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예수님의 관점 1701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3. 27. 12:10
2017-01-04 00:19:35조회 : 1105         
예수님의 관점 170103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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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8.127)17-01-06 00:21 

가락-요한복음13장1절(예수님의 관점)170103a-이 근호 목사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자,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하기 전에 12장 했잖아요. 12장 이야기는 너무 관념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죠. 실질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 관념적인. 관념적인 이야기라는 말은 뭐냐, 남들한테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데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이야기. 예수님에게만. 

  

그러니까 사람이 서로서로 만나면서 본인 이야기만 계속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공감을 느낄 수가 없는 거예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나는 이 땅에서 죽었다가 다시 들려야 될 것이다.” 전부 다 예수님이야기에요. 그리고 아버지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의 이야기니까 그건 예수님의 아버지 이야기지, 다른 듣는 사람의 아버지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관념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 관념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결론까지 이야기해버렸어요. 뭐냐 하면 “너희들은 자신의 영광을 사랑하지 나를 믿지 않는다.” 실컷 이야기해놓고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믿지를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믿지를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인데, 신명기 마지막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맺어버렸어요. 신명기 1장에서는 분명히 말씀대로 살라고 지시해놓고, 마지막 장에서는 너희들은 배신할 것이다. 이걸 다른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폐쇄회로라고 합니다. 폐쇄회로. 닫힌 구조라고 하죠. 닫힌 구조. 

  

공간이 폐쇄가 되게 되면 공간에 천장이 있겠죠.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너희들은 그 천장 아래서 예언의 적용을 그냥 당하게 될 것이다. 배신하고 말리라. 반드시 배신 되리라. 그러면 신명기 끝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뭘 믿어야 돼요? 처음에 뭘 하라, 하지마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하는 이걸 믿어야 되겠어요? 마지막에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되겠어요? 

  

결국은 이걸 일관성 있게 통째로 믿으려면, 아! 우리는 배신하게 되는구나! 라는 것을 믿어야 되겠죠. 근데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우리는 결국은 하나님은 배신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 저 믿습니다.” “뭘 믿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게 진심이겠어요? 아니면 놀리는 것이겠어요? 이게 사실은 진심일 수가 없어요. 

  

진짜 배신할 것 같으면요, “하나님, 우리한테 이렇게 나오면 안 되죠?”라고 반박이 나오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저는 끝까지 우리가 배신할 줄을 믿습니다.”라고 이런 말을 한다는 그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배신이라는 말이 배신하는 척을 배신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진짜 배신을 할 때 배신이 된다 이 말이죠. 진짜 배신하는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 입에서 우리가 배신할 줄 예언했죠? 배신합니다.” 이러면 이거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배신 안 한 게 돼요. 

  

왜? 주께서 너희들은 배신한다는 예언을 내가 받아들였으니까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신명기 32장부터 마지막장에 나오는 말씀이나 요한복음 12장 말씀이나 우리가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개인이야기고, 그 개인이야기는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그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없다, 에요. 우리가 믿을 것은 없다. 믿는다고 용 써봐야 그거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걸 폐쇄회로, 갇힌 구조. 밑 있고 그 위에 천장 있고. 백날 설쳐봐야 그 폐쇄된 구조에서 열 내는 것밖에는 안 돼요. 그래서 자기 최면을 걸기 위해 그 안에서 고함지르면서 철야하면서 기도하는 것밖에는 안 돼요. 

  

자, 그렇다면, 믿지 못한다면 그럼 제자들이 구원받지 못했는가? 구원받았죠. 그럼 뭐냐,

항상

믿음은 사후에 회고적으로 믿음이 돼요. 회고적으로.
미리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다 해놓고,
그 다음에 돌이켜보니까 내가 믿으려고 애쓴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 말씀의 내용대로 믿게 하시는 새로운 피조물로
계속해서 만들어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내가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도 성립이 안 되고요. 주께서 말씀대로 그렇게 현실화시켰다가 성립되죠. 주께서 말씀대로. 주께서 말씀대로 그대로 실시된 거예요. 주께서 말씀대로 그렇게 된 겁니다. 따라서 말씀대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나를 안 믿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고 믿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다. 이래나 저래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12장이야기에서 우리는 믿을 게 없다. 주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신다. 그럼 그 이야기가 된다면 13장부터는 할 게 없지 않습니까? 할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이 12장에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자신의 일을 본인에게 퍼부었던 것을, 이제는 거기에 부합되는 현실을 서서히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갇힌 구조 안에, 오늘 제목을 이걸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폐쇄회로, 갇힌 구조죠. 

  

갇힌 구조를 실제화 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개입이 되는 겁니다. 자, 갇힌 구조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갇힌 구조에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시면서, 갇힌 구조 바깥에는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갇힌 구조 바깥에 계신 아버지하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2장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갇힌 구조에서 통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게 언약관계인데, 아버지하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너희는 결국 나를 믿지 못할 것이다.” 이래 나왔다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이건 12장이고, 13장에 보면 이 갇힌 구조에 바깥에서 이게 실제화로 개입이 되는 겁니다. 개입이 되면 갇힌 구조 안에 있던 로봇 같은 이 제자들이 주의 말씀대로 시작된, 계시되는 이 말씀의 개입에 의해서 이들에게 뭔가 움직임이 형성돼요. 움직임이 형성된다고요. 저는 이걸 젤리라고 하는데, 젤리가 어떻습니까? 액체와 고체의 경계선에 있죠. 액체는 흔들면 출렁출렁하잖아요. 고체는 딱딱하잖아요. 근데 젤리는 약간 흐물흐물하면서 움직이잖아요. 약간 빡빡하게 밀고 땡기고 한다 이 말이죠. 

  

열 두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지진 비슷하게 난데없는 어떤 밀고 땡기는 질서의 재배치. 질서의 재정립. 그냥 헤쳐모여! 정도가 아니고 그냥 사는데, 뭔가 밀 때 밀리고 땡길 때 땡기면서, ‘왜 이러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뭐지?’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 성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상 못할, 뭔가 뻑뻑하고 빡빡한 현상, 그리고 내가 어떻게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는, 이것은 주께서 자신을 위해서 한 예언이 이게 우리 안에서 실제화 되는 현상으로 보라 이 말입니다. 

  

그걸 현상인지, 착각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반드시 현상이 일어날 경우에는 이 갇힌 구조, 폐쇄회로를 겸해서 생각해야 되죠. 갇혀있다는 것. 갇혀있고 주님이 여기에 개입해야만 발생되는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현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뭐냐, 주의 증인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21장으로 되어 있거든요. 요한복음 21장 끝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목격자로 끝나요. 목격자. 베드로도 목격자고 사도요한도 목격자인데, 이 목격자라는 말은 뭐냐 하면 본인이 역사의 주체자가 아니고 구경꾼이라는 뜻입니다. 구경꾼. 

  

이렇게 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뭐다? 구경꾼이 되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억지로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고, 젤리 안에서, 이게 폐쇄구조니까, 전체가 흔들리거든요. 이 전체가. 북한의 핵문제와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이 말이죠. 전체가 젤리구조니까. 흔들흔들 거리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된다는 것을 아는데, 다른 사람은 그냥 우연적인, 이러다가 없어질 일시적 현상으로 생각하죠.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다. “뭐 늘 일어나겠어? 일시적 현상이지.” 그러나 성도는 “늘 지진이 일어나도 당연한 것이다. 늘.” 오히려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죠. 이게 보는 관점이 달라요. 관점이. 

  

철학에서는 관점주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관점주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본다가 사라지는 것이 관점주의에요. 나는 현실에 의해서 휩쓸리는 것이고, 그리고 나만 까불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이, 다른 사람과 같이 연동되어서 무빙moving, 흔들리고 있음을 아는 겁니다. 이 관점주의가. 관점주의가 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관점주의의 좋은 점은 뭐냐 하면 모든 일에 긍정적이라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기분 좋은 것이 있잖아요. 그런 경우가 없다고요? 이유도 없이 기분 좋은 것. 만약에 이유가 있어 버리면 그거는 관점주의가 아니고, 자기주체주의입니다. ‘아, 이런 일이 생겨서 기쁘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 할 것 없이 그냥 기쁜 것은 미쳤거나 아니면 세상을 제대로 알 거나 이래 되는 거예요. 뭐 범사에 감사하라. 그게 바로 관점주의 아닙니까? “니! 무슨 좋은 일 있나?” “아니.” 그냥 그 자체가 이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그냥 세상 돌아가는 자체가. 

  

요한복음 21장에서 마지막으로 나오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대한 증인, 증인이라는 말이 목격자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이런, 이런 일을 일으켰습니다.”하는 것에 목격자로 살아가는 것. 관점주의에서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쓸데없는 돈 자랑이나, 권력자랑이나, 자식자랑이나, 괜히 사적인 것 가지고 남하고 비교하는 그런 스트레스나, 그런 것은 안 해도 되는 겁니다. 안 해도 되는 그런 좋은 장점이 있어요.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을 이렇게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눈치 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룟 유다 나오잖아요. 그럼 여러분들이 눈치 챘는지 테스트해볼게요. 다른 제자들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좋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놀라는 겁니까? 여러분들 성경 보면서 그런 것이 안 보이던가요? “저 배신자여!” 이게 아니고 깜짝 놀라요. “누가?” 그리고 예수님은 알았지만 제자들은 몰랐어요. 나중에 사도행전에 들어가면 주께서 한 사람을 뽑아냈다고 해서 그때서 알지만. 

  

무슨 의미냐 하면 “아! 정말 가룟 유다가 저렇게 사탄이라면, 우리가 안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래 생각하지, “가룟 유다가 저렇게 할 줄 알았어!” 이런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 너무나 자기들하고 같은 급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도 가룟 유다가 나오는데, 사탄 나오는데도, 그러니까 가룟 유다를 이렇게 마귀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혼자 생각이지, 동료의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제자들에게는 가룟 유다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고생을 같이 한 사람이고. 귀신 쫓아낼 때 같이 쫓아냈고. 누가 그 사람에게 사탄 들었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도 못했어요.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나와요. “나는 저 사람이 무슨 할 일이 있어서 가는 줄 알았다.” 이래 나와요. 다른 성경구절 보면 그렇게 나오잖아요. 평소에 그것도 임원 아닙니까? 재정회계 맡았으니까. 회장, 부회장은 아니지만. 총무도 아니죠. 재정을 맡았죠. 재정을 맡았지만 어찌됐던지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팬클럽 간부급이란 말이죠. 그래서 13장을 이제부터 설명할 텐데요, 이런 관점주의, 다시 말해서 모든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관점주의라는 것은 주께서 개입해서 흔들어버리면 다 같이 흔들려서 이 환경을, 이 상황을 통째로 한꺼번에 그대로, 마치 여름에 양동이에 물 받아서 한 번에 확 붓듯이, 이 상황을 한 번에 확 들이붓는 그런 관점으로, 세계를 보기를 원합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봐야 하느냐, 먼저 이것부터 아시면 비로소 13장이 풀립니다. 

  

13장은 우리 제자들 가운데 누가 똑똑합니까? 이래 보면 안 되고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기 12명 제자들이 다 똑같은.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구분은 예수님이 하시고. 자기들 보기에는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동일합니다. 그 다음에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오든, 가룟 유다 말고 사도요한에게 오든 그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방식이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지, “우리 중에서 가룟 유다 좀 빼내세요!”라든지, “저 사람은 나빠요!”라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은 열 두 제자 어느 누구에게도 그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신자니까 우리들이 돌로 쳐야 된다는 그런 인식이 없어요. “걔가 왜 그랬어? 니 알았어?” “나도 몰랐어. 왜 그랬대?” “주께서 그냥 찍었대.” “아휴! 진짜 주님 무섭다.” 이런 분위기의 느낌이라니까요. ‘아이고, 저 사람 저럴 줄 알았어.’라는 게 아니라, ‘나는 착한데 저럴 줄 알았어.’ 이게 아니라, 그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사탄이 들어간 것을 통해서 나한테도 사탄이 들어오고 배신해도, 나는 입이 열 개라도,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라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런 안목을 가지고 13장을 보셔야 해요. 그런 안목으로. 

  

12장에 관념적으로 보이는 것이, 이게 현실로 가면서 12장의 원칙은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눈치 챘나? 그럼 구원해줄게.”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가면서도 오히려 눈치를 채는 것이 아니고, 의문만, 질문만 해대죠.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습니까?”이래 되죠. 그걸 실제로 한 번 봅시다.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예수님 혼자 알고 있어요. 그럼 다른 사람은 알아야 된다? 몰라야 된다? 알 필요가 없어요. 


이거 진짜 중요한 거예요. “알아야 믿죠?” 이거 땡입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믿음이 뭐라고 했던가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고 회고적이라고 했죠. 나중에 돌아보니까 주께서 믿도록 꾸준히 이끄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은 내가 했다는 것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요. ‘그때 눈치 챘어.’ 이러는 것이 있으면 안 돼요. 그거는 믿음이 아니에요. 

  

주께서 홀로 하신 요한복음 12장의 내용이, 원칙이 믿고 난 뒤에도 그 원칙은 계속 살아있어야 됩니다. 어제도 주께서 홀로 하셨고, 오늘도 주께서 홀로 하셨고, 우리는 주님이 흔드는 대로 젤리 안에서 같이 흔들렸을 뿐이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것이고, 영원히 천국 갈 때까지도 그게 마찬가지로 될 것이라고, 이래 되어야 됩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제가 믿겠나이다.” 이런 것은, 끝까지 이런 것은 용납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설교를 하면서 말이 안 통해가지고 기껏 끄집어낸 것이 제발 예수 믿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끄집어내야 될 이유가 있어요. 막 사는 것하고 같은 취지에요.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안 믿어서 구원된 거예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구원된 거예요. 그게. 그게 믿는 사람에게 나오는 고백이 그거에요. “저는 예수님을 애초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이군요.” 회고적으로, 뒤돌아보니까 그걸 아는 거예요. 뒤돌아보니까 다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그러면 예수 믿기 위해서 어떤 집사가 찾아와도, 어떤 권사가 찾아와도 그것도 바로 같은 젤리 안에서 주께서 그렇게 움직이신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목격자이지, 주께서 일하는 자의 목격자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증인이지, 예수 잘 믿는 사람의 증인 될 필요가 없어요. 그럼 그걸 누가 방해하느냐? 그걸 목사들이 방해하는 거죠. 여기에는 그런 목사가 없어서 하는 이야기지만. 목사들이 참 불행한 사람이에요. 목사가 안 됐으면 말씀에 관심이 있는데, 목사가 되고 난 뒤에는 이걸 목회에 어떻게 써먹을까,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자기가 목사라는 위상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아까 집사님 말씀대로 동업자 된 줄 알고. 주님은 어떤 동업자를 두신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 말은 뭐냐 하면 목사는 주님을 믿지 않고, 예수를 잘 믿는 자기 자신을 계속 믿고 있는 거예요. ‘정신 차려! 예수 잘 믿어야 돼!’ 꼭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 앞에 설 때는, 나처럼 해봐라~이렇게~♬ 이걸 이야기한다고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처럼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걸 증거 한다고요. 그러나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은 회고적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 적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게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은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도망쳤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3장 1절 끝에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걸 그 현장에서 들어도, 이걸 듣고 난 제자들이 얼마나 아부를 떨었겠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선생님 믿습니다.” 주께서는 “니가 그렇게 믿습니다,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좀 있다 두고 보면 알아. 왜? 너의 운명과 미래는 내가 흔들어댈 테니까. 

  

그 믿습니다, 하는 것이 그 믿음이 아니고 다 헛방이에요. 그런데 그 13장 1절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유월절과 예수님이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이거는 예수님만 꼬불쳐놓고,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만. 제자들은 이 내용을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되면, 회고적으로 13장을 다시 보게 되면, 아, 그때 그 타이밍이 이거는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 타이밍을 맞추어서 유월절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죠. 

  

그러면 그때만 그래요? 그렇게 고백하는 2017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까? 오늘도 그 타이밍이에요. 그 타이밍이라는 말은 뭐가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결국 유월절이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유월절이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원칙이. 그럼 유월절의 원칙이 뭐냐 하면 양 죽으면 누가 산다? 사람이 산다. 맞지요? 유월절이 이거잖아요. 피 바르면 사람이 살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옆에 바퀴벌레가 죽으면 내가 삽니까? 뭐 저기 가는 당나귀가 죽으면 내가 살아요? 가축 한 마리 죽으면, AI조류인플루엔자 걸려서 3,300만마리 죽었는데 그러면 내가 삽니까? 닭이 죽어서 내가 살았다고 하면 그거는 미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진해서 미친 인간이 되기 싫어해요. 왜냐? 이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양이 죽었다고 내가 산다는 것은, 그거는 그 분위기가 기독교 분위기라면 “예.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절대로 이 속에는 그것이 인위적으로 스며들 수가 없습니다. 

  

따져보세요. 양이 죽었는데 인간이 왜 삽니까? “에이, 그냥 그런 줄 알고 믿으라니까!” 그럴 수 없어요. 우리교회에 어떤 교인처럼 수련회에 데려가려고 아들한테 돈 15만원 주고 참석시키고, 아들은 참석하고 15만원 챙기고. 그 애는 내가 중학생이니까 수련회에 갈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근데 뭘 제시했습니까? 돈 15만원을 제시했잖아요. 그러면 수련회보고는 참석 못하지만 뭐 보고는 참석 하겠다? 돈 보고 가는 거예요. 그냥 그 애는 수련회에 관계없이 갔다 오기만 하면 15만원이 생기고, “다음에 가면 또 얼마 줄 건데?” 할 거예요. 

  

참, 철없는 중학생이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그렇다면 우리는 안 그래요. “예수님 십자가 믿어 줄 테니까, 우리 가족 몽땅 천국 보내줄래요? 안 줄래요?” 이래 나온다면 이거는 전혀 믿음이 아닌 거예요. “내가 양 죽어서 내가 산다는 것을 믿어줄 테니까, 주님께서는 뭐 줄래요?” 그럼 주님께서 “그러니까 니는 양 죽어서 니가 산다는 것을, 니가 지금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입으로 털어놓은 거지?” 털어놓은 거예요.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이겁니다. 양 죽었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설명한 책이 성경입니다. 이게 설명이라고요. 그러니까 그거 믿어주고 뭐 주실래요? 하면 그 뭐가 없어요. 성경에는 뭐가 없어요. 뭐라는 것이 없어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고 나는 그걸 믿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넣어 주시겠습니까?”라고 생각하다면 그건 성경에 없는 내용이에요. 

  

왜냐하면 뒤에다가 뭘 붙였다는 말은, 앞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안 믿어진다는 뜻이에요. 그게.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그 자체가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다만 그 결과로써 내가 천국의 영생을 얻는다면 그거는 혹한다는 거예요. 그거는 살짝 믿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아무도 믿는 사람을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여기서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것과 그리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멘트, 그 발언을, 모든 것을 사전에 다 알고 계시면서 왜 하셨는가? 분명히 그 전에 내가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는 딴소리 하십니까? 이거는 이천년 교회 역사, 신학에서 미궁에 빠진 거예요. 이 야기가. 

  

다 아실 것 같으면 “주여! 다 아시죠? 순순히 제 잔을 마시겠습니다.” 이렇게 할 거라고 우리는 잔뜩 기대했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전에 워낙 큰소리를 쳐놨으니까, 한 믿음하시는 분이 주님이니까, 주님이 믿음 없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믿음 없는 주님이라는 것이 어떻게 주님일 수가 있어요? 그 분이 먼저 믿음이 있어줘야, 우리가 모델로 삼아서 믿음이 생기는데, 믿음 없는, 전혀 불신앙적인 예수님이라면, 그동안 큰소리 친 것은 그냥 저질러 본 것뿐이고 그냥 시도한 것뿐이잖아요. 그냥 시도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것은 대전강의에서 했어요.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까요?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사실은 그 내용이 오늘 본문과 관련이 있어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 버리시면 안 되잖아요? 그런 뜻이거든요. 제가 놀라겠습니다.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마치 반문하듯이. 예수님이 메시아다, 메시아다, 하면서 따라가다가, 따라가면 예수님 따라서 천국 갈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갑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주춤하죠. 저분하고 같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좀 이렇게 팔짱 끼고 기다렸다가, 우병우처럼 팔짱끼고 기다렸다가, 사흘 만에 등장하는 그때에, ‘내가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딱 잡아가지고, 마치 큰 봉황을 타고 가는 예수님 따라서 천국 갈 것인가? 이걸 결정해야 되거든요. 

  

만약에 딱 팔짱끼고 있다가 죽었을 때는 안 믿다가 살아났을 때, 부활을 보고 그 부활 등허리에 올라타고 가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단절이 없어 버려요. 단절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구원하지 아브람을 구원하지 않거든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야곱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로부터의 단절된 또 다른 나는 단절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예상도 안 되고 상상도 안 돼요.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극한은 나지, 나 말고 다른 나는 나의 범위 안에서는 없는 존재에요. 결국 주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없는 존재를 만들어놓고 데려간다면 나는 닭 좇던 개꼴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닭 좇던 개꼴이 되기 싫으면 날 한 번 따라와 보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따라갔잖아요. 근데 따라 갈 쯤 되어가지고, 니는 따라오고 싶어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안 된다. 뭐가 안 된다? 구원 안 된다. 이게 옳습니다. 안 됩니다. 

  

열 두 제자를 뽑아놓은 이유가, 대표자인데, 내가 뽑았다 할지라도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구원 될 수가 없어요. 그럼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헤어짐입니다. 오늘 강의제목입니다. 헤어짐. 잠시 헤어질까요? 영원히 헤어질까요? 영원히 헤어져야 돼요. 영원히. 잠시 헤어지게 되면 주님 곁을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헤어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려야 돼요. 영원히 헤어지게 되면 이제 예수님 스토리는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버립니다. 그때 반짝 추억으로 끝나버려야 돼요. 

  

이게 바로 열 두 제자가 보여주는, 인간은 자기 추억 속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구원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만 그 구원에 대해서 성취할 수 있는 대책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느냐, 그래야 예수의 증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예수의 증인이 돼요. 

  

그러면 헤어지고 난 뒤에는, 돌아온다는 그러한 언질이 있습니까? 그런 언질도 없어요. 성경은 나와 있는데 이건 회고적이고. 그 당시 제자들에게는 그게 없어요. “끝났구나!”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찾아오죠? 고기 잡을 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죠. 여기서 만약에 다시 찾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다시 오지 않아도 될 권한이 주님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거예요. 주님은 제자들을 걱정해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성취하기 위해서 오지, 우리를 걱정해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걱정할 대상이 안 됩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를 걱정해서 온다면 그거는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에요. 우리가 증언하는 것은 주께서 나를 이렇게 괄시하지 않았다 하는 사실이 그 증언 속에 포함이 돼버리면 이거는 온전한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에요. “나도 괜찮은 존재다.”이래 돼버려요. 절대로 인간은 괜찮은 존재가 돼버리면 안 돼요. 

  

안 찾아와도 되는데 찾아오신 거예요. 그것이, 그 마음이, 그 관점이 계속 유지될 때만, 그 순간에만 오롯이 예수님이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자기 사람들, 이 자기 사람들이 될 때, 제자들은 그걸 들으면서 백이면 백 다 오해합니다. “아, 자기 사람이 우리구나!” 우리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우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열두 명 전체를 말하겠죠. 그런데 2절에 보세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자, 여기서 제가 설명하게 되면 너무 단어가 어렵기 때문에 질문 식으로 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집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우리 중 하나는 탈락할 것이라는 것을 열 두 제자 어느 누구도 사전에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그 모른 이유는, 예수님과 동일한 간격과 동일한 관계에 놓여있다고 열 두 제자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만 특별하게 구원받고 너는 아니야.’라는 것이 그 열 두 제자 사이에는 일체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죽으면 다 죽고 살면 다 사는 거지, 하나를 제킨다는 것은 열 두 제자 생각 속에는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나중에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도록 했다는 말은, 여기 13장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했다는 말은 가룟 유다에게만 사탄이 들어가도록 했다는 말인데, 그 생각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이 눈치 챘겠습니까? 눈치 못 챘겠습니까? 전혀 눈치 못 채죠. 왜? 열둘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사는 거예요. 같은 운명공동체에요. 그러니까 사탄이 들어간 가룟 유다나 사탄이 안 들어간 다른 제자들이나 별반 의식의 차이는 없어요. 똑같아요. 그럼 결국 가룟 유다가 열 두 제자의 대표자가 되는 거죠.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6장에도 마찬가지로 나와요. 6장 끝에 보면 7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이래 되어 있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을 이렇게 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가룟 유다가 마귀다.”라고 하기를 원해요. 제자들은. 

  

근데 너희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리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너희들이라는 공동체 자체는 구원에 실패하는 집단이라는 뜻이에요. 그 너희가 누구나 될 수 있고, 한 시간 뒤에 너가 될 수 있다가, 두 시간 뒤에 너가 될 수 있고, 이틀 뒤에 너가 될 수 있고, 너희들 중의 하나기 때문에. 결국 너희 중의 하나라는 말은 그 하나를 뭉치면 결국 예수 팔자가 사실은 나머지기 11명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 한명의 운명이. 

  

제가 그걸 전에 설명할 때, 카드로 피라미드 쌓는 것 했잖아요. 카드 열장가지고 하죠. 아홉 장이 아무리해도 소용없어요. 밑에 한 장만 빼면 다 무너집니다. 다 무너지죠. 두 명에게 사탄을 넣어 줄 필요 없어요. 다섯 명, 네 명에게 사탄이 들어가 필요 없어요. 단 한 장만 빼도 나머지기는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유월절은 사람에게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유월절에 양이 죽고 누가 살죠? 사람이 살죠. 사람은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사느냐? 근데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악마가 알아요. 마귀는 알아요. 열두 제자는 몰라요. 그 원칙을 몰라요.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그 원칙을 그대로 지금, 구약 전체의 원리원칙을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 여자의 후손 이야기를 여기서 좀 해볼게요. 여자가 남자를 만듭니다. 여자가 남자를 만들죠. 왜? 여자의 후손 이름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니까. 아들은 남자잖아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다 이 말이죠. 여자가 남자를 만들어요. 이걸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머리에 별 면류관을 쓴 여자가 아들을 안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남자는, 여자가 앞에 주체의 자리에 있고 남자는 하나의 결과, 서술의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었어요? 여자를 만들었어요? 그냥 생각해보세요. 같이 만들지, 어차피 같이 만들 건데 왜 시간차 공격을 하시냐 말이죠. 배구에서 공이 뜨고 내려갈 때 시간차 공격하듯이. 어차피 만들 것, 같이 동시에 남자, 여자 만들면 될 건데, 왜 남자부터 만들어놓고, 남자를 잠들게 한 후에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놓았는가? 

  

남자에서 여자가 나온 것 하고, 그 다음에 여자에서 남자를 만드는 그 틈바구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여기에 뱀이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 유월절에 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애굽의 그 많은 장자들은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만 안 죽었다. 그럼 그 양과 안 죽은 장자의 관련성은 뭐냐, 이래 되는 거죠. 

  

그것은 바로 죽음에서 뭐가 나옵니까? 죽음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오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 그거잖아요. 죽음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죽음이 없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없죠. 그럼 죽음이 안 오게 되면 모든 인간은 살았어요? 죽었어요?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모든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악마 속에, 폐쇄공간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누구도 동의 안 합니다. 자기 심장이 뛰면서 살아있으니까.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의 적시타로 나온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버림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물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물세례.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을 물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회개하라고 한 뜻이 무슨 뜻이에요? 죄 지은 것이 있다는 뜻이에요. 죄 지은 것이 없으면 회개 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죄인이 들어가야 될 강물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뛰어드니까 누가 말립니까? 세례요한이 “왜 이러십니까? 뛰어들 분이 아니신데 왜 이러십니까?” 물론 세례요한이 성령 받고 한 거겠죠. 예수님께서 “아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이렇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게 해야 틈이 생긴다. 틈이 벌어진다. 틈이. 예수님께서는 쐐기에요. 쐐기. 뭔가 갈라지지 않는 것을 박아버리면 그대로 쩍쩍 갈라지잖아요.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갈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열 두 제자도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간에 예수님은 십자기 질 때까지는 계속, 지금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관념적이지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걸 현실화시킵니다. 현실화시키는데 이게 삐걱거리는 거예요. 제자들하고.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냥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이러면 끝나는 것을 가지고 왜 갑자기 사탄이 아무나에게 들어간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아무나에게. 그게 누구냐 하면, 아무나에게 들어온 것이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 아무나에게. 가룟 유다가 특별히 나쁜 자가 아니에요. 악해서 그렇다는 그런 논리로 하지 마세요. 

  

제가 월요일에 대구강의하면서 했죠. 비윤리성을 견뎌야 된다. 비윤리성을. 사실은 폐쇄회로의 천장에 붙어있는 인간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최고의 윤리와 도덕가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죠.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산다?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근데 여기에 마귀를 집어넣어버리면, 사탄을 집어넣어버리면 천장 말고, 천장 바깥에 나가 있는 그런 관점에서, 이 세상 신, 전체가 악마의 품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한꺼번에 그 관점으로 다 비춰볼 수가 있는 거예요. 비춰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살았다고 할 때에, 뒤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끊어버리세요. 그럼 뭐만 남아요? 앞에 있는 양이 죽었다만 남죠. 그것도 어떤 양? 흠 없는 양.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는 것은 필히 죽게 되어 있어요. 흠 없는 양이 죽는다는 말은 결국 흠 없는 양을 죽이도록 만드는 힘이 현재 우리가 알량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입니다. 

  

월드컵 예선 벌이고 있는 이 세상, 정유라가 지금 체포된 이 세상이 실은 누가 됐던 죄 값으로 죽어야 될, 그것도 누구라도 가룟 유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없게 만드는, 악마가 그렇게 조져버렸어요. 그렇게 만든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죠. 근데 예수님은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다는 거예요. 알아듣는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못 알아듣는 것에 너희들이 한통속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은 끝까지 사랑하는데, 그 자기 사람이라고 할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난 뒤의 문제에요. 난 뒤의 문제. 십자가에서 다 이루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자기 사람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그 전에 “저 봐주소! 저 봐 주이소!”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럼 아까 이야기를 약간만 더 하고 첫째 시간을 쉬어봅시다. 양이 죽었다, 어떤 양이다? 흠 없는 양이다. 하나님께서 이 폐쇄회로 바깥에서 집어넣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흠 없는 양을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근데 나올 때는 어떻게 나왔다? 이게 죽어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제 늘 죽었어요. 죽은 거예요.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음으로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가죠. 그 죄인의 모습, 물세례의 모습과 성령세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갇혀 있는 모든 인간은 나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나처럼. 

  

제발 다른 힘들지 않는 방식은 없습니까? 이것에 인간이 갇혀있으니까 어떤 인간이 구원될 권리가 있습니까?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어디서 이런 인간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 권한자, 권리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할 수만 있거든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주께서 가위가지고, 밑에는 지옥불이고 위에는 천국이라면, 천국에 가려고 애쓰니까, 완전히 사리면 자르듯이, 밧줄 자르듯이 주께서 가위가지고 잘라 버리죠. 그러면 으악!!하고 떨어지겠죠.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정입니다. 이것 외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실정도 모르고 그런 소리 하지마세요. 우리가 “나는 구원받아야 돼!”라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만든, 우리를 갇히게 만든,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계속 한다는 것은 악마가 마지막 내세울 수 있는 카드에요. “니는 니 구원에 갇혀 살아라!” 이게 악마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이게 악마의 소리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구원받아서 천국 가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다시 찾아오시잖아요. 그 찾아오신 것이 뭡니까? 성령이잖아요. 성령이 찾아오니까, 찾아오면 믿음이라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회고적이죠. 딱 보니 세상에! 안 찾아왔으면 지옥 갈 뻔 했던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나오는 목격자가 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88.127)17-01-06 00:22 
가락-요한복음13장1절(예수님의 관점)170103b-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누가 부추겼죠? 악마가 부추겼죠. 여기서 신비로운 것이 뭐냐 하면 선과 악은 그 본질이 충돌이 되게 되어 있어요. 충돌이 되는데, 이게 선악과에요. 선 과일이 따로 있고 악 과일이 따로 있는데, 두 개다 먹으라고 한 게 아니고. 그 과일을 먹음으로써 그 안에서 이미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죠. 근데 인간들은 이게 통합이 안 돼요. 선을 하면 선을 하든지, 선인 동시에 악도 하는 아이디어는 인간에게 나올 수 없습니다. 악이면 악이고, 악이 저질러졌다는 말은 인간은 선을 행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에요.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그런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죠? 

     

그런데 마귀의 세계에서는 그게 성립이 돼요. 마귀에게서는 그게 성립이 되기 때문에 선악과 세계를 가지고 계속 인간들을 요리할 수가 있는 겁니다. 끊임없이.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선 같은 인간인데도, 내가 원하는 바는 선을 원하는데, 내 안에 원치 않는 악이 있다 이 말입니다. 원치 않는 악이 있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선이 있고 악이 있는데, 이게 한 주머니에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게 통합이 안 돼요. 통합이 안 되니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서로 싸운다고 되어 있어요. 서로 싸운다. 또는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투쟁한다. 안 지려고 한다. 

  

근데 결국 누가 이깁니까? 악이 이기죠.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간단합니다. 선, 악, 그게 통합되어 있는 그 자체가 악이 되는 겁니다. 악. 그러면 악에서 벗어나려면 어디서 벗어나야 하느냐 하면 이 선에서 벗어나야 해요. 선하지 않아야 악이 되는데, 우리가 선을 요구하는 이상 계속 악마한테 시달리는 거예요. 악마의 덫에 완전히 포착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에는 너무나 선해요. 우리가 구원받기에는 너무나 선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선하기 때문에. 계속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선악과의 질곡에 잡혀있는 인간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선악체제 자체를 악으로 밟아버려야 되겠죠. “니가 선을 행해? 에잇! 이 나쁜 놈아!” 이래 돼야 돼요. 근데 그것이 말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고 있는데 그걸 악이라고 하니까. 그러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선이 있는데 왜 악이냐 이 말이죠. 

  

그러면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뭐라고 해요? 예수님을 찾아올 때 명칭이 뭡니까?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리고 선한 선생이여, 하면서 본인을 어느 쪽에다 몰아세웠습니까? 내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선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했죠. 그러면 선이 있으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이게 악마에 사로잡혀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빼내려면 그 선마저도 악이 됨을 알려줘야 되잖아요. 처음부터 선은 일체 없어야 돼요. 

  

그게 되려면 선악 말고 다른 관점이 있어야 돼요. 다른 관점의 선이 따로 있어야 돼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완전히 빼돌렸습니다. 빼돌리고, 선악을 알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생명나무하고 선악과 아는 것 하고 이게 어떻게 돼요? 인간 선에서는 이게 대립이 되는 겁니다. 그 대립에, 하나님께서 폐쇄회로 사이에 개입을 해버리면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 충돌이 십자가라는 충돌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어리석다고 했죠. 왜 십자가가 어리석으냐 하면 전혀 선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거예요. 왜? 십자가 믿고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십자가 믿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그것을 본인이 악한 행동으로 보지 않고 무슨 행동으로 봅니까? 선한 행동으로 보고 십자가로 달려드니까, 진짜 십자가하고 선한 행동으로 위장된 가짜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 앞에 어른거리면서 그걸 배척해버립니다.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이천년 교회가 그걸 계속 해오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 믿는 선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당신은 영생이 주어졌고, 당신의 가정은 복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짜를 계속 등장시킨 거예요. 그러면 그걸 피하는 방법은, 내가 예수 십자가 믿는 것까지도 악하다는 것에 포함이 되어야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은 옳고 우리 인간은 나쁘다면, 그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 충돌 지점에서 바리새인뿐만 아니고 제자들까지 몽땅 다 예수님의 대해서 대척관계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보여줘야 되죠.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예수님 빼놓고 몽땅 다 저쪽 편에 가 있어야 돼요. 그냥 저쪽 편에 전부 다 가 있어야줘 됩니다. 가 있는데 그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느냐, 사탄이 그 역할을 해줘야 해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기는 다 예수님의 대척관계에 있다는 그 작업을 인간들은 하지를 못합니다. 인간들은 개별적 존재거든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보는 거지, 옆 사람하고 전체성을 인간을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전체성을. 

  

우리가 친하게 지내면 친구라고 하죠. 친구라 하잖아요. 근데 친구가 돈 문제 틀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원수 되죠.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부부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사업 망하면 가짜 이혼이라도 해야 돼요. 절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인간 쪽을 이렇게 담아두는 바구니 역할, 통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등장을 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사탄이 제자들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작업이에요. 가룟 유다가 됐든, 누가 됐든 사탄이 들어가서, 11대 1이잖아요. 사탄이 들어간 사람 몇 명? 1명. 나머지기는 몇 명? 11명. 11대 1로 싸우면 11명이 이기게 되잖아요. 고등학교 때 17대 1로 다들 싸워봤죠? 11대 1에서 누가 이기게 됩니까? “그래, 가룟 유다 니는 예수님 배신해라. 우리는 따라 갈래.” 이래야 되는데, 어떻게 됩니까? 하나가 전체를 이기게 된 겁니다. 

  

사탄이 전체를 이끌어요. 그거는 평소에 이미 제자들도 사탄이 형성된 결합력에 의해서, 그걸 권력이라고 하는데, 악한 어둠의 권력에서 어느 누구도, 열 두 제자라도 한 명도 빠져나온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뭐냐, 현재 있는 상황을 그냥 직무로써 보여준 거예요. 뾰루지 난 겁니다. 원래부터 우리는 세상 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게 하나의 뾰루지 난 것처럼 튀어나와, “어? 그거 문제 있네?”가 된 거예요. 그 문제 있다는 직무는 정상적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 팔아먹는 거예요. 

  

이렇게 하니까 성경이 굉장히 쉽죠. 관점이 복잡하지 않고 굉장히 간단하죠. 간단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전부 다 인간을 하나로 묶기 때문에 간단한 거예요. 묶지 않고 그냥 성경을 보게 되면, “가룟 유다 나쁘네? 우리는 정신 차리자. 가룟 유다처럼 되지 말고.” 각자 개개인으로 돌아가 버려요. 개개인으로 돌아가 버리면, “베드로는 배웠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면 전체를 다 씻어줬다는 것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알겠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머지도 씻겨 달라고 하다니? 이런 철딱서니 없는, 3년 동안 뭘 배웠어? 학원에서 졸았나? 뭘 배웠어?” 이렇게 개별적으로 또 나와요. 개별적으로. “우리는 이러지 맙시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나가버리면 우리는 뭐가 돼요? 악인이 되지 않고, 통합된 악인 속에 포함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뭐가 됩니까? 선인이 되죠. 선한 이것이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마귀로 하여금 계속 예수 믿는 선한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지금도 부추기는, 그러한 부지런한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귀 없이는 구원이 안 돼요. 마귀 없이는 구원이 안 돼요. 어쨌든 간에 교회 와서 지금보다 더 향상된,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각개 전투(병사 개개인이 총검술 따위로 벌이는 전투), 나라도 구원받아야지, 라고 하는 이것. 

  

“나라도 구원받아야지.” 열 두 제자가 다 실패했습니다. “가룟 유다 제치고 우리는 구원받자.” 이런 것 없습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를 통해서, 가룟 유다가 대표적으로 자기들이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한 것을 다 드러낸 거예요. 잡혔다는 소리를 듣고 다 도망쳤잖아요. 별 혐의 없이. 혐의는 몽땅 다 가룟 유다한테 덮어씌우고. “니가 팔았잖아? 니가 귀띔해줬잖아? 우리는 어쩔 수 없었어. 그때 너무 무서웠어. 예수를 아느냐 할 때 나는 모른다 했어. 분위기가 너무 무서워서 혼났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에요. 

  

근데 처음부터 어쩔 수 없었어요. 처음부터. 예수님 따라다닐 때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근데 자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겁니다. 이런 겁니다. 이 이야기를 진작 할 걸. 아래 인간이 있잖아요. 여기 위에 천국이 있죠. 그 사이에 띠가 있어요. 그게 무슨 띠냐 하면 악마의 띠. 무슨 띠? 이 세상의 신이 이런 띠를 형성한 겁니다. 성경책인가, 이런 띠를 형성한 거예요. 이 띠는 전체를 포획하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띠에요. 이게 관점주의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이 무지무지하게 쉬워요. 그러나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못 믿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또 “내 구원은?”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지난 25일 설교할 때, 2017년도 교회의 목표를 제가 설교 시간에 이야기했죠. 교만해서 구원받자!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2017년도에 교회 왔는데 이제는 박차를 가해가지고 더욱더 교만 합시다. 교만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자, 요한복음 13장 2절을 봅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자, 이렇게 보게 되면 마귀가 주님 시키는 대로 하는 얼마나 충실한 종인지. 마귀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요. 욥기도 마찬가지고. “니가 가서 욥에게 가서 모든 것을 뺏어라.” 악한 천사는 그야말로 시키는 대로 해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이야기지, 거기서 인간은 빠져야 돼요. 인간은 그냥 뒤늦게 와서 폼이나 잡는 존재에요. 폼만 잡아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TV에 미국드라마가 있어요. 웨스트월드라는 드라마인데, 미래의 세계에 천재과학자가 뭘 만드느냐 하면 놀이동산을 만들었는데, 그 놀이동산이 어떤 동산이냐 하면 1박에 5만 불 받고 직접 옛날 서부시대에 넣어주는 거예요. 실감나게. 넣어줘서, 거기의 악당들, 보안관들을 전부 다 기계로 만들어서 시나리오로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인공지능이에요. 근데 고객의 장점은 총 맞아도 안 죽는다는 겁니다. 그거 하나 집어넣고 거기서 실감나게 옛날 서부극을 즐기는 겁니다. 1박에 5만 불 이렇게 해가지고. 근데 그렇게 하면 드라마가 1회로 끝날 거잖아요. 근데 10회까지 이어지는 이유가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긍심을 갖게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나리오대로 안 하게 되고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작년에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던 그 드라마인데, 우리가 그걸 보면서 이거를 봐야 돼요. 

  

뱀하고 벌써 다 폐쇄공간이니까, 폐쇄회로, 폐쇄 공간, 갇혀있는 공간이니까, “야! 마귀 실시!” “예.” 가가지고 가룟 유다한테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만들어진 존재인줄 모르고 제자들은 나름대로의 예수 믿고, 메시아 만나서 구원받겠다고 설쳐대는 그 꼬락서니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 꼬락서니를 보여주면서, 뭐냐 하면 그래서 너희들은 마귀에 속해있다는 것의 확정된, 그 면면들을 보여주는데, 그 다음 내용입니다. 발을 씻겨주는 대목입니다. 이거는 백석대학 CF가 아닙니다. YTN에서 하는 천안 백석대학 CF에 보면 우리는 서로 발 씻어줍니다. 그게 나와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세족식 하는 거 있잖아요. 청년회 수련회 때 많이 해봤죠. 발 씻겨주는 것, 스승이 먼저 제자한테 발 씻겨주고. 사실은 그거는 성추행이에요. 

  

이게 재미있는 게, 인간의 법이 웃기는 게, 원래 성추행이 남자가 여자한테, 또는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소수자는 뭡니까? 남자가 남자, 여자가 여자죠.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이 성소수자인지 분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가 남자를 발 씻겨 줄 경우에는, 만약에 그 사람이 동성애자라면 성추행으로 고발당합니다. 미국에서는 인간의 인권을 존중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 여자 없애버리고 Z라는 제 3의 성으로 하잖아요. 그리고 학교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가르치면 징계 받게 되어 있어요. 불교에 대해서는 괜찮은데 기독교에 대해서는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미국에 대안학교가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대안학교. 

  

6절,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우리가 다 모시는 가운데 정립된 것이 관계입니다. 무슨 관계냐, 주군입니다. 주군이라고 하는 것은 사무라이에 나와요. 주군의 특징이 있어요. 주군이 죽으면 다 죽어야 돼요. 멀쩡하게 살아있는 부하도 주군 따라 다 죽어야 해요. 왜냐하면 주군과 사무라이의 관계는 충성의 관계에요. 운명을 같이 해요. 운명을. 그 조건이 전쟁터에서 주군이 죽을 때는 안 죽지만, 잠자다가 죽거나 등산가다 미끄러져 죽으면 같이 다 죽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말은 뭐냐 하면 밑에 있는 사무라이는 자신의 명예나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서 일체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주군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해요. IS하고 똑같아요. 알라신을 위해서 죽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하는 겁니다. 알라신을 위해서.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주께서 원하시는가, 원하시지 않는가, 하는 그 문제에요. 발 씻어주는 문제가. 어떻게 주군이 자기 부하의 발을 씻어주는가? 이래 나온 거예요. 스승이 어디 학원에서 피아노 레슨 하는 강사수준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3년 동안 따라다녔다는 말은 사무라이와 주군 같은 관계입니다. 이 관계, 스승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그런 관계에요. 그래서 스승님은 우리가 지켜주면 그냥 계시면 되는 겁니다. “스승님의 모든 명예와 가치는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 받고 죽는다고 하니까 그 베드로가 가만히 있지 않죠.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폼으로 있습니까? 지켜드릴게요. 이게 주군관계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관계를 이미 아시고, 그 관계가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이미 사탄에 속해있는 관계에요. 악마의 전략이죠. 스승을 위해서 죽는 것은 이게 악한 일이 아니고 선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선과 악이, 악마에 의해서 통합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이렇게 선과 악을 통합시킨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말도 어려운데, 선을 행할 때 인간은 악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인간이 자기 마음을 속이는 거예요. 선을 행하면서 “더! 더! 더! 그래가지고 되겠어.”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악이 선을 행하는 현장에 새로운 악으로 더 등장합니다. “니가 성의 있게 했나?” 기도를 하게 되면 “주여, 제가 기도했습니다.” “제대로 꿇어 앉아 기도했어? 몇 분 기도했어? 작년 이 맘 때 25분 했는데, 니 또 25분이가? 5퍼센트 인상해라. 물가 다 오르는데? 30분 정도 해야 신앙이나 믿음의 향상이라고 할 수 있지. 25분가지고 뭐 하느냐? 작년에 성경 3장 읽었으면 이제는 4장 읽어야지. 이 싸가지 없는 이것 좀 봐!”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한테 이야기한다고요. 

  

보다 더 선을 위해서, 그래야 악에서 달아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악은 절대로 달아나지 않습니다. 동반해서 가기 때문에 달아나지 않습니다. 속도를 높이면 같이 따라와요. 영원한 굴레입니다. 그리고 항상 누가 이기는가? 항상 거북이보다 토끼가 이겨요. 자기 딴에 뻘뻘 흘리면서 선을 행했는데, 이미 이렇게 함으로써 등장한 새로운 악은 벌써 나에게서 달아나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제목이 정해졌네요. 금지. 새로운 금지 조항이 주어집니다. 제목, 금지. 이거로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새로운 금기, 금단, 금지가 나와요. 

  

그걸 징크스라고 하죠. 새로운 징크스가 나와요. 뭔가 행하게 되면 새로운 징크스가 나와요.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 받으면 이 은혜 받은 것이 문제가 돼요. 그 다음부터는 뒷자리에 앉으면 죄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은혜 받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은혜 안 받으려고 한 짓거리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앞에 앉으려고 하는데 처음 온 어떤 사람이 먼저 내 자리에 앉았다. 그럼 거기서 갑자기 성질이 나죠. 그럼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봐! 니 성질냈잖아?” 그럼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뭡니까? “주여, 잘못했나이다.”하고 회개하죠.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인간은 회개의 대상이, 인간은 반성의 대상이 아니다, 라고 했죠. 인간은 반성한다고 인간되는 법은 없어요. 

  

회개는 회개의 기준이 등장해야 회개가 됩니다. 내가 내 기준보고 회개하는 것은, 이거는 장난치는 거예요. “5장 읽어야 되는데 3장밖에 못 읽었습니다.” 그 기준이 누구에요? 3장 읽었다는 자기가 기준이잖아요. 회개의 진짜 기준은 다 이루었다가 기준이 돼요. 십자가가 회개의 기준이 된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또 내가 십자가 앞에서 선을 행하려고 노력했던 죄를 또 지었습니다.”하는 그거잖아요. 그거. 논리를 잘 들어야 돼요. 딴 생각하다가 놓쳤다고 하지 마시고 잘 들어야 돼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니는 안 돼!”라는 지시, 표시 아닙니까? 싸인 이거든요. 안 되는 싸인 앞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그 노력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회개했잖아요?”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니까요. “회개했잖아요?”가. “회개 하나 했어요. 회개 했잖아요?” 이게 포함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결국은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된, 착한, 의인되겠다는 시도는 영원히 나에게는 떠나지 않아요. 아예 떨어지지 않아야 돼요. 왜? 마귀와 함께 날아가 버려야 되니까. 우리가 애쓰는 것을 마귀한테 넘겨줘야 해요. 이거 먹고 떨어져라! 주인이 바깥에 나가려고 하면 개가 신발 끈을 물죠. 고무신 같으면 물잖아요. 그럼 주인의 대처는 왜 이러냐고 하면 안 되고 신발짝 던져주면 돼요. 딴 거 신고 나가면 돼요. 그럼 걔는 주인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신발 물고 있다고요. 

  

지금 우리가 착해지려고 하니까, 착해지는 고무신 쥐고 있으니까, 착함을 더불어서 마귀한테 던져주면 되는 거예요. 이거 먹고 떨어지라고. 이게 욥에 나옵니다. 이게 돈이 많아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 건강하기 때문에 하나님 잘 믿는다, 이렇게 하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이 뭡니까? 마귀한테 던져줘라. 강아지한테 물게 줘버려라. 아들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가도, 욥이 하는 말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인간은 하나의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들러리에 불과해요. 그 들러리를 주께서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계속 철저하게 활용하는데, 그 파트너가 누구냐 하면 마귀를 파트너로 하는 거예요. 악마는 하나님께 대들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대드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대들어요. 예수님께 대든다고요. 악마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지, 누구한테 대든다? 예수님에게 대든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 적하나님이 아니에요. 적그리스도에요. 

  

그래서 마귀의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 빼고 하나님 믿는 것이 바로 마귀의 소망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는 인간이 없어요. 적그리스도에 굴복되지 않는 인간은 구원될 수가 없어요.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만이 회고적으로 보면 바로 적그리스도 속에 내가 지배당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살아온 그 뒤에 회고적으로. 근데 자력으로 하겠다고 하면 그건 이미 악마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내 힘으로 어떻게 해서, 시키는 대로 구원받겠다는 것. 그 중의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주군이 발을 씻겨주죠. 그러니까 6절에 봅시다.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이 말은 뭐냐 우리 관계가 주님께서 씻겨줄 관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씻어주게 되면 무슨 관계가 뒤죽박죽이 돼요? 이 주군관계, 자기가 평소에 설정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아는 그 관계가, 이게 틀어져버리잖아요. 이 틀어지는 것이 왜 문제가 되죠? 결국 베드로는 뭐냐 하면 베드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지금 예수 믿겠다는 거예요. 자기 가치를 안 놓치고, 자기가 죄인 안 된 상태에서 예수님마저 믿는 사람이 돼보겠다는 거예요. 이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베드로가 지금 겁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세상 살면서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이유가 뭡니까? ‘나 괜찮은 존재인데,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괜찮은 존재에서 안 괜찮은 존재가 되어, 진짜로 내가 예상하기 싫은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비윤리적인 것이 나올 때.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나온 것이, 제발 비윤리적인 것을 견뎌야 되고 참아야 된다고요. 처음부터 우리는 윤리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는데, 베드로처럼 너무 자기 자신을 너무 좋게 과대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과대평가를 왜 하느냐 하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노력 덕분에, 내 착함 덕분에, 이만큼 한다는 자기 자존감 때문에, 자기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착했으면 주께서는 나를 살려주느냐? 이런 식이에요. 얼마나 착했으면? 교회 다니죠. 헌금도 하죠. 밤늦은 시간에 성경공부에도 참석하잖아요. 저 같으면 강의도 하잖아요. 얼마나 착해요? 착하기 때문에 당뇨도 안 걸렸잖아요. 얼마나 자기 관리가 잘 되어 있어요. 뱃살도 뺏다고요.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럼 우리가 그렇게 살지 말아야죠?” 그렇게 살지 말아야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그럼 그렇게 안 살아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지금 보다 더 배 볼록하게 누릴 권리는 다 누리겠다는 이 말 아닙니까? 이런 못된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지금은 은혜로 삽니다. 미안하고 부끄럽지만, 근데 내가 지금보다 더 착해버리면 당당하게 내가 받아 챙길 것은 받아 챙긴다는 식으로 살겠다는 거죠. 이게 마귀적이죠. 이런 소리 한다는 것이. 

  

주께서는 방법을 반대로 갑니다.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그게 실패로 끝나버려요. 내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세상에! 이 성경말씀대로 이 자손이 잘되는구나.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 천대가 복을 받는다고 했다. 어떤 분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박근혜 때문에 4대가 지금, 그동안의 대를 완전히 배려놨다는 거예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요, 출애굽기 20장에서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했죠. 만약에 안 지키면 4대까지 저주를 받죠.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세대에서 십계명을 지켜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4대까지 와야 되는데, 두 번째에서 천대가 끼어들게 되면 4대가 1대로 종결되어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천대까지 나가야 돼요. 계산이 그렇게 되죠. 그러면 윗대는 아무 의미 없어요. 윗대가 아무리 어떻게 해도 지금 내가 지키면 천대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천대까지 이어지죠. 그러면 아무리 후대에 저주받을 짓을 해도 천대는 일단 챙기고 보는 거예요. 복이라는 연금은 계속 받아 챙겨먹는 거예요. 연금을. 주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왜, 4대 저주받는 것을 챙겨요? 천대 복 받는 것을 챙기자 이 말이죠. 천대에 복 받으면 4대는 끼어들어가다가 못 끼어들어요. 천대가 픽픽 돌아가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줄넘기에서 금강산 찾아가자고 해도 찾아갈 수가 없어요. 지금 천대 복을 받는 중인데. 

  

베드로가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습을 그대로 회고하듯이, 엑스레이 찍듯이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봐야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성경을 봐야 보여요. 베드로가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요한복음 13장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는데 왜 실시합니까? 구원받았으니까 회고적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왔는지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나는 뭐 4살 때 어떻게 했고, 7살 때 어떻게 했고... 그거 말고, 내가 7살 때, 20살 때, 내가 얼마나 베드로처럼 살았는가, 하는 계시적 의미를 담아야지, 뭐 열 몇 살 때 야구하고, 고등학교 어디에 나왔고 하는, 그런 것은 성경적 의미가 없어요. 그거는 내가 조립한 거고. 진짜 의미는 성경적으로 봤을 때, 언약적으로 봤을 때, 나는 베드로 거쳐서, 가룟 유다 거쳐서, 그렇게 왔다고 해야 언약적인 의미가, 이게 우리 안에 진짜 내 본질로서 차곡차곡 누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경 말씀에 입각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이 말은 “내가 구축해놓은 이 관계를 주께서 틀어버리면, 그럼 내가 아는 주님은 어떻게 다시 확립이 됩니까? 다시 원상복귀 시켜주든지, 내가 아는 것이 틀렸다고 이렇게 다시 수정해주시든지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니까, 7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지금껏 두 시간 동안 강의한 것이 이거에요. 지금은 어떻다? 알지 못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지금 네가 모른 짓을 마음껏 해내라. 

  

그럼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는? 회고적으로 보게 되면 이미 우리가 잘못 곡해한 것을 회고적으로 알게 만들죠. 내가 베드로고, ‘내가 이 짓을 또 했구나. 베드로 짓을 오늘 또 했구나. 오늘 착한 일 했으니까 내일 계약이 있는데 계약 잘 되겠지.’ 이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또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대구강의는 연세가 많은 분들이 오시니까. 내가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마일리지가 쌓여가지고 저 외국에 있는 내 자식한테, 자식은 기도를 안 하잖아요. 엄마가 열심히 해놓으면 그 마일리지가 쌓이고, 마일리지는 대한항공이면 언제든 탈 수 있어요. 그 기도한 복을, 기도 생전 안 한 자식한테 오게 해서 복 받으면 얼마나 좋으냐. 그것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는 거예요. 어머니 기도 못 잊어, 하는 찬송이 나오듯이. 그게 바로 베드로에요. 베드로라니까요. 

  

왜, 내 것을 흔들어버립니까? 이런 뜻이에요. 왜, 내가 갖고 있는 구축된 관계를 흔들어버리십니까? 그럼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당황해야 된다. 후에 가면 그때 당황했어야 된다는 것을 니가 알리라. 그러면 베드로는 나중에 자기 잘남을 증거 하겠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겠죠. 나는 구원 될 자격도 없고 안 되도 그만인 존재였었다. 그런데 이제는 말한다. 이같이 말도 안 되는 나를 주님의 십자가로써 구원했다는 것을, 그렇게 주님만 증거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아까 관계라고 이야기했는데, 거기에 나오네요. 8절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며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 관계없다, 에요. 관계없다. 그럼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니가 생각하는 그런 예수는 애초에, 보면서도 그런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다. 지금 보면서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면서도 니가 생각하는 그런 예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발을 씻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수정해줄게. 수정도 그 당시에는 안 됩니다마는. 

  

그리고 난 뒤에 9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 분석은 여러분들이 쉽게 할 수 있겠죠. 자, 베드로가 뭘 생각했느냐 하면 양적 개념을 생각한 거예요. 사람이 있는데 발을 씻겼습니다. 발이라고 하는 것은 양적으로 전체에서 일부가 되는 겁니다. 양적으로 일부가 되죠.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을, 양量이 아니고 질質을 이야기합니다. 발에 있는 피나 머리에 흐르고 있는 피나 다 같이 순회하는, 회전하는 피잖아요. 

  

주님께서 발을 건드렸다는 말은 전체 다 건드렸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뭡니까? 양量에서 질質로 바뀌는 그 관계가 지금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관계라고 하는 거죠. 기도해서 부자 되고 이게 전부 다 뭡니까? 양量이잖아요. 기도하면 우리 애가 성공하고, 다 양量이죠. 그것이 바로 잘못된 관계에요. 기도하면 우리교회 부흥되고, 다 잘못된 관계에요.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다 잘못된 관계에요. 확장, 부흥, 이게 다 무슨 개념이에요? 이게 다 양적 개념이거든요.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노아방주에서 몇 명 나왔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달랑 몇 명만 탔습니까? 8명이죠. 8명 나오죠. 그것도 나중에 보면 또 하나는 저주하고 난리가 났죠. 방주를 그렇게 크게 지어놓고, 배를 그렇게 크게 건조해놓고, 대우조선에 맡겼는지 하여튼, 달랑 8명이에요. 그것도 말이 8명이지, 한 식구만 구원이 됐어요. 이게 언약이라는 것이, 이게 양量이 아니고 질質입니다. 숫자가 왜 적느냐고 타박하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이미 홍수 속에서 새롭게 예상 못한 새로운 질質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미쳤지?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인간이 되었어? 양이 죽었는데 누가 산다? 내가 산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소리? 근데 내가 왜 달라졌지? 그게 왜 믿어지지? 미친 거야? 돌은 거야? 진짜 또라이야? 뭐야? 근데 그걸 알고 어떤 교회를 방문했더니만, 거기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 어린양을 믿고 구원받으면 영생을 얻습니다.”이래 이야기하는 겁니다. 

  

뒤에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영생을 얻습니다. 복을 받습니다.”이래하니까, 그 소리 하는 취지가 뭐지? 나는 지금 어떻게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사는지, 그거에 초점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이것을 원해서 교회에 왔잖아요?” 마치 그걸 알듯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우리는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두 번 다시 그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있을까요? 

  

복음을 믿으면 얻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 그 자체에요. 십자가 믿으면 얻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그 자체입니다. 부분적으로 손, 발을 해달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할 때는 베드로에 대해서 우리는 칭찬하고 싶어요. 사람이 자기 솔직한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잘 표현했을까? 

  

“십자가로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월급도 올려주셔야죠?” 이런 양적으로 꽉 억눌린,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우리는 못하지만 베드로는 우리 대신 용감하게 해줬습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월급도 올려주세요.” 이런 것. 노골적으로 “나는 평소에 양量에 매료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쫙 내놓죠.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결혼해야죠? “결혼하게 되면 고난이 있다.” 그러면 “아이고, 고난이 있어도 좋습니다. 고난 받더라도 결혼은 한 번 해보고 받겠습니다.” “니가 양적이니라.” 

  

양적이라는 것은, 왜 양적이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는 질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럼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는 선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 선이 곧 악이라는 것은 몰랐어요. 왜냐하면 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아까 했듯이 이 세상 신이 띠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안에 니나 내나 다 잠겨있는 상태에서, 우리 별 문제없지? 어. 별 문제없어. 교회가도 별 문제없어.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 당연하지. 신명기에 나와 있잖아. 별미 바치니까 양이 잘 되고 두 배나 상속받고 잘 되잖아. 그러니까 별 문제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올 때는 마귀도 함께 등장해요. 근데 예수님이 오기 전이기 때문에 마귀가 어떻게 우리를 그동안 굴복시켰는가, 그 내막이 빛이 안 오니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빛이 옴으로써 어두움이 드러나 버렸어요. 모든 인간이 어두움에 속하니까, 우리가 물리적으로 생각해서는 빛이 오게 되면 온 만큼, 촛불만큼 이게 밝게 되어 있어요. 전기스탠드가 어두운 곳에 오면 그 만큼 밝게 되어 있다고요. 근데 성경은 빛이 오매 어두움이 더욱더 어두워져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알면 더욱더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더 뭐가 돼요? 죄인 중의 괴수가 된다니까요. 이런 즐거움이!! 뭘 하기만 하면 죄가 돼요. 뭐든지 하면 죄가 된다 말이죠. 뭘 하기만 하면 죄가 되죠. 그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반대로 뭘 해도 거룩이 된다면, 착하게 된다면, 그걸 유지하려고 세 번, 네 번 스트레스를 더 받게 돼요. 

  

그때 그 착함을 유지해야지. 내가 어떻게 그 노인네가 무거운 짐 들고 내려올 때, 내가 어떻게 그걸 받쳐가지고 밀어 드렸는지. 어떻게 착한 일을 했을까? 하나님의 은혜구나! 굉장히 상쾌해요.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떤 두려움이 오느냐 하면 내일 그 장소에 그 자리에 가니까 이번에는 노인 열 두 명이 열 두 개의 리어카를 들고 내려오는데, 지금 기차시간은 되었지, 한 명도 기차시간 때문에 못 밀어줄 판인데, 열 두 명이 내려오는데, “아이고 안 됩니다.” 노인네는 “지금 혼자서 뭐라고 하는 거야?” 혼자서 지가 움츠려져가지고 자괴감을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이게 뭐냐, 두려움이에요. 두려움. 이게 두려움이라고요. 양이 죽어서 우리가 구원받지, 언제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구원받았습니까? 사랑을 한다고요? 얼마나 해야 되는데요? 얼마나?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양적이잖아요. 사랑이 얼마면 되겠어? 양이 죽어서 구원받았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몰라요. 우리도 전혀 몰라요. 

  

근데 구원받은 사람은 헥헥 거리고 뒤돌아보니까 그렇게들 살아왔어요. 2016년도 그렇게 살아왔고, 교만했고, 교만 아닌 줄 알았죠. 겸손을 띤 교만이었어요. 그러니까 올해도 더욱더 빛이 더 오게 되면 어두움은 더 짙어지거든요. 더욱더 교만해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교만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절,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개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열 두 제자 통째로 보는 거예요. 통째로 보는 거예요. 통째로 볼 때 다는 아니라는 말은,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얼른 보면 1대 11로 보는 것 같지만, 이게 뭐냐 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누구는 구원받고 이게 아니고, 예수님과 이 밧줄, 이 관계를 보는 겁니다. 관계를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면 반드시 뭐가 등장합니까? 이 관계 말고, 예수님이 옴으로써 뭐가 등장했다? 사탄의 전략이 등장하죠. 이걸 지목하는 겁니다. 

  

이 힘에 너희들 전체는 이겨낼 수가 없느니라. 그래서 지금 너희들은 내가 해도 무슨 말인 줄 모른다. 나중에 이 사탄에서 예수님이 빠져나갔잖아요. 그 빠져 나온 힘 가지고 베드로를 찾아오게 되면, 베드로가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빠져나온 입장에서 다시 예수님과 동일한 관점에서, 세상 전체를 악마의 지배아래 있는 관점으로 한꺼번에 보게 됩니다. 그게 바로 생명의 신호라는 책, 요한계시록의 관점이에요. 

  

요한계시록의 관점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미 성령 안에서 내가 어떤 세상을, 어떻게 그 무시무시한 세상을 그동안 빠져나왔는가,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톰과 제리라는 만화에 보면 고층건물 짓고 있는데 쥐가 뭣도 모르고 도망가고 있는데, 떨어졌다 하면 크레인이 딱 와서 받치고, 또 끝에 가서 떨어지려고 하면 다른 크레인이 딱 와서 받치고, 쥐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뛰기만 해도 착착 받쳐줘서 1층까지 딱 내려와요. 

  

그렇게 1층으로 내려온 것처럼, 지금도 젤리처럼 모든 게 갇혀서 같이 동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순실 문제라든지, 북한 핵문제라든지, 이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영생 줄자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누가 쥐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나오죠.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권세,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연관되어 있어요. 이슬람의 테러도 다 연관되어 있어요. 모든 권세가 아들만을 목격하기 위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이런 젤리적인 요동침이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죠. 마지막 끝에 봅시다. 요한복음 13장 12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주군이에요. 옳습니다. 이때 선생은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고 목숨 받친 주군이에요. 너희 말이 옳은데, 아직도 옳다는 것은 예수님 측면에서 옳은 거예요. 

  

그런데 반드시 이렇게 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가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진짜 스승님만은 주군이 맞구나! 진짜 주인님이 맞구나! 진짜 주가 맞구나! 근데 우리는 철도 없이, 개뿔도 모르면서 우리가 섬기면 그게 주인 되는 줄 알고, 섬기면 주인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섬기는 자가 되도록 그렇게 해주십니다. 

  

성령만 오시면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보시는 안목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죽어있는 시체에 불과한 우리가 남들이 살아있다고 같이 살아있는 것으로 우깁니다. 하지만 사실은 주께서 필요해서 날마다 우리를 살려내고 있고, 새로운 말씀을 통해서 말씀 덩어리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 우리 잘남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격자, 예수님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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