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20장 28절(자아정립의 세월)190416b-이근호 목사
그리스도의 몸이 보이지 않을 때 왜 안보이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 몸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대립시켜야 될 이유가 주님과 도마의 만남에서 도마가 창자국 못자국 만지고 믿었잖아요. 도마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거에요. 보고 믿는 거에요.
따라서 보고 믿는다는 그 사실 때문에 창자국 못자국이 발생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야’라는 말을 하시기 위해서. 만지고 보고 믿는 것은 이것은 네가 하늘나라에서 인정한 믿음이 아니야를 하시기 위해서 아니야를 충분하게 여기에 사건화시켜서 도마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따라서 도마는 그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만진다는 것은 평소에 도마가 자기 몸을 만지듯이 만졌거든요. 결국 도마가 그 몸을 만져서 ‘야 이제 믿겠습니다’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 몸을 만졌던 그것이 하나의 전제가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럼 그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이게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이죠.
믿음이 아니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방식은 믿음이 아닌 것을 내용을 할 때 이게 믿음이 되어버려요. 믿음이 아닌 것을 빼버리는게 아니고 믿음이 아닌 것을 이걸 포장을 해버리면 이게 믿음이 돼요. 아닙니다가 믿음이 되는 거에요 이게.
도넛 있잖아요. 도넛에 앙꼬가 이만큼 들어있습니다. 앙꼬가 들어있고 여기 밀가루로 튀겨가지고 있지요. 믿음 없음을 내용을 할 때만 이게 믿음이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지지 않으면 주가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 악마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주님이 아니시거든요. 주님만이 악마를, 주님의 원수를 현실화시켜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 언약이 있는 사람 선지자들 활동 보세요. 전부 다 그 때마다 누가 등장합니까? 복음을 전할 때는 꼭 진짜 인간의 배후의 사상이나 그런 악마적인 요소가 그 때 그 현장에 출현하지요. 복음이 있는 그 장소에 악마가 나와요.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만 악마가 반응을 나타내요. 인간이 나타나면 악마는 반응을 안 나타내요.
그렇게 해줘야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어야 예수님이 주가 될 수가 있어요. 인간의 역할을 이제 아시겠지요?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짓지 아니하면 죄를 짓지 않겠다고 버티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죄 짓는 이것이 도넛의 앙꼬 역할을 해요. 만두의 앙꼬 역할을 해요.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사함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기 때문에.
그동안 죄 안지으려고 하는 그자들이 바로 사실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반듯하게 바르게 살고 성령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의 행동과 말씨를 통해서 주께 영광을 돌리세 하는 이것들이 바로 악마에 속한 거에요. 그건 바리새인들이 다 했던 거에요.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안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는 말씀에 의한 현실과 직접 주님이 말씀을 적용하는 현실과 그 현장에서 얼마나 이게 대조가 되고 우리가 엉터리라고 하는 것을 발각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성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내가 적용하는 말씀과 주님이 적용하는 말씀이 너무 다른 거에요.
사도가 사도 바울이 도마가 고백한 것과 도마와 사울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되지요. 사도 바울의 고백의 차이점을 한번 봅시다. 도마는 뭡니까? 주는 나의 주시고 그 다음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그 사도 바울은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되어 있지요. 어느 것이 더 원천적이고 더 보편화된 일일까요? 더 일반적일까요?
어느 쪽이 내가 그동안 주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어느 쪽이 더 근원적이냐 말이죠? “주여 누구십니까?” 되묻는 것이 더 근원적이죠? 그렇지요? 더 근원적인 동시에 더 사상이라고 할까요. 그 진리의 깊이가 바다 끝까지 간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누가 물어요? 사울이라는 존재가 묻지요. 그럼 존재가 직접 주님과 만나면 나오는 공통적인 고백은 뭐냐 하면은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예상 못한 낯선 분으로 오신 분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요. 내가 아는 테두리 바깥에서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내가 상상한 삼위일체 내가 상상한 하나님 내가 상상한 주님 그거 아니고 엉뚱하게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이미 우리가 상상했다는 말은 상상한 그것이 나에게 뭐냐? 나의 잘남과 나의 의로 이미 재료가 되어 있는 상태에요.
15년을 믿었으면 15년 믿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경을 봤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그것이 아까 무슨 세월이라고 했습니까? 모정의 세월? 아니에요. 자기정립의 세월. 자기정립의 세월이에요. 자기정립의 세월을 그 다음 사건이 다 부숴버리는 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매일같이 주여 누구십니까? 매일같이 우리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는 거에요. 바닥을.
가난하게 된다고 가난하게 되었다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거에 아니에요. 내가 고생한다고 신앙 좋아지는게 아닙니다. 자기 바닥을 쳐야 돼요. 자기 존재라는 자체의 바닥을. 존재를 사건으로 완전히 해체시켜버리는 그런 만남이 지속되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시는가? 그 일을 성령님이 하시게 되는 거에요.
성령님의 특징의 활동은 특징은 뭐냐 하면은 ‘우발성’이다. 아까 우발성은 아까 뭐가 안된다? 소유의 대상이 안돼. 우발성은 소유의 대상이 안됩니다. 성령님은 우발성으로 왔는데 우발성으로 들어닥치는 순간이 전에까지는 몰랐던 주님을 새롭게 아는 순간으로 만들어 버려요. 새롭게 아는 순간. 하루 가고 그 다음날 가면 또 마찬가지지만. 새롭게 아는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새롭게 아는 순간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사건이 돼요.
존재 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시간이 들어있어요 시간. 시간의 연속성이 들어있습니다. 나 이 믿음 내일까지 이어가야지. 내일이라는 미래와 어제라는 과거가 ‘나’라는 존재 안에 ‘나’라는 존재가 만든 시간 안에 들어있어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존재 만든 사건을 무시해버리고 무용화시켜 버립니다.
내일? 내일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한테 내일은 없어. 지금 이 순간 너는 이미 죽은거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 있어서 네가 지금 산다는 것은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그냥 사건의 일부야. 하나의 사태에 불과한거에요. 순간순간 사태에요. 여러분 주무실 때에 30분 뒤에 잔다 잔다 잔다. 그러다 진짜 잠들기 전에 2초전에 잔다 1초전에 잔다. 0초에 잔다. 역시 내가 잔다고 하니까 자는구나 이러면 그건 잠 안 잔거에요 그거는.
진짜 주무시게 되면 앞에 있는 자기 계산은 다 무효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의식이 없는거거든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시간이 없어요. 어떤 기억도 없고 시간도 없고 없어요. 다만 우리가 새아침이라고 하는 것은 깨어나고 난 뒤에 결과적으로 새로운 날이 되다보니까 새날이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시는 말씀이 이방인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왜 자꾸 생각하느냐 하면 내일의 그 양식을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살면서도 내일까지 생각하니까 이방인들이 무엇을 입을까 내일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계속 생각하는거에요. 제가 대구강의 할때 shelter라는 것 피난처 이걸 자꾸 이야기했다고요.
그걸 제가 하면서 정신적 은신처까지 언급을 했는데 사람은 자기 존재만 있는게 아니고 자기 존재를 담아놓을 그릇이라든지 쉼터같은 것을 항상 이렇게 경유해서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안 가면 되지요 뭐. 배가본드라 하는 ‘방랑자’. 늘 인간은 방랑자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디에 정착되야 되고 정착되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떠돌이 안 되니까.
그게 사람의 기본 소망이 뭐냐 하면 나의 안식처 찾는거에요 안식처. 안식처를 찾는거에요. 그런데 이미 사도 바울은요 주여 누구십니까 했던 사도 바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함과 동시에 이미 예수님은 사도에게 안식처를 제공했어요. 사도 바울이 제공받은 안식처는 뭐냐 하면은 놀랍게도 이거에요. ‘예수 안’입니다. 이거 말이 안되는 소리거든요.
너는 예수 안에 있다. 예수 안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십자가 안’. 같은 말로 ‘성령 안’. 다 같은 말이에요. 성령 안에서 기뻐하라 성령 안. 이걸 제가 여기서 하나 보탠다면 ‘무덤 안’입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인간을 관속에 있다고 이야기 했고 관을 좀 넓히라고 했지요. 위로 한 15km 아래쪽으로 50km 옆으로 한 2500km. 관이에요.
관은 관인데 너무 살기 좋아 관이. 꽃 피고 봄, 여름 다 있어. 미세먼지도 다 있어. 크루즈도 막 다니고 관 속에. 답답한 관이 아니고 친구도 왜그리 많은지 왜 친구 모임도 커뮤니티 모임도 왜 그리 많아요? 관 속인데. 그걸 너무 즐기고 세월 좋다보니까 그게 관인지를 몰라. 그게 무덤인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데 모르고 있거든요.
또 마귀가 좋다고 또 후원해주네요. 관에서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출세하라는 거에요. 그리고 돈 좀 있으면 아시아나 네가 인수하라는 거에요. 관 속에서. 인수해봐라. 또 뭐 남편들은 또 인수한다고 돈 모을까? 하고 있단 말이죠. 보람이라든지 희망, 기대가 전부 다 하는게 관 안에서 뺑뺑이 돌고 계속 추구하고 있는거에요 그게.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뭐냐 그냥 놀아버려라. 다만 관이라는건 알고 놀아버려라. 같이. 같이 투자를 하든 주식을 하든지 이왕 죽은 인간이 죽은 유령인데 망령이거든요. 죽은 귀신이 뭔들 못해요? 귀신인데. 귀신도 주식투자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귀신인 것을 알고 김귀신 최귀신 박귀신. 귀신도 머리 이쁘게 할 수 있고요 철마다 옷 입을 수 있어요.
입어봐야 귀신이지만 하여튼 이왕 귀신인거 때깔나게 입고 돌아다니고 놀러가고 하시되 자기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자기가 이미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이 뭡니까? 십자가 무덤이잖아요. ‘죽음’이죠. 죽음 안에 있다. 그래서 남들은 세상에서 노는 자랑하는데 우리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자랑하라. 내가 이미 죽은 자다.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은 놈이니까 두 번 다시 찌를 일 없어요. 죽을 일 없기 때문에 약점이 없는 거에요. 약점이. 협박이나 공갈 받을 필요가 없어요. 위협받을 필요가 없어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안식처를 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안에라는 안식을 줍니다. 그러면 예수 안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뭘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몸을 갖고 있는데 어떤 몸이냐 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보면 이게 무슨 몸이냐 하면 하늘에 속한 몸이에요. 아담은 무슨 몸입니까? 흙에서 출발했지요. 그렇지요? 흙에서 출발해서 흙에 속한 몸이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영광을 입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이 필요했으면 뭐냐 하면 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 몸이 흘렸던 피에 의해서 몸이 피 흘린 몸이 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 뭐냐 하면 죄를 받아들여서 죄를 원료로 해가지고 자기의 피를 매개로 해서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는 유일한 몸이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 몸은 안돼요. 우리 몸은 아예 안되기 때문에 폐기, 그래서 죽은 몸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자꾸 육의 본성에서 우리의 몸의 존재를 자꾸 의식하는데 죄를 통해서 나의 행함을 통해서 내 죄를 뭐로? 의로 바꾸어서 이렇게 되어버려요. 이 의는 뭐냐 하면 몸이 투입된 몸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이 의는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지를 않아요. 실컷 학교 다녔는데 학교 졸업장 안 나오는 것과 똑같애요.
실컷 뭐 했는데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 봉사 했는데 합격 통지서가 없네요. 합격 통지서가. 불합격된 거에요 그게. 유령, 부동산 회사랑 똑같은거에요.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다 부었는데 그게 사기집단이에요. 그게 사기집단인거에요. 거기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자기만 거기 빠진게 아니고 남편까지 자식까지 전부 다 거기에다 다 집어넣었는데 꼭 신천지같애.
다 집어넣고 보니까 전혀 합격 통지서가 안 나오는 거에요. 열심히 믿는 정도가 아니고 믿습니다!! 까지 했는데 소용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본인이 알아요.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고백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찾아갈게요 이것밖에 없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갑자기 나의 바닥을 거덜내시는 분. 나의 모든 것이 의미 없음을 통보해주는 분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 통보는 객관적 증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거든요. 그 잘난 분도 이 땅에서 죽었어요. 이 땅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훌륭하신 분도 이 땅에 속했다는 이유로 돌아가셨고 저주받았잖아요.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통째로 이것이 통째로 이것은 저주의 땅인데 저주의 세계인데 우리는 거기서 그 관 속에서 뭔가 잘 해버려고 자기 도를 닦으려고 인격을 함량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놈의 인격 2분만에 분노케 만들어버릴까. 그 점잔과 품위 인격 다 소용없어요.
30절에 봅시다. 약간 난해한 이야기 나와요.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여기 기적이라고 되어 있어요? 표적이라고 되어 있어요?
표적, 싸인이거든요 싸인. 싸인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입니다. 기호에요. 기호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뭐를 쥐고 있어라는 말이 아니고 훅 지나가버린 한순간의 사건이라는 뜻이에요. 한순간의 사건입니다.
태극기. 하나의 싸인이죠. 태극지 백날 분해 해봐야 섬유조직이지 뭐 태극기 안에 독도 안 들어있고 그냥 다른거 뭐 없어요. 그냥 천조각이잖아요. 그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천조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그건 붙잡을 것이 아니고 그냥 순간순간 변형되고 다른 것으로 교체될 것들이에요. 그중에 대표적인 싸인. 대표적인게 훅 지나가는게 뭐냐 하면 ‘나’라는 의식이에요.
어제 알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요. 오늘의 나를 몰라요. 왜? 그때그때 주님께서 변형시키기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켜요. 우리는 어제의 나 오늘의 나를 자꾸 이렇게 identity, 정체성이라고 하는데 자아 정체성. 꼭 하나라고 독립성을 갖고 있다고 우기는데 전혀 그럴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 어제 나를 변수들과 오늘의 나를 만든 변수가 달라요.
어제의 그 파리의 성당은 불 안탔지만 오늘은 탔잖아요. 그걸 새롭게 인식하는 나는 어제 그걸 몰랐던 나와 다른 나입니다. 나와 달라요. 그런 CF있지요. 뭐를 하기 전과 뭐를 한 후 아로나민 골드. 아로나민 골드를 먹는 날과 먹지 않은 날이 다르잖아요. 달라요. 그거 안 봐도 달라요. 변수가 그것 하나뿐이겠습니까?
박항서 베트남 감독을 아는 것과 모를 때와 다르잖아요. 베트남 그것도 축구야? 이렇게 하다가 박항서 오! 베트남도 축구할 줄 아네! 이렇게. 이게 달라요. 그런데 그걸 같다고 우길 때 그런 완전히 악마들린겁니다. 그게 바로 세월호 사건이에요. 세월호 사건입니다. 얼마나 이게 악마적인지를 아시겠지요? 5.18 이런거 전부다 삼풍백화점 무너진 것.
지난간 것은~지나간대로 보내버리세요. 나름대로의 의미 없어요. 그건 전인권이 오해한 거고. 지나간 것은~~에브리바디!! 다 없어진거에요.
어제의 나를 어디서 찾습니까? 빛바랜 사진 외에는 없지요. 어제의 나는 없어요. 어제가 무너져서 오늘이 되었는데 뭐가 어제가 있어요. 어디서 어제를 찾습니까? 그때그때 달라요~ 이 말이 맞아요. 그때그때 달라요 우리는.
그러면 그때그때 다른 나를 우발적인 나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는거에요 제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으면 안돼요. 그럼 일관적인 것은 뭐냐? 일관적인 것은 일관적인 사건에 성질, 본질이 드러나요. 그게 뭐냐? 주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 주님이 주님답게 하는 것은 항상 일관적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일관성.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 여기서 유명한 말. 내 다리 내놔라. 서산에 충청도. 꼭 왜 전설은 충청도가 많은지 몰라. 전설의 고향 보면 내 다리 내놔라. 어떤 효자가 무덤 파가지고 고기 먹고 싶다고 하니까 고기 해주니까 죽은 시체가 막 비오니까 막 따라오는거야.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꼭 오토바이 타고 오는거 같애.
내 다리 내놔라는 식으로 주님 죽은 줄 알았는데 주님귀신 따라오는 거에요. 내 다리 내놓으라고. 나 너 때문에 죽었잖아. 너 나 때문에 살았잖아. 왜 너는 너의 자신의 증인이 되야해? 그럴 필요 없는데. 그게 너의 약점이야. 너 잘남으로 살려면 그게 약점이라고. 한결같은 것은 물론 요리 못하는 가정주부의 미역국 그런 것. 일주일 내내 미역국, 일주일 내내 감자튀김, 감자볶음. 좋다며?
하지만 좋았더라도 다음날 되면 또 달라요. 내가. 입맛이 또 달라져. 입맛뿐 아니라 다 달라졌어요. 다 달라졌어요. 한달 수입이 700만원 정도 되면 좋겠다. 700만원 되보세요. 되본 적도 없겠지만. 되보세요. 시들해. 천만원 되야 좀 산다는 소리 듣지 이렇게 되거든요. 남자가 맨날 하는게 차 바꾸는 거잖아요. 옛날 남자들 말 바꾸는 것처럼 차 바꾸고 차보고 대견하다고 누가 흠집냈어!!! 미세먼지가 흠집냈는데 누가 흠집냈어?! 차에 미쳐있어요.
여자는 가방에 미쳤듯이 차에 미쳐있어요. 그런데 백날 미쳐도 얼마 지나면 또 바꾸자 이렇게 하고요. 식상하다. 안에 앰프 바꿨다가 온갖 것 취미가 그거에요 취미가. 한결같은 것은 항상 죽이신다는 것. 제가 언제 설교했지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죽이는 것. 죽여주는 것이에요. 죽여줘요~!!이렇잖아요. 얼마나 은혜로운 찬송가 입니까? 죽여주는 거에요. 우리를 아주 죽여버리는거에요. 죽어도 좋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거든요. 그게 사랑입니다.
자, 이제부터 제가 해야될 것은 주여 누구십니까? ‘주’. 주 개념입니다. 유대인이나 사울도 마찬가지고 세상의 모든 변화는 어디서 유입되었느냐 하면은 주님부터 유입된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한결같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게 성경 히브리서 7장을 한번 찾아봅시다. 7장 23절 24절 한번 읽어보세요.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절이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자, 여기서 제사장 나옵니다. 인간은 안돼요. 그러면 인간은 안 된다면 그 인간의 직분을 그대로 영원히 고수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다 했지요. 영원히 계시다면 그 영원히 계신다는 의미가 뭐냐?
영원히 계셨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어떤 현상이나 어떤 다양성이 있다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딱 하나의 원칙은 변치 않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힘입어. 자기를 힘입었다는 거거든요. 다시 오늘 본문 요한복음 20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20장 31절에 보면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뭡니까? “힘입어” 죠.
그러니까 30절에 보면 표적을 행한다. 싸인이거든요. 싸인에서 뭐가 주께서 싸인 또는 표적을 행한다하면 이건 뭐를 빼라는 이야기에요. 나를 나라는 존재를 삭제하라는 말이에요. 평소에 인간은 자기정립의 세월 아닙니까. 왜냐하면 자기정립이라는것은 내가 했다에서 멈추는게 아니에요. 내가 함으로서 나에게 돌아올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더 나 자신은 안정성 있게 괜찮은 나로 확실한 나로 결과물을 내가 소유할 수 있다까지 이어져야 돼요.
내가 멋있는 나, 잘난 나가 되는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어떤 행동도 결심도 하지 않는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 자체가 뭐냐 하면 그 자체가 주께서 싫어버린 바 되는 하나의 싸인이 되는 거에요. 왜? 표적은 싸인이라는 말은 이 싸인이라는 말은 인간이 곡해하고 오해할 거리를 앞에 제시했다는 거에요.
아! 예수님이 저런 분이니까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했던 자들이 12제자들이였어요. 물위를 걸었지요. 오병이어 행했지요. 전부다 표적이거든요. 표적인데 그 사람들은 뭘 보느냐 이걸 기적 또는 이적으로 본거에요. 야 우리 좋아라고. 내가 그걸 먹고 내가 배부른 까닭이다. 내가 도리어 윤택해지고 내가 더 안전빵으로 갈수 있다. 내가 점점 더 나는 내가 괜찮은 존재로 붙들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자기 보람으로 이게 어떤 결과물을 얻는 흐뭇함을 건질 수 있다는 그 희망을 자꾸 허락하는 그걸로 곡해한 거에요.
하지만 그 많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따라온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표적이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내게 생명이 없다 하니까 그들은 생명이 없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생명을 포기하지요. 생명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이 아니면 생명이 뭐라도 우리는 돌아서겠습니다. 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러면 요한복음 6장에 힘입었다는게 뭐냐 하면은 이렇게 표현해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 수학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폐구조 또는 폐곡선. 닫혀있는, 닫힌 공간. 주님에서부터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 닫힌 공간이에요. 심지어 12제자도 거기에 자력으로 끼어들 수 있다? 없다? 없어요.
닫힌 공간에 왔을 때 사람들은 이걸 기적으로 봤고 이적으로 봤어요.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는 이걸 뭐로 봅니까? 표적으로 본거에요. 기적에서 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재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게 있다면 주님께서 마지막 표적 다시 말해서 내 창자국 못자국을 도마에게 보여줄 이유가 없어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거에요. 너 때문에.
네가 왜 악마한테 벌벌 떨고 네 인생을 걱정하느냐. 그 죄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그 이야기거든요. 네가 뭔가 겁내지 말아야 하는 것에 벌벌 떨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 걱정하는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부터는
너 자체가 네가 날 믿을 생각하지 말고 너 자체가 내 믿음을 증거하는 내 표적으로 이제는 내가 삼으리라. 그래서 성령이 오신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천하에 믿음 없는 사람으로 아주 즐겁게 행세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 있나?” “믿음은 무슨 내가 무슨 믿음이 있어.” “예수 믿나?” “안 믿어.” “너 주특기가 뭐야?” “하나님 안 믿는거.” 이런 이야기. 나는 하나님 안 믿는게 주특기고 예수님 안 믿는게 주특기에요.
예수님 왔을 때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여호와를 믿는다고 했거든요. 그들이 믿을 때 믿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간다고 생각한거에요. 하나님을 힘입어. 그런데 하나님을 힘입는다를 뭐로 바꿨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안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바꿨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주의 이름이 뭐냐 하면 언약을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 맹세와 언약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을 우리가 믿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가 주의 백성이기 때문에 약속들을 기다리게 되면 언젠가 로마에서 해방되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회복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지방교회처럼. 회복될 것입니다. 지금도 회복이라는 말 쓰잖아요. 뭐 잘났다고 회복. 회복되기를 믿었단 말이죠.
그럴 때 예수님을 그들이 뭐로 봤습니까? 자기가 믿음이 있는고로 예수님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심지어는 귀신의 대장이다. 악마다. 귀신의 오야붕으로 본거에요. 이단이고. 율법을 잘못 가르치는 사람이고. 그렇게 본거에요.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저쪽 권세를 두려워했던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 체포될 때 다 도망갔잖아요. 세상이라는 힘에서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다고 노력하는 것이지 예수 믿는게 아니었어요. 믿음은 도마고 뭐고 믿음 없어요. 믿음은 성령이 와야 되는 거에요.
존재가 사건이 되는 것은 성령이 와야 되지 열심히 주는 누구십니까 누구십니까?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사도 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했다고 사도 바울이 믿음 있는게 아니고 사도 바울에게 뭐가 임했느냐 하면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오고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자기가 부활을 보았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
여러분 부활을 보았다는 것이 편하게 생각합시다. 부활을 보았다는 것이 뭡니까? 오! 주님 살아계시네 이거거든요. 그럼 주님 살아계시면 나만 살아있는게 아니잖아요. 그럼 전에는 내가 살아있다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하다가 주님이 살아계시면 주님 살아계셔서의 저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는거에요.
주는 누구십니까?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질문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이 접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는 매일같이 주님의 답변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주님의 일의 결과물로 살아가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8절인가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어요. 우리가 소망 믿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이기 때문에. 사랑은 내가 받는게 아니고 사랑 자체가 사건화되야 돼요. 사랑의 사건화. 이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존재가 주님의 사랑의 사건화를 증거하는 사건이 되어 버리는겁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까불고 촐랑대는 거에요. 사랑은 여기 있다.
사랑은 뭐라고 합니까? 김세환이 부른 노래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고 이게 인간으로서 가능하지 않지요. 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게 과연 이게 늘상 우리 존재는 투기하지 않습니까? 하잖아요. 하지만 내가 죄인인 것을 십자가 앞에 알 때 우리는 투기하고 싶어도 투기가 뭐지? 이렇게 하게 돼요. 뭐지? 투기가? 사랑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 거짓말이 뭐지요? 거짓말이 뭐에요? 거짓말이 뭔지를 모르는거에요.
왜냐하면 자격 없으니까. 순간적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순간적입니다. 그딴 것 계산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극미의 간격이에요. 극미의 순간.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돈이 뭐에요? 의미 없어요. 디모데전서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뭐 이런거 나오잖아요. 사랑하는 순간에 그거 상관없어요. 그게 뭐죠? 자기가 누구인지를 오히려 물을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 0.003초인가.
짧은 순간에 자기가 기억이 나지를 않아요. 그걸 순간적으로 자기를 부인한 순간이에요. 자기를 자기가 부인한 '나'가 아니에요. 순간 사건화 우발적인 도발적인 사태가 일어난거에요. 갑자기. 갑자기 하다가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이러면 다시 정신 차려서 내 위주로 살지요. 내 위주로 살다가 또 마귀한테 실컷 농락당하고 또 고민고민 다하고 약 먹고 끙끙 앓고 띠 두르고 아이고 이놈의 집구석 걱정은 또 혼자 다하고요. 복음 들은거 다 날아가 버리고.
하나의 순환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죄라는 것을 경유해서 의가 나와요. 의는 어디서 나온다? 죄 안에 있을 때만 비로소 의가 보이고 죽음 안에 있을 때만 생명이 귀한 줄 아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이 귀한 것을 생명이 귀하다고 하지 않고 우리를 초죽음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나는 이제 자살할거야. 이제 나는 끝났어. 나는 인생 안 살거야. 하는 순간에 베시시 웃지요. 왜?
갑자기 그 순간 잠시 잊어버렸던 생명이라는 것이 주께서 나를 사용하는 그 과정 자체가 관계망 자체가 생겨나요. 생명을 소유하는게 아니고 생명이 나를 농락한거에요. 갖고 논거에요. 생명이 생명답기 위해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튀기게 만드는거에요. 치킨처럼. 죽음에 튀기게 만드는 거에요. 혼 좀 나게 만들었어요.
왜 그렇게 심하게 삽니까? 주님이 그래야 주님이거든요. 주님이 바로 죄 속에 경유해야 주님이 돼요. 주님도 주님이 겪었던 그 상황을 반복해서 성령께서 그대로 이제 네가 주님 되라 해가지고 주님 되기 싫은데 하여튼 주님이 겪었던 그 체험을 되풀이해가면서 주의 주 되심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발현되도록 구체화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거에요. 성령께서. 성령께서는 오직 주님밖에 몰라요. 너를 통해서 주님 끄집어낼거야. 그 생각이 성령의 생각이에요.
마태복음 12장 한번 보겠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게 마태복음 12장에 이렇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31절 마태복음 12장 31절 32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뭐한다?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나를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되” 여기 나오죠. 33절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아주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욕할 수 있는데 성령을 받아놓고는 예수님을 욕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왜? 성령이 우리 욕보다 더 쎄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가 주님을 싫어하는 것보다 더 쎄요. 우리가 맨날 주님 싫어하고 반발해도 성령님이 그걸 뭐로 바꿉니까? 그걸 죄로 바꾸어서 그 죄와 주님의 죄사함과 자꾸 이렇게 재확인시켜주거든요.
사람이 몸이 아픈데 원망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살아온 몸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존재인데요. 컨디션 몸의 컨디션 있잖아요. 몸의 컨디션이 기분을 좌우하지 않습니까? 봄들 되면 전부다 살랑살랑 기분 좋지요? 꽃피고. 이놈의 꽃들!! 이런 사람 별로 없어요.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천만에. 꽃은 사람 기쁘게 하려고 꽃을 피우는게 아닙니다. 꽃은 인간과 비교해서 얼마나 초라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꽃을 피우는 거에요.
왜? 이게 시편에 나오지요. 모든 세상 만물은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주고받지만 유독 인간만큼은 하나님 자기 아비어미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죄악을 짓잖아요. 그런데 아무 죄도 없는 피조물이 인간 때문에 같이 신음하고 고통한다고. 로마서 8장에 나와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름다운 들풀과 그리고 참새가 짹짹 거리는 것은 우리의 처지와 대조하고 비교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친히 기르시잖아. 들풀도 내일 잘린다고 들풀이 거기서 짜증내고 있느냐? 그냥 짤리면 짤리라 이 말이죠. 내일 잘려도 오늘은 그냥 들풀로 그냥 존재하고 있는 거에요. 너는 왜 그렇게 못살아 가느냐 이거에요. 왜? 심보가 얼마나 뒤틀어지고 그 뱀이 몇 마리가 들었으면 그렇게 모든 심보가 딱 뒤틀어졌는가. 그거는 바로 뭐냐 하면 바로 자기위주 자기정립입니다. 자기 위주로. 악마를 닮아가지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나의 가치의 전부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렇게 못된 죄를 버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이게 싸인이 되게 하는 겁니다. 표적이 되게 해요. 나는 너희에게 베풀었지만 너희는 나를 찼다는 싸인. 그걸 매일같이 우리에게 되풀이 하는 겁니다. 우리한테 매일같이. 이걸 안다고 정신 차리자 하는 그런 헛소리 하지 마세요. 정신 차리는건 없습니다. 우린 정신 지금도 헤롱헤롱한데.
정신 못 차립니다. 정신 차리지 마세요. 정신을 차려도 주께서 차리게 하시지 내가 차리는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원칙에 의해서 힘입어에요. 모든 다양성은 결국 하나로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뭐냐? 언약체계고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각자 활동은 다르지만 힘입었다는 것.
힘입었다는 말은 뭡니까? 내 힘 가지고 안 된다는 말이죠. 주님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영원함 주님만 영원히 종속된 주님의 가치만 이미 확정 났음. 따로이 추가하거나 보탤 일 없음. 내 행함과 내 의가 나의 구원에 전혀 기여할 필요도 없고 기여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요. 그러면 주님의 힘입어가 이게 원칙이라면 주의 하는 일은 뭡니까? 간단하죠. 나에게서 나의 모든 의를 내 구원에 보탬되는 것은 전부 다 밀어버리고 잘라버리고 삭제해버리고 없애버리는 겁니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 뭐냐. 나를 부인하는 일을 하죠. 이만큼 했습니다. 이만큼 착했습니다. 이만큼 의로웠습니다. 또 반대로 나는 이만큼 악했습니다. 나쁜 짓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삭제해버리는겁니다. 제거해버리는거에요. 너는 애초부터 했다 안했다 자체를 논할 가치도 없어. 내가 살려줘서 사는거야. 그리고 네가 살고 싶어서 사는게 아니고 내가 너가 싸인으로 필요한 그 날까지 그 수명까지만 계속해서 너에게 나는 너를 부르고 사용할거다.
이런 조치가 나오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로 관련되는 생명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이제는 주님의 영생이 지금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 어두운 시대에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지금 살아서 일하십니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이름이 뭐냐? 작은 자라고 했거든요. 그 작은 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신 이유를 보세요.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하는 대상이잖아요. 심지어 본인도 몰라요. 내가 주님을 언제 섬겼습니까? 아 몰라야 돼요. 우리는 몰라야 돼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점수 채점하면 끝이에요. 한번 보자. 너는 100점. 제가 언제 100점했습니까?!!
너는 몰라도 돼. 내가 100점하면 100점이야. 내가 합격이면 합격이야. 따지지마. 너는 그냥 합격된 상태의 싸인이야. 하나의 신호이고 하나의 기호거든요 기호. 그냥 밥먹고 잠자는 기호란 말이죠. 움직이는 기호.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나도 알아요 소용없는 거 아는데 성경말씀이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도마가 무슨 믿음이 있습니까? 보고 믿은게 뭐가 있어요? 하지만 그 이적, 기적을 표적이 되게 하시는 능력이 다시 말해서 존재에서 사건이 되게 하는 능력이 이제 성령이 임하게 될 겁니다. 자, 요한복음 20장 여기 다시 봅시다. 20장 22절요.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역시 예수님이 창자국 보여줬거든요. 옆구리 보아라 해놓고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했지요.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를 아예 뭐로 봅니까? 의인으로 봅니까? 죄인으로 봅니까? 죄인으로 아예 간주해요. 왜? 예수님 빼놓고 다 죄인이니까. 아예 간주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오신다는 것은 이미 뭐냐 하면은 내가 오게 되면 이미 너에게는 죄사함이 있다. 죄사함 받았다. 그렇다면 네가 이렇게 모든 벌어지는 일은 죄 사함을 선포하는 거죠. 우리가 선포하고 나 꼬라지 이렇지만 죄사함 받았어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죄가 뭡니까? 모르죠. 본인이 어떻게 죄와 의를 구분합니까. 구분해봤자 선악적으로 구분할 뿐인데요. 인간은 일단 선이 없어요. 선이 없는데 선악지식을 아는 것은 자꾸 선이라고 우겨서 마귀가 우기게해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선이 없는데. 자기가 선악을 안다는 지식 때문에 이 선을 행할 수 있지 않겠냐고 자꾸 꾸역꾸역 다른 소리를 내는거에요.
이거는 선이고 이거는 악이라고 자꾸 자기가 구분을 짓는게 이게 악이에요 이게. 구분 짓는게 아니고 몽땅 악인데. 몽땅 악인데 ‘그래도’ 이러거든요. ‘그래도’ 그래도 헌금을 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헌금하면 선이 되지 않겠느냐 그 생각이 악이에요 그 생각이. 그래서 우리는 악만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악만. 왜냐? 선과 악의 가치 체계만 나와요. 가치 체계만.
선과 악의 가치 체계만 나오는데 가치 체계가 나온다는 자체는 우리 속에서 뭐냐?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누가?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구축합니다. 오늘도 복음 들었으니까 이거 설마 나쁜 일은 아니겠지? 나쁜 일 하시는거에요 오늘 . 뭐 복음 들었다고 갑자기 월급이 오르고 그런거 없습니다. 어떤 보상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흐뭇하죠. 이미 내 존재가 이미 형성되어 버립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거에요. 주께서.
선악에 대해서 먹지 마라고 했거든요. 알지마라 했는데 이미 알아버렸어요. 결국 이거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거는 갖고 가야 돼요. 선악이라는 이 난치병 이 불치병은 우리의 고질병이에요. 어떤 순간도 여기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 죄를 죄 되게 하는 것에 동반해서 죄사함이 돼요.
따라서 죄사함을 아는 순간은 철저하게 우리가 죄에서 못 벗어난다. 나라는 존재는 죄인이다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에서만 죄사함이라는 이미 결과로서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자기를 자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십니까? 성령이 하시는 거에요. 그렇다면 성령에 의해서 기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기도 내용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멋있는 것을 다 가지고 기도하지요. 어린아이부터 다 끄집어내지요.
그러면 성령이 이제 탄식하지요. 기도 꼬라지하고는. 그런데 우리가 재주가 그 재주 밖에 없거든요. 주여 제가 온 가정의 목숨을 바쳐서 주를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께서 놀고 있네. 네가 뭐라고 네가 재주도 없으면서 너 혼자 하나?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는 또 말하는 것이 자기 속내를 감추는 하나의 방식이거든요. 말이라는 것이. 말이 많다는 것은 나 좀 알아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자꾸 주님 앞에 말하는 것이거든요. 기도를 주께서 하게 하시고 그 응답은 누가 하십니까? 성령으로 응답하시는 거에요 성령으로. 그럼 그 성령의 응답은 뭐냐? 그거 딱 하나 밖에 없어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고마움과 감사가 없는 일은 성령의 일이 아니고 마귀의 일입니다. 곧 나의 일이고.
그리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오면 나쁜 짓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가본 교도소도 가보게 하고. 사실 교도소가 없어요. 세상 자체가 교도소거든요. 이미 옥에 갇혔는데 뭐 수갑을 또 채웁니까. 이런데도 가보게 하시고 다 주께서 새로운 사태를 일으키시는군요. 또 어떤 옥에서 어떤 복음적 사태를 일으키실지 제가 참 두근두근 거립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지만 진짜 인간이 영생을 얻었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주님은 진지하고 심각하고 엄숙하게 이야기 한 한마디가 우리는 나의 일에 바쁘다 보니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그 진지함이 참된 현실인 것을 깨우쳐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