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지체와 몸(엡4;15-16) 1908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8. 27. 07:32
2019-08-25 12:40:55조회 : 658         
   지체와 몸 190825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지체와 몸(에베소서 4:15-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LnMzvFjXIS8, Hit:11
 이근호19-08-25 13:29 
지체와 몸 

2019년 8월 25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15-16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람의 몸은 눈에 보이지만 ‘그리스도 몸’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눈에 띄는 자기 몸 위주로 인간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회라는 것은 이런 몸과 몸과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생각하고 이 생각이 또한 정상적이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른 몸을 제시합니다. 

이 다른 몸은 인간의 몸을 거부합니다. 몸1이 그대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몸1은 지체가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몸2가 되어서 천국갑니다. 여기서 몸2란 곧 예수님의 몸을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몸’ 구원입니다. 이는 인간 몸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인간의 몸은 아담의 몸입니다. 

아담의 몸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죄’라는 무거운 것이 그대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이라고 만지고 있는 이 몸도 아담의 몸입니다. 죄가 담겨 있고 죄를 뿜어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나오는 생각이 정상적이다 고 여기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이 몸에다 온갖 성경지식과 신학과 교리들을 다 집어넣어서 자신의 몸을 천국까지 넣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즉 ‘나는 〜 의 지체다’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누구의 지체가 되면 나의 독립성과 자주성과 독자적 가치성이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싫은 겁니다. 하지만 내가 단순한 누구의 지체라면 몸통되시는 분이 우리의 미래나 운명까지 일방적으로 다 완성시키고 완료시키시는 겁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초승달이 아니라 보름달이 되는 것을 뜻입니다. 비록 초승달로 보이는 경우라도 실제로는 달의 완전형은 온전히 둥근겁니다. 그런데 그 온전함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니까 지체라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25:42에 보면,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지체를 건드리니 몸통과 머리 부분이 반응하시는 겁니다. 꼭 반신욕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지체를 원치 않는 겁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몸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사수하기 위해 현실체제를 긁어모습니다. 즉 내가 정상적이다 는 사실을 증명하고 증거하기 위해 나를 위한 현실상을 주변으로 끌어모으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기껏 ‘목수의 아들’ 정도로 본 겁니다. 그 당시 ‘목수의 아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므로 서 자신들의 이해가 정상적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칭 정상적이라고 여긴 사람들과 반대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림’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필히 큰 아들의 입장과 동반시켜 합니다. 큰 아들은 자신이 정상적인 아들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짜 정상적인 관계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는 마련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적인 아들은 이 땅에서 ‘버림받은 아들’입니다. 

바로 이 ‘버림받음 像(상)’을 보여주는 것은 큰 아들이 아니라 둘 때 아들, 곧 탕자입니다. 탕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하실 일을 담은 운반체입니다. 그에게는 ‘잃어버렸다고 다시 얻음’이라는 원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하나님의 율법 완성, 곧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0:25-27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완성을 위해 소위 ‘정상적’이라는 작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십니다. 율법사나 일방인들은 자신이 정상인이라서 이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식으로 영생을 따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겁니다. 사람들로부터 비-정상인 취급받는 분이기에 비로소 예수님은 유일한 정상이신 겁니다. 

베드로전서 2:7-8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인간세계에 의도적으로 걸려 넣어지는 돌이 되셨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에게 내미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사랑에 근거한 믿음과 소망을 받으십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자기 지체를 관리하십니다. 

예를 들면 룻기 1장에서, 나오미 가정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게 됩니다. 그때 정상적인 사람은 오르바라는 며느리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자기가 살던 고향, 친정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룻은 자기 고향을 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 시집을 박살내신 그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제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시어미를 따라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벌 위에 벌을 내려주세요”라고 말합니다.(룻 1:17) 요나 전체에서 볼 때에는 요나 내용은 “㉠자신이 원치 않는 지시를 받는다.㉡도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징벌 받아 이제 그 일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인정한다.㉢하나님께서 요나의 생각대로 하지 않으신다.”라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그 이유는 지체가 어디까지나 지체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킬러본능을 갖고, 저격해야 될 사람의 신상에 일체 묻지도 따지지 않고 복음을 날려야 하는 자들이 성도이요 지체다운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주님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무엇과 비교해서 말입니까? 나와 비교해서 예수님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자신은 시시해야 되고 아무 것도 아님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살면서 신발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자꾸 아프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소중함이 주님의 소중함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 죄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것으로 주님의 몸을 가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8-26 23:02 
38강-엡 4장 15-16절(지체와 몸)1908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5-16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과 좀 다르지요. 평소에 사람들이 지체와 몸을 이야기할 때 일단 몸이 이렇게 있어요. 몸이 여기 있고 그 몸이 있는 곳에 자동적으로 지체가 달려 있다. 이게 우리가 아는 일상 속에서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몸은 우리 몸과 다르다는 거예요. 

지체부터 먼저 있고, 그리고 몸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보이는 지체가 어떤 방향성을 갖는데 그 방향성은 머리 쪽에 모든 생각과 마음을 두고 살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몸이 있고 그 다음에 지체가 있는 것이 상식인데, 그게 우리가 아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지체만 덜렁 있고 머리는, 그 몸 전체는 보이지 않는다. 이걸 어떻게 우리보고 믿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몸을 우리가 믿지를 못하는 이유가요. 이미 몸에 대해서, 지체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니고 이미 알고 있거든요. 알고 있는데 그것 아니고 이것이라고 해버리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자체를 부정해야 될 부담이 있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모텔에 숙박했는데 그 사람이 숙박한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사람의 몸통은 어디에 있었느냐? 그 사람의 몸통은 한강에 빠져 있었고 그 사람의 지체는 한두 개밖에 못 찾았다고 되어 있어요. 숙박료 4만원을 안냈다고 죽여 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지체 따로, 몸통 따로가 되는 거예요. 경찰에서 수중작업을 하는 고생까지 해가면서 몸통 찾고 지체는 몇 개밖에 못 찾았어요.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 그 사람의 몸 전체는 찾지 못했다.’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리스도 보여주면 내가 믿겠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몸이 아니에요. 지체만 보여주고 몸은 보여주지 않아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이 아무리 신자를 봐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몸이지 누구의 지체라고 할 건덕지가 없어요. ‘지체가 가네.’ 그럴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 자체가 몸이 되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이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몸과 지체라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느냐? 몸과 지체를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면, 4장 13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충만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 이렇게 보시면 돼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그런 말이 있지요. 초승달이 달의 전부가 아니에요. 반달도 달의 전부가 아닙니다. 충만이 되려면 보름달이 되어야 달의 충만이 되는 거예요. 

충만이라는 것은, 각도 때문에 달의 일부만 보여주다가, 점점 더 보여주다가, 보여주다가, 보여주다가 드디어 충만한 데까지 가버리면 달의 전체 모습이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스도 몸이라는 것은 우리 지체만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 몸이 없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일부만, 조금씩, 조금씩만 보여줬지요. 그게 지체가 되는 거예요. 

지체는 무엇이 있다는 뜻이냐 하면, 온전한 몸은 따로 있다. 따라서 너는 너 자체로서 독자적인 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구 계십니까?”라고 하는데 어떤 분, 혹은 누구라고 하지 말고 “누구의 지체가 계십니까?”라고 이렇게 물으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누구의 지체일 뿐이니까. 

내 지체를 붙들고 있는 몸은 보이지는 않지만 따로 계시는 거예요. 따로 계시면서 그 분이 이 지체에 대해서 어떤 작용을 하느냐 하면, 모든 미래를 책임지는 일을 하셔요. 보이지 않는 몸, 몸통이 보이는 지체에 대해서 그 미래까지 다 보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시면 되지요. 이 세상을 반신욕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발 부분, 그 몸의 아래 반쯤은 욕조에 담기고 몸의 윗부분, 머리 부분은 보이지 않는 채로 있고. 

나중에 보면 그 때는 다 계신데 다만 지체부분만 보이는 형식으로 이렇게 등장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도바울의 몸의 이미지는 상당히 우리가 보기에 정상적이 아니고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을 대하면서 비정상적인 인간이 안 되면 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러분이 받아들이셔야 돼요. 

정상적이다, 라고 했을 때는 이미 이 말씀은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 우리 몸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의 공식을 내 보겠습니다. 보통 인간은 일단은 자기 몸이 있어요. 몸이 있고 그 몸이 나중에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이 몸이 나중에 천국 간다. 

이게 우리가 교회 나올 때 흔히 교회 목사한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몸 가지고 예수 받아들이시면 그 몸 그대로 천국 갑니다.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 많이 들으셨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몸이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면 이것은 정상이 되어버려요. 이 세상의 모든 정상적인 것, 종교라는 이름의 정상적인 거예요. 

‘너는 부처 믿어서 극락가라. 나는 예수 믿어서 천당 갈 게.’ 예수나 부처가 다른 것 같지만 목적은 딱 하나에요. ‘내 몸이 죽어서 잘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똑같은 노림수에요. 우리에게는 예수가 있고 저쪽에는 부처가 있다고 해서 다르다고, 우리는 특별히 거듭난 존재라고 그렇게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식으로 성경말씀을 한 적이 없어요. 

전에 절에 다녔는데 이번에 친구 따라 교회 나와서 이제 예수 믿고 내 몸 천당 보내야 되겠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이야기에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내 몸이 일단 그 몸이 되면 안 되고 내 몸이 지체가 되어야 돼요. 몸(1)이 지체가 되면서 첫 번째 몸은 ‘빠이빠이’ 해버려야 되고 그 다음에 지체에서 구성되어서 나타난 것이 몸(2)가 나옵니다. 그 몸(2)가 그리스도 몸이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이 구원받지 내 몸이 구원받지 않습니다. 이걸 줄이면 나는 구원받지 않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그동안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습니까? 교회 나오는 것도 투자요, 헌금하는 것도 투자요, 하여튼 시키는 대로 얼마나 투자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투자가 헛수고인 거예요. 

집에 세탁기와 냉장고 두 개를 동시에 돌렸다 합시다. 그러면 설명서가 다 붙어 있지요. 세탁기는 세탁기 설명서가 따로 있고요. 냉장고는 냉장고 설명서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냉장고 돌리는데 세탁기설명서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요. 우리 몸에 대한 설명서 따로 있고 그리스도 몸 설명서가 따로 있다고요. 

그런데 그리스도 몸이 되고자 하면서 뭘 나에게 적용시키느냐 하면, 내 몸이 어떻게 천당 가느냐, 하는 그 설명서를 억지로 계속 적용하니까 날이 갈수록 내가 점점 악마가 되어가는 거예요. ‘나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그런 식으로요. 뭔가 하나 삭제를 해야 되는데 삭제를 안 당했어요. 우리는 뭐냐? ‘몸이 있고 지체가 있다.’ 그거잖아요. 

주님은 “그게 아니야. 지체부터 먼저 있고 몸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형식으로” 그러면 내 몸이 있으니까 이 몸을 천국 보내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아니야. 그 몸은 구원 안 돼. 지체가 먼저 되고 난 뒤에 지체에서 몸이 되어서 구원되어야 된다.” 하면 그 사람은 “같은 교회 다니면서 그런 소리 하는 것 보니 너는 비정상이야.” 그렇게 할 거예요. 

그 비정상이라는 소리를 여러분은 고맙게 들어야 되고 감격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왜 위에서 따로 주셔야 되는 겁니다. 땅에 뭐 문제 있는 거예요. 땅에 뭐가 문제가 있어요. 왜 문제가 있느냐? 그 땅에 내가 있거든요. 내 이 몸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 내 몸이라 하는 것은 그냥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이 있는 동시에 몸을 살리기 위한 세계라는 그 환경도 같이 조성이 되는 겁니다. 

어떤 환경이라 하는 것, 다른 말로 현실이라 하는 것은 그냥 현실이 아니고 내 몸에 유리한 현실이 되는 거예요. 내 몸에 좋은 환경이 되는 겁니다. tv에 나오는 건강프로그램 왜 봅니까? 내 몸 좋으라고 보잖아요. 그게 설명서가 뭐냐? 내게 맞는 설명서를 내가 취득하겠다는 겁니다. 내 몸이니까 내게 필요한 환경은 내가 선택해서 내게 필요한 현실을 따로 구성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현실을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 라는 전략을 세우고 교회 나오신 거예요. ‘이 정상적인 내가 어떻게 더 확실하게 정상적으로 될 수 있습니까?’라고 요청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냐 하면, 너는 정상이 아니야. 그런 몸은 아담의 몸이라 해서 아담의 몸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이게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로마서 이야기를 하려 하니 눈치 보이는 이 분위기는 뭐지요? 이게 눈치 볼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아담의 몸에 불과한 거예요. 서양식 높은 건물의 열린 홀의 꼭대기 높은 곳에서 무거운 물체를 떨어뜨려 봅시다. 중앙의 공간이 계단으로 죽 연결되어 있다고 치고. 

위에서 무거운 것이 떨어지면 우당탕탕, 바닥까지 떨어지겠지요. 아담부터 시작한 그 죄가 우당탕탕, 우당탕탕, 아담이 누굴 낳고,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오늘날 바닥까지 떨어지면서 우리가 떡이 된 거예요. 그 죄가 우당탕탕, 하면서 계속 내려오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내려와도 그 건물은 아담의 몸이라는 건물입니다. 

이미 거기는 확정된 내 몸이에요. 이 몸은 포기 못하겠다는 그 원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내 몸. 교회 나와도 내 몸 잘되기 위해서 나오는 그 내 몸. 그런데 주께서는 그 몸을 구원받을 수 없는 몸으로 폐기처분하는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자기 몸을 구원하기 위해서 완벽에 완벽의 요건을 다 갖춘다 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한 구원의 환경이 되지를 못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식구가 열 세 식구여서 여러 가지 모자란 것들이 많았습니다만 특히 이불도 모자랐어요. 남자 형제들과 삼촌들이 한 방에 잤는데요. 어릴 때는 이불을 좀 덮었어요. 그런데 크다 보니까 이불이 내 몸통을 다 못 덮어요. 다리가 삐져나와요. 다리 덮으면 가슴팍이 나오고 가슴팍 덮으면 다리가 나오고.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넓은 이불은 누가 갖고 있는가? 큰 삼촌이 혼자 둘둘 감고 있는 거예요. 새벽 두시 쯤 되면 전부 그 안에 다 들어가 있어요. 자, 여러분이 노아당시에 방주 타고 구원받으려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노아방주가 물이 샌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방주 타도 소용없지요. 물이 새서 방주 침몰하지요. 방주라 하는 것은 위에서 온 거예요. 위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방주는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방주 안에는 우리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서, 우리 몸보다 더 소중한 것과 그리고 노아의 그 몸과 비교하는 그 환경이 방주 안에 들어 있습니다. 노아보다 더 귀중한 것이 뭐냐 하면, 정결한 짐승이에요. 이미 정결로 확정된 그 정결한 짐승과 노아방주가 합치가 돼요. 내용이 맞는다, 그 말입니다. 

냉장고는 냉장고설명서가 맞는데 그 설명서가 방주라면 그 안의 냉장고가 뭐냐 하면,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에요. 정결한 짐승의 희생, 깨끗한 짐승이 대신 죽을 필요도 없는데, 안 죽어야 되는데 그 희생덕분에 동승했던, 같이 탔던 노아가족들이 사는 겁니다. 노아가족들이 완전한 줄 압니까? 노아가족 자체에서, 거기서 저주의 자식들이 나오는데요. 가나안과 함. 

방주 탔다고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방주 안에서 뭘 봤느냐, 뭘 발견했느냐 하는 거예요. 거기 같이 있으면서 동행하는 그 무엇을 봤느냐, 그 말이지요.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어요. 하지만 바깥에서 동행한 것이 아니고 그 동행이 방주 안에서도 동행이 되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기 전에 동행할 때는 자기 몸이 하나 있고 동행하는 자를 찾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언약을 구체화시킨 방주 안에 들어가 보니까 하나님의 그 동행이라는 것이 구체적이었어요. 뭐냐 하면, 정결한 짐승, 그리고 그 희생. 그럴 때 노아의 몸은 종속된 몸이에요. 아, 이 몸이 내게 맞는 조건들을 취한다고 해서 내 몸이 사는 것이 아니고 나와 상관없이 나와 동행하는 어떤 정결한 존재와 하나님의 약속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덕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노아가 뭘 배우느냐? 바로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나보다 더 소중한 것. 그것은 내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감지덕지하게도 우리는 그 몸의 지체가 된 거예요. 지체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몸은 지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지체와 지체끼리 있어버리면 아무리 2.0 과 2.0 서로 그 눈을 뜨고 아무리 봐도 그냥 인간이거든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보고 지체가 아니라고 무시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은근히 걱정이 되지요. 분명히 나는 주님의 몸의 지체인데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를 않네요. ‘그럴 때 짜증나서 어떻게 하지?’ 하는데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목수의 아들로 취급받았습니다. 그 당시 목수의 아들이 예수님뿐만 아니고 여러 명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볼 때 뭘 로 봤느냐 하면, 그의 아버지의 직업을 통해서 그 집안의 아들로 본 거예요. 그렇게 볼 때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보는 거예요. ‘나는 푸줏간의 아들인데 저 예수라는 사람은 목수집안의 아들이다.’ 그렇게 본 거예요. 이는 극히 정상적이에요. 비정상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설교 처음부터 계속 비정상을 강조하고 있어요. 

위에서 주지 않으면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내가 나를 보는 식으로 예수님을 대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같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마찬가지가 돼요. “나 주님의 지체입니다.” “아이고 놀고 있네. 지체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지체 아니야 너.” 이래버리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래서 ‘지체냐, 지체 아니냐?’ 하는 그 결과적인 내용이 마태복음 25장 45절에 나옵니다. 두 구절을 읽어드릴 텐데요. 예수님의 오른쪽 법칙인데 오른쪽에 영생 얻는 양을 두고 왼쪽에다 지옥 가는, 영원한 벌을 받는 염소를 둔다 했어요. 주님은 심판주니까요. 39절에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태복음 25장 40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오늘 본문과 연관시키면 ‘내 지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왜? 지체는 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본문을 익히 압니다. 그런데 무슨 본문을 놓치기 쉬우냐 하면 이 본문을 놓치기 쉬워요. 

지옥 가는 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왜 저는 지옥 갑니까?” 45절에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예수 내보이라고 자꾸 억지 쓰지 말라는 말이지요. 예수 내 눈앞에 보이라고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거예요. 나는 정상적인 눈을 갖고 있는 몸이다. 이걸 파기시켜야 돼요. 이걸 부정해야 돼요. 이걸 없애야 됩니다. 나는 사고방식이 정상적이다. 내가 정상적이라면 남과의 만남도 정상적인 만남이 돼요. 그것은 교회가 될지언정 절대로 주님의 지체가 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체가 아니에요. 왜? 정상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주고받는 만남이기 때문에. 윤리적, 도덕적관계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이야기가 나오지요. 탕자이야기 하면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탕자 아닌 형을 옆에 배치합니다. 

부모를 떠난 적이 없는 형이 구원받느냐? 아니면 집나간 탕자가 구원받는가? 너희들이 한번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자, 일단 정상적인 사고로 봅시다. 정상적인 사고로 보면 ‘부모 옆에서 끝가지 평생 효도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아들이다.’ 이게 정상적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정상적 사고방식이에요. 

아버지 재산을 기생한테 다 탕진하고 날려버린 그런 아들 탕자는 절대로 아버지가 용서해서는 안 될 자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누가 구원받느냐 하면, 탕자가 구원받아요. 누가 구원 못 받느냐 하면, 부모 옆에서 효도한 자가 구원을 못 받아요. 효도만 했지 지옥 간다 그 말입니다. 효도하고 지옥가고. 왜 그러냐 하면, 잃어버린 경험, 잃어버린 경우가 없어요. 

탕자는 운반체에요. 잃어버림의 운반체에요. 그러면 뭘 운반하느냐? 예수님께서 대신 죽기 위해서 이 땅에서 정상적인 세상 사람들에게 잃어버림을 당했던 그 체험이 탕자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들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들어 있어요? 운반체에요. 우리는 나를 안 잃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안돼요. 나를 잃어버려야 돼요. 정상적인 나를 잃어버려야 돼요. 

그리고 비정상으로 전환되어야 됩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백날 봐도 몰라요. 성경 내용을 모른다고요. 남에게 정상적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으려고. ‘나 괜찮지 그지?’ 누구한테 평가를 듣는 겁니까? 지옥 갈 사람에게 평가를 들어요? 

베드로전서 2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주님 자체가 버림받은 돌입니다. 그러면 천국 간다는 말은 어디에 합세한다? 그 버림받은 돌에 합세하는 거예요. 정상적이고 훌륭한 나를 내가 버릴 수 있어야 돼요. 우리는 비정상을 선호해야 됩니다. 

그놈의 ‘정상적’ 때문에 정상적으로, 정상적으로, 그것이 누적이 되어서 우리는 교회 나오고 지옥 가는 엉뚱한 방향을 잡고 가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2장 8절에 보면, 그 버림받은 돌이 부딪히는 돌이라고 했어요.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위에서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그 돌에 다 엎어지고 자빠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큰 아들처럼.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은 큰 아들처럼. “아빠, 나 효자지요?” 아버지는 탕자를 받아주면서 철저하게 큰 아들의 허점을 지적합니다. 큰아들 보란 듯이 탕자, 돌아온 아이에게 가락지 끼워주고 소 잡고, 그게 한우 아닙니까, 비싼 한우, 소 잡고 잔치 베풀어주면서 아버지가 정상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의 화를 돋궈버려요. 

“왜 저에게는 그렇게 안 해줍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그 애는 잃었다가 얻은 자다.” 너는 그런 과정을 경유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너는 평소에 너 잘난 맛에 살았잖아. 네가 스스로 잃기를 싫어했잖아. 너 스스로 너 자체를 잃기를 싫어했잖아. 정상적이기를 원했잖아. 그 애는 비정상이야. 아들이 아니야.”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아들이에요. 아들이 아니라는 경과를 거쳐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을 포기한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 밖이에요. 안돼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실 때에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나 같은 경우에 잘 나타나 있어요. 

요나는 본인이 니느웨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주께서 보냈거든요. 그 말은 뭐냐? 첫 번째, 요나는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두 번째, 요나가 한 번 혼나고 난 뒤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다.’ 이게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반전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내 식대로 일을 안 한다. 

요나서 4장 1절과 2절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요나가 하는 말이 “이런 식으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다고 사전에 알려준 적이 없잖아요. 내가 주의 뜻이 싫어서 잠시 다시스로 간 것은 맞지만 정신 차려서 주의 뜻대로 하겠다고 나왔을 때는 이제 주의 뜻과 내 뜻과 일치가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이제 와서 그 뜻을 변경시킵니까?” 

요나가 삐졌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살하려고 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 결코 잃어버릴지 모르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통해서 잃어버리게 만들어버려요. “이게 네가 네 힘으로 알 수 없는 네 본색이다.” 너는, 요새 식으로 하나님 찾고 예수 찾고 백날 찾아도 그 수작, 그 노림수가 결국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온갖 성경정보, 신학정보, 교리는 다 차지했는데 그 노림수가 뭐냐 하면, 결국은 ‘나 잘났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할 수 없는 우리를 주께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는가? 에베소서에서는 성령을 언급하면서 성령대로 이뤄진다고 하는데 성령대로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킨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있었던 그 관계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킨다. 이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만 적용시키지 그 외에는 적용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대했습니까? 버림받았지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서 하는 말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반드시 ‘내 원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를 먼저 이야기한다고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뭐냐 하면, 율법의 완성이고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오늘 본문 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사랑만으로 지체와 머리가 연결되고 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또 그 지체들 사이에서도 오직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운다는 겁니다. 

지체와 지체사이도 사랑이고, 머리와 지체 사이도 사랑이고. 그러면 그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만이 이룰 수 있는 그 사랑이에요. 인간사랑은 안 됩니다. 사랑은 시간을 멈추게 만들어요. 인간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하면서 ‘너에게 다 주고, 다 주고, 다 줬다.’ 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잃어버릴 줄 모르는 사랑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서 탈락이에요. 

부모가 자식 위한다고 천당 갑니까? 부부가,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한다고 천당 갑니까? 아니에요. 그 사랑 빼고, 그 사랑은 탕자처럼 잃어버려야 될 사랑이고, 그 사랑 말고 다른 사랑, 아버지와 예수님이 주고받던 그 사랑이 있어야 돼요. 그 사랑은 버림받아야 돼요. 이 땅에서. 자기 부인이 돼야 돼요. 

인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사랑 찾아 해매는 그것이 인생입니다. <너 그러다 장가 못 간다> 앨범 자체가 <너 그러다 장가 못간다>는 앨범이 있어요. 앨범에 실린 노래 하나가 이런 내용입니다. 봉숙아~. 여러분은 잘 모르지만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있어요. 

“야 봉숙아 말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서 놨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아까는 집에 안간다고 데낄라 시키돌라 캐서 시키놨드만 집에 간단 말이고. 못드간다 못간단 말이다.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단 말이고. 못드간다 못간단 말이다.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우우~” 

이런 노래입니다. 보사노바 가락에다 <장미여관>이라는 밴드가 불렀어요. 마지막 가사가 뭐냐 하면요. “사랑을 찾아서 사람을 찾아서 오늘도 헤매고 있잖아.” 이게 마지막 가사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 내가 정상인 것을 말로서 이야기해줄 옆의 보조자를 찾는 것. “그래 너 정상이야. 너 잘났어.”라고 해줄 보조자를 찾는 거예요. 

그 보조자가 없으면 개라도 키우고. 부부라고 해봐야 결국 부부는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여의도 아파트 부녀회장이 바자회를 연다고 “집에서 쓸모없는 것들 여의도 광장에 다 가지고 나오세요.” 했는데 80퍼센트가 자기 남편을 데리고 나왔어요. 또 어떤 병원에 남자 다섯 명이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어요. 40대도 있고, 50대도 있고, 60대도 있어요. 70대와 80대도 있어요. 

40대보고 “당신 얼굴에 왜 반창고가 붙어 있습니까?” 하니까 아내보고 어디 가느냐고 묻다가 얻어맞았답니다. 50대 당신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아내 따라간다고 했다가 얻어맞았답니다. 60대는 왜 그런가 하니까, 아내 보고 빨리 들어오라고 했다가 얻어맞았다는 거예요. 70대는 정말 실감나요. 70대 남편은 왜 맞았느냐고 하니까, 밖에 안나나고 자꾸 얼쩡거린다고 맞았답니다. 집안에서 얼쩡거린다고. 집안은 자기 나와바리인데 남편이 밖에 안 나가고 자꾸 얼쩡거리니까 짜증이 나가지고 팬 거예요. 

80대정도 되면 안 맞을 것 같은데 80대는 왜 아내에게 얻어맞았느냐고 하니까, 아침이 되었는데 눈이 떠져서 맞았어요. 빨리 안 죽고 아직도 살아있다고. 치료를 다 하고 있는데 90대가 또 들어왔어요. 90대보고 “당신은 왜 이렇게 얻어맞았습니까?” 하니까 친구들은 다 산에서 자고 있는데 당신은 왜 방에서 자고 있느냐고 얻어맞았다는 거예요. 친구들은 다 죽어서 산속에 가 있거든요. 

그러니 이것은 뭐냐? 인간은 몸이 자기의 완전체에요. 완전체기 때문에 자기 몸 빼고는 다 걸거치는(거치적거리다) 거예요. 그냥 이 몸만 붙들기 때문에 이 몸 말고 다른 몸은 없어요. 쉽게 말해서 내 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겁니다. 이 소중한 것 예수도 좀 받쳐주고 하나님도 좀 받쳐주고, 내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도 하고 헌금할 테니까 내 몸이 소중한 것을 좀 위로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사랑 아닙니다. 사랑은 잃어버림이 있어야 그게 사랑이에요. ‘내 몸 내가 챙기겠다. 극히 정상적이지요.’ 왜 주님께서 율법을 이루면서 자기 몸 잃어버리는 이유가 뭐냐? 그게 누가복음에 나와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5절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니까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율법에 기록되었다고 하거든요. 

그 율법을 누가 이룰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루는데 지금 율법사의 방법은 뭐냐? ‘나 율법을 지키는데 정상이다. 정상적이기 때문에 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있다. 정상적인 나에게서 나오는 행동은 정상적일 것이다. 이 정상적인 것을 주께서 받아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걸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사는 자기가 율법을 못 지키는 비정상이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마치 탕자의 형, 아버지 옆에 있던 형 같아요. 내가 성의를 다해서 아버지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이 성의를 인정해주겠지. 인정 안 해줍니다. 모델과 규칙과 모든 법칙은 예수 그리스도로 끝나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방법이 그게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 하시고 십자가 지러 가시거든요. 십자가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십자가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교회에서나 성경에서 많이 이야기들 하지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자.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방법은? 예수 믿으면 되지요. 예수 믿으면 되는 겁니다. 앞에 뭐가 붙는다면? 나를 믿지 않고. 내 행함을 믿지 않고 예수 믿으면 되지요. 

참 쉽지요. 예수 믿으면 되는데 예수 믿는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믿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진짜 소중한 나를 챙기자.’ 이게 아니고 소중한 분이 있다면 나 같은 것은 신경 더 이상 쓸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예수 믿으라’ 하니까 ‘예수 믿는다’ 하는 율법을 지켜버리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 말씀을 어떻게 지키는가? 예수 믿으면 돼요. 억수로 쉽지요. 굉장히 쉬운 거예요. 이게 비정상입니다. 내가 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이기 때문에 이미 이것은 주님 앞에 거부당한 것이거든요. 내가 행할 수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 이걸 다 부정하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잘해봤자, 내가 끌어당겨봤자 이불은 작아요. 내 이불은 작아요. 내가 구축한 모든 것은 물이 샙니다. 예수님 복음,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나는 그 앞에서는 하찮다. 시시하다.’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과오를 했거나, 잘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나 뭘 해도, 잘했어도 아무것도 아니고 못했어도 아무것도 아니고, 돈 좀 벌어도 시시하고 돈 안 벌어도 시시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은 뭐냐? 쉽게 한다고 킬러본능이라고 해보는데 킬러본능이 뭐냐? 돈 받고 사람 죽이는 킬러는 그 사람의 직업이 뭐고, 과거가 뭔지 묻지도 않고 표적만 알려주면 그냥 총으로 멀리서 쏴서 죽이면 그만이에요. 그게 킬러에요. 내가 그 사람 죽일 자격이 될까? 내가 뭐라고. 그런 것 따지지 말라니까요. 

사람이 겸손한 것이 수상해요. 겸손한 그것이 못됐어요. 겸손하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에게 미련이 있어요. 킬러 앞에 세자가 붙습니다. 냉혈한. 차가운 피를 가진 사나이. 복음으로 쏘면 돼요. 쏘세요. 복음으로 쏘면 되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왜? 지체는 본인의 계획이나 본인의 스케줄이 없기 때문에. 

몸에서 성령을 통해서 버림받은 그것이 바로 영생의 길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을 그냥 알려줬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총 들고 그냥 쏘면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고향을 버려야 되겠지요. 룻기에 보면 두 사람 나옵니다. 오르바라는 사람 또 하나는 룻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둘 다 나오미의 며느리에요. 

모압으로 갔다가 남자 죽고 아들 둘 다 죽고요. 아들 둘이 다 기혼자인데 다 죽었어요. 하나님께서 뭘 생산했느냐 하면, 여자만 달랑 남았어요. 죽은 그 남자의 부인 나오미, 그리고 오르바라는 며느리와 룻이라는 며느리 둘만 남았어요.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둘 불러놓고 “우리 집에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었다. 이게 하나님 뜻이다.” 잃어버림이지요. 내가 결혼해서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잘살기는커녕 인생 망가졌다. 이게 비정상이지요. 비정상일 때 다시 만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정상일 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을 때 “네가 보고 싶었다.” 하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만났을 때의 내가 보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자기의 과거를 그리워해요. 나오미가 며느리들 불러놓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야, 이제 우리 집에 남자도 없는데 너희들 팔자 고쳐야지. 그러니까 너희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라.” 했습니다. 

자, 여기서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뭐냐? 고향으로 돌아가라 했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정상입니다. 누가 정상이냐? 오르바가 정상이에요. 어머니 따라가지 않고 다시 모압 친정집으로 돌아간 오르바가 정상입니다. 왜? 태생이 그 태생이니까. 혈육적 태생이니까. 그런데 누가 비정상이냐 하면, 룻이 비정상이에요. 

룻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16절부터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이 말은, 룻이 보기에 ‘시아버지 죽고 내 남편이 죽은 것이 숨어 있는 하나님의 정상적인 코스다’ 그 말입니다. ‘고향에서 내가 알던 그 신은 신이 아니고 집구석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그 말입니다. 이게 인간의 제정신으로 되겠습니까? 그만큼 살아오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얼마나 나한테 투자를 했는데! 

이것뿐만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다 그래요. 제가 지난 시간에 했지요. 욥은 악마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했다고요. 욥에게 악마가 다가오니까 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욥기 3장 11절에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이 너무너무 몸이 힘들어서 어디로 되돌아가려고 하느냐 하면, 차라리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거예요. 내가 없었던 시절이 그립다는 말이지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걸 보통 죽음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마귀를 통해서 욥을 건드리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뭐냐? 그냥 돌아가면 안돼요. 죄와 결부해서 돌아가 줘야 예수님의 운반체가 되고 십자가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어렵다고 해서 자살하면 안돼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죄와 결부해서, 도대체 이 아담이라는 큰 건물, 아담이라는 건물 안에서 나는 하나의 벽돌인데 이 건물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걸 알고 죽어야 돼요. 그래야 그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영생을 얻는 사람이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를 우리에게 계속 성령을 통해서 주께서 주시는 거예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십자가라고 해놓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풀이해놨지요. “십자가는 뭐 나무토막이지요.” 아니에요.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의 현재형이 뭐냐?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 십자가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죽어 있다는 그것, 주님이 살기 위한 방법이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목 조를까요? 번개탄 피울까요? 아니에요. 내 죄와 결부되어 있는 모습 자체가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요. 그 죄가 뭐냐 하면, 나를 챙기려 하는 것, 나 위주로, 내가 소중하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착함과, 내 의로움과, 내 훌륭함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그것이 바로 주께서 손대지 아니하면 안 되는,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훌륭하다는 그것이 바로 내 몸통이 감추어놓는 죄였던 겁니다. 

참, 아무리 제가 이야기해도 우리는 돌아서면 다시 내 위주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감사하게도 우리 신발에다 돌멩이를 집어넣고, 신발에 소나무 이파리를 집어넣어요. 정상인데, 착하게 사는데 이상하게 발에 뭐 들어갔어요. 이물질이 들어갔어요. “왜 자꾸 정상이고 싶어하느냐, 이 인간아. 예수님 봐라. 사도 봐라. 그게 정상이더냐?” 비정상이거든요. 

“비정상으로 살면 되는데 왜 자꾸 정상이기를 고집해. 자꾸 발에서 뭐가 아파. 아니야. 그쪽 아니야. 그길 아니야. 그것은 지옥이야. 그건 넓은 길이야.” 자꾸 뭔가 알려줘요. 챙기고 또 챙기고. 백날 아무리 당도리 하고 또 당도리 해봐야 우리는 자꾸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만 찾는 거예요. “내가 이래서 죽으면 안 됩니다, 주여.” 

인간의 사랑이든 무슨 사랑이든
사랑을 받게 되면 시간이 멈춰버립니다.
멈춰버리면 동시성이라 해서 내가 죽는 순간 주님의 십자가가 과거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미래에 십자가사건만 달랑 남아요.
십자가사건이 있는 현장성이 되는 겁니다.
동시성이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가리지 않고 십자가만 작용한다는 것이 그 순간에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 몸이 살아나게 되면 나는 과거가 어떻고 현재가 어떻고 또 내 몸 위주로 하다 보니까 그 동시성이 깨져버리고 ‘나는 지난 5년 전에 십자가 믿었다. 그래서 지금 십자가 믿고 있다. 앞으로 십자가 믿어서 천당 갈 걸.’ 다시 주님의 몸의 동시성이 날라 가 버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 되어버려요. 

주님이 주신 사랑이 없어져 버렸어요. 몸이 스톱이 되니까 지체가 몸 행세 하고 있는 겁니다. 지체가 지체되려면 몸이 살아나야 돼요. 몸이 살아나려면 내 몸은 신발 안에 작은 돌멩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 우리를 아프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늘 아파요. 늘 내 뜻대로 안되고 내 예측대로 안 되고 내 예상대로 안 되고 늘 아파요. 

신발 벗어서 털어냈는데 돌아서면 또 뭐가 달그락달그락, 늘 우리 인생이 그래요. 그것은 뭐냐 하면, 비정상이어도 되는데 우리가 탕자가 되어도 되는데 맨 날 탕자 말고 정상적인 형이 되려고, 부모한테 효도하는 사람 되려고, 하나님 앞에 잘하는 사람 되려고, 그러한 내 생각이 바로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너는 네 몸이 있는 한, 90되어서 산에서 자기 전까지는 우리는 내 몸 위주로, 내 몸이 최고로 소중하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바로 그러한 경험, 그것이 죄와 그리고 동행하시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의 피와 결합이 되면서 우리는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증거는 뭐만 증거 하느냐?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우리는 감히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체의 모습을 마음껏 보이게 되는 겁니다. 

바라기는 성도와 성도사이라도 우리가 죄밖에 지을 것이 없다
는 그러한 복음을 가지고 서로교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뭐가 옳은지도 구분 안하면서 남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내 몸 챙기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남한테 으스대고 ‘나 이정도야. 나 이렇게 괜찮아.’ 하던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복음을 이해 못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이 세상의 경향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서 십자가가 주어진, 십자가를 알게 된 그 은혜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