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끝과 중심

아빠와 함께 2020. 7. 10. 21:07

대전-60강 사무엘상18장17-절(끝과 중심)20200630-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8장 1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17절,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두 사람이 등장하죠. 사울 등장하고 그 다음에 다윗 등장하죠. 사울은 그 위치가 왕입니다. 왕은 절대적 기준을 세우는 거죠. 다윗은 무조건 추종해야 되고. 절대적 기준은 법칙을 세우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신하기 때문에 여기에 추종해야 됩니다. 그러면 사울 왕이 이렇게 절대적 기준을 세울 때,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 기준이 정상적인가?’ 하는 겁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정상적이죠. 그런데 왕이니까 왕이 정상적이라면 그걸 순종하는 다윗 레벨에서도 정상적이어야 하는데 성경에서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아까 방금 보셨잖아요,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겠다.” 경품을 건 겁니다. ‘이번 조건에 네가 블레셋을 이기게 되면 너는 내 맏딸과 결혼해서 내 사위가 된다.’ 라고 경품을 걸었고 그 뒤에 17절에 보면 그렇게 한 이유가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다윗을 제거하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사울 왕의 자기 기준이 정상적이라면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정당성, 자기가 정당하다고 여긴다면 그걸 순종한 다윗을 제거할 이유가 없죠. 왜? 자기 정당함이 계속 이어지게 되면 나라 전체의 정당함이 이어지기 때문에 자기 기준에 맞는 사람을 제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기준을 정해놓고 규칙을 세우고 다윗으로 하여금 강제로 그 규칙을 따르게 하는 것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왕이면서도, 왕은 최고 자리에 있죠, 왕이 최고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 부하를 제거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사울이 추진하는 노선과 다윗이 가는 그 노선이 같다는 뜻이에요, 같지 않다는 뜻입니까? 같지 않다는 거죠. 그러면 같지 않다는 말은 한쪽이 정상적이면 어느 한쪽은 비정상적이 되죠. 한쪽이 정당하면 한쪽은 불의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상 18장 17절에 나왔다는 말은,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자기 기준, 자기 원칙이 있다고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게 신앙생활 아니에요. ‘나 인생 이렇게 살겠어.’ 그걸 자기 가치관 또는 인생관 또는 세상관이라고 해요. ‘나는 한평생 이렇게 살아왔어.’ 자기 보기에는 상당히 정당하죠. 자기 보기에는 정당한데 그 정당성은 사울 왕이 내세우는 정당성과 똑같아요.

사울은 다윗을 라이벌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이벌이 오기 전에, 다윗이 오기 전에 사울은 본인이 살아온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난번에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반면에 사울은 골리앗을 못 이겼습니다. 이기고 난 뒤에 그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라면 다윗은 만만, 10배에요. 인기가 10배란 말이에요. 이미 인기가 사울에서 다윗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가 위기를 느끼는가? 사울이 위기를 느끼죠. 사울이 위기를 느낀다는 말은 사울의 왕의 통치성에 위기를 느끼고 그것이 정상적이냐를 물을 필요도 없이 이것은 불의한 게 되고 그 정당성은 옳지 않은 게 돼요. 나쁜 것, 비정당성이 되죠, 비정상적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에 다윗을 등장시킨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뭐냐 하면 사울 스스로 절대적인 왕으로서 ‘옳다고 여겼던 그것이 옳지 않다’를 알려주기 위해서 다윗을 등장시킨 거예요.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게 되면 내가 살아온 인생은 항상 내가 보기에는 정당하고 옳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냐 정당하지 않냐하는 것은, 내가 불의하고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노출시키고 고발할 수 있는 기준이 등장해야 돼요.

그 기준이 등장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환상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자기 환상. 스스로 자기를 격려하거든요. 자기 임의로 빠지고.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이런 구호죠. ‘예수님은 내 편이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 편이다. 그게 옳습니까? 예수님은 누구 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아들 있고 딸 있고 아빠, 엄마 있다면 아빠, 엄마한테 애들이 서로 싸우다가 묻죠. “아빠는 내 편이에요, 동생 편이에요?” 묻죠. 그걸 왜 묻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에요. 자식이 다윗이라면, 다윗 쪽에 있다면 사울 쪽에 있는 것은 아빠, 엄마가 점유하고 있죠, 차지하고 있어요. 아빠가 절대적 기준이고 엄마가 절대적 기준이라면 그 기준에 따르게 되면, 그 정당성에 대해서 내가 그대로 추종하게 되면 나도 정당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동생이 없고 애가 하나밖에 없다면 아빠, 엄마한테 “나 어때?”, “너 옳아.” 그러면 그게 옳은 거예요. 그런데 그걸 듣고 있던 동생이 “아빠, 엄마 나는 어때?” 이렇게 물으면 어떻습니까? “너도 옳아.”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아빠, 엄마 입장에서 가정이 편안하기 위해서 둘 다 옳다고 하고 싶지만 막상 형제들 사이에서는, 남매 사이에서는 갈등을 일으켰죠. 여기서 두 개의 옳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둘 다 옳을 것 같으면 싸울 리가 없잖아요. 싸웠다는 말은 한쪽은 옳고 한쪽은 틀리다는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거기서 정답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냐 하면 ‘모든 인간은 본인 보기에는 옳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다’를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이거 크게 쓰겠어요. 이건 첫 번째 나오는 아주 중요한 거니까요. 시편에도 많이 나오고 구약에도 많이 나오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했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다”.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하는 자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예수님을 살해했다고요.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은 내 편이니까 내 결정은 곧 누구의 결정이다? 하나님의 결정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나한테 모든 것을 인수인계했기 때문에 우리가 결정한 것은 신의 뜻이니까 우리의 결정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했으니까 예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는 이단 되는 거예요.

자,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사울이었던 사람이죠. 사울이 전부터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며 철저하게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이 교리, 이 신학을 추앙했어요.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파생되는 것이 여러 가지 있겠죠. 하나님은 우리 교회 편이다. 하나님은 내 가정 편이다. 하나님께서는 내 회사 편이다. 하나님은 내 학교 편이다. 하나님은 우리 고장, 우리 지역 편이다. 여기서 파생되면 여러 가지 파생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 편이다’가 곧 나와 관련된 이런 것이 나온다 이 말이죠.

신약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메섹에 갈 때 누가 찾아왔습니까?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자들에 의해 살해된 자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죽었기 때문에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없어요, 없어졌어요. 시체가 되었으니까 없어졌잖아요. 없는데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에게 누가 찾아왔습니까? 이미 죽은 자라고 확정된 예수님이 찾아와서 만났죠. 같이 만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만날 때 사울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정당한 판결을 내려서 사형당한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단이다. 따라서 이단 믿는 사람들을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사울은 권한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서 다메섹, 다마스커스에 갔죠. 그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죠.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하면 이단이에요, 이단의 괴수입니다. 이단의 괴수.

대부분의 사람이 틀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수가 진리에 더 approach할 수가 있어요. 소수라 하는 것은, 작은 숫자가 동의한다는 것은 그만큼 진리 될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뜻이거든요, 일반 상식에서.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께서 두 개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영생 가는 길, 하나는 멸망의 길, 두 길을 제시하면서 영생으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이라고 설명되어 있던가요? 찾는 사람이 적은 길이에요. 소수가 가는 길이 영생 길이고, 그것은 별로 놀랍지 않아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다수가 동의하는 길이 멸망 길, 지옥 가는 길이라는 거예요. 다수가 동의하는 길이.

이 말은 뭐냐 하면 네 결정을 다시 분석해봐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서 과연 옳은지를 해체시켜봐라. 해체시킬 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사울이 만났던 예수님의 의견이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울은 왕이니까 절대적인 기준을 내세울 수 있는 권한이 있죠. 그러면 이 사울이 누구를 자꾸 의식해요? 다윗을 의식하죠. 사울은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우기는 자는 블레셋 나라의 골리앗을 못 무너뜨렸고 오히려 다윗이 키가 3m가 넘는 골리앗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말로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말을 누가 못해요? 예배당 앞에다가 ‘하나님은 우리 편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런 플랭카드를 그 뭐 돈 한 2만원만 주면 갖다 붙이는 거잖아요, 간판집에다가. 그걸 누가 못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우리한테 이걸 묻는 거예요. “평생 살아온 네가 옳게 살았는지 아니면 네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지, 본인이 그러고 싶어서 나는 옳다고 여기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여러분들은 갖고 있습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어떤 절대적인 기준.

“내가 옳다고 하면 옳은 거야”하는 네 소리 말고. 너의 주장 말고. 일단 너의 주장은 제껴놓고 다른 기준을 동원시켜서 과연 네가 평생 살아온 것은 옳았다고 결정지을 수 있는 기준을, 집사님 갖고 있습니까? 있어요? 있습니까? 어디 뭐 교회목사가 “아이고 집사님, 구원받았습니다.” 뭐 교회목사 말 들을라고? 목사는요, ‘자기 교회는 하나님 편이다’ 이거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럼 아는 친한 사람이 “아이고 집사님, 아무리 봐도 신자같애.” 그거는 내 친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친구이기 때문에 좋은 소리를 해줘가지고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사울이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는 나쁜 짓을 했지만 너무나 다행스러운 것은 사울은 중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만나면서 예수님한테 한소리 듣죠. 네가 하는 짓은 나를 핍박하는 짓이다. 너는 지금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야. 나를 대상으로 하는 거야. 나에 대한 공격이야.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이다. 네가 핍박하는 것은 나이다. 나는 엄연히 살아 있잖아. 너는 죽었다고 생각했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어. 나 살아있어. 봐. 살아있으니까 너 만나러 왔잖아. 그런데 너는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들만 평생 상대해왔어.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기준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상식, 다수의 생각, 그게 전부였어. 네가 한번이라도 예수님의 생각이 어떤지 생각해본 적 있냐? 이렇게 꾸중을 받고 꾸중을 받는 동시에 사울은 그렇게 불가능하다는 구원을 받은 거예요,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절차가 반드시 필요합니까? 내가 옳은가를 다시 한 번 지적받을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만나는 것. 그게 바로 구원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믿으면 구원되겠지. 그것은 벌써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것이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마다할 리가 없잖아요.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예, 우리교회는 진짜 교회 같아요. 복음을 아는 교회 같습니다. 그 소리를 누가 못해요? 다 하나님, 예수님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자기 마음 편하려고 하는 소리인데 그것은 우리 자체에서 기각시켜야 돼요.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내가 나를 편드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옥이라는 것이 있을 필요가 없죠. 모든 인간이 다 가는 곳이 천국이라면 구태여 지옥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옥이 있다는 것은 구분 짓겠다는 거죠. 지옥 갈 자가 따로 있고 천국 갈 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갈 자는 뭐냐 하면 죽기 전에 내가 과연 옳게 살았는가를 절대적 기준에 의해서 판정을 내릴 그런 판정과 만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사울은 예수님을 만났는데, 나중에 바울 돼요. 사도바울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났는데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만나야 되는가? 꿈에 예수님 나타나야 되는가? 아니면 예수님 나타나라고 하늘나라로 전화하든지 끔찍하게 기도하든지 금식하든지 교회 충성을 하든지 뭐 그런 유난스러운 짓을 해야 예수님께서 뭐 처량해서 한번 봐줄게 그런 식으로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 이게 굉장히 처음으로 나온 어려운 건데요.

인간이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만나는 것이냐면, 한번 적을게요. ‘기존의 윤리도덕체계에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로 등장할 때’ 예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기존의 윤리체계에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사태, 새로운 사건 또는 새로운 생각이 들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기존의 윤리도덕체계가 누구 잘났다고 형성된 거예요?

집 안에 아빠, 엄마, 자식들 이렇게 4명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생각이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왜? 사람은 자기의 과거가 다 다르기 때문에. 과거의 체험에서 그 다음에 뭐가 형성되느냐 하면 기억이 형성되고 그 기억의 뭉치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identity, 자기 현재 정체성, 쉽게 말해서 이걸 자아, 더 간단히 말해서 ‘나’에요. ‘나’라는 것은 쪼개보면 과거에 내가 체험했던 가운데서 나만이 의미 있게 모아놓는 기억의 뭉치, 기억의 다발, 그게 나에요.

그러니까 아빠, 엄마, 아들, 딸 전부다 살아온 것은 한 집에 살아왔지만 전부다 기억이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어릴 때 봤던 충격, 쇼크 같은 거 다 달라요. 우리 형님은 어릴 때 잡채 먹고 체한 적이 있어요. 그 다음부턴 잡채를 안 먹어요. 그러니 같은 형제인 저 같으면 이상해요. 그 맛있는 잡채를 왜 안 먹어? 그러나 형은 지금까지 잡채를 안 먹어요. 그리고 어떤 20대는 친구들이 담배를 권하는데 담배 대하는 순간 역겨움이 있어가지고 그 역겨운 기억 때문에 담배 꼴도 보기 싫어요. 냄새도 못 맡아요.

서로 DNA가 다르니까 서로 다른 환경과 다른 성격을 갖고 있으니까 자아가 다 달라요. 네 식구, 다섯 식구, 열 식구 있다고 해서 자아가 같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게 같지 않아요. 같으려고 전부다 정치적인 협상을 하죠, 가정에서. 양보하고 그냥 봐주죠. 그러나 보이지 않는 타협이 있다니까요, 타협이.

각자 다 달라요, 모든 인간은. 늘 협상의 여지가 있어요, 가족끼리. 부부라는 것은 뭐냐 하면 마음이 하나로 사는 게 아니고 맞춰주는 거예요. 협상을 하는 거예요, 정치적 협상. 내가 얼마 양보할 테니까 네가 얼마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이정도 양보하니까 얼마 내놓을래? 두 분도 협상 많이 하죠?

그러니 이것은 결국 윤리도덕체제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이렇게 보면 돼요, ‘자기 정당성’. 성경에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면 세 자로 ‘자기 의’(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을 돌파하려고, 천국 가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의, 자기 정당성. 자기 윤리체제 안에서 항상 자기는 어떤 사람이냐? 옳은 사람이에요. 항상 자기는 옳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식구 네 식구 있으면 원, 투, 쓰리, 포 전부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전부다. 자기 정당성. 그러면 애들하고 의견이 잘 안 맞으면 이걸 가지고 애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세대 차이라고 하는 거예요. 세대 차이라고 하는 것은 친구들끼리 구성된 자기 윤리도덕체계가 기성세대는 안 맞고 자기 세대는 맞다는 겁니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홍상수감독의 영화제목에도 나오죠.

그러면 자기 정당성 가지고 그 다음에 뭘 하느냐? ‘자기 영향력 확대’입니다. 영향력을 확대시켜요, 사회에 나가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나의 소유’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나왔습니다. 교회 나와서 설교 듣는 둥 마는 둥 설교시간에 자다가 기도시간에 기도하라면 또 기도합니다. 자, 어떤 사람이 기도를 왜 합니까?

이걸 그대로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는 것은 효과가 있어야 된다. 왜?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자가 아니고 성실한 자이기 때문에 내 기도를 안 들어주면 누구 기도를 들어주겠어? 성실하고 착실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게 공들여서 살아오고 나쁜 짓은 피하고 착한 일만 골라했고 내가 보기에 내가 남한테 해코지 한 적 없으니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당하다. 정당한 기도는 하나님도 정당하기 때문에 정당한 백성의 기도는 정당한 하나님이 들어줄 때 하나님은 모순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럼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면 되지, 기도는 왜 합니까? 그 다음에 나오죠. 자기 영향력 확대, 자기 세력화. 그러니까 자기 정당성은 자기 세력화. 여기에 적용되는 것은 “날 무시하지 마라. 나 이정도야.”이거죠. 이걸 가지고 그 개인이 왕(王)의 성격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네 식구 있으면 네 식구 하나하나 다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자기가 왕이 되는 거예요. 최고가 되는 거예요. 왕이 뭡니까? 자기 영향력 확대하는 거예요. 문 열고 엄마가 뭐 만지려고 하면 “엄마 엄마, 그거 만지지 마.”, “왜? 이거 양말 또 벗어놓고.”, “만지지 마. 내가 또 신고 나갈거야.” 이거 뭡니까? 자기는 이 양말을 신고 나가기로 이미 자기가 결정했어요. 자기 스스로 결정을 했다고요. 자기 영향력을 확대한 거예요. 그러면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면 그 양말을 신고 친구를 만나고 누구를 만날 때 타인을 만나잖아요. 남을 만나면 사회에서 남을 만난다는 것은 뭡니까? 타인을 뭐로 만드는 거예요? 뭐로 만듭니까?

①번-자기 정당성, ②번-자기 영향력 확대, 그 다음에 뭡니까? ③번-나의 소유물로 만들죠. 나의 소유물을 가지고 ‘나’라고 하는 거예요. 나에요. 모든 인간의 존재는 자기가 애써서 긁어모은 것들의 집대성, 그것을 ‘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들 차사면요, 남들이 와서 내 몸 만지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몸 안 만지고 자기 자동차를 만지면 뭐로 보는 거예요? 자신의 연장, 확장이에요. 왜 나를 때립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 차 때렸는데, 왜 나를 때립니까. 여자들도 마찬가지죠. 뭐 명품가방 만지게 되면 내 가방 왜 만집니까? 전부다 자기 영향력이죠.

자, 가장이 있다. 그러면 자식이 세 명이 있다. 자식한테 욕하면 누구한테 욕하는 거예요? 나한테 욕하는 거죠. 왜? 자식은 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이게 바로 사울이에요. 평생을 자기 정당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절대적인 것, 그러니까 너, 나 관계없이 초월적으로 절대적인 것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각자 지 주먹 흔들고 지 팔 흔들면 세상은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타인을 만나죠. 여기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면 동창생을 만난다면, A가 B를 만난다면 그냥 오지 않잖아요. 여기에 자기 소유물을 끌고 들어가죠. 물론 실제로 끌고 오는 게 아니고 보이는 ‘나’는 전면에 나타나는 거고 뒤에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친구가 살아온 모든 것이 모여서 각자 자기 자랑하죠. 카페에 앉아가지고. 지 자식자랑하고 부동산 자랑하고.

그런데 왜 만나느냐? 만나지 말지 왜 만나느냐? 이 중에서 일부 까만 것(타인의 소유물)을 가지고 말 잘해서 나의 파란 것(나의 소유물)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왜 만나느냐? 상대의 파란 것을 가지고 일부 자기 것으로 가져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좋은 게 좋다는 게 그런 뜻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평생을 살아도 ‘나 잘났다’하는 그 원칙에 맞추어서 그 다음에 도덕과 윤리 체계가 나름대로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거예요? 있다는 거예요. 이게 있으니까 그 다음에 여기에 대해서 전부다 판단을 하는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식, 교육 모든 분야, 국제관계, 이 모든 분야에서 어떤 평을 할 때 “나 저 사람 좋아. 저 국회의원 좋아” 이것은 무엇이 가동되겠어요, 평할 때마다? 나의 윤리와 나의 도덕체제가 가동되고 나의 윤리도덕체제의 배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상이야. 비정상이 결코 아니다.”가 가동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은 넓은 길 다시 말해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 또 진도 나갑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은 사울이죠. 사울은 뭐였다? 왕. 왕은 스스로 자기를 절대자라고 하고 절대자 의식을 갖고 있다. 이게 바로 오늘날 현대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사울처럼 왕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 복습해봅시다. 사울은 결국 자기 윤리도덕체계 있죠? 도덕체계는 아까 뭐로 도로 돌아간다고 합니까? 나는 잘났죠? 나는 잘났는데 만약에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이 등장했다고 봅시다. 다윗. 받아들이겠어요, 배타시하겠습니까? 배척하겠죠, 배척.

그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의 잘남을 기어이, 필사적으로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한 사람을 배척했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을 배척했죠, 모든 인간이.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유대인들이 배척할 때 유대인들의 구호는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이야기했는데 구호는? 하나님은 내 편이다. 내 편이라는 것이 파생되면 하나님은 내 가정 편이다, 내 직장편이다, 나는 내 편이다. 이런 게 전부다 파생된다 했죠.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그 구호, 그 명분, 그 주장. 그걸로 인하여 누가 죽었다고요? 예수님이 배척받은 거예요. 그래서 당한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

사울에게는 이것이 뭐로 오느냐 하면 새로움으로 오는 거예요, 새로움으로. 어떤 점이 새로우냐 하면 내가 아무리 도를 닦고 내가 아무리 절에 가서 공부를 하고 또 신학대학가서 공부를 많이 해도 근원적으로 나는 다른 이들과 똑같다는 생각.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유난떨죠. 나만 독보적인데 따지고 보면 나나 남이나 세상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똑같죠.

모든 것은 모방하면서 살아가니까. 모델이 어디 있겠어요? 모델은 기존에 있는 것에서 뽑아서 모델 삼는 것 아닙니까? 궁금한 게 있어요. 이 집 지으실 때 모델을 뭐로 봤습니까? 이 집 지을 때 모델. 북유럽형? 뭐 생각한 거 있었어요? 뭐든 모델이 있을 거예요, 그쵸? 인간은 기껏 생각을 해봐야 기존의 팜플렛에 나오는 모델에서 그냥 골라잡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나는 개인적으로 잘났어. 잘났지만 그러면 너무 건방지고 나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은 오십보 백보 똑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생각이죠. 바로 그 똑같은 생각이 결국은 누구를 제거했습니까? 예수님을 제거한 거예요. 예수님만이 똑같지 않은 분이에요. 왜? 모든 사람은 죽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써 나오는 진리는 뭐냐? ‘사람은 하나님 편이 아니다’ 이게 바로 ‘나’에요. 하나님은 절대로 내 편이 아닌 거예요. 복음 전하고 목사 됐다고 해서 절대로 하나님께서 안도와줍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니까. 하나님은 우리교회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자식 편이 아니고 내 가정 편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예수님 편입니다. 왜? 예수님만 부활했기 때문에. 따라서 이제 정리하게 되면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그렇고 그런 인간들만 만나요. 그리고 만날 때 항상 내가 이거 주면 너 뭐 줄래 거래하고 흥정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평생을 보내요. 참 스트레스 받을 일이죠. 왜냐하면 내 소유물이 뺏기면 안되니까. 내가 손해나는 장사하면 안되니까. 이게 늘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그래서 나보다 좀 잘난 사람 있으면 배척하기도 하지만 면전에서는 배척 안하죠. 아부를 해서 얻을 거 얻고 더 얻을 거 없으면 배척해버리죠. 사람은 얻을 것 없으면 그 다음부터는 친구도 아닙니다. 쓸모없는 것은 친구도 아니죠. 빼먹을 게 있을 때만 친구거든요.

이렇게 살아와서 나를 구축했는데 이 ‘나’가 주님 가신 천국에 가려면 누가 마중을 나와줘야 돼요. 예수님이 오셔야 돼요. 예수님이 마중을 나오셔야 되는데 그 예수님이 우리와 맞닥뜨릴 때 그동안 ‘내가 구축했던 나’가 아니라 ‘예수님관점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를 나의 관점으로 교체가 되어야 돼요, 교체가. 그 교체되는 작업 중에 하나가 사무엘상 17절부터 30절까지 에요. 그 내용이 교체되는 과정이에요.

어떻게 교체되느냐 하면 계속해서 이 사울이 다윗을 못 죽여서 환장했어요. 죽이기 위해서 규칙을 자꾸 바꿔버립니다. 너 이래도 안죽어? 이래도 안죽어? 이렇게 되죠. 심지어 18장 25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포피는 남자의 생식기 끝을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을 죽여 놓고 완전히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된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칼을 들고 남자의 생식기, 남자의 힘의 원천이죠, 그걸 잘라가지고 한 개 가졌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옛날 60된 사람은 다 알죠. 국민학교 때 쥐잡기 하면서 쥐꼬리 가져오라고 하잖아요. 쥐 한 마리 잡고 난 뒤에 꼬리를 잘라서 가져오듯이 사람 죽여 놓고 고추 끝을 잘라서 가져오라는 상당히 망측한 규칙을 내세웁니다.

아까 처음에 제가 강의할 때 규칙을 누가 세운다? 왕이 세우죠. 왕이 세울 때 그 규칙은 무엇을 제거하기 위한 규칙이었습니까? 다윗. 왜 다윗을 제거해야 되죠? 이미 백성들이 사울보다 누가 더 정당하기 때문에? 다윗이 더 정당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싸움이라는 것은, 스트레스 받는 것은, 나보다 네가 왜 더 정당하냐? 나보다 네가 왜 복을 더 받아? ‘질투심’이죠.

나는 너보다 착한데 왜 너는 나보다 더 잘살아? 나는 너보다 더 선하게 살았는데 왜 나는 아프고 너는 왜 건강해? 몸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고 몸 아픈 동시에 타인에 대한 분노와 질투심을 갖고 있다는 게 정신적으로 더 문제죠. 몸 아픈 것은 뭐 아프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정신병환자처럼 남 탓하고 있는 인간들은 고치기 힘들어요.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남이 죽어야 내가 살거든요. 남이 죽어야 내가 살아요, 이 세상은. 더불어 사는 건 없어요. 더불어 살면 짜증나서 안돼요. 남이 죽어야 내가 산다니까요, 남이 죽어야. 남이 이혼해야 내 가정에 화색이 돕니다. 누가 제일 이혼 1번 타자로 할 것인가 프로그램도 있잖아요, 개그맨들 나와 가지고. 누가 1호가 될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뭔가 하면 다윗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지금 사울은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했죠.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같은 말이거든요. 이게 좀 어려워요. 이게 어떻게 어려우냐 하면 다윗도 다윗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여러분이 생각하는데 다윗은 인생관이 없어요. 다윗은 세상관도 없습니다. 자기 윤리도덕관도 없어요. 뭐냐 하면 ‘시킨대로 산다’.

사울이 악한 거 맞죠? 악한데 악이 만든 규칙 다시 말해서 나를 죽이기 위해 만든 규칙에 대해서 다윗이 여기에 순응해버립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면 ‘진리는 앞에 오류가 등장해야 된다’는 겁니다. 진리 앞에 오류가 등장해야 진리가 등장해요. 오류가 없으면 진리가 등장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너끈히 십자가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유대인들에 의해서 살해를 당한 이유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줌으로써 그들은 뭐로 등장하느냐 하면 오류로 등장하는 거예요. 잘못으로 등장해요, 죄로 등장하는 거예요. 주님 자신의 주장은 없어요. 너희들이 나한테 마음껏 나쁜 짓을 제발 하라는 거예요. 네가 나쁜 짓을 함으로써 비로소 너희들의 본질이 나로 인하여 노출되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성품 좋게 살고 싶어요. 인품 좋다는 소리 듣고 싶어요. 그러나 그래가지고는 자기 자신을 몰라요. 자꾸 감추기만 해요.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나를 근원적으로 미치게 만드는, 조금만 넘어가면 완전히 미쳐 버리는 그런 일. 옛날에 내가 꾸준히 남한테 과시용으로써 내가 구성해 놓은 점잔빼는 거, 착실한 거, 이런 모든 점잔빼고 착실하고 뭐 훌륭하고 인품 좋다는 소리가 한꺼번에 다 달아날만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박세리가 골프에서 US오픈할 때 마지막에 우승했잖아요. 그 때 나오는 양희은이 불렀던 노래 있죠? <끝내 이기리라>. 끝내 지켜왔던 거 있잖아요, 나의 선함을. 끝내 지켜왔던 게 한꺼번에 완전히 박살나는 순간. 갑자기 다른 차가 내 차 박았다든지 이런 거. 갑자기 자식이 내 뜻대로 안된다든지. 내가 딱 생각한 게 있는데 핀트가 나간다든지. 내가 구축한 모든 쌓아놓은 모든 구축이, 밑바닥의 카드가 빠짐으로써 와르르 무너지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 끝을 보는 거예요, 세상 끝. 세상 끝은 곧 나의 끝이죠, 나의 끝. 정말 여기서 더 나가면 나 자살한다 할 정도로. 나의 수고했던 모든 것을 아무짝도 소용없이 다 망쳐버리는 사태. 그 사태에서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독밖에 안 나와요. 평생을 교회 다니고 새벽기도하고 십일조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선교헌금내고 집사, 장로까지 다 하고 온갖 것 다한 그건 뭔가 하면 교회에서 노닥거린 거예요. 교회놀이에요, 교회놀이. 그저 취미생활 한 거예요. 친목단체 취미생활 한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진짜 구원받으려면 이 교회를 50년 다녔는데 50년 다닌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이, 헛짓했다는 것이 한꺼번에 확 다가와야 돼요. 성경 1000독하고 뭐 시키는 대로 하고 수련회 참석하고 모든 것이 다 헛짓이다. 성경공부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나는 세상 끝자락에, 낭떠러지에 섰는데. 내가 죽든지 아니면 여기서 내가 미쳐버리든지 둘 중 하나에요. 내가 정신이 나가든지 아니면 내가 자살하든지 둘 밖에 없는 그 사태에 직면할 때, 그 때 ‘내가 나의 목적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 현실세계에서 나 좋으라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아는 거예요.

양희은 말 나왔으니까 양희은 노래 하나 알려 드릴께요. 이런 가사가 있어요.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너는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속에서 이들을 데려갈까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노래에 나오죠. 그 후렴에 나와요.

아름다운 것들
양희은

꽃 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하나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함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음 이들을 데려갈까

외국노래 번안한 건데요, 세상의 끝이 실은 세상의 중심이었다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끝과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내 중심이 세상 끝이었고, 정말 내가 그동안 주님한테 끌려오니까, 내 중심을 주님 중심 앞에서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내가 구축한 나의 잘남과 의로움과 착함과 성실함도 이게 바로 나를 지옥가게 만든다는 거예요. 나로 넓은 길로 가게 만들었어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죠. 교인들이 다 그렇게 가니까. 세상 목사가 다 그렇게 하니까. 성경대로 살면 구원받습니다. 다 이런 소리하니까 그게 옳은 줄 알았지. 그게 틀렸다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하나님은 내 편인 줄 알았어요.

구원받는 나를 포기해야 되는데.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계획에 없는 겁니다. 그것은 목사가 사기를 친 거예요. 모든 교회가 사기를 친 거예요. 내 구원은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이미 죽어 마땅한 것을 천당 넣으면 그 더러운 성질이 천당 가면 좋겠다. 천당 개판 되지요. 이런 위선자들을. 인간은 모두 얼마나 위선자에요? 남을 속이지만 본인은 속일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면 선해요. 그 말은 돈 없으면 선한자도 악한 자 된다는 뜻이에요. 이 땅에서 선하다는 말은 여유 있다는 뜻이거든요. 사람이 급해보세요. 무슨 여유가 있고 무슨 양보가 있습니까? 범죄자보고 개 같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막상 그런 환경 속에 살아왔고 자기 수중에 돈 없어보세요. 어쩔 수 없이 죄 지을 수밖에 없죠.

절망이 왔을 때 나오는 것은 뭐냐? ‘새로움’.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시키는 대로 다 해요. 메랍도 하고 또 미갈이 좋아하니까 딸 미갈 줄게 하니까 시키는 대로 하고. 어떻게든 30절까지 계속해서 다윗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블레셋 손으로 죽이는 그 규칙을 왕이 내립니다, 사울 왕이 내려요. 왜? 그래야 자기가 정당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기의 왕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다윗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거예요. 자칫하면 이거 암 걸립니다. 진짜 귀신 뭐 하노, 저 인간 안 잡아가고. 이런 거 있잖아요. 귀신 뭐하노. 사울은 스트레스 받는데 다윗은 사울 왕이 그런 조치하는 것도 주께서 나로 하여금 세상 끝, 세상 끝이 중심이니까, 세상 끝까지, 내가 내 힘으로 살 이유 없음을 알려주는 데까지 끌고 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다시 할게요. 내가 나로 살 이유 없다. 그럼 누구 때문에 삽니까? 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냥 다루어지는 거죠, 지금껏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니까 다루어지는 것이지 나 천당 가기 위해서 하나님 동원하고 예수님 동원한다는 것은 이것은 마귀 짓이거든요. 이것은 아직도 자기 이익, 자기 정당성, 자기 잘남, 남한테 자랑하고 싶은 거리 만들기 위해서 계속 그런 것을 내가 주워 모은 거예요. 자아에는 뭐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나의 소유물들의 집합체잖아요. 나의 소유물들의 집합체. 그러니까 그거 다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 거예요.

사람이 왜 자살 하는 줄 알아요? 살고 싶어서. 몸은 죽어도 내 자존심은 살고 싶어서, 자아는 살고 싶어서 자살해요. 지금 다윗은 자살 안합니다. 자살할 필요 없어요. 왜? 자기 것이 없기 때문에. 골리앗을 누가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지 본인이 한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본인이 골리앗 상대하는데, 그것도 다윗은 소년이었어요,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못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내세울 것 없는 나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는 무슨 관계냐? 새로움의 관계죠. 모든 인간은 지 잘난 맛인데 다윗은 자기 잘난 맛 안하잖아요. 이 새로운 관계된 사람을 가지고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천국 가는 사람은 장차 올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처럼 본인도 본인이 세상 살면서 자기도 예상 못한 새로움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나가면 전부다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나도 안 꿀리려고 내 자랑거리 들고 나오는데, 그러나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내 자랑거리가 오히려 예수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이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못나도 괜찮다는데 자꾸 잘나고 싶어 하는 내 자신이 주님 앞에 정말 못난 놈이라는 것을 자인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 일들이.

그것이 바로 주께서는 내가 없어지는 끝까지 데려가는데 거기에 보면 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낚싯대로 “이리 와. 내가 여기 있어.”하고 계속해서 좁은 길로 인도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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