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강-엡 3장 18-19절(사랑의 규모)1906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18-119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가 기도하는 대목이지요. 사도의 기도의 바탕에는 이런 것이 들어 있어요. “여기서 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것이 밑에 깔려 있어요. 사도는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이야기할 때,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는 괜히 해봤자 자기 체력만 낭비되지요.
사도는 우리가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를 이 편지에서 하실 분이 아니에요. “이것은 안 들으면 안 돼.”라는 취지가 듬뿍 담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을 언급한다고 해서 우리가 갈구하는 사랑에 대해서 사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알고부터 이 세상 자체를 자연재해로 보는 겁니다.
여기 있다가는 다 같이 죽습니다, 라는 정신을 다 품고 있어요. “앞으로 제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꼭 들으셔야 됩니다.”라는 것이고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그것이 아주 강렬해요. 사도가 지금 기도를 하는데 기도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기도내용대로 꼭 여러분들이 그 기도내용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하는 이 자체가 곧 현실입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가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를 하실 분이겠어요? 이 에베소서 3장의 성경을 쓰시면서.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이야기할 때 롯은 천사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작살난다.”
그래서 롯은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절박함이라는 것은, 저 사람을 어떻게 꾀어볼까, 저 사람을 어떻게 이용해볼까, 라는 그런 생각이 일절 없어요. 저 사람이 나를 욕하면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우습게 되겠지, 라는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절박함이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들었던 바 그 현실적인 것만 사위를 불러다가 그냥 내뱉습니다.
“나가자. 여기 망한단다. 여기 불바다 된단다.” 그렇게 하니까 그 사위는 롯의 절박함에 동조를 하지 못했어요. 같이 동감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롯의 사위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되어 있어요. 오늘날 교회의 설교가 전부 다 농담 같아요. 절박하지를 않아요. 목사부터 절박하지 않고 교인들은 물론 절박하지 않고.
그냥 취미생활 하러 오신 분들 같아요. 점심 먹으로 오셨습니까? 사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주께서 구원하실 때 필수적으로 투입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절차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가운데 넘치게 해달라는 것은, 기존의 있던, 우리가 망하는 세상에서 기대하고 있던 그 세상에 대한 사랑, 그것을 다 긁어내는 절차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사랑이라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하고 가로막는 그런 사랑일 뿐이라는 거지요. 진짜 사랑을 감추는, 대역하는 엉터리사랑으로서 우리는 계속 이 세상에 눌러앉으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본문에서 사도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빠져나오면서 정말 이 땅을 빠져나온 사람에게 꼭 주어지는 절차요, 과정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뭐부터 시작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한 성령에 의한 사랑이 없다고 치고 그 없는 경우를 먼저 한 번 상상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주님의 성령의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기쁨으로 살아가는가? 그럴 때 여기에 보통 세 가지 사랑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제가 임의로 나눠봤는데 첫 번째는 상상적사랑, 두 번째는 상징적사랑, 세 번째는 돌발적사랑,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어요.
성령으로 오는 사랑 말고, 하나님에게서 온 사랑이 없을 때의 그 사랑이라는 것이 뭘 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보자는 말입니다. 상상적 사랑이라는 것은 내 몸이 요구하는 사랑, 내 몸이 원하는 사랑, 그 사랑이 내가 상상하니까 저는 이름을 상상적 사랑으로 표현해 봤습니다.
상징적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말이 좀 어려운데 이것은 쉽게 말해서, 남들이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사랑, “너는 사랑할 때 이렇게 사랑해야 돼.”라고 세상에서 우리를 주시하면서, 우리를 응시하면서 요구하는 사랑이 있어요. “적어도 네가 우리 집안사람 같으면 이런 사랑은 허락이 안 돼. 이런 사랑 같으면 내가 용납해줄게.” 이런 조의, 이미 규제된 사랑, 남들에게 동의를 받을 수 있는 그 사랑, 규격화된 사랑을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고 그동안 나를 키워주고 길러준 부모님들이 ‘네 색시감은 이래야 되고, 네 색시감은 이래야 돼’ 라고 미리 정해놓은 그 사랑을 내가 맞춰드리는 사랑, 그게 이 세상적인 사랑이지요. 내가 사랑하지 않는데 상징적으로 남들 보기에 사랑인 것처럼 보이는 사랑, 우리는 그 사랑을 마다할 수가 없습니다.
“어버이날인데 네가 바쁘더라도 집에 한 번 왔다 가거라.” 이게 바로 상징적 사랑이에요. 부모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데 어버이날이라는 그 상징, 그 상징에 맞춰야 자식 노릇 하는 것처럼 세상에서는 그걸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드라마 보면 이 두 가지의 사랑이 서로 대비되고 있어요.
적어도 재벌집 아들이면 같은 재벌급의 딸과 혼인을 해야지, 회사에 막 입사한 비정규직으로 들어온 여사원과 우연히 계단 올라가다가 커피 쏟으면서 그 때부터 눈 맞는 그런 사랑에 대해서 출신 성분, 근본도 없는 것이라는 말 나오는 것.
나중에 다방에 불러놓고 돈 봉투 내 밀면서 “근본도 없는 네가 감히 누구 집안을 넘보나?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그 사랑. 항상 이게 충돌을 일으키는 사랑이에요. 내가 원하는 여자를 얻지 못하고 집안에서 맞춰주는 여자하고 억지사랑을 해야 될 그런 갈등. 이 세상은 사랑은 없는데, 내용도 없고 하나도 사랑하지도 않는데 상징적으로 사랑인 것처럼 포장되는 사랑, 그 사랑과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의 강렬함이 이 세상의 사랑입니다. 대다수 사랑이지요.
내 몸이 원하는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우리는 살기 위해서 몸을 너무 굴립니다. 몸이 아파요. 몸이 아프기 때문에 그 아픈 만큼 뭔가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으로 채워야 되는데 그 기쁨은 내가 원하는 사랑 외에는 다른 약이 없거든요. 만약에 둘이 살다가 배우자 한분이 먼저 돌아가셨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내 몸이 원하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사랑, 할 말 안할 말 다 털어 내놓고 허물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사이, 그게 사랑이에요. 유명한 시인인데요. 경북대 교수하다가 먼저 아내를 보냈어요. 그 시인이 시를 썼습니다. 이름이 김 춘수인데요. 아내가 있을 때는 아내가 그렇게 귀한 줄을 몰라요. 바깥으로 돌면서 문학 활동 한다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시인이니까요.
그런데 시고 뭐고 간에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얼마 안 되어서 죽어버렸어요. 너무 외로워서 미치겠는 거예요. 부엌 쪽을 보면서 맨 날 하는 말이 “고등어 굽던 당신은 어디로 갔나.” 맨 날 그러고 있어요. 아내 죽고 난 뒤 몇 개월이 지나도 지금도 그 자리에서 고등어를 굽고 있는 착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지만 몸이 외롭고 허할 때는 나를 잊을 정도로, 내 온몸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을 원합니다. 만날 때는 꼭 껴안고 싶지요. 빨래 짜듯이. 그리고 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이 시간 그이는 뭐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옥탑방 올라가서, 구름사이의 달을 보면서. ‘이 시간 그 이는 지금 뭐하고 있지?’ 그 감정에 부딪혀서 또 담배나 피우지는 말고요.
내 몸이 원하는 사랑에 그리워하면 마치 서점에서 서가를 둘이 같이 지나가는 것 같아요. 서가 지나갈 때는 안보이다가 그 사이사이로 잠간씩 보이잖아요. 까꿍, 하다가 또 안보이고, 또 까꿍, 보이고. 그러니까 항상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분신 같은 겁니다. 나만 있으면 내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쪽이 함께 있어야 내가 있는 거예요. 나의 충족함이 있는 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을 해 봐야 알지요 뭐.
그래서 내 몸이 원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뭐라 해도 끝내 이겨서 그 사랑을 쟁취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을 가로막지요. 그것은 불쌍한 사랑이라고 가로막지요. 가로막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데 세상의 눈들이 가로막아 버리면 그 미흡함, 그 결함, 그 결핍, 그게 더욱 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주위에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몸은 그런 숱한 사랑으로 만족하지 않고 개발해내요. 새로운 내 몸을 위한 사랑을 날마다 개발해 냅니다. 날마다 결핍을 느껴요. 마치 남자 다섯 명 사귀었다가 이제 다 청산하고 여섯 번째 사귀는 사마리아여인처럼.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여인이 주님 만날 때 여인이 보여줄 역할은 뭐냐? 결핍이에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 다섯 명을 만나도 그 자체도 결핍이었다. 인간은 영원히 결핍된 존재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결핍되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그 안에 만들어주지요.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항상 중심이 뭐냐? 내 몸 중심이에요. 내 몸 중심이다 보니 누구를 사랑해도 그게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고, 소유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내가 일단 밑천을 들여야 되고, 저 사람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야 되거든요.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것처럼. 그런데 인간의 몸의 한계가 뭐냐 하면, 인간의 몸과 몸 사이에는 저쪽 몸이 보따리 싸들고 다 와도 내 몸에 접수가 안돼요.
이것은 결혼을 해보면 알아요. 결혼을 해보면 아무리 아내를 사랑해도 내 몸이 있는 한 내 몸을 몽땅 다 그 아내 속에 집어넣는다 할지라도, 나는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끝낸 줄 알았는데 내 몸에서 스멀스멀 새로운 나 위함이 또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다 줬는데, 분명히 저 사람에게 ‘다 가져가라’하고 다 줬는데 또 ‘내 몸을 위해서, 이것은 나를 위해서 내가 챙겨야 돼. 내가 소유해야 돼.’라고 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가 또 새로 생겨버렸어요. 퍼줘도 또 생긴다니까요. 퍼줘도 또 생겨요.
인간은 자기 몸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요. 다 준다 했는데 그것은 10년 전 이야기고, 10년 후의 나는 ‘안 돼. 이것은 내가 챙겨야 되겠어.’라는 것이 따로 생겨나는데 이것은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몸 자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사랑이 성립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사랑자체가 성립 안 되고 몽땅 드린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내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 문제 아닙니까? 사람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괜찮을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어느새 내가 또 내 것을 챙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외로움을 또 느끼는 거예요. 아내하고 남편하고 결혼했는데 남편은 말합니다. “당신이 내 것 다 가져갔다.”
그러나 아내는 “당신만 그런가? 나도 다 줬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둘이 서로 저쪽의 몸을 접수할 수 있는 몸들이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몸과 몸 사이에는 다 건네줄 수 없는 형편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몸을 어떻게 사랑한다고요? 내가 눈앞에 있는 이웃도 사랑 못하면서 어떻게 “주님, 기다리세요. 제 몸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런 구라가 어디 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하는 말씀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을 때 우리는 여기서 자연적으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몸 자체에서 복음에 대한 반발이 꾸역꾸역 계속 올라와 있어요. 주님이 그 말씀을 하니까 “옛날에 사랑 많이 했잖아요. 봉사 많이 했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0장 2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말씀인데요. 25절부터 보면 어떤 율법 교사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했을 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니까 영생과 율법이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 된다는 거지요.
그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27절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가능합니까? 이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거예요. 화내고 분노하고 하나님께 대들고 “더는 못해줍니다. 최선을 다 했는데 더 이상 제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제 할 도리 다 했는데! 여기서 더 이상 하라고 한다면 저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하고 화내면서 어디로 피하느냐 하면, 토굴로 피해요.
자기만의 세계, 주님한테 충성했다는 기념물을 걸어놓는 아지트가 만들어져 있어요. 주님이 주신 그 말씀이 너무 따가워서, 그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피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토굴에는 바퀴벌레 안 나타납니까? 그 토굴, 자기가 만든 아지트 천장에 자기 욕망을 쏘아대고 다시 밑으로 떨어지고, 다시 쏘아대고 또 밑으로 떨어지고. 완전히 지옥이 따로 없어요.
나만의 세계, 천국이 아니고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해결나지 않습니다. 해결점이 안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아무리 입술로는 사랑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이 몸을 저쪽 몸에 다 던져 넣을 수가 없어요. 사랑은 항복이 아닙니다. 귀순하는 거예요. 내 보따리 다 챙겨서 그 안에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항복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귀순은 안돼요.
뭔가 우리 몸이 우리의 구원을 발목을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얼마나 거짓말을 해대는지요. 서로가 부부로서 살아가도 진정한 사랑은 애초부터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아까 말한 대로 인간은 상상적 사랑을 멈추지 않지요.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랑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은 상상적 사랑이죠. 내 허한 몸을 감추기 위해서, 내 몸에 따뜻한 위로의 말을 주기 위해서 내가 찾는 사랑.
그것은 상상적 사랑이고 상징적 사랑이라 하는 것은, 세상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사랑이에요. 네가 아내라면 이 정도 해야 되고, 남편이라면 이 정도 해야지. 네가 자식이라면 나한테 이 정도 해줘야지. 세상에서 나에게 추궁하고 요구하는 사랑이 있어요. 세 번째 사랑은 뭐냐? 돌발적인 사랑인데 이것은 사랑 같지도 않아요. 사랑 같지도 않은데 자꾸 따라와.
무슨 말이냐 하면, 내 타입도 아니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계속 사랑한다고 쫓아와. 내가 원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돌발적으로 쳐들어오는 사랑. 스토커 같아요. 스토커가 붙었어요. 떼지도 못해요. 전화 안하면 죽인다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첫 번째, 상상적 사랑이란 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원해서, 나는 이런 사람 원한다, 나는 이런 사람과 사귀고 싶다. 이것은 내 쪽에서 원하는 것이고요. 반대로 내 쪽에서는 사랑하지도 않는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나오니까 기겁을 하고 도망치고 내빼기 바빠요. 그런 사랑. 이 세 가지 사랑은 전부 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심이 내 몸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내 몸이 귀찮으냐, 편안하냐? 내 몸이 행복하냐? 항상 측정을 내 몸이 측정하기 때문에 이것은 다 가짜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사랑을 읽어볼게요. 에베소서 3장 19절에 보면,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이런 사랑을 받았을 때 그 받은 사람의 현상이 뭐냐? 요한복음 3장 3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 원리가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랑이 넓으면 나의 내 사랑은 좁아져야 되고, 그 사랑이 길면 나의 내 몸 사랑은 짧아져야 되고, 그 사랑이 높으면 나의 내 사랑은 형편없이, 무시해도 될 정도로 낮아져야 되고, 그 사랑이 깊이가 있다면 나의 내 사랑 챙기기는 얕아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되니까. 이 원칙이 작용해요. 그렇지 않고 만약에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아, 내가 세상의 사랑을 원했건만 세상사랑은 다 헛것이야. 나는 정말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 필요해.’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나 좋으라고 주신 사랑 아니에요. 내 외로움 덜라고 주님께서 이 사랑 주신 것이 아닙니다.
흔히 저에게 그런 말씀 하시는 분들 많이 있어요. “목사님, 복음 알고 난 뒤에는 친구들 다 떠나서 외로워요.” 본인 외롭지 않으라고 주께서 복음 준 것이 아니거든요. 아직도 주님의 사랑을 상상적 사랑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잘못된 거예요. 주님의 사랑은 반비례해서 내가 기대하고 요구했던 것은 형편없이 밟혀야지요.
나는 찌질해도 괜찮아요. 인생사는 처지나 형편이 너절해도 상관없어요. 왜?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 충만하기 때문에. 그러면 이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우리 몸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요. 내 몸이 있는 이상은 내 몸을 다 털어서 주님 사랑에 안길 수가 없습니다. 이 몸은 내 관리 대상이 안돼요. 내가 관리할 수 없어요. 내 몸이 잡아당기고 우리는 항상 사랑을 소유로 보잖아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주위에서 자꾸 결혼하라고 하는데 결혼할 사람이 없네요, 라고 하거든요. 그것은, 제가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내가 젓가락질을 해서 먹을 반찬거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먹을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내 몸 소유 위주기 때문에 적당한 남자, 저건 내가 먹으면 맛있겠다, 그런 남자가……, 물론 남자는 많지요. 하지만 젓가락이 안가는 거예요. 내 것 만들 만한 것이 쉽지 않은 거예요.
인간은 몸이 있는 자체가 이기주의기 때문에. 그래서 중매라도 들어오면, 이 따위 남자 만나려고 그동안 그 좋은 혼처 다 마다했느냐고 나오지요. 내가 지금까지 너 같은 인간 만나려고……,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 정도로 우리는 이미 강력하게 우리 위주입니다. 내가 내 위주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 놓치고 잊으면 안돼요. 자기는 순수한 줄 알고 있습니다.
사랑 원한다고 순수한 것이 아니에요. 순수하지 않은 몸 가지고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서 천국을 내 소유로 만들겠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오죽했으면,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 못하는 주제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요한일서 3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주제 파악하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 땅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어디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어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품속에만 독생자가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품속에만 있어요. 이 품속에 있는 이 사랑이 뚜껑을 열리면 그 사랑은 뭐가 되느냐 하면, 고체가 아니고 액체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페인트 뚜껑 열면 그 안에 고체가 아니고 액체지요. 인간 대 인간의 몸이 사랑을 못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몸은 고체기에 사랑이 안돼요. 그러나 사랑이 액체로 나온다면 이것은 성경에서 부어준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성령을 받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에 하늘에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부어주신다는 것은 액체성을 띄는 거예요. 액체성을 띄면 우리는 뒤집어쓰는 겁니다. 사랑을 뒤집어쓰는 거예요.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고체라는 내 몸에 주님의 사랑을 뒤집어쓰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3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라고 되어 있고 오늘 본문 에베소서 3장에서는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충만한데서 충만하게 한다. 더 이상 네가 네 몸을 심사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랑은 심사하지 않는 거예요. “주여, 제가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습니까?”라고 묻지 않아요. 사랑은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이 오면 내가 내 잘못을 묻지 않아요. 따지지 마세요. 우리가 물을 수 있다면, 주께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걸 물어야 돼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요.
그냥 주께서 액체로 부어주시는 사랑이 넘쳐버립니다. 그러면 고체의 내 몸이 꼼지락거리면서, “이런 일도 했습니다. 봉사도 했고 헌금도 했습니다. 선교도 하고 예배참석도 했습니다.” 이러잖아요. 그 고체에 페인트 통 안에 들어 있는 액체가 부어져 버리면 그 고체가 하는 짓은 전부 다 완전히 덮여버린다고요. 이런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이런 성령이 없으니까……, 아까 했지요, 우리가 사랑이 없는 경우를 상상하라고요.
이런 사랑이 없으니까 내 몸을 내가 천국 보내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뭔가 시작을 해야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몸이 부서지라고 봉사해드릴까요? 헌금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되겠습니까?’ 자꾸 내 몸을 사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품속에서 사랑을 드러냈다는 말은 이 지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말이고 다시 말해서 너의 사랑은 안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결별된 상태에요. 선악과에서 죽음이라는 중앙이 있는 이유는, 생명나무의 생명의 취지를 높이기 위해서 먼저 선악과의 죽음조항을 달았던 거예요. 이걸 먹으면 죽지만 저걸 먹으면 산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몸으로 어떤 보고 싶은 사람을 그려보세요. 그러면, 아, 그리울 때는 마치 징벌을 받는 것 같아요. 벌 받는 것 같아요. 사랑의 죄. 너무 그리워서.
그러나 그것은 가짜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요구하고 내 몸이 허하기 때문에.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배우자가 먼저 돌아가고 난 뒤에 그리운 아내가 보고 싶을 때 징벌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걸 징벌이라고 했지만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면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자체가 재앙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미세먼지로 가득 찬 자연재해에요.
거기서 네가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사도의 말은,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이라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절실한 거예요. 교회는 놀러오는 곳이 아니에요. 교회는 힘 채우러 오는 것이 아니고 있는 힘도 다 빼는 거예요. 쇠해야 됩니다, 우리는. 성령이 올 때 이것은 마치 빠찡코에서……,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동전 넣고 무심코 잡아당겼는데 ‘777’ 나오면서 감당할 수 없는 코인이 쏟아지는 것처럼 이것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이 넘치는데 계속 넘친다고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고, 또 은혜, 은혜, “이제 그만!” 해도 소용없어요. “누구 맘대로 그만이야? 계속 용서할거야.” 이게 바로 성령의 충만이고 이게 사랑의 충만입니다. 잘 보여서 사랑을 빼낼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이런 사랑을 주는 것은 두 번 다시 하나님이 자기 사람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를 원해서 그런 거예요.
어떤 노래를 듣는데 그 노래의 나레이션이 먼저 나와요. 전화 벨소리가 들리면 여자가 전화를 받아요. “여보세요?” 남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야. 잘 있었어?” 아주 공손하게 마음을 낮춰서 “나야. 잘 있었어?” 남자가 오랜만에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는 여자가 “미안해.” 하고 툭 끊어버렸어요.
그리고 뒤에 나오는 노래가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 하면서 나오는 노래에요. 우리가 아무리 주님한테 전화를 걸어도 내 쪽에서 전화 거는 식으로는 통화가 안돼요. 연락이 안 됩니다. 교회마다 무당집을 만들어가지고요. 금요철야하면서 얼마나 주님한테 전화를 겁니까?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라고 해가면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님이 “미안해.” 툭 끊어버려요.
성령은 주님 자신의 그 품, 주님의 품의 뚜껑이 열려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사랑은 없다는 거예요. 주님 품에만 있지 이 세상에 사랑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가, 그걸 아셔야지요. 왜 사랑받아서는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지를 아셔야 됩니다.
그 이유를 지금 말씀드릴게요. 아인쉬타인이라는 과학자가 상대성원리를 이야기했는데 첫 번째 것을 특수상대성원리라 하고 두 번째 것을 일반상대성원리라고 합니다. 특수상대성원리라 하는 것은 뭐냐? 우주에 물질이라는 것, 일례로 담요 위에 무거운 공이 있으면 그 밑이 휘어지는 것처럼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의 질량 때문에 휘어지는 것이라 하는 그것이 특수상대성원리에요.
그런데 일반상대성원리는 뭐냐? 그걸 반대로 뒤집습니다. 물질의 질량이라 하는 것은 공간이 휘어진 효과라고 본 이것이 일반상대성원리에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우리가 몸무게가 나가는 것은 내 주위의 공간이 휘어졌기에 그 휘어진 효과가 우리의 질량이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잘 모르니까 비슷한 예를 들겠어요. 손 흥민이 한국에서 축구하다가 16세에 독일 함부르크에 갑니다. 거기서 갔을 때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기숙사 옆에 운동장이 있습니다.”라고 했어요. 기숙사 옆에 운동장이 있을까요, 운동장 옆에 기숙사가 있을까요? 사실은 운동장 옆에 기숙사가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 애는 축구하는 공간이 더 필요하지 밥 먹는 그런 것은 좀 멀어도 관계없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공간, 환경, 그 환경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일반상대성원리에요. 공간의 휘어짐에 의해서 질량이 있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자기운동, 사랑의 자기운동, 사랑의 품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일성, 예수님이 지배하는 그 통일된 공간, 그걸 두자로 천국이라 해요, 예수님이 통치하고 지배하고, 온전히 예수님의 은혜만 가득 차 있는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로 만드신 거예요.
지금 내 상상적 사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성령께서 왜 한없이 퍼부어주느냐? 내 사랑, 내 소유되라고 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주님의 소유라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이 소유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랑은 내가 나쁜 짓 한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내가 착한 일 한다고 더 주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그 사랑에 의해서 나라는 존재가 미미하게 점점 축소되고 작아지는 겁니다. 주님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뭘 원하는 이것은 시답지 않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내 몸이 아프다, 내 한 달 수입이 5십만 원도 안 된다, 자식들이 나에게 전화도 안 건다, 또 사기당해서 3억 2천 날렸다, 이런 모든 이야기, 그것은 본인이 너무 커서 그래요. 자기가 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주님의 계시라는 그 환경은 나라는 이 질량을 안 받쳐 주느냐? 그것은 특수상대성원리지요. 나라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고, 예수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거 뒤바뀌어야 돼요. 손 흥민이 소시지 먹고 빵 먹고 싶어서 독일 간 것이 아니잖아요. 축구하러 갔잖아요. 그러면 기숙사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운동장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가 공을 찰 운동장이.
지금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천국이라는 그 곳에서 주님의 은혜에 찬미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주님 덕분에 밥 먹고 살고, 잘 먹고 잘 사느냐는 그것은 바뀌어져야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는지. 우리가 어떤 진리를 규정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진리를 진리라고 인정해줄까?
이게 바로 상징적인 복음관이거든요. 내가 뭘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들이 이걸 복음이라고 알아줄까가 더 우선이 되고 거기에 더 예민해지는 것, 남 눈치 보는 것, 그놈의 세상이 멸망하는 세상이라도, 그게 불심판 받을 세상이라도, 그쪽에서 인정해주지 않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는 거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유명한 교회, 유명한 사람들을 원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6장에 보세요.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아요. 하나님은 유명한 사람을 몰라요. 하나님은 유명한 사람을 알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이처럼 자기 몸 하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이 내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놓고는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는 말을 겁 없이 이야기해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사랑을 언급하면서 사도바울이 아주 체제 있는, 규모 있는 말을 하는데 이렇게 합니다. 천사의 말, 그거 사랑 아니다. 예언하는 것, 그거 사랑 아니야. 복음 전하는 것, 그거 사랑 아니야. 그리고 내 모든 것을 구제한다, 그거 사랑 아니야.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그거 사랑 아니야.
우리는 하나를 얻기 위해서, 천국을 얻기 위해서 내 몸을 불사르고, 내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교회에 모든 것을 헌신하고……, 말하고 나니 전혀 우리교회는 해당이 안 되네요. 모든 것을 뭘 얻기 위해서, 소유하기 위해서, 내 허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그건 사랑 아닙니다. 노림수지요. 사랑 아니에요!
내 몸 하나 건강하기 위해서 주 앞에 충성하는 척을 하는 것, 사랑하는 척을 하는 것. 사랑은 뭘 로 되어 있는가?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왜? 액체에 완전히 뒤범벅되어버렸으니까 내 것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요.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일이 아니고 사랑의 절차, 사랑의 과정이에요.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사랑이 있다고 할 때, 그 십자가가 뭐냐? 지금 중간에 회개하지 마. 회개도 짜증스러워. 중간에 회개하는 것은 회개했다가 도로 올수가 있어요. 끝까지 밀어붙여요. 어디까지? 우리가 죽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 그 자리까지 밀어붙입니다. 중간에 어설프게 회개하면서 “주여, 신자 맞지요?” 이렇게 까불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랑주세요.” 그러지 마세요.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네 주제는 이게 다야. 네가 진즉에 죽어 마땅해.”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절차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모든 사랑을 긁어내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 하면 괜찮겠지. 이 정도면 대단한 존재지.’ 그걸 다 긁어내는 과정과 절차가 성령의 사랑이 오는 겁니다.
사랑의 넘침은 나의 쪼그라짐, 사랑의 깊이는 나의 얕음, 그리고 사랑의 너비는 내가 작아짐, 항상 병행하게 만들어요. 사랑의 대단함은 나는 아무것도 아님. 그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남을 우리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사랑은 뭐냐? 차이 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와 내 몸이 요구하는 것과의 차이남, 그 차이성.
그래서 날이 가면 갈수록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더욱 더 강렬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잘난 내가 얼쩡거리지 않기 때문에. 주어진 모든 것이 사랑의 덩어리거든요. 여러분, 대구 재래시장, 칠성시장에 가게 되면 해물 파는 데가 있어요. 거기 보면 해물탕 거리를 파는데 우리가 원하는 대로 비닐에 담아주거든요. 저거 하나 더 얹어주세요, 해서 돈 더 주는 식으로 계산하는데 해물탕을 그렇게 먹을 수도 있고요.
가까운 마트에 가서 사서 해물탕 끓여먹을 수도 있어요. 만 천 원정도 하던가요? 거기는 포장을 해놓아서 우리는 손도 못 대게 만들어놓았어요. 집에 가서 비닐 뜯고 그 안에 미리 들어 있는 양념장 풀어서 끓입니다. 우리가 손도 댈 수 없는 요소들이 끓이면 끓일수록 국물이 끝내줘요. 우리가 원치 않는 그 사랑이 나오는데 주님의 사랑의 국물이 날로 깊고, 넓고, 그 국물이, 그 사랑이 끝내줘요.
왜? 개뿔도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하시기 때문에. 매사에. 우리는 자꾸 유명해지려고 하고 유명한 사람 되려고 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모든 것이 남성 위주가 되었어요. 여자도 전부 다 남성에 소속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자라는 것은 남자의 탈골이에요. 남자가 결핍되어 삐져나온 것이 여자라서 여자는 남자에게 박혀야 여자의 본래의 존재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남자들은 여자다운 여자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여자조차 범죄해서 남자의 소속이 되어 있으니까 여자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서 새로운 사람을 여자의 자리에 집어넣습니다. 모든 남성들은 죽음이고, 아담은 죽음이고 여자만이 하와, 생명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자리가 주님 보시기에는 허한 자리에요. 우리가 엉뚱한데 신경 쓰고 있고 정말 우리의 자리는 우리가 의도해서 그것을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죽음의 자리거든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 20절에, 피조물은 허무한데 굴복한다, 썩어진다는 겁니다. 지난 여름수련회에 아가서 했는데요. 지금 책이 나왔지요.
<완전한 사랑> 39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랑에 의해서 여자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생기는 것이 남자다. 원래 창조는 남자가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여자가 생기는데 사랑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영생에 의해서 여자가 먼저 생기고, 그 여자란 빈자리고 그 빈자리,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하나님의 여성성, 하나님의 여성다움이 먼저 생기고 거기서 나오신 아들이 있으니 그 아들이 진짜 우리의 신랑이 됩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동안 왜 이런 사랑을 몰랐는가? 그놈의 내 상상적 사랑, 내 사랑 챙기기 바빠 가지고 이런 사랑을 계속 끝가지 고집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리고 세상에서 그 사랑 안 해주니까 자꾸 토굴로 피하고 자기만의 세계, 아지트로 자꾸 피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누굴 사랑할 때 자기 육정을 만족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 장착된 복음의 요소를 훼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사랑은 인간적인 육정의 사랑이 우선이 안고 복음 안에서 사랑입니다. 우리 둘 다 쪼다 아니냐. 우리가 둘 다 바보거든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저는 고맙게도 우리 교회가 그런 점에서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누가 왔잖아요. 절대로 나서서 관심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외로워서 교회 왔을 거야. 한 번 두고 보자. 본색이 드러날 때까지.’
가만 기다려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요. ‘분명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 신에게 빌러 왔을 거야. 두 번 다시 안 속지.’ 이런 식으로. 탐색, 탐색을 계속 하고 있어요. “왜 나에게 관심두지 않고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그것 봐. 본색 드러났잖아.” “날 무시하지 마라.” “본색 드러났잖아.”
여러분, 우리는 무시당해야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 우리가 가렸습니다. 내가 어줍지 않게 내 선행으로 사랑을 빼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진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어리석게 그것을 가리고 그것이 도리의 우리 자신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저희들이 이제는 눈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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