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예언하는 부녀(겔13;17-19)이근호130424

아빠와 함께 2013. 4. 24. 21:20

 

예언하는 부녀(에스겔 1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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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4-24 21:05 
예언하는 부녀자

2013년 4월 24일                       본문 말씀: 13:17-19

(겔 13:17, 개역)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겔 13:18, 개역)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겔 13:19, 개역)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점을 치고 싶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이대로 인생 무너질 수는 없다는 다급함이 점집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점쳐주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이들 여인들은 고객들의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이러이러하기에 여전히 세상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복채를 챙겨서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점집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미신이라고 하지만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양 자체가 요행과 행운과 고대하면서 살아가기에 미신 아닌 삶이란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점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점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평범한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냥 무심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느끼는 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래를 예언해주는 사람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점치는 것을 서로들 다 용납해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유독 하나님만큼은 까칠하게 나오십니다. 그냥 묵고하지 않고 개입하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즉 참된 선지자의 개입은 ‘죽지 아니할 영혼은 반드시 죽지 않게 하고, 죽어야 될 영혼은 반드시 죽게 하는’ 그 원리만이 현실로 통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서로 대비가 되고 반대가 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원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어 예언하는 부녀들을 비난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 존재 의미는 어떻게 마련되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얻고자 자기쪽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즉 이러이러해야 비로소 나는 살 맛나는 자아로 간주하겠다는 선입견이 먼저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의 계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해석을 자신이 먼저 내리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점쳐주는 점쟁이들이 계시받는 방법은 일단 무작위적인 방식을 동원합니다. 상 위에 낟알을 흩뿌리거나 팥을 뿌려서 임의로 흩어져 놓여진 무늬의 변화를 보고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내리게 됩니다.

인간의 의사가 개입되지 않는 흩뿌려진 무작위으로 변화된 현상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공감대에 근거해서 마치 신의 손실에 의한 현상이라고 수긍하고자 합니다. 문제는 해석자입니다. 그 변화상을 보고 내리는 점장이의 해석은 특별한 주도권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의 동의를 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손금이나 관상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자의 해석에 일방적으로 고객은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점쟁이들이 변화에 대해서 무능력하나 해석에 관해서 말들이 많습니다. 자기 영역이라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죽을 영혼을 살리고 살 영혼은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이러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유발하는데 이 변화의 조짐은 인간이 미리 예측될 수 없고 그 화 자체가 곧 하나님의 해석으로 처리됩니다. 개인이 자신의 의미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신의 뜻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인간에게 변화를 주심므로서 그 자체가 곧 신의 해석이 되는 방식이게 하십니다

구약 사무엘상 9:3에 보면,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스라는 가정에서 암나귀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개인 가정사의 문제입니다. 사울이란 이름의 아들은 단지 그 암나귀를 찾으려 나선 것 뿐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8:5-6에 보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 가정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지도자급에서 이방나라와 같은 왕제도를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주장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처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왕이 될만한 자를 찾아서 왕으로 만들어내십니다.

사울은 암나귀를 자기힘으로 찾지 못하자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혹시나 자기집 암나귀가 어디에 있는지 희한하게 알아 맞추는 신기함이 있을까 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나름대로 이스라엘의 왕될 자를 찾아 다닌 겁니다. 암나귀를 찾아 헤매는 바로 그 자가 이스라엘이 찾고자 하는 왕이 될 자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은 자기의 의미를 찾고자 아무 것도 행동에 나선 것은 없습니다. 그저 거저 자기 가정일인 암나귀를 찾아나설 뿐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스라엘 사사처럼 성신이 임하여 벌거벗기도하고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10:10-11에 보면,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암나귀 찾는데 구태여 예언의 능력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예언의 능력을 받는 것은 사사들이나 있을 일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의미를 개인의 소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사울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입각한 일이지 결코 사울왕 개인의 기대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하여 성도가 된 자들은 오늘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구원적 해석을 쏟아내게 됩니다. 즉 내가 구원받고 싶어 환장했는데 과연 구원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서의 진정한 복은 죽음의 지경에서도 생명을 믿고 기뻐하는 겁니다. 이러한 신분의 전환은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 죄 많은 세상에 관여하셨기 때문인데 이것이 살 영혼이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생을 얻게 된 것이 순전히 예수님의 소원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4-25 22:23 
37강-에스겔13장 17-19(예언하는 부녀)1304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3장 17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7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3:17-19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찐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하느냐 너희가 두어웅큼 보리와 두어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상당히 경악스럽게 하는 겁니다. 여기에 점치는 여자들이 나오는데 점치는 여자들은 하나님의 계획보다도 자신의 고객들, 자신에게 찾아와서 점쳐 달라고 요청하고 약간의 돈을 지불하는 손님들의 마음이나 그들의 생각에 더 치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더 집중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기에 집어넣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점치는 여인들을 우리는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점치는 여인들뿐만 아니고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은 점치러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왜 점을 치러 올까요? 현대적인 의미를 여기에 추가하면 자기존재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 점치러 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지금보다 좀 더 상황이 나아지기를 원한다는 것은 자기가 뭔가 가치가 있어야 되고 뭔가 의미가 있어야 된다고 먼저 단정을 짓고 그런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그렇다면 점쳐 주는 이 여인들은 고객들에게 이야기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기에 참으로 귀한 존재고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 무엇을 집어넣어도 괜찮아요. 뭘 집어넣든지 간에 끝에는 당신은 이래서 가치 있고 의미 있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그 소리를 듣고 뭐라고 이해하느냐하면, ‘하나님이 참 나를 사랑하는구나. 저것은 점쟁이의 말이 아니고 신의 말이다.’ 그렇게 여기고 즐거이 복채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이러한 모든 일들에 있어서 사람들이 점치는 여인을 안 찾아왔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물어볼 때 자기 스스로 묻게 되면 자기의미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찾아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본인이 본인한테서는 찾아낼 수 없는 절망이 있다는 그 말이지요. 그걸 복채를 들고 가서 주변에 있는 점치는 여자한테 이야기하면 당신은 이래서 가치 있고 이렇기에 앞으로 잘 될 것입니다, 라고 언급을 해 줄 때 돈을 지불하고 그 의미를 자기가 사서 약간의 행복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이라는 것이 당신은 의미 있습니다, 당신은 소중합니다, 당신은 가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의미를 주고받는 것,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지극히 평범한 일상. 누가 점을 치든 굿을 하든지 자기 아쉬워서 하는 것을 구태여 관여하거나 간섭할 필요가 없다, 왜, 그것도 일상 속에서 돌아가는 생활의 하나이기에.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무심합니다. ‘세상은 그런 거야, 저 재미로 사는 거지, 저런 맛으로 생활비도 버는 것이고.’ 그런데 에스겔 13장 17절에 보면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찐저.”
 


점치거나 사주보는 사람들이 우리 일상생활 중에 하나거든요.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면 되는데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 우리가 일상으로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꼭 지적을 하신다는 것이 우리가 세상 보는 것과 하나님이 세상 보는 것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못 본 척 지나가면 되는데 화 있을 것이다, 저주가 있을 것이다, 쳐서 예언하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소한 일에 큰 비중을 두고 선지자를 통해서 언급을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소하게 봤는데 주님은 사소하게 보지 않는다 할 때 주님이 보는 세상 안목과 우리가 보는 세상 안목과는 뭔가 안 맞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주님께서는 신경 쓰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면서도 뭔가 뭉텅이로 놓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세밀한 마음으로 이런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상당히 신중하게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일상에 일어나는 평범한 일로 간주했던 우리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점치는 여인을 방치하지 않고 갋아야 되는가? 19절에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이렇게 보면 되지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일상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 나름대로의 살 영혼과 죽을 영혼이 분명하게 분류되지 않고 모호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점치는 여인을 하나님께서 지적을 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산다는 것, 살아야 될 영혼은 어떤 영혼이고 죽을 영혼이 어떤 영혼인가를 점치는 여인이 개입하고 그 개입한 여인을 하나님께서 지적을 함으로써 거기서 새롭게 그 구절이 나타나고 분명해지는 겁니다.
 


이런 점이 상당히 어려운데요, 어려운 것을 하기 전에 먼저 쉬운 것부터 하겠습니다. 점치는 여인이 점을 친다 합시다. 본문 18절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이렇게 하니까 점치는 여자들이 팔뚝에 방석을 주렁주렁 꿰매어 달았고 또 수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흉내를 내는 겁니다. 꼭 이 방법 아니더라도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는 상에다 팥이나 쌀을 던져 놓으면 무작위로 흩어지잖아요. 흩어지게 되면 그것을 젓가락가지고 “아하, 당신은 재수가 안 좋겠다. 굿을 해야 되겠구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방법은 이거예요. 어떤 무작위적인 현상, 인위적이 아니고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 인간의 손이 관여할 수 없는 현상을 일부러 만들어요. 만들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라고 여기느냐 하면 사람이 계획 잡은 것이 아니고 이것은 사람이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분명히 살아계신 신께서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 라고 합니다. 무작위적인 현상이 첫 번째고,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누가 해석하느냐하면, 쌀이나 팥을 던지고 방울을 흔드는 그 점쟁이가 해석을 한다는 거예요. 현상은 무작위적이지만 해석은 이미 손님들의 복채를 겨냥해서 복채가 많이 나오는 쪽으로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팥을 던지고 쌀을 던지는 그 자체만 무작위라고 생각하지만 더 넓혀보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점쟁이 밥상 위에 무작위로 던져진 알갱이처럼 인간에게 무작위로 일어나는 변화들이 있는데 그 주도권은 해석을 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쥐는 겁니다. 일반사람들이 낱알 흩어진 모습을 보면서 ‘저게 무슨 뜻이지?’ 해도 모르지만, 또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나 손금이나 관상을 보면서 해석하는 자가 주도권을 쥐고 해석을 해서 그 사람의 장래와 운명을 예언해버리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감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제발 누군가 나 대신, 프로가 좀 나서서 해석해 달라는 거지요. 해석을 왜 하는가, 해석을 미리 하게 되면 장래 재수 없는 것을 미리 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이러한 점치는 부녀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냥 잘못되었다, 네가 우상 섬겼다, 이것이 아니고 이렇게 합니다. “죽을 영혼을 살리고 살릴 영혼을 죽이”는 짓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것을 거론하고 나서시는 것은 하나님은 살릴 영혼을 살리고 주일 영혼을 반드시 죽이는 식으로 세상을 해석하시는 거지요.
 


변화를 만드시고 그 변화에 따른 해석을 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만이 진짜 살 영혼을 살리고 죽을 영혼을 죽이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다 살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 해석은 어떤 해석이 되느냐, 이제부터 오늘 설교의 중요한 부분에 들어갑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것을 누가 해석할 때 ‘야, 이것은 정답이다. 제대로 해석했다.’라고 나서는 위인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떤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구시렁거리면서 위장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 자체에 대해서 일부러 벌리는 것은 이미 사람의 손에서 떠난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신분이 모든 상황을 묵시적인 상황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오셨습니다. 오시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 예수님 당시의 모든 상황들이 예수님이 하늘에서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쪽으로 전환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주어지고, 즉 살 영혼이 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을 영혼, 지옥 갈 영혼으로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주님은 모든 권세를 동원해서 세상 모든 변화를 그런 짜임새로 다 바꾸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점쟁이는 그냥 쌀 몇 줌 던져놓고 자기가 해석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변화도 주님이 알아서 만들어놓고 거기에 대한 해석도 주님이 거기에 맞춰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해석에 수용이 되면서 예수님의 해석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산 영혼이 되고 예수님의 해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죽을 영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가름대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사람이 누가 있는가, 사무엘상 9장과 10장에 보면 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 사울이라는 사람이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냥 아버지 따라 목축업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겁니다. 너무 어렵기에 간단하게 전체를 쉽게 말씀드리고 자세히 들어가겠습니다. 한 가정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암나귀들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갑니다. 사무엘 상 10장에 보면 암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고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겁니다. 이 내용은 다 아시죠. 이것이 한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되는데 사무엘 8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에게 뭘 요구했느냐하면 ‘우리에게도 왕을 주옵소서.’라는 요구를 했어요.
 


자 한 번 봅시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나귀 키우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신분 자가 될지 모릅니다. 사울 말고 이스라엘 전체 장로들은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이 필요하다.’라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왕이 있어야 그 왕이 우리나라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든든하게 지켜주면 우리나라가 안정하게 됩니다, 그런 뜻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하는 말이 “우리에게는 왕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까 사무엘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왕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이다.” 합니다.
 


“현재 하나님이 분명히 왕인데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그 방식에 대해서 너희들이 불만을 품고 세상 나라처럼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서 세상나라 되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질책을 받습니다. 그런 질책을 받고 난 뒤에 사울이라는 사적이고 가정사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사무엘상 9장에 보면 기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기스라는 사람의 아들이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울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었어요. 암나귀를 잃자 아들보고 그 암나귀를 찾으라고 했어요.
 


“사울아! 우리 집 암나귀를 잃었다. 네가 찾아서 데려오너라.” 이렇게 지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아버지의 명을 따라 암나귀를 찾기 위해서 계속 애쓰는데 찾다가 찾다가 못 찾으니까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사울이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를 찾아가는 이유는 자기 집 재산인 암나귀를 찾아서 아버지의 명대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 간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무엘은 자기 집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그 사울이라는 사람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찾고 있는 그 왕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에게 지시를 받아요.
 


사울은 잃어버린 가축 하나 찾기 위해서 나왔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원하니까 합당한 왕을 찾아야 돼요. 둘 다 찾는다는 것은 같아요. 하나는 왕 될 사람을 찾고 한 사람은 나귀를 찾아야 되는데 이 두 개가 합치되는 장소가 어디냐, 사울이라는 본인에서 둘 이 합치가 돼요. “선지자님, 우리 집 암나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찾고 싶습니다.” 하니까 사울이 “찾았느니라. 그것은 걱정하지 말고 이제 너는 앞으로 누군가를 만날 것인데 너를 찾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네가 누구를 찾지 말고 이제는 너를 찾는 사람을 만나라. 찾는 사람을 만나니까 그 때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해서 예언도 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선지자처럼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분의 전환입니다. 사울은 평범한 목동에서 이스라엘 왕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 왕이 되려면 하나님의 신을 듬뿍 받아야 돼요. 그 당시는 사사시대이기 때문에 어떤 인물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되는데 사울은 그냥 암나귀 찾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신이 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냥 암나귀 찾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만나게 했고 사무엘은 암나귀를 찾고 있는 너를 찾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장로들이라고 해서 사울은 안하려고 숨기도 했지만 결국 왕으로 등극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얼마나 소중합니까,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입니까, 나는 소중하고 싶다, 나는 의미 있고 싶다, 나는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다, 나는 이렇게 허무하게 살기 싫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에 내가 하는 이 욕망과 욕구를 대신 들어줄 사람이 없을까, 하고 자기 자신이 잘 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것을 부추겨주는 사람을 찾다보니 여자점쟁이를 찾은 거예요.



그런데 아까 말한 사울과 사무엘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내가 뭐가 되고 싶다, 뭔가 하고 싶다, 나는 우수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것이 아니고 사울은 그냥 평범하게 자기 집 나귀를 잃어버려서 암나귀 찾으러 갔다가 졸지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방식이 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점친다는 것은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힘드니까, 이대로 사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없으니까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점쟁이를 찾아가서 “앞으로 한 달 뒤에 잘 되겠습니까?” 복채를 주면서 좋은 소리 들으려고 하는 것은 죽일 영혼을 살리고 살릴 영혼을 죽이는 인간적인 방법밖에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해석을 할 때는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되어가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개입을 한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어떻습니까, 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식의 고백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는데 사업이 잘 되었어요. 그런데 차를 몰다가 그만 자기 식구 다 죽였어요. 그래서 사업을 걷어치웠습니다. 왜냐, 내가 사업하는 이유는 가족들 살리고 잘 되게 하고 가족과 행복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서 한 것인데 기껏 사업한다고 바쁘다 보니 가족들 다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 사업할 의욕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럴 때 만약에 그 사람에게 사울처럼 성령이 임해버리면 이런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지금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한 것, 가족 죽이고 사업 망하게 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다면 그게 바로 살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해석을 듣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한테 이런 소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해석을 듣는 것이 아니고 이미 현재 있는 것조차도 현재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간에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충분하고 넘치는 해석으로 인하여 살릴 영혼을 살리는 방식으로 해석이 주어져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내 입으로 고백케 하는 놀라운 기적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선지자가 이 점치는 여인들과 만나야 될 이유는 에스겔 선지자는 죽을 영혼만 죽이고 살 영혼만 살리는 방식이라면 이 점치는 여자들은 죽을 영혼도 살려버리고 살 영혼은 죽여 버리고, 반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점치는 여인들이 하는 방법은 사람들이 복채 들고 와서 다 그렇게 해주기를 요청했기에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켜 봅시다. 성경에서 복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죽음조차 극복하는 성령의 힘을 복이라고 합니다. 죽음에 이르러도 염려하지 않을 정도로 부활의 능력, 영생의 능력이 덮치는 것, 그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숨 끊어져도 오늘 밤에는 낙원, 천국에 가 있는 이런 기쁨이 축복인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점치는 여인들이 당회장으로 있는 교회처럼 되고 말았어요. “여러분들이 무슨 소리를 듣고 싶습니까? 이런 것을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기도 빡세게 하시면 응답받습니다. 그렇게 응답 받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제 말은 실제로 이루어진 말이니 여러분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진짜입니다. 반드시 기도하고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그 정성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해주시는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듣고 싶은 것을 증거 하는 거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여, 내가 죽어도 천국 가는 사람으로서 지금 살아갑니다. 이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렇게 교회 오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형편이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이 형편이 반전되어서 하나님을 믿는 순간 예상 밖으로 일이 너무 잘되고 잘 풀리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헌금이라는 이름의 복채를 들고 목사라는 이름의 점치는 사람, 박수무당을 향하여 오늘도 찾아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죽을 영혼을 살리고 살 영혼을 죽이는 거예요. 예를 들면 바로 그런 것에 대해서 진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라는 소리를 교회에서 했다가 그 교회에서 왕따 당하고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고 오늘날 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교회가 줄곧 그래 왔습니다. 그만큼 이 교회라는 것이 사람이 원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람이 기뻐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해야 그만큼 장사가 되었던 거예요. 그렇게 안하면 아무도 교회 다닐 사람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교회가 되느냐?
 


오늘 본문 다시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에스겔은 누가 봐도 구원받은 사람이죠.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에스겔이 살 영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보고 “에스겔아!” “예!” “네가 살 영혼이다.” “감사합니다.” “너는 빠져 있어.” 이렇게 하지 않고 살 영혼 에스겔로 하여금 점치는 여자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것은 점치는 여자들은 지옥 간다는 사실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에스겔 본인, 오늘날 성도 본인들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그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믿어지도록 우리한테 이런 임무와 사명을 맡기고 일을 시키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로 죽을 영혼이 아니고 산 영혼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구원되었다는 이야기를 세상을 향하여 주저 없이 외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처럼. 잘 되기 위해서, 축복받기 위해서, 세상에서 번영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장사하는 교회, 그런 것을 원하는 교인들, 그 중심에 뭐가 있는가? 악마, 점치는 여인들이 있다는 사실, 그 중심에서 가짜가 목사 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이 땅에 죄인으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그 죄인의 모습이 사실은 영생을 담고 오신 죄인의 모습인데 우리는 그걸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할 때 예수님께서 하늘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 얻게 되는 전환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면서 진정 산자는 죽어도 산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