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떠난 복음

아빠와 함께 2020. 6. 1. 12:45

대전-121강 마태복음27장1-8절(떠난 복음)20200526-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절,

1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절, 결박하고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얼른 보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되어 있죠.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걸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떠날게.” 주님이 일을 마무리하고 떠나려고 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그냥 곱게 떠나시면 되는데, 사람하고 결별하는 방식으로 떠나는 겁니다. 사람하고 결별하는 방식으로. 사람과 같은 사람인데, 사람에게서 영원히 결별할 때 잠시 결별하는 것이 아니고 이 영원한 결별. 영원함을, 한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결별이 되는 그러한 조건을 만들고 떠나는 거예요. 영원히 결별하는 것, 영원히 헤어지는 조건을 만들면서 떠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다 이루었다.”에요. 다 이루었다. 하나님하고 인간하고는 영원한 결별이다. 그걸 분명히 했음을, 그게 분명함을 알리시고 떠나버리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 인간세계에서 쫓아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너희들의 본심이 드러났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는데 그 하나님은 인간과 결별이 안 된 하나님을 믿은 거예요. 인간들은. 얼마든지 우리가 빌고 기도하고 떼쓰면 주께서 응답을 들어주고,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고 하는, 그런 하나님을 믿은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가 상종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간들 쪽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어도 그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이 본인을 모르는 거예요. 영원히 알 수가 없는 어떤 갇혀있는 그러한 힘에 그들이 놓여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떠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마주보지 않겠다. 마주본다는 것은 얼굴과 얼굴을 보잖아요. 뒤돌아보게 되면 마주보지 않는 겁니다. 보통 사랑하고 이별할 때는 등을 돌리고 서로 이쪽은 이쪽 방향으로 저쪽은 저쪽방향으로 가죠. 그런데 한쪽에서 미련이 있으면 자기는 그냥 서있어요. 계속 서있고 한쪽만 떠나죠. 갔는가 싶어서 돌아보면 또 그 자리에, 갔는가 싶어서 보게 되면 또 그 자리에. 그럴 것 같으면 옛날에는 여자가 옷고름을 입에 물어요. 훌쩍이면서 가라고 손짓을 하죠. 가라! 가!

서울 객지로 자식을 떠나보내는 엄마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죠. 자식은 찬바람 부니까 엄마보고 들어가라고 하는데 안 들어가고 있으니까 빨리 들어가라고 하죠. 그거는 아주 떠날 사이가 아니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이죠. 그러나 아주 떠날 때는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떠나는 겁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떠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각각 지향하는, 추구하는 삶의 방향의 달라요. 속성이 달라요. 성격이 다르잖아요. 각자 방향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서로 이질적인 두 개의 삶의 방식이 함께 있었고 때가 되매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떼놓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각자의 방향이니까, 각자의 삶의 방식, 이걸 어려운 말로, 영어로는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하는데, 우리말로하면 정체, 나의 정체, 또는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야? 나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의 정체성. 각자 삶의 방식은 나의 정체성을 따로 갖는 거예요. 이 정체성을 어떻게 내가 아느냐 하면은, 이거부터 좀 어려운데, 정체성은 투쟁과 전쟁 그리고 씨름, 싸움, 이걸 통해서 정체성이 확립이 돼요. 그냥 있어버리면 이 정체성은 확립이 안 되고 좋은 것 다 끌어당겨요.

우리 멀리 있는 우리 외손녀하고 영상통화를 하거든요. 하는데, 니 뭐 좋아해? 아민이 뭐 좋아해? 라고 하면 이걸 좋아한대요. 치마. 치마 말고 또 뭐 좋아해? 하면, 공주목걸이. 치마, 공주목걸이.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들이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인간들이 있다면 처음에는 이걸 좋아해요. 처음에 세 살, 다섯 살, 그 다음에는 열 살, 나중에는 스무 살, 그림으로 그리면 나이테처럼 커지죠. 점점 더 이것이 이 세상 것을 원하면 동그라미 제일 바깥의 원이 있겠죠. 그게 뭐냐 하면은 현재 원하고 있는 자기의 원하는 것, 그게 현재 자기의 정체성인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 내 창고에 가득 집어넣어있는 거예요. 20대 같으면 20대에 원하는 것. 20대에 원하는 것은 이미 3살 때 원하는 것하고는 점점 더 멀어졌으니까 이건 더 이상 원하지 않아요. 3살, 5살 때 원하는 것은 스무 살 때 원하지 않죠.

이게 인간의 어떤 정체성이냐 하면은 상상한 정체성이에요. 상상한 정체성.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미리 이야기할까요? 가룟 유다. 가룟 유다에요. 상상한 정체성에, 여기에 예수님이 떠나버린 거예요. 가룟 유다 입장에서는. 뒤에 나와요.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버렸다는 것을 이야기할 거예요. 이 정체성이 계속 가는데, 이 정체성이 갈수록 수월하겠어요? 아니면 힘들겠어요? 이 정체성 유지하는데 수월하겠어요, 힘들겠어요? 매사가 힘들죠. 그러니까 빡빡하다는 말은 세상은 진공이 아니고, 진공상태가 아니고 어떻다? 빡빡한 거예요. 빡빡한. 어느 장소, 어느 모임에 가도 거기에 도사들이 다 있어요. 도사들이. 어떤 취미생활을 하게 되면, 내가 35년이라고 하면 누구야? 주제파악도 못한 거. 이렇게 나와요.

모든 직업, 직장이 다 그래요. 나하고 동기인데 나보다 그 직장에 5년 전에 먼저 왔고 자기는 나중에 왔다고 했을 때에, 자기하고 나하고 정체성이 비슷하다. 니 실력 내 실력이 비슷하다고 했는데 막상 직장에서 맡겨준 어떤 업무를 추진하는데 있어서는 걔는 이미 베테랑이 되어 있어요. 나는 초짜고. 그럼 어떻게 돼요? 갑질 당해야죠. 갑질 당한다는 말은, 내가 을이 된다는 말은 갑에 종속된다는 말이고 내 맘대로 못한다는 뜻이에요. 세상의 어느 구석도 빈자리가 하나도 없어요. 빈자리가. 여러분들이 해외여행가면 경치 좋은데 있죠. 땅주인들이 다 있습니다. 그리스의 좋은 풍경도 중국 사람이 돈 주고 산거고. 파리해변에 있는 것도 파리부호가 미리 사놓은 것. 우리나라의 모든 좋은 지점도 보세요. 전부 다 땅 주인이 다 있어요. 등기 떼보면 등기 다 되어 있어요. 빡빡해요. 그걸 보면서 참, 내 땅 하나 없구나, 탄식이 되겠죠.

가룟 유다의 상상한 정체성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느냐 하면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니까, 그리고 본인이 제자 되게 했습니까? 주께서 뽑았습니까? 스승이 나를 제자로 뽑았다 이 말이죠. 그것도 임원진으로. 회계를 맡겨주었으니까 가장 신임할만한 신실한 사람이에요. 신실한 사람. 모든 지갑을, 세상활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근간이 되는 돈 지불 문제를 가룟 유다에게 맡겼다는 말은, 거기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이 이의가 없었다는 말은 그냥 신실한 거예요. 신실한 거.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자성이 잘 된 사람, 자기 정화를 늘 소홀히 하고 있지 않는 사람. 자기를 항상 점검하고 자기가 잘했나, 못했나를 이렇게 반성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가 어디까지 생각했느냐 하면은 주님이 메시야니까, 메시야라고 이야기했고 또 자기들끼리 믿지도 않았지만 자기 한도 내에서 믿은 거예요. 저분이 메시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다. 믿은 거예요. 믿었으니까 어디 간다고 생각했습니까? 천국 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자기가 가룟 유다인줄 모르고, 그냥 예수 믿고 하면 천당 간다고 생각한 줄 안 거예요. 믿었는데 따라갈 수가 없네. 마주보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전쟁, 투쟁, 씨름, 싸움,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전부 다 가룟 유다밖에 안 돼요. 잠자는 가룟 유다 건드리면 안 돼요. 전부 다 나름 가룟 유다에요. 전부 다. 자기 정체성 밖에 안 돼요. 개마저도 세 살이 되면 세 살만큼 얻는 것이 또 있어요.

자, 이렇게 될 때, 한번 보세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예수님이 너무나 실망스럽게 행동을 했어요. 제자를 버렸습니다. 선택을 해놓고, 본인이 제자를 뽑아놓고 제자를 버리고 홀로 가신 것조차도 섭섭한데, 만약 그냥 떠나는 것이었으면 안 섭섭해요. 죽는 것도 안 섭섭해요. 근데 맥없이 죽었다는 겁니다. 맥없이. 가룟 유다가 화가 난 것은 그 점이에요. 그럼 가룟 유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그만큼 내 정체성에 한자로 뭐냐 하면은 ‘힘’이 비축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예수님이 잡혔다는 것. 이 말은 뭐냐, 잡은 세력보다 힘이 작았음을, 힘이 별 볼일 없었음을,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허풍이었음을 공개적으로 제자들 보는 데서 그걸 노출시킨 것이 돼요.

그럼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아니면 헛발질이었다? 3년 동안 따라다닌 게 지금 헛수고가 된 거예요. 헛수고. 참, 이거는 가룟 유다 입장에서 기가 찰 노릇이에요. 다시 우리는 예수님 입장에 서지 말고 반드시 가룟 유다 입장에 섭니다. 자, 예수님이 체포된 뒤에는 가룟 유다는 스스로 어떻게 됐느냐 하면은, 체포 될 때 가룟 유다가 관여한 거예요. 예수님의 추종세력이 많다는 것을 알고 대제사장들이 정치적으로 처리를 하는데, 정치적 처리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일이 끝나고 난 뒤에, 힘이 하나의 질서로 응집이 되어야 힘이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반란이 있으면 안 돼요. 이 정치하는 데에 있어서의 대적세력이 남아있으면 정치가 힘이 들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마저 건드리게 되면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요. 그쪽 사람들을 내쳐야 되니까 비용이 많이 들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대제사장들 쪽에서는 알고 있어요. 대제사장들도 알고 가룟 유다도 알고 있어요. 체포해서 일이 커지기 전에, 로마의 질서체제가, 로마 쪽에서 화를 내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기어서, 알아서 처리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가룟 유다가 알아서, 외부에서 강하게 치려면 힘이 많이 드는데 내부에 배신자가 생기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안 잡으려고 했는데, 저거는 내부문제로 그들이 자기 스승을 잡아가라고 고발을 하는데 우리는 어쩔 수 없었지 뭐. 우리는 그냥 질서차원에서 체포했지. 우리가 뭐 예수 죽이라고 그렇게 뭐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어.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의 권세가 민중들은 하늘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예수님도 어떤 메시아인가, 메시야일 수 있어, 라는 생각을 반짝 잠시잠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로마에서 해방될 수 있는, 로마의 정치에서 해방될 수 있는 메시야라고 기대를 하고 있는 겁니다. 기대를 하는 사람을 만약에 잡아버리면 졸지에 영웅이 됩니다. 그렇죠. 그런데 예수 그 사람도 집안단속 못해서 이렇게 됐다면, 스스로 무너진 게 되니까 정치적인 그러한 부담을 적게 가지죠. 정치적인 프레스가 적죠.

그래서 가룟 유다가 배신자로 자처해서 나서서 잡아가세요, 라고 할 때에 대제사장들은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적이 된다고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겠어요? 아까도 했지만 자기의 정당성이란 어떤 적이 있을 때 그게 다시 부각이 된다고 했잖아요. 자기정당성. 나의 정의로움이 있을 때 그것은 살 만한 나의 이유가 생기니까. 내가 못난 놈 같으면요, 내가 죽어도 마땅한 것 같으면 남한테 아무소리 못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맥없이 돌아가셨다. 힘없이 돌아가셨다. 이 말은 주님께서 자기의 마지막 뒷모습을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아무 쓸모없다.” 워낙 쓸모 있는 자들이 이 세상을 꽉 쥐고 있기 때문에. “나는 쓸모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끼리 잘해먹어라. 나는 쓸모없지. 그러니까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래, 쓸모없는 인간으로 빠질게.” 그래서 죽이신 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이죠. 그러면 예수님 따라 구원받는다는 것은 결국은 어떤 구멍을 따라, 그냥 이 멀쩡한 이 몸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가면서 이 몸이 어떤 몸이 되어야 해요?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단 조건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은 나의 고향도 아니고 내가 머물 곳도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사람이 아는 거예요.

아는 방법을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를 했죠. 뭘 알 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까? 죄를 알 때, 제가 죽어 마땅함을 알 때,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근데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면 참 여기서 신기한 힘이 나와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어요. 모든 것을. 구애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체면 안 차리고. 저 사람에게 인사하고 웃을 수도 있고. 뭐든지 용서가 되고. 나에게 주어진 어떤 형편, 가정이 파탄이 나는 형편, 가정의 소중한 것을 잃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럼 내가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닐 경우에는 현재 멀쩡하게 있는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선물은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거리가 되죠.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고마움과 감사로 다 다가오는 거예요. 고마움과 감사로. 고맙소~!고마운 거예요. 아이고,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몰랐나봐. 스승님이 그런 분일 줄 몰랐다 그 말이죠. 이렇게 고마운 분인 줄 몰랐다 그 말이죠. 사실은 그 선생님이 그렇게 고마운 분이었어요? 안동예고 음악선생님이지 뭐 있겠어요. 그런데 김호중이라는 사람은 고맙다고 하잖아요. 고맙소! 고맙소! 이 나이 먹도록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이 강하게 임할 때에요. 강하게 임할 때.

근데 원하기는 늘 강하게 임했으면 좋겠는데, 아까 국지성 했죠. 로컬리티locality, 국지성. 국지성을 보면 특정지점이 나타나야 비로소 나타난 것을 알아요. 그게 현존의 특징이 아니겠어요? 현존. 존재가 아니고 현존. 있을 때만 있고 다시 떠나버리죠. 그것은 우리가 주가 아니고 주님이 주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기계고.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을 봅시다. 그래서 주님은 힘이 없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 가룟 유다는, 항상 이것을 보실 때 예수님 쪽에서 보지 말고 예수님을 체포하는 대제사장들 입장에 서야 되고 가룟 유다 입장에 서야 돼요. 안 그러면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어요. 가룟 유다가 만약에 40이라고 합시다. 40까지 오면서 그냥 왔습니까? 힘을 비축했습니까? 힘을 비축했죠.

그러면 40대의 새로운 자기 정체성, 나는 이것이 더 좋아. 전에는 이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냉장고를 바꾸고 싶어. 옛날 냉장고는 짜증나. 이것 보니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백화점에 가거나 하이마트에 가서 가전제품을 사게 되면 주의를 해야 돼요. 분명히 내가 백만 원을 잡고 갔는데, 그 다음부터는 에이 모르겠다. 서비스받자.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는 갑자기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고, 욕심이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욕심이. 아직 우리의 욕심은 다 안 썼어요. 그러다보니까 지금껏 기존에 내가 힘을 모은 것에 상처를 받기 싫어요. 이게 흠집이 나기 싫은 거예요. 얼마나 공을 들였습니까?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조심스럽게.

이 나이 먹도록~ 이 나이 먹도록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아왔습니까? 그래. 그야말로 예수님한테 다 간 거예요. 이제 예수님만 돼버리면 어디 간다? 천국 간다. 마치 대학교 선교단체에서 하는 전도 그림에 이 세상, 속세세상 그려놓고 천국 그려 넣고 그 사이에 십자가 딱 그려놓죠. 십자가 건너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간다고 간편하게 전도하잖아요. 할 때, 이 십자가다리에 올라섰을 때에 얼마나 큰 희망이고, 이 희망은 믿음이라고 간주하겠죠. 믿는 자. 이게 바로 가룟 유다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합니다. 갑자기 동영상에 ‘싫어요.’ 누르죠. 제 동영상에 싫어요, 두 개나 올라왔어요. 구원의 서정 끝에는 지옥에 간다는 그 소리 때문에 그럴 거예요.

모든 교회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따라가지고 지옥 가는 거예요. 구원의 서정에 들어서보면 가수 전영이 돼요. 전영. ‘어디쯤 가고 있을까’ 노래. 어디쯤 가고 있을까? 나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구원의 서정에서 어디쯤 가고 있는지 그거 따지고 있는 거예요. 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요. 이게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몰라요. 속세를 떠나서 이만큼 십자가위에 오기까지, 그동안 자기는 헌금 십일조 주일성수 봉사 얼마나 교회놀이 한다고, 그것도 재미나게 눈만 뜨면 교회에서 살다시피 교회놀이를 했잖아요. 목사님 섬기고. 하여튼 좋다는 보약 먹듯이 좋다는 것은, 복 된다는 것은 다 집어넣어가지고.

그래서 그 증거가 뭐냐, 우리 가정이 이정도면 해도 참 선방했다고 하죠. 가정이 왜 이만큼 됐어요? 그동안 얼마나 교회에 충성, 봉사했기 때문에 복을 줘서 이 아파트도 사고. 샀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지금 선방하신 거예요. 화장실은 드르륵 소리 난다 마는, 그래도 선방하신 거예요. 얼마나 자화자찬,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래! 나는 더 살아야 돼. 왜?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게 가룟 유다에요. 자기 것이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는 것을 용납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은 대제사장들이나 그리고 가룟 유다나 오늘날 우리를 포함해서 전부 다 나의 정체성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무엇의 비축? 힘의 비축. 힘이 있을 때 이 세상에서 정의롭다는 평가를 받아요. 남한테. 이걸 신용도가 높다고 해요. 신용도가 높은 거예요. 인간은 카드다. 카드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신용카드가 있고요. 직불카드, 체크카드, 이번에 선불카드 있고요. 신용카드는 은행에 있는 잔고 그 이상이라도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 게 신용카드. 은행의 잔고보다 초과되더라도 이자 갚을 용하고 더 쓸 수 있는 게 신용카드. 직불카드는 물건은 못 사도 돈만 빼낼 수 있는 것, 돈을 빼낼 수 있되 은행에 들어있는 돈 한도 내에서만 돈을 빼낼 수 있는 게 직불카드. 돈도 빼낼 수 있지만 물건도 살 수 있는 것, 은행에 들어있는 돈 한도 내에서만. 선불카드는 아직 안 들어왔어. 재해기금이. 나중에 돈이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마치 상품권처럼 살 수 있는 카드. 이거 말고 교통카드도 있는데 그건 여기서 다 파생된 거예요.

인간의 모든 카드 안에는 결국 한자로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힘인데, 무슨 힘이냐 하면은 생존의 힘이죠. 누굴 위한 생존의 힘입니까? 나의 생존을 위한 힘. 이걸 가지고 크게 쓸게요. 구약에서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상. 인간은 우상 외에는 다른 신이 없어요. 인간의 신은 다 우상입니다. 예수님은 그 인간과 얼굴을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떠나려고 하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살아라! 우상 섬기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예수라는 우상 섬기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십자가라는 교회 하나 걸고 지옥가라! 그 말이에요. 여호와 외치고 지옥가라 이 말이에요.

내가 나의 정체성을 내가 포기를 못하고 있어요. 왜? 이거는 나의 과거에 비축되고 누적된 의식이고 기억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한번 봅시다. 좀 어려운데요. 지금까지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29절을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오른 눈이 실족케 하거든 빼어버려라. 30절에 오른 손이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뭘 겨냥하느냐 하면은 마치 신체성, 물질성을 이야기하지만, 이걸 듣는 그 누구도 내 팔이 죄 짓는 겁니까? 내 마음이 죄 짓는 거예요? 마음이 죄 짓는 거죠.

이거는 상식이죠. 누구나 알죠. 이 말은 오른팔 자른다고 해서 왼팔로 오른팔이 지었던 죄를 안 지을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지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죽어라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진도가 더 나갑니다. 어떻게 나가느냐 하면은 28절에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왼팔 찍히고 오른팔 찍혀도 주님께서는 이것 보존하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것을 겨냥한 거예요. 왜냐 하면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몸이 지옥의 바이러스로, 신종코로나로, 아니 신종이 아니고 이미 구종인데. 아담의 지옥 바이러스로 완전히 차있어요. 이 신체가.

그러니까 주님께서 고맙게도 이 몸을 아프게 해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구더기에 맡기는,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에는 구더기가 활동해요. 이거 영원히 없앤다고. 그래서 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모세가 몸에 손을 안에 넣으니까 거기서 뭐가 나왔어요? 문둥병, 저주가 나왔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무한입니까? 유한입니까? 무한의 저주가 나온 거예요. 무한의 저주가. 몸은 분명히 유한인데, 유한 안에 무한이 들어있는 줄 모세가 몰랐죠. 내 몸은 기껏해야 40년, 50년, 60년 살았다고 하는데, 60년의 한도가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내가 이 한도 낸 인생 가운데서 무한의 죄가 유한의 신체에 담겨서 우리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봄이 됐다고 하면 봄이 됐다고 좋다고 꽃구경 가죠. 꽃구경 가봐야 그 안에 죄가 같이 꽃구경가고 있는데요? 꽃이 오히려 놀립니다. “이쁘냐? 나 곧 시든다. 니도 똑같아.” 인간의 모든 영광은 꽃의 영광 같아서 잠시 좋았다가 도로 져버리면 얼마나 서글프다고요. 인생도 마치 그와 같은 것처럼. 봄여름가을겨울 모든 계절을 통해서 이미 주께서 시그널을 보내줬잖아요. 인간은 허무하다고요. 안개 같다고요.

그런데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맨날 있음이에요. 있음. 내 있음. 힘을 비축했기 때문에, 그 힘을 비축해놓고 자기는 카드를 긁고 있네요. 인생이. 때로는 신용카드 때로는 직불카드 때로는 체크카드 때로는 외상으로 끊고. 어쩔 땐 신용, 체크, 직불, 선불, 이 카드가 없으면 자살. 이 카드 없으면 자살하는 거예요. 힘이 없으면 자살하는 거예요. 자기 카드가 없으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혈육적 관계성. “형님 좀 도와주소.” 형님 카드 쓰고 있죠. 자기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남한테 의존하는, 남의 힘에 기대는 거예요.

영어로 린lean, 기대다. 제가 ktx 내릴 때마다 내가 늘 그걸 유심히 봐요. 문에 기대지 마세요! 우리는 자기만 죽으면 되는데, 꼭 기대는 거예요. 왜 기대느냐, 자기의 분풀이 화풀이 남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 자꾸 남한테 기대는 겁니다. 또 세상에 기대고. 국가에 기대고. 남 탓이고. 보상 안 해주냐 하고. 신문지상에 뉴스 나오는 것을 보면 저는 늘 지옥을 느끼는 거예요. 지옥을. 정치적 발언을 안 하고 싶은데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하고 죽자,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민식이법. 이거 무슨 이런 법이 다 있어요? 이게. 이런 짓하면 안 돼요. 애가 스쿨존에서 교통사고 나면 특별 처벌하는 거. 이런 짓하면 안 되거든요.

세상이 뭐냐 하면은 지 탓을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애가 그 타이밍에 갔잖아요. 누가 했어요? 보이지 않는 악령이 한 거예요. 그냥.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 지배하지 보이는 인간들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어요. 때가 되매 죽을 때가 있고 살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는 거예요. 많은 예술가들이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예술가들이 천재들이잖아요.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피카소 같은 그런 예술가는 세상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고심을 하면서,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예술가나 종교나 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나 아까 그림 그린 것처럼 나라는 인간이 세 살, 다섯 살, 열 살, 가면 갈수록, 나중에 80이나 90이 된 사람은, 하여튼 밥만 먹으면 그만이지. 이것도 시건, 철이 나야 하는 소리지. 92살 먹고 기자회견하는 그런 할머니들은 시건도 나지도 않았어. 그런데 젊은이들이 까불락, 까불락 거리면서 빠라빠라빠라빠~ 하면서 벤츠 타고 돌아다니는 것 있잖아요. 80, 90할머니들 눈에 전부다 한심스러운 거예요. 이게. 이게 뭐냐, 비축된 힘이 뭘 받는다? 자기정체성을 구사하는 거예요. 나 이것까지 나답다는 거예요. 나답다. 드라마 보면 나오죠. 재벌3세들이 까부는 것 나오죠. 실제로 재벌3세들 그런 사람들이 없는데. 이게 드라마니까, 부자 하나 잡아야 시청자들 마음 스트레스 풀라고, 누구 잘난 사람 하나 조지는 거예요. 자기 정체성을 힘으로 자꾸 비축을 해서 하려는 거예요. 비축을 해서.

그런데 나중에 천재 피카소가 세상을 보니까, 아,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보통 어떤 여인을 그리는데, 모자 쓴 여인 옆모습을 보통 이렇게 그리잖아요. 보통 모자 쓴 여자를 이렇게 그린다 이 말이죠. 제목이 뭐냐 하면은 ‘마리 테리즈 발테르의 초상’이에요. 근데 이렇게 해놨다고요. 보이지 않는 한쪽 눈을 또 그려놓은 거예요(얼굴은 옆모습인데 앞모습처럼) 이게 입체파에요. 입체파라고 해요. 보이지 않는 것까지 같이 들어가요. 3차원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다가 이렇게 그려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그림이 처음 나왔을 때 피카소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눈이 왜 거기서 나와? 없어야 맞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진리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곳에 진리가 있음을 피카소가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피카소가 백날해도 이것은 하나의 예술이지 복음이 아니잖아요. 복음이 아니에요. 그럼 복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은 떠났어요. 오늘 제목, ‘떠난 복음’입니다. 이게 적당하네. 복음은 떠나버렸다고요. 꼴 보기 싫다고 얼굴을 마주 않고 떠나버렸다고요. 주님이 죽으신 것이 맞는데, 주님이 떠나버린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 나와요. 내가 알아서 아버지께로 가버리는 거예요. 가버리는데 그냥 가버리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믿던 여호와, 너희들의 율법해석,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한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정체성, 너 자신의 힘을 얻기 위해서 신을 섬긴 것뿐이다. 나는 너희하고 상대 안 해! 하고 떠나버린 거예요.

여기에 베드로가 목숨을 담보로 해서 따라가려고 했죠. 따라갔었는데 실패했습니까,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죠. 너도 마찬가지야. 어느 누구도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외의 현상이에요. 설명이 안 되어야 할 현상이에요. 설명이. 설명이 되면 안 돼요. 설명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거예요. 얼굴을 안 맞대고, 서로 얼굴을 안 보고 갔던 그분이 자기 얼굴을 앞장세워가지고 등 돌리고 있는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시는 거예요. 피 흘리는 얼굴. 떠났던 그 지점. 십자가 그 지점을 보이시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죠. 사도바울이 십자가 눈앞에 보인다고 할 때 사람들이 안경 들고, 돋보기 들고 “니 십자가 어디 보이나?” 십자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에요. 완전히 입체파에요. 십자가가 지금 떠나지도 않고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얼마나 이게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그냥 편지에다 써버린 거예요. 편지에다가. 믿는 말든 자기소관이 아니고, 성령이 온 사람만 믿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못 믿고. 주님은 우리를 떠나는 분이에요. 우리가 싫다고 버리는 분이란 말이죠. 우리가 싫다고. 그리고 주님이 싫다는 그 본성, 아직도 우리는 대를 이어서 계속 우리 안에 육체로 태어나면서 그걸 담고 태어나요. 장착해서 태어난다고요.

예수 믿으라고 하면 믿을 수가 있어요. “예”하고서. “아들아 예수 믿어라.” “예.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잘 믿습니다. 말로는 왜 못해요. “니 예수 좋은지 알지?” “좋습니다.” 무슨 말을 못해요. 백번, 천 번 할 수 있어요. 무엇을 알 때 진짜 예수님을 만난 겁니까? 주님은 나를 떠나신 분이다.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죠. 내 정체성. 내가 내 힘을 비축해서 이것까지는 납니다, 라고 고집했던 나를 떠나신 분이다. 그럼 어떻게 아느냐? 찾아왔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내 바깥에,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주님의 안목과 같은 안목으로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은 겁니다. 아, 내가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따라서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하고 같은 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모든 일을. 허드레 한 인생이라도 감사하면서 나는, 살게 하시는 그 자체로 나는 감사하겠습니다. 나한테 어떤 미래가 온다 할지라도.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나서 보니 자기 아내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 이쯤해가지고 종용히 끊고자 하지 말고, 그냥 받아주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슬픈 게 아니고 놀라야 된다고 했죠.

아, 이거는 나에게 예상 밖인데. 예상 밖이라는 말은 다시 한 번 나로 하여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뭐든지 나는 예상해야 되는데, 그래야 동그라미가 늘어나요. 지금은 30평, 다음은 50평. 지금의 내 남편은 과장, 다음에는 차장, 부장. 자꾸 어떤 희망 같은 것이 있어야 지금 내가 자살을 안 할 이유가 돼요. 보람이 있으니까. 애가 10등하다가, 이제 5등하다가, 갑자기 뭐합니까? 가자! 1등 가자! 끌어줄 테니까 가자. 이래서 내가 지금은 죽으면 안 돼. 왜? 아까워서. 1등하는 것을 보고 죽어야지.

나라는 것은 희망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희망이. 지금보다 더 힘이 많아진다는 것을 내다보는 그 재미로 산다니까요. 여러분 보고 제가 닦달 낸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하고 같이 사는 가족들, 남편들이 어떻게 사는가, 이제는 복음의 눈으로 보시라 이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거 벌써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할 거예요. 어떻게 사는지. 근데 그 사는 모습이 내가 사는 모습과 어떻게 닮았는지. 정도의 차이뿐이지. 자기의 개성, 고집, 정체성, 이거 붙드는 데는 뭐 양보가 없죠. 막상막하죠. 막상막하.

떠나신 분이 찾아왔으니까, 이거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왜 오셨습니까? 아까 요한복음 10장 읽어봤죠. 양은 목자를 몰라요. 그런데 목자가 주도권을 쥐고 양에게 뭘 준다? 영생을 줘버린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은 영생나무, 생명나무를 못 따먹었어요. 왜? 쫓겨났으니까. 그 아담도 못 따먹은 영생나무, 생명나무를, 주님이 영생이 되어서 우리에게 줬는데, 이 또 기쁜 소식이 뒤따라왔는데 뭐냐, 주고서는 관리 잘해라! 잘 간직해야 돼! 이게 아니고, 줬는데 어느 누구도 그 준 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

그 중에 빠진 게 있어요. 나도 내 영생을 빼앗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영생을 위해서 내가 기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 이유가 빼앗기지 않을 것이 내안에 들어있음을 나타나기 위해서 내가 지금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영생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서, 뭐든지 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요소가, 다른 분이, 주님이 나한테 찾아왔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겁니다. 이 절차에 지금 마태복음 27장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안 됐으니까. 자, 3절에 보게 되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스스로 뉘우친다는 것을 아까 두자로 이야기했습니다. 자성한다는 것. 자성. 불교에서는 그걸 굉장히 강조해요. 그리고 중, 스님이름도 자성스님이 많아요. 쉽게 풀이하면 “나는 못났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 스님 있잖아요. 스님을 여러분은 안 믿겠지만, 믿지 마세요. 머리 깎았기 때문에. 머리 깎는다는 그 자체가 권력이거든요. 자기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머리 깎는 거예요. 머리 안 깎으면 돈이 안 되니까. 머리 안 깎으면 그 교단에서 쫓겨나가지고 생활비가 안 나와요. 무슨 소리를 해도 머리만 깎으면 돈은 나오니까. 머리 깎고 돈 얻고. 긴급재해자금 얻는 것하고 비슷하다.

“스스로 뉘우쳐서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자, 이 의미가 뭐냐 하면은 대제사장들이나 가룟 유다가 돈보고 예수님을 받아들였고, 돈보고 처형하였고, 돈보고 예수님을 팔아먹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적으로 물론 돈이 제일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는 돈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요소가 예수님을 팔리게 했고 가룟 유다는 팔아넘겼고 대제사장들은 받은 거예요. 그 다른 요소가 가룟 유다는 사단이 들어왔다. 주님께서 성만찬하실 때 사단보고 들어가라고 했죠. 그래서 사단이 들어갔잖아요.

사탄, 다른 말로 악신. 아까 이야기한대로 악신이 들어갔다는 것은 반드시 뭐냐 하면, 악신이 인간의 허락 없이 들락날락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시고자 한다면 어느 누구도, 직업귀천나이불문하고 오시면 그냥 오시는 거예요. 주님도. 다시 말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 말씀대로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뭘 자꾸 바깥으로 배출해내느냐 하면은, “내가 지킨 게 아닙니다. 내가 지켜서, 내가 복 받아서 힘이 비축된 게 아닙니다.”라는 것을 계속 바깥으로 뽑아낼 필요가 있죠. 배설물이니까 계속 나와야된다 이 말이죠.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할 때, 사도바울이 지금 뭘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봐도 이 모든 복음 전파는, 누가 봐도 사도바울 본인이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이거는 에브리바디everybody, 누가 봐도 누가 한 겁니까? 그 현장에 누가 있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보고 무슨 이야기를 했고, 앉은뱅이가 쳐다보고 했는데 벌떡 일어섰다면, 그 현장에 누가 있었어요? 누가 현존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생뚱맞는 소리를 해요. 내가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한 게.

그러니까 우리네 인생은 내가 산 인생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산 인생이 아니에요. 제가 주일 낮 끝에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들이 뭔가 실수를 했을 때 결국 내가 한 실수가 아니라 이 말이죠. 실수를 따지자면 매사가 실수에요. 실수 아닌 게 없어요. 숨 쉬는 것도 실수에요. 근데 그게 내 실수가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자,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게 결론이 나왔어요. 자, 주의 일이란 뭘 경유한다? 바로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을 경유해야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근데 이게 뭐냐, 가룟 유다, 대제사장들은 뭐냐, 나의 정체성은 나를 살리기 위한 힘으로 가득 차있다는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이 임했다는 것은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만 챙겨주면 좋은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나의 정체성을, 내가 바깥으로 이미 부산물로 내놓는 거예요. 가라 이 더러운 것아! 내가 나보고 나를 쫓아내요. 그것도 기분 좋게. 아휴 뭐 이런 큰일도 다 하시고. 과일도 대접하시고. 이게 나의 죄입니다. 안 보여도 죄라고 다 써 있는 것 같은데. 주께서 하셨는데 자꾸 나는 내가 했다고, 내가 스스로 그렇게 자꾸 순간순간, 분명히 주께서 하셨는데 이거 한다고 손 빼고. 전부다 마치 내 공로처럼 느껴지는 그것이 자꾸 쌓여서, 쌓여서 남들 앞에서 내 인생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는 게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나는 이렇게 살 것입니다, 라는 게 또 나오고. 그러니까 참, 주님의 적은 우리 자신. 이게 지금 죽어 마땅한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괜히 지신 것이 아니고, 괜히 떠나신 것이 아니고, 다시 찾아올 때에 우리가 어떤 존재고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서 오직 모든 구원이 주의 소관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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