뭔 뜻이냐 하면 엘이시여, 엘은 하나님, ‘엘이시여, 우리가 쟁취한 것을 보호해 주소서.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끌어 모은 것을 포로와 전리품을 신이시여 지켜주소서.’ 그런 뜻입니다.

그런 뜻이라면 결국 다니엘과 3친구라 하는 것은 바벨론 입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전리품이죠. 전쟁에서 쟁취 품이니까 이 전리품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느냐 하면 이것은 우리가 승리했다는 증거물이 되겠죠. 그래서 포로 잡힌 것이 많으면 큰 승리한 것이고, 변변찮으면 변변찮게 승리한 거예요. 포로 잡힌 것이 계속해서 우리 수확이 있어줘야 우리는 전에 승리했던 승리 도취감을 계속 유지가 돼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니엘 3친구가 이름이 바뀌었다는 개념은 무슨 의미냐 하면 그 전까지는 너희들이 포로 안 잡혔을 때는 여호와가 너희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누가 승리자다? 여호와가 패배자고 자기들 믿는 신, 마르둑 신이 승리자가 돼서 너는 우리 속에 포로 됐기 때문에 너희들이 포로생활 하면서 우리의 위대함을 너희들 통해서 이제는 우리 신이 간접적으로 높임을 받아야 되겠다. 우리는 제대로 된 신을 믿었고 너희들을 엉터리 신을 믿었다 이 말이거든요. 우리 종교가 너희 종교보다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제로 살아있는 신에 합당하다, 이렇게 본 겁니다.

다니엘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이게 어떻게 반전되고 어떻게 역전되는가, 한번 보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은 상당히 흥미진진한 겁니다. 분명히 삼킨 자가 오히려 삼킴을 당하는 거, 얼마 전에 박 윤진 성도님이 글 썼죠. 죽음이 생명에 삼킴을 당한다. 보통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살고 죽는 것보다도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 여러 가지 환경들을 얼마나 축복이란 이름으로 제공할 것인가, 주게 되면 우리가 바치면 복주고 이러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은 이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죽음이라고 보고 그리고 이 전체를 죽음이라고 봤을 때 죽은 자를 돈을 몇 푼 가졌든 출세를 했든 승진을 했든 이게 의미가 있다? 없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나이, 남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지금 같은 죽음이란 바구니에 들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여기서 생명이 와서 이걸 삼켜버리면 비로소 그것은 뭐가 되느냐, 영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곧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것을 기뻐할 수 있고, 예수님이 생명이라면 우리가 흔히 생명이라고 여기는 돈과 건강 이것은 이 생명 앞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렇게 되겠죠.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신약 때에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밝혀낸 현실이고, 지금 다니엘에서는 그게 아니고 포로 없었는데 포로 생겼다. 우리는 복 받고 있다. 이러한 수준이죠. 이걸 오늘날 현대 용어로 하게 되면 소유 수준이죠. 얼마나 가졌느냐 하는 것 가지고 많이 가졌으면 복이고 적게 가졌으면 저주고, 소유를 가지고 축복이냐, 저주냐, 그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호와는 뭡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 여호와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문제죠. 어느 것이 생명이냐, 어느 것이 저주냐, 어느 것이 영생이고 어느 것이 저주냐, 그걸 밝히면 되겠죠. 그러면 제가 다니엘 할 때 반전되고 역전되죠. 뭐냐, 소유를 가지고 뭐로? 축복으로 봤던 그 시대 마르둑 신, 바벨론 신의 세계에서 뭐가 밑에서 솟아올라 옵니까? 패배했다고 여기는 여호와가 사실은 패배한 게 아니고 웅크리고 있었죠. ‘날 잡아먹어라.’ 사실은 몰래 잠입한 거예요. 포로 잡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몰래 잠입해서 아주 내부 깊숙이 들어와서 이렇게 기지개를 켜버리니까 이것은 덮었다고 덮었던 그것이 감당이 안 되니까 다 찢어지겠죠.

만약에 여호와 신이다. 이걸 둘러친 것이 바벨론 마르둑 신이라면 자기는 이불로 덮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만약에 기지개를 켜니까 이불들이 다 갈기갈기 조각조각 찢어져서 이건 망사도 아니고 노끈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해체돼 버리죠. 신도 아니죠. 찢어지는 신이니까 이건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비현실적인 신이다 말이죠. 이게 오늘날 21세기에 적용시킨다면 소위 나는 교회 안 나와도 돼, 나는 신 같은 거는 몰라. 하지만 나는 돈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장이야, 나는 회장이야, 니는 교회 다녀도 꼼짝 마라, 이렇게 했던 그것이 막상 거기서 기지개를 켜버리니까 오히려 ‘형제여, 어떻게 하면 나와 내 집이 구원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나오죠. 구원문제, 돈 누가 많고 적은 이 문제에서 갑자기 죽으면 지옥 갈까봐서, 이런 식으로 하면 지옥 간다니까 문제가 큰 문제라 이거죠. 지옥은 돈 문제로 해결이 안 되잖아요.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먼저 믿음을 준 거예요. 돈이나 건강이나 권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진짜배기 현실이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 때문에 초청받는 것이고 결국 다니엘 3친구는 사실은 잡힌 것이 아니고 잡혀줬죠. 잡혀줬는데 누가 그렇게 잡히도록 했습니까? 비밀요원으로서 누가 그렇게 잡히도록 했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전략이, 언약이 결코 도중에 포기할 수가 없다.

이게 시편 89편1절에서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이게 유명한 다윗언약이거든요. 이 다윗언약은 영원한데 이걸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은 바보같이 이걸 자기 나라 형식으로 이게 영원한 줄 알았어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방식으로 그 언약을 세울 줄이야 상상도 못한 겁니다. ‘하나님, 저 예수 믿어요. 저 축복해 주세요.’라고 생각했던 하나님께서 거지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역전의 방법을, 반전을 베드로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어요. 그거 안 사람이 없을걸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 역전을 펼치시는데 그런 실마리가 다니엘에 나오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는 정말 어렵습니다. 저부터 정신을 차려야 되겠어요. 제가 웅크리고 있다 하고 그리고 기지개를 펴니까 눌렸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다 찢어지고 낡아빠진 천 조각처럼 낱낱이 다 찢어져 버리죠. 금 신상으로 연결되는 그 바벨론 제국은 무너져도 인자의 나라, 돌멩이로 표현되는 작은 인자의 나라는 그 무너진 바벨론 나라에 영원한 태산이 되어서 세워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는데 뭐가 어려우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안과 밖의 문제가 있어요. 안과 밖의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집단에 있어서 창세기 4장 이야기부터 하면 거기에 가인 이야기가 나오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벨 이야기가 아니고 이 뒷부분에 가인이 하나님께 벌을 받을 때 니가 이곳을 떠나서 다른 동네로 가라 할 때에 가인이 깜짝 놀랍니다. ‘제가 거기로 가서 나그네로 가게 되면 그쪽 토박이들이 나를 함부로 때리고 죽이고 해서 나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할 텐데 내가 견딜 수 없습니다.’라는 그 대목이 뭐냐 하면 어떤 집단이 있고 어떤 공동체가 있으면 이 공동체 안에서 일이 잘 될 경우는 괜찮은데 못 될 경우는 그 원인을 밖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요소 때문에 잘 꾸려나왔던 이 공동체가 문제가 생겼다. ‘누구야? 우리 허락 없이 밖에서 들어온 거, 끄집어 내.’ 끄집어내고 돌로 쳐서 이 이질적인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다시 원상대로 잘 굴러가게 되겠죠.

이러한 공식 입장이 모든 신, 그 사람들이 믿는 신과 관련돼 있습니다. 인간들이 믿는 신이라 하는 것은 뭐냐 우리들끼리는 괜찮은데 우리들과 속성이 다른 것이 왔을 때는 반드시 골라내어서 버리지 아니하면 너희들도 망한다. 그러니까 그게 보통 신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단결을 하거든요.

여호수아에 보면 아간 있잖아요. 아간이 여리고성을 칠 때 하나님께 바칠 물건, 외투나 금을 자기가 챙겼죠? 그런데 어떻게 처리합니까? 제비뽑기해서 아간을 집어내어서 돌로 쳐서 저주를 하죠. 저주를 하니까 다시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이 성을 회복해 줬죠. 이게 뭐냐 하면 그 당시에 모든 사람들의 신과 자기 집단과의 연락체계가 그런 연락체계입니다. 우리들끼리의 아주 순수한 혈통, 또는 순수한 신앙심, 또는 순수한 사상으로 하나 돼야 되는데 이것이 유지되면 복 받고 만약에 거기에 엉뚱한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 때문에 망하니까 밖에서 나온 것을 끄집어내어서 돌로 쳐야 된다는 거죠. 이걸 가지고 희생이라 해요.

이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거와 일리가 있어요. 뭐냐 하면 몸이 아프다 하는 게 뭡니까? 우리 속에 자생했던 바이러스가 아니고 외부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병원균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면역성이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찾아내서 고름을 만들어야죠. 백혈구가 달려들어서 세균하고 싸워서 고름으로 바깥으로 배출하도록 하잖아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항상 자기 동질화를 유지하는데 살아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녀가 친구를 데려왔다고 하면 그러면 대충 ‘빨리 보내라, 빨리 보내라.’ 하는데 왜냐 하면 결국 낯선 사람이 집 안에 있으면 온 식구들이 옷도 못 갈아입고 생활하기 불편하다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올 때는 포로 잡아서 이름을 바꿔서 전에는 저쪽 신을 믿어서 저쪽 공동체를 갖고 있던 것을 이름을 바꿈으로서 이쪽 지배하에 있을 때에는 오히려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으로 유지할 가치가 있죠. 그래서 벨드사살로 이름이 바뀐 겁니다. ‘나의 어획물은 신께서 보호해 주소서.’하는 거예요. 그럼 다니엘 뜻은 뭐냐 하면 ‘여호와는 심판이시다.’라는 뜻이거든요. 여호와는 심판하시는 여호와인데 이것이 저쪽에서는 ‘우리의 곡물을 보호하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을 보게 되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바로 그 자리에서 장차 올 것을 찾는다는 거죠.

그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베들레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사람이 돼 버려요. 의도적으로 애굽에 갔다 와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갈릴리 사람으로 갔는데 그곳은 빛이 없는 곳 이예요. 이방의 나라입니다. 왜 이방의 나라라 하느냐 하면 거기는 앗수르 군대가 침범했을 때 예루살렘 빼놓고 전부 다 초토화 박살났어요. 그래서 앗수르 제국이 혼혈정책을 펴서 아브라함 혈통 자체를 DNA를 섞어버린 짓을 한 거예요. 그래서 갈릴리, 사마리아 전부 다 혼혈아 들입니다. 거기는 그쪽 사람들, 빛을 잃은 그쪽 사람들 속에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서서히 예루살렘 쪽으로 다가오는 방법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쓰여 진 거예요. 요한복음은 달라요.

결국 이것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이잖아요. 우리는 높이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복음적 내용을 보면 가장 낮은 곳, 어느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곳, 십자가의 길, 빌립보서 2장 8,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걸 인정치 아니하고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하니까 십자가보다 더 낮은 복종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거기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거예요.

오히려 저 높은 곳이 아니고 저 낮은 곳으로 갔죠. 그런데 그곳이 뭐냐, 예루살렘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가장 빛 된 도성 이예요. 가장 고상하고 거룩하고 근본 된 도성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여기가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이 딴 데는 없고 성전이 있는 지옥이 돼야 되는 겁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지옥은 지옥이 아닙니다. 진짜 지옥이 뭐냐 하는 것은 성전이 있는 그곳이 지옥일 때 가장 지옥다워요. 그냥 ‘아유, 죽어서 지옥가면 뜨겁다.’ 뜨거운 게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성전이 있는 곳에 가야 알 수 있습니다. 거기 어린양이 죽으니까.

너무나 복음은 간단해요. 복음은 내가 ‘저 사람은 죄도 안 짓고 나는 죄 짓고.’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복음이 안 나타납니다. ‘저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나는 못하고.’ 이래서는 안 되고 어린양을 만나야 돼요. 내 죄 때문에 대신 죽은 분을 만나야 돼요. 그 곳이 성전이고 그 십자가 있는 그곳에서 비로소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한, 야!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구나.’ 하는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 대신 죽으신 어린양이 있는 그 현장에서만 이게 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 오늘날 성령을 줘서 성전을 가지고 이동하죠. 움직이는 성전이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외칠 때 그것이 움직이는 이동식 성전이 되는 겁니다. 저 시골에 가면 이동식 도서관이 있고 이동식 보건소 있듯이 고을고을마다 가는 그곳이 바로 지옥을 앞장세우는, ‘내가 바로 지옥 가야될 존재였습니다.‘ 라는 걸 이야기함으로서 십자가를 증거케 하죠.

성전이 있는 곳이 지옥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유대인들은 자기는 성전이 있으니까 이건 뭐다? 천국이 되고 지옥은 어디 있느냐 하면 성전 바깥의 이웃나라로 본 거예요. 일단 천국은 고정돼 있으니까 다른데 있으면 천국이 둘 돼 버리니까 안 되죠. 천국이 둘되면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천국 만들었으면 다른 데는 지옥 돼야 하잖아요. 시편에 봐도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퍼부으소서.’ 딱 그 말 들으면 우리는 언약 있고 저쪽에는 언약 없으니까 저주 받아야 돼, 인간으로서 유대인이 해석하면 그 외 다른 해석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지옥일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성전을 지옥 만들 줄이야. 불바다 만들 줄이야. 그것도 누굴 앞장 세워서? 그것도 안 믿는 바벨론을 앞장 세워서. 구원하는 것도 안 믿는 사람이 구원해요. 고레스, 바벨론 그 다음 나라가 뭐냐, 바사나라예요. 바사 나라의 왕 이름이 고레스예요. 고레스 때 구원을 받아요. 고레스가 이사야에 보면 메시아예요. 얼마나 수치스러워요? 법정스님이 메시아란 말과 똑같은 소리라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메시아라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가 메시아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유일하게 깨닫는 사람이 구원받은 유대인이죠.

70이레 논문 보면 나옵니다. 70이레 논문을 보게 되면 다니엘이 70년의 비밀을 알았는데 그 비밀이 뭐냐, ‘70년 되면 돌아간다.’가 아니라 70년 동안 있어 보니까 비로소 우리가 지은 죄가 무슨 차원에서 지은 죄인가를 유일하게 알게 된 거예요. 쫓겨 가면서 알게 된 거예요.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죄인입니다.’라는 건 소용없어요.

내가 천국 백성이라고 여겼던 것이 취소당할 때 비로소 지옥이 뭐며 천국이 뭐라는 것을 알아가는 기회를 받은 거예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게 천국이고요. 지옥이라 하는 것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말씀과 십계명이 있으니까 말씀과 십계명과 제사 가지고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다른 민족보다  더욱 더 지옥스럽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는 알죠. 율법을 준 것은 저주아래 있게 하려함이니라. 그래서 3장에도 나오지만 사도바울의 복음에도 나오지만 이 당시에는 몰랐죠. 언젠가 돌아갈 거다. 돌아가도 소용없어요. 다니엘은 안 돌아가잖아요. ‘그게, 그게 아니야.’ 천국은 이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붕~ 떴어요.

여기 공간이 있다 합시다. 공간에서 이렇게 70년 포로 잡혀서 나오잖아요. 바벨론 아닙니까? 여기 공간이 있고 바벨론 있다면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와 같은가 하면 여기 이게 하나의 판때기라면 이게 공간이라면 이게 다시 나가서 들어오게 되면 요 공간 말고 또 하나의 판때기가 있으니까 2개 있으니까 이중적이죠. 땅도 이중적이고 씨도 이중적이고 약속도 이중적이고 하나님의 의도 이중적이고, 아브라함의 약속이 뭐냐 하면 씨와 땅과 하나님의 의에 관한 거거든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다고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오잖아요. 니 씨가 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씨, 땅, 의 다 나온다고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한 것은 아브라함이고 그들 모두가 보기에 단일 공간에 있다고 여겼는데 한번 갔다가 오니까 이게 공간이 두 개로 떴어요. 이 위 공간이 바로 천국이고 이 밑의 공간은 뭐냐 지옥에 편입됩니다. 요거만 지옥이 아니고 바벨론 땅 전부가 지옥 이예요.

우리의 약속된 생명은 위에 있다고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나오죠. 니는 땅을 보지 말고 뭘 봐라? 위를 봐라. 그냥 위로 본다고 안 돼요. 여기 그냥 위를 보면 목성, 달만 보이지, 소용없어요. 여기 위라 하는 것은 약속이 있는 성전이 세워진 그 공간을 위라 합니다. 봐도 안 보이죠. 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지상에 같이 언약에 있는, 같은 엘리베이터 통로 속에 같이 놓여 있을 때만 위고 아래고 보이지 엘리베이터 통로 바깥에 나오면 그냥 보면 목성, 달만 보이지, 위가 안 보입니다. 위를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이사야가 있던 요 자리가 새 언약의 자리가 형성돼야 거기서 위를 볼 때 어린양의 보좌, 요한계시록에서 ‘보라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가 보이지, 요걸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고난, 예수를 인하여 받는 고난, 고난의 자리에 있어야 어린양이 보이지, 지금 고난, 주님과 관계없는데 백날 봐야 어린양이 안 보이죠.

어린양 보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릴게요. 카메라 앞에 어린양을 그려서 앞에 붙이면 어린양 늘 보입니다.ㅎ 그렇죠? 사이비가 뭐냐 하면 벽이 있는데 벽에다가 천국을 낙서하는 게 사이비예요. 벽을 뚫을 수 없으니까 뚫고 지나 갈 수는 없으니까, 왜 행함으로 뚫릴 천국이 아니잖아요. 육으로 백날 거듭나야 육밖에 안 되잖아요. 육에서 영이 될 방법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육으로 할 수 있는 건 낙서만 하는 거예요. 천국, 십자가, 언약, 좋은 것은 들어서 다 써놓는 거예요.

여기에 언약에 의해서 내리 꽂는 이 현장은 죄인이 필수가 되는 겁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내가 땅이 몇 만평 있고 돈이 있어도 이건 내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지난주일 날 설교에 인용한 예레미야 9장 23절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건강 자랑하지 말고 니 똑똑한 거 자랑하지 말고 자랑할 것은 여호와의 주신 총기 그것을 자랑하라 했죠?
 
그게 바로 에베소서 1장에 나옵니다.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신령한 지혜라 하죠. 제가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상에서 돈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건강하든 아프든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게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나는 더 당해도 싸고 지옥 갈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것, 그것이 바로 언약이 되는 거예요. 그게 전에 1초, 2초 했죠? 그게 일종의 불꽃놀이인 거예요. 불꽃놀이 한번 터지면 몇 초갑니까? ‘우와~’ 하다가 몇 초 안 지나서 없어지죠. 밤의 적막에 싸이잖아요. 그럼 또 터지면 ‘아!’ 하잖아요. 그런데 불꽃을 계속 더 쏘아 올리면 재미없어요. 가끔 팍팍 쏘아 올려야 불꽃이 아름답지, 늘 불꽃이 터지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겹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속에 불꽃을 탁 피워 올려 버리면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얻었다면 거기에 이미 누가 죽음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문제가 해결됐다는 거예요. 주일 아침에 이야기했죠. 그걸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지금 당장 죽어도 ‘저는 상관없어요.’ 하는 그런 말이 된다 말이죠. 그럴 때 어린양이 보이는 거예요. 이걸 바깥에서 보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고 이야기를 약간 깊이 있게 봅시다.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게 이중적이라 했죠? 어떻게 이 땅에서 나왔다가 들어오면 이중적이 되느냐, 그건 설명 안 했습니다. 그걸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수준이 되니까 어려운 거 하는데 이건 어려운 게 아닌데 이건 여러분이 옛날 공부한 걸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이 이렇게 있을 때 여기 해가 있고 해를 공전하는 것이 지구잖아요.

시차적 관점이 뭐냐 하면 이 별의 대한 거리를 측정할 때 뭘 계산했느냐 하면 지구가 공전하는 걸 계산한 거예요. 그러면 지구의 공전의 거리는 나와 있고 각도가 여기서 이 별을 봤을 때 각도와 별에서 본 각도 차이에 차이가 나죠. 고 차이와 요 거리를 알게 되면 별과의 거리를 측정할 수가 있습니다. 요 각도의 차이를 시차라 해요. 관점의 차이죠. 시차를 통해서 어느 지점에 별 있다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을 때 인간적으로 볼 것이냐, 신으로 볼 것이냐, 문제 있잖아요. 이걸 시차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건 신약 성경으로하면 너무 어렵고 구약부터 할게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죠. 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 ①번, 모세가 명령했다. ②번, 모세 지팡이로 갈라졌다. ③번, 하나님이 갈랐다. 몇 번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갈랐죠? 하나님이 갈랐으면 지팡이는 왜 필요하냐 이 말이죠. 그렇잖아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 팔이 올라가니까 승리하고 모세 팔이 내려오면 패배했다. 그러면 밑에서 칼싸움하고 있는 여호수아의 칼은 왜 필요합니까? 쓸데없이 왜 그 짓 하는 거예요? ‘여호수아야, 이리 와라, 와서 지켜보자.’ 이러면 될 텐데 왜 하는 겁니까?

하나님은 시차가 아니면 포착되지 않아요. 시차가 아니면 포착되지 않는 이유가 인간이 하게 되면 신을 무시하게 돼 있고 신을 생각하게 되면 인간을 무시하게 돼 있어요. 인간의 관점이라는 게. 인간이 다 했는데 신이 왜 필요해? 신이 다 했는데 인간이 뭐가 필요해? 지금도 이 시차를 모르는 게 개혁주의 신학 아닙니까? 여기서 삼위일체, 개혁주의 신학이 나온 거예요. 기껏 하는 게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한다. 통해서 하는 이유가 뭡니까? 몰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개입됨으로서, 인간은 그냥 개입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죄인의 입장에서 개입을 해줘야 돼요. 죄인의 입장에서!! 죄인의 입장에서 개입을 해보면 그동안 인간이 생각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예요. 그런데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고, 이런 나쁜 인간에게 맥없이 죽은 연약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연약한 하나님과 누구의 만남? 죄인의 만남. 이것이 시차적 관점 이예요. 이게 십자가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존재론 적으로 생각해요. 인간이 여기 존재하고 신이 여기 존재하니까 신은 일단 전지전능하니까 ‘하나님이여, 무슨 고상한 노래를 부를까요? 대중가요 말고 땡 벌, 땡 벌 말고 무슨 노래 만들어 드릴까요? 그러면 영광 받겠습니까?’ 돈도 그냥 장터에서 꾸겨진 돈 말고 다림질한 돈 드리면 영광 받겠습니까?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을 드리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게 인간이 하는 방법 이예요.

우리는 성전이 있다. 우리는 씨가 아브라함 씨다. 이 땅은 모세가 데려다 준 약속의 땅이다. 땅 있고 씨 있고 하나님 있고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무슨 선지자? 거짓 선지자. 진리에 거짓 선지자가 등장해야 돼요. 거짓 선지자한테 죽은 사람이 이사야입니다. 이게 시차 아닙니까? 이사야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을 앞당겨서 미리 앞당겨서 죽게 하신 거예요. 죽어도 좋죠. 왜냐 자기는 성전에서 천사를 봤기 때문에. 천사 봤는데 뭐. 볼 거 다 봤는데 뭐.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데 뭐. 살 마음 없어요. 누가 가겠느냐 할 때 ‘제가 갈게요.’ 사나 죽으나 관계없어요. 볼 거 다 봤는데요 뭐. 아버지와 어머니 다 아는데 뭐. 부부간에 볼 거 다 봤는데 뭐. 부부 사이에 뭐 가리고 할 필요 없죠. 주님과 우리 사이가 볼 거 다 본 사이예요. 우리는 무조건 죄인 이예요. 죄를 짓고 안 짓고 상관없어요. 무조건 죄인이고 주님은 무조건 여기 창 자국 있는 분이고 못 자국 있는 분이고, 그러면 됐잖아요.

놀라운 사실은 그 외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성경에는. 전지전능하고 뭐 어떻고, 저떻고 아니에요. 유대인이 이사야를 모르겠습니까? 책을 달달 다 외우는데, 모세를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메시아 오니까 ‘당신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악마의 대장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그게 주의 전략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 있죠? 하나님이 사람에게 포로 잡힌 거예요. 사람보다 더 못한 하나님! 여러분, 이거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보다 재주가 많다고 해서 우리보다 더 듬직하다고 해서 우리가 못한 것을 당신이 해낼 수 있다고 여겨서 그래서 교회 가서 가정사 어려운 거 다 가지고 빌려고 갔잖아요. 그런데 내 신앙보다  실력이 더 없어. 이 세상사는 그 실력이. 요령도 없고 아부할 줄도 모르고 뇌물도 줄줄 모르고 사법 줘서 공천 받을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사는 재주가 없어요. 안철수보다 더 못해. 전혀 지도자가 될 수도 없어.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그만큼 혜택 입고도 ‘나 저 사람 모른다.‘고 했겠습니까? 공천자가 있어야 하는데 누가 공천해? 아무도 공천자가 없어요. 이상한 데로 끌고 가요. 십자가로 끌고 갈 줄 상상도 못했죠. 물론 그 전에 이야기했죠. 나 따르려면 십자가 지라 하는 것은 그냥 흘러가는 잔소리인 줄 알았지, 실제로 십자가로 몰아갈 줄은, 미쳤어요? 내가 예수 믿고 망하게.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때는 니 자랑하지 말아라, 내가 그냥 너를 그냥 구원시켰기 때문에 그냥 구원되는 거예요. 우리가. 토 달지 마세요. 이유 없어요. 무조건 선택해서 무조건 그냥 데려가서 천국 들어간 거예요. 무조건 면류관 반납하고 런닝이고 팬티고 전부 다 갖다 바치는 거예요. ‘주께서 받으심이 합당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우리가 뭐 개척교회 했습니다. 뭐 했습니다.‘ 말도 안 돼. ’주님 때문에 내가 손도 아프고 어떻고 저쩌고...‘ 그런 거 익숙지 못해서 그렇죠. 아직 시차 이야기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시차에서 한번 정리해 보면 방금은 죄인과 그리고 희생자라는 시차를 신약에서 언급했는데, 다니엘서에서는 뭐냐, 역사와 묵시라는 시차를 사용합니다. 역사적으로 되돌아가면 맨 그 땅이 그 땅 이예요. ’야, 이 땅에 있는데 역사니까 역사적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 공간 그 땅이 가나안 땅 이예요. 팔레스타인 땅, 블레셋 땅이지만, 현재 이스라엘 땅, 그 땅, 시간은 70년 만에 돌아온다. 그런데 이 70년이 뭐로 바뀝니까? 70년이 아니고 70이레로 바뀌죠.

시간이 70이레로 바뀌면서 이 땅의 의미는 누구하고 하느냐, 돌아올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죽어야 될 장차 오실 죽을 메시아가 이 땅을 접수해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이 땅에 돌아간 사람들은 뭐냐, 메시아를 죽여야 될 나쁜 역할을 담당하는, 그러니까 옛날 영화에서 허 장강 같은 역할, 나쁜 역할을 담당하는, 그런데 본인들은 몰라요. 본인들은 하나님이 축복한 이 땅, 이 땅은 메시아가 오셔서 감람산에 오실 것이라고 여겼던 그 사람들의 역할은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이 인류를 대표해서 메시아를 창으로 찔러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야.’라고 외쳐야 될 그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왕을 죽인 거예요. 누가?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오신 왕을 죽인 거예요. 왕은 죽여 놓고 백성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사도행전 2장 37~38절에 보면 ‘우리가 어찌 할꼬’ 라고 나오죠. 이 이야기를 전하니까 ‘우리가 어찌 할 꼬’ 할 때 베드로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찌 할꼬, 우리가 실수했는데.‘ 이게 보통 실수한 게 아니잖아요. 사실 하나님이 실수를 유도한 거예요. 실수 다 할 수 있는데 너희들이 뽑혀서 대표로 실수 한 거예요. 사실 그 실수 가운데 우리도 다 거기에 같이 한패가 돼 있습니다.

사람들의 집단성에 보면 항상 사람들은 능동적이 아니고 수동적 이예요. 누구 하나 외치면 그제서 우르르 따라갑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 인간 마음속에 선악과가 심어져 있어서 이것은 누가 지시와 명령을 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어요. 목사가 이걸 잘 이용하죠. 명령과 지시를 하게 되면 교인들은 그걸 굉장히 좋게 여깁니다.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명령과 지시를 하는 목사도 본인이 기분 좋아요. 누굴 명령한다는 것은 자기가 그런 위치에 있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명령이 아니고 뭐냐 하면 상황을 이야기하거든요. ‘너는 죄인이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8장에서 성전에 어떤 죄인이 고개를 못 들고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주님께서 ‘너는 의인이다.’라고 했죠? 반대편에 있는 바리새인은 이레에 2번씩이나 금식하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쫓겨나죠.

만약에 그것을 하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한테 의인 소리 듣기 위해서 전부 다 꿇어 엎드려 ‘죄인입니다.’라고 할 거다 말이죠. 그건 명령이 아니고 네가 이렇게 된 상황을 내가 일부러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나서서 만들어진 상황 속에 네가 지금 나의 작품으로 있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이 사실은 따지고 보면 주께서 그렇게 간통하게 만들었어요. 그 여자가 간통하다 안 걸리는데 하필 전봇대에 cctv가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게 아다리예요. 주께서 그렇게 조절한 겁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다른 데 갈 수 있는데 하필 예수님이 제자들 있는데 맞닥뜨리게 한 것은 조치를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실로암 가서 진흙 바르고 닦아서 눈 뜨게 했잖아요. 모든 상황이 가만히 두고 관찰해 보면 주님께서 ‘에이, 주님이 다 하셨지?’ 나중에 보면 가만히 보면 내가 실수해서 죄 졌다 하는 것도 가만히 따져보니까 ‘주님, 일부러 했죠? 일부러.’

진짜 다윗도 그럴 만해요. 다윗도 암몬 전쟁할 때 지는 인터넷이나 하고 있지 왜 심심하다고 주택도 왜 허가해 줘서 그 밑의 장군 우리야가 못난 여자하고 결혼 안 하고 잘 빠진 여자하고 해서, 가만히 따지고 보면 ‘에이, 주님이 일부러 그런 거야.’ 전부 다 그 배치가.

우리가 뭐 되게 하기 위해서? 죄인이라는 거죠. 그걸 알고도 의인된다는 것은 이슬람교에서. 모든 것은 우리 알라신이 해줍니다.  이걸 알고서 의인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걸 알고 뭐가 된다? ‘역시 죄인이구나.’ 우리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시는 거, 죄가 넘치는 곳에 뭐가 넘치기 위해서? 은혜를 더욱 더 넘치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신약에선 아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선 뭐냐 모든 율법에 뭐가 있습니까? 사랑이 있다는 말은 ‘니, 우리는 사랑 안 받으면 지옥 가.‘라고 할 정도로 너는 사랑 안 받으면 형편없어.’라는 그 ‘형편없음’의 자리가 주께서 만들어 낸 자리예요. 그 형편없음을 그냥 우리가 수용하고 그걸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없이는 그것도 지난 사랑 말고 매일같이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 없이는 우리는 형편없습니다. 그 형편없음을 우리는 받아들이면 돼요. 이름도 이 형편없음이라고. 이 무가치 이런 거.

결혼할 때도 김 무가치는 이 무가치를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하면 ‘예, 아멘’ 하면 잘 살죠. 지 잘나서 결혼하니까 싸우고 나중에 이혼하고 하죠. 실제로 나 무가치, 너 무가치하면 아무 문제없잖아요.

여기 역사와 묵시라는 것이 다니엘에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오느냐, 야, 이게 진짜 어려운데 70이레 논문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몇 명 되겠는가 의심스러운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육에서 나온 역사와 묵시가 따로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래요. 묵시라 하면 전부 다 영적이라 생각하면 굉장히 편한데 저는 그걸 시비 걸었던 거예요. 인간의 시간성 속에는 역사 말고 아직 남아있는 이것을 델로스(telos)라 하는데 목적, 역사가 흘러가면 언젠가 어떤 목적에 이를 것이다. 그 목적의식이 미비 된 그 목적을 묵시라 하자. 라는 아이디어를 영이 아니고 육이 끄집어낼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을 끄집어 내줘야 약속의 땅에 돌아가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묵시적 메시아를 그들이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묵시를 무시한 게 아니고 묵시를 알았어요.

묵시를 알았는데 주께서 역사로 올 줄이야 그들은 꿈에도 몰랐죠. 자기는 구름 타고 올 줄 알았죠. 구름 타고 올 줄 알았는데 세상에 베들레헴 어린애로 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묵시를 역사로 놓고 역사를 묵시로 바꿀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수를 써도 주께서는 결코 인간의 행함과 그 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해도 다 반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해서 반대로 기도해도 그것도 반대예요. 안 돼, 백날 비비꽈서 안 돼요.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1.16) 12-08-31 17:51 
가락교회-다니엘1장(시차적 관점)120823-2강b-이 근호 목사

제 2강b

시작해 봅시다. 신약 때에 우리가 죄인 되고 주님은 희생자가 된다는 그 시각적인 차원이 된다고 한다면 다니엘이 포로 잡힌 것은 그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걸 따져봐야 되겠죠. 그거 제가 힌트 줬습니다. 다니엘에서는 역사와 묵시의 시차라 했습니다.

그러면 묵시라는 것은 우리가 이런 시차 말고 복음적인 것 말고 인간이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역사는 진행돼 봐야 역사는 항상 모르더라. 하지만 역사 끝에는 완성이 될 거야. 고 차이, 텔로스(telos), 목적이라 하는데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언젠가는 그 목적을 이룰 날이 있을 것이다. 목적을 향하여 시간은 계속 지연된다. 그러면 목적이 여기가 현재라면 목적이 안 됐으니까 이건 미완성이겠죠. 여기는 완성이고 여기는 미완성이죠. 미완성 이 부분을 사람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묵시라고 보는 거예요. 이 묵시는 시간 끝에 달려있는 묵시가 되겠죠? 이걸 ‘이미’라고 하고 이 미진한 것을 ‘아직’이라 해서 개혁주의 신학 리들보스나.....철학자들은 이걸 역사와 묵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디어는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이미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2천년 역사의 신학자들이 날고 긴다 해도 유대인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를 못해요.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그 여호와에 대한 풍부한 모든 논리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보다 못해요. 교회사에 신비주의가 나왔는데 그 신비주의가 백날 끄집어내도 유대 묵시문학에서 신비주의를 못 따라갑니다. 대단한 신비주의예요. 여기도 신학자부터 한 신비주의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독일의 신비주의 이런 사람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게 뭡니까? 문자로 파악되지 않는 불교에도 칠로 벽, 대승불교도 참선해 보면 이런 거 나오잖아요. 고수들이 막상막하예요. 힌두교도 나오고, 그 신비주의도 결국은 유대종교의 답습이라 할까,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다 예수님 보시기에 악마의 술책에 불과한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나오는 것. 마귀를 이기겠다고 설치는 그것도 마귀예요.

그러니 지금 다니엘을 보면서 다니엘에서 묵시라고 할 때 제가 왜 이걸 끄집어내느냐 하면 다니엘 주석가, 다니엘 해석을 보게 되면 묵시를 이야기하는데 어떤 묵시냐 하면 바로 이 묵시를 이야기해요. 시간이 아직도 도달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 요 남아있는 이걸 종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다니엘은 묵시적 세계를 기다렸다.’라고 한 거예요.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도 이런 해석을 해왔었습니다. 백날 하면 뭐합니까? 메시아를 죽여 버렸는데요. 이런 해석이 모여서 누굴 죽였다? 메시아를 죽이는 하나의 아이디어로 사용된 거죠. 아이디어로 사용됐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다니엘에서 시각적 차이를 한번 끄집어내자 말이죠. 여러분, 제가 이러한 해석은 엉터리라고 하면 우리는 또 이 해석 버리고 다른 해석으로 가면 시차가 아니잖아요. 이 해석을 일단 가지고 이 해석이 아닌 다른 해석을 가져야 두 사이에서 진짜 복음이 나오는 겁니다.

바리새인 이야기하면 우리는 바리새인 아니니까 들을 필요 없고 바리새인 말고 예수님이 하신 해석을 바로 들읍시다라고 하지만 바로 듣지 마세요.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우리는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충분히 들어줘야 돼요. 어떤 사람이 간통했는데 바리새인이 돌로 쳤다. ‘아이고, 나쁜 바리새인들, 죄 있는 것들이 어디 돌로 쳐?’라는 말을 하죠. 막상 우리 집안에 어떤 형수님이나 누가 해 보세요. 우리는 교회 못 가게 만들고 ‘쉿’ 하죠. 교회 못 나오게 하는 것은 돌로 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보세요. 남들 이야기할 때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왜 자기한테는 그렇게 관대한지 몰라요. 남한테는 그렇게 엄격하면서 ‘죽여야 돼.’ 하면서 막상 자기 집안, 자기 식구한테는 쉬쉬 해버리고.

왜 자꾸 시차를 인정 안하고 자꾸 하나로 묶으려 하느냐 이 말이죠. 하나로 묶어봐야 누가 잘났다? 역시 나는 모든 판단력에 있어서 나는 종합할 수 있는 종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러한 능력까지 있는 ‘나는 대단해’ 이렇게 되죠. 이 종합 판단, 이걸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뭐든지 종합해서, 종합을 왜 합니까? 역시 내 판단은 종합적으로 내가 우수해. 헤겔은 정 반 합, 이거 왜 합니까? 역시 정 반에서 합은 누가 챙긴다? 내가 챙기는 거예요. 합을 알 정도로 나는 대단한 존재야. 결국 이것과 관련돼 있어요.

인간의 모든 논리라 하는 것은 항상 누구 좋은 쪽으로 자꾸 이게 돌아옵니까? 내 좋은 쪽으로 돌아오죠. 요번에 수련회 할 때에 플로티누스 이야기하면서 머무르고 나타나고 회귀 한다 는 말 했죠. 삼중 신 이야기하면서, 삼위일체를 인간의 지식으로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수련회 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로고스 이야기하면서. 신이 3개인데 하나 될 때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 삼위일체라 하는 것이 이게 얼마나 우스운 게 돼요? 삼위일체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가지고 요새는 삼위일체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난리 나거든요. 교회에서.

이게 뭐냐 하면 시차적 관점을 모르고 항상 최종적인 합(合)을 누구로 돌린다? 내가 판단하는 자기 것으로 돌리는 그 잘못된 것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 해석하면서 이 두 가지 해석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해석을 할 때 육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과 성령 받아서 나올 때 해석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양쪽 다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해석이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다니엘 3친구가 뭘 안 먹었죠? 고기를 안 먹었죠. 우선 기존의 해석, 고기를 안 먹은 이유는 율법에 이방 제물에 바쳤던 고기기 때문에 못 먹겠다. 그래서 고기를 안 먹어서 바짝 마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채소만 먹겠다. 해서 버텼더니만 하나님께서 포동포동 살이 찌게하셔서 ‘야, 이건 뭐 니가 우리한테 포로 잡혀서 이름도 벨드사살, 우리의 전리품임에도 불구하고 너희 하나님이 함께 있는 모양이다.’ 해서 복음을 전했다. 이런 해석, 그래서 우리도 어디 가더라도 기존의 세속에 물들지 말고 바르게 살면 주께서 포동포동 살찌게 한다. 이렇게 나오겠죠.

그럼 이걸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면 교사 임용고시를 언제 칩니까? 월요일에 칩니까? 토요일에 칩니까? 일요일 날 치죠. ‘시험 칠까, 아니면 안식일 지킬까 하다가 일요일 날 시험 치지 말고 안식일 지키게 되면 교사해서 받는 봉급보다 더 많은 봉급의 일자리가 마련되는 놀라운 기적이 생긴다.’ 라는 식으로 적용을 하게 되죠.

결국 사람들의 노림수가 뭡니까? 지가 평소에 챙기고 싶은 것, 속으로 은근히 챙기고 싶은 그러한 것을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서 백날 빙빙 돌고, 빙빙 돌아봐야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것은 뭡니까? ‘역시 난 챙길만한 존재야.’ 라는 자기 잘남이죠. 노골적으로 ‘나는 나밖에 모른다.’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아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뭐 주님 이야기 다하고 다니엘 채소 인용 다하고 이러는 건 뭡니까? 나는 이 땅에 승리자가 되었다. 나의 가치를 무시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나는 의인이니까 복 받을 짓을 해서 복 받았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건 천국이 아니고 지 세계예요. 자기 세계가 뭡니까? 지옥이잖아요. 하여튼 같은 다니엘 보고도 지옥 갈 해석만 끄집어내요.

②그렇다면 그 해석이 아니라면 그러면 다니엘 3친구가 채소를 먹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지금 땅과 씨와 의, 하나님의 의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성전에서 나옵니다. 땅과 씨와 의를 합쳐서 아브라함 언약이라 해요. 이것은 사람 관점이 아니고 하나님 관점이죠. 하나님이 보기에 땅과 씨와 의가 있을 때 아브라함 언약은 완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갈라디아 3장에 있는 것처럼 완성은 누가 등장해야 돼요? 아브라함 자손이 등장해야 완성이 돼요. 이 땅과 씨와 의에서 씨는 아브라함 혈통 대신 누가 대신했죠? 유대인이죠. 유대인들이 자기가 씨니까 땅과 의는 당연히 따라온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돼서 이것이 예수님한테 갔다 말이죠. 지금 다니엘 이야기하다가 예수님 이야기하느냐 하지만, 다니엘은 어디에 끼어있습니까? 지금 유대 나라가 멸망했다는 거예요. 누가 멸망시켰습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한 유대인과 그리고 신약 성경 예수님께서 유일한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 사이에 누가 있다? 다니엘이 끼어 있잖아요.

그럼 다니엘은 층이 몇 개 있다 했습니까? 역사적 관점과 묵시적 관점, 층이 2개 있잖아요. 아까 첫 번째 시간에 했죠? 약속의 땅에서 판때기가 있다고 했잖아요. 층이 2개 생겼다고 했죠. 2개가 생겨서 지금 예수님한테 연결된다 말이죠. 사람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다. 연결되는 과정에서 이게 멸망되면서 이 2개가 뻗어져 나온 겁니다.

한쪽은 멸망당할 만해서 멸망당했다. 또 한쪽은 멸망당한 쓰레기통에서 세상에 생명이 나오더라. 너희들은 멸망당해 마땅해. 그 다음은 너희는 구원받아 마땅해. 이게 말로 설명이 모순되잖아요. 죄인이다. 의인이네. 이게 말이 안 된다니까. 루터가 이것 때문에 고민했어요. 어떻게 죄인이 의인되고 의인이 죄인 되고, 지는 성경대로 했지만 자기도 어떻게 되는지 설명을 못해요.

멸망 받아 마땅하기에 구원받아 마땅하다는 거예요. 여기에 조사를 연결해 주는 게 있어야 돼요. 그게 다니엘과 3친구가 연결해 줍니다. 다니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인자는 누구용이나 하면 신약에 하나님께서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름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름 속에 팔자가 들어있습니다. 운명이 들어있어요. 고상하게 말해서 운명 속에 사명이 들어있습니다. 임무, 사명. 이 사명은 언약 적 사명 이예요. 언약 적 사명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언약을 이룬다는 그 정도가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내가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말씀 지켜야지.’ 이 말하고 ‘말씀의 성취 때문에 너는 존재해야 돼.‘라는 말과 다르죠? ’야, 딸아, 똑바로 잘 해.‘ 이거 하고 ’딸이기 때문에 딸다워야 돼.‘ 이거하고 다릅니다. ’이거 못하면 니 딸 아니야.‘ 이거하고 ’이미 딸이야, 딸이어서 이걸 해야 된다.‘ 이거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미 이름이 뭡니까? 人子라. 다니엘은 무슨 범위에서 못 벗어납니까? 人子됨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장차 예수님이 하실 人子됨에서 다니엘은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납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자기도 자기 주변 상황과 자기 팔자를 자기가 정하지를 않는 거예요. 포로 잡혀 온 것부터가 자기 팔자가 아니라니까요. 자기 뜻이 아니에요. 이거 뭐 이상해. 자기 뜻이야 고기 먹고 싶죠. 그런데 뭔가 주변의 상황이 어떤 사명 같은 게 있어요. 사명 같은 게 있고 이걸 내가 주어진 내가 생존하기 위한 내가 어떻게 살기 위한 상황이라고 하기가 뭐한 그러한 상황이 주어진 거예요.

밑을 보면서 다른 층에서 간섭 받는, 역사를 살면서도 묵시로부터 뭔가 간섭을 받는 그 안에 끼어있는 납작하게 두 층 사이에 끼어있는 입장 이예요. 두 층을 연결시키는 매개, 매체 물, 역사와 묵시를 연결시키는 모습으로 다니엘과 3친구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들은 다니엘 본인도 해결 못해요. 자기는 채소만 먹을 뿐이지, 채소 먹는 건 자기가 하는데 포동포동 살찌는 것은 자기가 한다? 못한다? 못해요. 이걸 뭐 다이어트 한다고 만날 몸무게를 잰다고 저울에 올라가고 하는 그러니까 내 쪽에서 실시하는 방법 자체가 완전히 차단돼 있습니다. 요렇게, 요렇게 하면 요렇게 된다. 그런 인 결과의 구조에서 이미 다니엘은 거기에 빠져있어요. 어떻게 손 쓸 수가 없습니다. 채소 먹어서 바짝 여위어도 자기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기 좀 잡수시지.

글쎄 그게 왜 고기를 안 잡쉈느냐 하면, 다니엘은 역사 층이죠. 다니엘이 자기가 고기 먹고 싶어서 먹을 수 있는 본인만을 위한 역사 층이 아니에요. 역사 층에 누가 함께 여기 작업에 끼어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가 요청한 게 아니에요.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오는 역사적 사명이 자기가 존재하는 역사적 층에 같이 지금 같은 열차에 타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어떻게 자기가 ‘아저씨 나가세요.’ 할 수가 없어요. 드라마에 보면 뭡니까? ‘며느리 너가 들어와서 재벌 가족이 파탄이 났어. 그러니까 너는 보따리 싸서 미국으로 가.’ 이거는 드라마 천사의 선택에 나와요. 아침 드라마. 내 역사적인 바탕에 니가 왜 역사적 바탕에 끼어들었어. 나가.‘ 드라마는 되는데 다니엘은 자기중심으로 역사를 편집을 못해요.

포로 잡혀 왔다는 것이 이 포로 잡힌 현실을 내가 어느 것을 수정을 하고 포로 잡혀도 고생 덜 하고 이걸 자기가 손 쓸 수 있는 입장이 못 돼요. 이것은 오늘날 성도가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을 다니엘이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술 잡숫고 돌아가시고, 이런 상황을 지금껏 신자라면 이걸 내가 손질해서 수정하려고 하지 말라 말이죠. ‘내가 그때 아버지 술 잡숫고 개천에 빠질 때 내가 같이 따라가야 했는데 괜히 그때 tv본다고 안 따라가서 아버지가 술 먹고 죽으셨다.’ 자꾸 그렇게 후회하지 말라 말이죠.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있는 거예요. 내 사명이 아닙니다. 내 행복을 위한 사명이 아니에요. 여기는 묵시와 역사를 매개하는, 묵시가 있음을 알려주는 증인으로 살라고 역사적 층에 살고 있는데 거기에 나도 끼어있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끼어있고 다 끼어있는 거예요.

여의도에서 길을 가는데 어떤 술 먹은 인간이 찔러서 아팠다. 거기 왜 갔어? 여의도 간 게 문젠가? 여의도에 간다고 다 찔립니까? 그렇게 찔렀을 때 경찰청장이 가서 개입하고 안 찔렀으면 개입 안 하잖아요. 그런데 여의도 광장은 경찰청장도 관심 표명하는 새로운 명소로 되죠. 그러면 이 역사는 전에 있던 여의도하고 다른 여의도가 되겠죠.

이것은 뭐냐, 변화, 어디에서 조정하는 변화? 묵시에서 조정하는 변화, 그런데 변화 된 것만 보이는데 뭐는 (  ) 쳐서 안 보이더라? 어떻게 변화한다는 묵시의 조정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뭐가 없습니까? 묵시가 없기 때문에 묵시와 단절됐기 때문에 뭐를 모릅니까? 변화를 모르는 거예요. 결국은 다니엘이 포동포동 자체적으로 살찐다는 것은 뭐에 대한 고발이다? 묵시와 연계된 쪽에서 묵시와 연계 되지 않은 쪽을 오히려 포로잡고 오히려 시기하고 영적으로 니는 내 통솔 하에 있으며 마르둑 신이 여호와 신에게 다룸을 당하는 오히려 한 수 아래 있는 그러한 현실에 있음을 알려주는 거예요.

니들이 판단하는 판단에 다니엘 3친구는 놀아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다니엘 3친구는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다니엘 3친구는 저쪽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채소 먹고 싶은 것이 다니엘 3친구의 그게 희망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다니엘 설교가 달라야 돼요. 오늘날 설교는 다니엘이 신앙 좋은 걸 티내기 위해서 지가 알아서 채소를 골라먹었다는 겁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도 고기 먹고 싶고 치킨 먹고 싶어요.

다니엘의 운명은 다니엘이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이미 자격 박탈당했어요. 그는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과 묵시적 지평이란 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다니엘 3친구는. 그런데 느부갓네살과 그쪽 묵시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저 인간들 미쳤지. 왜 이러나. 어이, 보소. 당신이 채소 먹는 것은 당신 자유지만 당신이 채소 먹어서 바짝 여위면 내가 공무원으로서 내가 책임추궁 당한다고. 저 쓸모 있는 유능한 다니엘.’ 다니엘은 요즘으로 말하면 세무사나 회계사 되겠죠. ‘똑똑한 저 사람들이 바짝 여위어서 사무 보다가 캑하고 코피 쏟아지면 ’누구야? 저 인재 관리하는 사람 누구야? 너 사표 내.‘ 이러면 지가 책임추궁 당하니까 누가 당황스러운 거예요? 다니엘 3친구를 관리하는 쪽에서 당황스럽죠.

그 당황스럽다는 게 뭐냐, 결국은 누가 포로 잡은 자고 누가 포로 잡힌 자인지 이미 여기서 균열이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균열은 어려움을 야기 시킵니다. 자, 느부갓네살 쪽에서의 어떤 당황스러움이 그들은 묵시로 이어지느냐, 안 이어집니다. 어디로 이어지느냐, 그들이 말하는 가짜 묵시로 이어지죠. 지금 내가 당황스러움이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게 남아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 모르는 거 남아 있는 거하고 내가 죄인 된 거와 같은 말입니까? 다르죠. 일단 요거는 맞는데 내가 배울 게 남아있다. 그러면 더 배워서 알게 되면 요 남아있는 것도 괜찮지만 더 배우면 배울수록 더 훌륭한 ‘나’가 되겠죠. 그걸 4자로 개혁주의, 개혁주의 신학이라 해요. 개혁주의 신학은 지금 예수 믿는 나는 죄인 아니고 괜찮은데 다만 아쉬운 것은 성경 전체를 깊이 있게 모르는 거, 그 깊이를 더 알게 되면 잘난 데다 계속해서 더 잘난 쪽으로 발전하게 되면 요게 성화 론인 거예요. 인간 요거 되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마귀가 그렇게 환장하게 만들어요.

옛날에는 기도하라 하면 못 할 것 같았는데 요즘에 공중기도 20분 한다. 그게 뭡니까? 그만큼 실력이 나아졌고 실력이 나아지면 신과 가까워졌고 신과 가까워진 만큼 축복을 타낼 가능성 확률이 높아졌다 이 말입니다. 어지간하면 축복이죠. 워낙 잘하니까 어지간하면 다 축복 이예요. 여기에서 못 벗어나요. 이건 아무리 부정하고 부인해도 못 벗어납니다. 왜, 그것 때문에 교회 오고 그것 때문에 예수 믿었고 그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 이런 이익을 노리고 하나님을 믿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아니라면 그들은 발작을 일으킵니다. 발작! 게거품을 일으키며 발작을 일으킵니다.

이거 아니라면, 그럼 이게 아니라면 뭐라고 하느냐, ‘한국교회 다 틀렸나? 한국교회 니들 빼놓고 다 지옥 가나?’ 이럽니다. 처음부터 다 지옥가요. 그걸 몰라요. 처음부터 다 지옥 간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나 지옥 가도 마땅한 사람인데 주님께서 알아서 구원해줬습니다.’라고 불꽃놀이처럼 팍팍 피어오르는 그 사람이 구원받는 거예요. 왜, 그건 본인이 인력으로 인간의 육에서 나온 사고방식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지가 죄인이라는데, 그런 인간 봤어요? 지가 죄인이라는데. 없죠.

다니엘에서 엉터리 묵시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건 우리가 안 해도 그 당시 다니엘 주변에 포진돼 있던 그 당시 느부갓네살부터 해서 모든 신하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다 해주고 있습니다. 다리오 왕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는데 사자 입이 봉해져 있으니까 ‘아이고, 다니엘아 우리 신보다 니가 믿는 신이 더 훌륭하고 더 옳다.’했죠?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은 못 받아요. 또 잊어버렸죠? 구원은 뭐를 지식을 확보해서 구원 얻는 게 아니고 주께서 직접 손을 대야 구원받습니다. 이건 제가 목소리 높여도 할 수 없습니다. 고함질러야 돼요. 구원은요 예수님이 찾아와서 십자가 피로 용서해 줄때 구원받습니다. 예수 피로 구원받는다는 지식을 백날 외워봐야 구원 안 되거든요. 그건 로고스입니다. 로고스! 요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지식!

유대인들이 언약을 달달 외웠습니다. 유대인들이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한 종교 하는 사람 이예요. 만날 밥 먹고 연구하는 게 종교 연구하는 사람 이예요. 자기 부인 얼마나 잘한다고요. 자기 겸손, 자기 부인. 재를 뒤집어써서 구원될 것 같으면 우리 이거 하지 마세요. 난로 피워서 재 뒤집어 써야 돼요.

사람이 구원받는 방법이 없어요. 이게 복음입니다.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다시 태어나, 다시 태어나. 뭔 뜻입니까? 지금 너는 안 돼, 안 된다는 말을 니고데모는 못 알아듣는 거예요. 주님은 안 된다 하는데 지 맘속에서는 어쨌든 돼야 된다는 게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허전해. 안 되는 줄 아는데 어떻게 됩니까? 이 말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말은 말이 안 되잖아요.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니가 육이거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까 안 되게 돼 있어.

그러면 질문 바꿔서 ‘그럼 천국 간사람 없겠네.’ ‘있어.’ ‘바람이 불어서’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했잖아요. 바람같이 불어서 되는 사람, 그 외는 없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바람, 결국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는 자는 내가 알아서 구원하고 나머지는 구원 안 해줘. 예수님 돌에 맞아 쌉니다. 지가 뭔데?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떡 와서 ‘내가 구원 안 해주면 니 구원 못 받지.’ 이거는 맞아도 싸지 뭐. 이거는 예수님 영, 그리스도 영을 받지 아니하면 이 말 이해 못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니라.

왜 나는 내 사람 돼야 되지, 왜 그리스도 사람이 돼야 돼요? 갑자기 내 이름 떼버리고 거기다 내 이름 자리에 뭐로 박힌다? 그리스도로, 니 몸은 니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것이야, 이렇게 문신처럼 인박힌 채로 도장처럼 박혀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야 마귀에 속한 사람들을 이겨서 생명책에 기록이 돼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러면 저쪽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뭐라 하는지 압니까? ‘그럼 구원되기로 작정된 자, 니가 그런 소리를 왜 하느냐?’ 하죠. 세상은 구원을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만이 그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무도 있고 햇빛도 비치고 다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오늘 낮이 서늘한 것도 날씨가 더운 것도 38도 올라가는 것도 전부 다 주님만이 그런 권한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한 것이고 그 중에 일부가 우리다 말이죠.

‘참새야, 왜 짹짹 거리느냐?’ 참새한테 물으면 안 되죠. 참새가 짹짹거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친히 기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짹짹거리고 들풀이 피어있는 이유는 들풀은 지가 열심히 피었기 때문에 ‘피우자, 피우자.’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들풀아, 니가 애써도 들풀이 아닌데, 니가 왜 거기 있느냐?‘ 이건 말이 안 되는 질문 이예요.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그 말을 알아들으니까 주께서 기르시는데 ’니는 거기 왜 있는데?‘ 이게 말이 되냐고요. 아니 방귀 나온 사람보고 ’니 왜 방귀 나오느냐?‘ 하면 ’나오는 걸 어떻게.‘

그리스도 영이 그리스도께서 홀로 구원한다는 걸 외치는데 ‘그 만 입 다물라.‘ 해품달에 나오는 것처럼. 입 다물라 해서 입이 다물어집니까? 그래서 다니엘과 3친구는 뭐라 합니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역사에서 뭐라고 하던 간에 묵시가 까라 하면 깔 수밖에 없다니까요. 묵시가 불 속에 들어가는 역할로 사명을 받았으면 우리는 ’들어갈까 말까, 들어가면 너무 뜨거울까.‘ 우리가 이럴 입장이 못 된다니까요. 다니엘 3친구는 지도 답답해. 본인도 모르는 이야기를 나보고 이야기하라고 하니 본인도 답변할 게 있어야죠.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어떻게 해. 이런 소리 하니까 계룡산에서 내려왔다는 소리 하는 거예요. 학자라 하는 것은 그건 바리새인들입니다. 적어도 학자가 됐으면 ‘이 박사학위는 죄입니다.‘라는 이런 고백이 나와야죠. ’이 박사학위 때문에 예수 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야지.

그러니까 내 인생을 내가 어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DNA가 같은데 DNA를 누가 바꿔요? 조금 있으면 DNA도 바꾸게 생길지도 모르죠. DNA를 바꾸면 좋은 DNA와 나쁜 DNA를 누가 판단합니까? 거기서도 문제 생긴다고요.

이제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약속의 땅에 있는데 나갈 때는 역사로 나왔다가 들어올 때는 역사, 묵시 두 층이 나오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되느냐, 다니엘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바벨론에 일부러 박아놓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바벨론이 예루살렘 칠 때에 바벨론을 누가 다루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다뤄졌습니다. 그러면 지금 유다 나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느 나라가 적용된다? 우리 유다나라만 적용된다고 봤어요. 북쪽도 아니에요. 왜 다윗언약이 무슨 지파입니까? 유다지파잖아요. 유다지파에게 아까 시편 89편 봤죠? 다윗 왕조에게 준 약속을 논하죠. 그럼 북쪽은 유다지파 아니잖아요. 두 지파 빼놓고 10지파잖아요. 그러니 이건 망해야 되고, 주께서 끝까지 남은 자라 하는 것은 유다지파잖아요. 이 유다지파를 주께서 친히 다루시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만 내 백성이고 나머지는 자기 백성 아닌 거예요.

그런데 언약을 이룰 때 유다지파를 다루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한 거예요. 한번 적어 볼게요. 유다지파를 누가 다룬다? 언약이 다루니까 유다지파만이 뭐가 된다? ‘구원 된다.‘라고 한 겁니다. 이 출발점이 뭡니까? 유다지파가 그렇게 생각하죠. 나에서 출발해서 언약을 중간에 집어넣어서 구원은 누구 몫으로 되고? 내가 구원되고, 이건 바로 인간의 육적인 사고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모르는 바벨론을 다루는 그것도 언약에 포함이 돼 있다는 사실을 유다지파가 상상을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 저 있죠. 저 백성 맞죠? 아브라함 혈통, 할례를 행하고 알죠? 말 안 해도 알 거야. 우리만 구원하세.‘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유다지파 말고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공격하게 하는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언약 성취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바벨론의 의미가 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하이라이트까지 왔습니다. 바벨론 = 타락한 유다지파 유다지파는 자신의 죄를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벨론과 함께 함으로서 그 바벨론이 우상숭배 하잖아요. 그 우상숭배 하는 바벨론. 니가 그토록 욕했던 바벨론. 저주받으라고 아예 악을 고리고래 고함쳤던 그 저주 받을 나라가 사실은 누구모습이다? 유다모습이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 새로 시작하자. 긍휼로 구원 새로 시작하자. 니가 강퍅함으로 모두를 강퍅함으로 가두어두심은 오직 긍휼로만 구원을 얻게 하심이라. 로마서 11장 31~32절에도 나오고 9장 15~16절에도 나오죠.

모든 것을 가두어 두심은 긍휼로만 구원하게 하심이라. 사실은 이게 매일같이 우리한테 적용돼야 돼요. 조금 복음 알면 복음으로 까불대고 복음 모르면 저주 받아야 돼, 가만히 보면 그렇게 까부는 그것도 갑자기 언제 유다가 돼 있어요. 이렇게 나는 믿음 좋으니까 우리 애는 대기업에 가고 저는 떨어져야 돼, 다음 날 보면 반대로 돼 있고, 뭔가 내 쪽은 다 잘 돼야 되고 내 쪽에서 인정하지 않는 저쪽은 다 저주받아야 되고 이게 바로 관점을 역사적 관점인지 묵시적 관점인지, 어떤 관점인지 이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그런 죄악 된 관점입니다.

언약이란 결국 우리의 죄가 어느 정도 깊은가를 다 드러내기 위한 그것이 언약이란 사실을 언약 받는 당사자는 그걸 몰랐어요. 뭐 대충 죄인이라고 우기면 그냥 넘어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죄의 밑바닥까지 파헤칠 줄이야 상상도 못했죠. ‘나는 간음도 안 했습니다. 나는 살인도 안 했습니다. 나는 도둑질도 안 했습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십일조 하고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이러면 대충 넘어갈 줄 알았지. 세리와 창기가 나보다 먼저 천국 갈 때 기가 막힌 겁니다. 인간의 밑바닥을, 인간의 근원에 손 터치하는 게 언약의 전략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은 자아는 숨기고 주체는 드러내요.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주체는 드러내고 진짜 자아는 숨기려고 하는 겁니다. 주체와 자아의 차이점은 이 주체는 사회적 개념 이예요. 이게 뭐냐, 사회에서만 어떤 존재냐, 이건 주체예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 ‘나는 뭘 원하지?’ 이건 자아가 되는 겁니다. 자아는 은근히 숨기고 주체하고 거래에 나서죠. 협상에 나서고 타협에 나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이에 대해서 아이가 언제 어른 되고 인간되느냐, 이게 궁금하죠?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른 이예요. 지밖에 몰라요. 아이가 어리석다. 무지하다. 그건 주체가 사회적인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자아는 마귀새끼입니다. 아직까지 어설퍼서 그렇지, 거짓말하는 것도 어설프고 모든 게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요령만 보완되면 얼마든지 마귀죠.

어떤 청년이 어떤 길 가던 여자를 성폭행하고 했다 하니까 지 엄마 하는 말이 ‘우리 애가 그럴 애가 아닙니다.’ 당신 애는 주체는 드러내고 자아는 당신 앞에서 숨긴 애예요. 어린애도 그래요. 부모 앞에서 주체하고 지 혼자 있을 때 자아가 달라요. 이것이 그대로 여기에 적용됩니다. 왜, 유다나라가 그러니까.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하는 행세는 평소에 멸망하기 전에 유다나라가 하는 행세와 똑같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나한테 뭘 해주렵니까?’

언약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줄 오해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언약인데 자기를 위해서 있는 언약인 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한테 뭘 해주렵니까? 저 바벨론, 적들 다 물리쳐 주옵소서. 우리나라가 저 바벨론보다 더 잘 살게 해주옵소서.’ ‘니가 한번 해봐.’ 하고 그렇게 그들을 무시하고 못살게 했던 바벨론 앗수르를 키워서 그것도 작은 나라를 일부러 키워서 혹독하게 이 유다의 주체를 깨버립니다. 주체가 깨지니까 비로소 뭐가 보입니까? 자아가 노출되는 겁니다.

달팽이에서 그 껍질이 떨어지고 하얀 알맹이만 쏙 튀어나올 때 그 모습 상상해 보세요. 징그럽죠. 껍데기 없는 달팽이가 달팽이겠습니까? 그게 순두부지, 이렇게, 이렇게 기어 나오는 걸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껍질이 없으면 우리는 아니에요. 우리가 속살 다 나오면 우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자살할 때 왜 하느냐, 껍데기가 벗겨지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잘난 체 했는데 벗겨지니까. 신용불량자가 순두부처럼 알맹이란 사실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하는.

바벨론을 통해서 왜 유다나라는 바벨론을 이길 수 없는가, 바벨론하고 똑같기 때문에. 왜 바벨론을 못 이기는가, 유다나 바벨론이나 똑같은 놈들이라. 그러니까 누가 뭘 하는지도, 누구 편을 들어줘요? 똑같은 놈들인데. 안 되죠. 그래서 다니엘 3친구는 바벨론에 포로 잡힌 것을 당연한 걸로 여겨야 되는데 놀라운 사실은 포동포동 살이 찐다는 사실 이예요. 이건 더 무서운 이야기라. 왜, 자기 역사적 지평에서 보면 바벨론이나 자기나 똑같은, 당해도 싸죠. 바벨론 섬기는 우상 섬기고 했으니까. 그런데 예상 밖에 포동포동 살이 찌니까 살찐다고 좋아할 수 없는 거예요. 왜, 이건 무서운 거예요.

사람은 자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좋은 일이라도 무서워요. 만날 수학 50점, 0점 받던 애가 갑자기 ‘엄마, 수학 100점 맞았어.’ 하면 무서워요. ‘니 하던 대로 해라. 니 이러면 당황스럽다. 니 분명히 컨닝했어. 요번에 새로이 공부 잘하는 애 전화 받더니 그럴 줄 알았어. 제발 하던 대로 해. 갑자기 이러면 엄마 놀라거든. 니 하던 대로 50점 받아 와.’ 그처럼 사업이 갑자기 잘된다든지 우연히 좋은 사람 만날 때 주의해야 됩니다. ‘아니옵니다. 이건 아닙니다.’ 갑자기 주식 값이 오르고 갑자기 누가 돈 대준다 하고, ‘이건 아닙니다. 이건 저한테 안 맞는 겁니다. 나는 굶어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갑자기 거지 나사로가 하루아침에 깨끗해져서 신사양복 입고 놀이 집에 어성거리면 이건 안 되는 겁니다. 이건 전혀 안 맞는 겁니다. 욥에 있어서 모든 게 날라 갔을 때, 다시 회복 될 때 욥은 제대로 믿음이 뭐냐, 절대로 나를 안 믿는다는 게 믿음이라는 사실은 욥기는 보여주죠. 딸이 예쁘고 죽은 딸 대신 예쁘고 부자 되더라도 이건 내 행함으로 된 결실이 아님을 본인이 느끼는 겁니다. 사실은 무서워요. 그래서 우리를 죽이는 하나님보다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 더 무섭다 했죠? 무서워요. 이게 안 살아야 되는데. 지옥 가도 우리 괜찮은데 만날 죄인이고 나만 좋아하는데 우리를 천국 보내면 이건 무서운 거예요.

‘주여 내가 천국 가는데 뭘 해야 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그래도 뭐 해야 되는데. 이거 아니되옵니다. 이럴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천국 갑니까?’ 이래야 된다니까. 이게 정상 이예요. 십일조 했으니까 천당 보내주세요. 이건 말이 안 돼요.

그러니 다니엘 해석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다니엘부터가 느부갓네살이 겁나는 정도가 아니고 다니엘도 겁나고 다 같이 겁나는 문제예요. 그러면 겁 안 나시는 분이 누구밖에 없는가, 人子밖에 없어요. 문제는 人子라는 그것도 人子 예수님이 안 계시고 人子는 어디 겹쳐 있다? 2층으로, 이중성, 어디 겹쳐 있어요? 다니엘에게 겹쳐져 있으니까 다니엘과 다니엘 3친구가 죽을 지경 이예요. 자기는 人子가 아닌데 人子가 돼 버렸어요. 왜 장차 오실 人子를 위해서 다니엘이 미리 당겨서 그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결국은 포로 잡혀 있는 자가 그냥 포로 잡혀 있으면 편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포로 잡혀 있는 자를 오히려 포로로 만드는 작업에 나서니까 누가 당황스러운 겁니까? 다니엘이 당황스럽고 3친구가 당황스러운 거예요. ‘이거 누가 주인이야? 도대체 이 나라에. 누가 왕이야? 나는 왕이 아니야.’

사람이 어디 직장에 가든지 하면 적응 잘 합니다. 빌 때 빌고 고개 숙인다고요. 그런데 비비고 이러면 편한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오히려 반대로 나가라 하면 오히려 본인들이 굉장히 당황스러운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 채소 먹고 포동포동 살이 쪘잖아요. 누가 당황스럽습니까? 아까 감독관이 있죠?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좋게 지내도 포로 잡힌 채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한테 밉상 받아 보세요. 그러면 유대인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을 저질러서 이건 오히려 다니엘이 거북한 거예요. 차라리 채소 먹고 살 안 쪘으면 누가 높아집니까? 감독관이 높아지니까 그래도 계속 포로 된 입장에서 사이가 정상적인 관계가 되는데 이건 뜻대로 안 될 때는 자칫하면 오히려 미움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직장생활 오래 못합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 난처하게 만들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물을 쳤잖아요. 고기 잡으면 되는 거예요. 왜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다 잡았어요. 그런데 고기가 하나도 안 잡혔어요. 안 잡혔으면 그냥 가시면 돼요. 괜히 주님께서 오셔서 ‘오른편에 한번 던져 보지.’ 그 말을 안 들었으면 괜찮았어요. 괜히 들었어. 왜, 오른편 왼편 앞 뒤 다 했는데 고기가 없었다고요. 그런데 던져 보니까 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혔죠.

베드로의 솔직한 자아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그 다음에 ‘나를 떠나소서.’ 야~ 이게 진짜예요. ‘나를 떠나소서. 주여, 주님은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그래, 니는 떠나고 싶지? 나를 떠나고 싶은 너를 내가 구원해 줄게.‘ 그 정도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공로도 없이 그냥 구원받는 겁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날 때 그때 그 계약 파기 안 됐다. 니가 어떤 호작질을 하고 어떻게 날 부인할지라도 니 계약 내가 밀어붙이지, 니가 성취한다고 니가 성취하는 거 아니다.

다니엘과 3친구에 있어서 이제는 뭐냐 하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무슨 전쟁? 유다나라가 싸워야 될 바벨론이 아니고 이제는 다니엘이 대표해서 다른 말로 하면 人子가 대표해서 누구를 공격하는? 드디어 언약대로 바벨론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겁니다. 바벨론이 그 바벨론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은 바로 숨어져 있었던 배후인물, 짐승이었습니다. 유다나라는 바벨론하고 싸우고 앗수르하고 싸웠지 짐승하고 싸울 필요는 없었거든요. 이게 인간들의 역사적인 지평선의 한계라니까요. 저 끝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어린애들은 저 골목으로 나가면 큰일 나는 거예요. 골목이 자기 세계 전부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골목까지 나가기 싫은 인간을 강제로 거기서 끌고 나가서 감당도 안 되는 묵시세계에 집어넣어서 人子를 통해서 다니엘을 통해서 짐승을 호출시키는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다니엘은 바들바들 떨죠. 오늘날 우리 같아. 예수를 안 믿고 싶은데 믿게 되어서, 어디 취직할 때 예수 믿는다 하면 떨어질까 싶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선보러 가서 ‘교회 갑니까?’ 하면 ‘교회 안 가는데요.’ 이처럼 우리는 모든 매사에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어디 자리 하나 있는데 ‘당신 교회 다니지?’ 그 소리 나올까봐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모든 것에서 주님 때문에 욕 보일까봐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우리로 하여금 욕 뵈게 만듭니다. 우리가 가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요. 예수쟁이 와서 그럴 줄 알았다 이런 소릴 듣게 만들어요. 뭐 빛과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고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거 반대가 되게 우리로 만들어요. 너한테 대접하지 못하는 자를 니가 대접하라 했죠? 주일 날 설교 했잖아요. 상대방을 모독하는 것이 존경이라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쉽게 하려고 재판 예를 들었죠. 재판 자가 재판하는 판사가 피고한테 존대 말할 때는 그 사람을 인간취급 안 하는 거라고. 피고는 좋아서 하는데 속셈을 몰라서 그래요.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니 존중이나 먹고 떨어져라.’ 그런 뜻 이예요. ‘난 니를 사랑하지 않아.’ 그런 뜻 이예요. 주께서 우릴 사랑할 때는 우리를 존중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한없이 무시한다는 그것이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 이예요. 사랑은 화목제물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에 있기 때문에 이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한없이 떨어뜨리는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를 온 사방에 집어넣어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고 예수 이름으로 있는 대로 다 알려서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바벨론과의 전쟁에 있어서 누가 개입한다 했습니까? 이제는 人子라고 이름 붙여주는 다니엘을 등장시켜서 이건 옛날에 유다나라가 그렇게 이기고 싶었던 앗수르도 못 이기는 그것을 한 사람 누구? 人子 한 사람 때문에 전 세계를 바벨론 화 만들고 전 세상의 모든 민족과 국가를 상대로 예수님 혼자 승리하는 승리자, 그게 다니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주 안에다 성령을 집어넣어서 그리스도만이 승리한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감당도 안 되는 그 일을 하시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 와중에서 아무 능력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더욱 더 많이 밝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능력만이 전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