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56강 사무엘상18장1절(생명관계)20200225-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8장 1절에서 4절입니다. 제가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1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2절,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3절,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절,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여기 보게 되면 몇 사람, 인물들이 나옵니다. 우선 다윗이 나오고 그 다음에 요나단이 나오고 그 다음에 사울 왕이 나오고. 사울 왕. 일단 이 세 사람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럼 다윗에게는 다윗 자기의 자리가 있고, 요나단 자기의 자리가 있고, 사울 왕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포지션이 있죠. 자리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자리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골리앗이라는 자리가 같이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요나단을 만나기 전에 골리앗을 먼저 만났습니다. 골리앗을 만나지 않은 다윗, 그거 뭐 의미가 없죠. 골리앗을 거치고 온 다윗, 골리앗을 거치고 온 다윗과 그냥 다윗에 대해서 사울왕은 전혀 달리 보고 요나단도 달리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골리앗과 다윗의 자리를 주선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은, 누가 주선하셨는가 하면은 하나님께서 주선을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먼저 골리앗을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그 이스라엘이 그 골리앗 앞에 전혀 대항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과 사울 왕이 골리앗을 당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윗이 거기에 나타났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타났어요. 그럼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보시면 되죠. 하나님이 주선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주선, 하나님이 골리앗과 다윗을 주선을 하실 때에 골리앗을 먼저 등장시키고, ①번 골리앗을 먼저 등장시킴. ②번 사울 및 이스라엘을 골리앗 앞에 등장시킴.
이렇게 등장시킴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선을 함으로써 여기서 누가 승자가 되느냐 하면은 골리앗이 사울 및 이스라엘에 대해서 승리자가 되게 하는 겁니다. 골리앗이 승리했다는 말은,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든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때에, 그냥 이스라엘을 하나님하고 직접 주선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골리앗을 넣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주선에 의해서 구원에 실패자가 되는 겁니다. 구원받는데 실패자가 돼요.
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구원받고자 시도해도 일단 어디에 가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구원에 실패하는 자리에 가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구원에. 구원에 실패한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이스라엘의 본색이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본질에 부합되는 자리가 구원에 실패한 자리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늘 혜택을 입는다고 생각하죠. 자,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틀렸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우선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자체로 구원에 성공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들이 처한 상황이 구원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명백하게 그걸 인식하고 있어야 돼요.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은 맥도 못 추고 있습니다. 감당 못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파멸시키러온 적의 장군이죠. 블레셋나라 자체가. 자기들을 공격하고 파멸시키는 나라 앞에서 구원이 되려면 자기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골리앗을 극복해 내야죠. 근데 이 극복이 안 된다는 말은 구원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는 그런 형편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되죠. 명백하게 이스라엘과 사울은 골리앗 앞에서 맥을 못 췄다는 것은,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잠시 신약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신약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죄 때문이다,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다시 구약 골리앗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면 본인들이 죄인이라는 뜻이거든요. 골리앗을 하나님께서 주선하셔서 이스라엘 앞에 감당 못할 괴물을 등장시킨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사울로 하여금 자신은 죄 안에 갇혀있다, 자기 힘으로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치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그거는 큰 오산이 되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자리라고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사울이든 요나단이든 다윗이든 자기 자리를 자기가 보존하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유지되기를 바라고 잘되기를 바라겠죠. 그러나 사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자기 입장, 자기 형편을 생각하지 못하고, 뭐가 죄냐, 제가 이걸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지우고. 인간에게 있어서 죄라는 것은, 죄란? 예상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죄라는 것은 미리 예상하는 거예요.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자기에 대해서는 알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예상을 해서 보다 더 진보되고 보다 더 나아지고, 자기가 가질 만한 자기 자리를 유지하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다.
쉽게 말해서 예상한다는 이유가 가지려고 하고 그 다음에 유지하려고 하고 그 다음에 얻으려고 하고, 이런 것을 전부다 생각해서 뭔가 기대를 하고 예상을 하는데. 제가 아까 강의 초반에 이야기한 것처럼 사울왕의 죄는 바로 자기 자리부터 먼저 생각한다는 거예요. 자기 자리를 먼저 생각하고 이것을 유지하고, 이것을 가지고 더 얻으려고 예상하게 되죠. 죄가 뭐냐, 지금 우리가 하는 본문이 골리앗과 다윗이야기에요. 골리앗과 다윗. 지금 사무엘상 18장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서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딱 먼저 줘요. 골리앗을. 덩치 큰 골리앗. 키가 3미터가 넘는 거대한 거인. 골리앗이 먼저 있어요.
골리앗을 누가 마련했는가, 하나님께서 주선해서 이스라엘과 사울왕과 골리앗을 맞닥뜨리게 만들었어요. 싸우게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이 사울 왕은 골리앗을 이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기지를 못해요. 너무 덩치가 커서. 저쪽에는 힘이 장사고 이쪽은 왜소한데 이길 수가 있어요? 못 이기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못 이기게 함으로써 무엇을 계속 인식시키느냐 하면은 이스라엘과 사울 왕에게 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규정하려고 하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죄라는 것은 자기가 이기지 못하는 어떤 덩치 큰 괴물 앞에서 자기가 무능력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죄를 더욱더 죄 되게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어떤 난관이 오지 않는다면, 자 인간들은 뭐냐 하면 자기가 앞으로 예상을 해서, 잘되는 쪽으로 미리 예상해서 가지려고 하고 유지하려고 하고 더 얻으려고 할 거다 이 말이죠. 내가 누군지는 생각 안 하고 내 것을 더욱 키우려고 예상을 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뭐냐 예상한다는 이게 죄다 이 말입니다. 예상한다는 게. 인간은 자꾸 예상하는 거예요. 자꾸 기대하는 거예요. 예상한다는 것은 미래에 관한 문제거든요. 미래에 대한 문제를 예상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내가 그 미래에 괜찮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권리나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자기를 안 다치려고 하는 거예요.
자, 죄란 뭐다? 무조건 나를 안 다치려고 하는 거예요. 다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골리앗 앞에서 사울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이건 다쳐도 와장창 다쳐야 돼요. 망가져야 된다 이 말이죠. 지금 강의하면서 다윗이야기는 뺐어요. 다윗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골리앗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항상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나부터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길 수 없는 골리앗부터 먼저 하나님께 내 앞에 두셨다. 그것부터 생각해야 돼요. 골리앗 앞에. 천국 가고 싶다고요? 마귀부터 시작해야 돼요. 악마가 버티고 있는데 우리가 천국을 갈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악마를 이길 수가 없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그게 뭐냐 다윗 빠지고 골리앗부터 먼저 설정해놓고, 골리앗과 이스라엘과 사울과 만나는 장소부터 먼저 하나님께서 설정을 해놓으신 거예요. 난감하죠. 난감해야 돼요. 소위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본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본인을 모르니까 구원받겠다고 하겠죠. 본인이 어떤 입장인지 모르니까 구원받겠다고 하는 거예요. 구원받겠다는 그 의욕 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가, 잘 들으셔야 돼요. 구원받겠다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가 구원의 주인공이 바로 본인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사울이 죄가 되는 이유가 다윗이 없는 상태에서 골리앗을 이기지 못하는 처지가 본인이라는 것을, 본인이 인정하지 아니하면 사울은 죄가 되는 거예요. 그걸 달리 이야기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사울이 죄의 집단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골리앗을 주신 거예요. 골리앗이 딱 와버리니까 자기들은 전혀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한 거예요. 그것을 약간의 철학적인 용어지만 저는 그걸 이렇게 쓰겠습니다. “실증” 실증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실증주의라고 하거든요. 실제적인 증거.
뭔가 범인이 살인현장이나 범죄현장에서 남기고 간 그 증거물, 실증물이 있어야 수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하지 말고 실제적인 증거를 대라고 할 때 그 실증, 실제로 있는 증거. 그걸 저는 실증이라고 지금 표현을 했는데요, 성경은, 그냥 무턱대고 구원받고자 하면 안돼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구원의 실증요소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실증이 무슨 실증이냐, 우리 앞에 골리앗이 있다는 것이 실증이에요. 그리고 우리 앞에 마귀가 있다는 것이 실증이에요. 그리고 그 앞에 왜소한 우리가 있다는 게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무슨 증거? 구원이 안 된다는 증거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겠다고 우기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누구 구원이냐 하면은 이게 나의 구원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이 아니고 누구 구원이냐 하면은 예수님 구원이에요. 대학에 가면 응원팀이 있죠. 연대 고대 축구팀 농구팀에 치어리더들이 나와서 자기 팀에게 힘을 북돋우기 위해서 여자응원단들은 짧은 치마 입고 남자들은 건전하게 입고 활발하게 몸짓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 치어리더들이 나와서 응원할 때 응원의 하이라이트가 뭐냐 하면은 힘센 남자들이 만들어서 여자를 공중으로 던지고 그 던져진 여자 응원단장이 다시 내려와서 안전하게 받는 그 대목이 하이라이트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로켓만 쏘아 올리듯이, 치어리더를 공중에 높이 올리듯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주님의 구원을 높이 올리는 그게 구원이에요. 내가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니까요. 남자 응원단들과 여자 응원단들이 한 팀을 구성하거든요. 그러면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여자 팀원이 공중에 올라갔다가 묘기를 발휘해서 다시 안착하는 것처럼, 주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 주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그 상황을 연출하는 그게 구원이에요. 우리는 주님만 구원입니다, 라고 올려 보내는, 밑에서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 구원이라 이 말이죠. 내가 구원에 나서는 이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사울 앞에 배치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나 사울 왕의 구원은 애초부터 없다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사울 왕이나 이스라엘의 구원은 없어요. 무엇이 구원이냐 하면은, 골리앗은 물론 구원이 안 되죠. 골리앗 구원 아니고 사울과 이스라엘도 구원 아니에요. 이렇게 배치해놓고, 그리고 자기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분명히 실증적으로, 실증했죠. 실증. 실제 증거로, 현실로 보여줬고. 그 다음에 여기에 없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은 다윗을 등장시켜버려요. 다윗. 다윗을 등장시킨다고요.
그러면 이 사무엘상 17장, 18장에서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은 다윗의 구원이에요.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원해준다는 것은, 그건 나중 결과의 문제고요. 지금 초점이 뭐냐, 주목되어야 할 것이 뭐냐 하면은 다윗이 구원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윗은 이스라엘과 사울 왕 쪽에서는 다윗은 없는 존재에요. 왜? 어린애니까. 애들은 가라! 어른들 싸움에 애들은 끼지 마라! 이런 쪽이다 이 말이죠. 이런 쪽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이거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하는 말이, 골리앗 앞에 나가니까 다 말리겠죠. 그럴 때 다윗이 하는 말이 있어요. “이 전쟁은 인간들이 하는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손에 붙였다. 이래 되어 있어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구원은 제가 무슨 구원이라고 했습니까? 인간들의 구원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죠. 이것을 사무엘상 17장 45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구원이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주가 되고 신약에서는 그 주님이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교회에 다니면서 그 시작점부터 이게 교체가 되어야 합니다. 시작점이 내가 구원받고 내가 천당 가는 것이 시작점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만이 왜 구원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출발점을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려면 누구는 그 자리에서 꺼져야 되느냐 하면은, 사라져야 하느냐 하면은, 내 구원을 시도하는 생각이 우리에겐 급하죠. 인간이 살아온 것이 자기 위주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을 통해서 막아버리는 거예요. “어디 구원을 넘봐! 니가 골리앗을 이길 수 있어?”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게.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죄가 뭐냐? 미리 예상하는 거예요. 내가 예상하는 거예요. 왜 예상하는가? 내 것 유지하고 내 것 갖고 싶고 내 것 얻고 싶고. 이러한 속성 때문에 우리는 자꾸 기대하게 되고 예상하게 돼요. 그게 바로 뭘 가로막는가? 사울이 구원받고자 하는 것하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죄는 뭐냐 하면은 없는 다윗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기부터 출발하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부터. ‘아이고, 저 골리앗 어떻게 이기지? 내가 그래도 명색이 이스라엘 왕인데. 왕의 본때를 보여야 될 텐데. 어떻게 하나님도 야속하지. 나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골리앗 같은 괴물을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우리는 절망이야!’
이미 절망했다는 말은 기대를 했다는 말이고 예상을 했다는 말이고 예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됐다는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막으신 거예요.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것을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증적으로 그걸 막으신 겁니다. 그 실증적인 것이 골리앗이 되고, 그리고 신약에 오게 되면 십자가가 되는 거잖아요. 십자가.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버림받아야 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 십자가사건입니다. 실증적인 거예요. 교회 가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실증이 아니고 상상하는 겁니다. 우리는 맨날 상상하고 예상하고 기대하는 그것밖에 없죠.
실제적인 증거는 십자가로 막혀있는데, 우리는 막힌 것을 생각 안 하고, 실증적으로 막혀 있는데 막힌 것은 생각 안 하고, 자꾸 내가 천국 가서 희희낙락 영생을 누리고 생명나무에서 헤엄치는 것만 지금 상상하고, 혼자 착각하고, 어디 명상에 잠겨있는 거예요. 그래놓고 은혜 받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말하죠. 남을 패고 때리고 살인하는 것이 죄라고요. 아니에요. 사람이 왜 남을 패고 때리고 살인하겠습니까? 자기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고, 그 노림수를 미리 예상하고 미리 뜻한바가 있는데 그게 장애가 되니까 그걸 패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저 사람을 팰 수 있고 죽일 수도 있지만, 어느 인간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습니까? 골리앗을 못 이기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잘난 쪽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뻔히 아시고 가는 곳마다 골리앗을 배치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골리앗은 팰 수가 없어요. 골리앗은 죽일 수가 없어요. 지가 죽어요. 자기가 얻어맞는다고요. 그러면 이 골리앗은 신약시대에 뭡니까? 악마죠. 나와 악마를 먼저 배치해버려요. 하나님께서. 나와 악마를 먼저 배치해버려서 내가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내가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될 수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거는 마귀가 뒤에서 가짜로 만든 구원이기 때문에. 나의 구원은 구원이 아니거든요. 예수님의 구원만이 구원이에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신약 성도가 구원받는 것은 구원된 자 예수 안에서만 구원돼요. 나 있고 예수님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 안에서만 구원이 된다고요. 근데 그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놓친 분입니다. 놓치고 떠밀었던 분이에요. 함께 있기 싫다고 내친 분이에요. 그러니 인간이 무슨 구원이 돼요? 구원이 안 될뿐더러 구원 자체가 악마적인 의도라는 것을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밝히 보여주신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계속 구원이야기 하는데, 복 받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복 받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죄인 줄 몰라요. 근데 복 받고 싶은데 골리앗이 등장했다, 괴물이 등장했다, 마귀가 등장했다, 이거 뭐 실패죠.
복을 받겠다고 예상하죠. 미리 기대하죠. 왜? 내 것 유지하고, 그거 키우고, 더 얻기 위해서, 보존하기 위해서. 그 전체가 바로 죄잖아요. 그 전체가. 꼭 남을 해쳐야 죄가 아니라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죄가 되는 이유가 자꾸 예상하기 때문에,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앞에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고마워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형편을 알고. 내가 하나님께 복 받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께 구원받겠다는 이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는, 터무니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한 문장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인간들의 낭패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게 인간들의 낭패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들의 낭패입니다. 제가 지금 강의하면서 아직 다윗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사울과 골리앗부터 했습니다. 다윗은 없습니다. 다윗은 없는 존재에요. 근데 여기에, 골리앗 먼저 있고, 순서가 ①번 골리앗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②번 이스라엘, 사울 있고. ①번, ②번을 하나님께서 설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느냐? 어떤 식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가? 절망이죠. 골리앗은 아주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야! 일대일로 붙자. 비겁하게 하지 말고 남자답게 일대일로 붙자.” 완전히 이스라엘은 주눅 들었어요. “졸았냐? 너희 완전히 졸았지? 하나님 믿는다며? 믿으면 솜씨 한번 발휘해봐!” 이스라엘은 뭐 끽소리 못하죠. 진즉에 못해야 해요. 진즉에. 하나님은 어디에 나타나는가, 바로 제 3의 인물 소년 다윗으로 나타나요. 소년 다윗. 소년 다윗으로 나타나거든요.
그러면 이미 여기서는 사울과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구원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이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여러분들이 생각 안 할까 싶어서 자꾸 염려가 되는데,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자, 골리앗 없는 이스라엘과 골리앗 있는 이스라엘과 차이점을 생각하라 이 말입니다. 골리앗을 누가 배정했는가, 하나님께서 배정하셨어요. 흔히 교인들은 말하잖아요. 흔히 교인들이 “목사님. 예수 믿으려고 하는데 자꾸 이렇게 집안이 어수선하고 난관이 있네요.”라고 하는데, 그 난관과 어수선한 것을 누가 그렇게 철저하게 타이밍 맞춰서 배정을 했어요? “뭐 교회 한번 오려고 하니까 기침 나는 것 같고 머리 아프고 그리고 마스크 쓰려고 하니까 짜증이 나고 코로나 걸릴까봐 못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에,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근데 교회를 나올 때에 사람들은 그냥 안 나오죠. 예상을 한다고요. 기대를 해요. 뭔가 예상하고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해서 예상하고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생각을 꿈에도 생각 못하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도 뭐 신천지, 신종코로나 이야기를 하니까, 제가 짧게 지나가는 말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요. 뭐냐 하면은 “죽은 자에 대해서 관심두지 마시고”라는 말을 했어요. 분명히. 녹취 보면 나옵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이 말이죠. 신천지가 어떠니, 다른 사람이 몇 명 죽었니, 지금 몇 명 퍼졌니, 이미 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들이에요. 죽은 자들을 신경 쓰지 마라 말이죠.
근데 왜 죽은 자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느냐 하면은 자기는 안 죽으려고 기대하고 예상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래도 예상하는 게 죄가 아닙니까? 이래도 기대한 게 죄 아니에요? 남들은 죽어도 본인은 살라고 한다 이 말이죠. 어디 그런 법이 있습니까? 실증적인 증거를 저한테 한번 제시해보시죠. 남은 지옥가도 지는 천당 가야 될 어떤 증거 한번 대보시죠. 실증적인 증거, 실제적인 증거를 한번 대보시죠. 증거 있습니까? 없잖아요. 왜 그렇게 우깁니까?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버스 탈 때 사람들 모일 때 마스크 쓰죠. 마스크를 쓰는 게 좋죠.
하지만 마스크 쓰면서, 마스크 벗으면서, 마스크 쓰는 게 죄라는 말이 아니고. 쓰면서 벗으면서 뭔가 예상을 한다는 그게 죄라니까요. ‘내가 마스크 쓰면 수명이 좀 더 연장이 될까.’ 이게 예상한다는 게 죄다 이 말이죠. 그 예상하는 순간 우리는 뭐냐 하면은 마치 내 힘으로 난관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도하는 거예요. 이 현실을 비실증적으로 오도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마음 같으면 진짜 신종코로나 없는 저 멀리 독일로 도망가고 싶어요. 해봤자 받아주지도 않지만. 체포해가지고 back home! 너희 나라 가라고 하겠지만. 자꾸 피하려고만, 피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 몸 살리려고 애쓴다고, 구원받는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라 이 말이죠.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어요. 하나님의 구원은 무슨 구원이냐,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다른 구원은 없어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 대목에서 골리앗과 사울사이에서 누가 구원이냐, 다윗만 구원돼요. 없는 자가 구원돼요. 이 말은 구원은 애초부터 없는데 들어갔다가 빠지면서 구원이 된다 이 말이죠. 없던 구원이 반짝 나타나면서 반짝 없어지는 거예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무엘상 18장에서 요나단이 확 다윗을 붙잡는 거예요. 확 붙잡는 거예요. 요나단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때부터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고 했어요. 18장 1절 끝에 보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래서 3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두 번이나 나오죠. 생명같이 사랑해서 그 다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아, 이거 어렵습니다. 이 대목을 이제부터 해야 되겠죠. 4절에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라는 말은 불멸성적인, 다윗과 자기와의 관계를 불멸적인 관계로 조인join하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입던 갑옷을 벗어서, 내 건데 내 게 없어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어떤 예상이나 기대는 내 손에서 어디로 옮겨가느냐 하면은 다윗에게로 옮겨간 거예요.
다윗의 예상이 나의 예상이 되고, 다윗의 기대가 나의 기대가 되고, 다윗의 미래가 나의 미래가 되고, 다윗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 되도록, 생명으로 조인하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요나단의 태도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오기 전에, 자 강의 처음으로 가겠습니다. 강의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했죠. 다윗의 자리, 요나단의 자리, 사울의 자리, ‘자리’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죠. 처음에. 했다면 했다고 이야기하세요. 그때 분명히 요나단의 자리가 있었어요. 사람에게 본인의 자리가 있으면 본인은 뭐하냐면 기대하고 예상합니다. 어떻게? 다윗이 없는 상태에서 저 골리앗이 우리 이스라엘에게 지기를 바랐죠.
그런데 지기는커녕 감당도 못하는데요? 요나단이 이스라엘 속에 일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패배는 요나단의 패배가 되는 거예요. 요나단이 골리앗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우리 처지가 어떤 처지인 것을 요나단이 알게 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기대와 예상 자체가, 이게 골리앗 앞에 막히게 되면 이거는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이게 죄구나! 이걸 인정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없던 존재, 소년 다윗이 등장해가지고 골리앗을 이겨버리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줬죠. 그렇다면 요나단 본인의 자리는 날아가 버린 거예요.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할게요. 노아가 홍수 전에 자기 부동산이 있을 게 아닙니까? 자기 주택도 있고 자기 부동산도 있고 자기 화장실도 있고 자기 작업 터도 있고 자기 업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주 지으라는 언약이 왔을 때에 자기가 갖고 있던 부동산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의미가 없죠. 물로 다 덮어버리는데. 노아의 본인 자리가 없어졌어요. 노아 언약에 의해서. 언약은 그런 거예요.
언약이 오게 되면 어떻게 살려보겠다고 아니고 내 자리가 없어지니까 내 기대와 예상도 더 이상 내가 신경 안 쓰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뭐 있어야 생각을 하지. 내 게 없는데 무슨 생각을 해요? 내 미래가 어디에 있어요? 내가 죽었는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내 안에 언약이 피어난다는 뜻이에요. 내 안에 언약이 자라난다 이 말이죠.
그럼 언약이라는 말이 너무 어려워요? 어렵다 치고, 그걸 바꾸겠어요. 언약이라는 말을 하지 말고 관계. 누구와의 관계, 이 관계, 연결고리, 연결이 더 중요하죠. 내 존재보다, 내 자리보다 나는 누구와 묶여 있는 끈, 그 끈이 더 중요한 거예요. 끈이. 만약에 우리가 나의 자리와 나의 영역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쉬지도 않고 예상하고 기대하고 또 소유하려고 하고 또 이미 가진 것을 유지하려고 하고 또 더 얻으려고 하고. 그거만 계속 시도하는 거예요. 사람이 예상을 하게 되면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만이 나와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예상했는데 얘걔 이거 밖에 안 줍니까? 나를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습니까?” 이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골리앗이 없는 사울 같은 자세입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여기 18장 6절을 한번 볼까요?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절에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라고 되어 있죠. 이것을 잠시 이렇게 한번 바꿔봅시다. “요나단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할 때에, 요나단이 화를 냈겠습니까? 아니면 동의했겠습니까? 어떻게 했겠습니까? 생중계하니까 답변이 없네요. 실제로 할 때는 잘하시는데.
다시 이야기할 테니 답변해보세요. 이게 사울이 아니고 요나단을 집어넣으면, 요나단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할 때에 요나단이 화를 냈겠어요? 안 냈겠어요? 화를 안 냈겠죠. 그럼 또 다른 사람을 집어넣어봅시다. 세례 요한을 집어넣어봅시다. 세례 요한은 천천이고 예수님은 만만이라고 할 때에, 세례 요한이 화를 냈겠어요? 안 냈겠어요? 안 냈겠죠. 왜? 나는 쇠하여 되고 주님은 흥해야 되니까. 그리 되겠죠. 아, 이게 바로 관계가 중요한 거예요. 관계가. 지금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에요. 지금 나는 누구와 끈으로 엮여져 있는 거예요. 주님은 엮인 것을 중요시하지 나를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엮인 것이 중요해요.
근데 인간들은 내가 중요해요? 주님이 중요해요? 인간들은 주님보다 내가 더 중요한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아담의 족속은 다 그래요. 그런데 고맙게도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골리앗을 뒀다 이 말이죠. 골리앗을. 자, 아까 제가 골리앗을 뒀다는 말을 신약에는 뭘 뒀다고 이야기했던가요? 구약에서는 골리앗을 뒀다면 신약에서는 악마를 뒀잖아요. 악마를 둔 거예요. 마귀를 뒀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힘에 막혀서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이 안 돼요. 왜? 마귀는 우리보다도 세니까.
그래서 이걸 관계라는 말도 하지만 이렇게 하겠습니다. 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언약의 나로 바꿔요. 언약의 나. 노아를 언약의 노아로 바꾸듯이. 나를 언약이라는 관계를 위한 나로. 전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 예수님을 찾다가 이제는 언약을 위해서 내가 얽히게 된 나. 그러니까 시작점은 나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나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냥 다윗과 요나단처럼, 나에게 찾아왔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까가 아니라 다윗이 요나단 나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 찬스를 놓칠 이유가 없죠.
그냥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입던 그 갑옷, 이 갑옷은 나를 위한 갑옷인데 그걸 벗어서 누구한테 주느냐, 다윗에게 줘서 불멸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나중에 죽어요. 죽고 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미 자기의 모든 등기, 권한, 생명은 다윗에게 넘어가버렸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한번 물어봅시다. 다윗에게 진 것이 누굽니까? 골리앗 맞죠. 문제는 골리앗이 맞는 게 아니고 누가 졌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진 거예요.
사무엘상 17장 51절에 보면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며 그 칼로 그를 죽이고”라고 되어 있죠. 이걸 오늘날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주여, 내 모가지 잘라주세요.”에요. 주님이 다윗이거든요. 주님은 다윗언약을 따라오셨으니까. “주님이여, 주님이 내가 나를 보호하려고 갖고 있었던 무기를 가지고 도리어 빼앗아서 그 무기로 악마를 치고 뭘 치고 할 것 없이 아예 나의 목을 쳐버려 주옵소서.”라고 요청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다 이 말입니다. 이게. 뭐 목을 쳐야 예상도 기대도 안 할 게 아니겠습니까? 아예 내 목이 없는데요. 내 목이 달아났는데요.
죽은 골리앗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평소에 우리의 정신구조와 감정, 우리의 사상, 나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던 오야붕이었습니다. 대장이었습니다. 그 골리앗이. 마귀죠. 그 마귀가. 그 마귀는 맨날 우리보고 니 구원받아야 되지 않겠나, 천당 가야 되지 않겠나, 이런 식으로 해놓고는 실제적으로는 자기의 시녀로 자기의 종으로 삼았던 거예요. 우리를 노예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죄 이외에는 나올 게 없어요. 죄만 나오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시켰으니까.
“그저 나 구원받고 싶어요. 나 천당 가고 싶어요. 우리 애까지 구원받고 싶어요.” 맨날 내 구원이 없는데도 자꾸, 내 구원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조건 나는 구원받고 싶다는 거예요. “지금 이게 나의 본심이고 본능이고, 어쩔 수 없습니다.” 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이 말이죠. 다윗이 와서 골리앗의 목을 칠 때 우리의 목도 쳐달라고 소년 다윗에게 부탁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그 부탁을 들어주기 전에 먼저 우리의 목을 치죠.
첫째 시간을 이렇게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 천국이라고 봅시다. 천국 있고, 이 땅에서 빠져나와서, 출구죠. 이 땅에서 빠져나와서 천국 간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렇게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출구로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입구로 들어가게 해요. 입구. 내가 생각하는 구원받는 그 길이 이 땅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입구에 들어가야 돼요. 우리는 출구를 원하는데, 주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신 이유는 주님이 다녀가신 이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에다가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입구로 들어간다고요.
그 입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함, 우리는 구원이 없는 게 마땅함, 그렇게 만들어놓고 거기에 가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내 소원 내 기대가 아니라 주님의 찾아오심에 의해서, 다윗의 찾아오심에 의해서 이런 두께, 악마의 두께를 뚫은 이 자리, 입구의 자리에서만 출구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출구가 아니고, 이 땅이 지옥이라는 입구로, 입구에서 그 다음에 출구로 나가는 거예요. 이 출구로 나갈 때 내 힘으로 갈 수가 없죠. 주님께서 데리고 나간다는 사실. 이미 여기에 올 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어요. 죽어서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관계, 언약적인 관계라는 겁니다. 그 처신을 요나단이 한 거예요.
여기 18장 1절과 3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했다고 했습니까? 자기 생명으로 사랑했다는 거예요.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뜻은 내 생명은 나한테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내 생명이 어디에 가있습니까? 내 생명이 다윗에게 가있는 거예요. 이런 마음가짐은, 이미 자기가 골리앗한테 못 이긴다, 신약에는 마귀한테 못 이긴다, 우리는 질 수밖에 없음을, 여기에 완전히 철저하게 고개 끄덕이면서 동의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실증적으로 마귀한테 못 이기는 이유가 뭐냐, 눈만 뜨면 우리는 예상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고, 또 나 하나 건사하려고 하고, 내 것 지키려고 하고, 뭔가 공격 들어오면 내 방어에 나서고. 이기지도 못하면서 방어하고, 방어 안 되면 내빼고. 코로나 이참에 미국 갈까, 미국 가지도 못해요. 다 막아놨어요. 배타도 한국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제주도도 못 오게 만들었어요. 타이밍 놓쳤어요. 맨날 우리는 도망치기 바쁘고, 내 한 몸만 마스크 쓰면 그만이고.
맨날 하는 것이,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 평생 계속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저주받은 이 세상의 제일 밑바닥에 그냥 놓여있음을 확인해주는 거죠. 내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늘 알고, 아예 내 구원 없고 주님의 구원만 있는 거예요. 이걸 신약 요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이에요. 내 구원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원, 집단구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백성들만 구원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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