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에스겔13장 1-7(본것이 없이 예언)1304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3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3:1-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찐저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나하나가 말씀이 떨어지면 그 현장이 심판하는 현장입니다. 재판하는 현장이죠. 너는 가짜, 너는 진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그 현장이 주의 말씀이 주어지는 현장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판이라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라, 죽고 난 뒤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보게 되면 인간이 행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행하고 있는 그 자체에 대해서 말씀이 접근해서 다가서게 되면 그 행동 하나하나가 ‘내가 했다’ 하는 그것, 내가 결정하고 내가 시행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3장 3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라고 되어 있지요.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 여기서 한번 빼봅시다. “본 것도 없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 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자기 심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화가 있을 찌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고기 손질하듯이 해버리면 남는 것이 뭐냐, 자기 심령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화가 있을찌어다, 이 이야기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심령을 따라 살아가는데 자기 심령을 따라 살아가는 그 자체가 저주받을 일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심령을 따라 살아가는 그 와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같이 임한 것을 느껴야 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생각대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CF에 그런 것도 있어요. “생각, 생각, 생각 ……” 자기의 생각, 이것은 내가 생각해서 내가 결정해서 하는 거야, 라고 하신다면 주어지는 것은 “그러니까 네가 저주받아야 되는 것이 맞잖아.” 그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심령을 따라 생각을 안 하면서 어떻게 인간은 자기의 행동을 하게 되는가? 모든 행동은 자기의 마음이 먼저고 자기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나중에 화가 있을찌어다, 하는 저주를 안 받으려면 심령을 따라, 라는 이것을 삭제를 하든지 생각도 없이 자기 심령을 빼버리고 살아가면 화가 안 오고 저주를 안 받는 것일까?’라고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자기 심령 따라 안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자기 심령 따라 살아가는데요.
본문 3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 심령을 따라 사는데 자기 심령이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여기는 사람은 지금 주님과 교제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이 사람만 저주가 없는 것이고 화가 없는 겁니다. 시작을 내 심령부터 출발한다면 저주가 임하는 거예요. 나는 이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나중에 화가 있을찌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을 “하라” 했어요. 그러니까 ‘아,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구나.’라는 그것이 자기의 심령이 된다면 그 사람의 어떤 행동은 주님께서 시키신 행동이 되면서 그것은 저주가 임하지 않는 겁니다. 사막을 지나가던 에티오피아 내시를 빌립집사님이 만난 적이 있어요. 우리는 그 대목을 보면서 ‘빌립집사가 왜 갑자기 사막에 가서 수레를 타고 가던 에디오피아 내시를 왜 만나는가?’ 하는데 성경에 보면 천사가 보냈다고 되어 있어요. 천사가 지시해서 또는 성령께서 인도하사 빌립집사는 그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집사는 복음을 전했지요.
그래서 빌립집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심령에 따라서 그 내시가 펴놓은 이사야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는 말이지요. 빌립집사가 그렇게 하는 것을 옆에 누군가가 봤다고 칩시다.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인다고 했을 때 그 옆 사람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게 증거가 없어요. 사막에서 에티오피아 내시가 수레를 타고 가는데 그걸 빌립집사가 우연히 만났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MBC에서 카메라로 찍었다고 합시다. 그걸 한 1억 명의 시청자가 보면서 ‘아, 저것은 주님께서 시킨 일이다.’ 이렇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무도 모르지요. 싸이라는 가수가 강남스타일 춤을 출 때 그것은 주께서 시켜서 저렇게 한 것이라고 그것을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아무도 인정 안 해요. 그러니 이 에스겔의 말씀들은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요, 이것은 에스겔뿐이 아니고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될 자는 이렇게 살아간다, 그것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구원될 자는 이런 식으로 인생의 모습을 보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본 것도 없고 말씀도 없이 자기 심령대로 움직이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에 못가고 주님의 말씀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천국 간다, 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 일반사람들이 그것이 주님의 지시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은 그들에게 없어요.
한 가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예배드릴 때 뭘 준비하면 됩니까? 예배드릴 때는 찬송가도 준비하고, 성경책도 준비해야 되고, 또 예배드리려면 직접 참석도 해야 되고, 그러면 그것이 예배드린 겁니까?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찬송가 준비하고 성경책 준비하고 추운 날 수요예배까지 참석해서 앉아 있으면 이것이 예배냐 그 말입니다. 예배가 되려면 날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며 내가 성경책 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며 찬송가 부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끝까지 전화 안 오게 해서 전화기 안 꺼내고 이렇게 앉아 있게 하심도 하나님의 뜻이며 설사 예배 중간에 휴대폰이 와서 말씀 듣다 말고 볼일 보러 간 그것조차도 주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예배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끝까지 예배 참석하는 자리에 남아 있으면 그것을 ‘나는 예배 드렸다.’라고 판정을 해버려요. 그 판정을 누가 뭘 기준을 한 판정이냐 하면 자기 심령을 따라 내린 판정입니다. 그리고 그런 판정을 내린 사람이 저주 받아요. 4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여우가 황무지에 들어가면 하는 일은 그냥 황무지나 짓밟고 돌아다니는 거지요. 아무 의미도 없고 맨 날 돌아다녀도 아무 효과도 없고 그저 자기 기분대로 까불다가 가는 거지요.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황무지의 여우같이 자기 기분에 혼자 까불 듯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더욱더 사람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든 것이 뭐냐 하면,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라고 되어 있어요. 자기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직접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라고 하면서 헛된 계시를 남발하고 점괘를 보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선지자가 “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가짜 선지자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는 것, 이것을 일반사람들이 어떻게 구분합니까? 구분하는 방법이나 어떤 대책이 있습니까? 없다 이 말이지요. 없는 거예요. 그래서 후대의 신부들이나 목사들이나 소위 성직자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거짓 선지자는 자기 심령을 따라 자기 맘대로 예언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에스겔 13장 3절에 의해서 마구 설교시간에 내뱉었다고 해서 그 말을 한 본인이 거짓선지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없다 그 말이지요.
모든 이단들이나 모든 거짓선지자들이 전부 다 이 말씀을 거론하면서 “여러분, 주의해야 됩니다. 마지막 때에 거짓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도 없이 본 것도 없이 심령을 따라서 자기 맘대로 하는데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정말 조심해야 됩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신이 옳다는 기준을 당신이 제시해봐라.” 하면 뭘 제시해야 됩니까? 특히 여기 2, 3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입니다.
본 것이 없이 예언했다고 할 때 사람이 뭔가 경험한 것이 있어서 그 경험한 것을 가지고 예언을 해야 진짜 그것이 예언이다, 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어떤 보통사람이 말할 때 자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지 경험 안한 것을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이 본문말씀은 오히려 이렇게 해야 돼요. “너희들이 남들이 다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니 너희는 거짓 선지자다.” 라는 말로 해석이 돼야 돼요.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평소에 찻집이나 술집에서 이야기 나눌 때 주로 다 자기가 경험한 거잖아요. 자기가 본 것을 말하잖아요.
사람은 본 것만 이야기하게 되어 있어요. 오히려 본 것 아닌 것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지요. 사람들은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다 본 것을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알고 느낀 것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자연스럽고 일상적인데 여기 말씀에 보면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한다 하니 “누가요? 누구나 다 보고 이야기하는 건데?” 했을 때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판정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해요. ‘에스겔 당시에 거짓선지자들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조작해서 거짓 예언들을 남발했다. 그들은 여우같은 존재라서 그들의 말을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 배만 채우고 양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채우면서도 참된 선지자로 위장한 채 살아갔다.’라고 이야기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거짓 선지자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본 것”이라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본 것을 가지고 본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여기 참된 선지자가 본 것을 가지고 예언할 때 이 선지자는 사람들이 납득이 되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본 것을 가지고 본 것이라고 하지 않아요. 굉장히 낯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야기를 했다 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지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는 것은 뭔가 재료 던져 놓고 제품 하나 만들어라, 그런 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온다는 것은 말씀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익히고 보고 느끼고 알고 정립했고 손에 잡히는 이 모든 것을 새롭게 절단 내는 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어떤 새로운 것에 의해서 기존의 것이 붕괴되고 해체되려면 그들이 아무도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해석들이 가미되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 선지자의 말씀이라 하는 것은 이 선지자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그냥 하나님이 들이닥친다,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쉬워요. 선지자가 말 한마디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심판주가 선지자의 옷을 입고 선지자로 변장해서 그냥 그 시대 그 순간에 작살내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천박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두 개 들겠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2반으로 같은 반이었습니다. 3학년이 되자 반이 갈려서 1반과 3반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너무 친한 친구가 되어서 1반에 있는 친구가 자꾸 3반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너는 1반이고 너는 3 반이니까 갈라서.” 그런데 갈라서기 싫다는 거예요. 사람이라는 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스스로 갈라서기 싫어하는 겁니다. 왜, 어제의 내가 익숙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로 그대로 인수인계 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해 버리면 어제의 나는 어제의 나로 그냥 남으면 안 되고 오늘은 오늘의 나로 남아줘야 주님의 말씀으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해서 미래로 나아가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미래에서 우리를 끌고 가기에 날마다 새롭게 달라져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가기 때문에 날마다 새롭게 하기 보다도 옛날 익숙한 그것을 그대로 끌고 천국까지 그대로 가려는 성향이 굉장히 강해요. 이제 좀 이해가 되셨습니까? 말씀이라 하는 것은 위에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어제는 어제로 끝나고 오늘은 오늘로서 새로운 일을 주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육적인 성향이 뭐냐 하면 자꾸 어제 했던 그것을 자꾸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만하면 믿음 댓길입니다. 어제처럼만 살면 되지요.” 우리는 자꾸 어제의 나를 믿으려고 해요. 지금 하늘나라 계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어제의 괜찮은 나를 믿으려고 하는 겁니다. 빌립집사가 에티오피아 내시 만날 때 예상했습니까? 예상한 적 없어요. 4월 3일 날 내시를 만난다면 4월 2일까지 까맣게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4월 3일 아침에 광야에 가라고 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주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참 선지자입니다.
참 선지자가 뭘 아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 본인이 날마다 새롭게 달라져야 될 필요성이 있는 거예요. 사람은 2학년 2반 때 같은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 친구와 헤어져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헤어지기를 싫어해요. 연세 많은 분한테 물어보세요. 항상 나오는 것이 과거 이야기에요. 옛날에 참 좋았다, 어쨌다, 하는 과거 이야기에요. 그러면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오늘도 주님께서 날 이렇게 새롭게 만들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과거에……” 맨 날 과거 이야기라. 그러면 지금의 몸은 누가 이끄셨습니까?
하나님이 이끄셨는데 하나님이 이끄셨다는 흔적은 날아가 버리고 과거의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그 덕으로 이만큼 왔다는 식의 자기 자신을 믿는 신앙심이니까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새로운 요소가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아직도 이해가 안 되셨으면 두 번째 천박한 예를 또 들어야겠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온 아이가 있습니다. 영어시간인데 선생님이 숙제를 냈어요. 딸기를 영어로 써오라고 했어요. 이 애가 선행학습을 좀 했던 모양입니다. 딸기를 영어로 하라니까 딸, 이것을 ddal이라고 쓰고 기, 이것을 ki라고 쓴 거예요.
딸기는 영어로 strawberry 거든요. 그런데 그 애는 영어세계에 strawberry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은 모르고 이 세상에서 자기가 알던 것, 기존에 배웠던 한국말 방식을 가지고 영어는 무조건 기역(ㄱ)이나 니은(ㄴ)처럼 발음 나는 대로 집어넣으면 된다는 기존의 자기법칙을 고수한 거예요. 저쪽에 strawberry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채 이쪽의 ddalki, 이렇게 쓰면 된다고 여기는 거예요. “여러분, 천국은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배? 그렇다면 성경책 가져오고 찬송가 가져오고 모여서 순서 맞춰서 시간 보내면 예배 끝!’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예배에요. 이것은 ddalki에요, ddalki, strawberry가 아니에요. 옆에 누나가 있다가 “야, 넌 영어의 세계를 정말 모르는구나. 그것은 네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네 영어고 진짜 영어는 딸기를 strawberry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애는 이해를 못하는거예요. “언제 ddalki가 strawberry로 달라졌나.” 달라진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네 법칙을 고수하다 보니 저쪽 법칙과 매칭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자꾸 끄집어내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7절에 보면 선지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 다음에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라고 물어요.
그 시대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요새 말로 하면 삼성그룹의 회장쯤 되겠지요. 대통령은 5년만 하고 끝나기 때문에 별로 부럽지가 않아요. 그런데 삼성그룹 회장은 지금 몇 십 년째 그것도 대를 이어서 계속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선지자라는 존재가 부드러운 옷 안 입고 거친 옷 입었다고 해서 선지자가 아니고 선지자라는 존재는 주위 배경이 어떠냐에 따라서 선지자가 새롭게 부각되는 겁니다. 우리가 팔짱끼고 “선지자 한 번 나와 봐! 내가 선지자 보고 싶어.” 이런다고 해서 털옷 입고 지팡이 짚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것이 선지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에 맞춰서 나오는 선지자가 거짓선지자고 내가 예상하지 않은 전혀 다른 분으로 나타나서 선지자를 기다리는 나를 아주 우습게 만든다면 그게 진짜 참 선지자에요.
선지자는 유동성이 있어요. 성경을 볼 때 우리가 안다고 보면 주의 말씀은 비켜가 버려요. 이것을 장애물이라고 해요. 이게 십자가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거치는 것, 엎어지고 자빠지게 만드는 그 모든 것, 모든 주의 성경말씀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인간을 자빠지게 하는 요소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왔더냐.” 하고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세례요한이 털옷 입고 광야에 살더라, 이런 자연주의자들은 지리산에 많습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가면 일부러 수염도 기르고 머리도 길러서 도인처럼 행세하는 인간들 많이 있습니다. 전부 다 가짜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로 하여금 회개케 할 수 있는가? 그런데 회개라는 것은 뭐냐 하면 회개 두 번 쯤 했으니 이젠 안 해도 되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회개를 해도 그 회개한 것이 항상 과거로 남아요. 과거로 남기에 우리는 과거에 회개한 것을 가지고 지금 효과 보려고 시도하는데 진짜 회개의 근거,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할 수 있는 능력과 근거는 십자가 지신 장차 만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 주님으로부터 회개의 능력이 오게 되면 우리는 점차 주님께 가까이 가는 쪽으로 회개하기 때문에 과거에 회개한 것을 우리가 움켜쥐려는 그것마저도 회개대상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주님이여, 어제 예수 참 잘 믿었습니다.’ 그거 회개해야 돼요. ‘지난 한달 동안 은혜생활 잘 해서 이것이 천국이다 싶었습니다.’ 그거 회개해야 돼요. 지금 우리 입에서 나온 것은 내가 주님한테 얻어서 이것은 내 것,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계속해서 유입돼야 돼요. 내가 본 것은 이미 내 심령으로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요소로 전환되고 말았어요. 내가 어제 뭘 봤던, 과거에 어떤 주의 계시를 받았던지 오늘 되면 내가 심는 대로 내가 관리하는 나의 관리사항으로 속해버려요.
그러니까 항상 육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이야, 라고 잡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는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자기 본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 시점에 주께서 개입하신 그 증거는 아니에요. 왕년에 나도 잘나갔다, 왕년에 나도 믿음생활 잘했다, 하는 자기 자랑 질 밖에 안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점괘라는 말이 나오는데 점괘는 간단한 거예요. 과거에 축적된 경험들을 통해서 미래까지 꿰뚫어 보겠다는 것이 점괘거든요. 그 점치는 중심에 누가 있느냐, 자기가 되고 싶은 자신의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이 선교단체에서 “여러분의 꿈과 비전을 이루세요.” 하고 통성기도하고 찬양 한 삼십 분쯤 하고 또 다시 통성 기도하는 모든 것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점쟁이로 만들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자기가 만든 점괘를 의지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참된 기도는 뭐냐, 참된 기도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꿈을 이루겠다는 그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게 기도입니다. 참된 선지자는 성령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판단에 대해서 책망하는 기능을 합니다.
날마다 책망 받으면서 주님한테 이끌려가고 있을 때 “나의 나 됨이 은혜이며 나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습니다.”라는 그 고백이야말로 그 현장에 십자가사건이 또 다시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매체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돌아보면 다 멋져 보이는 내 인생이지만 그런 마음가짐, 멋있게 되고 싶은 이 마음가짐조차도 십자가를 가리는 못된 버릇에서 나오는 열매인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행하심인데 왜 자꾸 우리는 우리의 행함을 증거 하는지, 섞어 넣는지. 주여, 성령께서 역사하사 오직 십자가만 구원임을 우리의 죄와 더불어 증거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