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21장 1절(나를 넘어선 의미)190604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이 살아있음에 모든 관심사가 자기로 마감되거든요. 모든게 자기로 마감되기 때문에 그 주님은 주님의 십자가 부활의 세계로서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그걸 골키퍼처럼 막아서면서 “주님 제발 저 살게 해주세요” 라고 막아서버리면 결국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배열을 하느냐 이게 주님의 스토리가 아니고 나의 대한 스토리로 다 전락하고 말아요.
특히 목사님들 아시겠지만 자기 목회 잘했는가 교회 잘 키워내서 부흥시킨거 그걸로 마감되겠지요. 자기 사업이니까. 또 장사한 사람은 그렇게 하고. 또 뭐 이렇게 TV 나오는 연예인들은 자기 노래하고 하면 되는데 사업하고 망했다고 쫄딱 쓰디쓴 맛을 보았다고 이야기할 때 그 모든 이야기를 사람들이 듣고싶은 거에요. 네 인생을 어떻게 망했느냐. 왜? 비교하고 싶어서.
그런데 건짐 받은 사람은 비교대상이 없습니다. 비교대상이 없어요. 왜냐하면 경쟁해서 구원받은게 아니기 때문에. 애써서 먼저 앞장서서 따낸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타고넘어왔잖아 그 장벽을. 아무리 뚫어도 뚫을 수 없는 장벽을. 아예 타고 넘어왔고 아예 앞장서서 밀고 들어왔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이 아까도 동영상했지만 예수를 자랑하는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자랑해요.
예수 자랑하게 되면 우리 주님 예수님이다 그거 자랑할거에요. 그게 아니고 십자가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주님이 와서 그걸 깨우쳐줬다는 것 그 사실. 주님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의미에서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 사건, 인간의 충돌 주님과의 충돌.
이 모든 관심사가 자기로부터 이게 마감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참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요 예수님께서 오늘 21장에서 제자들 찾아온 것은 제자들 구원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신의 믿음 그 행하심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자기 사람들을 죽음으로 유도한거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고유의 가치 가지고 대들지요. 주님은 좋겠다만은 나는요?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베드로는 오늘 본문 21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를 않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15절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참 이 대목 읽어보면 과거 이야기가 솔솔 떠올라요. 도대체 교회에서 헌신하면서 얼마나 이 대목을 들어왔고 울려먹어 왔습니까. 이 대목하고 로마서 12장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헌신하라. 헌신예배 때 하는거요. 얼마나 우려먹었어요 이 대목을. 네?! 이 설교를. 이제부터 예수 믿었으니까 주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이 대목은 뭐냐 하면 너는 가치 없다는 거에요.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너는 애초부터 가치없는 거고 아니 찾아와서도 너의 가치는 없어요. 오직 주님의 가치만 돋보이기 위해서 베드로가 거기에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납치당한거에요. 그냥 편입된거에요. 이게 ‘택함’의 의미에요.
하나님의 창세전의 비밀은 뭐냐 하면 ‘예수 안’ 입니다. 예수 안의 비밀이에요. 예수 안에 모든게 통일된 비밀이거든요. 이 비밀을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게 어떤 방향이 되느냐를 같이 이제 경유하여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선악과를 따먹게 해가지고 죽음에 이르게 했고 우리 보기에는 참 ‘아~~그 때 안 따먹을건데’ 후회하지만 천사들 보기에는 세상에 저런 복이 어디 있느냐 죽음을 아는 피조물이 되다니. 우리는 죽음도 모르는데 저들은 죽음을 아니까.
죽음을 아는 쪽이 오히려 죽음 자체가 창조의 비밀이니까. 상대적으로 천사는 배제되는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이 죄인들의 집합인 이 교회의 진리가 나중에는 하늘의 천사의 영역까지 장악한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있는거에요. 모든 비밀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믿음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주님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그 죽음은 우리가 아는 죽음 말고 주께서 갔던 코스대로 우리에게 가게하시는 겁니다. 가게하실 때 뭐는 죽고 뭐는 사느냐? 선악을 아는 나는 죽고 생판 내가 모르는 나, 창세전에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한 내가 그 현장에 톡 튀어나오는 겁니다.
몇 초 가지도 못하지만. 다시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죽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선악을 아는 나는 무가치하고 그게 가리워졌거든요. 아까 그 광고판 이야기했지요. 주유소 광고판. 이게 가리워져 있으니까 뒤에것이 안보였던거에요. 선악이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죽어버리니까 뒤에 비로소 주님이 창세전에 준비된 바로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이죠. 앞에 있는 광고판은 나고 뒤에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나고 이게 다시 연결되는 겁니다. 물론 그 나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 대표해서 ‘나’라고 보면 돼요. 하나의 아담. 이정은5, 6 필요없어요. 어디가도 이정은이고 이쪽은 어디가도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이 우리를 동일하게 보는 겁니다. 그 원리로 보는거에요.
그렇게 하는 작업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처음부터 무슨 어부가 되게 했습니까? 여기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했지요.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였습니다. 어부인데 베드로가 뭘 잡았느냐 하면 고기를 잡았거든요. 고기 잡는데 잡는다는 것은 유지시켜주고요 그 프레임은 주님이 유지시키고 내용은 고기 잡지 말고 사람 잡아라 하는거죠. 프레임은 있고 형식은 있고 내용은 주님이 알아서 일방적으로 교체해버립니다.
그러면 자기가 어떤 나의 인생은 이렇게 살겠다고 하면서 형식 갖추고 내용은 자기 따로 생각한 바가 있을거 아닙니까. 이게 강제조치로 이게 교체된다 이 말입니다. 강제조치로. 프레임은 그 프레임이고요. 그래서 고기 잡는 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데 그러면 고기를 잡을 때 구원받는 사람을 이렇게 낚느냐? 그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에요.
주님의 방식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13장을 누가 한번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13장 47절 48절 49절 50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고기 잡을 때 좋은 고기만 잡습니까? 나쁜 고기도 겸하여 잡아요? 나쁜 고기도 겸하여 잡는거에요. 나쁜 고기도 겸하여 잡아요. 베드로가 전도했지만 그 전도한 사람이 좋은 것 나쁜 것 하지 않고 다 그대로 베드로 좋아한다 했고 따라다녔지요. 아까 이야기한 것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따로 있는게 아니고 분리되지 않아요.
나쁜 고기가 없다면 좋은 고기도 없어져요. 나쁜 고기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좋은 고기라는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몇 명이었어요? 한 명 아니었어요. 우리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강도만 달리게 하면 참 경제적이죠. 값을 싸게 먹히잖아요. 등장인물 배우 두사람 말고 한사람 쓰면 되잖아요. 그런데 두사람 쓰지요.
이게 천국과 지옥은 주님의 양면성을 가진 속성을 그대로 결산을 하기 때문에 그게 지옥되고 천국되는 거에요. 공의롭게 심판하는 동네 지옥, 사랑으로 봐주는 동네 그게 천국. 그릇 만들 때 한 종류로 만드는게 아니에요. 진노의 그릇 그리고 긍휼의 그릇. 이것이 주님의 솜씨고 그 솜씨가 지상에서 그대로 발휘하고 그 발휘한 것을 베드로를 통해서 그대로 역할을 맡고있는 거에요.
여러분 나쁜 고기도 좀 건지세요. 나쁜 고기도. 아마 돌아설 사람도 많이 아마 생겼을거에요. 좋은 고기 그거 몰라요. 뭐가 좋은 고기인지 자기 본인도 좋은 고기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무슨 좋은 고기를 건져요. 주께서 유발한다니까요. 어떤 사태든 주께서 유발해요. 성도의 일은요 주께서 지시를 주님께서 시작한 일을 그 다음에 우리에게 지시란 형식으로 깨닫게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지시는 주님을 드러내는데 내가 그 성질 급해서 내가 “주께 충성하겠습니다” 나서는 것은 꼭 가치가 ‘나’로 마감되어 버려요. 나로 마감이 되면 그러면 우리는 꼭 결산에 나서요. 내가 착했었나? 나쁜짓 했었나? 내가 충실했나? 자꾸 선악적인 논제로 자꾸 결산을 시키니 이게 주의 일에 방해된다니까요. 나로 모든 의미가 마감되면 안돼요. 나를 차고 넘쳐 넘어서야 돼요. 나를 밟고 방해하지 말라고 나를 짓밟고 나서야 돼요.
자, 좋은 고기 나쁜 고기라고 하는데 마태복음에 인간을 고기로 봤으니까 같은 고기로 봅시다. 자, 인간은 어떻게 있느냐하면 동물하고 달라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시공간을 휘두르고 나타나요. 시공간. 용어는 어렵다만은 시간과 + 공간을 갖고 나온다고요.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에요. 내가 주인공. 시간과 공간을.
인간은 자기가 여기 있다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저 뒤에 계시는 주님 보시기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건이에요. ‘사건’.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사건이다 말이죠. 사건인데 인간은 사건으로 볼 마음이 없어요. 너무 허무하니까. 존재로 보게 되면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비로소 최종 의미를 자기한테 최종 의미를 자기한테 부여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뉴브강. 다뉴브강 어디 있겠지 우리는. 어디 있겠지요. 흐르고 있겠지요. 뭐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노래도 있고 있겠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우리 이모가 어디 유럽에 놀러간다고 여행사 했는데 좋은 여행사 했는데 잘못 만나가지고 이모부하고 이모하고 여행 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구조자 명단에는 빠져있고 실종됐다는데 말이 실종이지 아직 안 나온거 보니까 이거 죽은거잖아요. 실종되었으면 뭐 걸어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다뉴브강이 내 이모, 이모부라는 그것 때문에 갑자기 다뉴브강이 갑자기 뭐로 등장했습니까? 내 존재 의미에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를 주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이게 일방적으로 이게 편입이 되요. 인간이라는게. 인간이 그냥 무심코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인데 사건같으면 내가 무산되고 내가 해체되어도 상관이 없는데 우리는 절대로 나를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영원한 존재로 굳히기에 들어가요 굳히기에. 유도에서 목 조르고 굳히기. 굳히기에 들어간다고요.
그 좋았던 다뉴브강도 우리 이모를 삼켰던 다뉴브강으로 돌변해버려요. 미워! 다뉴브강!! 이렇게 되버린다고요. 다뉴브강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가만 있는데. 선장이 잘못했지. 가만있는 다뉴브강 욕먹게 되었어요. 나 헝가리에 놀러 안갈거야 이런 식으로. 내 존재가 존재로부터 출발한 계시된 의미에 네가 뭔데 훼손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마귀지 이게 인간입니까? 괴물이지요. 이거 괴물이지요. 다같이 괴물이니까 괴물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거 주님께서 용납 안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 인간은 동물하고 달라서 바깥 세상을 분석하고 해석해요. 분석하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귀에 용어만 딱 들어와도 그 용어를 그냥 용어로 마중 나가지 않아요. 내가 잘 되야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용어에 접합니다. 목사가 설교하는데 설교에서 막 단어가 막 나오잖아요. 그 단어 전부다 쏙쏙쏙쏙 그러니까 내가 구원되는거 맞지요? 라고 전부다 일방적 자기 존재 좋아라고 일방적인 해석을 해버리는게 인간이에요. 일방적인 해석을 해버리는게.
인간들이 이게 시공간성입니다. ‘시간과 공간’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앞으로 어디 갈거다. 천국에 내자리 하나 마련해 놨다. 전부 이런 식으로.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한적 있지요. 인간의 거처는 소유할 수 있어도 시간은 소유하지 못한다고요. 거처가 중요합니까? 거처가 위에요? 시간이 위입니까? 시간이 우위죠. 아무리 좋은 아파트 살아도 늙어죽는 것은 이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잖아요. 내가 늙어서 시간 따라서 점점 없어지는 것. 이거 안되잖아요. 어쨌든간에 인간은 자기의 시공간성을 포기를 못하고있는 겁니다.
자, 장벽이야기 장벽. 예수님 여기 계십니다. 먼저 십자가 부활하고 먼저 와 계십니다. 제자들 여기서 고기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그들의 대답, 그들이 느낀 느낌, 그들의 감정 이거는 그냥 나오는게 아니고 자기의 시공간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해석된 단어가 나오겠지요. 이것은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못 놓겠다는 거기서 나온 뭐냐? 의미 행위다. ‘의미’. 자꾸 자기한테 의미를 주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되면 존재니까 계속 나는 계속 살아야 한다가 되겠지요. 살아야 한다. 많이 피곤하시죠. 조금 참으세요. 살아야 한다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하는데 주님께서는 죽었잖아요. 죽고 난 뒤에 다른 모습으로 살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예수님 나름대로의 뭐가 있겠습니까? 시공간이 있을거다 이 말이죠. 이 시공간을 제자들에게 덮치는거에요.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참 이해하기 난처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가 용감하게 해드려야 되겠습니다. 이거 빼면 안 되니까. 그거 하기 전에 아까 한 것 다시 해봅시다. 고기를 잡을 때 고기를 잡는다 여기는 뭐가 있다? 좋은 고기 있고 뭡니까? 나쁜 고기 있지요. 나쁜 고기는 어디 갑니까? 지옥가고 좋은 고기는 천국가지요. 그럼 고기를 잡는 것은 누가 잡는다? 베드로 사도가 하겠지요.
그럼 사도가 뭘 갖고 있느냐? 시공간을 갖고 있겠지요. 내 말 들으면 구원받을거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미가 어디서 마감됩니까? 베드로에게 마감되겠지요. 그러나 베드로 뒤에 뭐가 있다 했어요? 예수님의 나름대로의 시공간이 있지요. 예수님의 시공간과 이것이 연결이 되지요. 연결될 때 중간에 누가 낍니까? 인간이 끼어들지요. 인간이 끼어들지요. 이게 지금 우리 이야기잖아요 우리 이야기.
내가 설교 좀 못했다고 사람들 지옥가는거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느낌은 그래요. 진짜 구원받을 영혼을 못 가게했구나. 지가 목사가 설교해놓고 지가 스스로 생각한다니까요. 교회 복음 아는 엄마가 자식한테 잔소리해놓고 지옥가면 어떡하지 걱정한다 이 말이죠. 중간에 자기 시공간, 자기 의미성이 끼어드는거에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쉬운 예를 들면 여러분 이제 복잡한 것이 이해 될거에요. 여러분들이 김유신장군하고 계백장군하고 전쟁을 벌였어요. 이게 무슨 전쟁이냐 하면 황산벌전쟁을 했지요? 황산벌 경기도인가 제천인가 아무튼 황산벌전쟁을 했지요. 그때 황산벌전쟁을 했을 때에 한번 상상해보세요.
김유신장군 계백장군 칼싸움하고 있는데 저와 여러분들이 양복, 슈트빨 딱 챙겨가지고 여러분 양장 원피스 이쁜거 공수해가지고 그 현장에 한번 가보자 이 말이죠. 그럼 한번 상상해보세요. 이런 재미난 상상이 있어요. 지금 김유신 막 칼싸움하다가 잠시 옆을 보는 거에요. 우리가 서서 구경하고 있으니까. 누구세요? 어느 별에서 왔어요? 이렇게 되잖아요 지금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싸워봤자 계백 지고 김유신 이겨.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장소가 중첩되었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장벽과 그 벽을 넘어서 이쪽 벽에 계시는 분이 그 쪽 상황을 시공간을 가지고 우리 시공간 아닙니다. 그쪽 시공간을 오게 되면 의미가 내 의미 아닙니다. 주님의 의미 최종적인 주님 중심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이미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5G가되는 거에요. 5G가.
5G 얘기 잠시 해볼까요? 젊은 사람 둘이 지금 야구중계보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한 50대쯤 과장쯤 되는 사람이 보고있다. 야 이게 안타가 되겠나 안되겠나. 그거는 안타다. 어?! 어떻게 알지? 응 알지. 야 도루하는데 도루가 세이프 됐나? 그 도루가 세이프되지. 세이프야 그건 아웃 아니야 세이프야. 어떻게 알지?!! 5G거든. 속도가 전송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중계방송이 빨리 되기 때문에. 시간이 그게 선전이에요. KT 선전나온다고요.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알아요. 뭘 아느냐 하면은 주께서 택한 백성은 건진다는걸 다 알아요. 그리고 우리는 항상 우리의 구원은 쓰잘데기 없고 그것은 갖고있으면 고민거리만 될 뿐이지 그걸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 그걸 알아요. 아는데 계백 장군은 모른단 말이에요. 이건 죽기 살기로 내일을 모르니까 저 계백이나 김유신이나 저걸 죽이지 않으면 내가 못 살아요. 그래서 이 세상은 뭐냐? 죽기 살기로 살아요.
요리해가지고 백종원 골목식당해가지고 한번 살아볼라고 욕 얻어먹어가면서 청년들 돈가스 이렇게 하고. 모든 세상 돌아가는 일이 일등해볼라고 미스트롯해서 일등해서 상금 3000만원 탈라고 또 송가인 나와가지고 노래 부르고 홍자 모르죠? 모르면 치워버려요. 세상에 어느 구석에도 진짜 서울대학 갈라고 애쓰고 뭐 모든 것이 아니야 몰라 우리는 장래를 모르는거야 내가 잘되야 돼. 누가 잘된다? 의미 모든 의미가 어디로 마감됩니까? 우리 쪽으로 마감되는 거에요.
내가 잘되는 것이 주의 축복이라고요. 누가 그런 소리해요? 우리는 예수님 성공했으면 더 이상 거기에 추가해서 집어넣지 맙시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 이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안 알아줍니다. 자, 유명하다는 말은 뭐냐? 인간의 각자 나름대로 시공간에서 영웅처럼 보일 때 유명한거에요. 각자의 시공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때 영웅이라는 말을 붙이는거에요.
그런데 하나도 안 부러우면 영웅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인생 그냥 즐기는 거죠. 그리고 우리의 시공간을 낭비하는거에요. 오랜만에 좋은 말 했네. 우리의 인생을 그냥 낭비하면 됩니다 ‘낭비’. 겁이 많아서 낭비를 못하지 사실은 낭비해도 되는 거에요. 낭비해도. 그냥 소모해도 상관없어요.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이 우리를 죽이자고 덤벼드는 상황이기 때문에. 살기를 촉구하는 상황이 아니고 그만 손 놓지 그만. 가드 내리지 그만. 이렇게 하지말고 손 놔. 그냥 놔. 내가 살던대로 그냥 살면 돼. 이게 주의 뜻이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공격하지 말란 말이죠. 지킬게 지킬 가치가 없다 이 말 아닙니까. 아니 몸 아파도 어떤 사람이 누구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어떤 사람이 병든 남편을 진짜 전신마비 남편을 봉양하는데 그 남편은 육체는 마비되었는데 자기의 정신 모든 정신은 자기 시공간은 자기 두뇌에 쏠려있어요.
아내가 그만큼 수고해서 봉양하면 고맙다는 소리는 안하고 맨날 욕이라. 맨날 심한 욕을 해요. 고통스러우니까 그거 해소한다고 자기를 옆에서 봉양하는 사람에게 모든게 불만이고 불평이고 발로 차고 욕하고 던지고 그래놓고 요양병원 가라하면 죽어도 안 가겠다. 내가 어떤 인간인데 거기에 왜 가요. 제가 그랬죠 모든 수치는 어디에 모여 있다고요?
하체가 수치스러운게 아니고 어디 있다고요? 인간의 낮짝이 얼굴이라는 말도 안돼. 인간의 낮짝이 수치스러워요. 인간의 낮짝은 날 좀 알아달라는거에요. 늙어빠진거 볼 거 뭐 볼 거 뭐 있다고. 날 알아달라. 그 알아달라는 입과 코로 나오는게 뭐냐? 자기를 사수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외부에게 뭘 퍼붓는다? 욕을 퍼붓는거에요.
사람이 욕을 자꾸 하는 이유는 자기가 지금 이런 식으로 나를 지켜야 되겠다는거에요. 시공간이 수상해요. 이 수상한 것은 마귀가 너는 신처럼 되리라. 너는 의미있어. 너를 네가 안 지키면 누가 지켜. 이것이 조립된 조합된 내용이 꽉 차있는 것이 시공간입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시공간뿐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바르게 하라 반듯하게 하라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내용은 그거에요. 자, 베드로야 도 닦아라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지. 그걸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이 이야기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베드로에게 사도에게 열두제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니까 평소에 예수님만 생각하라 이걸 요구하는게 아니고 뭐냐 하면 이거에요. 사명이에요. ‘사명’. 목격자. 사명. 사명은 자기 일이다? 아니다? 완전히 자기 일이 아닌 거에요. 애 키우고 남편하고 살고 이거 자기 일 아니에요. 사명이라니까. 어떤 사명? 다 잊어버렸지요.
좋은 고기 그 다음에 무슨 고기? 나쁜 고기. 필히 나쁜 고기를 집어넣으세요. 그래 나는 사명 받았으니까 천당 갈 사람만 뽑아야지.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나쁜 고기 좋은 고기 다 건져올려야돼요. 복음으로. 그래야 천국과 지옥이 대비될게 아닙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구별되되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따로따로 노는게 아니에요. 분리되지 않아요.
도 닦아라 이야기 아닙니다. 지금 요한복음 20장은 자 정신 차리고 앞으로 그런 실수 하지 마라 그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양을 맡긴다. 사명을 맡긴다. 사명이에요 사명. 그럼 사명은 내 일이다? 아니다? 내 일이 아닌거에요. 내 일이 아닌거에요. 그런데 목회자뿐만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전부다 일을 해놓고는 그 평가를 마치 자기가 숙지해야 되는 것처럼 평가 내리는 오류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기 숫자까지 딱 언급했다.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주님이 파놓은 함정이고 미끼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짜 고기는 이 요한복음 21장 가지고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 미끼를 던진거에요. 153이라는 숫자가 나오니까 거기에 그 숫자풀이하면서 자기의 숨겨있는 자기의 시공간적인 자기로서의 의미가 자기한테 마감이 되는 의미들이 마구 해석되고 마구 쏟아나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베드로는 고기 잡는 사람이었다. 사람 낚는 어부였다. 그렇다면 그 어부의 고기가 153이라는 것은 사도행전 시대로 가서 주께서 153이라는 상정숫자에 합한 사람들을 건져올리라는 주님의 예고다라고 그렇게 해석한 거에요. 모든 주석이. 이 이천년 넘는 기독교 역사가. 그 다음부터 뭐냐 하면 사람을 좋은 고기 만들기 위한 수작에 나서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미끼라고 해야겠다. ‘미끼’.
어떤 사람은 모나미 153이라고 모나미 회사 처음 출시될 때. 뭐라고? 153. 1963년 5월 1일 해가지고 숫자를 153 그래서 모나미. 이렇게 붙일 수 있어요. 모나미가 153되는건 좋은데 모나미 그 볼펜 153하고 주의 일이 무슨 관계 있습니까? 모나미 사장을 칭찬하는 거에요. 모나미 사장 이거 하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거 해가지고 주께서 이처럼 많은 주의 일이 크게 되길 원해서 했다는거에요.
그러면 아까 했지요. 성공이라는게 뭐라고 했습니까? 성공이라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시공간 속에서 성경을 엉터리 해석한거죠. 그게 미끼라니까요. 성경을 준 것은 ‘네가 나쁜 고기 맞잖아’를 티내기 위해서 성경을 준거에요. 지옥 갈 사람을 뽑아내기 티내기 위해서 노출시키기 위해서 성경준 거에요. 성경 해석을 그렇게 할 줄 알았지롱~ 이런 식이란 말이죠. 성경 해석을.
사람들이 목사들이 그걸 거론하는 이유가 뭡니까? 카네기 이야기. 카네기가 두 사람이 있는데 카네기 이야기하는 것은 십일조 이야기하고 싶어서 카네기 하잖아요. 카네기 인생관, 카네기 십일조. 이게 뭡니까? 카네기 십일조 해가지고 복 받았다 그 이야기하려고 끄집어낸다는 자체가 목사가 십일조하게 되면 우리 교회 부흥되고 재산 많아진다. 교회 짓는다. 그걸 자기 무의식중에 노출, 무의식중이 아니라 노골적이지만 노출시켜버린 거에요 그걸.
옆에서 간음한 사람을 자식이든 누구든 욕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 죽기 싫다는 거에요. 내 인생 책임지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나 이렇게 누구 잃을 그런 남자 아니야. 그런 남자 아니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에요. 미쳤어요. 진짜 껍데기만 사람이지 속은 괴물 들었어요. 갑자기 봉준호 감독이 생각나네. 괴물. 그게 인간입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데.
도대체 그래가지고 어디 천당을 가요. 미쳤어요? 천국을 다 괴물 모여주게. 봉준호 감독도 천국가겠다 이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 보고 얼마나 우려먹는냐 하면 수석이 등장해요. 집에 물이 다 차가지고 수석 하나 들고 옵니다. 수석이 뭐냐하면 자연을 인공적으로 이렇게 가둬논거에요. 이거는 인간의 장래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획이 없어, 무계획이거든요. 혹시 기생충 보신 사람? 무계획이다. 아버지의 무계획에 반대해서 아들이 계획에 나서서 그 수석 가지고 지하 밑에 또 지하 있는 그 우리 정체를 아는 그 인간을 때려죽일려고 들고 가는 것이 아들의 계획입니다. 대책 없는 이 세상에 유일한 계획은 폭력이다 뭐 이런 식으로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또 제 평 보고 아예 영화 안 보는 사람은 없는지. 그걸 영화를 보여줬어야 되는데.
인간은 사람들이 그걸 처음 볼 때는 재미있었는데 나중에는 불편하더란 말이죠. 불편. 이 복음이 불편한 거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불편한 것을 진짜 기쁜 소식으로 다 바꿔놨어요. 물론 가짜이지만. 여러분 구원받고 싶어요? 이 153의 비밀만 풀어버리면 여러분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꼬시고있는 거에요. 거기에 걸려든거에요 결국. 주님이 던진 가짜 고기 티를 내기 위해서 뽑아놓은 153, 거기에 다 걸려든거에요.
사람들이 배운 사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를 보게 되면 153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분명히 사람을 낚는 거니까 베드로가 사도가 되어서 사람을 낚을 때 베드로가 낚은 사람의 숫자에 153은 넘을 거고 그러니까 베드로가 구원한 사람들의 총괄이 또는 제자들이 했던 총괄이 153일테니까 이 153을 그냥 풀게 되면 이게 신의 숫자가 신의 숫자답지 않다는 거에요.
신의 숫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언가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숫자에 숫자 + 신 +학문. 이게 유대교에 많이 하는데 이게 뭐에요 이게. 우리는 영적으로 풀어야 된다는 거에요. 영적으로 푼게 어떤 퍼즐풀 듯이 푼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153이 어디서 나왔는가? 153은 1의3승 + 5의3승 + 3의3승 하면 되는데 3은 뭐냐?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이래서 153이라는거에요.
그러면 그걸 보고 저렇게 오묘하다니 아이고 은혜받는다 이렇게. 인간으로 출발해서 찾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비밀을 손에 쥐면 구원받겠다는 거에요. 이거는 십자가 부활을 내쪽으로 손톱이 빠지더라도 기어 올라가면 뚫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지금은 아닌거 같지만 여러분들이 그동안 얼마나 원했고 이런 식으로 얼마나 들었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숫자 맞는거 보니까 거기 진리 있겠지. 숫자 많은데 왜 중국 안가고 돈 떼어먹고 도망가는데 조희팔인가? 회원수 많아가지고 돈 다 떼어 먹었는데. 또 어떤 사람은 뭐냐 하면 153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17의 연속수가 된다는 거에요. 17의 연속수가 뭐냐 하면 1+2 이거 더하면 3이 되거든요. 1하고 합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1,2,3, 다 합하면 뭐가 되냐면 6, 이거 다 합하면 뭐가 됩니까? 10. 이렇게 해가지고 몇차례? 17차례하게 되면 나중에 153이 된다는겁니다.
하여튼 시간이 남아돌아. 그럼 17이 왜없느냐? 10은 완전수고 7도 완전수라는거에요. 두 개 완전수가 합쳐져서 이걸 풀이하니까 이렇게 됐다. 하나님의 오묘하고 심오한 것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해가지고 요한복음. 153이라고 숫자를 확실히 이야기 한 것은 베드로가 고기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숫자의 고기수를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로 새롭게 기억되고 부곽되기 위해서 하는거에요.
내 일이 아니고. 내가 관리할 일이 아니고. 이제는 주님의 일에 +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에 사명자 또는 목격자가 되는 겁니다. 목격자라는 말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에 보면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요한복음의 사도들이 무슨 도 닦았습니까? 이제는 도를 닦아야지. 인격을 수양해야지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뭡니까? 내 일은 있다? 없다? 아예 내 일이라는 것은 없어요. 왜? 주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합니까?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해요. 다만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살아있음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거고 주님의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고 주님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관계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거에요.
우리는 그걸 순간순간 알 수는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유발시키는 사건은 처음부터 그걸 알게 하는 사건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가 어떤 자리에 놓여있다는 것을 지독하게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요. 어떤 일을 벌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내가 이거 신앙생활 똑바로 한 징후다 해가지고 또 혼자 고민에 빠지게 만들어요.
사람은 돌아서면 자기를 몰라요. 다시 한번 내가 어느 자리에서 어디에 얽매였던가? 선악이라는 구조에 얽매였음을 반복해서 그걸 느끼면서 거기서 다시 정신 차리고 보니까 아 내 일은 아예 없고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백장군 이제 그만합시다. 김유신도 그만 합시다. 그만 합시다. 유명이라는 것은 비교될 대상이 이 땅에 없어요.
아까도 했지만 유명인사라고 하는 것은 그거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맙시다. 질투하지 맙시다. 누가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거기에 얼마나 예민했습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 오랜만에 아파트 쳐들어와가지고 반찬 냉장고 관리 이따위로 할거야! 이따위로 할거면 너희 집 가! 성질 급한 불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면 어머니가 가세요. 요새 그런 겁 없는 그런 시어머니 잘 없지만. 당신 아들하고 살아주는 것만해도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계속 쏘아대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인간이야 그거에요. 기본이 뭐냐 하면 너 살아있잖아. 산 값을 해야지. 이게 세상 교회가도 그 소리 듣고 세상에서도 그 소리 들어요. 너 때문에 남 해 입으면 안 되잖아. 그런 이야기. 윤리 도덕 이야기가 계속 쏟아 져요. 누가 그렇게 유발합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유발하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왜? 우리가 사명, 사명 하다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의미가 ‘나’로 마감됐어요. 주님 나 이번 사명 잘 감당했지요? 다시 사명해놓고 마감이 나 잘했다는 마감 오니까 주께서 흔들어놓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시 흔들어놓는 거에요. 제가 옛날에 화학과 출신이라서 공장에 화학 실험실에 있었던 적이 있는데 거기 가면 뭐하느냐 하면은 화학실험실에 주로 아가씨들이 근무를 해요. 나는 정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실습하러 갔는데 하루 종일 뭐하느냐 하면 이거 해요.
이게 뭐냐 하면 그때 원심분리기도 없을 때 시약을 해놓고 그게 혼탁하잖아요. 그거를 앞에 가라앉는 액과 떨어지는 액을 분리하기 위해서 계속 흔들어 대요. 주님께서 계속 흔들어 대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영생 갈렙과 여호수아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위에것과 우리를 분리시킨단 말이죠. 그런데 놔두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섞여버려요. 섞여서 고민, 고민 혼자 고민 다 하고있어요. 인과논리를 자기가 다 구상하고 있어요.
사명이라는 것은 뭐냐? 사명이라는 것은 주님의 우위성, 주님의 하시는 십자가 부활의 우위성이에요. 위에 있는 겁니다. 아까 그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자, 계백장군하고 김유신이 신라시대 백제시대 그 당시 시대에 열심히 복장을 하고 싸우고 있다 이 말이죠. 우리는 슈트입고 양장입고 원피스 이쁜 것 입고 참관자로 관람자로 끼어 있는거에요. 물론 화살 오면 잠시 피하면 돼요. 피하면 되니까.
왜? 우리는 이미 그 시대 화살 꽂아도 통과해버려요. 그 시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태어난 적이 없기에 죽는 적도 없어요. 그냥 유령처럼 관람할 뿐이에요. 성령받은 사람이 오늘날 이 시대의 삶이 그런거에요. 이게 금방 안 되서 문제지만. 마치 화살이 내 화살이고 돈 1억 오천 나가면 내 돈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내 돈 아니거든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인데 그건 이론이고 실제는 제목이 뭐였던가요? ‘가상현실’ 아닙니까.
가상 3D로 놀이동산 해봤는데 알아요. 가짜인줄 알면서도 다 피해야돼요. 미치겠어요. 다 피해야되고 안 그러면 죽어요. 가상인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세상이 예수님께서 죽어버린 이거는 지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쓰고요 막 미워도하고 싸우고요. 한푼이라도 아낄려고 안 질려고 하고요 남하고 비교 안하겠다고 하고 또 비교하고 나 우수합니다 자랑질하고싶어하고 그래요.
계백장군 여기서 할 때 우리는 심정이 어떤 심정이냐 하면은 그냥 가만있으면 안되고 증거를 해야되거든요. 뭐라 해야 되냐하면 끝났어. 신라가 우승했어. 신라가 이겨. 너 백날 계백장군 잘하는데 소용없어. 어떻게 어떻게 해도 신라가 이기게 되어 있다고. 그게 바로 뭐냐? 이미 ‘종말의 영’, 종말의 영이 임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래 울어 울고 싶으면 울고 웃는데 그거 구원하고 아무 상관없어. 니 잘못한거 알고 네가 잘한 것도 있는데 그거하고 구원하고 무슨 관계 있어? 구원은 그걸 아예 생각하지 않는게 구원이야 라고 이야기하라고 요한복음 끝나고 사도행전 보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이게 세 번째 나타남이거든요. 12번 안 나타나고 세 번째 나타나고 끝나요. 이 말은 지금 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열한제자지만 나중에 열두제자입니다. 열두제자. 예수님께서 성령을 준 자기 백성을 만들어요. 백성을 만드는데 이 백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백성이 없어요. 왜? 다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없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없는 죽은 12제자가 12이라는 의미 때문에 12제자가 없어야 될 자리에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나중에 사도 바울이 여기 오는데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시공간이 내가 만든 시공간에 주님이 함께 주님 안에서 만들어낸 형성된 시공간에 참여하다보니까 내 시공간을 말하는게 아니고 주님의 시공간이 현재 이렇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복음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로 나는 죽고 지금 십자가의 생생한 위력만 살아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우리보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우리는 예언대로 이야기해요. 예언대로 해도 소용없어요. 가상현실의 이것 이것은 가상이라고 해도 소용없듯이. 우리는 성경 배우고 외우고해도 소용없어요. 하지만 실제로 주님께서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걸 느끼는 순간이 후딱 지나가지만 어떤 순간이 화들짝 그걸 느끼는 순간이 올 거에요. 내가 지금 연극하고 있다는 것. 내 팔자와 내 운명과 지금 내가 해석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 내가 지금 느끼는 것과 실제로 나의 운명과 관계없는 거에요.
다시 한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 시달렸느냐? 나보다 잘된 사람을 나보다 행복한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인간의 모든 수치는 어디에 몰려 있다고 했습니까? 눈, 코, 입 얼굴에 있지요. 우리는 봅니다. 듣습니다. 냄새 맡고 합니다. 부러워하지요. 눈으로 봤으니까 본 모든 정보는 두뇌에 쏠리죠. 모든게. 이 팔, 다리 잘라도 입만 살면요 아파가지고 욕한다고 했지요. 완전히 집결되어 있습니다. 욕이.
우리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도 평소에 별명이 천심이었습니다. 하늘의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치매 걸리고 어디서 배웠는지 욕이 나와요. 여러분 자녀가 집에서 너무 착하지요. 몰래 학교 가서 한번 보세요. 욕이 막 나와요. 우리가 뭐냐 하면 우리 몸 자체가 세상의 시공간과 하나가 되었어요 이미. 안 듣고싶어도 들려와요. 따라서 우리가 죽어도 할 말 없어요.
모든 의미는 내가 행복하면 끝, 만족하는 거에요. 이거는 죽어 마땅한 짓이에요. 그걸 알고 죽어 마땅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그 말 해봤자 소용없어요. 우리는 내가 도 닦으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주의 일을 하라고 사명을 맡긴거에요. 따로 내 계산 하지 마세요. 오늘 내가 수입이 얼마나 되나? 따로 계산시 누르지 마세요. 이렇게 해도 또 누를거야.
착한일 했으니까 내일 복이 올거야. 누를거에요. 착한일 많이 해놓고. 내일되면 착한일한 그 복을 받고 우리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 친근해요. 그게 우리의 원함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 그게 주님의 자기 일이기 때문에. 연속된 장벽을 가지고 오시는 자신의 연속된 일이에요. 보지 않고 믿는다는 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 상상한다는 말이 아니고 실제로 많은 무수한 보이는 것들 속에 우리가 휘둘리면서 믿음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실은 이게 조작이구나 하는 것. 내가 내 잘남을 위해서 내가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다고 여기면서 조작한거에요.
우리는 계백장군 김유신 만났다고 양복 벗고 원피스 벗고 옛날 여자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힐 하등의 이유 없습니다. 주님 주신 그 그리스도의 옷으로 그냥 입고 그냥 살면 돼요. 그쪽에서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하든지 나는 먼 별에서 왔다고 얘기하시고 먼 별에서 왔다고 얘기하시고 이미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거 맞아요. 덮친거에요.
제 이야기 아니고 골로새서 3장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따로 있다. 계백장군하고 김유신이 우리에게 물을거에요. 너 실례지만 양복 입으신 분 양복인 줄도 모르지 이상한 옷 입으신 분 혹시 지금 사시는 동네가 저 한양 쪽? 그때는 한양도 아니지 저기 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가야 쪽입니까? 하고 물을거에요. 어느 쪽이냐고.
우리는 미래에서 온 코난입니다. 우리는 미래에서 온 코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장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이 복장 그대로 가겠습니다. 예수의 옷을 입은 자는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사도가 요한복음도 그렇지만 사도가 참 납득하기 힘든 성령 안 받으면 납득하기 힘든 희한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쳐 놓은 미끼 함정 우리가 그동안 빠져있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 말씀 이용해서 천당 가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습니까? 주께서 찾아오셔서 사명을 줄 때 그것이 이제는 주의 일이 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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