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다니엘서1강-다니엘의 시작120809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6. 1. 08:35

 

 

2012-08-11 03:00:22 조회 : 540         
다니엘의 시작 120809 이름 : 이근호 (IP:117.55.13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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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다니엘1장(다니엘의 시작)120809-1강a-이 근호 목사

제 1강a

다니엘 1장 1절에 보면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렇게 돼 있죠. 느부갓네살이 남의 나라에 오기는 왜 옵니까? 이게 이스라엘 유다 사람이 사는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약속의 땅이잖아요. 약속의 땅에 느부갓네살이 등장한다는 것은 잘못됐죠. 왜냐 하면 그거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약속의 땅’이라 할 때 이 약속은 누가 한 약속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저희끼리 단합대회하고 회의해서 ‘약속의 땅’이라고 결정된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약속의 땅이라고 결정을 누가 지었느냐 하면 사람이 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한 게 아니면 누가 했느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의 땅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럼 하나님 쪽에서 약속의 땅이라고 했으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내막에 대해서 그들이 제대로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하나님이 약속했으니까. 제가 한 목사님 보고 ‘한 목사님, 약속해 드렸습니다.’하면 ‘이거 무슨 소리야?’ 일방적인 약속이라.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언약,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약속한 거예요. 한 목사님 하고 ‘우리 약속 한번 만듭시다. 목사님 뜻은 이렇고 내 뜻을 이렇고.’ 이렇게 의논한 게 아니잖아요.

요게 다니엘의 사실은 제일 기본인데 제일 중요하다고 보면 돼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의중에 담고 있었던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땅하고 결합돼서 무슨 땅이 되겠습니까? 약속의 땅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사람들이 오해를 잘해요. 이스라엘 유다 사람들이 약속의 땅이라 하니까 누구 좋으라고 약속의 땅이라고 오해를 했느냐 하면, 자기들 살기 좋은 땅 되기 위해서 약속이 있는 걸로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것은 천국이어서 약속을 땅이라고 했는데 거기 살고 있는 유다 이스라엘 사람 그들은 자기가 좋으면 그것이 마치 천국인양 이렇게 오해들을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오해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철회하신다면 애초부터 약속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약속을 ‘아이쿠, 약속을 몰랐구나. 철회해야지.’ 이럴 것 같으면 약속을 애초부터 주지를 않았어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 니들이 뭘 알아. 하지만 내 약속은 내 약속대로 그냥 밀어붙일 거야.’ 다시 해 봅시다. 이 약속의 땅에서 유다 사람, 이스라엘은 사람들은 뭘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들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무슨 내용이라 했습니까? 천국이죠. 자기들 살기 좋으면 이걸 사람들이 뭐로 봅니까? 천국. 이걸 천국 같다, 천국 같다 이러거든요. 지가 살기 좋으면. 자기가 살기 좋으면 천국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주님의 약속의 땅, 이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이 땅은 뭐냐 하면 천국을 보여주는 땅으로서 약속의 땅 이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살기 좋은 땅을 약속의 땅으로 봤고, 하나님이 약속한 이것은 뭔가 보여주는 땅 이예요. 그 보여주는 땅이 뭐냐 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살기 좋은 땅이라 했죠?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죠.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가 살기 좋은 땅이잖아요. 그러면 이건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다 결국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게 아니라는 거죠.

이게 아니고 천국은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에 엄청나게 안 맞는 반대가 되는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안 맞아서 대립이 되는

새로운 어떤 사태나 사건이 일어나 줘야 이 약속과 천국이 이게 일치가 되는 겁니다.

그 사건이 뭐냐, 심판사건 이예요. 약속의 땅에 누가 밀려왔습니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밀려온 겁니다. 감히 약속의 땅에. 감히 내가 살기 좋은 땅에 갑자기 내가 살기 좋은 땅이 아니고 괴로운 땅, 이건 위기의 땅, 죽음을 유발하는 땅, 그러면서도 그 느부갓네살이 들어온 것은 그것은 배후에 누가 있었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사악한 땅이라고 소리,소리쳤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약속의 땅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인정사정도 안 봐주고 그냥 처벌하고 파괴하고 부숴버리고. ‘살기 좋은 땅이 천국이라고? 꿈 깨라. 그건 내가 언급한 그 약속의 의미가 아니야. 그건 니가 일방적으로 오해한 약속이야, 내가 준 약속은 그런 식이 아니야. 니는 심판 받아 마땅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약속의 의미를 모르고 약속의 땅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 시작하면서 전체를 다시 한 번 일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뭐냐 하면 70년 동안 그들은 포로 잡혀 가서 70년 끝나면 돌아와야 됩니다. 70년입니다. 69년도 아니고 72년도 아니고 딱 70년 이예요. 7X10, 7이라는 것을 앞장 세워서 이렇게 10을 해서 70년입니다. 70년 동안 포로 잡혀 왔다가 다시 그 땅에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도 어떤 계획 속에 포함이 됐습니까? 하나님이 진정으로 생각했던 그 약속 안에 내용이 포함돼 있어요. 그렇다면 이거 7이라는 거와 10이라는 거, 이 의미가 70년이니까 결국 약속을 숫자로 표기하면 뭐가 돼요? 70이란 숫자가 나온 겁니다. 자, 이 70을 어떻게 지상에다 약속의 땅에다 펼치시는가, 그게 다니엘 해석의 묘미입니다. 아주 흥미진진해요.

약속을 숫자로 표기해 놓고 표기된 숫자가 사태와 사건의 연속의 연결로서 이 땅에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요 7이라는 것은 바로 창조인데 그냥 창조가 아니고 완전한 창조를 7로서 표기됩니다. 천지 창조 때 처음에 며칠 만에 완전했습니까? 7일 동안 해놓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래서 7일 동안, 8일도 필요 없어요. 6일도 안 되고 7일 동안 작업을 했다는 것은 이제는 완전한 천국의 모습이 이 70년 포로기간 동안에 전부 다 되는 겁니다. 그럼 70년 동안 복역이 됐다는 것은 뭐냐 하면 죄지어서 포로 잡혀 있는 거예요. 이 말을 쉽게 하게 되면 이 오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냥 포로 잡혀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70년 동안 수감생활 하고 있는 거예요. 수감생활 한다는 말은 본인이 어떻게 천국 이루는데 보탬이 된다? 보탬이 안 된다? 전혀 보탬이 안 되죠. 한 쪽으로 치워 버렸으니까. ‘나가, 나가, 나가. 니는 70년 뒤에 올 거야.’ 치워 놓은 거예요.

보통 엄마가 집안 청소 할 때에 애가 컴퓨터 하고 있으면 ‘나가, 나가 있어, 내가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 와.’ 라고 내 보내고 청소 다하고 그 다음에 들일 때, ‘와, 깨끗하다.’ ‘좀 치우고 살아라.’ 하잖아요. 상상도 못했죠. 그렇게 깨끗할 줄 몰랐죠. 특히 딸애들 키우면,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이 잘 치운다고 생각하는데 딸애들은 온갖 것들이 이거 입다가 벗어 놓고 이거 입어보다 벗어놓고, 옷이 열댓 개나 나와 있고 머리 끈도 나와 있고 모자도 나와 있고, 그러다가 ‘급하다, 급해.’ 시간 보다가 뛰어나가는데, 그거 누가 치우겠어요? ‘아이고, 이놈의 지지배.’ 하면서 치우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치워 놓습니다. 치워놓고 뭔가 작업해 놓고 다시 거기 들어갈 때 ‘와~!’라는 소리가 나오게 하시는 조치, 그게 바로 다니엘에 나타난 그 조치입니다.

자, 그러면 이 다니엘에 그런 작업을 할 때 누구하고 하는가,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건 관여 안 합니다. 그럼 누구하고 하는가, 느부갓네살과 여호와하고 직접 거기에 작업의 주체로서 같이 개입을 하게 되죠. 느부갓네살은 이방 나라 왕, 그리고 거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다스려서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그 천국을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달성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느부갓네살 이방나라 여호와도 모르는 그 인간이 뭘 할 줄 아느냐, 해야 될 중요한 일이 있어요. 느부갓네살 왕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핍박을 해야 돼요. 누굴? 인자를. 인자 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신약에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해서 왔던 그 다니엘을 인자라고 합니다. 그 다니엘을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언약에 의해서 핍박을 해야 될 중차대한 역할이 느부갓네살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역할을 하면서 느부갓네살은 점차 짐승이 돼 갑니다.

사람이 짐승으로 변해 버리면 결국은 짐승이 어디까지 연결되느냐 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할 때 뱀의 후손이라 해서 기어 다니는 뱀이 아니고 뱀의 후손은 뱀 같은 속성, 저주받은 속성을 지닌 어떤 인물이 등장한다면 거기 여자라 해서 그 여자가 어떤 여자가 아니고 그 여자의 후손이라 하는 것은 뱀과 대비가 되면서 승리자의 모습을 띄는 그 모습을 여자라 해요. 뱀이 영적인 해석이 되면서 덩달아서 여자 자체도 영적인 해석을 요구받게 되는 그러한 짝을 이루는 게 되거든요.

다니엘에 있어서 느부갓네살은 분명히 인간입니다. 인간인데 뭐로 변합니까? 변신되어서 짐승으로 변신되죠.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의 인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짐승의 인내, 짐승이 있다면 짐승은 핍박하는 기능을 해야 되고, 그러면 짐승에게 핍박받는 기능은 ‘어, 사람이 핍박받네.’ 가 아니고 ‘인자가 핍박받네.’이렇게 되고, 인자가 핍박받는다는 것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서 남아 있는 하나의 대목,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를 비로소 만개하고 내보이는 역할을 주변의 짐승과 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핍박받는 모습으로 그 여자의 후손이 정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여자가 애 낳았다고 다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게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먼저 뱀의 후손이 먼저 등장하고 그 뱀의 후손에 의해서 뭘 문다 했습니까? 발꿈치를 상하게, 압박과 고난을 입는 그분만이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여자의 유일한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에 있어서 이제부터 어려운데 다니엘에서 제일 문제가 어떻게 역사적인 사건이 묵시적인 이해와 해석을 유발시키도록 여기서 제공해 주느냐, 그 논리적 과정을 어떻게 정리되는가, 그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겠죠. 그걸 먼저 보겠습니다.

1절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지 삼년에” 이게 BC 605년 이예요. 이것이 2차, 3차, 4차에 걸쳐서 약속의 땅에서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죠. 약속의 땅에서는 여호와에게 속했다가 유대인들이 포로 잡혀 가면서 이들은 누구한테 속하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에게 속하죠. 느부갓네살은 아까 언급하면서 짐승이죠. 그러면 짐승 속에 누가 있다? 언약의 백성, 약속의 백성이 있으니까 이것은 뭣을 뜻하느냐 하면 짐승이 있다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약속의 자녀가 들어있는 거예요. 못 빠져나오죠. 짐승 속에 있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자기들은 어디 안에 있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본 겁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마을에 질문 했어요.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이냐, 왜 자꾸 예수 안을 거론하느냐, 짐승 안에 있으면 그게 예수 안에 있는 건데.

세상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못 빠져 나와요. 우리가 짐승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층이 너무 두꺼워요. 밀어내도 너무 압력이, 내려누르는 무게가 너무 심해서 이겨낼 수 없습니다. 못 이겨서 찌부러지죠.

주께서 일부러 집어넣어서 뭐를 받게 되느냐 하면 그냥 고요하게 살면 포로 될 이유가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가만히 살면 그들은 구원될 이유가 없어요. 갑자가 요셉을 모르는 바로 왕이 핍박을 하죠?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이유 때문에 요셉이라는 이유 때문에 난데없이 핍박을 가하니까 그들이 부르짖게 되죠. 부르짖으니까 여기에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다니엘 3친구 같은 경우에 가만히 있는데 괜히 느부갓네살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안 섬기면 풀무 불에 던진다. 왜 그 짓을 했어요? 가만 놔두면 좋게 지내는데, 다니엘 3친구나 다니엘 같은 경우에 업무나 이런 거에 대해서 정직한 사람이잖아요. 정직한 사람 같으면 나라 공무원으로서 정직하면 됐지, 뭘 또 바래? 그런데 그렇지 않고, ‘여호와를 믿으면 죽인다.‘는 뜻이 아니고 참 이런 게 다니엘에서 어려워요. 어려우니까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너 여호와 믿지, 죽어라.‘ 이게 아니고, 여호와 섬기는 것과 반대 되는 것을 사항을 만들어요.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 불에 넣는다.‘ 이렇게 돼요.

그러면 다니엘과 다니엘 3친구 입장에서는 ‘너 여호와 믿지? 죽인다.’ 이게 아니고 자기 인생 전부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처럼 산다는 것은 뭣을 유발시키느냐 하면, 자 그림이 이렇게 있다면 이게 우리 인생 전부라면 여기 하나 예수 믿는 시간 정하고, 나머지는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일반 농사짓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농사짓고 일요일 날 교회 나오고, 아무 문제없잖아요.

그런데 나라가 바뀌어서 농사 진 것에 대해서 짐승동상 앞에 바치지 아니하면 죽는다.‘라고 했을 때, 자기는 예수 믿는 일부분, 요거만 허락하면 신앙 얼추 견딜 만하다 생각했는데 하나도 가만두지 않고 종교적이 아닌 이 부분에서 이쪽에서 전체에 대한 공격을 나올 때, 여기 작게 나 혼자 예수 믿는 게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오락, 취미생활이라고 한 겁니다.

다니엘에 있어서 사적인 신앙은 의미가 없어요. 마귀가 ‘그래, 당신은 신앙생활하고 나머지는 우리끼리 하면 돼.’ 이렇게 허용하는 마귀가 아닙니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이미 뱀은 시비 걸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 호시탐탐 때만 노리고 있는 거예요.

땅콩 알레르기 있는 사람보고 학교 급식에서 땅콩 잼 발라서 나오듯이 하필 그게 나와서 얼굴이 벌겋게 오르듯이 인간 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좋게 지내면 돼요. 갑자기 이 인간이 인간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느부갓네살이 짐승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면 이 짐승과 대비가 되고 짐승이 노리는 어떤 특수한 집단이 이 바벨론 안에 들어 있어서 이걸 갈구게 되는 사태를 하나님께서 유도하신 거예요.



이 짐승과 그리고 여자의 후손, 여자의 남은 자, 요한계시록에서 여자의 남은 자,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이 2개 빼놓고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현실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짐승이냐, 여자의 남은 자냐. 그 두 항목에 어느 쪽에 속하느냐, 현실 전부예요. 제 3의 영역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거든요. 그럼 요한계시록을 모른다고 칩시다. 모른다 치면 이 세상에는 한국사람 있고 영국사람 있고 필리핀 사람 있고 미국 사람 있고 다 달라요. 터키 사람 있고 다 달라요. 직업도 달라요. 어떤 사람은 사격하고 어떤 사람은 태권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수영하고 어떤 사람은 레슬링해서 눈이 시커멓게 멍들어 있고 다 달라요. 서로가 메달 딴 것은 서로 존중해 주고 다 해요. 사격으로 금메달 딴 사람이 ‘레슬링도 운동인가.’하면 안 돼요. ‘체조 뭐 4초 만에 뛰어놓고 그것도 금메달이야? 난 축구하는데 얼마나 힘든데.’ 이러면 안 돼요.

이 세상은 짐승, 여자의 남은 자, 빼놓으면 우리는 누굴 높다, 낮다 할 수 없어요. 전부 다 균등하고 서로 평등하고 서로 존중해야 될 그런 이상적인 사회, 안철수가 꿈꾸는 그런 사회, 그런 민주주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천국 만드는 작업이 남아 있는 이상은 그것은 우리 뜻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차질 없어요.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계속해서 천국 만들기에 주께서 지금도 쉬지 않아요. 우리는 말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대충 하세요.’ 이럴 수가 없어요. ‘니는 니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밀어붙이다 보니까 아다리 걸려든 것이 뭐냐 다니엘 3친구가 된 겁니다. 충실하게 사무 보는데 경찰이 와서 잡아가서
‘절해라.’ ‘절 못합니다.’ 비로소 최초로 자기 종교성을 드러내서 ‘나는 못합니다.’ ‘도대체 넌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느냐?’ ‘우리 하나님은 죽은 데서도 살려내실 분이고 안 그런다 할지라도 저는 하나님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일이 터지니까 우상이 등장하니까 진짜 믿는 자의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가져가요. 풀무 불 속에서 만나죠. 거기에 짐승이 진작 노리고 있는 인물이 등장해요. 그게 뭐냐, 3사람 들어갔는데 4번째 사람이 등장하죠. 그게 짐승(마귀)은 알아요. 다른 사람은 이 현실을 모르니까 그냥 체조하고 레슬링하고 축구하는 줄 알지, 우리 속에 그리스도 있다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아요.

질문하시는 분이 예수 안을 질문하는 이유가 자기 눈에 띄는 예수 보고 싶다는 거예요. 눈에 띄는 예수 보면 우리는 그거 안 믿게 돼 있어요. 안 믿습니다. 왜, 흠모할만한 게 없기 때문에, 이용가치가 없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에 ‘괜히 봤어, 괜히 봤어. 안 보고 상상해서 믿는 게 낫지. 괜히 봤다.’고 나오게 되면 아무도 못 믿어요. 예를 들어서 ‘윤 집사님 일어서 보세요. 메시아입니다.’하면 누가 믿습니까? ‘아니야, 아냐, 결코 저 분은 아니야.’ 이런 식으로 그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영적인 막이 있는 걸 ‘고막’이라 해요. 고막 아시죠? 귀에 있는 고막. 고막을 통해서 이쪽 외부에 있는 현실을 해석하는 거예요. 외부에서는 고막이 없으면 그냥 파들만 있을 뿐인데 고막을 통해서 두뇌에 있는 안쪽에 들어와 버리면 현실에 있는 모든 물결들, 음파들이 제자리의 의미가 요 안에서 정립이 차곡차곡 정립이 돼 있어요. 우리는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회사에 가고 활동하고 주부는 설거지하고 하는 일상 아닙니까? 그런데 고막, 영적인 고막을 통과해서 보면 어느 것이 짐승의 일이며 어느 것이 성령의 일인지가 나타나요. 그 고막 역할을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다니엘과 3친구입니다. 고막이 아~주 얇아요. 치면 뚫어지고 째지고 다치죠. 이 얇은 고막 역할이 이쪽 현실과 이쪽 현실을 전부 다 갖고 있으면서 이쪽 현실을 이쪽 현실, 영적 해석에서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러한 현실, 이 얇은 막, 이것이 바로 주께서 십자가 질 때 약함으로서 졌다는 거, 고린도후서 13장 이야기에 나와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주께서 십자가 질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약하심으로 죽었잖아요. 천사가 내려와서 지금 다 처단할 수 있는 문젠데 의도적으로 가장 약한 분으로 불면 훅 날아갈 정도로, 이사야 53장에서는 그걸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렇게 돼 있죠. 저항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얇은 고막이라고 보면 돼요. 고막 통과하면 예수 안이고, 천국이고, 고 바깥으로 나오면 흔히 말하는 우리 현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고, 계속 그 진동, 이 세상에서 울려 퍼지는 모든 진동의 해석은 안쪽에서, 본부에서 약속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서 분류작업을 다 해버리죠. 저건 악령의 일, 저건 성령의 일, 다 해석합니다.

수사 극에 보면 저는 경찰서에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이런 게 있잖아요. 범인을 잡아서 취조하면 유리가 있는데 이쪽(취조하는)에서는 유리가 안 보이고 이쪽(경찰간부 있는)에서 보면 훤히 다 보이잖아요. 담당 형사가 취조하고 있으면 간부급들이 이렇게 취조하는 걸 보잖아요. 우리는 바로 취조실에 갇혀있는 셈 이예요. 그리고 그 모든 해석은 우리를 둘러싼 다른 영적 세계에서 지금 천사들과 성령께서 또 예수님께서 다 지켜보는 그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서 사태를 일으키고 거기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방법인데 그렇게 조성된 게 뭐냐 하면 바로 짐승에게 갇혀 있는 남은 자들, 남은 자는 오늘 최초로 이야기했는데, 무슨 남은 자냐 하면 ‘주님의 개입으로 우리는 구원됩니다.‘를 증거 해야 될 남은 자. ’절대로 우리 힘으로서는 이 마귀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자.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쉽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힘으로는 이 악마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전제로 깔고 해야 돼요. 사람들이 그걸 이야기 안 해요. ’제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마는 그것으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그 말을 하란 말이죠. ’제가 교회를 수십 군데 세우고 개척교회 했지만 그건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됩니다.‘ 왜, 그 말을 못해? 왜, 말을 못해?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이 없이는 못하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를 알고 언약도 압니다, 하지만 그 아는 것으로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왜, 말을 못해? 말을 안 해요. 그걸!

짐승이 우리가 몇 마디 한다고 그것 때문에 ‘아이쿠, 무서워’ 이런 짐승, 이런 마귀 없어요. ‘웃기네.’ 합니다. ‘내가 니 다 아는데. 내가 니 위선 떠는 거 다 알고 있어.’

2차 포로 잡힐 때 여호야김 잡혀갈 때 다니엘과 3친구도 잡혀갔습니다. 여호야긴은 대우받는데 아버지 여호야김은 죽습니다. 이건 좀 난해한데 해보겠습니다.

약속의 땅은 그대로 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된 백성이 포로 잡혀 갑니다. 그런데 그 작업에 누가 동원돼야 돼요. 느부갓네살이 등장해야 돼요. 아까 했던 거니까 여러분 복습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느부갓네살이 간 곳이 바벨론이죠. 그런데 그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약속의 씨가 들어있죠.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 + 땅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땅은 그대로 있는데 씨가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게 되면 약속을 이루는 것은 씨에서 무럭무럭 나온다면 바벨론 살고 있는 이 땅이 무슨 역할을 해야 되느냐 하면 약속의 씨를 품었다는 이유 때문에, 약속의 땅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단 차이점은 부정적으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부정적으로 해야 된다는 말은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 유다 때문에 망해야 되는 그런 역할을 해야 되죠. 약속의 땅에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품은, 유대인 때문에 짐승으로 변해야 됩니다. 바벨론이 짐승 되잖아요? 바벨론에서 나온 나라도 뭐가 되겠어요? 짐승 1, 짐승 2, 짐승 3, 짐승 4가 되겠죠. 계속 짐승, 짐승이 나오는 거예요. 언제까지 계속 짐승이 나오느냐, 여기에서 인자 1, 인자 2 인자 3..해서 마지막 인자가 등장할 때까지 이쪽은 마지막 짐승을 지배하고 있던 오야봉, 우두머리가 등장해야 되겠죠. 그게 누굽니까? 옛 뱀이라고 하고 마귀라고 하고 사단이라고 하는 그게 나오죠. 그 최후의 인물. 이쪽에서는 결국 누가 나옵니까? 자기 백성들 속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반면에 이쪽의 오야봉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저쪽의 오야봉은 옛 뱀, 악마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야봉 남고 나머지 다 철거해버리면 결국 남는 건 뭡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만 달랑 남는 거예요. 현실이란 딴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필요한 악마도 동원돼야 되고 사탄도 타락해야 되고, 그리스도가 주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역사와 이 땅은 그동안 주께서 창조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번에 수련회 할 때 참석 안 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하겠습니다. 원래 구약에는 유일신, 주가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이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오른편이죠. 그런데 오른편에서 지지지~직 해서 뭔가 포지션이 하나 나와요. 다이빙 할 때 뛰어내리는 대처럼. 이게 원래 없었는데 유일신, 신이 하나인데 여기서 지지지~직 나오면 이게 ‘주’가 돼요. 요 ‘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무슨 역할이냐 하면 원수를 발등상 되기까지, ‘까지‘란 말은 계속 지속한다. 끝까지 유지될 때까지, 원수를 지배할 때까지 내 우편에 있어라. 이게 바로 ’주께서 내 주에게‘ 다윗이 이 안에서 이걸 두개를 다 보고 있는 거예요. 이쪽 주와 이쪽 주.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유일신인데 유일신은 또 하나의 주가 튀어나오는 해괴망측한, 세상에 이런 신은 없어요. 그 안에 부록이 있을 줄 아무도 몰랐죠. 그 안에 또 주가 있을 줄 아무도 몰랐죠. 주께서 주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다윗언약에서 다윗 역할을 하는 것은 손 터는 역할,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 없고 내 원수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다윗 자신이 주의 원수 역할을 해야 돼요. 왜, 이쪽 튀어나온 주님에 의해서 승리한 자, 장군이 있어요. 우리야 장군 이예요. 우리야 장군을 누가 죽였습니까? 다윗이 죽인 거예요. 우리야 장군은 죽어버리고 그 죽음을 근거로 다윗은 용서받고 결국 주께서 주께로, 두 분의 주께서 일어나는 모든 내용이 하나의 그림자 역할을 하라고 이 땅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데 그러한 엑기스, 주 내용이 역사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로 깔려버리면, 어떤 우리야라는 역할의 탤런트와 우리야를 죽여야 될 다윗의 역할을 하는 탤런트가 챙챙챙챙 싸우는 게 아니고 이쪽은 아람 군대 등장해서 싸우고 이쪽은 벗은 여자 하나 나와서 목욕하는 장면이 있어야 되고, 이런 모든 맡은 배역들이 결국은 원수를 이기는 분은 오직 주님께 나온 그 주님만이 주님으로서 원수를 이긴다. 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지상에서는 요렇게 칼싸움도 해야 되고 이렇게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야 되고 그런 겁니다.

다니엘이 성실하게 했기 때문에 그 바벨론에서 버틴 게 아니에요. 다니엘이 똑똑했기 때문에 계시 받은 게 아닙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꿔서 ‘내 꿈 니가 찾아내라.’ 할 때 다니엘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니엘도 ‘기도해 보고 알아보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지가 백과사전처럼 컴퓨터 하드웨어처럼 다 외우는 게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시를 줄 때는 우리가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포지션만 언급해요. 난 이런 자리에, 넌 저런 자리에, 둘 사이에 차이나는 포지션만 이렇게 지정해 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포지션이 다니엘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존재하고 저쪽은 짐승 안에 존재하니까 다니엘이 예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이 속해 있던 약속 때문에 다니엘을 다루고, 저쪽은 성질 더러워서가 아니라 짐승 안에 속했기 때문에 짐승다운 것이 느부갓네살을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을 이렇게 읽어보면 너무나 인간적으로 봐서는 느부갓네살이 별로 잘못한 게 보이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그래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 잘못을 자인하는 사람도 왕치고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고정도 겸손했으면 구원받을 만도한데 그렇지 않거든요.

가룟 유다 보세요. 자기 스승을 팔아먹었다고 자살할 것 같으면 여기 한강다리 줄 서야 됩니다. 다 스승 팔아먹으니까. 스승 팔아먹었다고 자살하고, 그 인간성 멋지죠. 사나이 중에 사나이 아닙니까? 사나이 중에 사나이기 돼서 지옥 가서 보디빌더 할 일 있습니까? 지옥 가서 사나이라 보디빌더 해봐야 지옥이지요, 뭐. 거지 나사로가 무슨 사나이입니까? 긁는다고 사나이 중에 사나입니까?

그러니 이건 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디에 소속돼 있는가, 그 사람이 있는 포지션, 그 지점이 어떤 특수한 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위치 때문에 그 위치가 그 사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겁니다. 이쪽은 이쪽에 속한 짐승의 위치고 이쪽은 남은 자 위치기 때문에 약속은 아직 안 죽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를 옮겨갈 때는 이 전체 다가 약속을 실패한 게 아니고 오히려 성공을 이루기 위한 내용이 더 확대된 거예요.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를 단일 신으로 봤어요. ‘우리는 주를 섬긴다.’ 이렇게 봤습니다. 옆에 튀어나올 줄을 몰랐죠. 성경에 이러이러한 게 있지만 이런 뜻인지 몰랐습니다. 튀어나온 주를 섬겨야 될 텐데 자기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니까 하나님은 우릴 버릴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했다 이 말입니다. 약속은 주님께 바로 오는 게 아니에요. 약속은 튀어나온 오른편에 계신 주를 경유해서 이렇게 돼 있는데 경유한 것을 인간의 능력으로 알아차릴 수가 없어요.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한다. 그걸 불교신자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이 뭐가 모자라서 바로 구원하지, 지가 능력 없어서 비서 하나 들일 일이 뭐가 있느냐 말이죠. 불교신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 이예요.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의 비서 역할로 주님이 등장한다. 이건 아니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마귀가 점지해 준 하나님이라서 진짜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비교해 보라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은 흠모할 게 없고 우리 하나님은 참 멋있어 보이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은 흠모할 만한데요.’ 그건 가짜 예수죠. 그건 지 구미에 맞는 예수고 진짜 우리 생활에 관여해서 내 뜻대로 안 되는 주님 만나면 학을 뗍니다. 진저리나요. ‘괜히 예수 믿었어. 괜히 예수 믿었어. 이러면 안 믿을 걸. 괜히 믿었어. 괜히 믿었어.’ 주께서 ‘믿지 마라.’

이번 수련회 때 부부 문제로 밤늦게 2부 순서가 있었다고 수요일 날 이야기했죠. 2부 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복음하고 부부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관계없거든요. 복음 거기다 전할 필요 없어요. 서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 없으면 나도 없어요. 저런 아내가 없었으면, 김 권사님 없었으면 집사님도 없습니다. 상대방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한 번 정립하기 때문에. 저 여자가 다르다고 해 버리면 나는 다른 사람이 돼 버려요.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의 내가 있기에는 주변에 많은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고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따라서 부부하고 복음하고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복음은 주께서 경유해서 해서 우리가 만들어 낸 모든 개념들은 주님 보시기에 이건 어설프기 짝이 없고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기 그런 딱 맞는 그러한 인생으로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마구한테 속아 넘어가기 위해서. 아무리 예수도 좋지만 마귀가 뭐라 하면 ‘예’ 하고 고개 숙입니다. 예수님이야 뭐 ‘사탄아 물러가라. 난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만 할 수 있는 능력이고 예수 믿는다 하는데 예수 믿는데 다른데서 유혹이 들어오면 ‘아이쿠, 예, 잠시 안 믿죠.’이렇게 우리는 나온다 말이죠.

고 3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예수님은 없습니다. 고 3이 얼마나 센데, 고 3인데 교회 오는 애들은 어떤 아이들이냐 하면 이미 수능을 포기한 애들, 해도 안 되는데 교회 와서 기도나 해야지 하고. 고 3은 아무도 못 이깁니다. 그런데 고 3 이기는 게 있어요. 월드컵! 아시안 게임! 이건 고 3을 이겨요. 여학생들 지금 신났습니다. 여학생들은 스포츠 안 좋아하잖아요. 남학생들은 지금 공부가 머리에 안 들어와요. 11일 날 새벽 3시에 한일전 하는데 공부가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면 성적 팍팍 내려가고 여학생들은 팍팍 올라가고.

사람은 내가 나를 주관하고 있는 게 아니고 환경이 나를 주관하고 있는 걸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려요. 지금 내가 이렇게 점잖게 하는 것은 환경이 나를 점잖게 지금 안 건드려서 그런 거예요. 환경이 건드린다든지 술 한 잔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다룰지 모릅니다.

여러분, 술 안 먹고도 술주정 해본 적 있습니까? 환경이 바뀌어 버리면 술 안 먹고도 술주정 됩니다. 술주정이 되고 횡설수설하고 큰 소리 내고 합니다.

다니엘은 그걸 이야기합니다. 현실이라 하는 것은 니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니 인생은 니가 정해주는 게 아니고 내가 인생을 정하는 것이지, 니가 정하지도 못하는 인생에서 왜 쓸데없이 고민을 니가 하느냐 말이죠. 고민은 내가 해야지, 니가 왜 고민을 하느냐?

제가 어떤 분이 질문해서 답변을 했죠. ‘신학 공부를 왜 합니까?’ 신학공부는 오락이라 했잖아요. 오락이 아닌 것은 태어난 것과 죽는 것, 몸에서 나온 출산이듯이, 몸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은 오락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태어날 때 쌍꺼풀이 안 됐다. 그건 오락이 아닌 겁니다. 쌍꺼풀이 없다. 그건 오락이 아니에요. 그런데 뭐가 오락이냐, 쌍꺼풀 할 때 그게 오락이 되는 거예요. 그게 자기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에.

‘아유, 쌍꺼풀만 하면 미인 되겠는데.’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줘 버리면 이것은 주님의 역할에서 벗어난 게 돼요. 지금 주님은 원수하고 싸우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하고 싸워요. 쌍꺼풀 없는 내가 쌍꺼풀 있는 나로 하기 위해서 빨리 돈 모아서 쌍꺼풀 수술 해야지 하고. 양악 수술해서 턱도 다 깎고 해서 나중에 엄마도 못 알아봐서 ‘누구십니까?’ 이렇게 나와요. 한 달 동안 밥도 못 먹고 고생이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을 따먹지 마라 할 때는 뭔 뜻이냐 하면 먹고 싶어도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걸 따먹는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자체가 아니라니까. 인간이냐, 아니냐는 것은 만드신 주님이 알지, 내가 알지를 못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내가 몰라도 돼요. 왜, 그걸 안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주변이 우리 포지션이 우리로 하여금 사람 만들 겁니다. 주께서 정하신 뜻대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나를 이 근호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정하신 자를 나를 ‘의’로 만들어 줄 거예요. 주께서 ‘너는 이렇게 돼.’라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닙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탄식하면서 기도함으로써 이렇게 되게 되죠. 이 노선이 되려면, 이 노선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의롭게 된다 할 때, 우리는 내 노력으로, 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나의 본성을 우리는 그때그때마다 발각당합니다. 그럴 때 ‘야~! 주님의 공로 아니면 나는 내 의를 포기할 그런 놈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내가 어떤 경우라도 한강에 자살할 경우라도 자살하는 순간에도 나는 내 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것은 오락이 아니고 죽는 것은 오락이 아니지만 한강에 뛰어드는 것은 오락입니다. 사업 부도나서 이런 꼴로 부끄러워서 못살겠다 이 말이거든요. 이것도 오락 이예요. 오락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내가 생각한 내 존재 가치의 의미를 나에게 부여하는 것, 이게 오락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뭐 다들 한 오락들 하시죠? ㅎ 오락 참 잘들 하시고 계십니다. 그냥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대로 안 죽습니다. 우리는 호락호락 죽을 인간이 아니고 뭐 덮든지 꾸미든지 째든지 붙이든지 위장하든지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과 3친구는 민낯, 화장기 없는 얼굴, 그냥 민낯 이예요.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화를 돋운 겁니다. 좀 고개 숙이고 ‘내가 어떻게 하면 살지?’ 이게 없어요. 다니엘 3친구는 ‘내가 어떻게 공무원해서 어떻게 해서 살지?‘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민낯, 맨 얼굴 이예요.

왜냐 하면 포로 잡혔다는 자체가 이미 죄수 아닙니까? 죄수가 무슨 자기 개성을 발휘합니까? 죄수인데!! 어떤 처지도 주께서 주신 형벌인 것을 온 몸으로 감수할 때 그냥 죄수 입장에서 그냥 꾸밈없이 주어진 사태에서 공무원 하라면 공무원하고 나가라면 나가고 절해서는 안 된다 하면 안하면 되고, 기도 계속하면 되고 다니엘처럼 보란 듯이 문 열어놓고 기도하는 거예요. 다시는 기도하지 마. 그러한 일련의 이야기들이 다니엘에 보면 다음 시간이 어렵습니다만 역사적인 것에서 어떻게 묵시적인 일들이 역사의 이름으로 역사 안에서 어떤 사태로 아주 특이한 모습을 드러내는가, 10분 쉬고 해봅시다.

 이한례 (IP:203.♡.41.16) 12-08-18 10:32 
가락교회-다니엘1장(다니엘의 시작)120809-1강b-이 근호 목사

제 1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과를 깎으면 껍질이 나오잖아요. 보통 사과를 먹을 때 껍질은 안 먹잖아요. 사과를 벗기면 하나의 필름처럼 나와 있듯이 껍질만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사과 껍질만 모아서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면 그 실체는 없지만 어느 정도 사과 크기의 윤곽이 나오겠죠. 사과 껍질 끊어진 것을 이어보면 ‘아, 이 껍질을 보니까 사과 알맹이가 이쯤 되겠다.’라고 눈에 들어오잖아요.


다니엘은 바로 껍질을 보여주는 거예요. 껍질을 보여서 거기서 알맹이가 진짜 등장하도록 그렇게 껍질로 감싸는 역할 그게 역사라는 겁니다. 역사가 없다는 것은 오해죠. 저보고 ‘역사는 없습니까?‘ 이렇게 묻는 교수가 있는데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사과 껍질을 보게 되면 그 안에 묵시가 있는 거예요. 만약에 묵시, 알맹이를 보여주면 그 자체로 묵시가 아니고 역사가 되기 때문에 거기서 알맹이를 보여주면 안 돼요. 껍질만 계속 이어져야 돼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뭐다? 복되다 했잖아요. 도마는 만지고 봤잖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되죠.

보이는 눈을 가진 인간이 이미 자체가 역사적 존재이어서 역사적 존재에서는 항상 역사적 존재만 들끓고 역사와 존재만 온다는 거예요. 사과껍질은 껍데기만 만나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 껍데기를 만나는 가운데서 안쪽의 묵시에 의해서 껍질이 발생된다는 사실을 감 잡게 됩니다. 그러면 껍질이 아닌 사람은 그걸 허황되게 보이죠. ‘이거 뭐 똑같은 사물을 보고 그건 그냥 우연이야.’ ‘아니야, 주님이 하신 거야.’ ‘아무리 봐도 주님이 하신 걸로 안 보이는데, 어디서 주님이 나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 대표적인 모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 성경책을 봤잖아요. 그냥 책 봤어요. 책을 봤는데 빌립 집사가 와서 책의 주인공이 이렇게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이분이 누굽니까?‘ 했을 때 그것이 어려워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 받는 종이 누굽니까? 할 때 그 분이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갔다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입니다. 이야기하는 그것이 안의 껍질과 껍질이 아닌 사람은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안에 동그란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껍질로 이렇게 동그랗게 쌌다고 생각한다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보이지 않지만 사과를 통해서 껍질을 보게 되고 빌립 집사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이걸(껍질) 보니까 둘이 같은 껍질로 만나게 되는 겁니다.

안쪽의 사과를 모르게 되면 이사야 53장에서 무슨 예수란 말이 안 나오잖아요?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빌립 집사가 뭘 받았느냐 하면 성령에 충만했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성령에 충만한 게 뭐냐,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실체가 이렇게 축구공처럼 있고, 보이지 않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축구공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 그렇게 생각 될 때, 그러면 이쪽 사람도 그렇게 될 때 예수 안을 통해서 상대방을 보고 예수 안을 통해서 상대방을 보고 ‘이렇게 우리는 다 같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는 주님이 만들어 가시는 주님이 칼질해서 벗겨놓은 또 벗겨 놓은 사과껍질이죠. 우리가 죽고 난 뒤에는 또 성령께서 예수 믿는 사람을 또 껍질로서 벗겨 놓으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된다 이 말이죠.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베드로하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보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은 그걸 엘리야와 모세 나타나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일종의 하나의 역사적 인물로 봤죠. 묵시적 인물로 안 본 거예요.

어렵지만 해봅시다.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면, 역사적 인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시면 여기는 예수님이 없이 돼 버려요. 예수님이 덩치가 있고 키가 있고 몸무게가 있잖아요. 예수님이 이 방을 나가버리면 이쪽은 예수님이 없는 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왕의 신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니까 거기 계시지 말고 걸어서 이동해서 그 몸체가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아들한테 손을 얹으면 같은 역사적 인물이니까 손을 대면 병이 낫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니 아들은 이미 나았다.’하는 거예요. 나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신하가 믿었어요. 이게 이상해요. 미쳤다고 그걸 왜 믿느냐 말이죠. 방금 예수님보고 ‘오셔서 손을 대야 병이 낫겠다.’ 했는데 역사적 인물이 오지도 않았는데 나았다. 말이 안 되죠. 믿고 가보니까 말씀하신 그때에 병이 낫다 이렇게 되죠. 그래서 하는 말이 ‘도대체 너희들은 기적과 표적이 아니면 믿지 못하는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어떻게? 그게 어떻게 말로 설명이 됩니까? ‘어떻게‘라고 묻는 자체가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예수님을 역사적 사실로 표현하라 이 말인데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로 설명이 우리 역사적 표현력에 담기지 않게 돼 있어요. 안 담깁니다. 왜, 사과껍질은 사과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과껍질에서 사과가 나온 게 아닙니다. 그냥 감 잡았을 뿐입니다.

이런 믿음들이 주님에서 나온 믿음만이 주님에게 인도하게 돼 있습니다. 내가 믿음 만들어서 주께 다가갈 수 없어요. 주께로 나온 믿음만이, 사과에서 나온 껍질만이 우리가 나온 다시 사과 본체 알맹이로 우리를 데려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데려가서 포근히 우리는 그 몸을 지키는 지체로서 감사하게 돼 있죠. 지금도 주께서는 사과를 계속 깎고 있습니다. 잘 눈에 안 띄어서 그런데 지금도 깎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묵시를 설명할 때는 묵시가 역사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고 묵시가 만들어 낸 역사적 흔적들이 다니엘에 깔려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와 묵시의 차이점이 뭐냐, 그게 오늘 강의의 제일 중요한 어려운 부분인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형은 의사다. 이 세상에서 역사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죠? 우리 형은 의대 나와서 지금 의사다. 이게 틀렸습니까? 역사적으로는 안 틀렸는데 역사 자체가 묵시를 만나게 되면 이게 몽땅 틀린 표현이 되는 겁니다. 뭔 뜻이냐 하면 묵시를 표현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틀렸다. 죄다. 부족하다. 미흡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우리 형은 의사다. S는 P다. 논리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려운 말은 하지 마시고, 우리 형은 형이고, 의사는 의사다. 같이 붙여보면 우리 형 + 의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묵시가 되는 겁니다. 뭔 뜻이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를 역사에서 찾아내게 돼 있어요.

자, 매직이 이렇게 스톱돼 있죠? 매직을 던집니다. 2바퀴 돌았죠? 역사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매직이 2바퀴 돌은 걸 가지고 그 원인을 내가 팔에 에너지 힘을 줘서 돌리기 때문에 돌았다.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 2바퀴 돌은 매직이 연결되면서 같은 역사적인 것으로 표현이 되는 겁니다. ‘내 매직은 2바퀴 돌았다.’가 돼요. 그런데 묵시적으로는 이게 맞다? 안 맞다? 이게 안 맞는 겁니다. 여기 있는 매직이 있고, 2바퀴 돌은 매직이 있는 거예요. AND, ~과 ~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역사는 ‘~~는 ~~다.’ 가 되는데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묵시에서는 2바퀴 돌은 원인을 지상에서 찾을 수 있다? 없다? 찾으면 안 돼요. 내가 밥을 숟가락을 들고 먹었으니까 밥이 되는데, 역사적으로는 이게 되는데, 묵시에서는 숟가락을 드는 것도 내 힘이 아니고 입에 들어가는 것도 내 힘이 아닙니다. 숟가락 들었다. 밥이 넘어갔다. 이렇게 돼야지, 숟가락을 들어 밥을 뜨니까 밥이 넘어갔다. 이렇게 되면 이건 역사적 산물이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이만큼 된 것은 다 내 누구 덕이다? 내 덕이다. 이건 역사적 산물 이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이게 묵시가 되는 겁니다. 쉬운 것 같지만 무진장 어려운 거예요. 나는 니 때문에 못 살겠다.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겁니다. 나는 니가 못살게 굴기 때문에, 못살게 구는 너도 묵시적 존재고, 못살게 당하는 나도 묵시적 존재고, 니는 나를 핍박했고 나는 핍박 받고, 원인과 결과가 성립이 안 되게 돼 있어요.

다니엘에 있어서 느부갓네살이 꿈을 꿉니다. 꿈을 꾼 이유는 원인과 결과를 찾아낼 수 있는 놈 나와 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이 평소에 그동안 멋진 꿈꾸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까? 애를 써서 꿈 꿨다면 느부갓네살은 계속해서 줄 곧 역사적 인물로서 마감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잖아요. ’얘들아, 얘들아.‘ ’예, 대왕마님‘ ’어제, 꿈 꿨다.‘ ’저도 꿈 꿨습니다.‘ 이러면 문제없는 거예요.

요셉이 꿈을 꿨잖아요. 요셉이 꿈을 꿨다.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형, 나 꿈 꿨어. 해, 달, 별이 나한테 절했고 볏 집단이 나한테 절했어.’ 이거 꿀 수 있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왜 형들이 화를 내느냐 말이죠. 형들은 그걸 역사적 꿈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그걸 역사적 꿈으로 보지 않고 뭐로 봤느냐, 묵시로 봤기 때문에 요셉이 속해 있는 층, 포지션과 요셉의 형이 속해 있는 포지션이 차이난다는 것을 형들이 감을 잡고 화를 낸 겁니다. ‘이게 건방 떨고 있어. 어디서 건방 떨고 있어.’

소년 다윗이 골리앗 전쟁 때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형들은 골리앗을 못 이긴다. 왜 못 이기느냐, 키는 3미터 넘고....., 그러면 요셉의 형들이나 사울 왕은 역사적인 것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기려면 골리앗을 이길만한 더 힘 센 장수가 있어야 돼요. 이번에 장 미란이 메달 못 땄잖아요. 힘 센 중국 사람이 등장해서. 골리앗을 이기려면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야 이긴다는 것이 우리 몸에 익혀 있는 역사적인 논리 구조입니다. 거기에 소년 다윗이 등장했잖아요.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어디서 어린 애가 위험한 곳에서 노느냐, 빵빵 총이나 가지고 놀아라.‘고 내보내죠.

주님께서는 골리앗 만나는 역사적 사건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뭐로 바꿉니까? 다윗 하나 심어놓음으로서 역사적 상황이 묵시적 상황으로 바뀌면서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해석할 수 없는 약속의 개입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거예요. 약속은 역사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그 마당에 묵시적인 사건으로 침범하고 침투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가 뭐, 예수님 처형당한 거죠. 간단한 문제죠. 대들다가, 종교적인 나라에 종교적으로 대들고 반항하다가 민중들이 화가 나서, 종교라 하는 것은 정신세계가 혼란스러우면 나라꼴이 안 돼요. 만약에 예를 들면 김 일성 동상을 무너뜨렸다. 그야 또 만들면 되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북한은 용서 안 되죠. 왜냐 하면 정신으로 김 일성 동상은 우상이기 때문에 신이기 때문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역사 속에 계속 묶이게 하는 그것은 악마는 묵시의 세계에 있어서 악마는 묵시를 뭐로 바꿉니까? 역사로 바꿔놓고 역사에서 못 벗어난 채 묵시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이게 다니엘 70이레 논문 보셨습니까? 그 논문을 이해하려면 역사에서 나온 묵시와 묵시에서 나온 묵시가 다르다는 그 점을 알고 있어야 돼요. 그거 모르면 이미, 아직 가지고 계속 우려먹을 수 있어요. 내가 지적한 것은 역사적 사고방식 갖고 있는 묵시가 있는데 그건 가짜 묵시다. 그건 옛날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구름 타고 오실 것이다. 기다리면 뭐 합니까? 이미 왔는데, 구름 타고 오실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꾸려면 느부갓네살이 바뀌어야 됩니까? 다니엘이 바뀌어야 됩니까? 다니엘부터 바뀌어야 돼요. 다니엘부터 감 잡아야 돼요. 내가 있는 포지션이 보통 포지션이 아니라는 사실. 포지션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하나 밖에 없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우리나라의 신을 섬기지 마라가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다른 신과 나, 나만 섬겨야 돼요. 그래서 지지지직~ 해서 뭐가 나오죠. 오 용익 목사님은 지지지직을 zzzzzzzzz 나와서 오른 편에 주님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등장하게 되면 주님이 등장했다는 것은 사람 눈에 안 보이죠. 유일신인데, 신이 둘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렇게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 신은 무슨 신이다? 유일  신이니까 여기서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되지, 여기서 튀어나온 신을 또 섬길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다윗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때문에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고 목욕하는 여인을 내가 겁탈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주께서 다윗 언약으로 지지지직~ 해서 요 부분이 사과라면 사과껍질이 어디에 주어집니까? 다윗의 행위를 사과껍질로 연결시켜 버립니다. 연결시켜 버리면 누가 죽었습니까? 다윗과 밧세바에서 태어난 애가 죽죠. 죽고 난 뒤에 다윗은 눈물을 쓱쓱 닦고 그 다음부터는 애통하지 않죠. 그 뒤 태어난 여디디아, 누가 태어납니까? 솔로몬이 태어나죠.

다윗은 뭘 알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이 한분인 것을 알았는데 그래서 나는 그 하나님을 철떡 같이 믿고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그 지지지직~ 튀어나온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자기 역사적인 사건 속에 자기를 집어넣어요. 묵시적인 사건화 돼 버린 다윗의 인생이 되고 말아요. 다윗의 인생 자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죽었다가 솔로몬 되는 이러한 사건 속에서 내가 여태까지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이 앞장 세워서 일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한테 있어야 돼요.

하나님, 이 말씀 지키면 되죠?’ 이랬던 우리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갖고 논다는 것, 내 안에 십자가 사건을 묵시적 사건을 일으키면서 나를 거기다가 십자가에다 푹 집어넣어서 삶듯이 우리 자체가 푹 삶기게 하는 겁니다. ‘아! 내가 죽어도 마땅한데, 돌에 맞아 죽어도 마땅한데 내가 이렇게 살았네, 살았네. 누구 때문에? 우리 주님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예수라는 주 예수라는 새로운 주님을 우리로 하여금 증거 하게 만들어요. 하나님, 하나님이 아니구나, 이게, 이게 아니야, 십자가야, 십자가! 이렇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꿀 때 다니엘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 같은 경우에 꿈 해몽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은 절망입니다. 그 절망, 그 절망이 바로 역사에서 묵시, 묵시에서 역사로 넘어 갈 때 저쪽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절망의 다리를 건어가야 돼요. 십자가로 된 좁은 길 아니면 영생은 없습니다. 그 절망으로 갈 때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절망을 해야 돼요. 완전히 노예에서 자기 힘으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모세가 애국자 안중근처럼 해서 쫓겨나간 하지만 안 돼요, 안 돼, 안 되는 거예요.

절망을 경험케 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묵시적 존재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과껍질로 이 세상에서 다루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게 있어요. 우리가 묵시적 사건으로 다루어지면 그때부터 우리의 몸 때문에 그 묵시가 뭐로 변하느냐 하면 묵시가 사과껍질이 아니고 우리자신이 사과로 변하는 수가 생깁니다. ‘나는 묵시야, 묵시야, 나는 묵시 사람이야, 예수 안에 있어서.’ 이렇게 까불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내가 하는 뭐든지 선한 것이고 나는 주와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뭐든지 성령이 하는 일이야.’ 완전히 교주 다 돼 버리죠. 요거 묵시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졸지에 역사로 바뀐 겁니다. 그 일을 누가 했습니까? 다윗이 그렇게 했어요. 다윗이 왕 되고 나서 우리야 처단하고 자기는 하나님 믿으니까, 율법 다 아니까, 자기는 왕이니까 자기는 묵시적 존재니까 뭐 걸릴 게 없죠. 막 계시 받고, 시편 보세요. 전부 다 계시 받고 한 예언 아닙니까? 인구 조사도 하고, 그런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거예요. 원수가 되는 그 모습 자체가 이미 다윗은 묵시적 존재에 포함이 돼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묵시적 사건 속에 이미 하나의 연극배우로 포함이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보면 돼요. 묵시를 역사화 시켜서 내가 소지할 수가 없다는 걸 명심해야 돼요. 어제 은혜 받았습니까? 그 은혜 오늘까지 안 들어갑니다. 유효하지 않아요. 늘 우리는 새로운 절망과 그 절망 속에서 비취는 주님의 새로운 구원의 손길을 손잡아야 되는 겁니다. 늘 우리가 잡는 게 아니고 주께서 먼저 잡게 하시죠.

다니엘에서의 느부갓네살의 꿈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서 절망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돼요. 뭐냐 하면 ‘다니엘아, 니 똑똑하지? 어제 내가 꿈 꾼 것 니가 기억나도록 해봐라.’ 이건 도저히 못 합니다. 거기서 못함, 나는 도저히 안 됨, 그러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역사적으로원인이 되어서 어떤 결과를 낳겠다는 그 논리 자체가 주님의 묵시 앞에서는 안 통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헌금하면 복주겠죠? 이거 안 통하거든요. 십일조하면 복 주겠지, 이거 안 통합니다. 왜, 이렇게 되면 내가 묵시를 역사로 내가 소지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안 돼요. 주님을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참기름 발라놨어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요.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을 잘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 편이었습니까? 거기다 예수님은 누굴 칭찬했습니까? 마리아보고 칭찬했죠. 마리아보고 단독적으로 칭찬한 게 아니고 마르다와 비교해서 칭찬했죠. ‘마르다야, 니는 음식 준비한다고 그렇게 분주한데.’ 마리아는 주님 앞에 턱 받치고 요렇게 앉아 말씀 들었다고요. 얼마나 밉상스러웠겠어요? 그걸 네 가지, 또는 싸가지라고 해요.

자, 칭찬을 했을 때 마리아보고 칭찬했지, 마리아 자체를 두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마르다는 뭘 느꼈습니까? 마리아 앞에서 절망을 느끼는 거예요. 자기 딴아 열심히 준비하는데 이건 싸가지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이건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온 모든 결과는 이건 역사일 뿐이지, 뭐는 아니다? ‘묵시는 아니다’는 겁니다.

그냥 묵시가 오게 되면 나는 원인을 내가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절망에 빠집니다. ‘내가 어제 꿈 꾼 거 알아내봐.’ 자, 그럴 때 명령이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인이 돼서 찾아낼 게 있어야지, 내가 그 사람하고 같이 동침해도 안 돼, 뇌파를 집어넣어도 병이나 알 수 있지, 꿈으로 해몽은 안 되잖아요. 블랙박스도 아니고, 안 되잖아요. 꿈 블랙박스 있으면 우리는 틀기가 곤란합니다. 대충 아침에 꿈 편직해서나 기억나지, 꿈 다 꾼 거 다 그대로 노출되면 낯 들고 못 살걸요. 우리는 항상 기억을 편집하게 돼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지금 다니엘의 서론 부분이니까 계속 다니엘 선지자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다니엘은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아닌 거예요. 우리 같으면 절망이죠. 그런데 그 절망을 다니엘은 뭐냐, 그걸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뭐냐 하면 나한테 절망을 주었다는 말은 주님이 원인이 돼서, 묵시적 세계의 내가 결과물로 이미 가입돼 있다는 것, 포함이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니가 못해, 내가 해.’라는 그 업무에 그 작업에 우리가 이미 하나의 재료로 삽입이 되었다는 이 기쁨, 그게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이 12제자와 다니면서 하는 일이 그 일이였거든요. 제자들은 그걸 이해를 못했어요.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오병이어도 하고,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원인을 ‘내가 뭘 했어? 내가 뭘 해서 이런 복을 받았지?’ 자꾸 역사적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기적 일으켰다는 소문 듣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면 당신을 메시아로 믿겠다.’고 나온 거예요. 그러면 기적을 우리가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기적이 되면 이게 뭡니까? 기적을 이미 우리는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안다는 뜻이거든요.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안 보여줘’ 하는 게 아니고 요나의 기적, 절망입니다. 죽음이죠. 니가 죽는다는 것이 그게 바로 기적이다. ‘니는 안 죽고 싶지? 내가 죽여줄게.’ 이게 기적인 거예요. ‘나는 안 죽고 싶어요.’ 이게 원인이 되어서 더 살고 싶다. 이건 역사적 우리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그걸 종합해서 주께 포함된 사람은 그게 허용이 돼요? 허용이 안 돼요? 허용이 안 됩니다. 우리는 살고 싶어도 죽어야 되고, 놀라운 사실은 죽고 싶어도 계속 살려내고 있어요. 계속 살아야 돼요.

제가 주일 날 설교했습니까?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왜, 살려내는 그 순간부터 내 것은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니, 마 마 마 마 니 죽었어. 죽었는데 살았어. 더 이상 니 꺼라고 하지 마 마 마 마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깁니까? 차라리 구원 받기 위해서 무슨 짓 할 때가 더 그리워지죠. 요거 봉사하면 복 받으려고 하고 하던 것이 더 그리워져요. 이제는 그때가 좋았지, 그게 없어져 버려요. 이제는 무조건 살았어. 무조건이야, 무조건 살았어, 무조건. 무조건 살았으니까 앞으로 인생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건 주님이 원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감당이 안 돼요.

그러니까 어제 나 같으면, 어제 ‘나’가 오늘 ‘나’가 아니라 어제 ‘나’ 따로 있고 오늘의 ‘나’가 따로 있으니까 ‘우리 형은 의사이다.’ 가 아니고 우리 형과 ~다? 의사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제 나도 나고, 오늘의 나도 나고 내일이 되면 낼 죽을지 모르지만 내일되면 나고, 영어로 and, and, 뭐 그리고 뭐 그리고 뭐 그리고, 묵시적 논리입니다.

역사적 논리는 뭐라고요? 뭐는 뭣이다. 뭣이 원인이 되어서 이런 경우가 나온다. 묵시적 원인은 역사 속에 없습니다. 그냥 사과껍질만, 만들어진 사과껍질만 열쇠고리처럼 이어지고, 이어지고 할 뿐 이예요. 그래서 다니엘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하자.’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안 되거든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 70년이란 포로기간, 이렇게 보게 되면 70년이란 포로기간을 정해 준 것도 주께서 묵시를 보여주기 위한 적합한 기간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죠. 70년이라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완성의 기간입니다. 결국 70년이 나중에 70이레로 바뀌면서 이게 셋으로 쪼개집니다. 7+62+1로 분해되면서 이 7과 62가 1이레에 여기에 쏠리는 방식으로 됩니다. 1이레!

1이레, 이거는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계시를 받을 때, 물어봅시다. ①번, 다니엘이 70이레 계시 받을 때가 좋았다. ②번, 사자 굴에 나왔을 때 좋았다. ③번, 느부갓네살이 꿈 꾼 것을 자기도 모를 때 내가 알아맞힐 때 좋았다. 몇 번 입니까?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좋았습니까? 정답 말씀드릴게요. 모두 다 나로 하여금 절망케 했습니다. 다니엘로 하여금. 더 이상 나는 이미 살려낸 몸이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좋다, 기쁘다,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그런 아쉬움? 내 인생 내가 관리할 수 없다는 아쉬움 같은 것. 아! 주께서 무섭게 다루시는구나.

그러면서 다니엘에게 인자야, 장차 1이레를 이루시려고 오실 분, 1이레를 이룬다는 말은 70이레를 이룬다는 말이고, 70이레를 이룬다는 말은 70년의 의미를 70년 동안 포로 잡혀야 되는 70년의 의미를 비로소 완성이란 이름으로 알려 줄 그분을 안다는 게 됩니다. 결국은 그분 있으매 내가 있는 것. 그분을 위하여, 그분 때문에, 그분을 주님이라고 높이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그러한 논리에 귀결됩니다. 그 다니엘이라 하는 것은 역사에서 묵시로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이륙하는 그 논리적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책, 그거 다니엘입니다.

어떻게 역사적 땅에서 묵시적 약속의 땅으로 이게 도약이 가능한가, 그건 짐승이 등장하고 그 짐승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그 짐승을 극복하고 거기서 이겨낸 그 인자의 왕국이 등장함으로써 역사에서 묵시로의 도약이 가능한 겁니다. 고걸 풀이하면 묵시에 있는 분이 역사적 인물로 길로 늘어뜨렸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묵시적 세계에 있던 그분이 발을 길게 이 땅에 발을 놓은 거예요.

요것을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보여줬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원래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시대에 필요한 금신상이죠. 머리는 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철과 진흙이고, 이런 식으로 돼 있죠. 그것을 하나님께서 눕혀 버립니다. 하늘까지 높아지겠다는 금 신상을 눕혀버리니까 역사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역사에서 역사로 계속 이어질 뿐인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하늘나라가 이 역사 속에 개입을 하는 겁니다. 말을 해도 어렵다.

땅과 하늘 사이를 꽉 차게 잇게 만든 금 신상을 발로 차서 엎어져 버리면 자빠지죠. 자빠지면 이것이 하늘은 역사 끝에 있게 돼요. 이렇게 개입하시는 이분이 진정한 하늘이다. 우상을 발로 차고 우상 끝이 역사 끝으로 조성하기 위해서 개입하신 그분이 바로 하늘인데 그것을 숫자로 이야기하면 바로 70이레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70이레 나온 근거는 포로 벌 받는 기간이 몇 년? 70년이고, ‘유다야 니 손들고 있어.’ 이 말입니다. 니는 손들고 벌 받고 있으면 나머지 모든 해결은 누가 한다? 니한테 손들게 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70이레 만에 모든 것을 손 털게 완성하시고 완료 하겠다 그런 이야기를 다니엘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말한 끝을 알려면 우리가 하늘나라로 계속 세상 전체가 높은 저 하늘나라를 쳐다보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하늘나라로 나아가겠다는 그러한 분위기가 우~ 우~ 자꾸 일어나야 되죠.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나를 하늘로 올려 보내겠다는 그 운동, movement, 그 운동, 종교죠. 기독교라든지 이런 거. 그런 종교 운동을 한껏 많이 확산시켜야 됩니다. 그게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 먼저 가죠? 자, 근거 대 보세요.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 먼저 간다는 것,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너희들 유대인 바리새인들보다 세리나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 가고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기도하고 죄인은 손들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감히 하늘도 쳐다보지 못할 때 ’니가 바로 의인이다.‘고 평 받았잖아요. 그렇게 되는 근거가 하나밖에 없어요. 묵시적으로 오신 그분이 ’죄 없다.‘하면 그 순간 죄 없는 거예요.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자 보고 ’나는 니 죄를 묻지 않겠다.‘하면 누가 와도 그 여자 죄 물으면 안 돼요. ’얼레리 꼴레리, 간통하는 거 봤다.’ 이러면 안 돼요.

결혼해서 아가씨가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이고 퍼지게 만들었다. 연애할 때는 라면을 사먹고 다녔으니까 그걸 몰랐죠. 한번 끓여보라고 하니까 안 끓여진다. 사랑과 전쟁 나와서 재판을 해서 이혼을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런 문제 생기죠.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왜 그 여자한테 라면 잘 끓이면 내 아내답다는 그 원인을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나는 여자는 라면을 잘 끓여야 한다.‘는 그 원인을 내 안에 내장돼 있었던 것을 그걸 아내한테 요구한 셈이 돼 버리죠. 그러면 만약 그러한 심정 심보 같으면 구원받는 것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요렇게 행동하니까 저 예뻐서 구원하겠죠?‘라고 그 원인을 자기의 선한 행위로서 출발하겠죠? 이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솔직히 딱 깨놓고 있어요. 있는데 그 자체가 죄라고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이걸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해야 복 받는다는 이것 자체가 죄라는 것, 그걸 인간의 힘으로 고백이 안 돼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잘해야 구원받는다는 이것 때문에 우리 주님 죽었습니다. 이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습관, 버릇, 평생 지니고 가야 될, 평생 나오고 또 나오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역사적인 그것 때문에 묵시적 존재를 오해하고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을 오해해서 주님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면 문제 해결 다 된 셈이죠. 내가 누구냐? 내가 ‘나는 역사적 존재, 이러면 문제 해답이죠. 다른 말로 하면 ’니 누구야?‘ ’나는 내가 원인이 돼서 뭔가 결과를 항상 기대하는 그런 존재.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은 바로 그것을 실생활로 하는 거예요.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환경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다니엘 3친구는 우상에 절하라 할 때 절 안했습니다. 자, 느부갓네살이 내가 우상보고 절하라 했는데 안 했으니까, 그때는 금신상이죠. 금신상보고 절 하느냐 안 하느냐 원인 결정을 니가 해라. 만약에 절을 하면 니는 살고, 절 안 하면 니는 죽는다. 여기 있는 우리 다 역사적 존재야, 나는 절해서 살았어. 니는 절 안했으니까 니는 죽어야 돼.‘ 다 같이 우리는 거기에 파묻혀 있고 거기서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다니엘 3친구는 뭡니까? ‘나는 아니요’ 하겠다는 말 이예요. ‘나는 당신들이 아는 그런 법칙에 난 동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럼 죽는다.’ 하거든요.

요걸 한번 설명해 봅시다. 이게 본격적으로 다니엘 들어가는 실마리가 됩니다. ‘니가 금 신상에 절 안하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럼 이게 뭡니까? 죽음이죠. 다니엘 3친구가 죽게 된 원인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 약속 때문에 그렇죠? 지금 주님께서는 망태, 또는 잠자리  채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잠자리채를 하나 준비해 놨습니다. 여기 걸리기만 해봐라, 해서 십자가 잠자리채에 걸리면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게 안 보이니까, 세상 포지션.

인간은 우리가 우리 되는 것이 아니고 포지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했죠. 세상 포지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고 사는 것은 누구 손에 달려있습니까? 절하면 살고 안 하면 죽으니까 죽고 사는 것은 누가 원인이 돼요? 내 하기 나름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요 죽음(세상 포지션)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죽음은 뭐냐 하면 ‘내 말에 의해서 좀 죽어줘.‘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이 ’절 안하면 죽는다.‘라는 말을 느부갓네살이 한 게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누굴 부린 거예요? 말 타고 ’강남 스타일‘ 싸이가 춤추는 거 나오죠? 주께서는 누굴 부리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을 부려서 다니엘 3친구 찾아가게 해서 세상적인 역사적인 질문을 던져서 다니엘 3친구로 하여금 세상적인 죽음을 거쳐서 어디 죽음에? 진짜 구원받은 매미채에 걸려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다니엘 3친구에게 작용을 했습니다. 다니엘 3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할 때 이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절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가만있는데 지금 사무보고 있는데 괜히 절 안한다고 시비 걸었으니까 이건 어떻게 내가 손 쓸 수 있는 입장이 안 돼요. 구원은 원래 그런 식으로 구원받습니다.

내가 헌금해서 구원받으면 내가 손 쓸 수가 있어요. 하나님 보이시죠? 인증 샷 찍어서 할 수 있는데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버려요. 그래서 모든 공로는 ‘주께서 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죠.

그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죠. 니가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구원받은 사람이 뭐라 합니까?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게 겸손 이예요? 겸손 아니에요? 겸손 아니에요. ‘내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언제 내가 옥을 돌아보았습니까?’ ‘이 소자에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아, 그때 그 애 하나. ‘아닙니다. 그거 아니거든요.’ 몰라요. 주께서 영생 주기로 한 사람은 주께서 버리지 않고 늘 곁에서 천사를 보내든지 성령을 보내서 늘 이런 사태를 일으킵니다. 일으켜서 내가 원인이 안 된 이상한 것이 우리 속에서 발산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내가 이런 놈이 아닌데, 나는 뭐든지 굽실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때는 절하기 싫던데.’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내 능력 밖에서 내가 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사과를 깎아놓은 사과 껍질에 해당되는 겁니다. 묵시적인 껍데기가 우리에게 해당되는 역사가 되는 거죠. 그 역사는 우리에게 나온 원인이 아닙니다. 주께서 원인이 되는 겁니다. 이거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족들하고 다니엘 같은 사람들이 몇 몇 수천 명이 포로 잡혀 갔죠.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의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은 과수하라고 남겨두고 중간 되는 사람들, 군사들은 죽었죠. 결국 포로 잡혀 왔다는 것은 죽음을 대체한 거죠. 죽음을 대체한 거죠.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70년 포로 기간 동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야 될 것은 진작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 존재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되는 겁니다. 이제 문제는 그거예요. 왜 죽이시는가, 무엇 때문에 죽이시는가, 그거만 알면 돼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신 거 여러분 아시죠? 우리가 남아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왜 죽으셨는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 죽으셨는가, 그거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거 우리 힘으로 모릅니다. 왜 우리는 만날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주께서 묵시적인 사태를 만들어 주게 되면 ‘아! 이런 것 때문에 우리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구나.’하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막같이 약한 막, 세상도 알고 영적 세계도 알고 간들간들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태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지 상관없이 주님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저희들이 알고 싶습니다. 다니엘을 시작하셨사오니 다니엘을 통하여 고막같이 얇은 막이지만 우렁찬 주님의 음성이 나오고 우렁찬 악마의 음성도 같이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