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처녀의징조

아빠와 함께 2019. 12. 22. 21:51
2006-11-29 19:07:52조회 : 1658         
이사야 7:10-17 /처녀의 징조이름 : 우리교회 (IP:219.249.86.250)

처녀의 징조

2006년 2월 8일                              본문 말씀: 이사야 7:10-17

7: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7: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7: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7: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징조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징조가 다가온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었던 하나님이 완전히 엉터리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자기 아들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를 끌고 아하스 왕 앞에서 서고서는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아하스 왕은 ‘나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바로 그러한 태도가 곧 ‘나의 하나님’, 즉 ‘이사야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로서 아하스 왕이 믿는 하나님과 이사야 선지자가 믿는 하나님이 상호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각자가 믿는 하나님이 상호 다르다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이 유다 나라의 진정한 유지를 위해서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징벌이 가한다는 사실이 연이어 터져나오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이러한 ‘이사야 하나님;, 즉 ’참 하나님‘의 징조가 참으로 믿기 곤란한 식으로 제시됩니다. 징조의 하나는 ’처녀가 아들을 낳는 징조‘요 또 하나의 징조는 유다나라가 감히 감당 못할 기세로 쳐들어오는 앗수르 나라를 통한 잔인한 징벌입니다. 이 두 징조가 어떻게 하나의 징조 안에 묶어 질까요?


이 징조의 결합은 신약 때에 되어야 마무리됩니다. 마태복음 1:21-23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두 개의 상이한 징조가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마무리됩니다. 즉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한 아이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평범한 결혼한 여인의 아들이 아니라 ‘처녀’에서 태어나는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조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참된 안목을 가지고 볼 자가 이 ‘처녀에서 난 아이’이 외는 없다는 말입니다.

즉 징조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주체자와 징조가 벌어지는 사태의 결합은 오로지 ‘처녀’에서 난 아이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조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즉 어느 누가 ‘처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난단 말입니까! 아하스왕이 이사야 선지자가 요청한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정상 궤도 안에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참 하나님의 징조는 인간들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식으로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지 못하고 부인하지도 안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징후를 찾고,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참 하나님의 뜻을 알아 챌 수 없는 겁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징조는 ‘유다 나라’가 이방 나라로부터 혹독하게 징벌을 당하는 징조입니다. 과연 유다 나라에 애착을 갖고 있는 백성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을 당연하다고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답답한 일은 자신의 두 발을 딛을 곳이 없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자신의 뿌리가 뽑히고, 밑둥치가 짤리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을 때는, 이 땅에서의 자기 존재의 바탕을 확실히 하는데 보탬이 되는 징조나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믿게 되는 하나님은 모조리 다 가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의 징조를 바로 해석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아기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이 신약 성경에 와서 밝혀집니다. 즉 이 땅은 우리의 기초를 위해 필요한 곳이 아니라 당연히 불 타 버려야 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참으로 위기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하나님의 징조는 항상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평안히 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늘 위기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아 볼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보니, 그 처녀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기만 구원하고자 하는 아이가 아니라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를 구별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예수’라는 예수님의 이름에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구별의 기능은 심판의 기능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우리’의 하나님으로 오셔서 ‘너희 하나님’과 ‘자기 하나님’으로 구별시키는 기능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메시야는 ‘임마누엘’이라는 기능으로 활동하신다는 겁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처녀가 낳은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름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존재하심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자기 백성만 구원한 구세주’ 즉 ‘예수’라는 이름으로 귀결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참 하나님의 징조를 알아 볼 자가 없습니다. 이사야 본문에 보면, 처녀에서 나온 아이가 버터와 꿀을 먹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인식이 형성되는 그 때가 되면 그 분만이 참 하나님의 징조를 제대로 이해합니다. 그 이해도가 성령에 의해서 ‘자기 백성’에게는 전달되면, 참 하나님의 백성된 그들은 자기 능력으로 참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주장치 못하게 됩니다.


즉 “제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하나님은 다 가짜였으며, 제 자신을 이 땅에서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나의 존재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우리 구주 되시는 예수님의 안목이 임하고 보니, 이 땅에 불 바다 되는 것조차 하나님이 마땅히 하셔야만 될 활동임을 이제사 알고 그 일에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순전히 예수님에 참 능력에 의해서만 참 하나님의 징조를 알게 된 ‘자기 백성’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고자 나서면 필히 자기에게 이득이 있다고 감지되기에 상상한 그 상상한 바가 덮어쒸어놓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늘 우리의 존재의 밑둥치를 잘라 버리는 하나님인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이 곧 심판의 하나님인 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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