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딤전후제1강110731

아빠와 함께 2013. 5. 8. 08:04

 

11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딤전후(교회를 잊어라!) 제1강(첫날저녁1)
 
                                                           2011,07,31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그동안 세상 일로 분주했지만, 디모데전후서라는 말씀이 여전히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움직이기에, 그 움직임 속에 삼켜진바 어떤 우리의 몸짓이 디모데전서며 우리의 어떤 생각이 디모데후서인지를,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말씀이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교회는, 누가 세운 것인가?

이번에 공부하려는 것은 디모데전후서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이미 광주강의 때, 지금부터 몇 년 전에 한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 디모데전후서는 성령님에 의해서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성경책에 포함되었다고 할 때는, 만약 디모데전후서가 빠졌다고 하면 어떤 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를 봐야 하는 겁니다. 즉 성경에서 디모데전후서가 없다고 하면, 어떤 점에서 완성한데서 누락될 수가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후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교회' 라는 것이, "과연 사람의 손으로 세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세운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교회라는 실체를 두고 서로 다툼에 나서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물론 "우리가 세웠습니다" 라고, 즉 자기들의 전도와 선교로 세웠다고 나올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웠다고 해서, 나는 교회라고 인정해줄 마음이 전혀 없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쪽에서는 "교회를 어떻게 세울지, 그 원칙만 제공해주시면, 우리가 성심 성의껏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라고 나올 것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그러한 원리 원칙을 제공해봐야 너희들이 오히려 교회를 버려놓는다" 라고, 즉 "너희들이 원리원칙을 알아서 교회에게 시키는 데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라고 나는 여전히 간주하지 못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있음'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 그런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서신이 디모데전서와 후서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소위 '교회 있음' 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교회가 아닌 다른 것을 손에 쥐고서,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검토를 해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 그러면, 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이번 수련회 주제가 "교회를 잊어라!" 라는 것인데, 여기에 느낌표가 하나 박혀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교회를 잊어라!" 라고 하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교회가 있어야 구원된다는 사람이라고 하면, "교회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 제가 교회가 없다고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교회를 잊으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여튼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니, 이런 것까지도 제가 시시콜콜이 설명해야한다는 것이 조금은 서글픈데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잊어라" 라는 것에 대해서, 만약에 교회를 잊으면, "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그 뒤에 감추어진 것을, 즉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교회는 하나의 간판이고, 그 뒤에 있는 자기 구원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 오늘부터 가게문을 닫습니다 !!

예를 들어서, 시골에 조그만 슈퍼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슈퍼주인이 "손님이 없어서 오늘부터 가게문을 닫습니다" 라고 하면,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 기저귀는 어디에서 사노?"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슈퍼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슈퍼를 이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다시 말해서, 마을 사람들은 "당신이 있어서 참 편리했는데, 당신이 가게문을 닫아버리면 우리는 읍내까지 기저귀를 사러가고, 음료수를 사러가려면 힘듭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슈퍼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들에게 내가 슈퍼하는 게 그렇게 귀하다면, 물건값을 깎아달라고 하지 말고, 자주 이용해줘야지.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당신들은 왜 당신 생각만 하느냐?"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잊으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 뒤에 감추어놓은 것, 즉 "내 구원은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해서, 이 사람은 무엇과 관련을 시키느냐 하면, 교회 존재가 자기 구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그만 들통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뭡니까? 교회를 사랑한 게 아니고, 자기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즉 "나를 사랑해서, 나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이 교회제도가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자기 사랑에서 떠난 적이 없음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즉 교회가 아닌, 자기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 첫째,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조성하십니다 !!

이런 경우가 첫 번째 있고, 사실 이런 경우가 대부분인데 말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십자가 마을이 여기에 해당되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잊어라" 라고 하면,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조성하고 있습니다" 라고 해서, 교회를 벌써 잊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교회는 주님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잊어라" 라는 말은 무엇인고 하니, "교회는 잊어도, 결코 주님은 잊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즉 디모데전후서에서 이야기하는 '교회'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진짜 교회인가? 가짜 교회인가?" 라는 것은, 날마다 교회를 잊어야만 된다는 겁니다. 교회를 잊음으로 말미암아서, 어제까지 교회는 주께서 어떻게 다루고, 이번 주는 또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다루고, 다음 주가 되면 주님께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그게 상당히 흥밋거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달 전에 두 명이 나갔고, 지난주에 세 명이 나갔고, 이번 주에 네 명이 나갔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야, 정말로 주님께서는 참된 교회 됨에 있어서 너무 단호하시고, 그 어떤 인간의 흥정이나 타협에도 굴하지 않는구나. 역시 주님은 살아 계시구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교회는, 주께서 친히 조성을 !!

그렇게 교회는 주님이 친히 조성하신다고 하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어떤 식으로 교회를 결과물로 내놓느냐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디모데전후서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즉 "주님은 복음을 전하게 해서 교회를 친히 조성하신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친히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교회에서 복음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그쪽은 분리해서 나가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변함이 없지만, 교회는 항상 그때마다 발생하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2번이 맞는데, 지금 여러분이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가만있는 것을 보니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ㅋㅋ).

◈ 둘째, 내 구원을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 !!
 
그러면 지금은 1번에 기준해서 "교회를 어떻게 만드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겠는데, 즉 "내 구원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 라고 할 경우에는, 일단 '내'가 교회를 버릴 수는 있어도, 교회가 건방지게 '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나' 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과 '나' 사이에 교회라는 것으로 뒤집어씌워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교회는 항상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고 하면, 교인이 열 명이라면, 열 명의 교인들이 각자 각자 자기의 구원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A' 라는 사람이 있고, 또 'B', 'C', 'D'가 있는데, 이 'A' 라는 사람은, 목사가 설교하게 되면 자기 구원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목사의 설교가 맞으면 몰라도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하면, 그 'A' 라는 사람은 다른 교회에 갈 것을 얼마든지 고려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로 말입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면, 그 목사의 성경해석의 옳고 그르다는 것을 누가 판단합니까? 자기가 판단하는데, 그리고 'A' 라는, 또 'B' 라는 사람이 한 소리를 들은 게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 각자가 다 교회다" 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만 교회가 열 개가 되는데, 즉 각자 각자가 모두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교회에 목돈을 냈다면, 나갈 때는 목돈을 가지고 나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교회니까 말입니다. 그건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전혀 어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구원이 중심이니 언제나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성경책이 있다면, 성경해석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다른데,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 하면, 즉 원칙이 무엇인고 하면, 자기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그들이 묻는 것은 "목사님, 어느 교회를 가야 됩니까?"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목사님, 어느 교회를 가야 됩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니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두 군데에 있으면 어느 곳이 교회로 성립이 되는 겁니까? 만약에 교회가 세 군데에 있다고 하면, 물론 "셋 중에서 하나의 교회에 가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 한 군데 있는 교회에 가면 된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논리상 그렇다는 겁니다.

만약 두 군데 있으면 "이쪽 갈래? 저쪽 갈래?" 라는 게 되지만, 한 군데라고 하면, 어느 쪽에 가던지, 그것은 간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라고 하는데, 즉 한 군데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뿐인 교회니, 여기 이쪽은 딜레마에 빠지는데,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건물은 많은데, 성경은 교회는 하나밖에 없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는데, 즉 그 하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어느 쪽으로 선을 그어서 하나의 노회로 만들 것인지, 그런 고민이 생기고, 또한 이쪽 노회를 만들 때 같은 신조, 또는 같은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대목으로 작성해서 하나로 뭉쳐야 하는지, 그런 고민도 든다는 말입니다.

◈ 교회가 매개체 ??

어쨌든 간에, 그것은 교회를 위함이 아니라 교회는 매개체인데, 즛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즉 자기 구원이 우선이지, 사실 교회는 자기 구원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최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최고가 된다면, 만약에 식구가 4명이고 교회가 하나밖에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네 사람을 하나로 집약, 즉 모을 수 있는 장치라든지 방법이 인간에게 나올 수 있습니까? 4가 어떻게 1이 되고, 7이 어떻게 1이 됩니까?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백 명의 교인이 하나의 교회에 있다" 라고 하면, 물론 말은 하나라고 하는데, 그 백 명에게 다 물어보라는 겁니다. 색깔이 똑같은지, 백 가지 생각이 다 있다는 말입니다. 백 가지 생각인데 어찌 하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부부가 한 몸이라 하는데, 각자에게 물어보라는 겁니다. 꿈도 따로 꾸는데 무엇이 한 몸이라는 겁니까?

그게 안 되는데, 그렇게 둘도 하나가 안 되는데, 어떻게 백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덮어놓는 겁니다. 사실은 이것만 덮는 게 아니고 모두 다 덮어놓는데, 성경말씀도 전부 덮어놓는다는 겁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콘크리트를 해버리지 말입니다.

그러니 남아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큰소리를 치는 사람, 돈을 많이 낸 사람, 그리고 오래된 텃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뒤에 온 사람은 기가 죽어야만 얼추 하나에 비슷하게 된다고 해서 교회에서 잡은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인정하는 장로, 목사, 집사 등등, 이러한 직분이 여럿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다는 말입니다.

◈ 여자는 오직 종용할지니라 ??

그런데 디모데전서나 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데, 즉 "여자들은 교회에서 조용하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워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뜻 생각이 나는 것이 뭐냐 하면, 군대 이야기 누가 합니까? 남자들이 하는데, 그런데 아내가 하사관 출신이고 남편이 방위출신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아내가 군대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딤전 2: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그러면 아내가 복음을 알고 남편이 복음을 모르면, 복음 이야기를 누가 해야 됩니까? 그거야 당연히 아내가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것을 왜 남편에게 배우느냐는 겁니다. 개뿔도 아무 것도 모르는데, 자기 전공분야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찌짐을 굽는데 아는 척을 하면, 후라이팬으로 여자들에게 얻어맞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ㅋㅋ). 아무 것도 모르면서 참견을 한다고 말입니다.

◈ 교인인지, 동우회인지 ??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을 가지고 만약에 교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억지춘향인데, 즉 억지로 이걸 전부 쑤셔 넣어야 된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마구잡이로 넣어서, 그 주동자가 목사가 되어서, "무조건 성경말씀이니까, 까라면 까라" 라는 식으로 발길로 차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교회 자체가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성령에 의해서 만든 교회인지, 폭력적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마 협회나 제주도 해녀협회와 교회와의 차이점을 대보라는 겁니다. 경북댄싱지부와 고양지구 바둑동호회와 교회의 차이점이 뭡니까? 회비도 다 내는데 말입니다. 사물놀이팀이 한 주에 두 번씩 연습하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는 겁니다. 그쪽은 두 번이고, 교회는 한 번 입니까? 재단법인, 사단법인과 교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법인화를 시켜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는 겁니다.

결국 교회 자체는, 제가 1번 쪽에서 하는 주장을 간추려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교회는 교회자체로서 의미가 없고, 우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 교회라야 진짜 교회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복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과연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1번의 자기 상식적인 구원론, 그것을 '종교'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자기 구원론 입장에서 교회나 성경을 봐서는 안 되고, 예수님이 친히 교회를 만들어놓고, 예수님께서 나갈 사람은 나가고, 들어올 사람은 들어오고, 그렇게 조정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초대교회 정신을 모르면 안 되는데, 즉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부부가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인데, 즉 그게 '에베소 교회' 라는 겁니다. 즉 자기 집에 모이면서 그것을 교회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초대교회의 특징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디에도 교회건물을 등록하고 말고 했다는 개념은 없다는 말입니다.

◈ 성령을 받으면 교회 !!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의 '교회'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성령을 받으면 교회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성경이 간단하게 이야기합니까? 어떤 사람이 "저는 성령을 안 받았는데요?" 라고 하면, 그러면 교회에 안 오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왜 사람에게 묻습니까? 성령은 누가 주느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성령을 준다" 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다 준다" 라는 뜻으로 표현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다 준다" 라는 말은,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 라는, 즉 "내가 주겠다고 하는데 왜 니가 나서서, '이 사람은 안 됩니다. 저 사람은 됩니다' 라고 하노? 그렇게 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모든 사람은 다 준다" 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성령을 받기 위해서 뭘 하면 되지 ??

그러니 본인이 성령은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그것을 어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마치 무당과도 같은데, 성령을 왜 받아야 합니까? 이것 자체가 이미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목적이 뭡니까? 아까 나왔는데 말입니다.

자기 구원을 받으려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성령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으니 구원이 된 것이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성령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되지?"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귀신들이 하는 짓이란 말입니다.

◈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니는 누꼬?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귀신이 이야기를 하면 장면이 나오는데, 즉 어떤 제사장에게 아들이 일곱 명이 있는데, 사도바울이 성령으로 귀신으로 쫓아내니까 자기들도 비슷하게 폼을 잡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귀신이 이야기하기를,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니는 누꼬?"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행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예를 들어서, 축구 월드컵 예선전을 한다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페루가 시합하는데, 어떤 아저씨들 몇 명이 반바지를 입고 들어온다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르헨티나도 알고 페루도 아는데, 당신은 누구냐?"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조기축구회가 왜 여기에 오느냐는 말입니다. 

◈ 교회는, 주께서 마귀를 이겨내신 결과물 !!

그러니 적어도 귀신이나 마귀와 싸우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바울 정도는 되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것을 누가 아느냐 하면 마귀가 아는데, 결국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령을 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악령과 성령이 하는 게임에 끼어드는 것과도 같은데, 전혀 끼어들 자리가 아닌데 말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성령으로 마귀를 이겨내시고, 그 결과물로 생긴 것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교회는 누구의 결과물이고요? 성령은 주님의 영이고, 주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해서 생긴 결과물이, 즉 악마로부터 구출해낸 결과물이, 그것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 교회가 'ATM(현금인출기)' ??

그래서 진짜 교회라고 하면, 자기가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이라도 교회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속이 다 시원한데(ㅋㅋ), 즉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하는, 그런 교회는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으니 그런 짓거리를 하지 말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사방놀이를 할 때 1, 2, 3을 밟듯이, 그런 것은 자기 마음대로 들어갔다가 나갔다가 하는데,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교회는 일종의 놀이인데, 자치기 놀이 말입니다. 그래서 삐치면 나오지 않고, 그야말로 자기들 마음대로 라는 겁니다. 저는 아무 말도 없이 교회에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너무 신기한데, 하지만 인간에게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를 들어올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말입니다.

물론 교회에 등록하는 방법은 있는데, 그런데 그런 등록은 하늘나라에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명찰을 단다고 해서 하늘나라에서 통합니까? 주민등록증을 이렇게 가져다대면, 이게 어떤 보면 CF에 나오는데, 즉 "나도 성인이다. 그래서 주민등록증이 있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통하느냐는 말입니다.

◈ 한민족의 바람은 '신(神)바람' !!

하여튼 인간들이 교회를 연극무대로 만들었는데, 놀이터로 말입니다. 특히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한국민족들은 옥저, 동예, 부여 등에서 제천의식이 많아서, 이번에도 제가 용산에서 봤는데 말입니다. 인간들끼리 노는 것은 재미가 없어서 신과 더불어 노는 모양인데, 그런 재주가 있다는 겁니다. 단군신화도 그렇고 말입니다. 한국 땅에 오면 뭐든지 잘 노는데, 그 어떤 신이 와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 바람을 '신(神)바람' 이라고 하는데(ㅋㅋ), 신바람 노래방도 있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은 신과 더불어서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서, 자연에 대한 모든 해석을 거기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여러 가지 예측 불능한, 그리고 불안정하고 알 수가 없는, 미래에 암담한, 그러한 것을 신바람으로서 잠재울 수 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여자 신학자는(현경?) 그 신바람을 성령바람이라고 해서 신학의 토착화를 주장했는데, 물론 모든 교회가 그 당시에는 유니온 신학교의 그 여자 신학자의 주장을 비웃었는데, 하지만 20년도 채 되지 않아서 모든 교회가 그런 짓을 다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갭이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행함에다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지 않고 성령을 보내야만 되는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갭이 있다는 겁니다. 이 갭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뛰어넘을 수가 있는데,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여기에서 그만 스톱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어쩔 수가 없는데, 그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탄력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스톱이 누구에게까지 해당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님마저 십자가에서 스톱이란 말입니다. 왜 하나님도 십자가에서 스톱인고 하면, 그렇게 하나님마저도 스톱이 된다고 하면, 그 어떤 인간도 이 갭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스톱을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무엇이 깨지느냐 하면, 그동안 인간들이 생각했던 구원의 구조, 즉 고해와도 같은 세상, 그리고 이승과 죽어서 좋은데 가는 저승, 그런 이승과 저승이라는 종교적인 구조도 여기서 그만 스톱인데, 여기서 완전히 뭉개지는 겁니다. 종교적인 구조가 말입니다. 즉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신의 자비로서 좋은데 가겠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도 여기서 그만 끝나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 십자가에서 예수님도 '스톱' !!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물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안 믿었지만,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는데, 그것도 이 선까지 오면 스톱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그들도 인간이니 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는 이 십자가에서 스톱인데,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마저 스톱인데, 그래서 성령께서 죽은 예수님을 사흘만에 부활시켜서, 그렇게 해서 예수님도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 라는 수제자는 자기의 생각, 즉 "지금 이 땅에서 죽고, 주님의 나라에서 산다" 라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가려고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서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스톱, 스톱하세요. 못 갑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죽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거하겠다는 생각도 스톱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죽어서 좋은 천국에 가겠다는 게 죄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라서 순교해서 천국에 가겠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그 어떤 생각을 해도, 죄가 아닌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의(義)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테레사 수녀라고 해도, 우리 인간에게서는 죄가 아닌 것이 전혀 나오지 않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 '새 언약의 영'으로 인해서 !!

그 다음에는 십자가에서 부활로 건너갈 수 없는 이런 구조가 성령을 통해서 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신약에 보면 이 성령을 '새 언약의 영'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슨 길이 열리느냐 하면, 구약에 있는 모든 성경말씀을 십자가에서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인해서, 그렇게 해서 나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구약의 언약들을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이, 그런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새 언약의 완성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부활로 뛰어넘을 수가 없다고 하면, 구약에 있는 모든 언약이 개입되는 사건에 있어서도 그 갭을 메울 수 있는 자질이, 그러한 자질이 더 이상 우리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 '유월절' 사건의 경우에 !!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어린양의 '유월절' 사건인데, 즉 여기에 한 무리의 히브리인들이 있고, 그들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무사히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피니까, 어린양의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어린양의 부활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린양의 부활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새 언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 언약을 설명할 수 있다면, 즉 모든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라고 하면, 즉 구약에 있는 모든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새 언약을 모델로 해서 그대로 적용이 된다면, 그런데 그 어린양이 죽어버렸는데, 그러면 그 어린양의 부활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 어휴, 죽을 뻔했다 ??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어린양, 즉 유월절을 보고 "어휴, 우리 장자가 죽을 뻔했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장자가 죽었다고 하는 것과 죽을 뻔했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데, 왜 그런가요? 만약 장자가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살아있는 히브리인들의 장자는 자기 집안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 즉 어린양의 소유가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죽을 뻔했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전히 자기 자식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야기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인데, 그래서 "아이고,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십자가를 잊어도 좋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자기는 살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은 다 죽었는데,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이용했기에 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에, 자기가 순교하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이용한 것입니까? 이 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도 예수님을 따라서, 이제는 베드로 자신이 어디에서 살겠다는 겁니까? 부활의 예수님 나라에서 살겠다고 하는, 그런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제안했다는 겁니다. 하여튼 마귀는 끝까지 따라다닌다는 말입니다.

◈ 교회 -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셨다 !!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죽을 뻔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그것을 두고 교회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지옥인데, 죽을 뻔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말입니다.

그게 아니고, 진짜로 죽었다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여기 뒤에서 "나는 죽었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여기서 "내가 살았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옛날의 나는 죽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다" 라는 고백을 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렇게 되어있는데, 즉 그리스도가 산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그래도, 신나는 좀비 인생 !!

그러니 우리는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데, 물론 우리 자신은 껍데기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는 우리를 구원하신 어르신이 있어서, 즉 우리는 죽어도 그분이 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오빠는 완전히 예수님의 쫄다구인데, 즉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경우에, 죽은 지가 이미 나흘이나 지났는데도 다시 살아나라고 하면 살아나야 된다는 겁니다. 즉 "자, 들어가고!", "예", "다시 나와!", "예", "이제 붕대를 풀어라!", "예", "제대로 풀었어?" "예, 다 풀었습니다" 라고, 바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산다고 무슨 새로운 낙을 볼 게 있다고, 나사로는 그렇게 살다가는 또 죽었다는 겁니다. 물론 또 불러낼지도 모르는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에 죽은 나사로에게 "어이, 또 한번 나와봐" 라고 하면, 나사로는 또 다시 튀어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완전히 좀비인생인데 말입니다(ㅋㅋ).

◈ 우리는 이제 살았다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죽게 되었다. 그런데 피로 말미암아서 내가 살게 되었다" 라고 한다면, 즉 '내'가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갔던 차원, 즉 부활은 저 위쪽에 있는데, 그런데 지금 이것은 아래쪽에서 놀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그 당시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어린양이 어디에 살아있는지도 모르고서 그냥 살았다고 우기면서 계속해서 가니까, 여기 애굽에서 살던 죽을 뻔했다고 여긴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고 난 뒤에 "우리는 이제 살았다" 라고 했는데, 사실 그들은 산 것이 아니고 애굽인으로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겁니다. 단지 두 사람만 빼놓고, 즉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 모두가 말입니다. 심지어 모세도 광야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 어린양이 지금 어디에 살아있는가?

그래서 이것을 찾아야 되는데, 즉 "어린양이 지금 어디에 살아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걸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홍해를 통과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러면 집에서 연습하면 되는데, 통과하는 연습을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백화점의 자동문을 처음 접했을 때, 다른 것은 다 제쳐주고 그 앞에서 노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양이 그 당시에 어디에 포함이 되어있습니까? 죽으심과 부활이 말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시내산에서 '언약' 이란 이름으로, 즉 율법이란 이름으로 주어지는데, 그렇게 주어지게 되면, 이 어린양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고 하면, "내 피로 말미암아서 죽어야 될 이스라엘인 너희가 살아서 움직인다" 라는, 그런 내용이 포함된 언약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 앞에서 히브리인들은 무엇을 해야만 됩니까? 그 언약을 따라서 치러지는 제사의 피 앞에서 그들은 "우리는 죽어서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그 언약이 살아있을 때, 비로소 그 언약의 혜택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 사건은 계속 살아있어 !!

이 언약이 신약에서 '새 언약'이 되고, 이 새 언약은 십자가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 그 유월절은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아니고 계속 언약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지나간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도 역시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아니고, 영원토록 성령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살아있으면, 즉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지금 니가 살려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려고 하느냐?" 라는 것을 따지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부활의 세계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육으로 살려고 한다면, 절대로 성령께서는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육으로 산다면 말입니다. 

◈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를 죽이고 누구의 몸이라는 말입니까? 오직 그리스도에 속한 몸이 될 때만,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예수님께서 계시는 부활의 나라에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그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그게 곧 '교회' 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러한 교회를 들락날락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교회에 등록하는 것은 필요한데, 왜냐하면 기도순서 때문에 말입니다. 청소당번이나 식사당번을 정할 때, 즉 카레와 짜장면을 누가 담당하느냐고 할 때는 필요한데, 하지만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낚시동호회나 바둑동호회와는 다른데, 기존의 동호회는 인간들이 각자 각자 살아있는데, 또한 살아있다는 티를 내야되고 말입니다. 그래서 "회비를 내세요" 라는 게 말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 예수님의 교회에서 무슨 회비를 받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이야기인데, 인간을 죽여 놨는데 무슨 회비를 받느냐는 겁니다. 죽여 놨는데 무슨 십일조를 받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안식일이고, 주일성수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전부가 다 사기를 치니까, 저거들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제 아무리 통한다고 하더라도 사기는 역시 사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띵' 하고 소리가 나는데, 사기(그릇)니까 말입니다(ㅋㅋ). 칼빈이 어떻고, 루터가 어떻고, 그런 사람들이 왜 등장하느냐는 말입니다.

◈ 사도행전과 관련을 지어서 !!

조금만 더 하고 10분을 쉬고 나서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어려운 것은 아직 근처에도 안 갔다는 겁니다. 디모데전후서에서 사도행전과 관련을 지어야하는데, 그러면 사도행전의 포인트는 뭔고 하니,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벌써 걱정이 되는데, 왜냐하면 이미 다 잊어버렸을 게 뻔하니까 말입니다(ㅋㅋ).

성령은 뭐라고요?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로 점프하게 하는데, 그런데 십자가에서 누구도 스톱을 했다는 겁니까? 예수님도 스톱을 했다는 말은,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에 끌고 가서 모두 다 죽여 버린다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 십자가에서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부활의 세계라는 것은, "나는 천국을 고대했습니다. 천국에 가려고 모든 것을 다 버렸나이다" 라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주여, 우리가 주를 위해서 모든 걸 버렸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렸다는 인간이 그렇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합니까? 하여튼 책임도 못 지는 말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데, 물론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물론 이왕 가만히 있어도 구원이 안 되는 것이니 속에 있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시원하기는 한데, 이상규 집사님처럼 댓글을 쓰고 싶으면 모조리 다 쓰고 말입니다(ㅋㅋ). 어쨌든 간에 그것과 구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 성령께서는, 일단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니가 그 어떤 일을 했던지 간에 죽은 자로 간주한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나서는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면 죽을 너희들도 살리시리라" 하고 하시면서 건지신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앞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무엇이 날아가 버리는고 하니, 예루살렘이란 기존의 중심지가 달라지는데, 즉 '땅 끝까지' 라고 하면서 그만 하늘로 비약이 되는데, 즉 언약의 땅 개념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게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데 말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안목으로 !!

다시 말해서, 성령이 밟고 지나가게 되면, 모든 개념과 해석이 예수님의 안목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지 않은 것을 두고서 '육' 이라고 하는데, 이 육은 십자가로서 다루게 되는데, 즉 그 어떤 것도 십자가 앞에서 육이 되지 않는 게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말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은 것처럼, 예수님뿐만이 아닌 모든 인간도 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육이냐? 그렇다면 저주해 줄게" 라고 해서, 즉 모든 인간은 육이란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는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오게 되어서 영이 되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면서,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까지 이 땅에서 오셔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 성령을 받게 되면 바로 그 예수님의 안목으로,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땅의 개념, 하늘개념, 율법개념, 교회개념, 남녀개념, 인간관계개념 등등, 그런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안목으로 다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 물론 결혼개념도 달라지는데 !!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즉 "아직 결혼을 안 했나? 그냥 혼자 살아라. 괜히 맞지도 않은 짝을 찾다가 고생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그렇게 혼자 살 때는 주를 섬겨라. 물론 너무 하고 싶으면 하고 말이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복음 때문에 마찰이 생긴다면, 서로가 깨끗하게 갈라서라" 라고 말입니다.

(고전 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전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고전 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자기는 결혼을 안 했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하는데, 사도바울은 너무 주관적이야. 그리고 이 양반이 얼마나 건방지게 말하는지, 지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럼 베드로는? 그럼 요한은? 니만 사도가? 니만 가수가? 사도바울은 너무 주관적이고 독단적이야. 자기밖에 몰라"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샌더스란 사람이 그렇게 비난하고, 많은 신학자들이 여기에 동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10분을 쉬고 우리가 해야될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안목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까지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오늘날 우리의 변화로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10분을 쉬겠습니다.


                                                           2011,09,26 재정리 마침 - 녹취 '구'

                                                             사도바울님, 진작 좀 가르쳐주지요. ㅋㅋ

 첨부파일 : 11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딤전후(교회를 잊어라)(강의정리)-재정리(1).hwp (47.3K), Dow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