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호적
2013년 4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13:8-12
(겔 13:8,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3:9, 개역)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3:10, 개역)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겔 13:11, 개역)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겔 13:12, 개역)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공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평강을 주시지 않으신다” 참 이상해보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상식으로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평강을 주신다”입니다. 바로 모든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들끓게 된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인 에스겔이 투입되는 것이 이런 시점에서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가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를 의도적으로 가려내시는 이유는 그래야지만 ‘이스라엘 족보’가 갖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거짓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참된 선지자를 보내시어 거짓 것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 백성들이 좋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취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차단된 입장에서 철저하게 백성들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의식은 이러합니다. “내가 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받아 구원되어야만 된다”입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열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싶다고 해서 다 사랑받는 것 아니요, 구원받고 싶다고 다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창세기 21:10에 보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여기에 보면, “내어 쫓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나는 여기 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 찾으면 구원되어야 된다”는 식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어 쯫으라”가 성사되는 와중에서 구원이 비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같이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스마엘이 구원을 원해도 말입니다.
이 구분과 결정은 아브라함 가정이 내릴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 가정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도 그들이 구원받을 만한 자격자라서가 아닙니다. 순전히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어느 누구도 할 것없이 다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심판에서 면제될 의로운 자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 의식에게는 ‘홍해 건너편’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홍해 바다는 그냥 막혀 있는 곳입니다. 홍해 바다를 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의 오른손’으로 행하신 심판 행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곧 심판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심판의 부산물입니다. 그래야지만 홍해 건너편이 결코 이스라엘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임이 분명해집니다.
분류되어진 본인들이 귀한 존재가 아니라 분류하신 분이 귀한 분이십니다. 홍해 바다 사건은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사건입니다. 누가 구원받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분류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시편 1:5에 보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주님되심을 보여주시는 기능은 ‘의인의 회중’을 그때그때 마다 분류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이스라엘은 곧장 약속의 땅에서 이 주님의 기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명기 20:16에 보면,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고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3에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갓난 아이까지 다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조치는 인간들의 자의적인 생각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조치입니다.
즉 약속의 땅이란 철저하게 구원받는 자의 땅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의 땅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벌리시는 심판 행위가 그대로 이스라엘 성회에서도 도출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본인의 구원마저 본인이 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점을 이런 심판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인의 회중’에 든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일입니다. 신명기 32:8-9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타민족들의 경계는 오로지 ‘이스라엘 호적’의 중요함을 위함입니다. 오늘날 이런 하나님의 구원작업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된 자들은 주변에서 늘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목격하게 됩니다. 즉 “내어 쫓으라”를 늘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받고자 애쓰는 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심판 행위 속에서 늘 자비를 만끽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명단이 들어 있는 자들의 삶이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의인의 회중에 들어간 복은 이 세상에서 불어오는 그 어떤 환란과 궁핍에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환란과 궁핍마저 당연한 심판 행위에 속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의인의 회중’ 이외는 다른 행복이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에스겔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하나님의 언약 개입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로서만 구원자가 생겨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호적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