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3장1절(예수님의 관점)170103a-이 근호 목사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자,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하기 전에 12장 했잖아요. 12장 이야기는 너무 관념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죠. 실질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 관념적인. 관념적인 이야기라는 말은 뭐냐, 남들한테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데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이야기. 예수님에게만.
그러니까 사람이 서로서로 만나면서 본인 이야기만 계속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공감을 느낄 수가 없는 거예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나는 이 땅에서 죽었다가 다시 들려야 될 것이다.” 전부 다 예수님이야기에요. 그리고 아버지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의 이야기니까 그건 예수님의 아버지 이야기지, 다른 듣는 사람의 아버지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관념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 관념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결론까지 이야기해버렸어요. 뭐냐 하면 “너희들은 자신의 영광을 사랑하지 나를 믿지 않는다.” 실컷 이야기해놓고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믿지를 못할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믿지를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인데, 신명기 마지막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맺어버렸어요. 신명기 1장에서는 분명히 말씀대로 살라고 지시해놓고, 마지막 장에서는 너희들은 배신할 것이다. 이걸 다른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폐쇄회로라고 합니다. 폐쇄회로. 닫힌 구조라고 하죠. 닫힌 구조.
공간이 폐쇄가 되게 되면 공간에 천장이 있겠죠.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너희들은 그 천장 아래서 예언의 적용을 그냥 당하게 될 것이다. 배신하고 말리라. 반드시 배신 되리라. 그러면 신명기 끝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뭘 믿어야 돼요? 처음에 뭘 하라, 하지마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하는 이걸 믿어야 되겠어요? 마지막에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되겠어요?
결국은 이걸 일관성 있게 통째로 믿으려면, 아! 우리는 배신하게 되는구나! 라는 것을 믿어야 되겠죠. 근데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우리는 결국은 하나님은 배신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 저 믿습니다.” “뭘 믿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게 진심이겠어요? 아니면 놀리는 것이겠어요? 이게 사실은 진심일 수가 없어요.
진짜 배신할 것 같으면요, “하나님, 우리한테 이렇게 나오면 안 되죠?”라고 반박이 나오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저는 끝까지 우리가 배신할 줄을 믿습니다.”라고 이런 말을 한다는 그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배신이라는 말이 배신하는 척을 배신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진짜 배신을 할 때 배신이 된다 이 말이죠. 진짜 배신하는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 입에서 우리가 배신할 줄 예언했죠? 배신합니다.” 이러면 이거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배신 안 한 게 돼요.
왜? 주께서 너희들은 배신한다는 예언을 내가 받아들였으니까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신명기 32장부터 마지막장에 나오는 말씀이나 요한복음 12장 말씀이나 우리가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개인이야기고, 그 개인이야기는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그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없다, 에요. 우리가 믿을 것은 없다. 믿는다고 용 써봐야 그거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걸 폐쇄회로, 갇힌 구조. 밑 있고 그 위에 천장 있고. 백날 설쳐봐야 그 폐쇄된 구조에서 열 내는 것밖에는 안 돼요. 그래서 자기 최면을 걸기 위해 그 안에서 고함지르면서 철야하면서 기도하는 것밖에는 안 돼요.
자, 그렇다면, 믿지 못한다면 그럼 제자들이 구원받지 못했는가? 구원받았죠. 그럼 뭐냐,
항상 믿음은 사후에 회고적으로 믿음이 돼요. 회고적으로. 미리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다 해놓고, 그 다음에 돌이켜보니까 내가 믿으려고 애쓴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 말씀의 내용대로 믿게 하시는 새로운 피조물로 계속해서 만들어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내가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도 성립이 안 되고요. 주께서 말씀대로 그렇게 현실화시켰다가 성립되죠. 주께서 말씀대로. 주께서 말씀대로 그대로 실시된 거예요. 주께서 말씀대로 그렇게 된 겁니다. 따라서 말씀대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나를 안 믿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고 믿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다. 이래나 저래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12장이야기에서 우리는 믿을 게 없다. 주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신다. 그럼 그 이야기가 된다면 13장부터는 할 게 없지 않습니까? 할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이 12장에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자신의 일을 본인에게 퍼부었던 것을, 이제는 거기에 부합되는 현실을 서서히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갇힌 구조 안에, 오늘 제목을 이걸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폐쇄회로, 갇힌 구조죠.
갇힌 구조를 실제화 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개입이 되는 겁니다. 자, 갇힌 구조의 그림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갇힌 구조에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시면서, 갇힌 구조 바깥에는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갇힌 구조 바깥에 계신 아버지하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2장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갇힌 구조에서 통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게 언약관계인데, 아버지하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너희는 결국 나를 믿지 못할 것이다.” 이래 나왔다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이건 12장이고, 13장에 보면 이 갇힌 구조에 바깥에서 이게 실제화로 개입이 되는 겁니다. 개입이 되면 갇힌 구조 안에 있던 로봇 같은 이 제자들이 주의 말씀대로 시작된, 계시되는 이 말씀의 개입에 의해서 이들에게 뭔가 움직임이 형성돼요. 움직임이 형성된다고요. 저는 이걸 젤리라고 하는데, 젤리가 어떻습니까? 액체와 고체의 경계선에 있죠. 액체는 흔들면 출렁출렁하잖아요. 고체는 딱딱하잖아요. 근데 젤리는 약간 흐물흐물하면서 움직이잖아요. 약간 빡빡하게 밀고 땡기고 한다 이 말이죠.
열 두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지진 비슷하게 난데없는 어떤 밀고 땡기는 질서의 재배치. 질서의 재정립. 그냥 헤쳐모여! 정도가 아니고 그냥 사는데, 뭔가 밀 때 밀리고 땡길 때 땡기면서, ‘왜 이러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뭐지?’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들, 성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상 못할, 뭔가 뻑뻑하고 빡빡한 현상, 그리고 내가 어떻게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는, 이것은 주께서 자신을 위해서 한 예언이 이게 우리 안에서 실제화 되는 현상으로 보라 이 말입니다.
그걸 현상인지, 착각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반드시 현상이 일어날 경우에는 이 갇힌 구조, 폐쇄회로를 겸해서 생각해야 되죠. 갇혀있다는 것. 갇혀있고 주님이 여기에 개입해야만 발생되는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현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뭐냐, 주의 증인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21장으로 되어 있거든요. 요한복음 21장 끝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목격자로 끝나요. 목격자. 베드로도 목격자고 사도요한도 목격자인데, 이 목격자라는 말은 뭐냐 하면 본인이 역사의 주체자가 아니고 구경꾼이라는 뜻입니다. 구경꾼.
이렇게 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뭐다? 구경꾼이 되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억지로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고, 젤리 안에서, 이게 폐쇄구조니까, 전체가 흔들리거든요. 이 전체가. 북한의 핵문제와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이 말이죠. 전체가 젤리구조니까. 흔들흔들 거리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된다는 것을 아는데, 다른 사람은 그냥 우연적인, 이러다가 없어질 일시적 현상으로 생각하죠. 일본에 지진이 일어났다. “뭐 늘 일어나겠어? 일시적 현상이지.” 그러나 성도는 “늘 지진이 일어나도 당연한 것이다. 늘.” 오히려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죠. 이게 보는 관점이 달라요. 관점이.
철학에서는 관점주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관점주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본다가 사라지는 것이 관점주의에요. 나는 현실에 의해서 휩쓸리는 것이고, 그리고 나만 까불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이, 다른 사람과 같이 연동되어서 무빙moving, 흔들리고 있음을 아는 겁니다. 이 관점주의가. 관점주의가 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관점주의의 좋은 점은 뭐냐 하면 모든 일에 긍정적이라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기분 좋은 것이 있잖아요. 그런 경우가 없다고요? 이유도 없이 기분 좋은 것. 만약에 이유가 있어 버리면 그거는 관점주의가 아니고, 자기주체주의입니다. ‘아, 이런 일이 생겨서 기쁘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 할 것 없이 그냥 기쁜 것은 미쳤거나 아니면 세상을 제대로 알 거나 이래 되는 거예요. 뭐 범사에 감사하라. 그게 바로 관점주의 아닙니까? “니! 무슨 좋은 일 있나?” “아니.” 그냥 그 자체가 이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그냥 세상 돌아가는 자체가.
요한복음 21장에서 마지막으로 나오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대한 증인, 증인이라는 말이 목격자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이런, 이런 일을 일으켰습니다.”하는 것에 목격자로 살아가는 것. 관점주의에서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쓸데없는 돈 자랑이나, 권력자랑이나, 자식자랑이나, 괜히 사적인 것 가지고 남하고 비교하는 그런 스트레스나, 그런 것은 안 해도 되는 겁니다. 안 해도 되는 그런 좋은 장점이 있어요.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을 이렇게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눈치 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룟 유다 나오잖아요. 그럼 여러분들이 눈치 챘는지 테스트해볼게요. 다른 제자들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좋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놀라는 겁니까? 여러분들 성경 보면서 그런 것이 안 보이던가요? “저 배신자여!” 이게 아니고 깜짝 놀라요. “누가?” 그리고 예수님은 알았지만 제자들은 몰랐어요. 나중에 사도행전에 들어가면 주께서 한 사람을 뽑아냈다고 해서 그때서 알지만.
무슨 의미냐 하면 “아! 정말 가룟 유다가 저렇게 사탄이라면, 우리가 안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래 생각하지, “가룟 유다가 저렇게 할 줄 알았어!” 이런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 너무나 자기들하고 같은 급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도 가룟 유다가 나오는데, 사탄 나오는데도, 그러니까 가룟 유다를 이렇게 마귀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혼자 생각이지, 동료의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제자들에게는 가룟 유다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고생을 같이 한 사람이고. 귀신 쫓아낼 때 같이 쫓아냈고. 누가 그 사람에게 사탄 들었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도 못했어요.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나와요. “나는 저 사람이 무슨 할 일이 있어서 가는 줄 알았다.” 이래 나와요. 다른 성경구절 보면 그렇게 나오잖아요. 평소에 그것도 임원 아닙니까? 재정회계 맡았으니까. 회장, 부회장은 아니지만. 총무도 아니죠. 재정을 맡았죠. 재정을 맡았지만 어찌됐던지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팬클럽 간부급이란 말이죠. 그래서 13장을 이제부터 설명할 텐데요, 이런 관점주의, 다시 말해서 모든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관점주의라는 것은 주께서 개입해서 흔들어버리면 다 같이 흔들려서 이 환경을, 이 상황을 통째로 한꺼번에 그대로, 마치 여름에 양동이에 물 받아서 한 번에 확 붓듯이, 이 상황을 한 번에 확 들이붓는 그런 관점으로, 세계를 보기를 원합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봐야 하느냐, 먼저 이것부터 아시면 비로소 13장이 풀립니다.
13장은 우리 제자들 가운데 누가 똑똑합니까? 이래 보면 안 되고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기 12명 제자들이 다 똑같은.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구분은 예수님이 하시고. 자기들 보기에는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동일합니다. 그 다음에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오든, 가룟 유다 말고 사도요한에게 오든 그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방식이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지, “우리 중에서 가룟 유다 좀 빼내세요!”라든지, “저 사람은 나빠요!”라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은 열 두 제자 어느 누구에게도 그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신자니까 우리들이 돌로 쳐야 된다는 그런 인식이 없어요. “걔가 왜 그랬어? 니 알았어?” “나도 몰랐어. 왜 그랬대?” “주께서 그냥 찍었대.” “아휴! 진짜 주님 무섭다.” 이런 분위기의 느낌이라니까요. ‘아이고, 저 사람 저럴 줄 알았어.’라는 게 아니라, ‘나는 착한데 저럴 줄 알았어.’ 이게 아니라, 그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사탄이 들어간 것을 통해서 나한테도 사탄이 들어오고 배신해도, 나는 입이 열 개라도,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라는 권한이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런 안목을 가지고 13장을 보셔야 해요. 그런 안목으로.
12장에 관념적으로 보이는 것이, 이게 현실로 가면서 12장의 원칙은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눈치 챘나? 그럼 구원해줄게.”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가면서도 오히려 눈치를 채는 것이 아니고, 의문만, 질문만 해대죠.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습니까?”이래 되죠. 그걸 실제로 한 번 봅시다.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예수님 혼자 알고 있어요. 그럼 다른 사람은 알아야 된다? 몰라야 된다? 알 필요가 없어요.
이거 진짜 중요한 거예요. “알아야 믿죠?” 이거 땡입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믿음이 뭐라고 했던가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고 회고적이라고 했죠. 나중에 돌아보니까 주께서 믿도록 꾸준히 이끄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은 내가 했다는 것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요. ‘그때 눈치 챘어.’ 이러는 것이 있으면 안 돼요. 그거는 믿음이 아니에요.
주께서 홀로 하신 요한복음 12장의 내용이, 원칙이 믿고 난 뒤에도 그 원칙은 계속 살아있어야 됩니다. 어제도 주께서 홀로 하셨고, 오늘도 주께서 홀로 하셨고, 우리는 주님이 흔드는 대로 젤리 안에서 같이 흔들렸을 뿐이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것이고, 영원히 천국 갈 때까지도 그게 마찬가지로 될 것이라고, 이래 되어야 됩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제가 믿겠나이다.” 이런 것은, 끝까지 이런 것은 용납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설교를 하면서 말이 안 통해가지고 기껏 끄집어낸 것이 제발 예수 믿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끄집어내야 될 이유가 있어요. 막 사는 것하고 같은 취지에요.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안 믿어서 구원된 거예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구원된 거예요. 그게. 그게 믿는 사람에게 나오는 고백이 그거에요. “저는 예수님을 애초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이군요.” 회고적으로, 뒤돌아보니까 그걸 아는 거예요. 뒤돌아보니까 다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그러면 예수 믿기 위해서 어떤 집사가 찾아와도, 어떤 권사가 찾아와도 그것도 바로 같은 젤리 안에서 주께서 그렇게 움직이신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목격자이지, 주께서 일하는 자의 목격자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증인이지, 예수 잘 믿는 사람의 증인 될 필요가 없어요. 그럼 그걸 누가 방해하느냐? 그걸 목사들이 방해하는 거죠. 여기에는 그런 목사가 없어서 하는 이야기지만. 목사들이 참 불행한 사람이에요. 목사가 안 됐으면 말씀에 관심이 있는데, 목사가 되고 난 뒤에는 이걸 목회에 어떻게 써먹을까,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자기가 목사라는 위상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아까 집사님 말씀대로 동업자 된 줄 알고. 주님은 어떤 동업자를 두신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 말은 뭐냐 하면 목사는 주님을 믿지 않고, 예수를 잘 믿는 자기 자신을 계속 믿고 있는 거예요. ‘정신 차려! 예수 잘 믿어야 돼!’ 꼭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 앞에 설 때는, 나처럼 해봐라~이렇게~♬ 이걸 이야기한다고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처럼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걸 증거 한다고요. 그러나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은 회고적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 적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게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은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도망쳤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3장 1절 끝에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걸 그 현장에서 들어도, 이걸 듣고 난 제자들이 얼마나 아부를 떨었겠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선생님 믿습니다.” 주께서는 “니가 그렇게 믿습니다,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좀 있다 두고 보면 알아. 왜? 너의 운명과 미래는 내가 흔들어댈 테니까.”
그 믿습니다, 하는 것이 그 믿음이 아니고 다 헛방이에요. 그런데 그 13장 1절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유월절과 예수님이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이거는 예수님만 꼬불쳐놓고,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만. 제자들은 이 내용을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되면, 회고적으로 13장을 다시 보게 되면, 아, 그때 그 타이밍이 이거는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 타이밍을 맞추어서 유월절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죠.
그러면 그때만 그래요? 그렇게 고백하는 2017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까? 오늘도 그 타이밍이에요. 그 타이밍이라는 말은 뭐가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결국 유월절이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유월절이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원칙이. 그럼 유월절의 원칙이 뭐냐 하면 양 죽으면 누가 산다? 사람이 산다. 맞지요? 유월절이 이거잖아요. 피 바르면 사람이 살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옆에 바퀴벌레가 죽으면 내가 삽니까? 뭐 저기 가는 당나귀가 죽으면 내가 살아요? 가축 한 마리 죽으면, AI조류인플루엔자 걸려서 3,300만마리 죽었는데 그러면 내가 삽니까? 닭이 죽어서 내가 살았다고 하면 그거는 미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진해서 미친 인간이 되기 싫어해요. 왜냐? 이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양이 죽었다고 내가 산다는 것은, 그거는 그 분위기가 기독교 분위기라면 “예.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절대로 이 속에는 그것이 인위적으로 스며들 수가 없습니다.
따져보세요. 양이 죽었는데 인간이 왜 삽니까? “에이, 그냥 그런 줄 알고 믿으라니까!” 그럴 수 없어요. 우리교회에 어떤 교인처럼 수련회에 데려가려고 아들한테 돈 15만원 주고 참석시키고, 아들은 참석하고 15만원 챙기고. 그 애는 내가 중학생이니까 수련회에 갈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근데 뭘 제시했습니까? 돈 15만원을 제시했잖아요. 그러면 수련회보고는 참석 못하지만 뭐 보고는 참석 하겠다? 돈 보고 가는 거예요. 그냥 그 애는 수련회에 관계없이 갔다 오기만 하면 15만원이 생기고, “다음에 가면 또 얼마 줄 건데?” 할 거예요.
참, 철없는 중학생이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그렇다면 우리는 안 그래요. “예수님 십자가 믿어 줄 테니까, 우리 가족 몽땅 천국 보내줄래요? 안 줄래요?” 이래 나온다면 이거는 전혀 믿음이 아닌 거예요. “내가 양 죽어서 내가 산다는 것을 믿어줄 테니까, 주님께서는 뭐 줄래요?” 그럼 주님께서 “그러니까 니는 양 죽어서 니가 산다는 것을, 니가 지금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입으로 털어놓은 거지?” 털어놓은 거예요.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이겁니다. 양 죽었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설명한 책이 성경입니다. 이게 설명이라고요. 그러니까 그거 믿어주고 뭐 주실래요? 하면 그 뭐가 없어요. 성경에는 뭐가 없어요. 뭐라는 것이 없어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고 나는 그걸 믿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넣어 주시겠습니까?”라고 생각하다면 그건 성경에 없는 내용이에요.
왜냐하면 뒤에다가 뭘 붙였다는 말은, 앞에 있는 것만으로 나는 안 믿어진다는 뜻이에요. 그게.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그 자체가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다만 그 결과로써 내가 천국의 영생을 얻는다면 그거는 혹한다는 거예요. 그거는 살짝 믿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아무도 믿는 사람을 없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여기서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것과 그리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 멘트, 그 발언을, 모든 것을 사전에 다 알고 계시면서 왜 하셨는가? 분명히 그 전에 내가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는 딴소리 하십니까? 이거는 이천년 교회 역사, 신학에서 미궁에 빠진 거예요. 이 야기가.
다 아실 것 같으면 “주여! 다 아시죠? 순순히 제 잔을 마시겠습니다.” 이렇게 할 거라고 우리는 잔뜩 기대했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전에 워낙 큰소리를 쳐놨으니까, 한 믿음하시는 분이 주님이니까, 주님이 믿음 없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믿음 없는 주님이라는 것이 어떻게 주님일 수가 있어요? 그 분이 먼저 믿음이 있어줘야, 우리가 모델로 삼아서 믿음이 생기는데, 믿음 없는, 전혀 불신앙적인 예수님이라면, 그동안 큰소리 친 것은 그냥 저질러 본 것뿐이고 그냥 시도한 것뿐이잖아요. 그냥 시도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것은 대전강의에서 했어요.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까요?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사실은 그 내용이 오늘 본문과 관련이 있어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 버리시면 안 되잖아요? 그런 뜻이거든요. 제가 놀라겠습니다.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마치 반문하듯이. 예수님이 메시아다, 메시아다, 하면서 따라가다가, 따라가면 예수님 따라서 천국 갈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갑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주춤하죠. 저분하고 같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좀 이렇게 팔짱 끼고 기다렸다가, 우병우처럼 팔짱끼고 기다렸다가, 사흘 만에 등장하는 그때에, ‘내가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딱 잡아가지고, 마치 큰 봉황을 타고 가는 예수님 따라서 천국 갈 것인가? 이걸 결정해야 되거든요.
만약에 딱 팔짱끼고 있다가 죽었을 때는 안 믿다가 살아났을 때, 부활을 보고 그 부활 등허리에 올라타고 가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단절이 없어 버려요. 단절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구원하지 아브람을 구원하지 않거든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야곱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로부터의 단절된 또 다른 나는 단절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예상도 안 되고 상상도 안 돼요.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극한은 나지, 나 말고 다른 나는 나의 범위 안에서는 없는 존재에요. 결국 주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없는 존재를 만들어놓고 데려간다면 나는 닭 좇던 개꼴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닭 좇던 개꼴이 되기 싫으면 날 한 번 따라와 보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따라갔잖아요. 근데 따라 갈 쯤 되어가지고, 니는 따라오고 싶어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안 된다. 뭐가 안 된다? 구원 안 된다. 이게 옳습니다. 안 됩니다.
열 두 제자를 뽑아놓은 이유가, 대표자인데, 내가 뽑았다 할지라도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구원 될 수가 없어요. 그럼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헤어짐입니다. 오늘 강의제목입니다. 헤어짐. 잠시 헤어질까요? 영원히 헤어질까요? 영원히 헤어져야 돼요. 영원히. 잠시 헤어지게 되면 주님 곁을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헤어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려야 돼요. 영원히 헤어지게 되면 이제 예수님 스토리는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버립니다. 그때 반짝 추억으로 끝나버려야 돼요.
이게 바로 열 두 제자가 보여주는, 인간은 자기 추억 속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구원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만 그 구원에 대해서 성취할 수 있는 대책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느냐, 그래야 예수의 증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예수의 증인이 돼요.
그러면 헤어지고 난 뒤에는, 돌아온다는 그러한 언질이 있습니까? 그런 언질도 없어요. 성경은 나와 있는데 이건 회고적이고. 그 당시 제자들에게는 그게 없어요. “끝났구나!”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찾아오죠? 고기 잡을 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죠. 여기서 만약에 다시 찾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다시 오지 않아도 될 권한이 주님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거예요. 주님은 제자들을 걱정해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성취하기 위해서 오지, 우리를 걱정해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걱정할 대상이 안 됩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를 걱정해서 온다면 그거는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에요. 우리가 증언하는 것은 주께서 나를 이렇게 괄시하지 않았다 하는 사실이 그 증언 속에 포함이 돼버리면 이거는 온전한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에요. “나도 괜찮은 존재다.”이래 돼버려요. 절대로 인간은 괜찮은 존재가 돼버리면 안 돼요.
안 찾아와도 되는데 찾아오신 거예요. 그것이, 그 마음이, 그 관점이 계속 유지될 때만, 그 순간에만 오롯이 예수님이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자기 사람들, 이 자기 사람들이 될 때, 제자들은 그걸 들으면서 백이면 백 다 오해합니다. “아, 자기 사람이 우리구나!” 우리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우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열두 명 전체를 말하겠죠. 그런데 2절에 보세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자, 여기서 제가 설명하게 되면 너무 단어가 어렵기 때문에 질문 식으로 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집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우리 중 하나는 탈락할 것이라는 것을 열 두 제자 어느 누구도 사전에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그 모른 이유는, 예수님과 동일한 간격과 동일한 관계에 놓여있다고 열 두 제자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만 특별하게 구원받고 너는 아니야.’라는 것이 그 열 두 제자 사이에는 일체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죽으면 다 죽고 살면 다 사는 거지, 하나를 제킨다는 것은 열 두 제자 생각 속에는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나중에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도록 했다는 말은, 여기 13장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했다는 말은 가룟 유다에게만 사탄이 들어가도록 했다는 말인데, 그 생각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이 눈치 챘겠습니까? 눈치 못 챘겠습니까? 전혀 눈치 못 채죠. 왜? 열둘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사는 거예요. 같은 운명공동체에요. 그러니까 사탄이 들어간 가룟 유다나 사탄이 안 들어간 다른 제자들이나 별반 의식의 차이는 없어요. 똑같아요. 그럼 결국 가룟 유다가 열 두 제자의 대표자가 되는 거죠.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6장에도 마찬가지로 나와요. 6장 끝에 보면 7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이래 되어 있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을 이렇게 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가룟 유다가 마귀다.”라고 하기를 원해요. 제자들은.
근데 너희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리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너희들이라는 공동체 자체는 구원에 실패하는 집단이라는 뜻이에요. 그 너희가 누구나 될 수 있고, 한 시간 뒤에 너가 될 수 있다가, 두 시간 뒤에 너가 될 수 있고, 이틀 뒤에 너가 될 수 있고, 너희들 중의 하나기 때문에. 결국 너희 중의 하나라는 말은 그 하나를 뭉치면 결국 예수 팔자가 사실은 나머지기 11명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 한명의 운명이.
제가 그걸 전에 설명할 때, 카드로 피라미드 쌓는 것 했잖아요. 카드 열장가지고 하죠. 아홉 장이 아무리해도 소용없어요. 밑에 한 장만 빼면 다 무너집니다. 다 무너지죠. 두 명에게 사탄을 넣어 줄 필요 없어요. 다섯 명, 네 명에게 사탄이 들어가 필요 없어요. 단 한 장만 빼도 나머지기는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유월절은 사람에게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유월절에 양이 죽고 누가 살죠? 사람이 살죠. 사람은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사느냐? 근데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악마가 알아요. 마귀는 알아요. 열두 제자는 몰라요. 그 원칙을 몰라요.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그 원칙을 그대로 지금, 구약 전체의 원리원칙을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 여자의 후손 이야기를 여기서 좀 해볼게요. 여자가 남자를 만듭니다. 여자가 남자를 만들죠. 왜? 여자의 후손 이름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니까. 아들은 남자잖아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다 이 말이죠. 여자가 남자를 만들어요. 이걸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머리에 별 면류관을 쓴 여자가 아들을 안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남자는, 여자가 앞에 주체의 자리에 있고 남자는 하나의 결과, 서술의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었어요? 여자를 만들었어요? 그냥 생각해보세요. 같이 만들지, 어차피 같이 만들 건데 왜 시간차 공격을 하시냐 말이죠. 배구에서 공이 뜨고 내려갈 때 시간차 공격하듯이. 어차피 만들 것, 같이 동시에 남자, 여자 만들면 될 건데, 왜 남자부터 만들어놓고, 남자를 잠들게 한 후에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놓았는가?
남자에서 여자가 나온 것 하고, 그 다음에 여자에서 남자를 만드는 그 틈바구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여기에 뱀이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 유월절에 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애굽의 그 많은 장자들은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만 안 죽었다. 그럼 그 양과 안 죽은 장자의 관련성은 뭐냐, 이래 되는 거죠.
그것은 바로 죽음에서 뭐가 나옵니까? 죽음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오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 그거잖아요. 죽음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죽음이 없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없죠. 그럼 죽음이 안 오게 되면 모든 인간은 살았어요? 죽었어요?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모든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악마 속에, 폐쇄공간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누구도 동의 안 합니다. 자기 심장이 뛰면서 살아있으니까.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의 적시타로 나온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버림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물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물세례. 세례요한의 물세례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을 물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회개하라고 한 뜻이 무슨 뜻이에요? 죄 지은 것이 있다는 뜻이에요. 죄 지은 것이 없으면 회개 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죄인이 들어가야 될 강물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뛰어드니까 누가 말립니까? 세례요한이 “왜 이러십니까? 뛰어들 분이 아니신데 왜 이러십니까?” 물론 세례요한이 성령 받고 한 거겠죠. 예수님께서 “아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이렇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게 해야 틈이 생긴다. 틈이 벌어진다. 틈이. 예수님께서는 쐐기에요. 쐐기. 뭔가 갈라지지 않는 것을 박아버리면 그대로 쩍쩍 갈라지잖아요.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갈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열 두 제자도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간에 예수님은 십자기 질 때까지는 계속, 지금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관념적이지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걸 현실화시킵니다. 현실화시키는데 이게 삐걱거리는 거예요. 제자들하고.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냥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이러면 끝나는 것을 가지고 왜 갑자기 사탄이 아무나에게 들어간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아무나에게. 그게 누구냐 하면, 아무나에게 들어온 것이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 아무나에게. 가룟 유다가 특별히 나쁜 자가 아니에요. 악해서 그렇다는 그런 논리로 하지 마세요.
제가 월요일에 대구강의하면서 했죠. 비윤리성을 견뎌야 된다. 비윤리성을. 사실은 폐쇄회로의 천장에 붙어있는 인간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최고의 윤리와 도덕가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죠.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산다?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근데 여기에 마귀를 집어넣어버리면, 사탄을 집어넣어버리면 천장 말고, 천장 바깥에 나가 있는 그런 관점에서, 이 세상 신, 전체가 악마의 품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한꺼번에 그 관점으로 다 비춰볼 수가 있는 거예요. 비춰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살았다고 할 때에, 뒤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끊어버리세요. 그럼 뭐만 남아요? 앞에 있는 양이 죽었다만 남죠. 그것도 어떤 양? 흠 없는 양.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는 것은 필히 죽게 되어 있어요. 흠 없는 양이 죽는다는 말은 결국 흠 없는 양을 죽이도록 만드는 힘이 현재 우리가 알량하게 살아가는 이 세상입니다.
월드컵 예선 벌이고 있는 이 세상, 정유라가 지금 체포된 이 세상이 실은 누가 됐던 죄 값으로 죽어야 될, 그것도 누구라도 가룟 유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없게 만드는, 악마가 그렇게 조져버렸어요. 그렇게 만든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죠. 근데 예수님은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다는 거예요. 알아듣는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못 알아듣는 것에 너희들이 한통속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은 끝까지 사랑하는데, 그 자기 사람이라고 할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난 뒤의 문제에요. 난 뒤의 문제. 십자가에서 다 이루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자기 사람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그 전에 “저 봐주소! 저 봐 주이소!”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럼 아까 이야기를 약간만 더 하고 첫째 시간을 쉬어봅시다. 양이 죽었다, 어떤 양이다? 흠 없는 양이다. 하나님께서 이 폐쇄회로 바깥에서 집어넣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흠 없는 양을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근데 나올 때는 어떻게 나왔다? 이게 죽어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제 늘 죽었어요. 죽은 거예요.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음으로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가죠. 그 죄인의 모습, 물세례의 모습과 성령세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갇혀 있는 모든 인간은 나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나처럼.
제발 다른 힘들지 않는 방식은 없습니까? 이것에 인간이 갇혀있으니까 어떤 인간이 구원될 권리가 있습니까?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어디서 이런 인간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 권한자, 권리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할 수만 있거든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주께서 가위가지고, 밑에는 지옥불이고 위에는 천국이라면, 천국에 가려고 애쓰니까, 완전히 사리면 자르듯이, 밧줄 자르듯이 주께서 가위가지고 잘라 버리죠. 그러면 으악!!하고 떨어지겠죠.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실정입니다. 이것 외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실정도 모르고 그런 소리 하지마세요. 우리가 “나는 구원받아야 돼!”라는 그것이 바로 악마가 만든, 우리를 갇히게 만든,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계속 한다는 것은 악마가 마지막 내세울 수 있는 카드에요. “니는 니 구원에 갇혀 살아라!” 이게 악마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이게 악마의 소리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구원받아서 천국 가서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다시 찾아오시잖아요. 그 찾아오신 것이 뭡니까? 성령이잖아요. 성령이 찾아오니까, 찾아오면 믿음이라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회고적이죠. 딱 보니 세상에! 안 찾아왔으면 지옥 갈 뻔 했던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나오는 목격자가 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