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두 개의 원천

아빠와 함께 2020. 5. 29. 09:41

대전-59강 사무엘상18장10-16절(두개의 원천)20200526-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8장 10절,

10절, 그 이튿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절,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악신, 오늘 주제는 영의 문제에요. 영. 영의 반대말은 신체성 또는 다른 말로 물질성이라고 하겠죠. 신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성경에서 악신이 임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는 것이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은 힘 있게 덮쳤다고 했습니다. 힘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더 세냐 하면은 영이 물질보다 더 세다. 이래 되는 거예요. 물질보다 신체보다 영이 더 센 거예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바람 불 때 아스팔트 위에 종이가 막 날아다니죠. 종이가 스스로 팔다리가 있어서 이렇게 휘젓습니까? 아니면 뭔가 부는 거예요? 떠밀리는 대로 아스팔트 위에 데굴데굴 굴러가죠. 서부영화에 보면 벌판에 덤불 같은 것이 굴러다니죠. 지금도 미국에는 고속도로 아스팔트 위에 덤불이 퍼져 있다가 굴러가고 있죠. west,서부음악이 막 깔리고 총잡이 둘이 결투한다고 폼 잡고 있고. 그런 게 있죠.

자, 인간은 아스팔트에 있는 휴지처럼 떠밀려간다. 떠밀려 갈 때는 여기에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은 무게감을 상실해버려요. 무게감을. 그냥 종이처럼 무게감을 상실. 종이 같은 것은 무게감이 없다. 이래 되지만, 인간 같은 경우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주체성이 떠밀린다. 내가 뭘 해볼까? 나는 여기서 살아야지, 하는 그것이 소용이 없어요. 뭔가 밀어요. 그걸 크게 생각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관계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관계성.

태어나서 인간들이 첫 번째 하는 착각과 오해가 뭐냐 하면은, 애들이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잠도 안 자고 앙탈을 부리죠. 자기 혼자밖에 모르죠. 근데 크면서 동생이 생기고 그다음에 친구 생기고 학교가면 선생님이 있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홀로, 단독성이라고 하는데, 혼자 사는 것 같지만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이리저리 떠밀려 가는 거예요. 만원지하철에 가만히 있는데 옆에서 밀면 밀리고, 아저씨 밀지 마세요! 해도 아저씨는 뒤에서 미니까 미는 거죠. 이 세상은 뭔가 떠밀려가는 거예요. 내 맘대로 안 돼요.

떠밀려 가는데, 그게 관계성인데 본성은 뭐냐 홀로입니다. 홀로 또는 혼자. 혼자 살고 싶어요. 인간의 결국 마지막은 뭐냐 하면은 홀로 간다는 겁니다. 혼자예요. 혼자. 참 슬프죠. 그래서 인간은 비극을 말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행복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냥 태어난 것 자체부터 해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섞여있는 자체가 우리에게 비극을 유발하죠. 비극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없다, 아프다, 그것만 생각하는데. 그렇게 좁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비극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내 맘대로 안 될 때. 나는 홀로 있고 싶고, 이걸 단독자의식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신처럼 되리라. 내가 곧 신이다. 나는 신이고 싶어.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주위에서 밀어내고, 참조할 게 많고, 배려할 게 많고, 신경 쓸 게 많고. 혼자 살고 싶은데 혼자 살도록 주위에서 내버려두지를 않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은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남들이 칭찬하고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고 나에 대해서 부럽다고 하고 행복한 거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닌 이상은, 내가 신이 아닌 이상은 필히 불행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꾸 불행할 때마다 우는데, 우는 것은, 눈물은 거품이에요. 눈물은 거품. 이별의 거품. 아모르파티 가사에 나와요. 눈물은 그냥 거품이에요. 아무 의미 없어요. 의미 없는데 나온다는 것은 인간은 신체성+( ), 뭐가 있다? 영적이라는 겁니다. ‘신체성+영적’

나는 보이는 것을 이렇게 운전하듯이, 보이는 차로 운전하듯이 그냥 보이는 내 신체와 내 행동을 조절하고 관리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렇게 자기신체, 자기 물질, 눈에 보이는 것이  이게 나다. 내가 이걸 조정하겠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생각하면 좋아요. 자성한다. 자성한다는 말을 여러분이 아시죠. 스스로 자기를 근사하게 관리한다. 스스로 나를 조절한다. 욕 안 얻어먹게. 그리고 스스로 나를 반성한다. 내가 보기에도 내가 우수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늘 조절시키는 거예요.

근데 스스로 자성하고 반성하고 자기 조절에 나설 때에 여기에 아까 이야기한 무엇이 떠밀립니까? 이 주체성이 떠밀린다는 이 현실세계에서는 이 자성이 소용이 있어요, 없어요?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한 비극이에요. 인간은. 돈이 아무리 많이 있고 아무리 잘 살고 싶어도 그것은 한때고, 짧은 시간의 쾌감이고 유쾌함인데, 나중에 시들해진다는 것이 또한 비극입니다. 처음에 있었던 기쁨이 계속 가면 좋겠는데, 가려고 하면 또 시들해져요.

남자가 여자하고 결혼할 때 “당신은 너무 미모가 아름답고 눈부셔. 나 그대에게 모든 것을 드리리.”라고 했는데, 결혼한 지 6개월도 안 돼서 그 얼굴이 지루하다는 거예요. 그 이쁜 얼굴이. 그래서 여자 쪽에서 화가 나서 얼굴을 확 뜯어고쳤어요. 성질나서. 분명히 이쁘다고 해놓고, 나 당신 얼굴에 반했다고 해놓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식상하다는 이런 이야기가 막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 생각에는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나이가 늙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나이든 것 같으면 화장품으로 꾸미면 되지요.

그런 게 아니고, 이쁜 것도 잠깐이라는 것이거든요. 뭐 어쩌라고? 빼도 박도 못하는데 뭐 어쩌라고! 그럼 남자 쪽에서는 더 의아해해요. 나는 어쩌라고? 얼굴이 지루하니까 지루하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지 뭐 어떻게 하자고 하는, 헤어지자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데. 그냥 지루한 것을 지루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 거짓말 할 수도 없고 나도 어쩌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자 쪽에서는 “차라리 혼자 살았으면...,” 갑자기 혼자 살았으면 하는데,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 주체를 밀기 때문에 인간은 이 관계성속에서 혼자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관계성을 최종적으로 둘을 뽑아내요. 이게 두 가지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의 원천. 두 개의 원천인데, 오늘 본문을 가지고 하게 되면 그 두 개의 원천에서 하나는 나왔어요. 18장 10절에 보면 원천이 하나는 나왔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악신이라고 되어 있죠. 신은 신인데 뭐와 결합이 되어 있다? 악한 신. 악신이 등장해요. 그러면 악신이 있다면, 두 개의 원천이니까, 한 개는 악신이라면 한 개는 무슨 신이 되겠어요? 선한 신. 선한+신, 또는 성신, 거룩한 신, 성스러운 신이 되겠죠.

이렇게 볼 때, 여기서 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참아내야죠. 어려운 거. 뭐가 어렵나 하면 이런 이야기가 어려워요. 오후설교 때 잠깐 언급했는데, 사람들이 그 짧은 오후설교 때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부재와 무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을 했어요. 부재, 제가 이야기했죠. 부재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은 게 아니고 있는데 잠시 출타중입니다. 부재중입니다. 부재중. 무라는 것은 아예 원천이 없어요. 아예 시작도 없기 때문에 여기에 없는 거예요. 부재는 여기 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신체와 물질이 안 보이는 거예요. 부재와 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부재와 무를 어떻게 보면 같은 걸로 봐요. 내 눈에 없으면 아예 없는 거예요. 아예 없는 것. 부재와 무에 대해서 좋은 예가 있어요. 커피숍에서 오랜 만에 제대하고서 여자 친구를 만났어요. 만났는데, 몇 시에 만나자고 했느냐 하면은 오전 11시에 만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처음에 입대할 때 그 카페에서 만나자. 위치 알지? 그렇게 해가지고 11시에 그 카페에서 만났어요. 왜 그 카페에서 만나야 하느냐 하면은 그때 좋았던 그 감정을, 그 동일한 감정이 그 카페 분위기와 환경을 보게 되면 다시 환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만나자 했다 이 말이죠.

옆에 여러 테이블이 있는데, 한 곳에 앉아서 남자가 자기 눈으로 보죠. 내 여자 친구를 보고 싶어서 기다리는데 안 보여요. 안 보인다고요. 계속 봐도 안 보여요. 11시부터 몇 시까지 기다렸느냐 하면은 오후 9시까지 기다렸어요. 무려 10시간을 기다렸어요. 아르바이트 학생이 이제 문 닫을 시간이 됐다고 나가달라고 해요. 나왔죠. 그렇다면 그 아가씨는 죽었습니까? 부재한 거예요? 부재한 거죠. 그런데 그걸 보고 있던 아르바이트 학생한테 주인이 하는 말이, “있지도 않는 여자인가 보네.” 저 남자는 이미 있지도 않는 여자, 3년 전에 이미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그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가지고 애써 그 죽었다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하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 갑자기 드라마 끝부분이 막 나오는데, 그 자리에 언젠가는 나타날 거야. 이게 남녀관계도 마찬가지고, 일찍 아들의 죽은 어머니의 마음도 마찬가지고요. 아들이 있던 그 장소를 떠날 수가 없어요. 옆에 사람이 말리죠. “아이고, 아주머니! 장례 다 치렀잖아요.” “아니에요. 우리 아들 살아있어요.” 이거는 현실과 이 두뇌가 괴리상태가 된 겁니다. 받아주지를 않는 거예요. 여러분 이해하시겠죠. 10시간을 기다려도 안 올 때, 제 3자는 여자는 이미 죽었다고 볼 수 있고, 그 남자는 지금 집에서 이 시간을 잊어버리고 자고 있다고 보고. 부재와 무의 차이를 아시겠죠.

지금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걸 묻는 거예요. 신은, 하나님은 부재하시냐? 무냐? 이걸 묻는 겁니다. 이 성경 자체가. 부재하면 기다리면 되고, 무면 지금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엉터리 짓 하고 있는 거예요. 무라고 보는 것은 불신자. 왜, 불신자들에게 무와 부재가 동일한, 똑같은 의미냐 하면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여기 무를 대신한, 무에 반대는 유에요. 있음. 이거 누가 있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고 싶다? 단독자,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거예요. 내 있음이 있음으로 충만하다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괜히 하나님을 믿어버리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여기서 하나님의 관계성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줬잖아요. 이게 듣기 싫은 거예요. 이게 잔소리인거예요. 내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때문에도 바쁜데 성경까지 챙겨야 되느냐?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있지도 않는 그분을 내가 왜 의식을 해야 해? 하나님은 내게 없어. 왜냐? 내가 여기 있으니까. 있는 것부터 우선 챙겨야지. 없는 주님은 나중이고 지금 있는 것부터 챙기고 나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거야. 이래 되는 거예요.

아직 죽음이, 유有가, 내가 죽음을 통해서 무無로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거는 나중 문제로 보는 거예요. 나중 문제로. 만약에 이게 나중 문제가 아니고 그 악신이 미리 나한테 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 문제가 안 되죠. 사울에게 악신이 미리 왔다면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닌 겁니다. 만약에 집사님에게 성령이 미리 왔다면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죠. 이거는 단독자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 홀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개의 원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두 개의 원천이 불신자 입장에서는 부재가 되던 무가 되든 일단은 단어 하나가 없음이 되는 거예요. 없음이 되는 거예요. 없음. 무에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유가 되죠. 부재의 반대말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현존이라고 합니다. 현존. 자, 어렵다고 했죠. 현존이라는 말은 여기 계시다가 돼요. 현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여기 계신데, 마음만 먹으면 내 손에 잡히지 않고 언제든지 본인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서 여기 계시는 분.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우리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결혼해놓고 자기성질이 식구들한테 말도 안 하고 이리저리 자꾸 떠나는 습관이 있어요. 애 셋이나 낳았는데. 그냥 답답하다고 하고 그냥 가버려요. 떠나는 성질이 있어요. 그러면서 가끔 집에 와서 빨랫감이나 주고 용돈이나 주고 애들은 돌볼 생각도 없고요. 그냥 결혼이 자기 취미생활이나 하려고 결혼한 거죠. 자기 총각 때 했던 그 성깔 있잖아요. 그대로 결혼했어도 못 버리는 거예요. 가정에 대한 책임이나 이런 것은 없고. 기분파라고 하죠. 남한테 잘해주고 훌쩍훌쩍 떠나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남편이 집에 왔을 때 그거는 있는 겁니까? 현존하는 겁니까? 잠시. 잠시 현존했죠. 또 그 다음날에 보면 벌써 “나 어디 한 달 갔다 올게,” 하고서 훌쩍 가버리는 거죠. 이거는 부재죠. 부재. 부재인데 나라에서 주는 재해기금은 부인명의로 오는 것이 아니고 세대주 명의로 온다니까요. 이게 문제에요. 그러니까 남편이 있을 때 동사무소에 가서 돈을 타내야 해요.

자,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서 사무엘상 18장 10절에서 악신이 임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있음의 상태, 나 있음은 존재거든요. 나밖에 모르는 입장에서 악신이 임했다는 것은 상당히 생뚱맞는 이야기입니다. 뭐 어쩌라고? 나 어쩌라고? 내가 살아온 게 있는데. 그래, 나는 떠밀려. 하지만 나의 개성은 버텼잖아. 맨날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떠밀려도 나의 나다움은, 나는 버텼다. 그 자부심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버텼다. 또는 이겨냈다. 박세리가 양말 벗고 골프 친 거 아시죠? 거기에 김민기 노래 상록수, 끝내 이기리라! 이 세상 모든 불신자들의 살아가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고 싶어도 끝내 이겨냈다는 거예요. 물론 현존하면서 계속 왔다갔다가 할 수 있지만. 끝내 이기리라. 끝까지 이기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성경에서는 뭐가 들렸다는 말입니까? 악신이 들린 거예요. 그것이 바로 악마가 창세기 3장에서 너를 높여줄게, 라는 제안으로 온 성깔이 태어나면서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악마는 뒤에 무로 빠져버리고요. 악신은 무로 빠져버린 거예요. 무슨 불신자가 악마를 믿어요? 악마, 천사, 아무것도 안 믿어요. 하나님도 안 믿는데 무슨 악마를 믿어요. 그러니까 믿는 것은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다고요. 성경에서 두 개의 보이지 않는 원천을 이야기하는데, 인간들에게는 그걸 의아해합니다. 낯선 거예요. 최종적으로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나밖에 없으니까 나 같은 것을, 내가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아까 뭐한다고 했습니까? 자성, 스스로 반성한다고 했죠. 계속해서 반성하는 거예요. 나쁜 짓했다고 해서 반성한 게 아니고 내가 끝내 이기리라에 힘을 비축하려면 내가 무슨 노력을 더하면 되겠는가, 뭘 조심하면 되겠는가, 하는 겁니다. 어떤 직원이 회사에 입사를 했을 때에, 그럼 벌써부터 자성을 해요. 이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마음가짐을 해야 하는가,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세 바로 스스로 반성하는 거예요. 스스로 자성하는 거예요. ‘잘못 밉보이면 인턴으로 끝낼 수가 있다. 그러면 나만 손해지. 그럼 끝내 이길 수가 없잖아. 끝내 이기기 위해서, 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성하자.’ 여기에 무슨 두 개의 원천이 귀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까? 안 들어오죠. 들어올 수가 없죠.

제가 부재와 무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는데, 무는 나만 있다고 했을 때는 모든 게 무가 돼요. 그런데 나 말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할 때는 내 눈에 안 보이니까, 우리 세속에서는 부재로 보이고, 성경에서는 이게 부재가 아니고 현존이 되고. 현존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제일 마지막에서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게 현존이거든요.

성경에서는 현존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재한 거예요. 남편이 떠나고 없어요. 이제 살림살이는 혼자 내가 감당해야 돼요. 내 인생을. 리어카에다가 무거운 나를 실어가지고, 나의 이상적인 무거운 동상 같은 나를 싣고 앞에는 누가 끄느냐, 내가 나를 끌어가요. 아휴 답답이! 답답이! 계속 질질 끌고 가야 되는 거예요. 끌고 가면서 자성하면서, 반성하면서, 이래서는 안 되지, 이래서는 안 되지.

그래서 이 영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강의가 좀 어려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비-인칭적인 존재라고 해요. 비-인칭적인 존재. 인칭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할 때는 인칭이거든요. 영어로 하면 I, You, There, Our, ‘우리’ 이런 것인데. 비-인칭적인 것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It이 돼요. ‘그것’이 돼버려요. 우리보기에 영은 비-인칭적인 존재죠.

그런데 오늘 본문 18장 10절에서 보니까, 악신이 오니까 사울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아니죠. 갑자기 미쳐버렸죠. 뭐 없나 했는데, 미쳤는데 방향이 있어요. 어떤 일정한 방향이 있어요. 창이 있어요. ‘아, 창을 가지고 놀자.’ 이게 아니고 창의 용도가 뭐냐 하면은 다윗을 향해서 들고 죽으라고 던지는 겁니다. 벌써 이쯤 되면 여러분들이 ‘아, 인간의 속성을 바로 사울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감을 잡을 거예요.

다윗 편에 서지 마세요. 사울 편에 서세요. 우리 사울 편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내 행동을 자제할 수 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상은, 나밖에 모른다. 그걸 아까 배웠듯이 유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부재된 악신은 나밖에 모르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이유도 원인도 몰라요. 그냥 적이 있어야 내가 잘났어. 이거 참 중요한 말인데. 적이 있어야 내가 잘났어요. 내가 잘났음을, 내가 밟아야 될 적을 하나 만들어내야 비로소 내가 그걸 느낄 수가 있어요.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보고 뭐라고 합니까? “사랑하는 남편이여!” 이래 이야기 안 하죠. 두자로 이야기하잖아요.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인간아!” 두자로. 왜냐하면 인칭이 없어요. 비-인칭적인 존재기 때문에.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이런다고요. 안 그러면 다른 말로, “나가! 나가! 나가! 개는 여기 집에 있고 니 나가! 내가 이러려고 살았나? 이러려고.” 비-인칭적인 존재에요. 니는 나를 괴롭히는 존재다. 인간도 아니죠. 비-인칭적인 존재기 때문에. 비-인칭적인 존재에서는 그 사람의 어떠한 말도 안 믿습니다. 입 다물어! 내 앞에서 이야기하지 마! 이게 뭐냐, 그 사람의 주체성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이렇게 할게, 저렇게 할게, 이런 계획이 있어서 하는 것이 일체 없는 거예요. 비-인칭적인 존재가 되면 없고, 그냥 악신이 들려가지고, 보통 남자들이 술 먹고 들어올 때죠. 술 먹은 악신이 들려서 들어올 때에, 그 술 먹는 남편보고도 못 참고 그 술 먹는 남편도 못 참고. 뭐 들고 있으면 다 부숴버리고. 그래서 술 처먹었든 들어가 디비 자라고 하잖아요. 설치지 말고. 애 깨워서 했던 말 또 하지 말고. 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악신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다 망해도 너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충동적입니다. 기본충동. 악신의 기본충동은 이 세상 대전바닥이 다 불바다 되어도 나는 휴거되면 그만 아닌가 하는 것이죠. 나만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이 육적인 것, 눈에 보이는 신체성, 물질성도 따져보면 관계성이 있어요. 그 관계성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혈육이라고 합니다. 혈육. 혈육이라고 하는데, 이걸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가족, 일가친척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관계성이에요. 만약에 이런 혈육적인 관계성을 포기하고 단독적인 자기 성질대로 살면 이걸 사회에서는 뭣 같지도 못한 인간이라고 하죠. 짐승만도,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해요. 짐승도 지 새끼는 챙길 줄 아는데 어떻게 집구석 들어와 가지고는 얼굴만 삐죽 보여주고 또 나가고. 그러니까 이거는 개만도,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혈육적인, 기본적인 관계조차도 안 돌봤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남녀가 결혼을 해가지고, 총각 때 어울렸던 취미생활을 아직도 유지하려고, 생각이 어떻게 그렇게 돌아가느냐 이 말이죠. 생각이. 총각 때 캐릭터 모으는 취미가 있다. 그러면 결혼을 했으면 캐릭터 모으는 취미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버려야죠. 총각 때 보드 타는 취미가 있다. 그 보드 버려야죠. 해외까지 가서 파도타기 한다고 호주가고 이런 것 하지 말아야죠. 그래, 결혼해가지고도 딴 건 다 양보하는데 이건 못한다 해서 보드 들고, 왔다가 파도 좋을 때 간다고 미국 가버리고. 그 대신 너는 백화점에서 옷 사라. 젊은 사람들의 그 마인드 속에는 결혼이 뭔지를 몰라요. 갑자기 뭐 누구를 의식해서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만.

결혼이라는 것이 뭔지를 몰라요. 니 즐거운 것, 나 즐거운 것,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양보? 미쳤어. 멀쩡한 내가 왜 양보해? 그게 어디서 깨지느냐 하면은 애 낳고서 깨져요. 애는 혈육이잖아요. 애가 새벽 2시 40분에 젖 달라고 깬다 이 말이죠. 깨니까, 아침 일찍 출근할 남편도 같이 잠을 못 이루네. 무슨 이런 난리가 다 있나. 무슨 이런 난리가 다 있어요. 애 시끄럽다고 아래층에서 문 퉁퉁 두드리고 가네. 이거 내 잘못인가? 도대체 이러한 비극, 불행, 애 낳아서 갓난애를 키우는 이 불행과 비극을 이 잘난 내가 왜 그걸 감수해야 되죠. 이 잘난 내가. 이 잘났기 짝이 없는 내가 왜 감수해야 하느냐? 나는 행복을 추구하지, 비극을 추구하기 싫은 나에게 왜 비극이 찾아오지.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유有, 있음, 나라는 몸뚱아리가 있음이 애가 빽하고 울게 되면 여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내가 이러다가 바짝 말라 죽을 수 있다는 거예요. 있음 자체가 곱게 있는 게 아니고 항상 어디에 노출되느냐 하면은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죽음의 공포에 노출된 있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끝내 이기리라를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양말도 벗어야 되고 계속해서 버텨야 되는데, 내가 나한테 주는 불행을 풀어야 되지 않습니까? 적을 만들어놓고 적에게 쏘아대는 거예요.

쏘아대면서 자기의 화를 내부적으로 억누르는 거예요. 억누르는 거. 거기에 적합한 것이 정치성향의 유튜브들. 아, 나이 60에 퇴직했지, 할 짓은 없지, 빈둥빈둥 놀지, 채널을 1분에 열 두 개씩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틀면서. 유튜브 보면서. 누구 하나 씹히기만 해봐라. 윤미향이 씹히기만 해봐라. 김정은이 씹히기만 해봐라. 이 씹는 재미로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을 좀 완화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완화시키려고.

오늘 18장 10절에서는 이게 얼마나 악신이 센지, 사울이 정신이 나가버렸어요. 정신이 나가서 조절이 안 되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정신분석학에서 충동이라고 해요. 충동. 충동하고 욕망하고 다릅니다. 욕망은 점잖은 거예요. 점잖게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은밀하게 뜨면서도 얼마든지 욕망할 수 있어요. 저 여자 예쁘다고 은밀한 마음으로 할 수 있지만, 충동은 이건 미친 거예요. 충동이 달려드는 거예요. 충동.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탐욕이죠. 야고보서 1장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죠. 이 모든 인간은 사망하죠. 그중의 인생은 어떤 찬란한 인생이라도 그거는 무슨 인생이다? 욕심이 있는 인생이에요. 

그 욕심의 인생이고, 그 욕심을 현실화, 구체화시킨 것이 인생이에요. 이게 바로 죄된 인생.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고. 주께서 바라는 노선, 보고 있는 노선은 이 노선밖에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죄를 실제화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땅에 살면서 성화, 성화라는 말을 알죠. 기존교회에서는 뭡니까? 거룩한 생활,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 거룩한 생활이 바로 자기 욕심이에요. 죄입니다. 본인은, 그 사람은 안 죽습니까? 죽죠. 죽으면 무조건 성화하고 싶은 생각이 있든, 주님을 믿던, 사랑하던 전부 다 죄가 돼요. 다 욕심이 되는 거예요.

혼자 집에 도 닦고 있을 때는 이게 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집나간 전처가 왔다. 이게 골치 아파요. 집나간 전처, 이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혈육이라고 했죠. 관계성. 한번 이어진 관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하는데, 인연은 내 쪽에서 끊고자 해도 무엇으로 남느냐 하면은 기억으로 남아요. 그 사람은 안 찾아와도 내 기억은 있어요. 그 사람과 거닐었던 거리만 가도 확 그 사람의 기억이 떠올라가지고 자신을 힘들게 해요. 참, 인간은 복잡해요. 내가 스스로 깨끗하게 자성이 안 됩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 말도 맞는 것 같지만 어쩔 때는 뭐 맑은 마음도 되던데요? 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악신이 강하게 남아서 그런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악신이 locality, 국지성을 갖고 있어요. 여기 보면 늘 사울에게 악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까 했잖아요. 영은, 영의 세계는 내 쪽에서 붙잡을 수 없어요. 그냥 쳐들어오고 침투하게 되면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충동적일 수밖에 없어요. 이거는 악신도 그렇고 반대로 성신도 그래요. 분명히 화가 나야 되는데 이상하게 기뻐. 감사가 일어나. 이것이 내 뜻이 아니거든요. 이리저리 따져보게 되면 화가 나야 돼요.

사람이 화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내가 유일한 존재거든요. 존재인데, 행복하게 사는데, 사는데다가 앞에 뭘 붙이면 돼요. 행복하게 사는데, 기쁘게 사는데, 즐겁게 사는데, 여러 가지 부사를 붙이면 되고. 중요한 것은 내가 살고 싶은 것이 당연한 권한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살아있으니까. 사는데, 행복하게 사는데 이것이 방해가 되게 되면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내가 싫은 죽음에 대해서 불리하게 작용하게 되면 이것은 이런 보이지 않는 관계성에서는 이건 우리가 말릴 수가 없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이 따뜻한 베란다에 홈드레스 입고 앉아서, 다리 꼬지 말라고 했는데 다리 꼬고 있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는데 갑자기 물이 안 나오네. 오전 10시까지 있었던 좋은 분위기. 야, 이걸 고쳐볼까? 아니면 아들이 오면 아들보고 고치라고 할까? 이게 뭐냐 하면은 돈이 안 드는 방향으로 나가겠죠. 아이고, 결국 수리를 해야 되나, 소박한 내 평화가 다 깨져버려요.

그리고 또 집에 있는데, 갑자기 뭐 촌에서 와가지고 감자, 고추, 바리바리 싸가지고, “조카 있나?” 촌수도 나는 모르겠어. 7촌인가 뭐 와가지고. 어디서 본적이 있는데 부재의 인물이 와버리면, 지금 나는 할 일이 많아요. 손에 뭐 김치 담그고 할 게 많은데 갑자기 아지매가 쳐들어 와가지고 뭐 하니까, 갑자기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확 오르죠. 나의 고요한 평화를 다 깨버려요. 그리고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든지. 다리가 이상하든지. 왜 이 고요한 나만의 삶을 왜 깨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용도 때문에 그래요. 용도. 이게 어려운데, 뭐가 어려우냐하면 아까 이야기한 부재, 무,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합시다. 알든 모르든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있음으로 볼 때는 하나님은 부재 내지는 무에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부재고 내가 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악신이 있고 성령이 있고 딱 끝나요. 이게 주가 돼요. 여기에 인칭적 요소를 여기다 딱 결부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반대가 되었어요. it가 돼요. 일종의 기계가 돼요. 내가 흔들면 흔들려야 돼요. 내가 이렇게 폼 잡고 커피를 마셔도 안 돼요. 누구처럼 찾아오면 찾아와야 돼요.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돼요. 그리고 몸이라고 하는, 신체라는 이 기계도, 30대 몸을 유지하고 싶고 20대 미모를 유지하고 싶어. 이게 안 돼요. 어떤 교양이 있고 정말 이화여대 나오고 옛날 60대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아하게 늘 이렇게 고급진 아파트에서 잘 사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 고장이 나서 계단 올라가다가 자빠져서 다리를 하나 절고 있는 거예요. 다른 이웃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거예요. 아, 다리 절고 있다.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한마디씩 하는 거예요. “아이고, 사모님 어디 발 다쳤습니까?” 한 말 또 하고 귀찮아 죽겠어요.

요 근래 제일 잔인한 짓, 현재 이 시국에서 제일 잔인한 짓이 뭐냐 하면은요, 잔인한 짓이. 왼쪽 가슴에다가 노란리본을 다는 거예요. 이미 죽은 지 5년이 넘었으면 이제는 잊어줘야 되는데, 지나 개나 리본들 다 달았어요. 민주당 의원들. 이러니까 유족입장에서는 미치겠는 거예요. 잊어도 될 것을 노란리본을 달아가지고, 구호도 뭐냐 하면은 잊지 않겠습니다, 에요. 이거 미치겠어요. 차라리 나를 감옥에 집어넣어라. 잊지 않기는 뭘 잊지 않아. 노란리본을 달고 말이죠. 좀 잊어줘야 돼요. 교통사고잖아요. 교통사고 그냥 잊어줘야죠. 보상받았으면 끝나는 문제에요. 왜 자꾸 이걸 들 먹이냐 말이죠. 광주 폭동도 마찬가지고. 무슨 이게 민주화입니까? 정치적 발언 큰일 났네. 이건 스톱해야 된다. 계속 들먹여. 위안부, 전쟁할 때 안 당할 그런 위험이 없는 여자가 어디에 있어요? 불교 말대로 다 과거지사입니다. 나무아비타불. 다 과거지사에요.

이거 진리에요. 이거는 진리. 누구 뭐 성질 돋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 바짝 차리자 이 말이죠. 과거지사잖아요. 뭐 일본한테 사과를 받아요.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해요. 그러니까 세상을 볼 때 복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돼요. 복음의 눈으로. 자꾸 정의로울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은 정의로운 게 없어요. 인간이 죽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 이야기 했죠. 뭐라고 했습니까? 죽는 이유가 죄죠. 죄가 생각하는 정의는 뭡니까? 불의죠. 그게. 성경이 그걸 이야기한다고요.

사울입장에서는요, 살기위해서는 다윗을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간단한 거예요. 왜 창을 들고 다윗에게 날리느냐, 니가 있는 한, 기존의, 기존입니다. 기존의 나의 주체성에 심각한 침범이 오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졸지에 비교가 되니까.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니까. 가만히 있다가 디스 됐어요. 가만히 있다가 완전히 욕 얻어먹게 된 거예요. 사울이.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다? 원천이 개입한 거예요. 원천. 진짜 있음. 두 종류의 있음이죠. 하나는 악신이고 하나는 성신이죠. 두 있음으로 인하여 졸지에 인간은 그냥 기계에 불과한 거예요. 혈육적 기계+ 세 분+개 한 마리가 오창으로 이사 가신 거예요. 이쪽 기계로 살다가 저쪽 기계로. 거기에 무슨 바람이 불고 어떤 관계가 찾아올지. 그거는 진짜 있는 성신의 몫이죠. 그리고 때로는 시험 들다가도, 악신보다 누가 더 세냐 하면은 성신이 더 세요. 요한복음 10장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영생을 그들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성도여! 니가 나서지 마. 가만히 있어. 니가 나대지 마. 성경말씀 니가 지키는 것이 아니야. 만약에 영생을 안 빼앗기려고 내가 나대버리면 이거는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의 티를 내버리는 거예요.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오는 이유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기계로 사용하는 거예요. 기계로. 지금 사울이 지옥 갔다고 말을 하시면 안 돼요.

사울의 지옥, 천국이 어디서 결정되느냐 하면은 신약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엘리야가 천국 갔다. 이거는 신약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십자가로 결정되는 것이지, 지금 잠시 악신 받았다고 지옥 간다고 그렇게 단정 지으면 안 됩니다. 지옥이나 천국은 최종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중간적 의미가 아니에요. 다만 구약에 있는 이 등장인물들은 쓰여 지는 거예요. 하나의 연기자, 배우들이에요. 배우들. 배우라고 해서 지옥에 안 가는 것도 아니에요.

출애굽기 15장을 한번 봅시다. 오늘 첫째 강의가 좀 어려워요. 우리의 발상을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지 말고, 저쪽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 초점을 맞춥시다. 26절을 보겠습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제 강의 들었으니까 강의 듣고 이 본문을 딱 보시면, 이야기하신 분은 저쪽이고, 부재 내지는 무. 부재하신 분이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냥 기계라는 생각을 가지고 보셔야 돼요. 이게. 이 말은 내가 지키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키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주신 언약을 현실화시키는데 니가 동원됐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물이 없는데 물을 내시는 거예요.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험한 곳, 물이 없다고 앞에서 원망을 했거든요. 원망을 먼저 나오게 하셔가지고, 원망한다는 말은 나의 있음, 아까 말씀드린 것을 복습하면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행복하게 있어야 돼. 악신이 와서 그렇게 하죠. 그리고 나는 안 죽어야 돼. 남은 죽더라도 나는 안 죽어야 돼. 그런데 물이 없어. 이거는 옛날 내가 살던 기존의 방식에 대해서, 그 옛날 좋았던 나의삶이 보장이 안 되니까 자연적으로 원망이 나오겠죠. 충동적으로 나오겠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망했음을 분명히 밝혀내시고, 그러니까 뭐가 있음이에요? 하나님의 있음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내 있음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가는 목적이 나 좋아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부재하지만 현존하고 있어요. 부재로 보이지만 현존하고 있음을, 여기 계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뭘 주느냐, 실컷 원망하게 해놓고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그럼 엘림은 어떤 곳이다? 치료가 된 곳이다. 그러니까 치료가 됐다는 말은 우리는 치료 대상이다, 아니다? 치료대상이다. 치료대상이라는 말은 우리는 정상이다, 아니다? 정상인이 아닌 거예요. 우리는 멀쩡한 인간이 아니에요. 우리의 기계를 멀쩡하지 않게 만들었어요.

근데 그 엘림 같으면 치료하죠. 아픈 사람이 없어야 되겠죠. 더구나 엘림 교회 같으면 어떻습니까? 아픈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되죠. 근데 역 앞에 있는 엘림 교회 목사부터 해가지고 다섯 명이 신종코로나 확진 받았어요. 교회 역 앞에 있는 교회 이름이 엘림 교회에요. 그 교회 갑자기 유명해졌어요. 엘림이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거예요. 이미 치료 후에요. 치료 후에. 따라서 이미 치료받은 우리는 그 다음부터 뭘 끄집어냅니까? 왜 혈육적인 관계가 다가 아닌지, 왜 일가친척이 다가 아닌지, 왜 주께서는 새로운 패밀리, 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을 맺도록 해야 하는지, 그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를 기계로 사용하여.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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