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됨(엡4;1-3) 19063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7. 1. 17:40
2019-06-30 12:38:32조회 : 544         
   하나됨 19063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하나됨(에베소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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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06-30 13:22 
하나 됨  

2019년 6월 30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1-3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미 인간 세상에서는 자기네들 끼리 하나됨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분업이라는 것도 그런 작업의 일부입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 끼리 단결해서 보다 살기 유리한 문명 환경을 조성하자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와 노고를 집어놓고 축적된 기술을 총동원해서 그런 식으로 될 수 있는 한 사는데 지장이 없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하나됨’의 중심은 늘 각 개인이라서 사적인 기대치를 표현하는 일방적 해석을 하게 됩니다. 즉 ‘나를 위하여 이 하나됨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억지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은 비록 모든 인간 존재가 그런 생각을 한다할지라도 전혀 하나됨에 부합될 수 없습니다. 

하나됨의 원천은 가족에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 남자를 통해서 여자로 만들었을 때, 둘이지만 실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됨’에 있어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원리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원리가 깨어지니 더 이상 하나됨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저주를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이것은 전혀 ‘하나됨’에 부합되는 모습이 아닙니다. 남성중심 세상이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신 그 하나됨이 아닙니다. 여자들 나름대로 독립하고 싶어도 여자들에게는 ‘여자만의 세계에 합당한  모델이 없습니다. 

기껏 해봤자 남자들이 해놓으신 것을 자신들이 그것을 같이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하나됨을 종속된 팔자를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하나됨을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이 자본주의 시대 때의 하나됨이란 돈을 토대로 한 하나됨입니다. 

가족이라는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 돈의 이해관계가 뼈대로서 드러나게 됩니다. 돈없는 부모는 부모라고 여기지 않게 됩니다. 돈없는 자식은 자식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나부터 우선 살 궁리하겠다는 것이 기본정신이 된 채, 여기에 필요한 하나됨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살고 보자’라는 이 의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일로서 하나됨이 아니라 ‘주님의 일’로서 하나됨이 되려면 이 주의 일을 방해하는 요소인 인간들의 ‘살고 보자’를 허락하지 않으신 겁니다. 갈라디아서 6:12에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자는 결국 십자가를 기피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는 이 세상 사람으로서 하나됨에서 못 벗어난 모습이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곧 인간들 중심의 하나됨에서 벗어난 자들을 묶어주는 하나됨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본인들의 생존의식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일’을 증거하는 배역자로서 주님 중심으로 하나됨을 형성합니다. 종교행위란 남들 보기에 거룩해 보지만 실은 계속해서 법에 밀리면서 기어이 살고 싶어 최선을 다하는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찬양 할테니 제발 살려주시고 제 미래를 보장해 달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 중심의 하나됨에 속한 사람은 그 어떤 몸짓이라도 주님에게 굴복하는 몸짓이 됩니다. 사람들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 되는 이유는, 자기 죽음과 자기 망함을 배제하지 않고 타인에게 내뱉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 있는 여기 나 중심으로 세상이 재편되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남을 믿었는데 그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남을 믿기 전에 자기 자신을 믿지 말아야했습니다. 남에게 발등 찍히기 전에 본인이 본인의 발등이 미리 매일같이 찍고 있어야 했습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아니하면 자기 중심의 엉터리 구원을 쥐고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됨이란 주님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들통 난 자들의 모임입니다. 어린아이라도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참으로 죽기 싫어하기에 끝까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자기 중심의 하나됨(통일체)’을 늘 구상하며 삽니다. 한 가족이라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나를 위해 주는 가족이 참된 가족이다’고 일방적으로 우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됨은 이 세상에서 하나됨에서 찾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요소를 주입시키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한 이스라엘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없던 시절, 자기네 소견에 보기에 옳다고 여기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이 오게 되면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됨을 보여줄 모델로서 쓰여집니다. 그리고 그런 왕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집결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겁니다. (시 51: 17)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시 51:9)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이 다윗의 출생에는, 그 전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내에 의미없는 여인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룻이라는 이방여인입니다. 그 룻이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은 겁니다. 

즉 남자 중심의 하나됨의 세계에서 남성과 상관없는 여자가 용병처럼 투입되므로서 ‘세상적인 하나됨’에 ‘주님의 하나됨’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전에 ‘하나됨’에 빠져나간 그것이 새로운 출구로 이 세상에서 들어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말은 이제 그 예수님과 하나되는 자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된 자는 이제 ‘자신의 잃어버림’이 마땅하다 자신의 ‘불의한 청기기 됨’이 마땅함을 압니다. 자기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지 않고 ‘주 안’에서 전자동으로 돌아감을 감사, 또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거나 해석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7-01 12:47 

30강-엡 4장 1-3절(하나 됨)1906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하나 됨이라는 것이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주어지게 되면, 이는 기존에 인간적으로 하나로 구성해서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모아서 하나로 결속해서 우리 이대로 세상 편안하고,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끝내자 하는 모든 시도, 그 시도에 대해서 주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새롭게 구성되는 하나 됨이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 됨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겨서 하나로 뭉친 겁니다. 이것은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여기 성령의 하나 됨이라 하는 것은 나타남이 아니고 은닉된 것이고 숨겨진 겁니다. 

그러면 언제 나타나는가? 성령을 통해서 이 ‘하나 됨’이 나타날 때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 물론 주님이 그 안의 중심에 계시고 주님과 더불어 손잡고 하나 되게 하신 그것에 필요한 배역을 맡아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배역을 맡았다는 말은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지금 네가 하는 모든 행동 같은 그것이 누구에게 굴복하기 위한 몸짓이냐주께서는 묻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하나 됨이라 하는 것은 굴복이라 하는 것은 전혀 가당치도 않지요. 세상의 하나 됨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나 중심의 통일체를 이루는 거예요. 나를 위해 하나 되는 겁니다. 이 하나 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미 실시를 했어요. 

하나 됨이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줬습니다. 중간에 죄가 끼어들어서 하나 됨이 깨졌는데 처음의 하나 됨의 본질은 날라 가 버리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그 하나 됨이 뭐냐? 바로 가족이라는 겁니다. 남자를 만들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들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 됨은 하나님에서 시작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이야기고 창세기 3장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이 지시에 위반함으로서 그 하나 됨이 깨졌어요. 깨지면서 인간들이 그 다음부터 억지를 부리는데 무슨 억지를 부리느냐 하면, 깨졌으니까 이 깨진 것을 억지로 본드 같은 것을 가지고 이으려고 하니까 여기서는 무엇이 작용하느냐? 

처음에는 하나님중심으로 하나 되었던 것이 이제는 그 중심이 날라 가버리고, 에덴동산, 그리고 생명나무에서 끊어져 있으니까 그 끊어진 대목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거예요. 나 중심, 나 잘되라고, 나 알아달라는 입장에서 새로운 하나 됨이 형성되는 거예요. 집안에 식구가 세 명이라면 다들 가족이 있다고 여깁니다. 

세 식구인데 가족이 있어요. 가족이 있는데 그 가족은 누굴 위한 가족이냐 하면, 아버지는 아버지 위주로 날 위해서 가족이 있다고 우기고, 엄마는 엄마 위주로 나 위주의 가족이라고 여기고, 자식은 아들 하나 있는 것이 나 위주로 가족이 돌아가야 이게 원만한 하나 됨의 취지가 산다고 하는 거예요. 

사람마다 전부다 자기 위주의 가족, 하나 됨, 통일성을 주장하니까 그걸 일괄적으로 정리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가족이라 하는 것은 부르주아에게만 해당된다고 이야기했어요. 왜냐하면 부르주아는 사유재산이 있으니까. 거기에 비해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계급은 가족이라는 것이 형성이 안 됩니다. 

아들은 전주에 근무하고, 딸은 군산에 근무하고, 아버지는 원주에 근무하고, 엄마는 부산에 근무하고. 이게 산업형식의 변경에 의해서 돈 따라서 뿔뿔이 다 헤어져버린 거예요. 주말부부도 그렇고요. 어떤 사람에게 이상적인 가족, 참된 가족이라고 하느냐? 

아버지가 돈이 많아서 이제는, 엄마는 쇼핑하는 즐거움으로 살고, 자식과 딸에게 시집가지 말라고 하면서 다 내가 품어준다고 하고, 나이 들어도 자기저택에서 다 같이 살게 될 때 남들 보기에 이상적인 가족 같아요. 온 식구가 모여 사니까. 그것은 그 바탕이 돈이 되니까 가능한 거예요. 

그 돈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증여라는 형식으로 계속 대물림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 이상적인 가족이라 하는 것은 태어났다고 해서 가족이 아니라 돈 없는 가족은 가족취급도 못 받는 시대에요. 따라서 좋은 아버지, 돈 있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지요. 좋은 어머니, 돈 있는 어머니가 좋은 어머니에요. 좋은 자식이 뭐냐? 자기 앞가림 잘하고 밥벌이 잘하는 자식이 최고로 좋은 자식이에요. 자꾸 대출이나 해달라고 찾아오는 아들 말고. 

벌써 돈으로 매개된 하나 됨은 하나 됨도 아니에요.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데 성령의 하나 됨을 가지고 지금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됨이란 주께서 일을 하심으로서 형성되는 하나 됨.
인간의 하나 됨이라는 것은 내가 여기 살아 있으니까 내 위주로 헤쳐 모여, 내 중심으로 헤쳐모여.
이걸 은연중에 가족들에게 계속 강요하고 있는 인간적인 하나 됨.

그 두 개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육적인 가족의 하나 됨 말고 그걸 대체해서, 대신해서 성령의 하나 됨을 유지해야 그것을 진정 영원한 가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육체의 하나 됨을 이렇게 형성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안이 내 중심이 되니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꼭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형성되는 나 중심의 하나 됨,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이것을 인간의 일로 보시고, 주님의 일은 뭐냐? 주님이 일로 인하여 하나 됨에는 조건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정화시킬 때나 가능한 하나 됨입니다. 나를 죽은 자로 여기시고 그렇게 내가 죽은 자가 되면 더 이상 나 중심의 하나 됨은 고집하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하나의 배역을 맡는데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형성한 하나 됨, 숨겨진, 나타나지 않은 하나 됨을 위해서 나는 뽑힌 사람이고,
따라서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주님의 영광,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배역을 맡은 자로서의 하나 됨의 고리가 형성되는 겁니다. 

큰 서클이지요. 큰 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하나 됨의 대화는 이거예요. 우리 인간 쪽에서의 하나 됨의 대화라 하는 것은……, 사실은 가족이라 하지만 가족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 친구도 들어가고, 동창도 들어가고, 이웃사람도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뭐냐 하면, 우리가 뭘 해야 앞으로 더 살 수 있느냐, 하는 그 사는 것이 핵심이 돼요. 인간적인 하나 됨에서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이 내뱉는 모든 말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이 말하는 모든 말, 설교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다 거짓말인데, 인간이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인 이유는 거기서 무엇을 배제하느냐 하면, 내가 망해야 되고 죽어야 된다는 것을 배제한 채, 그것을 빼놓고 구라를 떠니까 이게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입만 벌리면, ‘이야기를 듣는 너야, 나에게 굴복할래?’ 그 요구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남에게 이야기하는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내가 남에게 베풀었는데 남이 내게 안 베풀었다고 해서 화내면 안돼요. 베풀었다는 자체도 거짓말이거든요. 베풀 때 은근히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베풀었으니 나에게 무릎 꿇어,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사람들 대단하게 받들어 모시면서, 손 흥민이 최고다, 이 강인이 최고다, 이게 뭐냐 하면, 계속해서 골을 넣으라는 요구에요. 내가 골 넣는 것을 보고 싶으니까. 류 현진이 잘한다, 잘한다. 그러다 한 방에 꿇어앉아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관심도 없어요.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서 세상이 돌아가야 그것이 정상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 됨에서 주님의 하나 됨이 되려면 자기 자신에게 실망을 해야 돼요.
첫째는 누구한테 실망하느냐? 주님한테 실망해야 됩니다. 주님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거예요. 주님 믿으려고 애쓰고 주님한테 소망을 갖고 사랑을 했건만 무슨 보람이 있어야지요. 백날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데.

주님의 응답의 차원은 이거예요. 
네가 양각이 되지 말고 음각이 되라는 겁니다. 경주에 가면 분황사 조각이 있는데 그 조각은 뭐냐? 드러나 보이는 형식으로 조각을 한 것이 아니고 다 파버려요. 비어있는 모습이 분황사 조각의 모습이에요. 그걸 음각이라 하지요. 그 조각도 누구 것 베낀 것인데. 그 비어있는 모습이 주제에요. 껍데기, 비어있는 그 모습이 정말 드러내고자 하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었다고 할 때 뭐가 빠져야 되느냐 하면, 내가 주안에서 나의 자리가 없어져야 돼요. 내가 죽은 자가 되어야 되고. 없어져야 된다고요. 찬양집회 할 때 열심히 따라 부르면서 울기도 하는데 그 심보를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 거예요. ‘내가 찬양을 해드렸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살려주세요. 내가 찬양할 테니 앞으로 내 미래를 환하게 펼쳐주옵소서, 주여.’ 그런 마음가짐으로 찬양해요. 열심히. 

오늘 교회 참석했으니 앞으로의 내일 일도 잘 되게 해달라고 하는데 

내 일은 내 일이 없어요.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인데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관심이 있거든요. 

남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입을까, 내가 무엇을 마실까에 관심이 있는데 

그게 내 일이 되는 순간 내 일은 끊어진 겁니다. 내 일은 아예 없어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나라 의를 구하는 일과 

내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고는 연관성이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자꾸 이걸 억지로 연결시키지 마세요. 

주의 그 나라 의를 구할 테니까 먹을 것을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지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주님의 취지를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없지 않느냐 하고 섭섭해 하시는데 

이게 섭섭할 것이 안 되는 이유가,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행하라고 한다고 해서, 

명령이니 우리는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이걸 해석해서 바르게 살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아예 우리 자신이 주님의 해석이라는 그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해석의 결과물이에요

착하게 살지 말고 너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착하다고 이미 규정한, 

너를 그런 식으로 규정했던, 너를 착한 사람으로 배역을 맡긴 그 하나 됨에 관심을 가지라 그 말입니다. 

이 하나 됨을 위해서 우리는 개성이 강해야 돼요. 절대로 남 따라 하면 안 됩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남과 유사하게 하나 되려는 그런 시도는, 

우리가 알아서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이단적인, 우상 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성경 어느 말씀도 우리가 실천할 것은 하나도 없어요. 

이미 실천된 상태에서 소급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주께서 말씀대로 되게 하셨구나. 지킬 것이 없다니까요, 아무것도. 

지키게 되면 미흡함이 남아서 안돼요. 우리가 시험 들어요. 

마귀가 날 파리처럼 들끓어서 “애걔! 그게 다냐? 더 지켜야지. 더 어렵게 지켜야지. 힘들게 지켜야지. 너무 수월하게 지켰잖아. 네가 고난 받아서 지켜야지.” 자꾸 마귀가 와서 우리를 약 올리고 건드립니다. 우리는 거기에 미쳐가지고, 푹 빠져가지고 “꿇어앉아서 기도하겠습니다. 밥 안 먹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면 마귀가 “더, 더, 더, 더! 그래가지고 되겠어?” 

이것은 사탄의 꾀에 말려든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여기에 ‘억지로’라는 말이 나오지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고상한 일, 거룩한 일을 하더라도 억지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제가 평소에 자주 해 드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십자가가 내 인생 편하게 하기위한 십자가가 아닌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십자가가 오면 내가 핍박받으니까 ‘나는 십자가 안 믿고 딴 거 할래.’ 이게 종교적인 의례고, 의식이고, 어떤 집회에 참석하는 그런 것들이에요. 

“더 이상 내가 감당 할 수 없는 자리까지 제발 하나님은 밀고 들어오지 마세요. 제가 입구에서 다 처리해 드릴 테니까,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이것만큼은 손대지 말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협상과 타협조로 나서기 마련이에요. 그런 태도. 말씀 전하면 우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가기 바빠요. 양보 못할 것이 뭐가 있는 모양이라. 

여러분이 결혼할 때 서약을 하지요. 의례고 의식입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어쩌고저쩌고, 

저도 한 30번이 더 될 거예요. 결혼주례에서 그 서약을 해요. 

오직 남편(아내)만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는데요. 

그렇게 사랑할 때 그 해석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남자가 그런 맹세를 할 때 아내가 듣고 아내가 해석하고, 

아내가 그런 맹세를 할 때 남편이 듣고 해석하고, 

각자 자기통일성, 자기중심으로 해석을 해버려요. 

저 남자(여자)는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예요. 

저 남자(여자)만큼은 내가 믿을 만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수십 년 믿어도 한 방에 다 무너지는 것이 신뢰입니다. 

신뢰는 한방에 와르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다. 당신이 나에게 그럴 줄 몰랐다. 당신과 산 것이 후회된다. 

나의 모든 인생은 와르르 다 무너졌어. 이게 다 당신 탓이야.’라고 하는데 

여러분, 진즉에 발등을 자기가 찍어야 돼요. 자기가 발등을 도끼로 찍어야 돼요. 

본인부터 실망할 생각 안하고 남보고 실망하고 남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짜증을 내는 이유는 아직도 자기가 건방져서 그래요. 

교만해서 그래요. 자기가 안 무너져서 그렇다고요. 

아직도 내 중심, 착하디착한 내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돌아가니까 거기다가 가짜 예수, 가짜 성령, 가짜 삼위일체, 가짜 하나님, 다 집어넣는 겁니다. 

하나님한테 이만큼 대우해줬으니까 하나님도 얼추 어떤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 거예요. 

구성은 자기가 해놓고 하나님보고 시다바리 노릇 하라는 거예요. 그런 것이 교회지요. 그런 무당 짓 하는 데가 교회 아닙니까? 그러다 잘못되면 주님한테 실망했다고 하고요. 첫 번째는 주님한테 실망해야 되고 두 번째는 뭐냐? 자기 자신한테 실망해야 돼요. 아이도 죄인입니다. 갓난아이도 선하지 않아요. 인간은 처음부터 범죄 한 아담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훈련받고 양육 받아도 이거 인간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성경은 먼저 인간이 가족중심의, 또는 나 중심의 가족체제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또 전제는 뭐냐? 도저히 거기서 못 빠져 나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지금 사도바울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보통 이야기들 하지요. 등 굽은 나무가 아버지 묘소 지킨다고요. 못난 자식이 아버지 옆에서 효도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못나고 흉한 소나무가 아버지 묘소를 그늘로 덮어준다는 그런 내용인데 

성경의 뜻은 그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묘소를 파내야 그 자식이 아버지를 아는 자식이에요. 

그게 바로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입니다. 아버지와 결별해야 돼요. 

내가 아는 아버지는 나 자신이 잘못된 해석을 하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실제 아버지가 아니고 일방적으로 나한테 잘해줄 것이라고 

내가 착각한 가상적인 아버지를 나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어야 구원이 되는 이유는, 

죽지 않으면 구원을 맛볼 수가 없고 죽지 않으면 구원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알아서 죽으신 이유는 비로소 구원의 틈이 열리게 하는 거예요. 

네가 생각한 하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생각한 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째진 그 신의 자리에서 인간에게 밉상당한, 핍박당한 새로운 형태의, 상상도 못한, 

내가 근원적으로 문제 있음을 지적 질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주님이 우리에게 등장할 때 

비로소 구원은 내 일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인간이 자기중심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자기가 복 받은 나라라고 여기고 굉장히 자부심을 가졌어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했다. 어느 민족이 하나님을 만난 민족이 있느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고 모세에게 전한 율법이 있는 이상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다르게 

유일하게 특이성 있게 축복받은 민족이다, 라고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본인들이 해석한 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남자 여자를 만들면서 서로 하나가 되게 했어요. 

둘이 아니고 하나로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뒤에 남자 여자가 갈라지면서 따로가 된 거예요. 

그러면 하나 되었을 때 그 상황으로 이미 하나 되지 못한 상황에서 들어간다면 

그 출처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관건이 되는 겁니다. 

이미 하나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려면 

어떤 떨어져 나간 자리가 있어야 할 테고 다시 그 자리를 통해서 기어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 자리가 어디냐를 찾는 거예요.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와 뱀에게 다 저주를 했어요. 

저주를 함으로서 여자로 하여금 남자에게 복속되도록 했어요. 

그러니까 무슨 자리가 없느냐 하면, 여자의 자리가 없어진 거예요. 

이것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여자의 자리가 없어요. 전부 다 남성 위주의 자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남성 위주의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여자들이 남자에게 대드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이라 하는데, 

그렇게 대드는 것은 나도 좀 남자처럼 살아보겠다는 그 모델이 이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여자가 여자 됨이라 할 때의 그 ‘여자 됨’이라는 것은 없어요. 

여자 됨이라는 것은 인류역사상 단독적으로 ‘여자 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자 됨이 여자로서의 목표가 된 거예요. 

여자로서의 기분 나쁜 것은 ‘좋은 것은 남자들이 다 가진다.’는 그것이 기분 나쁜 것이지 

‘여자를 여자답게’ 하는 그 ‘여자 되기’가 이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종속된 존재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 됨이 가족이 깨지고 난 뒤에는 

남성위주의 가족이 되면서 이것은 범죄 한 그 자체가 저주에요. 

남성위주로 하는 것이 저주입니다. 

저주의 자리가 하나 되려면 그 출처는 하나님이 끼어들어야 돼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복된 백성이라고 했지만 

사사기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그 당시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멋대로 살았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사사기 그 다음에 다윗 왕이 나와요. 

사사기까지는 모세의 율법이 주관하는 세계고 구조라면 

다윗 왕이 오게 되면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덧붙여진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 뜻이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습니다. 

그게 뭐냐? 다윗언약 안에서의 하나 됨이에요. 

왕을 본받아라. 그 왕을 아는 자가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왕인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원한 것이 아니고 제사를 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한 것은 뭐냐? 상한 심령이 되는 거예요. 

그 상한심령을 드릴 때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키면 주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상관없이 그냥 준비해놓은 것을 줘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사죄가 다윗언약 안에 은밀하게 갖춰져 있습니다. 

용서받은 자의 묶음, 용서받은 자의 모임, 이것이 바로 다윗 왕을 통해서 주신 새로운 하나 됨이에요. 

사사기에서 왕으로 넘어가는데 중간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룻기에요. 

룻기가 뭐냐 하면, 이 땅에 없는 여자를 새로 만들어서 집어넣는 하나님이 작업, 주의 일이 룻기에요. 

나오미라는 여자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들 둘 다 죽었습니다. 그 집안의 남자라는 남자는 다 죽었어요.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나오미와 며느리 룻 둘만 남았습니다. 여자 둘은 자식을 낳을 수 없고 대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보아스라는 유력한 친척을 만나서 보아스와 며느리 룻이 혼인을 해서 오벳이라는 자식을 낳아요.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소위 이스라엘 사람의 남자는 없고 용병이 투입되는 거예요. 이방여자,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것은 여자도 아니에요. 이것은 남의 자식이고 지옥 갈 백성이에요. 지옥 갈 백성에서 용병 하나 구해서 여자 이름으로 집어넣으면 그 여자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다시 회생이 되는 겁니다. 성경이 그런 식으로 이어져가요. 

그런 예는 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에스더에 나옵니다. 에스더는 좀 더 복잡해요. 전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서 바벨론에 포로 잡히고 난 뒤에 바벨론 나라가 페르시아, 바사 나라로 정권이 바뀌지요. 맨 땅은 그 땅인데. 모르드개라는 유대인이 포로 잡혀 온 사람이고 에스더는 모르드개 입장에서 삼촌의 딸이기 때문에 사촌누이가 되는데 모르드개가 자기 양녀로 삼았어요. 

양녀로 삼은 그 여자가 오디션을 보게 되어서 바사나라의 왕비가 되는 겁니다. 아름답다고 바사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줬어요. 에스더라는 것은 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왕비가 되는데 그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뭐냐 하면, 그 에스더가 들어간 자리의 의미, 에스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해석을 하는데 해석을 맡은 배역들이 누구냐? 유대인들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아, 내 양녀가 얼굴이 예뻐서 남의 나라지만 미모로서 권력을 장악했구나.’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성경해석 잘못된 거예요. 

거기에 하만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난데없이 유대인은 다 죽인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부 다 강제로 자기 인생의 생존이 위태롭게 되는 지경으로 주께서 몰아세우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리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잃어버리게 하실 때 잃어버린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원래 준비했던 그 구원이라는 것이 뭐냐? 

과연 나의 생존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배역을 맡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살아계시는가? 그것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잃어버렸다가 얻는 식으로 살아계시는 거지요. 

잃어버렸다가 얻는 식으로.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때문에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요. 물론 에스더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서 살게 되었잖아요. 죽으면 죽으리라, 해가지고. 하만은 장대에 걸고 모르드개가 한 그 일이 갑자기 주목을 받아서 하만 자리에 모르드개가 들어가서 전부 다 구원했다 그 말이지요. 이것은 본인들이 하나님 잘 믿기 위해서 순교하는 것이 아니에요. 순교를 조장한 거지요, 주님께서. 

이미 우리 삶 자체가, 내가 죽어야 된다가 아니라, 

이미 죽은 것으로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해석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안에서 하나 됨’에서 사람들의 질문이 뭐냐? 

“살아서 오늘도 뭐하고 살렵니까?” 이런 대화가 아니고 

“우리 죽어서 뭐 할 겁니까?” 하는 대화를 해요. 

우리 죽어서 뭐 할 겁니까.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요 뭐. 

대화가, 살아서 뭐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 아니라 “죽어서 뭐 할 겁니까?” 

참 이것은 정말 성령의 하나 됨이 아니면 통할 수 없는 대화에요. 

어떤 분이 내가 독일에 잠간 갔다 온다 하니까 하는 소리가 “죽어서 만납시다.” 무슨 그런 대꾸가 있어요. 

그게 옳잖아요. 그게 옳다 이 말이지요. 가스펠송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니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얼마나 가족에 실망을 했으면, 믿는 도끼에 찍혔으면,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정을 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2절 가사에 보면, “저 천국에서 모두 날 기다리네 내 주 예수 피로 죄 씻음 받았네. 나 비록 약하나 주 날 지키시리니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얼마나 그동안 정을 많이 줬으면 실망에 실망을 했겠습니까? 3절 가사가 “저 영광의 땅에 나 길이 살겠네. 손잡고 승리를 외치는 성도들의 기쁜 찬송 하늘 울려 퍼지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후렴이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나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 가사 누가 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처음 교회 갔을 때부터 이 노래를 배웠어요. 이 노래 배우고 난 뒤에 이 가사 내용하고 내가 다닌 교인들 사는 모습하고 달라도 너무 달라요. 정 못 붙여서 환장을 했어요. 전부 다 화를 낸 채로 인생 다 보내고 있어요. 화가 나가지고. 도대체 화를 왜 내는 거지요? 무엇이 미흡해서 화를 내는 겁니까? 내 중심의 통일체가 자꾸 위협받으니까 화나는 거예요. 

자기한테 실망을 안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보통 사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최고라고 여겼어요. 자기중심으로. 

하나님과 자기사이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으로 있다면 충분하다고 본 겁니다. 

중간에 주님이 핍박받는 모습으로 끼어들 줄, 십자가로 끼어들 줄 상상도 못했어요. 

십자가가 뭐냐? 이거예요. 내 찢어진 살과 피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죽어있다는 겁니다. 

그 죽어 있음에 동참해라. 그 죽어 있음에 우리 하나 되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대머리인데 가발 쓰지 말라는 거예요. 

대머리이면서도 가발 쓰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거지요. 

내가 그 수법에 안 속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자꾸 자기 평가하잖아요. 

오늘도 내가 괜찮은 삶이라고 자기 해석을 하는데 그런 식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남녀 사이가 하나인데 그 하나 됨이 깨질 때 

주님께서 그 여자의 자리에다 주님을 보내버립니다. 

그 여성의 자리는 특징이 있어요. 

남성과 단절된 여성에서 잉태한 자식, 

그게 바로 성령으로 태어난 자식,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만 국한 된 사건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이와 같은 거예요.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잉태하고 동일한 잉태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겉모습에서 전혀 달라질 것이 없어요. 

성령이 왔다는 것을 구약 요나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나가 하나님 말씀 안 듣고 반대방향으로 가요. 

니느웨로 가야 될 것을, 다시 말해서 지금의 이라크 지역으로 가야 될 것을 스페인으로 가버린 거예요. 반대방향이지요. 

그렇게 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상선을 파도로 흔들어댑니다. 자연을 통해서, 폭풍을 통해서 흔들어댑니다. 흔들어대니까 예민한 사람들이 곤란에 처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비상시국이다. 분명히 여기에 자기가 믿는 신에게 범죄 한 자가 동승한 것이 문제다.” 해서 “신에게 잘못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물으니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누가 또 있는가 싶어서 보니 자고 있는 사람 있어요. 깨우니 그가 요나입니다. “요나, 당신이 당신의 신에게 범죄 했지요?”라고 하니 요나는 그것을 뭐로 봤느냐 하면, 요나는 그 일을 자기 일로 생각해서 도망친 것이거든요. 내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의 일에 자진해서 참여해요. 

그 사람들은 “당신이 회개하라.” 하니까 요나가 하는 말이 

“이것은 회개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죽어야 될 문제입니다.” 하니까 

저들이 말하기를 “너무 미안하잖아.” 

“미안할 것 없어요. 다 죽는데. 내가 알아서 죽겠습니다.” 

해서 주의 일에 요나가 자기 죄를, 자기죽음을 거기에 섞어 넣습니다. 

이게 오늘날 성도가 내 중심의 통일성에서 벗어나서 주님이 통일성 안에 들어가는 방법이에요. 

이게 출구가 되는 거예요. 죄인으로서 들어가는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니까. 그걸로 모든 것이 통일되니까. 

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가 나옵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여러분이 다 아시잖아요. 

횡령을 해서 직장에서 쫓겨난다는 소리를 듣고 회계장부 들춰서 자기 앞가림에 이용한다는 

아주 질 나쁜 회사원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 들으면서 ‘아, 이런 사람도 구원되는구나.’라고만 여기는데 

그것 또한 잘못된 해석이에요. ‘이런 사람도 구원된다.’ 하지 말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불의한 청지기가 되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걸 피하지 말고. 불의한 청지기 나오면 ‘딱 내 이야기네’ 하고 

그걸 받아들여서 앞으로는 어떻게 더 독하게 불의하느냐, 그걸 연구하세요. 

어떻게 독하게 하느냐?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가 정들 수 없는 세상이잖아요. 

정들 수 없는 세상에서 정 떼야지요. 정 떼는 방법을 연구해야지요. 

교회가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교회가 구원도 아니고. 

구원은 내가 나한테 실망할 때 비로소 그 짧은 틈이지만 그 사이에 구원이 보이는 거예요. 

‘야, 구원이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구나.’ 

주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그동안 가렸던 나 중심의 통일체를 아주 찢어버리는 거예요.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그걸 찢어버리는 거예요. 

이 가족, 아버지 어머니는 날 위해서 있어야 되고, 

남편은 아내보고 당신은 날 위해서 있어야 되고, 

아내는 남편보고 당신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 남편이어야 되고. 

이 모든 것을 다 찢어버려야 돼요. 

그래야 그 틈 사이에서 구원이 보이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계신데 구원받지 못한 남편이 불쌍해 죽겠다는 거예요. 

아 참! 여러분! 하나 됨이라는 것은 내 하나 됨에 누굴 넣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우리 하나 됨은 우리가 이미 주님의 하나 됨에서 놀아나는 거예요. 

그걸 숙명이라 말해도 괜찮고요, 운명이라고 해도 괜찮은데 그 숙명, 운명은 뭐냐 하면, 전자동세탁기에요. 

사용 안 해보셨습니까? 알아서 세탁 다 되게 되어 있어요. 

자동세탁기 주님이 스위치 누르면 그대로 작동하는데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필요는 없어요. 전자동 세탁기가 우리 가정에 들어오게 되면 

그동안의 우리의 어줍지 않은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을 전부 다 들어내요. 

생선 먹을 때 어떻게 먹습니까? 발라내지요. 

발라내면 거기에 뼈만 남아 있잖아요. 

오늘날 내 중심의 세계는 발라내면 거기에 전부 다 돈만 남아요. 

돈이라면 뼈대만 남아 있습니다.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전부 다 돈이에요, 돈. 

목사와 교인도 전부 다 마찬가지고. 내가 나갈 테니 2억 내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전부 다 돈으로만 형성된 관계에요. 관계망이 돈이에요. 

주께서는, 네가 아무리 예수 믿고 하나님 믿어도 네가 돈 더 사랑하잖아, 

라는 그것을 발라내는 작업을 전자동에 맡기면 되는 겁니다. 

아내가 꼭 구원이 되어야 되고 남편이 꼭 구원이 되어야 된다고요? 

그것은 네 체면과 자존심과 결부된 문제지요. ‘복음 아는 남편이 아내도 구원 못하고 이런 우세가……’ 

자꾸 이런 자기체면, 자기가치 중심으로 사고방식을 하지 마세요. 

우리가 전자동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장 나도 한참 고장 났어요. 덜그럭덜그럭, 이것은 세탁 자체가 안돼요. 

가인은 아벨을 몰랐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소속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어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니까 가인은 화가 난 거예요. 

하지만 화낼 이유가 없어요. 아벨이 착해서 그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그냥 받은 거지요. “반드시 받으시옵소서.”가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아벨을 하나님 자기구원의 해석의 결과물로 일방적으로 이미 잡아버린 거예요.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이라는 그 포크레인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그 전자동이 와서 우리를 잡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종교적인 형식, 이런 것을 가지고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마세요. 

우리 자신이 실망스러운 그것조차도 주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망스럽고, 내가 행복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직도 뭔가 내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불행을 느낀다면 

그것은 주님의 하나 됨을 내가 억지로 지금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걸 플러스 시키면 두 자로 ‘사랑’ 

이게 뭐냐 하면, 나, 자기중심이 되지 않을 때 저절로 온유해지고, 겸손해지고, 오래참게 되고, 

내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 배역을 통해서 퍼지게 되어 있어요. 

나는 좋은 배역 맡을래, 나는 부잣집 배역 맡을래, 하지 마세요. 

나는 몸이 건강한 배역 맡을래, 라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운명을 우리한테서 주께서 빼앗아 준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합시다. 

감사 또 감사, 내가 책임질 인생이 아니라는 것.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나 아니면 누가 책임지느냐,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나가야 돼요. 

나도 나를 책임지지 않는 그러한 존재가 된 것을 주 앞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하나 되어서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뭐가 못마땅해서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고 있는지.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방해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께서 저희들을 집게로 뽑아내시든지 오직 주님의 하나 됨만 드러내는 배역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